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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대전20130528a-행18장5절(지정된 백성)
49강-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18장 고린도라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여기 8절에 보면,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이리 되어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지도를 아셔야 되는데, 이탈리아하고요, 아드리아 반도라 했지요. 여기 헬로폰네소스라는 반도가 있고, 터키가 있고, 중요한 지명 같은 경우는 현재 나라 이야기합니다. 시리아, 레바논, 내륙에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쪽은 이라크, 이란, 그리고 여기 바다가 있는데, 카스피해, 아젠바이젠, 아르베니아, 조지아, 이란, 터키, 고린도가 여기에 있는데 상당히 높은 지대에 있어요.
박 경철이라 해가지고 안철수와 같이 늘 같이 있던 사람, 그 사람이 지은 책이 뭐냐 하면, 고린도에 대해서 책을 지었어요. ‘문명의 배꼽 그리스’라는 책을 여행 다니면서 썼는데, 고린도, 아테네, 갱글리아, 에베소,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레아, 여기 등장한 것이 중요한 겁니다. 안디옥 지금의 시리아지요. 여기서 한 바퀴 휙 돌고 왔고, 두 번째, 이걸 거쳐서 바다 건너서 빌립보, 데살로니가 이렇게 해서 아테네, 지금의 아덴도 있어요. 아테네, 고린도, 갱글리아, 에베소에서 1년 6개월 최고 많이 있었어요. 있다가 다시 예루살렘가서 안디옥으로 귀환해도 한 바퀴 갔던 곳에 한 번 더 돌고, 이리 됐거든요.
그런데 실라하고 사도바울하고 같이 갔다가 여기서 디모데를 만나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 한 조를 이루어서 이쪽에 지금은 그리스라는 나라에요. 부도난 나라, 옛날에는 이걸 가지고 마케도니아라고 했어요. 요 밑에는 아가야라고 해요. 실제로 지금도 요 위에 보면 마케도니아라는 나라가 있어요. 알바니아 있고 유고 있고 여기에서 가면서 계속 뭔가 부딪치는 거예요. 그 부딪칠 때 우리는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잖아요. 나는 유대인하고 싸웠다든지, 나는 복음과 싸웠다 이리되는데 이 부딪침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육과 영의 부딪침’이라 봅니다.
이 해석 자체가 어떻게 됩니까? 육과 영의 부딪침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무엇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영의 일을 받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거든요.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받지 아니한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내 십자가의 복음을 안 들어? 그러니까 육에 속해!” 왜냐 하면, 너희들은 육에 속했기 때문에 내 영의 하는 말을 안 들어! 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뭐라 합니까? “니는 뭐야? 니는?” “그러면 니는 뭔데? 니는 무조건 영이고 니 말 안 들으면 무조건 육이 된다고?” ”너는 뭐야?“ 이리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게 그거예요. 지금 육과 영이라는 말을 해서 마치 영은 무엇이 아니다? 육은 육이 아닌 영이 되는 거죠. 육이 아닌 영. 우리가 보통 쓰는, 일반 종교를 떠나서 일반사람들이 영이라 하는 것은 주로 뭐냐 하면, 귀신, 육체가 없는 것.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도는 일반사람들이 쓰는 개념에다가 복음의 개념을 집어넣으니까 새로운 개념으로 활용되는 거예요. 새로운 개념으로 활용돼가지고 그 새로운 개념을 납득이 되는, 이해되는 사람을 뽑아내는 작업으로 전도를 한 겁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분명히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의 내용은 뭐냐, 편지를 통해서 그 때를 알 수가 있어요. 데살로니가전후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편지를 보고 내용을 아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수평적으로 너, 나 이리 되잖아요. 사도바울이 육과 영을 사용함으로서 이 전체가 육이 되고 영이라 하는 것은 그 배후에 성령께서 조종하는 사람만 따로, 하늘에서 성령이 오니까 성령에 의해서 조종 받는 그 사람만 영에 속한 사람으로 따로 구분이 되는 겁니다. 구분이 되어버리면, 어렵더라도 밀어붙이겠습니다.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특정지점에 가야 구원 받느냐 하는 그 문제가 깨져버려요. 에베소에 와야 구원받는다든지, 고린도에 오면 구원받는다든지 이게 특정 지리상 특정 지점에 가야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진다는 개념은 이런 육과 영의 개념에서 성립이 안 됩니다. 특정지점이니까 공간이에요. 공간개념이 깨어지고 뭐로 바뀌는가 하면, 사건개념으로 바뀝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그 복음을 믿으면, 그 곳이 부엌이든 화장실이든 관계없어요. 아파트냐, 단독주택이냐, 전세 사느냐, 월세 사느냐, 관계없이 구원을 받아요. 예배당 개념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어느 거룩한 장소에 가면 자동적으로 은혜가 쏟아집니까? 라는 개념자체가 완전히 사도바울한테는 용납이 안 돼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늘 구원이 안돼요. 이게 또 안돼요. 복음을 전하면 늘 구원이 되어야 될 텐데, 늘 은혜가 되어야 될 텐데, 복음을 전하면, 사도행전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데, 성령의 역사에서 들어간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걸 안 믿는 정도가 아니고 그걸 미워해야 되는 거예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사도행전 28장에 나오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이라는 것이 사람 듣기 좋아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복음은 믿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라는 사실, 이거 억수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뭐냐 하면, 복음을 듣고 믿게 되면, 소유성이 되거든요.
