복음과 믿음
이사야 5:24-25 / 맹렬한 진노 본문
018강-사5장,24-25,(맹렬한,진노)-isa0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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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진노
2006년 1월 4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5:24-25
5:24 이로 인하여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5: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 분토같이 되었으나 그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 손이 오히려 펴졌느니라
성경을 볼 때는, 환희와 감격과 즐거움과 기쁨이 충만하면서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면서 알려주시는 교과서가 바로 성경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도 우리는 과연, 환희와 기쁨과 즐거움과 대만족감과 감사를 느끼게 됩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위배하고 멸시했다고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자기 백성에게 저주를 퍼부으시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앞두고서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게서 환희와 감격과 기쁨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과의 영속성을 유지하고자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세상과 단절된 그 무엇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세상살이하면서 탐을 내었는 것을 꼬깃꼬깃 염두에 두었다가 그것을 달라고 신에게 매달리고 떼를 씁니다. 그리고 신에게 아부하기 위해 온갖 종교적인 마음가짐과 행동을 서슴치 않습니다.
여러분, 집에 수도꼭지를 황금으로 바꾸었다고해서 비로소 물이 나오는 겁니까? 아무리 호사스러운 수도꼭지라 할지라도 상수도국에서 물을 보내지 아니하면 부엌에 물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아무리 자신을 거룩한 모양새로 무장해도 그것으로 인해 하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작 하늘의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점을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여인과의 만남에서 파악이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물에 물길으려 온 여인에게 접근합니다. 그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을 보고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제공하겠노라고 제안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인간들이 애타게 부르짖으면서 얻고자 하는 바는 ‘아무리 먹어도 목마를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이런 면을 다 아시고 인간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라고 부르거나 찾을 때는 반드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다른 것을 줄 용의가 있는 그 분’이라는 이미지로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왜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탐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세상살이하면서 스스로 ‘결핍’이라는 것을 따로 상정해내기 때문입니다.
즉 “아, 이런 것만 좀 메워주면 금상첨화인데, 아, 이런 것이 좀 더 있었으면 나에게 더 바랄 것이 없겠는데”라고 일방적으로 결정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인간에게 있어 결핍과 문제점은 인간들이 파악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문제점을 세상살이에 힘들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법을 멸시하는 그런 태도로부터 비롯되는 겁니다. 예수님과 만났던 사마리아여인도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는, 자기에게 당당히 그런 생수를 받은 자격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생수제공 이야기하시면서 갑자기 화제가 그 여인의 과거 이력을 들추어내자 당황하게 됩니다. 남편 5명이 있었으나 다 헤어지고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는 여섯 번째 남자라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수제공은 결코 그 인간은 그 영원한 물을 받을 자격이 있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냥 그 여인을 사랑하셔서 주시는 겁니다.
이 사랑이 사랑으로서 부각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도에 의해서 가로막히지 않고 장애물이 제거되어야 하는 겁니다. 장애물 제거는 인간의 현 신세와 주제를 제대로 알려주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만약, 내일 모래 사형집행을 당할 예수믿는 사형수가 본다면 참으로 환희와 감격과 즐거움과 기쁨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분수와 주제를 말씀을 통해서 또 한번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심판의 말씀에 대해서 시큰둥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살아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시편 119:89-91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만들어놓고서는 그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가득 채워놓으셨습니다. 마치 욕조에 물을 가득 채워놓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 인간이 이 말씀과 그 원리에 거스리면 이 자연세계는 가차없이 그 존재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즉 아예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이라면 사죽을 못쓰고 배격하고 싫어하고 거부하고 멸시하려는 속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이 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될 자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물을 주시기 전에 그 여인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차원에서 당연히 저주받아야 될 대상자라는 것을 들추어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뭐가 모자라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틀어져 있는가 하는 것조차 모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당연한 권리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인간을 저주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생수를 얻을 자격이 있음이 드러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얻어진 것을 시시하게 보지 않는 성도가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것에 눈 돌리다가 주심의 생수에 대해서 환희와 감격을 잃어버린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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