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도행전51강 / 행19장1절 / 육과 영의 경계선 /130725 본문
녹취;공은주 대전20130725a-행19장1절(육과 영의 경계선) -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령세례와 세례요한의 세례의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성령세례를 하면서 기억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그 코스를 밟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교회문제라 하는데 지금 뭐가 문제점이냐 딱 집어서 이야기해 달라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있고 인간 위에 하늘이 있으니까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려 한다 말이지요. 이 자체가 성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구라를 거짓말을 자꾸 치는 거예요. 이게 아니고 우리는 모르고 예수님이 이걸 터놓은 경로가 있어요. 길이 있어요. 나는 길이요, 했잖아요. 포크레인으로 삽으로 길을 퍼내는 거예요. 퍼내서 가는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물세례, 그 다음에 성령세례, 코스를 밟아서 나중에 주님나라에 갔습니다.
특히 제가 언젠가 얘기했지요. 처소, 주일 낮에 이야기했지요. 처소가 없으면 합류가 되지를 않아요. 그리고 처소를 만들건 안 만들건 인간들의 손을 떠났습니다. 처소를 만들어서 데리고 오면 구원을 받고, 안 오게 되면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뭐가 문제인가 하면,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유행이 되니까 예수님 믿으면 다 가는 줄 아는데 처소가 마련됐다고 통보해줘야 개인적으로 통보해 줄 때, 그 통지서보고 가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14장에 분명히 나오는데, 어떤 사람은 착하다고 갔습니다. 열심히 해서 갔습니다. 순교해서 갔습니다. 순교해서 천당 갈 것 같으면 누구나 자살해서 가지요.
처소가 마련되면 성령이 와서 데려갑니다. 그런데 제가 빠뜨린 게 있어요. 지난번에. 성령을 받게 되면서 예수님 쪽에서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성령이 내려오게 되면 그 과정을 거꾸로 역으로 예수님만 오는 도랑으로 성령께서 그 도랑을 이탈하지 않고 그 도랑 내에서만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드리고 싶어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했으니까 성령은 마음대로 자기의 어떤 길을 따로 개척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파논 그것만 고집하면서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배수관 타고 갔으면 성령도 배수관 바깥으로 오시는 게 아니고 안에서만, 통에서만 이렇게 오시는 겁니다. 오게 되니까 예수님 올라가실 때, 물세례 거쳐서 성령세례 올라갔잖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성령으로 찾아올 때는 성령세례 거쳐서 물세례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지요.
그러면 세례요한의 물세례 의미가 뭐냐,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죄인은 맞는데, 죄 지은 것을 찾아보자, 죄 지은 거 찾아봐서 죄인이 아니고 시대자체가 마지막 때에 있으니까 자동적으로 죄인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 안했으면 좋겠어요.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이런 개인적인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고 현재 우리가 놓여있는 상황 자체가 마지막 때입니다.
제가 주일날 설교에 성령을 가지고 종말의 영이라 했지요. 요엘서에 보면 마지막 때에 내가 성령을 보내리니, 해서 성령 자체가 마지막이 되어야 오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말을 바꾸어도 같은 말이에요. 성령이 왔다하면 그게 마지막 때에요. 마지막 때 해서 환경오염 이런 문제 따지지 말고 그냥 성령이 왔으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마지막 때에요.
