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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48강 / 행 18장 1절(말씀에 붙잡혀) / 130425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48강 / 행 18장 1절(말씀에 붙잡혀) / 130425

정인순 2013. 4. 25. 22:38

 

 

음성1     

 

녹취:공은주

대전130425a-행18장1절(말씀에 붙잡혀)

48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18장할 차례입니다. 18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이리 되어 있지요. 역사적 상항을 이야기한 건데. 항상 역사적 상항은 일회용입니다. 일회용이라서 지금 천막 장사한다고 해서 성령 받는 것도 아니고 구원 받는 것도 아니에요.

 

역사는 흘러가면 그만입니다. 옛날에 그랬었었지, 그걸로 땡 끝났어요. 오랜만에 동창생 만나봐야 그 때 그 고등학교 그 인간 아닙니다. 사람은 세월에 밀리다보면 자기도 늘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어디까지 달라지는 지는 본인도 몰라요. 어쨌든 달라진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거든요. ‘달라지지만 나는 달라지지 않았어. 그런 점에서 옛날하고 똑같아.’ 라고 고집을 부리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동질성은 일종의 자기 고집이에요. ”나는 고등학교 때도 하나님 믿었지만, 지금도 믿어“ 라고 하는 그건 자기 고집, 자기주장입니다. 이런 동질성을 주장하는 것은 ”나는 무엇입니다.“ 라고 하되 무엇은 동질성이라 하고, 나는 이라 하는 것은 주체성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무엇입니다. 고 할 때 동질성이라는 “나는 아직도 하나님 믿습니다.“ 하는 그런 것들은 전부 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변화되는 혼돈된 어지러운 가운데서 어쨌든 간에 자기 자신을 붙잡고 싶은 강한 집념 때문에 요런 주장을 합니다. 휘말리지 않으려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버틸려고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방금 본문에 봤던 여기에 역사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는 것은 성경내용하고 아무 관계없는 거예요. 옛날에 사도바울이 천막장사 했습니다, 어쩌라고? 그게 뭐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천막장사 했다는 것은 다른 의미를 끄집어내야 됩니다. 어떤 의미냐 하면, 여기서 만난 아굴라하고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것은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희망도 아니었고 우연이었지요. 어떤 우연이냐 하면, 글라우디오라는 로마황제가 있었는데, 로마황제가 이탈리아에서 유대인들끼리 폭동사건이 있었어요. AD47년쯤 데는데. 폭동사건이 있어가지고 “에이씨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싸울 거 같으면 나가, 나가”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만약에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 인천에서 저희들끼리 패싸움하면 우리나라 어떻게 합니까? “나가, 나가, 중국사람 나가” 하잖아요. 그렇게 쫓겨난 거예요. 유대인들끼리 몽땅. 쫓겨나서 갈데없으니까 장화같이 생긴 것이 이탈리아입니다. 옆에 있는 바다, 아드리아해고 알바니아 옆에 마케도니아라는 나라가 있어요. 아가야 동네가 있습니다. 이 마케도니아 동네에서 아가야의 튀어나온 펠로폰네소스반도에요. 이 들어가는 입구에 뭐가 있느냐 하면, 입구에 고린도라는 절벽위에 동네가 있고 BC7세기경에 올림픽이 처음 만들어진 아테네로 옮긴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기서 옮긴 이야기 한 거예요. 옮길 때, 고린도에서 이탈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한 사람이 같이 만났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건데요. 이것은 우연히 만난 건데, 또 여기에 합세한 사람이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디모데와 실라가 위에서 마케도니아로부터 내려오고요, 그 다음 7절에 보면, 회당장 그리스보를 만나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이 합세를 합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느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고린도교회의 초기 멤버들의 구성요소가 사도바울이 기대한 게 아니고 사도바울이란 졸이나 포, 차, 장기들 때 장기 알 움직이잖아요. 장기는 한 사람이 움직이고, 상대방이 움직이는데 하나님의 장기판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쪽 움직일 때, 저쪽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같이 움직여서 하나의 판이 되게 만드는 거예요. 이런 걸 보면 참 신기하죠.

 

아까 이야기를 하실 때, 가족이 신비를 찾는다 하는데, 신비라는 것을 따로 뽑아내면 그건 신비가 아닙니다. 마귀의 조작극이에요. 살아가는 자체가 신비여야 하는데 살아가는 것을 그냥 신비로 보지 않고 이건 당연한 거 아니야, 심장은 원래 뛰게 되어 있어, 이리 나오면 그것은 이미 신비에서 벗어난 거예요. 다른 신비, 이건 성경에 골로새서에 나오는 악마가 유혹하고자 덫을 깔아놓았는데 덫에 걸려버려요. 덫에는 멧돼지고 토끼고 걸리면 여지없습니다.

