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47강 / 행17장32절(십자가와 부활) / 130328 본문
녹취:공은주 대전130328a-행17장32절(십자가와 부활)47강-이 근호목사
사도행전17장32절 할 차례입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왜 이 구원에서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따져봐야 합니다. 산 사람끼리 모아 놓고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이란 말은 누가 듣게 되면 내가 행할 수 있는 거만, 골라서 듣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누가 훌륭했습니다.” 하면 ‘그렇다. 나도 저렇게 훌륭하게 될 수 있다.’ “누가 이렇게 믿음으로서 헌신할 수 있다.” ‘그렇다. 저게 내 갈 길이야, 저게 내 모델이야. 내도 헌신할 수 있겠어.’ 이리 나온다면, 어떤 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이것은 인간의 행함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서 생뚱 맞는 이야기가 된다 말이지요. 따라 붙일래야 따라 붙일 수 있는 근원을 처음부터 차단해버린다 이 말입니다. 닭 쫒는 개꼴이 되는 거예요.
도 닦는 사람들, 도 닦는 사람들의 희망은 항상 계속해서 자기의 모델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돼요. 모델을 만들어내서 그걸 라이벌로 여기고 존경합니다. 훌륭합니다. 말을 난발하면서 언젠가는 따라 잡을 거야, 하는 강한 집념을 보면서 하거든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뭐냐 하면, 교인들이 행하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기 때문에 교회 목사는 뭐냐 하면, 신앙의 모델케이스를 제시하게 되면 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신하지 말라 해도 헌신해요. “누가 헌금을 요번에 십일조를 이상으로 했습니다.”하면 ‘나는 못할 줄 알고.’ 이리 나온다니까요. 오기가 있잖아요. “어떤 분은 청소를 다했습니다. 꽃꽂이 했습니다. 피아노를 기증했습니다.” 하면 ‘치, 치, 나도 그 정도 할 수 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목사님들이 “꽃꽂이를 했는데 이 믿음을 본받으세요.”이리 나온다 말이지요. 그러면 ‘아, 꽃꽂이 하는 그것이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는 믿음의 하나의 케이스가 되는구나!’ 그러면 이는 어떤 교회란 단체에 사람이 가는 이유는, 인정받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사람이 인정받기 위해서 사는 것은 누가 말해서 유명해졌냐 하면, 헤겔이란 사람이 주장한 거예요. 상호인정이라 하는데. 사람은 인정받는다, 하는 말이 어려운 거 같으면, 쉬운 말로 고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뭐냐, ‘날 좀 바라봐.’ 내가 여기 있는데 날 좀 바라봐달라는 거예요.
청소년들이 드럼을 치는 이유가, 오토바이 타고 빠라빠라바 타는 이유가, 광속으로 가는 이유가, 내가 안 죽고 여기 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살아 있네.” 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그것이 교회 갔을 때, 제일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왕따요, 소외입니다. 이건 학교도 문제이지만,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집안 식구 간에도 항상 식구들이 염려하는 것은 혹시 저쪽 4명이 나를 왕따 시키지 않느냐, 왕따 시킨다면 그 해소하는 방법은 예배당에 가가지고 목사, 장로로부터 인정받으면 집안에서 왕따 당한 것은 교회 가서 해소가 돼요. 그래서 항상 교회에서 충성하는 청년들 문제 있습니다. 분명히 뭔가 욕구불만이 있어요. 그러면 그것은 목사한테 밥이 되는 거예요. 실컷 무임금으로 노동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격려해 주고, 잘한다고 하고, 하늘나라 상급 많이 받는다고 하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당신의 신앙에 모델케이스로 지켜보고 있으니까 교회 오빠로서, 완벽을 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귀가 남긴 최후의 마지막 굴레가 뭐냐 하면, 완벽 하라, 는 겁니다. 