일본 후지산이 폭발할 위험이 있다고 전문가들이 말하는데, 그래서 야! 종말이다. 하는데 후지산 폭발해서 종말이 아니고 누구한테 성령이 왔으면 이미 종말이에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19장뿐만 아니고 사도행전 전체가 종말 될 때 일어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종말이 되어야 비로소 일어나는 일들을 여기에 기록이 된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은 종말 때이기 때문에 제가 언제 택지개발 예를 들었잖아요. 교회도 있고 절도 있고 초가집도 있지만, 택지조성하게 되면 완전히 절이고 뭐고 학교고 다 밀어버리잖아요. 사도행전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완전히 몽땅 바닥을 다 드러내고 밀어내는 거예요. 고관대장 필요 없습니다. 고관대장이고 뭐고 다 밀어버려요. 사도바울은 불도저 운저사라 이리 보면 제일 가슴에 와 닿습니다. 불도저 운전사기 때문에 앞에 화살 쏜다 해도 그 작업을 중지할 수 없는 겁니다. 시에서 나와서 작업하지 말라하면 세상적인 어떤 법을 들이대도 금지할 법은 없다 했지요. 성령의 법은 어떤 것도 금지할 법이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불도저다. 다른 말로 하면, 이명박이다. 새벽4시에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별로 안 좋은데. 그냥 밀어붙이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사도바울이 하는 일은 지시를 누가하느냐 하면, 예수님만이 성령만이 지시를 내려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니까. 지시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점이 좋은가 하면, 실적에 대해서 묻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하니까. 종은 매였다고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매임으로서 자유를 얻는 거예요. 아주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매임으로서 책임이 없으니까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떠한 부담을 느끼지 않으니까 그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인이에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또 좋은 점이 뭐냐 하면, 개인적으로 굉장히 자유롭고 또 좋은 점은 뭐냐 하면, 자기가 불도저 운전해서 밀어붙이니까 그동안 괜찮아 보이고 고상해 보이던 그 내막이 두둑 터지듯이 다 나오잖아요. 밭을 개간하려고 캐보니까 산업폐기물 나오듯이 일종의 인간의 폐기물들이 다 노출될 때 그 노출되는 즐거움도 있어요.
예수님께서 가시니까 숨어있던 귀신들 이런 자들이 마구 귀신들이 달아나면서 예수님 욕하고 어떤 사람은 하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외치면서 튀어나오지요. 방금 이야기한 그것을 단출하게 정리하면 ‘육과 영의 경계선 확보’ 육은 영으로 못가고, 영은 육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육이 영으로 못가기 때문에 육이 아무리 고상하고 경건해도 요 경계선이 있잖아요. 경계선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을 자꾸 사람의 코앞에 들이대게 되면 사람은 자꾸 어? 어? 밀리지요. 요 경계선 역할을 하는 게 뭐냐 하면, 사도바울입니다.
부부싸움 할 때, 남편이 술 먹고 와서 횡포 부려서 아내가 참다 참다 못 참고 하는 말이 “그래, 죽여라, 죽여!” 얼굴 막 들이대지요. 그게 경계선이에요. “그래 날 죽여라. 30년 동안 밥 해먹인 게 고작 대가가 이거야? 죽여라, 죽여.” 그게 경계선이에요. “왜 이리카노?” 주춤하다가 겁나 물러나지요. 육이 들이미는 육을 향하여 경계선할 때 사도바울은 이 세상을 육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 말은 영이 이쪽(육)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럼 육은 뭐냐 하면, 육은 사실은 육이 아니고 영이에요. 앞에 뭐가 붙어요. 악한 영. 악한 영을 육이라 하지요. 물론 악한 영은 사단인데, 사단의 지배를 받는 그 대상이 육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이쪽은 누구의 지배를 받는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요.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묻게 되면, 본인이 육과 영의 경계선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공장을 하던, 교사를 하던, 농사를 짓던 상관없이 당신이 가는 그곳이 바로 육과 영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당신의 가는 곳이. 경계선은 폭이 없어요. 얇아요. 어느 날 경계선하려고 갑자기 지가 폭이 넓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 자기 팬이 많다든지, 돈이 많이 들어온다든지, 알아주는 사람이 많다든지, “목사님, 목사님.” 이래가지고 교주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경계선이 얇아야 되는데 두껍게 돼서 독자적으로 “나 아니면 구원 못 받아.” 이리 돼 버리면 그 자체가 이미 마귀가 그 안에 심어 놓은 암세포가 퍼졌다고 보면 되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물론 유명하니까 두껍게 될 수가 있는데, 성령께서 사도바울을 두껍게 되도록 허락을 하지 않았지요. 대단한 사도, 복음을 아는 사도지만 굶기도 하고, 매 맞기도 하고, 심지어 그것도 안 되면 몸에 가시를 줘가지고 삼층천을 본 그 교만함을 하지 않게 만들어서 결국 사도바울은 매일 하는 소리가 할 수만 있거든 데려가 달라, 하나님께서 좀 더 사용해야겠다. 그럼 또 사용하게 되고 또 묻지요. 할 수만 있거든 데려가 달라, 왜? 너무 힘드니까. 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은 게 소망입니다. 이런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습자지처럼 얇아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굉장히 얇아요. 그리고 내가 하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것은 결국 내가 한 게 아니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자기는 그냥 사탕 껍데기로 얇은 포장지로 항상 물러가요. 항상 알맹이는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모습,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만나는 사람이 사도행전에 보면 따르는 것 같은데 나중에 많이 사도바울을 떠나버려요. 그냥 습자지 되기 싫어서. 아주 바짝 마른 얇은 자아가 되기 싫어서. 아주 얇아요. 자기 게 전혀 내세울 게 없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오늘 하는 예가 19장에 나오는데요.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그리스가 있고, 터키가 있고 그리스반도가 누가 있습니까? 아볼로가 있지요. 아볼로는 이쪽 담당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사도바울이 온 거예요. 안디옥에서 출발해서 윗 지방으로 거쳐 에베소로 오게 됩니다. 원래 윗 지방에는 사도행전16장 6절에 보면, 원래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아시아 쪽으로 가지 마라해서 못 가게 만들었어요.