그런데 믿으라고 준 게 아니면, 이게 뭐냐 하면, 이것은 2층에 있는 천장이 그냥 무너진 게 돼요. 무너짐은 깔림이 되지요. 깔림은 소유성이 아닙니다. 이란에 지진이 났다. 미국의 큰 건물이 무너졌다. 한 사람이 나왔다. “니 건물에 깔려있으니까 힘들었지?” 할 때 깔린 사람이 하는 말이 “나는 깔린 게 아니고 나는 무너진 건물을 소유했어요.” 이게 터무니없는 객기잖아요.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우리가 이걸 믿어서 예수를 믿어줘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지혜와 통치를 받는 그것이 말씀에 결과물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내가 믿고자 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결과물로 믿음이라는 효과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믿음의 주체가 내가 믿는다는 내가 주체에서 빠져버리고 믿음의 주체가 누가 되느냐 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로 하여금 강제로 믿게 하셨다는 거예요. 선물이 되는 거예요. 이건 내 행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선물이 되겠지요.
선물이 되어 버리면 여기에서 누가 빠지는가 하면, 사도바울 본인도 빠지는 거예요. “내 아니면 너 못 믿었어!” 라는 것도 빠져야 돼요. 그 말은 전도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전도를 하는 거예요. 사람이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전도하라는 말이 나와요. 참 어려운 말이지요. 니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전도하라, 하는 명령을 사도바울 본인이 지어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사도바울 되게 했던 주께서 사도바울을 통과해서 준 말이잖아요. 준 말이니까 사도바울에 있어서의 전도를 몇 명 꾀어서 건졌느냐가 사도바울에게 의미 있는 게 아니고 내 입을 벌려서 전도하라는 말씀이 나를 경유해서 통과해서 이것이 바깥으로 쏟아졌다는 사실이 사도바울로서는 자기 할 일이 끝나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사도바울 너는 돈 사랑 안하겠네.” 라고 물으면 사도바울은 자기가 그걸 실천했기 때문에 권유하는 것이 아니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는 것이 사도바울을 경과해서 통과해서 그냥 바깥으로 토해 나온 거지요. “지도 못 지킨 것을 어디 남보고 큰 소리 해!” 라는 말을 사도바울에게 하면 안 돼요.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을 제가 할 때 “니는 얼마나 잘하는데?” 라고 그 사람에게 물으면 안돼요. 그냥 주께서 지금 그 말하도록 그 사람 속에 좌정해 있는 거예요. 살아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하라, 할 때 이게 숙제가 아닙니다. ‘아, 오늘 한 번 체크해 보자, 10시부터 11시까지 감사했지, 12시부터 1시까지는? 2시부터 3시까지 그 때 참 부도났잖아, 감사할 수 없어.’ 이렇게 계산하는데, 4시부터 5시까지 애 성적이 떨어져서 안 돼! 도저히 감사할 수 없어! 안 돼! 저 놈 자식 공부도 못하고 어쩌면 좋아! 모든 걸 체크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체크하면 안돼요.
