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사기 1:3-7 / 하나님의 보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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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강-삿1장3-7(하나님의보복)-jdg071021 이근호
하나님의 보복
2007년 10월 21일
본문 말씀: 사사기 1:3-7
(삿 1: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삿 1: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 명을 죽이고』 (삿 1: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삿 1: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 가락을 끊으매』 (삿 1:7)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사람들은 날마다 세상을 보는 판을 짭니다. 그 짜여진 판 안에다 세상과 자기 자신을 위치해 놓지요.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곧 죄악된 행위 중의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마음먹은대로 할 수 있는 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은 따로 존재합니다. 그것을 일종의 장기판으로 칩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 하나님의 장기판 위에서 노는 장기알로서 기능합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몸부림쳐도 그 장기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임의로 인간들을 움직이면서 장기판이 원래 드러내고자 하시는 뜻을 드러내십니다.
그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되심을 드러내는데 있어 그 어떤 장애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보복하시고 보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대드는 자들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장기판의 기능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즉 ‘주의 이름’에 합한 자와 ‘주의 이름’에 부적합자 끼리 그 장기판 위에서 상호 싸우게 하셔서 철저하게 복수하는 일을 벌리십니다. 여기에 동원된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장기판이 신약 때에는 전체 지구상으로 다 확산되지만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이란 한계가 정해진 그 땅에만 한정됩니다.
그 땅에 들어가야 될 민족이 있는 반면에, 그 땅에서 추방되어야 될 민족들도 있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해서 천국에 들어가야 될 자들이 있는 반면에, 지옥에 들어가야 할 자들도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약속의 땅이란 장기판에 어떤 식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자력으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그 땅은 인간의 힘을 믿는 자를 받아주는 곳이 아닙니다. 신약적으로 말해서, 천국이란 인간의 능력으로 들어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인간의 힘을 믿는 자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입니다.
어째서 그러한가요? 그 약속의 땅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부반응을 갖게 마련입니다. 인간들은 태생적으로 무질서와 악을 저지르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쁜 짓하는 것으로 좋은 일 하는 것보다 더 편하게 느끼게 마련입니다. 좋은 일이란 야무지게 마음먹고 해야 억지로라도 성사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있는 반면에, 나쁜 일이란 자연스럽게 살아도 어느새 우리들의 손과 발은 나쁜 쪽으로 기우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란 방치하게 되면 항상 나쁜 쪽으로 쏠립니다. 선함이란 불편한 심성에서 이루어지지만 악함이란 우리 깊은 마음의 호응와 격려를 받으면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이 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양심의 잔소리를 듣게 되는 것도 평소에 걸핏하면 나쁜 쪽으로 생각이 돌아간다는 증거입니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도 주로 평소에 허용되지 않는 나쁜 일들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무슨 나쁜 짓을 해도 간섭받지 않는 상태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그런 천국을 천국이라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실제로의 천국이란 참으로 거룩하고 거룩한 곳입니다.
영 우리들의 평소 취미에 안맞는 그 거룩, 그 거룩만으로만 가득차 있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천국이 없어서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상은 천국을 가느니 차라리 지옥의 죄가 있는 것에 합류하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조직폭력배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기 보다 더 질이 떨어지는 나쁜 짓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을 마구 질책하고 비난하는 와중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어느 정도 챙기고 싶은 심리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자들보다는 자신이 더 착하기에, 사람들이 나쁜 짓을 좋아하면서 아닌 척 하는 수법은 항상 자기보다 못난 자들을 밥으로 여기고 함부로 정죄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과연 성도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실제로 악한 일을 선호하면서 어떻게 거룩만이 있는 곳에 선뜻 나서서 들어갈 마음을 먹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콩가루 집안이 있다고 칩시다. 아버지는 매일 술먹고 들어오고, 엄마는 춤바람 나고. 화투치고, 아들은 폭력 사고를 쳐서 상대방에 피해 보상해 주기 바쁘고, 딸은 툭하면 서랍에게서 돈 챙겨서 유흥거리로 가출한다면 참으로 희망없는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집안에 참으로 어질고, 바느질 솜씨 있고, 요리 솜씨 있고, 얼굴도 곱상하고, 신체도 건강해서 하루 종일 일해도 피곤한 줄 모르고, 음성조차 청아하고, 싹싹해서 성격 좋고, 붙임성 있고, 누구에게나 감화 감동력이 줄 수 있고, 게다가 많은 돈까지 갖고 또 벌어주는 며느리가 들어왔다면, 모든 식구들이 이 며느리를 대 환영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자신의 처지에 비해서 월등하게 훌륭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천국에 넣으시는 방식은 그 천국에 들어갈 자들과 들여넣어주시는 분과 너무나도 엄청난 격차가 있음을 알려주는 방식입니다. 가족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그 완벽한 며느리에 비해서 너무나도 죄인들임을 절감하는 가운데 그 며느니가 하는 말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전쟁에 참여 시켜놓고서는 그 전쟁에서 인간들이 행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즉 약속의 땅에 입성하는 것은 도저히 자력으로 성취될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해두는 겁니다. 가는 곳마다 인간적인 방식을 사용할 때는 백전백패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서 오로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남긴 자신의 약속을 맹세하신대로 이루어는 차원에서 성취될 뿐입니다. 신명기 9:5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띱니까? 창세기 마지막 대목은 ‘요셉의 해결’로 끝이 납니다. 즉 요셉의 해골을 갖고 나가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합류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요셉의 해골’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체적 성취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 약속을 믿게 됩니다. 이들의 행함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는 겁니다.(고린도후서 5:7) 거기에 비해서 정복당해야 하는 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행함만 의지했다가 비참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복당합니다. 즉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치 않고 자기 선에서 자기 장기판을 따로 꾸며놓는 자라면 그 사람의 행한대로 보복당합니다.
죄인인 주제에, 상대방의 손가락을 잘랐던 아도니 베섹왕은, 자신이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없을 알게 되면 보복을 하나님께서 받게 됩니다. 이것이 영원한 행함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인간적인 복수를 할 자격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드리는 참된 제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용서만이 약속요 맹세요 심판의 기준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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