18장21절에 보면 약속을 했어요. 내가 언제 한 번 가긴 걸게. 이렇게 해요. 뭐냐 하면,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이걸 3차 전도라 하는데, 1차는 아시아 왔다 갔다 한 게 1차고, 2차는 가서 물을 건너서 아볼로, 브리스길라 하고 돌아오고, 3차는 방금 한 게 3차에요. 브리스길라는 에베소에 있고, 아볼로는 고린도 담당하면서 실라도 이 쪽 담당하고 있거든요. 사도바울도 다시 가는데 올 때는 좀 비극적으로 마감됩니다. 왜냐 하면, 와서 체포돼서 로마로 가기 때문에 3차하고 끝나버려요. 여기서 1차, 2차, 3차하고 오면서 체포되어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1차, 2차, 3차 했던 모든 결과가 사도바울 자기의 목숨을 뺏어가는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 이리 보시면 됩니다.
아직도 AD50년경에 이 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되어 있어요. 로마가 종교문제까지 개입하게 되면 그 유지하는 비용이 더 들기 때문에 알아서 해! 세금만 내! 종교는 알아서 하고 다만, 시위나 분쟁만 일으키지 마! 너희 쓸데없는 교리 논쟁에 우리가 정치적으로 개입하기 싫으니까 알아서 하되 세금 꼬박꼬박 내고 로마에게 충성봉사 다하게 되면 지도자급이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던, 알라를 믿던, 관여하지 않을게, 라는 보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내부적으로서는 뭡니까? 유대교 이외에는 다른 계시를 인정할 수 없죠. 그러니까 나름대로의 자체적으로 치한이 성립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안디옥에 속한 경찰이죠. 로마 군병이 아닙니다. 자치 경찰이에요. 우리가 만약에 유대인 입장에서 정상적인 질서가 아니라면 로마가 책임을 지도자한테 묻고 세금을 더 끌어내면 결국은 누가 고생하느냐 하면, 대중들이 고생하게 돼요. 백성들이.
그러니까 예수님한테 뭐라고 하는가 하면, “쉿, 입 좀 다물어 줘!” 한 거예요. “제발 좋은 게 좋은 건데, 왜 자꾸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뒤집어엎으니까 이건 도저히 참다 참다 못해서 하나를 죽여서 우리 민족이 살자, 이래서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하나를 죽여야 다른 사람이 산다는 그런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 됐고, 이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을 대제사장은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성경은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언약 적으로, 복음적으로 이해하고, 그러니 같은 사건을 두고 이해도가 벌써 육에 속한 자와 영한 속한 자가 달라요. 그러니까 특이한 사건을 기대하지 맙시다. 어느 작은 사건이라도 항상 우리는 육과 영의 경계선 상황에서 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나오느냐, 십자가가 나오느냐, 아니면 인간의 자기 권력이 나오느냐 거기에 따라서 육과 영이 갈라지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형편이에요. 어느 누구도 사도바울보고 아주 신기하다, 놀랍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은 육으로 평가해서 신기한 것도 놀라운 것도 부러운 것도 없어요. 마치 이사야53장하고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도 아무 사람에게도 흠모할 만한 것이 없다 이 말이에요. “아, 저 분하고 한 번 사겨 봐야지.”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인기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알아 본 사람은 놀랍게도 사탄만 알아보지, 사탄에 메인 인간들은 눈이 감겨서 몰라요. 이것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미리 나오는데 봅시다.