 

늘 남편이 옆에서 코골다가 어느 날 코 안 고는 것도 신비인데,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하나 했지요. 요한계시록 해석법을 올렸잖아요. 거기에 보면 신비에 대해서 글 올렸지요. 신비는 없어요. 신비가 있다면 뭐냐 하면, 나의 분노와 불평이 왜 내 힘으로 이걸 자제할 수 없느냐, 그게 신비라 했습니다. 그건 마태복음에 나오잖아요.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아, 니는 니가 다스리는 게 아니고 니 속에 악마가 너를 다스린다. 니는 악마의 노예에 불과하다. 그게 신비인 거예요.

 

사람은 악마를 잘라버린다 말이지요. 악마라 하는 것은 있지 않으니까. 그걸 잘라버리고 끊임없이 즐거움과 만족과 쾌락을 위해 찾는데 그 쾌락은 저기 있다고 잡아놓으면 벌써 즐거움은 저만치 들어가 버려요. 이거하면 만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또 찾아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인생은 마치 도박과 같고 마약 중독 같은 느낌, 인생 자체가 중독이 되는 듯한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많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돈이 많고 회장이 돼도 사람은 행복이 없잖아요.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행복이라 하는 것은 이 순간의 죽음을 생명이 영생이 극복해주면 그것이 행복이라 했지요. 지금 죽어가고 있는 나를 내일 살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까지 죽어가는 나를 지금 죽어도 오늘밤 낙원에 있게 만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이 말이지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덮친 영생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손길이 나보다 더 귀할 때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감사뿐이지요.

 

그럴 때는 얼마나 행복한 줄 몰라요. 발을 다쳐도 행복해요. 발 다친다고 지옥 가는 거 아니지요. 그렇죠? 여기서 더 다치면 죽을 수 있지만, 그래도 죽는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고 영생을 얻는 마지막 탈출시기를 맞이한 거니까 언제 죽어도 구멍 뚫린 곳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그걸 느낀다는 것, 이 행복 얼마주고 얻을까요? 로또 1등 되면 그 행복 되겠습니까? 1등 당첨된 사람 중에 30%가 패가망신했답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뭘 가진 것은 그 가진 것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놓쳐 버리는 겁니다. 행복이 도망치니까 또 따라잡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날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계속 물 뜨러 와야 되는 거예요. “이 물도 아니 아니 아니야, 아니야”

 

인간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저만치 가있는 행복, 그런데 성령을 통해서 죽어도 산다는 그걸 줄때는 우리는 풍성한 행복을 한꺼번에 받은 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죄를 더한 곳에 뭐라 했습니까? 죄를 더하게 하신 것은 은혜를 더욱 더 넘치게 하기 위해서 죄를 더하게 하셨다. 이런 소리를 어디서 듣겠습니까? 로마서5장에나 나올 이야기지, 어느 불경에서 어느 철학에서 어느 도인이 이런 소리를 합니까? 죄를 더한 것은 은혜를 더 주고 영생을 주기 위해서 계속 너로 하여금 죄 짓게 한다. 얼마나 기쁜 거예요.

 

그런데 신비주의가 돼버리면 자꾸 가져야 되고 가짐을 지탱하려하니까 지 인생이 피곤해지는 거예요. 모든 게 피곤한 거예요. 자식도 잘돼야 되고, 남편도 잘돼야 되고, 덕분에 나도 잘돼야 되고, 매일 잘 돼야 돼, 어느 정도로 잘돼야 되는 건지 도대체 끝도 없어요. 그걸 정신분석학에서는 미지의 X라 해요. 미지의 X는 구멍입니다.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알 수도 없는 곳으로 계속 끌려가서 귀신한테 홀린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인생 자체가. 성경에서는 우리가 마귀한테 홀렸다고 하는데 진짜 우리는 마귀까지는 안가도 뭔가 홀린 거 같은 인생. 의미도 목적도 없이 이유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거. 가련하지요.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도 마찬가지에요. 사도 바울 만나기 전에는 그랬던 사람이었습니다. “에이구, 이탈리아에서 못살면 아가야에서 살지.” 이래서 왔는데, 왔다가 딱 아다리된 거예요. 복음을 듣게 된 겁니다.