이것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바바리 맨 되게 만드는 거예요. 지난주일 오후에 설교했지요. 학교 앞에서 바바리 맨 하는 이유는 사실은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다는 것을 바바리로 감추기 위함입니다. 뭔가 감추고 있으면서 신비로운 느낌을 갖는 것, 신비주의거든요. 그러면 교회 교인들은 뭐냐, 전부다 각자 바바리 입고 온 사람들이에요. 전부 다. 바바리에다 또 장식을 하네. 이왕이면 명품 바바리 이런 거죠. 그런 점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 누구도 바바리 속에 있는 것을 말하지 않기, 침묵하기, 그리고 그들이 장식하고 온 것은 서로가 서로를 칭송하기, 그 칭송하기를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랑의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사랑의 교회만 그런 게 아니에요. 서울에 있는 사랑의 교회만 사랑을 부르짖는 게 아니고 모든 교회는 사랑을 언급함으로서 교회가 유지되는 겁니다. 위로해 주고, 서로 관심 가져 주고, 서로 엎어지면 절망하면 격려해서 일으켜주고, 그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상품화되는 거죠.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뭐냐 하면,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 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죽은 자의 부활’이에요. 그렇다면 지금 서로 격려해서 교회가 지금 잘 돌아가고 있고, 헌금도 척척, 모든 게 마지막은 돈이 문제거든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잖아요. 목사의 속셈은 뭐냐, 교인들이 돈 안가지고 오면 때려죽이고 싶은 게 목사의 심정입니다. ‘이 씨! 어디서? 공짜로 설교 듣고 공짜로 점심 먹고 가고, 특히 젊은 것들 와가지고 천원 달랑 내밀고 점심 먹고 이~ 씨! 함박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돈 안 가지고 와!’ 이런 거. ‘어디서 나한테 설교 듣고 다른데 헌금하고, 이 나쁜 인간들’ 이게 장사 밑에 목사는 깔려있다 이 말입니다.
그걸 감추는 방법이 뭐냐 하면, “여러분, 구제 많이 합시다!” 그 구제는 구제를 핑계해서 지는 목사는 커미션 챙겨 먹는 거예요. 밥 퍼주고 이런 거. 커미션 챙겨 먹는 거예요. 그러니 지금 사랑과 격려와 불법으로 충분하게 충분히 교회가 되는데 거기다 구태여 죽은 자의 부활을 이야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가 안 되면 몰라도 지금 교회가 잘 되고 있는데 죽은 자의 부활을 왜 이야기하느냐 이 말이지요. 이게 죽은 자의 부활을 이야기하면 이것은 그야말로 초치는 게 되거든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죽은 자의 부활을 초 안치면서 이야기를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죽은 자가 부활했기 때문에 죽은 자가 ①번이지요. 그 다음 부활이 뭡니까? ②번이죠. ②번이니까 ②번 되고 난 뒤에 ①번을 지워버리자 이 말입니다. 이것이 김성수목사의 마지막설교가 이거였습니다. 남는 건 부활이잖아요. 부활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부활공동체로 만들어버려요. 부활공동체 이름을 바꿉니다. 새 생명 공동체라고. 새 생명 공동체로 바꾸면 성경에서는 뭐냐, 찾아보니까 뭐가 풍성하다? 사랑이 풍성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이 풍성한 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로 보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성과 형제우애, 이걸 성령의 열매로 봤다면, ①번을 스스로 뭐라고 합니까? 스스로 자처하면 그만이에요.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믿습니다.” 일단 믿는 걸 전제로 하고 이제는 일단 믿으니까 더 이상 이것은 다시 한 번 터 닦을 필요 없고 중요한 것은 믿는 티만 내면 되거든요.