사도행전19장15절을 보게 되면, “ 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요거 잠시 바울에다가 괄호를 쳐놓고요, 거기다가 여러분 이름이나 여러분의 자녀 이름을 적어 넣어 보세요. 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서울대 합격,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 판사 돼서 밥이나 먹습니까? 밥 먹기도 힘들고 결국 나중에는 지옥 가는데. 세상에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사실은 그 가정이 받을 축복은 미리 당겨서 다 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성령의 보증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이 우리를 무시해도 예수님이 가신 코스대로 우리가 가야 되는 거예요. 성령은 그 코스대로 마련된 코스대로 오시고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주님 가신 그 코스대로 이탈됨이 없이 가고, 가는 가운데 서러움과 이러한 무시당함을 우리는 받을 때, 십자가에 함께 있는 같은 곳에서 나오는 고난이라 이렇게 보는 겁니다.
고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고난이에요. 고생은 개인적인 문제고, 고난은 내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서 주님의 작업에 관한 문제에요. 주님의 하시는 일에 동참하다 보니까 나오는 고난이지, 지 밥 먹고 살려고 개척교회하려고 하는 것은 고생이지, 고난이 아닙니다. 고생은 고생한 값을 찾게 돼 있고 고난은 항상 자기 부인이 돼 있어요.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고 고생은 “내가 고생했으니까 나도 한 밑천 잡읍시다.” 하고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게 돼 있고 고난은 “네, 맞습니다. 제가 당해도 싸지요. 제가 죄인인 것을 또 잊어버리고.” 자기의 죄의 깊이를 더 아는 그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고난가운데 즐거움이 있다고 로마서5장에 보면 환난가운데 즐거움이 있어요. 보이는 거예요. 바로 그걸 소망이라 하는 거예요. 환난 속에 있어야 보인다 하는 거예요. 언제 보이는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에 보이는 거예요. 그럼 그동안 왜 안 보였습니까? 자기 부인이 안 되니까. 남한테 인정받으려 하니까. 내가 뭐가 모자라서 무시당해! 나는 무시당하기 싫어! 이러니까 안 보이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 옆의 강도 보세요. 그 강도가 편의점 강도인 줄은 모르겠는데, 하여튼 간에 그 강도가 죽기까지 밥 먹고 살았잖아요. 이 땅에서 밥 먹고 살고 죽어서 천국가고, 이것은 영육 간에 다 얻었어요. 강도짓을 했던, 가스관을 탔던, 편의점을 털던 어떤 짓을 해도 관계없어요. 하여튼 밥 먹고 살았잖아요. 살았다가 체포되고 난 뒤에 천국까지 가니까.
육과 영의 경계선에 사도바울이잖아요. 육에서 사도바울을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왜냐 하면, 경계선이기 때문에. 영과 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작용을 해줘야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육과 영의 경계선 역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어요. 왜? 경계선 역할이란 분명히 자기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천막 장사를 해도 육과 영의 경계선, 배를 타고 가도 육과 영의 경계선, 자기가 가는 곳마다 육과 영이 갈라지네. 그러니까 일종의 뱃머리와 같다고 보면 돼요. 사도바울이 자기만 떴다하면 육과 영이 갈라져요.
