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7:10-14 / 임마누엘 본문
172강-사7장,10-14,(임마누엘)-isa081224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72강-사7장,10-14,(임마누엘)-isa081224.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72강-사7장,10-14,(임마누엘)-isa081224.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72강-사7장,10-14,(임마누엘)-isa081224.hwp
크리스마스 설교
임마누엘
2008년 12월 24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7:10-14
(사 7:10, 개역)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 7:11, 개역)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사 7:12, 개역)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사 7:13, 개역)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사 7:14, 개역)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옆집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과 나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구원이라는 구원 받는 우리 자신이 도를 닦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진짜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옆집에 사는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면 그 공로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이야기이지만 진짜 구원은 그런 종교 행위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만약 어떤 처녀가 아기를 낳지 아니하면 우리에게는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고 영생도 없다는 말입니다. 참 이상한 현상으로 하나님께서 일 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도 우리가 구원받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그 아들 이름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입니다. 이 아들을 데리고 선지자는 그 당시 왕인 아하스 왕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왕이여 하나님께 징조를 달라고 해보세요” 이 말은 이 유다 나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망해야 될 나라임을 지적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유다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라고 자부 했습니다. 만사가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과 최선의 행위로 그럭저럭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 있어 이상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요상한 이름을 가진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타날 때부터 매우 분위기가 모두 수상하게 돌아갑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유다 나라가 구원이 될 수 없는 나라임을 통보해주는 시점에서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새로운 의미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의 경우가 둘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둘 중의 하나는 거짓입니다. 참된 임마누엘을 하나님께서 소개하면서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 이것이 징조로서 등장한다는 것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 처녀는 아직 정식으로 남자를 만난 적이 없는 자입니다.
자, 남자 없이 여자 몸에서 저절로 아기가 생겨난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인간 혈통에 대한 전면적 부정입니다. 즉 진정 구원받고, 진정 하나님과 함께 있을 사람은, 인간들이 예상하고 있는 혈육적인 자존생산에서 태어나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혈통적인 자손에 대해서 결코 ‘하나님이 함께 있을’ 자격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모든 인간들의 구원의지를 부정하고 꺽어버립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자기 구원에 힘써도 어디까지나 부모로 물러받은 몸으로 벌리는 열심히기에 이제 아님을 하나님은 징조로 보여주시는데 그 징조가 바로 ‘처녀의 아기 가짐’입니다.
남자없이 성령으로 태어나신 분에게 특별히 천사가 와서 이름을 붙여주는데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를 말하고 부르면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 예수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겠습니끼?
마태복음 1:21-23에서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 이사야 그 시점에서 비로소 밝혀진 그 ‘임마누엘’의 의미가 없는 예수는 진정 예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된 예수는 성령으로만 태어나신 것으로서 ‘임마누엘’이 됨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구원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혈통이나 혈육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다시 만들어진 사람이 되어야만 진짜 ‘임마누엘’이 됩니다.
임마누엘에 대해서 가짜가 옛날부터 판을 쳤습니다. 미가라는 선지자 시절에는 시중에 가짜 선지자와 제사장들과 재판관이 줄비했습니다. 이들은 민중들에게 ‘희망’을 상품으로 내놓고 그것 팔아서 돈을 벌어들었습니다. 즉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되풀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안심하세요. 당신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미가는 말합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맞는가? 아니다. 우리는 마땅히 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참된 메시야가 신약에 와서 아기로 등장했습니다. 그 아기가 하실 일이 이사야 9장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 9:6-7을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열심’을 축약한 말씀입니다. 어쨌든 우리 열심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는 열심히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의 열심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이 눈에 뜨여야 합니다. 인간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철없이 그냥 코 앞에 있는 일, 눈 앞에 있는 일 밖에 신경쓰기에 급급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임마누엘로서 다가오십니다. 즉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일을 되게 하셨습니다.
마치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육만 챙기고 육만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보다 더 중요하고, 나보다 더 우선되시는 분이 계심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런 자는 누가 뭐래도 신자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런 백성되게 하시는 그 일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열심에서 나온 겁니다. 이 열심을 잊지 않는 여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일방적인 내 위주로 ‘임마누엘’을 원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깨어지는 징조가 성령에 의해서 출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이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7:23-25 / 그 날에는 (0) | 2013.11.01 |
---|---|
이사야 7:10-17 / 처녀의 징조 (0) | 2013.11.01 |
이사야 7:3-8 / 스얄야숩 (0) | 2013.11.01 |
이사야 6:9-13 / 하나님의 의도 (0) | 2013.11.01 |
이사야 6:6-8 / 누가 갈꼬? (0) | 2013.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