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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사기 8:1-3 / 시기심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사사기

사사기 8:1-3 / 시기심

정인순 2013. 10. 2. 23:18

이근호

19강-삿8장1-3(헛된시기심)-jdg08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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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

 

2008년 2월 17일

 

본문 말씀: 사사기 8:1-3

 

 

(삿 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삿 8:2)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 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삿 8:3)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들의 노가 풀리니라』

 

 

 

사람들이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로가 자신의 영역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서로 의사소통을 시도해도 막상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순전히 각자 본인들이 일방적으로 해석하기 일 수입니다. 사람들은 매일 끊임없이 자기 세계만 구상하고 연구하고 몰두 합니다.

 

 

자기가 만든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좀 돌아보시고 신경 써주시고 관심 가져 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는 오로지 말씀의 세계 뿐입니다. 이 말씀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이 말씀의 세계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세계입니다.

 

 

마치 인간의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까 말까를 우리가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 쪽으로 돌려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겠다는 것은 참 무의미한 짓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생각하는 너의 세계를 부셔라 어차피 의미없는 세계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세계만 고수하고 고집하십니다. 그 곳은 말씀으로만 가득찬 세계입니다. 교회라는 것도 이러한 세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만이 관심 갖는 세계입니다. 만약에 자신의 포부나 자신의 세계를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해서, 교회에 나오신다면 엉뚱한 곳에 와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말씀에 관심없는 자들이 모인 교회라면, 그 교회는 오직 소위 ‘긍정적 설교’만이 남발할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희망으로 내거는 그런 설교만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교 가운데는 예수님의 눈물이나 예수님의 아픔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가짜 계시들은, 인간들의 한맺힘과 원한을 달성해준다는 악마의 설교 뿐입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 앞에서 기어이 자기 세계를 뭉개지 않고 고집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괴로움이나 아픔 보다는 자신의 자존심과 위신이 우선이 되었습니다.

 

 

이 자존심과 위신이 오늘 본문의 경우 시기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즉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자, 그 승리에 자신들을 참여시켜 주지 않아서 모든 영광과 칭찬을 기드온 혼자 독차지 않는 것에 대한 시기심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실제로 하나님 만나고 난 뒤, 그는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린 자입니다.

 

 

그도 남들과 같이 자기만의 영역과 공간과 세계와 자존심과 위신과 체험에 매달리는 사람 맞습니다. 하지만 직접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의 사사로 사용할 때부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박살났습니다. 더 이상 자기 세계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일을 시킨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의 세계는 따로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구성해가는 그 세계뿐입니다. 하지만 기드온 외에 다른 사람들은 이점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 눈에는 하나님의 승리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의 승리로 보이는 겁니다. 그 승리가 탐이 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는 길로 가는데, 그 뒤 따라가는 제자들은 서로 공치사를 미리 당겨서 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천국에서 우리들 중에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 하겠느냐고 다투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천국이란 제자들이 상상한 그런 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마시는 고난의 잔을 함께 마시게 된 그들만이 천국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떡과 고기를 예수님으로부터 배불리 먹고 난 뒤 왕으로 삼고자 예수님을 줄기차게 따라 왔지만 진작 그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얼마나 그 예수가 유리하겠느냐 하는 입장에서만 쳐다보고 온 것입니다.

 

 

기드온은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놀라운 ‘부수심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삼백명을 데리고 잔당을 소탕하려 하는데, 같은 이스라엘 족속들인 숙곳과 브누엘 주민들은 기드온의 이러한 심정을 전혀 이해해주지 못하고 일개 300명으로 잔당 12500명을 물리칠 수 없다고 해서 피곤한 기드온 군대에게 조금의 도움을 주지를 않았습니다.

 

 

즉 자신들의 세계와 기드온의 세계가 달랐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말합니다. “내가 이 300명으로 잔당을 소탕하고 오면 너희들은 이제 내 손에 죽는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 됩니다. 기드온은 이러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릅니다. 그저 자신의 세계에서만 상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아픔과 고통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하심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에 준해서만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러한 말씀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말씀이 없으면서도 말씀이 들어있는 세계를 견눈질해 봅니다.

 

 

이런 시도는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 안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성은 일체 거부당합니다. 예를 들면, “찬송가가 어디로 내빼는지 없노?”라는 무심코 하는 말을 잠시 분석해봅시다. 당연히 찬송가 스스로가 움직이지를 못한다는 것을 우리 인간들은 압니다.

 

 

찬송가에 두뇌가 있는 것도 아니요 발이 달린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진짜로 찬송가가 스스로 움직였다고 주장한다면 거의 미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믿고,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여긴다면 하늘 나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신병자와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공간은 모든 것이 말씀대로 확정된 사항이 그 확정된 내용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방안간 주인이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이 자신의 의지가 인하여 자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인도대로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런 확정된 신분으로 우리가 부름받았기에 우리는 이제부터 주님의 아픔과 눈물과 피를 더 많이 아는 자들이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