믿는 티가 뭡니까? 사랑의 공동체. 사랑의 열매를 내면 당신은 부활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부활의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 안에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외부에서 나를 인정해 주지요. 그게 헤겔의 ‘상호인정’입니다. 나는 여기 와서 비로소 새사람 됐구나, 라는 것을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현황입니다. “위로 받고 싶지요. 위로 받은 만큼 마지막에 돈 내세요. 교육관 지은 거, 선교사 파송할 때, 돈 내세요.” “아무리 믿어 봐도 돈 안 나오면 예배당 형광등 하나 못 갈면, 월세 못 내면 구원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 만큼 키워준 값이라도 해야 덜 뻔뻔스럽지 않잖아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입니다. ” 라고 호소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돌아가실 때, 이거 전하라고 예수님 돌아가셨겠어요? 결국 바바리 입고 지 잘난 체, 경쟁하듯이 내부 경쟁 일어나는 그것이 과연 주님께서 원했던 사도가 통해서 했던 이것이 부활의 공동체입니까? 아닙니다. 왜 아닌가,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죽은 자의 부활에서 아까 제가 ①번 죽은 자이고, 원인이라면 ②번은 죽은 자의 부활로서 결과지요. 누가 죽은 자가 없다면 부활도 없다. 따라서 이 말은 원인과 결과라면 결과만 챙겨버리면 원인은 이제는 없어도 된다는 거죠. 그런 논리거든요. 이 논리가 뭐냐 하면, 유명한 사다리 논리에요. 사다리 논리가 뭐냐 하면, 건물을 짓고 난 뒤에는 외벽에 있던 사다리를 어떻게 하겠어요? 치우면 되겠지요. 그 논리에요.
그런데 이 논리가 이 논리로서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세요. 이상하게 분명히 ①번 다음에 ②번이기 때문에 ②번하면 ①번 철거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분명히 ②번에서 ①번으로 돌아오게 돼있어요.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로마서 에베소서 다 마찬가지에요.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뭐 밖에 없다? 십자가 밖에 없다 하는데, 그러면 그거는 오늘날 한국교회 논리와 안 맞아요. 왜냐, 십자가하는 것은 초보, 처음구원 받을 때 터 잡는 것밖에 안되는데 왜 자꾸 기초공사만 하느냐, 이런 논리가 성립되잖아요. 맨날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이제는 부활 언제 나가는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냐 하면, 사람이 자기가 여기 있잖아요. 이 한국교회 논리가 잘못된 게 간단해요. 자기가 있어가지고 자기 눈이 까 잡아서 눈이 있잖아요. 눈이 있어가지고 스크린 영화 화면을 보는 거예요. 자기는 A석에 앉아서 보는 거예요. 그러면 ①번 지나고 ②번 지났으니까 ②번만 잡아 챙기면 구원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십자가 안에 뭘 하는가 하면, “이 앞에 있는 관객! 들어오지.”여기다가 집어넣어버린다고요. 집어넣는데 아무도 여기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건 제가 지어낸 예니까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다니엘 세친구가 자기들은 불 속에 안 들어가고 자기 친국 아는 사람 세 명이 우상 안 섬겼다고 느브갓네살한테 당해가지고 불 속에 들어갔다가 주님만나서 멀쩡하게 다시 왔다면, 다니엘 세 친구는 앉아서 뭐하겠습니까? 박수치겠지요. 그렇지요? 야! 저게 믿음이야. 그렇게 하면, 다니엘 세 친구는 무슨 생각이 부풀어 오르겠습니까? ‘나도 저런 믿음을 가져야지.’ 왜, 아까 처음에 모든 인간은 도 닦는 거기 때문에 저게 모델이 되는 거예요. ‘나도 저렇게 있으면 들어가야지.’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왕이 바뀌었어요. 왕이 바뀌어서 그 다음에 또 용광로 불붙여가지고 “어이, 아까 전에 했던 그거 했던 너 들어가.” 이렇게 할 때, 전번에 한 번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기는 구경 실컷 했잖아요. 그러면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못 들어간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왜냐 하면, 원래 하나님의 부활의 세계는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못 들어가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에요. 왜? 성령을 통해서만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 성령이 뭐냐 하면, 이미 죽었던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이미 죽었던 예수님의 영이 강제로 그 영이 오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안 들어 갈래야 안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들어가려고 비행기 타고 가면 예루살렘에 까지 지금 가야돼요? 지금. 그 때 있는 빌라도 다시 태어나야 되고, 가야바 제사장 다시 앉아서 재판 받아야 됩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왜 가만히 앉아있어도 되느냐 하면, 예배당 가는 게 아니에요. 기도원,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가만히 있으면 돼요. 왜? 성령은 바람이기 때문에.