멜리데에 가서 추장을 언제 봤다고 그런데 추장의 아들을 살려내지요. 독사를 던지니까 추장이 받들어 모시잖아요. 특히 19장19절에 보면,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리 되어 있잖아요. 그 뒤에 나온 말씀이 뭡니까?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되어 있지요. 사도바울이 마술사한테 가서 “어이, 아저씨, 책 다 불사르세요.” 라고 부탁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사도바울은 경계선이기 때문에 육이 덤벼들면, 처리는 누가 하는가 하면, 영에서 처리를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중간에 끼어있어요. 그냥. 심지어 사도바울이 손수건을 던지니까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는 거예요. 자기 손수건에 사바사바하고 콧김 넣었습니까? 저도 손수건 하나 있는데, 손수건을 흘려가지고 죽은 고양이한테 던지니까 고양이가 살아났다. 이러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골치 아파요. 손수건을 국립과학수사관에 의뢰해서 보자, 보니까 지도와 갈매기가 있는데, 중국산해서 똑같은 손수건 나옵니다. 사람 살렸던 손수건해서 대량생산해서 특허권한다고 바빠요.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보면 광고에 나오잖아요. 이 달마도를 하시면 병이 낫습니다. 있잖아요. 그 짝 난다니까요. 그 달마도를 불살라 버리는 거예요. 달마도나 신기한 기적들이 결론은 뭐냐, 그들 나름대로의 육과 영의 경계선 역할을 했는데, 이게 전부다 진짜 사도바울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게 가짜라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기존 교회에서 여러분, 제가 육과 영의 경계선입니다. 저를 통해서도 구원받습니다. 했던 인간들이 여기에 오면 사도바울 만나가지고 그동안 내가 이런 헛짓했습니다. 하고 그 많은 책들을 다 불살라 버린 거예요. 개혁주의 책들 다 불살라 버려야 돼요. 그 책을 다 불살라 버렸는데 그 책값이 은 오만이라, 천만원 가까이 돼요. 그걸 다 태웠다는 말은 책값이 아깝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그동안 미친 짓을 했습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이것이 육과 영의 경계선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특정부위가 잘못됐습니다. 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인생 자체가 그 지향성, 방향성 자체가 지금 생각하니까 전부 다 엉터리였습니다. 는 고백을 사도바울 앞에서 액션으로 보여준 거예요.
어떤 사람이 부흥회해서 그 사람 집에 있는 술병이 있잖아요. 제 말 끝까지 잘 들어보세요. 술로 인생을 달랜 사람이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이런 술병에 찌들어서 살았습니다.” 하고 다 갔다 버리는 경우, 그 경우도 맞고요. 그 다음에 내가 술 끊으면 구원 받는 줄 알고 술 끊었는데, 다시 한 번 술 안 마신 경우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간에 내 쪽에서 뭔가 내 행함의 결심과 결단과 그걸 로마서에서는 용기, 절제, 지혜라 하거든요. 그런 것으로 해서 뭔가 인간성 착하게 하겠다는 자체가 주님 십자가 앞에서는 착함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수관같이 길을 뚫어놨잖아요. 그러면 사도가 육과 영의 경계선으로 오기 때문에 성령이 오기 때문에 십자가 앞장세우고 올 때, 이 사람이 만약에 무당이다. 그럼 이 사람이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무당 짓 한 것이 뭐가 되느냐, 악마에게 속아서 내가 나름대로 잘한다고 했는데 죄가 된 것을 알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인물보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능력이 실제로 그 사람에게 나타난 거예요. 사도바울이 내 공로라고 할 수가 없어요. 사도바울은 그냥 목격자고 증언자지, 사도바울을 통해서는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도바울에 의해서는 능력으로서는 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줄이면 뭐냐,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줄이면, 전도는 인간이 못 합니다. 이걸 줄여서 인간은 전도를 못합니다,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전도하라했는데 당신은 전도를 못한다하고. 해봐라 전도가 되는지. 전도는 주님 소관이지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 11절에 봅시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 때부터 사도바울이 앞치마 두 세 개 씩 여분으로 갖고 있었습니까? 필요 없지요. 이것이 어디서 이루어졌다? 바로 에베소에서 이루어진 거예요. 에베소에서 하는데 8절에 보면, 처음에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를 강론했어요. 9절에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그러니까 육과 영의 경계선이라니까요. 사도바울이 멘트 날리면 다 회개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비로소 니는 육에 속했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뭔가 전함으로서 티가 나게 돼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니가 복음을 전파하라, 그게 있습니다. 잊어버렸을 테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종은 실적과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게 종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입니다. 