 

그 복음을 들을 때, 사도 바울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5절에 봅시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난해하지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여러분, 거울을 보잖아요. 거울을 볼 때, 앞에 보면 누가 보입니까? 그냥 내 모습이 보이지요. 내 모습이 보이는데, 만약에 거울이 진실된 거울이라면, 거울 앞에 설까요? 아니면 거울을 깰까요? 거울이 진실의 말을 건다면, 백설공주의 문제가 거울이에요. 말을 안 하고 있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거울 쪽에서 말을 건네는 거예요. 이게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울처럼 우리가 비쳐보면 내 모습, 내 잘난 모습을 찾으면 성경은 백독을 하고 천 독을 하고 어릴 때부터 봐도 백날을 봐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언젠가 말씀이 나를 지적질하면서 말을 건네요. “니는 나를 핍박한 자로다.” 이렇게 말을 건넬 때, 우리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을 안 보던지, 말씀에 인생을 맡기던지. 성경은 말씀은 우리에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자유라는 말은 어려운데, 쉬운 말로 ‘벗어나게 한다.’ 누구한테 벗어나게 할까요? 바로 거울을 쳐다보는 나, 자아로부터 벗어나게 하지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자기 자신을 예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그 거울역할을 누가 했느냐 하면, 친구가 했고 부모가 거울역할을 한 거예요. “아빠, 나 오늘 백점 맞았어.” 아빠는 나의 거울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아빠가 돌아가신다면 그 애는 백점 맞아도 그 다음에 공부할 보람이 없습니다. 왜, 지 자랑질 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서 부부 중에 한 사람이 죽으면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래요. 찢고 싸우던 말던 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확인할 수 있는 상호 인정받을 수 있는 거울역할을 톡톡히 했는데, 고등어 구워주던 아내가 갑자기 없을 때, 특히 아내 죽고 난 뒤에 잠자다가 벌떡 일어나면, 꿈속에서는 아내가 있거든요. “여보, 꿀물 하나 타줘.” 하면 “어, 아내가 없어. 정신 차려, 정신 차려, 그럼 아내가 왜 없지? 아, 한 달 전에 죽었구나.” 그게 반복되면 잠에서 깨어날 때 정신을 지금 현실로 다시 못 할 때 이것은 거의 정신병 수준입니다.

 

자유라 하는 것은 나 자아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제일 큰 자유가 뭐냐 하면, 바로 종교로부터 자유에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것은 충격인데, 자기의 믿음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돼요. “나는 믿습니다.”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믿습니다, 로 벗어나는 게 이게 믿음이에요. 자기 믿음을 주장해버리면 이게 행함이 돼 버리는 거예요.

 

성경이란 말을 쓴 것은 ‘거울’이란 뜻이에요. 거룩한 거울이란 뜻이에요. 거룩한 거울은 가만히 있는 수가 없어요. 반드시 우리한테 진실을 이야기해 버립니다. 진실의 거울은 마치 촬영하는 엑스레이 기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꾸미는 것은 피해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암 조직 있잖아요. 우리가 감추고 싶은 거, 그리고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암 조직 같은 거, 이런 것을 그대로 다 보여주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진실에 매료돼야 돼요. 우리를 나로부터 자유케 하신 이 말씀의 위력에 많은 행복과 감사가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내가 성경을 천 독 보게 되면, 그 사람은 자유가 아니에요. 천 독이나 봤던 나에게 그대로 갇혀있는 셈이 되기 때문에 나는 성경을 천 독 봤어,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을 만 독 봤다는 사람이 있답니다. 사람은 누굴 믿는다는 것은 믿지 않으면 정신병 걸리기 때문에 대체해서 믿게 돼 있어요. 대전역에서 나오는데 전봇대에 재림예수라는 포스터가 붙어있어요. 재림 예수가 붙어있는데, 저는 느낀 점이 뭐냐 하면, 재림예수다, 하는 그 사람 사진을 붙이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게 아마 아르바이트 쓰면 문제가 안 되는데, 그걸 자진해서 붙인다는 말은 결국 재림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나는 재림예수다, 하는 그걸 농담할 수 있어요. 농담으로.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농담한 사람을 화들짝 놀라게 만듭니다. “저요, 재림 예수거든요.” 분명히 농담이다 말이지요. 그런데 이걸 “아멘.” 하고 따른다 말이에요. “저, 인간 미쳤지.” 본인도 미치는 거예요. 이건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이 장림이란 사람이 얘기했거든요. 이 장림이가 1992년 12월 18일에 온다고 했거든요. 나중에 안 왔을 때, 이 장림에게 물었어요. “왜 그런 소리 했습니까?” “농담으로 해봤는데.” 실제로 그걸 믿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지도 놀래 버렸어요.

 

이 만희가 자기가 그냥 보혜사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는데 지금 믿는 사람이 수십 명 되잖아요. 왜 그러느냐 그것은 이 만희나 이 장림을 이용해서 자기 정신병을 감추는 거예요. 솔직히 이 세상은 너무나 돈 위주기 때문에 돈 없으면 인간취급도 못 받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 받아가지고 뭐든지 믿지 아니하면 지가 미칠 것 같아. 믿지 아니하면. 참, 악마의 세계입니다.