여기서 요한복음에 중요한 테마가 있습니다. 바람이 불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정돼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바람이 왔을 때, 우리는 느껴져요. 혼자서 지 자리에서 도 닦아봐야 도 닦는 나만 계속 믿게 돼요. 나는 이 정도 도 닦았다. 나 이만큼 됐을까? 얼추하면 내가 주 기철목사쯤 됐지. 맨날 자기는 달라진 게 없어요. 왜냐 하면, 내가 어느 정도 달라졌느냐 하는 것을 누가 점검해야 되느냐 하면, 외부 감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시험문제내고, 자기가 시험치고, 채점을 누가 합니까? 본인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춤추고 노래하고 장단 맞추고 누가 다 하는 거예요? 자기가 다 해요. 모노드라마에요. 지가 연출하고 지가 주연배우고 지가 엑스트라 다하고 그렇게 해놓고 그 영화 잘됐다, 못 됐다 평가를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결국 뭐냐 하면, “날 좀 봐 주세요.” “내가 나 혼자 얼마나 몸부림치고 성화되기 위해서 노력하는지를 주위사람들의 여러분들의 관객 되시고 내가 벌인 내 스스로 벌인 이벤트와 쇼를 해주고 칭찬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둘 중에 객관식 질문하겠습니다. 우리는 용광로 속에 불 속에 들어가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는 직업도 그만두고 불길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여기에 불타는데 확 들어갑니다. 들어가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친구가 와가지고 나보고 흉을 볼 때, 우리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제일 친한 친구가 와가지고 네 흉볼 것이다. 성내지 말라.” 라는 말을 하고 갔어요. 그러면 성내지 말라, 하는 게 어렵습니까? 아니면 불 속에 들어가는 게 어렵습니까? 둘 중에 하나에요. 불 속에 들어가는 게 쉬워요. 그 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는 스스로 자살했잖아요. 마귀는 인간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뭐는 안돼요?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할 때 내가 화 안 낼 수 없고 잠을 이룰 수 없는 거예요. 새벽2시반에 깨이는 거예요. 결국 그것도 하나 못하면서 어딜 들어가요? 불 속에 들어간다고? 불 속에 들어가면 도 닦으면 그건 자기가 만든 출제하는 문제에요.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어떤 인간도 우리 힘으로 십자가 믿어서 우리 힘으로 부활되는 경우는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단독 범행이에요. 범행이라 하면 말이 안 되지만, 예수님께서 단독 일로 저질로 놓고 그렇게 일을 저질러 놓은 분이 우리가 그 앞에 코앞에 있으면서도 건너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해놓고 그리고 난 뒤에 그걸 데려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능력으로 주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독히 느끼는 거예요.
주의 은혜로 은혜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는 뭘 해야 됩니까? ‘나는 내가 행할 수 있는데,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유발시켜줘야 돼요. 계속해서. 우리는 항상 믿음에 대해서 자신만만하고 신앙생활 유지하는데 있어서 남한테 뒤지지 않는다는 그런 교만과 우월감에 사로잡혀야 돼요. 늘 사로잡혀 있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내 고정된 자리를 유지한다는 고집이 고집쟁이로서 우리한테 체험이 되고 윤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계속 바람만 부는 거예요. 성령의 바람이. 대전에 그냥 계속사시면서 대전에 바람 불거든요. 그러면 내가 하늘의 별을 따려고 선교사해서 아프리카 하는 그런 시나리오를 했는데, 2층에서 쿵쿵거릴 때, 아프리카 갈 것도 없어요. 2층이 쿵쿵거릴 때 올라가 불 질러 버려 마러. 그러한 갈등이 내가 주를 위해서 몸 바치겠습니다, 하는 그 문제보다 더 중요한 출제문제로 그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신학교 다닐 때, 주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철야하고, 전부다 거룩한 사람들 모였다고 생각했는데, 제일 첫 번 째 어디에 걸리느냐 하면, 시험 칠 때 왜 그리 컨닝 하는 사람이 많은지, 신학교 가겠다고 한 사람들이 왜 그리 컨닝하는 거예요. 나중에 제대로 성령 받고 바람 불어서 복음 알게 되면, 컨닝하는 것이 신학생으로서는 합당치 않다, 라는 것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인지를 깨닫고 더 기쁜 것은 나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내 주변에 큰 일하는 신학생만 배치해 놨다는 그것마저도 주님의 은혜로서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뭐든 게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내 주변에 컨닝하는 친구가 없었더라면 내 생각이 어떤 오류가 계속 유지되겠습니까? 적어도 한국교회는 썩어도 신학교만큼은 아직도, 내가 신학교에 오긴 참 잘했지, 역시 신학교만큼은 살아있네. 진짜로 성령이 살아있는 데라고 오해할 뻔했잖아요. 그 다음에 신학교 졸업하고 난 뒤에 목사 되지요. 목사가 되면 아직도 오해가 남아있어요. 적어도 한국은 썩어도 목사님만큼은 이 시대의 빛과 소금으로서 버틸 것이다. 라는 그런 오류가 남아 있지요. 그냥 지옥 갈사람 같으면 그냥 오류로 남겨두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갈 사람 같으면 남겨두지 않지요.
