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이사야 5:8-12 / 주님이 하신 일 본문
016강-사5장,8-12,(주님이,하신,일)-isa0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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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하신 일
2005년 12월 21일 이근호
본문 말씀: 이사야 5:8-12
5: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5:9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찌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5:10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5:11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5:12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신약성경은 사이비한 계시책이라고 여깁니다. 여기에 비해서 기독교신자들은 구약 뿐만아니라 신약 성경까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깁니다. 왜 유대인들은 신약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고해서 왜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주장하기를, 구약의 모든 성경 말씀은 택한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라는 자가 등장해서 “다 이루었다”고 주장해 버리면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앞에 있는 의미가 날라가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모릅니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데 집착하게 되면,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여호와의 행하심’이나 ‘그 분의 손으로 하신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 더 관심두기 마련입니다. 즉 어느 정도로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었는가 하는 것에 몰두하게 됩니다.
만약 이런 정신상태로 신약성경까지 대하게 되면 그 사람은 여전히 유대교인에 불과합니다. 즉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고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내용은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과 우리 자신들의 ‘ 다 이루심’을 늘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물론 기독교 신자들도 늘 자신을 생각해야합니다. 하지만 보다 의인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왜 지독한 죄인 일수밖에 없는가를 늘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책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부동산 투기하면 하나님께서 쪽박 차게 만들고, 흔하게 파티에만 참석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친히 하신 일에 관심이 없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구약 말씀을 대하게 되면, 일절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곧장 하나님 말씀을 지켜낸 것같지만, 실은 그 어느 누구도 이 말씀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인생들의 삶이란 ‘남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간 사회에서 살려고 하는 자는 남들이 보는 태도에 의식하지 아니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그 가운데서 어느 정도 공통점이 형성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통하는 것이 있어야 교류가 되고 교감이 됩니다.
인간 사회에서 산다고 하면서 모든 대화나 모임에 대해 일절 단절하고 그냥 철옹성같이 버티고 살 수는 없습니다. 공감대에 끼지 못하면 결코 그 사회 안에서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인간 사회 안에서 보편적인 대세입니다. 돈이 없는 경우를 빼놓고서는 누구나 불로소득이 주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부동산 투기란 결국 서로들 쉽게 돈버는 것에 대해서 일단 환영한다는 공감대로 인하여 허용되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부동산 투기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다면 이것인 이미 대세처럼 굳어져 있는 사회 안의 공감대에서 이탈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웃간의 대화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이웃들로부터 적개심을 받고, 본인 또한 이웃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질 것이 뻔합니다.
“돈을 그저 먹을려고 하고 가나한 자의 토지나 재산을 합법을 가장하여 강탈하여 온 천지에 혼자서만 독야청청하려는 자는 도적이다!”라고 식식대며, 이 사회에서 버틸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내가 갖고 있는 부동산이 갑자기 오르게 되면 나는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믿고싶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지만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동산 투기란 인간에게 타고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눈에 보이는 토지를 할 수만 있다고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 그 속에서 홀로 우뚝 솟아날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인생승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한결같은 바람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고 파티 열면서 자신이 가진 정렬을 불태우고 이웃과 늘 단합된 면을 보이는 것은 안정된 사회 생활의 기초를 위해서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뻔합니다. 문제는 그런 것을 통해 대인관계 유지에 열중하기에 필히 하나님이 하신 일에는 별로 관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겁니다.
사회라는 것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어진 것이고 그냥 그 안에서 출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커나가면 그 사회가 이미 만든 환상과 이미지를 생명의 젖으로 빨아먹고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 대해서 자신있게 의인이라고 말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약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수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성도란 마치 작대기가 꽂힌 아이스케이크와 같습니다. 막대기 주변에 뭉쳐져 있는 팥얼음 과자가 다 녹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지저분한 작대기만 손에 쥐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의 인생도 이와같습니다.
아무리 바르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써도 인생의 세월이 다 바람 따라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것은 주님의 용서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가 죽을 때만 성도와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도와 함께 있습니다. 단지 그 용서가 우리들의 분주한 인생살이로 인해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곧 신약의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은혜를 증거케 하기 위해 성도로 하여금 때로는 부동산 투기에 매진하기도 하고 주식 투자에 몰입하기도 하고, 늘 파티에 참여하는 것을 인생을 즐거움으로 여기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고난’입니다. 그 고난 속에는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용서만 파악되기 위해 왜 그것이 죄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성도에게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로만 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주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의 효력을 빠트리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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