감사가 우리를 케찹 바르듯이 아이스크림에 시럽 바르듯이 이미 시럽을 바르고 지나간 겁니다. 바르고 가면 우리는 감사함을 못하잖아요. 감사함을 못하는데, 뭔가 발리지요. 뭔가 덮치지요. 덮치는 게 뭡니까? 감사하라지요. 감사하라가 덮쳤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나는 늘 감사함을 못한다가 발각되지요. 요게 바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만이 감사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이유가, 우리가 그 감사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비로소 성취되는 겁니다. 어떤 말씀도 우리가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성취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가 빠지겠습니까? 자기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의만 빠져버리면 그게 행복이에요. 그놈의 행복, 그놈의 건강, 그놈의 기쁨, 전부 다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자기 게 챙겨져 있기 때문에 그게 악마의 가시처럼 박혔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사람이 불행한 거예요. 돈이 수천억 있어도 불행한 이유가 자기의 때문에 그래요. 돈이 없어서 유산 싸움 하는 게 아니고 자존심 때문에 자기의 때문에 유산 싸움했던 이 맹희 그 아들이 회장으로 있는 회사가 CJ, 도대체 기쁨과 행복이 뭐예요? 전부 다 자존심이에요. 자기의 라니까요. 그런데 그 쪽 회사 욕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하루하루 버티는 게 뭐냐 하면, 어쨌든 내 의가 손상되지 않고 흠집 안 잡히는 이것이 하루 사는 목표가 되고 말았어요. 이걸 제가 잘 쓰는 용어가 ‘자랑질’이에요.
지 자랑질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술 먹은 사람은 술 먹은 그 자체를 자랑질해요. “나, 오늘 한 잔 했다!” “아이고, 잘했다, 그래.” 자기의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인간, 거기에 담요 덮이듯이 주님의 의가 덮쳐버리면 우리는 자기 의를 버리는 게 아니고 ‘아~ 자기 의만 나타내는 식으로 내 육이 그렇게 지금 활동하고 있구나!’ 그 육이 육일 때 그 육으로 살 때, 비로소 그 사람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이 나와요.
언젠가 그런 예를 든 적이 있는데요. 지난주일 설교에서 마태복음 9장 이야기했지요. 중풍병자가 왔잖아요. 중풍병자가 왔을 때, 중풍병자가 낫기 위해서 왔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뭘 뽑아냈습니까? 중풍병 낫기 위해 온 사람에게 그들이 원한 중풍병을 낫게 한 게 아니고 니 죄 사함을 받았다, 했지요. 그러니까 온 사람은 병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왔는데, 주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라해서 쑥 뽑아내요. 죄를 뽑아내요. 죄를 뽑아내고 그 죄 사함은 내가 사했다. 이렇게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자기 병 나으려고 신경 쓰는 너희들을 데리고 나는 그걸 보여주는 거다.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찾아올 때, 금요 철야할 때 기대는 다 있어요. 이런 문제, 저런 문제, 가정 문제, 모든 문제 오더라도 주께서는 나가라 하지 않고 무조건 와! 와가지고 뭘 뽑아냅니까? 죄를 뽑아내는 거예요. 죄를 뽑아내면 중풍병을 걸리던 안 걸리던 전혀 문제거리가 안돼요. 사도가 예수님과 같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그 지도를 다시 그려보면, 아테네, 아덴 있을 때에 사도바울이 빌립보에서는 실라를 보내고 데살로니가에서는 디모데를 보내요. 실라 한 테는 빌립보에서는 헌금을 가져오라 했고 데살로니가에서는 그 교회가 잘 있는지, 교회가 풍지 박산이 됐는지, 성도들이 잘 모이고 있는지를 확인 차해서 둘이 고린도에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이 고린도에서 누굴 만났는가 하면, 아굴라, 브리스길라 왔거든요. 이 사람들이 로마에 살던 사람들이에요. 잘 들어보세요.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폭동이 일어났어요.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그 시대적 상황을 아는 게 중요한데요.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할 때 “폭동이 일어났겠지, 지금 21세기와는 관계없어.” 그렇게 할 경우가 있는데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먼저 물어볼게요. 우리가 이 대전에 살고, 서울에 살고, 대구에 사는 게 나라를 위해서 삽니까? 나를 위해 삽니까? 자기를 위해 살지요. 그러면 나라는 필요치 않네요. 자기를 위해 살면 나라는 왜 필요한데? 국가라는 게 왜 필요하냐 말입니다. 분명히 나는 나를 위해 사는데, 절벽에 갈 때, 절벽은 길이 끊어졌잖아요. 저 쪽 길을 가야될 텐데, 만약에 나한테 날개가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면 되는데, 왜 날개가 없지요. 질문자체가 이상하지만, 물어봅시다.
인간에게 왜 날개가 없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날고 싶잖아요. 이 인간이 날고 싶다가 못돼 처먹은 거예요. 왜냐 하면 날개가 없으면 못 날아하면 되는데, 날개가 없는 주제에 날고 싶다는 마음은 왜 생기냐 말이지요. 날개가 없는 채로 날고 싶다고 하니까 그만 마음이 못 난 만큼 가슴이 아프잖아요. 도대체 인간은 자기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거예요. 안 날면 되는데, 날고 싶다가 뭐예요? 선악과를 안 따먹으면 되는데 왜 따먹은 거예요? 도대체.