지 인생도 지 맘대로 못하는데, 남의 운명까지 지가 건방지게 개입할 수가 없지요. 심지어 자녀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은 성인되기 전까지를 자식이라 해요. 성경에 보면. 성경은 성인이 되게 되면 더 이상 독립적인 존재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결혼이라 하는 게 뭐냐 하면, 부모를 떠나는 게 결혼이에요. 시집가는 게 결혼이 아니고 부모를 떠나는 거예요. 신난다 하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니 인생 니가 책임지기 때문에 신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부터는 아슬아슬하지요. 왜, 그동안 부모 때문에 조금만 어려우면 화내고 엄마한테 분풀이하고 짜증은 부모한테 다 내고, 오냐 오냐 해줬더니만 이건 부모가 봉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부모의 약점을 노리는 거예요.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을 던지니까 병이 나았다. 이 정도 했으면, 완악해서는 안 되는데 사람이 기적 안 받아서 완악한 게 아니고 처음부터 완악했었는데 사도 바울이 복음전하니까 지 본색을 지가 못 이겨서 결국은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벌써 몇 번 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어요. 절대로 여러분들이 자책하거나 ‘아, 내가 말을 좀 잘했으면...‘하고 결과에 대해서 기대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게 집착이고 우상숭배입니다. 내가 하는 결과에 대해서 내 노동의 대가에 대해서 기대하는 그것이 우상숭배일 수가 있습니다. 그냥 내 하는 이것이 주의 일이라 이리 생각하시면 됩니다. 왜, 같은 배수관에 있거든요. 주님이 가는 그 길에 노선에 있는 존재거든요. 주님의 길에 서 있기 때문에 성령이 쥐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길에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그냥 몸짓 표현할 뿐이에요. 사라가는 모습이.
미국의 현대 50년대, 60년대 초현실주의라는 폴록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수직적으로 놓고 그려야 할 그림을 수평에다 깔아놓고 신발신고 페인트칠을 해요. 그게 현대미술의 시초가 돼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내 몸이 작품이 되는 하나의 과정 속에 내가 포함이 되어 있다. 내가 작품을 남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의 예술 작품을 위한 과정으로서만 그냥 개입하고 그 결과가 작품이라면 이 작품에 대해서는 나는 손을 떼겠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이 폴록 작품하나가 요새 150억 갑니다. 그 만큼 비싼 이유가 최초로 했다는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자 변기 팔잖아요. 그걸 가게에 있는 걸 돈 주고 사서 샘이란 이름으로 전시장에 놔두니까 작품이 된 거예요. 두상이란 사람이 세계 최초로 했어요. 그게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육이 너무 허무하거든요. 허무해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그것도 마귀 짓이에요.
그 다음에 13,14절에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이게 폼이거든요. 뭐냐 하면, 이걸 볼 때 참 답답한 게 마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마귀에 대해서 논문 쓰는 것과 직접 마귀를 접해 본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마귀에 대해서 논문 할 수 있고 예수님에 대해서 논문 쓸 수 있는데 직접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런 논문 쓰겠어요? 안 쓰겠어요? 안 쓰지요. 그래서 신학교수, 박사 하는 사람이 내가 보기에는 신자가 아닌 거예요.
진짜 믿음 있는 사람은 유학 안 갑니다. 멀리까지 차비 들여서 왜 갑니까? 직접 예수 믿는 사람은 신학교 나오고 목사고 개척교회 하던지 개척교회 안되면 다른 직장 다니던지 하지 신학박사라는 그것을 가질 마음이 들 이유가 없지요. 왜냐 하면 사람이 신학박사를 얻겠다는 말은 무엇을 노리는가 하면, 신학박사 이후를 생각하거든요. 그 이후의 자기 모습을 대체하려고 하는데 진짜 예수 만난 사람은 그건 게 필요합니까? 그런 게 필요치 않지요. “니가 박사 되어야 내 종이다.” 이런 거 예수님께서 한 적 없지요.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에게 “강도야, 니 십자가 오기 전에 삼위일체 공부해야지, 삼위일체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에를 가, 빨리 몇 시간 안 남았어. 빨리 해!” 이리 안 했거든요.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하면 끝나는 문제지요. 무슨 삼위일체 교육을 합니까? 구원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건지기 때문에 그런 걸 물어서 시험에 합격해서 통과시키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영과 육의 경계선이니까 진짜 영적인 일을 할 때, 육에서 영에 일을 모방하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방하는 현상이 육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경계선 가까이 있는 최고의 최후의 궁극적인 모습입니다. 육으로서 영을 모방할 때, 이 정도까지는 합니다, 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서도 뭐가 일어납니까? 기적이 일어나지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 성령의 일이라 하면 큰일 나는 거죠.