 

교회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그런데 수천 명 모이잖아요. 그거라도 해야 지가 미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의 칭찬, 장로님의 칭찬, 교회 나와서의 가치 의미, 거기서 다 찾는 겁니다. 나를 칭찬해주는 사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거울 역할을 교회가 해줄 때 교회 목사님이 해주고, 장로님이 해줄 때, 사랑받기 위해서 그 장소에 가는 거예요. 이것은 자유가 아니고 악마한테 더욱 더 덫에 걸리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나를 지적질 하시는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뭘 얻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주님, 저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정신병에 걸려도 괜찮아. 니 구원 받으면 됐잖아.” “니가 미쳐도 괜찮아. 오늘 밤 죽어도 너는 구원받잖아.” “제가 미친 짓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더한다? 은혜가 더 많다. 그럼 문제될 게 뭐가 있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불교입니다. 매일 반성문 쓰고, 불교에요. 이걸 자기 부인이라 하는데 바리새인들의 주특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한 주일을 할애해서 나라전체가 자기 부인하고 절기를 만들었어요. 요즘 교회에서는 그걸 뭐라 합니까? 고난주일이라 하지요. 금식해서 금모아가지고 어려운 사람 돕고, 고난주일은 금요일날 끝나요. 왜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이 끝났기 때문에. 토요일 아침에 피자 큰 거 사가지고 못 먹은 거 한 푸는 거죠. 결국 고난 받은 게 아니고 참은 거예요. 나중에 끝나기만 해봐라, 시켜먹을 테니까.

 

바리새인이 왜 기록돼 있느냐 하면, 바리새인이 성경이라는 진리 안에 왜 거론되느냐 하면, 그 바리새인을 비난했던 바리새인 하는 그 짓을 우리가 지금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바리새인을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지적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뭐든지 우리가 죄 아닌 게 없어요. 왜, 십자가 피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제가 주일날 이야기했지요. 국물에 물을 더 붓는 것은 간장을 더 타므로 말미암아 맛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계속 물을 더 탄다고 했지요. 뭔가 싱거운 거 같아, 그러면 뭐합니까? 간장 타지요. 조금 짠 거 같아, 또 물을 넣지요. 이게 뭐냐, 물의 의미가 아니고 간장의 의미, 우리로 하여금 자꾸 죄짓게 만드는 것은 그 죄 용서가 누구의 행함 때문에 죄 용서됐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우리가 그 하나를 볼 때, 나라는 하나, 숫자 1, 원, 나라는 하나에서 자유케 되는 겁니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전부 다 하나에 매이게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모였던 이 사람들은 전부 다 사도바울처럼 어디에 매였느냐, 사도바울이 말씀에 매였다 하잖아요. 성령을 받게 되면 사도바울이 말씀을 전하면,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면, 진리의 거울 가지고 하지, 우리의 소망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소망이 무엇이냐, 들어줄게, 하는 것은 악마의 소리입니다. 이건 성령의 소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 되어 있잖아요. 이것은 사도바울에게만 해당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씀에 붙잡혀서 말씀이 나올 때, 그 배를 가르고 터져 나온 말씀이 듣는 사람들의 심령을 똑같이 붙잡아 주는 겁니다. 사로잡아 버려요. 단, 영생 주기로 작정된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성경은 말씀을 사용하신다. 그런데 말씀에 보면, 영생 받을 자와 영생 안 받을 자와 구분되어 있어요. 어제 수요일 날 설교 들어보면, 점치는 여자들이 살 영혼을 죽이고 죽을 영혼을 살리게 한다, 했지요. 그러면 에스겔을 그 가운데 보낸 이유는 에스겔은 모두 다 살리는 게 아니고 살 영혼만 살리고 죽을 영혼은 필히 반드시 죽게 하는 용도로서 에스겔이 거기에 점치는 여자들에게 그렇게 단언했지요. 사람들이 점치는 여자를 찾는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자기의 존재의미를 기대하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기대한 게 있으면 문제가 돼요.