사도바울이 인간이 너는 육이라 할 때 그 육은 육체라는 개념에다가 복음적 개념을 집어넣으면 니는 육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악한 영의 사주를 받고 있는 그런 육이라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다 거부합니다.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은 돈이고 돈만 있으면 살고, 건강하고, 죽으면 살만큼 살았으니 죽으면 그만이지, 내가 악한 마귀와 결탁한 적이 없다고 하거든요. 하지만 인간은 항상 자기 분수를 넘어서서 ‘아! 나는 새처럼 날고 싶다!’ 또는 ‘치타처럼 빨리 달리고 싶다! 그러면 차가 필요 없을 텐데.’ 자기의 육체의 한계를 이것을 완전히 인정치 않고 그 넘어 까지 포괄해서 자꾸 욕망을 일으키는 어떤 다른 배후세력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또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인간에게는 언어가 있잖아요. 원숭이는 상대방이 치면 왜 치냐고 때립니다. 그런데 인간은 치지도 않아요. 그냥 욕만 해도 화가 나요. 뭘 알기 때문에? 언어를 알기 때문에 ‘저게 나에게 욕하는구나!’ 뿐만 아니고 남자친구가 자기에게 다투고 소홀히 했다. 관심이 없다. 아까 인간은 자기 혼자 산다고 했잖아요. 혼자 살면 되는데, 남자 친구가 소홀히 해가지고 남자친구 차에서 연탄불 피워놓고 유서남기고 죽어요. 사람이 하나 젊을 때 죽으면 자기는 혼자라고 생각하지만 20년 넘게 키워준 부모 심정은 어떻습니까? 자식 크는 보람으로 시집간다는 보람으로 이렇게 사는데 그 애가 죽어버리면 가족은 어떻게 되는데요? 이게 동물보다 더 나은 겁니까? 동물보다 더 못한 짓입니까? 도대체 인간은 육신이 밥 먹고 살고 그냥 뛰고 이게 인간이 아니고 뭔가 사주를 받아요. 영적인 존재에요. 귀신같은 존재에요.
이걸 과학에서는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뇌하수체가 있어서 감각적인 인간의 먹고 마시고는 하지만 이것이 진화가 되면 대뇌피질은 사고하는 능력이 있어서 모든 신경조직을 지배해서 이게 마음에 안 들면 지 뜻대로 안 되면 자살도 한다는 거예요. 지가 알아서 지가 죽는다는 거예요. 자기 파괴시스템이지요. 자기 파괴 시스템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건 육에서 영적 요소를 빼는 반칙이에요. 그건 과학의 반칙입니다. 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해도 본인이 아프면 내 신경세포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못 살겠다고 울고불고 난리 납니다. 본인은 이 감정을 과학으로 설명해도 막상 본인이 이런 일을 당하면 과학이고 뭐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돼요.
사도바울이 이들에게 오라하고 편지하고 집결을 시킬 때, 이것은 바로 데살로니가에 있는 모든 현상에 있어서 뭐를 뽑아내느냐 하면, 그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하는가를 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지금 그 쪽 성소에서는 어떻게 활동하고 역사하느냐 그걸 보고 싶어 그래요.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나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아요. 빌립보서에서도 핍박 받아요. 뭐냐 하면, 핍박받아라, 항상 기뻐하라 하지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이 세상은 인간의 육으로 해명할 수 없는 다른 플러스, 알파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손수 일구어 나가는 농사짓고 있는 그 농토라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봅시다. 사도행전18장 9,10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방금 읽었던 요 본문을 역사적으로 우리가 재현하거나 반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걸 ‘사건’이라 합니다. 주님의 사건은 우발성이지요. 우발적이라 하는 것은 소유대상이 안 된다는 거죠. 잡으면 없어져요. 그걸 전도서에서는 ‘바람’이라 해요. 바람은 천명이 있어도 이 바람은 제로가 돼요. 어떤 교회는 교인수가 천명이다. 많아 보이지요. 3년 뒤에 가면 하나도 없어요. 왜 처음부터 모든 양은 바람이에요. 바람은 그 현장에 꼭 있으라는 지시를 받지도 않고 바람은 지 맘대로 에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하잖아요. 바람을 저 사람은 내 팬클럽이고, 내 팬 관리할 사람이라고 쥐는 것은 곧 무엇을 잊는가 하면, 저 쪽이 바람이라는 것을 잊은 게 아니고 쥐려고 하는 내가 한 줌의 죄라 하는 것을, 내가 사실은 바람인 것을, 그걸 알지를 못하는 거예요.