왜냐 하면, 십자가는 누가 합류돼 있습니까? 주일 낮에 한 핵심내용이지요. 십자가에서 누가 합류된다 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지은 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고 죄를 몇 번 지었다가 아니라 우리는 날 때부터 뭐다? 죄인으로 들어가거든요. 그럼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압니까?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사람만 비로소 눈에 뭐가 띕니까? 십자가가 눈에 띄는 거예요. 십자가가.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알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미안합니다.” 해요. 뭐가 미안한데? 미안하다는 말이 뭐냐 하면, 결국은 불경이지요. 주님을 내가 믿은 적이 없고 주님을 본받아 놓고 행하기만 한 행함의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그게. 부모한테 잘해주는 것이 그게 불교에요. 왜 그렇습니까? 부모한테 잘해주면 잘해 줄수록 부모가 내려준 은혜를 자기가 갚아 나간다는 의식을 갖기 때문에. 이것은 부모 은혜 속에서가 아니라 부모를 이미 타인으로 간주한 경우에만 부모의 은혜를 빚으로 여기고 갚아나갈 수 있는 겁니다. 이건 부모에 대한 효도가 아니고 부모를 채권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식이 채권자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뭡니까? 부모가 기대한대로 하지 않고 일부러 어긋나게 삐뚤어진 대로 가버릴 때, 부모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요? 내가 너를 보고 “실망했다.” 실망했다 할 때, “으쌰!” 드디어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사춘기 때, 서서히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부모 원대로 해주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자기 인생은 없거든요. 그리고 숨이 막혀 죽습니다. 숨이 막혀 죽어요. 부모한테는 이게 납득이 돼요. 부모가 보이고 실제 행동하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이 뭐라 합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 하거든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몰라요. 왜, 부활했다는 말을, 부활이란 어려운 말을 사용했지만, 아주 듣기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살아 있다.’ 이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살아있거든요. 그럼 살아 있으면 무엇이 난처해집니까? 누가 살아있어요? 가장 살아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내가 살아 있잖아요. 데카르트가 뭐라 했습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모든 걸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아무리 깨어나도 의심하지 못하는 그 마지막하나는 내가 의심하고 있으니까 이것이야 말로 내가 분명히 살아있는 증거가 아니고 뭐냐, 여기서 반박해 봐라, 이리 나오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그런데 데카르트가 치명적인 잘못이 있어요. 제가 거기에 대해서 반박해 볼게요. “데카르트 선생님, 눈을 한 번 감아보세요. 뭐가 보이지요?” 눈을 감아보세요. 누가 보입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지요.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 교회, 부모, 자식, 학교, 그리고 모든 대전시도 내가 마지막 영혼이 눈감는 순간이 언제지요?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가 죽었는데.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지어낸 하나님을 내가 살아있다는 용도로 필요하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그것도 주일 낮에 이야기했지요.