 

점치는 여자들이 요새 같으면 팥이나 쌀을 상에 톡 뿌리지요. 무작위 변화가 생기면 그건 신이 하신 거예요. 뿌려 진 것은 신이 하시고 해석은 누가합니까? 신 내림을 받은 지가 해석하는 거예요. 아마추어는 팥 같은 나락을 뿌려도 무슨 의미인지 무늬가 어떻게 만든지 몰라요. 그런 경우가 기독교도 있지요. 어떤 사람이 말 타고 가다가 눈 오는 날, 우연히 카메라를 주님, 보고 싶어요. 기도하고 있는 가운데 카메라로 사진을 찰칵 찍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게 바로 점쟁이 아닙니까? 이리 맞추면 이렇게 형상되고, 저리 맞추면 저렇게 형상되는데 해석을 지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집에서 실험해봤지요. 벽지 무늬를 가만히 보세요. 예수님의 형상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한 자리에 열 몇 개 나와 가지고 어느 것이 예수님의 진짜 형상인지, 그런데 눈에 덮인 예수님의 형상은 수염이 났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수염 난 예수님의 형상은 AD3세기부터 나온 그림이고 그 전에는 예수님의 수염이 없어요. 그걸 찍어가지고 판매하면서 예수님은 이 집의 주인이다, 해가지고 밥상하나, 빈 밥그릇 놓고 그런 식으로 교인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은 평소에 점치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이 점치는 방법을 이야기해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집에서 밥그릇 하나 놓으면 예수님 오시니까, 주님은 이 집의 주인이고, 임마누엘이 함께 계신다. 밥그릇만 마련해 놓으면 안 되는 거예요. 밥그릇 마련해 놓는 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옛날 조상 때, 우리 집에서 다 했던 거예요.

 

여러분, 조상 제사 지낼 때, 제가 안양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 믿는 집안 제사에 가봤데요. 갔는데, 약과를 상에 놓는데 포장을 안 떼는 거예요. 약과를 포장 째 그냥 올려놨어요. 그래서 그 집사님이 지적했지요. 비닐포장이 있으면 어떻게 귀신이 먹느냐 말이에요. 나중에 제사 다 지내고 보니까 문을 안 열어 놓은 거예요. 문을 열어 놔야 오는데 문이 닫혔는데 어떻게 귀신이 들어와요. 그래서 온 식구들이 찝찝한 거예요. 요번 제사는 포장으로 막어 놨지, 문도 안 열었지, 귀신이 오다가 문에 받혀 혹 뿔나서 되돌아가니까. 왜 사람들은 그걸 원하는가 하면, 자기가 기대한 그 범주 안에서 신비고 신이고 귀신이고 조상이고 고 안에서만 제발 놀아라 이 말입니다. 왜, 그래야 자기가 다룰 수 있어요. 신도 다루고 예수도 다 다룰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자기로부터 자유지 않았다. 자기가 그대로 자기를 고소하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왜, 벗어나지 못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 의에 얽매인다는 거예요. 자기 의에 얽매이니까 아무리 성경을 많이 봐도 자기 잘난 맛을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방법은 뭐밖에 없습니까? 이 인간을 뭐로 만들어야 돼요? 전적으로 죄인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는데, 죄인을 만드는 것은 죄를 지적질해도 이 인간이 또 반성을 한다고요. 손들고 반성하면 안 돼요. 어떻게 하느냐, 반성해도 소용없는 사건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 그래서 십자가만이 신비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를 알 길이 없어요. 알 길이 없으니까 인간들은 교회 가서 교회란 미신에 매이고 목사란 미신에 매이고 그래서 자기 존재의미를 찾으니까 점점 더 어디에 얽매인다? 자기 자신 자존심에 얽매이는 거예요. 성경 보면 성경 2번 봤다하고 석장 봤다하고 점점 더 자기 가치를 하니까 나중에 폭발지경입니다. 그걸 가장 교묘하게 자랑하는 단체가 지방교회지요. 극치라 보면 돼요. 바리새인이라 보면 돼요. 자기한테 매여 있으니까 모든 말을 자유 못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가지고 하는 겁니다. 그게 말씀에 얽매였다, 붙잡혔다,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5절의 말씀을 보고 “사도바울은 참 불쌍하다. 장가도 못 간 주제에 골프도 치고 싶고 다른 것도 하고 싶은데 바보같이 매일 성경공부만하고 얼마나 비참 한가” 이리 하는 거예요. 오히려 사도 바울은 지가 어떻게 구원받으려고 말씀을 이용한 게 아니고 그냥 말씀이 와서 자기를 잡아갔는데 자기인들 살아가는 모든 것이 말씀에 입각해서 살아가게 하시는데 그걸 어떻게 지 맘대로 주님이 주신 환경을 자기가 탈피하고 벗어나고 할 입장이 못 되지요.

 

아까 욥 이야기 했지만, 욥이 벌 받으려고 자기가 환장했습니까? ‘내가 이 쯤 되어 벌 받아야 구원 받지.’ 이런 게 있습니까? 욥은 그냥 막 살았어요. 지 편한 대로 살고 있었는데 자식 열 명이 죽은 거예요.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역사로부터 자유’입니다. 역사로부터 자유 했을 때 이제부터 약간 어렵습니다. 역사로부터 자유가 생길 때, 역사적인 사람들이 자유하게 된 사람을 그냥 둘까요? 공격할까요? 이게 참 신기한 거예요. “니, 예수 믿나?” “믿어라.” 이렇게 놔두면 얼마나 좋습니까? 가만 놔두지 않는 이유가 구약에 보면 나와요.