사람은 바람을 가지고 자꾸 뭘 만들려고 하느냐 하면, 동질성을 유지하려 해요. 여러분, 꿈속에 본인이 등장하잖아요. 그 때 나이 몇 살로 보입니까? 전부 다 젊었어요. 50대에 꿈꾸면 적어도 서른 몇 살밖에 안돼요. 가장 자기 마음에 드는 자아상이 유지가 돼요. 스스로 기억을 편집해서 조작을 만들어가지고 해요. 그리고 꿈속에서 만나는 사람은 다 젊었어요. 그래서 꿈이 현실이고 현실은 내가 원하는 현실이 아니고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을 도피해서 진짜 자기가 원하는 현실을 가기 위해서 술 먹잖아요. 술 먹으면서 지금의 현실은 현실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현실이라고 억지, 고집을 부리는 그 힘 줌, 매일같이 우리는 힘주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피곤한 이유가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눈만 뜨면 힘을 줘요. 이 세상을 내가 원하는 현실로 바꿔보려고 오늘도 하면 된다는 구호를 붙여가면서 용기를 내! 너는 할 수 있어! 뭐하는데? 내가 원하는 현실을 자기 동질성을 만들게 되면 이걸 ‘자기 주체성’이라 합니다. 현실에서 수시로 바뀝니다. 이게 안 바뀌면 자살해야 돼요. 안 바뀌면 바뀔 때, 굴욕을 하지만 이 굴욕을 못 이기면 이 사람은 자살하던지 사표 내던지 해야 돼요. 그래서 직장생활 오래하는 사람 보면 존경스러워요. 그 때 그때마다 뭘 바꿨다? 자기 주체를 바꾼 거예요. 상대에 따라서 주체를 바꾼 거예요. 헤헤거릴 때는 헤헤거릴 줄 알고, 큰 소리 칠 때는 큰 소리 칠 줄 알면서 처신을 잘 해서 그래요.
젊은 사람들은 이 굴욕이 싫어서 사표를 6개월마다 내고 튀어나오지요. 굴욕이 안 좋아서. 그저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랑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매는 식으로 자기 자리를 바꾸어가면서 삽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내가 구상한 거기에 딱 들어맞는 그것을 사랑이라 합니다. 일방적인 사랑이죠.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으려하지요. 이걸 프로이드는 인간의 모든 사랑의 원천은 엄마에서 왔다. 엄마같이 무조건 사랑해주는 그 사랑에 대상을 엄마의 대체 자를 평생 동안 찾아다니면서 헤매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아들한테는 엄마 같은 사랑, 딸한테는 아빠 같은 사랑, 물론 가정마다 다릅니다.
이 바람 같은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다 갖고 있으니까 이것들이 뭘 하느냐 하면, 누굴 핍박하느냐, 반드시 복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구체화되지 않고 개념상 구체화되어 있지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다.” 이렇게 되지만, 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이 사건이기 때문에 종잡을 수 없어요. 그런데 언제 복음이 등장하느냐 하면, 바람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동질성 만들고 주체성을 주장할 때, 그 때 이것을 공격하고 반격하면서 일시적으로 구체화되는 이것이 바로 ‘현실적인 복음’입니다. 논리가 어렵지요.
그러니 복음은 무엇이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이거 의미 없어요. 이건 하나에 지식에 불과하고 술 한 잔 마시면 농담거리 밖에 안돼요. 그런데 막상 예수 믿는데 갑자기 불이 났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로 구원받고 천국가고 좋아했지만, 막상 집이 불로 홀랑 다 탈 때는 우째 사노? 이젠 죽었다! 이제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싫다. 이제 내가 예수님 믿으면 개다! 성을 갈지, 라고 할 때, 비로소 동질화가 “이것은 내가 원했던 현실이 아니옵니다. 신이시여.”라고 동질이 들어날 때, 그 때 우리를 그동안 죽 지켜왔던 주님께서 비로소 십자가 피로 등장하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는 이론상 알고 있지요. 이론상이 우리가 체험 화 되지 않는 거예요.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체험 화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막상 주께서는 나로 하여금 불나게 만든 체험을 줌으로서 그 체험을 일으킨 유발자로서 그 체험 속에서 같이 동반해서 들어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구절 읽어봅시다. 18장 9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되어 있지요. 특히 두려워하지 말라, 했지요. 그러면 사도바울 가는 길에 어떤 길이 벌어질까요? 매사가 안 두려울 때가 없지요.
