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사기 1:19-21 / 철병거의위력 본문
이근호
04강-삿1장19-21(철병거의위력)-jdg07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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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병거의 위력
2007년 11월 4일
본문 말씀: 사사기 1:19-21
(삿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삿 1:20) 『무리가 모세의 명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삿 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교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시니 안 되는 일이 없이 만사형통하더라’라는 멘트를 듣고 싶어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이런 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일들을 자꾸 대하게 됩니다. 온갖 종교적인 모션을 다 취해도 우리 힘으로 해결될 기미는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무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 함께 한다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무능력함을 더욱 드러나는 사태를 만나게 됩니다.
유다 자손에게 있어 적들의 철병거는 퇴치 불능이었던 모양입니다.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죽창과 자동기관총과 전쟁을 벌린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인 것은 상식있는 자는 누구나 느끼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필이면 유다 자손의 적들의 손에 철병거를 들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우리들은 아예 그 명령할 자질이 애초부터 없었음을 알게 합니다. 지킬 능력도 없음을 우리 하나님은 아시지만 놀랍게도 우리 자신들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성공적인 삶만 잔뜩 노리게 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희생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우리 자신의 성공만을 노리는 전형적인 악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 하나님을 부르짖지만 정작 예수님의 희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달리 말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분석해도 항상 예수님의 희생에서 벗어나서 비켜지나는 식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성공만을 노리는 결론을 맺는데 급급합니다. 즉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못난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을 치뤘느냐’라는 것을 알고자 하여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장차 얼마나 성공적인 인간이 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런 식이 되어버리면 하나님께서 주신 각가지 사태나 사건들이 자신의 못남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 던져주신 어려운 난관도 자신들의 대단한 믿음 덕분에 무사히 극복해 내었음을 과시하는 식으로 해석해버리게 됩니다. 어디까지 ‘자기 잘남’ 중심이지요.
그런데 지금 유다 자손이 정복해야 할 땅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 즉 주께서 어떤 주님이신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게 하는 말씀을 이미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그것이 나옵니다.
요단강을 건너 이 약속의 땅에 발을 딛게 되면 이스라엘은 제단을 만들어 특정 지점에 세워야 합니다. 그 특정 지점이라고 곳이 바로 저주산인 에발산입니다. 그 맞은 편에서 축복산이라고 일컫는 그리심 산이 있습니다. 자 우리 같으면 어느 산에 설려고 달려갈까요? 이 말은 곧 사람들이 교회에서 무슨 소리 듣기를 평소에 원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 있는 제단이 이 둘 중에 어느 산에 안치되어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오셔서 어느 쪽으로 자신의 인생길을 내닫았는지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소위 목회 성공한 자들이 얼마나 여유만만하게 세상 영광을 즐기고 있느냐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느냐가 관권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곳을 우리가 선호 한다는 점을 우리는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늘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심지어 극복하기 힘든 사태가 일어나도 그 사태마저 극복했노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본심상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는 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길은 곧 주님만아 가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요 저주받은 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담긴 제단은 저주산에 세워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슨 소리가 들려나옵니다. 저주산이기에 저주를 선포하는 말씀이 울러퍼집니다. 이 역할은 저주산에 섰던 지파들이 대행하게 됩니다. 맞은 편 축복산에 서 있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의 선포는 발산됩니다. 주님께서 외치는 저주입니다. 이 저주를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로서 약속의 땅은 저주 아니면, 축복 양대 운명으로만 수립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그 저주를 받는 않는 것만 해도 이미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항상 살아있는 땅이어야 곧 약속의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퍼붓는 저주가 곧 약속의 약속됨을 유지시켜 줍니다. 저주가 없는 약속의 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주로 뒤덮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저주 속에서 헤쳐 나올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축복산에 서 있는 지파들은 저주산에서 자기 쪽으로 향해 날아온 저주의 말씀에 대해서가감없이 ‘아멘’하면서 동참했어야 합니다. 축복산에서의 축복이란 딴 게 아닙니다. 축복산에 내뱉는 축복의 멘트는 따로 없습니다. 단지 저주산에서 날아오는 그 저주의 실제성에 아멘하면서 동참하는 것이 곧 축복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저주산에서 외치면 맞은편에 있는 축복산의 지파들은 “아멘!”해야 합니다. 이 저주의 말씀대로 그대로 실행에 옮길 땅이 곧 약속의 땅입니다. 다른 땅, 다른 세계는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한 술 더 떠십니다.
마음 속으로 간음만해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입니다. 여기서 대해서 성도는 ‘아멘’하면서 동참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기피한다면 약속의 땅이 아닌 엉뚱한 곳을 그동안 염두에 두었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일단 약속의 땅에 들어선 자들은 하나님의 던져주신 저주를 동반하는 말씀의 저촉을 받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 힘으로 이 저주를 벗겨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사태를 통해서 우리들은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짓들을 보여주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아멘으로 인해 우리는 그 저주를 고스란히 다 받아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결과는 이 ‘아멘’을 외칠 수 있는 자는 곧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용서와 희생을 알기에 주님이 퍼붓는 저주도 더불어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성공 위주로 성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의 희생 위주로 성경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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