 

구약은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가 가만 두질 않아요. 왜냐 하면, 주님의 언약에 의하면 언약을 드러낼 때는 반드시 주변으로부터 핍박과 공격을 받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용서의 빛이 빛나게 돼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자기 향수 뿌리면서 예수님의 발을 머리로 닦을 때 그 때 주변에서 가만히 있었습니까? 바리새인이 비난했지요. 48년 된 병자가 낫을 때 주변이 고요했습니까? 박수쳤습니까? 아니지요. “야, 니 안식일 날 왜 자리를 들고 다니는데.” 하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안식일 날 그 병을 고친 거예요. 안식일 날.

 

안식일 나왔으니 잠시 봅시다. 출애굽기31장13, 14절 읽어보세요.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이걸 안식일 교인들이 알게 아닙니까? 안식일 교인은 성경의 핵심을 저희들은 찾아냈다고 하는 거예요. 다른 건 다 양보해도 뭐는 양보하면 안 된다? 안식일 양보하면 죽고 끊어진다고 하는 거예요. 천국 백성이 안 되는 거예요. 요 출애굽기 방금 봤지요. 그 이야기가 에스겔에도 나옵니다. 에스겔에 나오니까 요한계시록에도 예수의 계명을 지켰다, 할 때 예수님께서 다른 건 다 완성 돼도 안식일만큼은 반드시 안식일을 지키는 것까지 포함하고 안식일 지키고 그 다음에 예수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요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그들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지금 요한계시록의 해석법하면서 이런 것을 다 고려해서 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지적질하려 하는 거죠. 지적하기 위함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 내가 뭘 지키고 뭘 행하면 구원받습니까?”라는 본인은 자기 욕망이 있는 줄 몰랐는데 말씀이 딱 오니까 “야, 저거는 지키면 되겠구나!” 하고 불쑥 숨어있던 괴물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안식일 안 지키면 끊어진다 했으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요? 안식일 지키면 안 끊어진다고 우리는 이해하거든요. 인간은 이미 끊어졌어요. 이미 끊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안식일을 지켰다 하는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위반됨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말씀을 지켰다는 그것이.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법 나와요. 말씀의 의미란 근사치가 아니고 다른 것과 연계돼 있다는 것을 인간은 미처 모른다는 거예요. 안식일이 안식일 지키면 된다, 그러면 안식일 완성이라 이렇게 생각했지 안식일이 나 말고 따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바리새인들은 몰랐고 우리도 몰랐던 거예요.

 

안식일의 주인이 누굽니까? 그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자기가 안식일을 딱 잡아서 자기가 지키면 안식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안식일뿐만 아니고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십일조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십일조를 소득의 10%내는 내 행위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정신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내 행함을 나는 나를 계속 믿고 있을 때만, 나는 정신 바짝 차려서 내 동질서, 내 주체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나는 나를 믿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교주하고 자기가 교인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신자에요. 이건 어린애도 마찬가지고 강아지도 마찬가지에요. 귀한 자식도 지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 사이에서 서로 대화가 절대 통하지를 않습니다. 계속 이야기해 봅시다. 역사라 하는 것은 역사에서 해방됐다 했지요. 해방되면 역사라 하는 것이 해방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역사가 총동원해서 이걸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순서를 정해 봅시다. 첫 번째, 말씀에 붙잡혀 온다. 두 번째 자유, 해방, 자유케 되지요. 세 번째 공격 들어와요. 이 3개가 모여서 ‘십자가의 반복성’이라 합니다.

 

갈라디아서3장에 보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했지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예수님 만난 사람이에요. 십자가 눈에 안 보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이 얼마나 멉니까? 보입니까? 그런데 갈라디아서에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느냐 하거든요. 뭐냐 하면, 니가 말씀이 믿어진다는 것이 지금 십자가 능력이 십자가가 안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십자가가 살아서 능력을 주니까 니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씀이 믿어진다는 겁니다.

 

니가 오늘 밤 낙원에 가리라, 이게 안 믿어져야 되는데, 제 말이 중요해요. 이게 안 믿어져야 된다니까요. 이게 안 믿어져야 되는데, 믿어진다는 것,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것, 그 은혜라 하는 것은 그냥 넘치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 근거해서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기 때문에 대신에 값을 계속해서 우리를 상대로 해서 대신의 값을 우리에게 퍼부어 주고 있는 거예요. 삽으로 계속 퍼주고 있는 거예요. 눈이고 귀고 다 퍼주고 있는 거예요. 용서를 뒤집어쓰고 있는 거예요.