복음으로 인하여 너희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나니, 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복음이 빠져 버리면 우리는 이 땅에 뭐다? 이 땅에 부끄러운 존재로 누가 봐도 “아이고, 인간이 저리 살지?” 부끄러워 할 밖에 없는 지점으로 주께서 몰아넣는 겁니다. 이게 좁은 길인데. 끝에는 생명이 있어요. 그런데 남들 보기에 손가락질 당하는 부끄러운 일을 하는데 거기에 복음 때문에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지요.
그러면 반대로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보고 손가락질 하는 그 사람은 그들은 자체적으로 안 부끄러워하려고 애를 쓰잖아요.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처음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제일 먼저 일어난 현상이 뭐냐 하면, 아담과 하와가 뭘 가렸지요? 자기를 가리지요. 가릴 만 해서 가리잖아요. 부끄러워서 가리잖아요. 처음에 인간을 창조할 때는 내놔도 안 부끄러워야 되는데 뭔가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왔어요. 뭔가 이상해요. 몸은 그 몸인데 이상해, 갑자기 부끄러워진 거예요. 환경도 안 바뀌었지요. 환경도 에덴동산이라, 자기 몸도 버짐생긴 것도 아니고 같은 몸인데, 부끄럽다는 이런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을 때, 이것은 어디서 개입된 거예요? 도대체. 아직도 풀리지 않는 비밀입니다.
처음에는 아담과 하와가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다고 분명히 창세기2장에 나왔지요. 성경이 일부러 그걸 적어놨어요. 나중에 어떤 일이 변화가 일나줄 알고,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다 해놓고 3장에 넘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옷을 입게 되었고 부끄러워했다 이지요. 부끄럽다는 것은 부끄럽게 만드는 어떤 향수? 어떤 화학적인 구조물? 아니면 중국산 참기름? 뭐가 왔습니까? 바이러스? 병균 박테리아?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뭔가 어떤 새로운 실체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뭐가 없습니까? 새로운 실체가 없잖아요. 없는데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 때, 이게 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인간은 아무리 쪼개 놓고 해부해도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설명이 안 되는 것을 지금 사도바울은 전하고 있는 거예요. 설명이 안 되는 세계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무식한 인간들아 하면서 전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유는 부끄러워하는 이미 수치를 당했던 이미 자기가 스스로 내가 왜 부끄러워하는 지도 모르면서 지 주제파악도 못 하면서 “그래, 세상은 이런 거야, 하나님은 이런 거야, 예수는 이런 거야.” 지 맘대로 입에 튀어나오는 대로 지 맘대로 지 위주로 현실을 조작해 내는 이 엉터리 같은 인간들, 사도바울은 현실은 이거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했잖아요. 사도바울은 걱정이 된 거예요. 전했지만 데살로니가에 하나님께서 유대인의 핍박이 주어집니다. 배 떠나고 난 뒤에 “끝났어, 끝났어” 왜? “사람은 육이니까.” 같이 있을 때는 좋다하다가도 돌아서면 복음이 없으면 “예, 예” 하는 게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놀랍게도 디모데의 소식에 의하면 사도바울이 있으나 없으나 관계없이 오히려 핍박가운데 교회가 든든히 섰고, 믿음으로 기뻐하더라 했을 때,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 주인이 누굽니까? 사도바울입니까?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그걸 바로 사도바울은 전한 거예요. 놀랍다! 그들이 잘했다가 아니라 훌륭하다가 아니라 주님이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것에 대해서 놀랍다. 나, 빠지면 일 안 될 줄 알았는데 택한 백성을 하나도 노치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다는 거예요. 그래서 같은 취지가 뭐냐,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아! 이거, 저도 너무 놀라요. 병에서 낫는 게 기적이 아니고 기도해서 돈 버는 게 기적이 아니고 아직도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게 놀라운 기적이 아닙니까?