데살로니가후서에 보면, 마귀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니까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이 몰리게 되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기적을 원한다는 것은 결국 뭘 원하는가 하면, 뭐로 포기 못하겠다는 말입니까? 나의 영역을 포기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육으로서 영의 구역까지 돌파하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의지를 욕구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육은 육으로 끝나면 되는데 살려주는 것은 주님이 살려주는데 기어이 육을 손대서 어떻게 이걸 장난질 쳐서 육으로 영의 세계를 들어가 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죽 참다못했으면 마귀가 직접 등장하겠습니까? “어이, 어디 귀신 앞에서 귀신 노릇하고 있어? 내가 귀신이야.” 하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당신들은 누구지요?” 어디서 가짜가 진짜 행사하냐구요. 가짜가.
박상민이라는 가수 알지요. 콧수염 기르고. 세상에 똑같이 해가지고 지가 밤무대서고 말이지요. 그럴 때 본인은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지금도 주님께서 세상 교회 꼬라지보면 얼마나 웃겠어요? 전부 가짜들이 예수를 언급하고. 예수 믿으라고 부흥회하고 하니까 기가 찹니다. 행복해질 겁니다. 대전 시민 교양강좌에 나오는 이야기들이죠. 예수 사랑해요. 전부 다 마귀들이 하는 짓이에요. 마귀들이 하는 짓이 뭐냐, 육에서 자꾸 영을 모방해도 마지막 도달하는 지점은 그것밖에 못해요. 영의 세계를 뚫을 수가 없습니다. 아예 육은 영으로 뚫리지를 않습니다. 성령이 처소를 마련해야 우리가 그 파 놓은 배수관을 통해서 우리는 가면서 날마다 자기 죄를 알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가는 거예요. 자기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실적을 내 인생 이 만큼 큰 일했습니다, 라는 그 실적을 자랑하지 않아요.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지 자기 실적, 업적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15절에 보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했잖아요. 이 대목을 보면서 제가 신학교 때 상당히 마음 아팠던 게 있어요. 이미 예수님도 바울을 알잖아요. 귀신도 바울 알지요. 그런데 바울을 왜 그리 고생시킵니까? 마치 예수도 악마도 마치 버려놓은 자식처럼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고 인기도 없고 아무도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 없이 마치 그냥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것처럼 내놓은 자식처럼 그런 식으로 취급받는 그 모습을 볼 때에 그런다고 실적은 뭡니까? 악마도 바울을 알고 예수님도 니가 나와 함께 로마에 서리라, 해 놓고 풍랑 만나게 해서 다 토하게 만들고 크루즈를 탈 것을 배를 타고 사람을 그렇게 힘들게 해요. 죽을 뻔했잖아요. 내일을 기약 못하게 만들어요. 약속은 있는데 어떤 경로로 건너가는 지는 이야기가 없어요. 로마에 서리라, 해놓고는 로마에 갈 수 있는 어떠한 통밥 이라든지 어떠한 예상되는 경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거예요. 그저 이야기해주는 것이 니가 어떤 경우라도 내가 니 곁에 있을게, 해 놓고 실제로는 전혀 어긋나게 만들어요. 아~ 바울이 가는 길, 오늘날 우리가 가는 길 똑같습니다.
17절 봅시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아~ 정답이지요. 사도바울 이름을 높이고 아니지요. 주 예수 이름을 높였지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설교가운데서 얼마나 자기를 낮췄느냐 라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짐작할 수 있겠지요. 만약에 사도바울이 설교에서 지 자랑했으면 사도바울을 자랑할 건데, 주 예수를 높인 걸 보니까 그 예수님 앞에서 사도바울이 얼마나 복음을 전하는 자신도 얼마나 낮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후서 죽 나오니까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 진 적 없습니다. 십자가 진 예수님만이 구원이지, 나는 여러분들의 구원이 아닙니다. 라는 이야기를 편지에도 하잖아요.