 

아침에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아침부터 깨워서 머리에 뒤집어쓰니까 하루일과라 하는 것은 이 용서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루일과를 통해서 말씀에서 죄가 죄로서 늘 밝혀지는 겁니다. 이미 용서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 비슷한 상황이 고린도전서11장에 보면, 초대교회에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게 되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남자하고 헤어져도 남자는 내 머리위에 있다. 이런 표시로서 있는 거예요. 그걸 ‘관계성’이라 합니다. 여자가 혼자 찜질방에 있어도 남자가 여자 머리 위에 있다는 표를 내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찜질하면서 “아이고, 더운데 머리 깎을까?” 머리 깎지 마라, 왜 머리 깎으면 안 되는데? 남자의 권위 밑에서 여자가 있다는 것.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여자는 머리 깎으면 안 되고, 머리 깎는 대신 수건을 쓰라,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이미 용서가 우리에게 주어졌으면 하루 일과는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가 아니고 왜 용서가 나를 떠나지 않는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발을 접질렀다. 에이씨 하지요. 말씀에 의하면 이것도 감사해야 될 건데, 감사는 이론이고 실제는 “아이고, 오늘 참 재수 더럽다.” 결국 재수 더러운 날인데 그 날은 누가 주신 날입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주신 재수 더러운 날 아닙니까? 순간적으로 욱한다 이 말이죠. 욱하지요. 그러니 1번, 2번, 3번, 이 역사가 자유함을 더한 역사 속에 역사가 계속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자유를 받았지만, 우리는 훌륭해서 자유된 게 아니고 주님의 용서의 위력으로 자유 됐잖아요. 우리의 인간성은 여전히 역사와 부합되려고 애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그걸 노리고 역사 쪽에서 계속 공격을 해대는 거예요. 그 공격이 바로 뒤에 나옵니다.

 

18장 12절,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회당장에서 강론하고 갈리오가 총독 되었을 때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서 유대인들이 고소를 했지요. 고소를 하면서 재수 없게 걸려든 사람이 있어요. 17절 봅시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 소스데네를 잡아 때린 거예요. 아마 그때 사도바울이 출장 갔는가, 없었던 모양이라. 자, 왜 때렸는가? 라고 묻지 마시고 왜 그들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바로 자유의 자유성을 더욱 더 부각하기 위해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때렸다. 나쁜 사람.” 하지 마시고 그들이 왜 때려야만 했던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역사에서 그들의 사상에서 뭔가 벗어나는 특별한 하나님의 일은 그들에게는 없었다. 하나님의 일이든, 누구의 일이든 현재 눈에 보이는 주어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에요. 따라서 만약에 주어진 것에 동감하지 않고 벗어난다면 그 벗어난 사람들은 현재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뭐라고 지적하겠습니까? 너희들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 간다고 지적할 게 아니겠어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잖아요.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너희들은 어디 간다? 지옥 간다. 그러면 이것이 진리의 거울이잖아요. 그럼 진리의 거울은 어떻게 해야 돼요? 거기 계속 있어서 계속 외치면 안 되잖아요. 어떻게 합니까? 거울을 깨버려야 되죠. 깰 때 이것이 뭐냐, 십자가는 안 죽고 지금도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18장에 나오는 이런 사건들을 보게 되면, 이런 사건 자체가 주님이 주님으로서 지금도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에 소스데네를 그리스보, 유스보, 아굴라, 브리스길라, 디모데, 실라, 그리고 사도 바울 이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지금 그런 사람이 살아있다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누구한테 붙잡혔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되고 있는 십자가 사역을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 하기 위해서 그들은 현재 역사 속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누가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주로서 본격적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런 관계가 신앙이지요. “아, 주님 살아계시는군요.” 주님 살아있다는 것을 기존 교회에서는 기도했더니만 갑자기 복을 받는다든지 기도하면 숨이 살아있다고 보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복음 받아가지고 오늘밤에 죽어도 구원받으니까 역사로부터 벗어나고 자유를 얻으니까 자기 자신의 행함으로부터 벗어나니까 이걸 왁 달려들어서 공격할 때 이게 무슨 증거다? 바로 자기가 구원받은 증거라 이겁니다. 이게 구원받은 증거에요.

 

그러니까 기존사람하고 납득이 안 되지요.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안되면 말지. 나도 의사소통돼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말씀이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구원받지 내가 말씀 연구해서 신학박사 돼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처럼 그들도 이해 안 되는 것은 우리가 할 말이 없어요. 우리가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고 증인이지요. 우리는 남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요러하니까 요러니까 요렇게 된다,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증인이에요.