아니 강감찬이 죽은 지 언제인데 강감찬 하면 남이 욕합니다. 세종대왕 죽은 지 언제입니까? 세종대왕 동상만 있을 뿐이지, 세종대왕이 거리를 활보하지는 안잖아요. 예수 죽은 지 언제입니까? 벌써 2000년 넘었잖아요. 아직도 예수 찾아요. 왜 찾는데? 돈이 생깁니까? 예수 왜 찾습니까? 찾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물론 돈 생긴다고 찾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엉터리예수고, 병난다고 하는 것도 엉터리 예수고, 그것저것도 아니고 그냥 예수님을 찾게 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지금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주께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오늘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있다는 말은 지금 이 세상은 누가 주관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바울이 진땅 고생을 하더라도 제발 고생하는 나를 보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내가 고생한다, 저 분 수고 많이 했구나! 전도했기 때문에 그만큼 열매 열리지, 제발 좀 그러지를 말아 달라는 거예요. 내가 고생해서 몇 명 건지고 내가 고생해서 교회 세우고 제발 내 보고 선교해서 그렇다고 제발 선교라는 말을 내 앞에 붙이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누가 했다는 거예요? 주께서 하셨다, 그걸 증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의 주제는 하나밖에 없어요. 주께서 살아 계시다. 이게 주제입니다. 초대교회를 본받자, 이게 주제 아니에요. 바람을 소유하면 안돼요. 초대교회 때 떡 떼었다고 그 때처럼 같이 떡 떼고 그 때 모이고 통용했다고 재산 나눴다고 재산 교회에 갔다 바쳐라,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냥 여러분 집구석에서 주께서 함께 하시면 되는 거예요. 지금 데살로니가에 사도바울 없습니다. 디모데도 없어요. 자기들끼리 모여서 지금 성경 봅니다. 사도의 편지 돌아가면서 그것가지고 은혜 받아요. 왜? 편지 자체가 주의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성경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성경을 앞장세워서 그 자리에 계신 예수님이 살아 계신 겁니다. 택한 백성은 주께서 잃어버리지 않는데 걱정은 왜 우리가 걱정을 합니까? 사도바울이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행전하면서 내가 설치더라도 설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거기에 미혹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주께서 밤에 나와 함께 있었다. 이 고린도 교회에 내 백성이 많으며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이 될지 안 될지 하나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우리 같이 동호해 보자.” 해가지고 많이 모이면 장사 계속하고, 안 모이면 “우리 때려치우고 또 다른데 가서 하지.” 이랬습니까? 아니면 백성이 먼저입니까? 사도바울이 먼저입니까? 이미 정해 놓은 백성이 먼저 창세전부터 정해놨지요. 그 다음에 누구를 보냅니까? 사도바울을 보내서 말씀을 전하게 하지요.
그러면 백성인데 사도바울 말을 못 알아듣는 경우가 생길까요? 안 생길까요? 그런 경우는 안 생기지요. 못 알아먹으면 처음부터 백성이 아니니까. 처음부터 백성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백성이 있을 경우에는 사도바울이 왔으면 사도바울 말을 다 듣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양쪽 다 서로 서로를 바라보면 안 되고 양쪽 다 뭘 통과해서 봐야 돼요? 이 사람도 주와 함께 있고, 사도바울도 주와 함께 있으니까 요한일서2장 27절 말씀처럼 누가 너희를 가르치리요, 너희 속에 성령께서 친히 가르친다는 그 말이, 말이 되지요. 내가 여러분을 가르쳐요? 여러분 가르쳐서 여러분이 구원 받아요? 이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내가 너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너희 속에 친히 가르치지요.
그럼 사도바울은 왜 보냅니까? 친히 가르치면 주님이 가르치지, 왜 사도바울을 보낸 거예요? 사도바울은 하나의 운반체입니다. 말씀을 그 당시에 전했던 운반체입니다. 그게 사도에요. 그러면 사도가 끝나면 운반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나 일반교회나 복음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자기 삶을 그대로 증거 하면 되는 거예요. 몇 명 더 꼬십시다. 전도합시다. 하지 말고 “그냥 나 이렇게 삽니다.” 하고 증거 하면 됩니다. 그래서 백성이 아닐 것 같으면 아무리 천국가고 싶어도 못 알아듣게 돼 있고, 백성 같으면 아무리 어렵게 해도 알아먹게 되어 있어요. 다 따먹게 되어 있어요.