18절,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믿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사람들 어디 있다가 나온 사람들입니까? 그동안 마귀한테 붙잡혔다가 나온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하신 일과 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귀신을 쫒아냈다. 개 거품을 물고 뒤틀려서 간질병 돼야 그 짓 쫒아내는 게 아니고 그냥 멀쩡하게 들어온 손이 와서 복음 듣고 멀쩡하게 ‘아하! 내가 방향 자체가 큰일 날 뻔했구나! 엉뚱한데 갔구나. 내가 육으로서 그냥 영적인 흉내나 냈을 뿐이지, 전혀 진짜 실제 영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육의 다른 변형체에 불과한 걸 가지고 영이라고 그렇게 지 자랑하면서 살아온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그 안타까운 세월이 길어요.
21절 봅시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마게도냐가 어디 있느냐 하면, 지금 터키 에베소 있고 바다가 있잖아요. 마게도냐가 고린도 북쪽을 말합니다. 이쪽에 있다는 말은 이미 디모데나 이런 사람들이 여기서 활동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성령께서 여기도, 저기도 활동시키는 거예요. 이걸 누가 아느냐, 사도바울이 이걸 아는 겁니다. 그래서 남의 터 위에 내가 전하지 않겠다, 하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성령이 내려왔고, 내가 성령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으로서 활동하겠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성령은 나 말고 다른 사람으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자기가 사도바울 본인이 그걸 알아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존재가 주의 일을 거추장스럽게 하고 주의 일을 훼방하고 가리는 마귀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성령 받은 내 일이 오히려 성령의 일을 훼방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심지어 로마에 가도 로마에 편지 보면 로마에 간적도 없는데 로마에 소식이 들려와요. 이미 복음이 전파되는 소식을 듣고 기뻐해서 로마에다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내가 나서야 구원시킨다는 게 없는 입장에서 우리는 종으로 또 한 번 자유를 만끽합니다. 내가 나서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 엄마 구원은 내 책임이라고 하지 마세요. 주님 책임입니다. 본인이 엄마 구원이나 아빠 구원에 자식 구원에 주제 넘어가지 마세요. 주제넘지 않는다고 해서 기회를 줬는데 일부러 “나, 안 해!” 이런 것은 또 뭐예요. 안되지요. 그래서 복음 전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그 방법을 말씀드릴게요. 사도행전과 관련되어 있으니까. 이리 보시면 돼요.
자식이 있을 때, 그냥 전도하면 안 되고요. 반드시 무엇을 경유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경유해서 가야 돼요. 그래야 내가 전도한 게 아니고 주님이 전도 한 게 되어야 돼요. 주님이 전도하게 하면 어떻게 되느냐, 나는 주님 앞에서 자기 부인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 내 자식을 전도하려고 합니다.“ 주께서 ”해서 뭐하려고?“ ’그래도 내가 복음 아는데 자식 구원받아야지요.” “그럼 니 자존심이네.” “남이 안하고 하필 니가 해야 하는데?” “그래도 내 자식인데.” “아이고, 천국 니가 만드느냐?” 그러니까 이런 기도와 이런 것이 없이 그냥 해버리면 열심히 자식한테 하는 것이 자기 자존심으로 귀환, 회수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실컷 해 놓고는 안 된다고 또 주님한테 짜증을 바가지로 내는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부인케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자식이든 주께서 구원할 자에게 다가서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구원 받을 자로 하여금 “저분은 나한테 꼬시려고 전도하는 게 아니고 저 분 자체에 주님이 함께 있음을 전도 받는 사람이 같이 공감하게 되는 겁니다.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 엄마는 자식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짓말 같아. 자식이 아니고 주님한테 홀린 사람 같아.“ 참, 꿈같은 이야기입니다만, 그런 인상을 몇 초간이라도 늘 한다는 것은 욕심이고 그런 것을 느낄 때, 다른 세계, 영의 세계, 육과 영의 경계선에 우리가 사용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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