 

창조과학 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에요. 예수님을 증거 하면 되는데 자꾸 모든 것은 신이 만들었습니다. 신이 만들었다는 것을 자꾸 증명을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증명이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돼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냥 곱게 돌아가신 게 아니고 사람에게 공격받아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공격성이 계속해서 남아있는 한 공격받을 말만 할 수밖에 없어요. 왜, 공격성 때문에. 공격받은 흔적 때문에, 공격 받은 흔적은 공격한 세력과 만나기 때문에 좋게 만나지를 않는다니까요. 그것을 어려운 말로 ‘존재의 얼룩’이라 해요.

 

만약에 어릴 때, 집에서 끓는 물을 쏟아서, 집에 불이 나서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면 이게 뭡니까? 피부에 뭐가 남지요? 얼룩이 남지요. 흉터지요. 바로 흉터라 하는 것은 피부에서 흉터지만, 내면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흉터 생기잖아요. 바로 우리 내면에서 올라온 십자가의 흉터와 얼룩이 우리 몸 전체를 통해서 그 때 그 때마다 보여주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저항, 외면, 그건 아니야, 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본성이 우리 마음대로 안 돼요. 본성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주께서 “그건 복음이 아니야” 라고 우리를 통해서 거부하게 하는 겁니다.

 

공무원해서 돈 뇌물 주니까 해달라고 할 때 “예, 얼마든지 예~ 고마워라, 해주지요.” 이거 안 받아도 해줄 건데 돈까지 주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그런 죄를 짓더라도 마지막에 “그러니까 교회가지 마시고 복음 믿지 마시고 해 주세요.” 그 때는 속에서 돈은 받아 쳐 먹어놓고 복음은 아니라 하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복음이 내가 채택했다면 우리는 그것마저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자꾸 공격하게 하는 것은 가짜들이 너무 많아요. 죽을 영혼이 살면 안 되거든요. 죽을 영혼을 죽은 쪽에서 데려가라고 죽은 자가 찾아가라고 계속 공격해서 핍박과 고난 가운데 넘어지게 만들어요. “어디서 함부로 천국을 넘봐! 가! 가!” 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음 같은 소리하고 있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해놓고 나중에 일이 터지니까 전부 다 어디로 돌아가요? 결국은 행함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믿음으로 드리는 헌금은 괜찮다고. 그래도 성령 받아 하는 찬양은 찬양이라고. 계속해서 행함대로 하니까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을 계속해서 그런 시험을 받도록 만들어요.

 

그리고 그게 우리한테도 옵니다. 악마가 우는 사자같이 으르릉, 으르릉, 찾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데 왠 은혜인지, ‘그래도 내가 믿기로는 피 능력으로 구원 받는데.’ ‘행함이 아닌데.’ 언뜻 그런 생각들이 들어요. ‘몸이 아파도 그래도 피로 구원 받기는 받잖아. 몸이 아파도.’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지요. 예수 피로서 구원받습니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고린도가 BC5세기경부터 창녀들의 도시에요. 10절에 보면 여기에 1년 6개월 동안 있었거든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에 반을 어디서 보냈느냐 하면, 이 고린도에서 보냈어요. 3년인데 그 반을 고린도에서 보내고 그리고 에베소에서 보내고 다시 안디옥으로 되돌아가요. 뒤에 에베소이야기 나옵니다. 그래서 2차 전도가 끝나는데, 고린도에서 머물면서 고린도 편지를 썼거든요.

 

그 편지에 보면, 음란과 음행에 대해서 굉장히 언급을 많이 했어요.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육과 영과 육신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2장 끝에 보면 나와요. 육신에 속한 자, 육에 속한 자, 영에 속한 자 이리 나와요. 이렇게 할 때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육과 육신과 영을 설명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절하다고 보신 거예요. 제 말은 뭐냐 하면, 어떤 나쁜 도시에 갔다고 못살겠다고 나오지 마시고 환경은 내가 예수님한테 적당치 않아, 예수 믿는데 적당치 않는 환경 없어요. 어느 환경이든지 간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 자리를 그 환경에 그 현실을 집어넣었다는 것을 이 고린도에서 실감나게 고린도편지를 통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처한 환경은 주님이 필요하면 주님이 다 알아서 바꿉니다. 괜히 내가 나서서 바꾸면 오버되는 거고, 억지로 인생사는 거니까 그러지 마시고, 현재 주어진 환경은 미처 내가 놓치고 잊어버리고 있던 그 십자가의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고린도 같은 교회, 고린도 같은 집안, 집구석, 그러한 곳에, 지옥 같은 곳에, 일부러 보냈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