남의 가게에 점원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은 따로 있으니까. 종이 걱정하는 것은 그건 자기 주제 넘는 일입니다. 무익한 종이라 할 바를 했을 뿐이지, 자기가 성과를 앉아서 얼마나 벌어야 되나 하는 그런 성과를 하면 안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갔어요.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서 난 사람 구원 받았잖아요. 나중에 “베드로님, 몇 명 꼬셨습니까? 몇 명 설득해서 천당 보냈습니까?” “나는 내가 원치 않는 길로만 다녔을 뿐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것! 그러면 그 결과는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서 어떤 열매나 결실을 맺었다면, 그러면 누구 열매입니까? 주님의 열매지요. 왜? 자기는 자기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중에서 자기가 원하는 길 인생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보통 평범하게 살고 싶다하는데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걱정 없는 평범한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평범한 가정 되고 싶어도 아무도 안돼요. 왜? 누구나 가정에 걱정거리 다 있습니다. 왜 걱정거리가 있느냐 하면, 주께서 걱정거리를 주십니다. 왜? 뭐 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님 없이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이 이거 막으면, 저거 터지고, 오늘은 별일 없겠지 하면 또 별일 가져다주시고 걱정하지 마세요. 택배로 다 갔다 줘요. 항상 고민거리가 일어나요.
그래서 여기 이 말씀은 그들 가운데 11절 보면,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그러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주님의 결과물이고 그냥 말씀이 전하면 말씀이 있으면 그냥 말씀을 믿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두 개냐 세 개냐 이런 것이 성립이 안돼요. 교회가 숫자 성립이 안 되고 교회는 무조건 하나입니다. 니 교회 내 교회도 있을 수도 없고 무조건 하나에요.
그 다음에 12절 나오는데 일괄적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핍박이 오는데 그 다음에 유대인들이 등장합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로 죽죽 설명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굴 핍박했습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를 핍박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지금 사도바울이 뭘 증거 하지요?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지요.
십자가 복음이 증거가 되려면 요 십자가만 증거 하는 게 아니고 누구와 노끈을 묶어서 증거 해야 십자가입니까? 뭘 증거 해야 돼요? 핍박 자가 있어야 돼요. 왜? 예수님은 피해자고 가해자가 있어야 되니까. 십자가 그 당시 가해자가 누구냐, 유대인이죠. 사도바울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사도바울은 십자가 당시에는 사도바울이 거기 십자가 근처에 얼쩡거리지 않았지요. 그럼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고, 로마 군병이 있었지, 그 때 사도바울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공격할 때 다메섹에서 주님 나타나셔서 뭐라 합니까? “사울아, 사울아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순간 이 십자가 사건은 역사와 어떤 역사라는 집행위에 이것이 그냥 죽 탕수육의 소스 붓듯이 좍 부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저 세계 끝날 때까지 십자가로 좍 부어버리면 십자가만 부어지는 게 아니고 뭐도 같이 부어진다? 유대인의 사고방식도 부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의 대표자가 바리새인이거든요. 바리새인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의로운 행동, 종교적인 행동을 다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천국 바로 밑에 있어요. 최고 정상급의 천로역정이 바리새인들이에요. 요거만 뛰어넘으면 천국 가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다 그 뒤에 줄을 서세요. 전부 다 뒤에 졸다구에요. 바리새인이 뭐냐 하면, 로마서10장에 보면,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죠.
그러니까 자기 의를 한껏 밀어붙일 때, 천정 밑바닥, 천국 밑바닥에는 뭐가 얼굴을 내미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바로 있는데 아, 이게 극복이 안 되는 거예요. 끼어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무식한 이방인들이 있는 데살로니가교회에서는 성령이 와버리니까 사도바울이 있는 곳에 육인데, 육과 찌지직~ 해서 뭔가 고압적인 것이 연결되면서 성령세례가 일어나면서 도저히 이 갭을 뛰어 넘을 수 없는 갭을 성령의 번개가 치면서 통합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어떤 유대인들의 핍박이 와도 이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미 찌지직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착해서 죄 사함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의 종교적인 행함을 자기 의로 전환시키지 않지요. 그런데 이 찌지직을 안 받은 사람은 지가 마지막 최후의 보루로 줄 수 있는 것은 뭐냐, 자기 의라는 이름의 자존심, 그것 없이는 자살할 것 같아요. 이것마저 빼앗기면 살 이유가 없는 겁니다. 마지막 붙들고 있는 것은 자기 종교적인 신앙적인 의미인 거죠. 5년 전에 은혜 받았다. 그러면 5년 전에 받은 은혜를 쥐고 있으면 이미 5년이 지났는데, 바람인데, 자기 동질성하고 5년 전에 은혜 받는 걸 자기 주체적으로 깊속한 창고에다가 비밀금고에 집어넣어놨어요.
그러니까 이게 아무리 은혜 받아도 자기 의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속성, 그래서 매일같이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내가 몸부림쳤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했음을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해서 육이 무엇이며, 영이 무엇이다 하는 걸 분별해야 되지요. 이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