원주민이 있었는데, 탐험가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원주민이 듣기 소문에는 토속 춤을 잘 춘다고 하던데 한 번 춰보세요.” 하니까 쑥덕쑥덕하더니만 춰주는 거예요. “비러 그겁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이 그겁니다.” 사진 찍고, 동영상 찍고, 이거 고향에 가면 신문에 내겠습니다. 당신들 찾아오면 달러 내겠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촬영하고 간 다음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야만 춤을 춥니까?” 하니까 토인들이 하는 말이 “상대방이 요런 춤을 원하데요.” 상대방이 그런 춤을 원하니까 저 쪽에서 만들어낸 거예요.
사람들이 원하는 하나님, 예수, 성령을 저쪽에서 교회에서 만들어 내줘야 돈이 떨어지거든요. 사람들은 이미 신을 알고 있거든요. 아는 신을 꽃다발로 만들면 돼요.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신만 아는 게 아니고 신을 접근하는 방법, 신을 섬기는 방법, 신에게 복 받는 방법도 누가 알고 있어요? 이미 성경 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흔히 유명한 말로 ‘기복신앙’이라 하는 겁니다.
기복신앙을 다른 말로 하면, 정성이 지극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하늘도 감동한다. 지성이면 감천이거든요. 그래서 교회 모든 교리고 뭐고 다 벗겨내면 그냥 교인하나 붙들어 와가지고 “할머니, 어떻게 왔어요?” 하면 구구한 성경이야기해도 다 걷어내면 남는 게 뭐냐, 하나님이 그것도 살아있다면, 우리가 정성하게 되면 다 복 받겠습니다. 이런 거거든요.
그러면 십자가에 죄인의 모습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고 “나도 신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라는 자기의 의로운 자로서 뭐냐 하면, 예수와 협상, 흥정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 어디까지 해드리면 됩니까?” “십일조? 주일성수? 어디까지 해야 됩니까?” 매일 이거 물으면서 왔고, 목사는 그러한 고객들의 요구에 부축해서 “이거 하시면 복 받습니다.”하고 오후쯤 되면 간증설교해서 그거해서 복 받은 사람 세워가지고 장로로 유명한 사람해가지고 “야, 저 사람이 저렇게 해서 암 낫구나!” “나도 저렇게 해서 암 낫겠다.” 그래서 그게 하나의 교인이 소통이 되는 거예요. 요새 소통이 유명하잖아요.
거기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를 위해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눈치도 없이 코치도 없이 이야기해버리면 그 많은 수천 명이 뭐라 합니까? “우리가 죄지은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의 초보고 그것은 처음 발판이고 그 이야기하지마시고 새 생명이야기 합시다.” “부활이 있는데, 당신은 부활이야기는 안하고 한물지나간 이야기를 왜 합니까?” 라는 식으로 이야기할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뭘 오해했습니까? “우리가 죄지은 것을 우리가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죄지은 것을 자기가 안다는 그 죄는 지가 해결할 수 있는, 반성해서 해결할 수 있는, 조작된 죄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에요.
여러분, 아무리 죄를 지어도 반성해버리면 그 죄는 죄 아닌 게 돼요. 오히려 자기의 반성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그냥 자기 옹호하기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을 모든 인간이 결국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고, 믿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진짜 하나님 말고 이미 다른 하나님을 하나씩 갖고 있다는 거예요. 갖고 있어서 그 가진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억울하게 피해자로해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셨다는 말은 뭐냐 하면, 니 자신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항상 뭐냐 하면, 바로 피언약이거든요. 피언약이 뭡니까? 행하라는 거예요? 아니지요. 이미 벌어졌다는 이야기예요. 피언약이라면 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아이고, 죄송합니다. 몇 푼 더 드리면 되겠습니까?” “두 번 다시 피는 나 잠자는 시간에 오지마세요.” 이렇게 할 타협할 게 아니에요.
히브리서10장에 보면, 옛날 모세 때는 율법가지고 적용했지만, 마지막 때는 뭐냐 하면, 그 피언약가지고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이 피언약이 없은즉 뭐가 없다? 죄 사함이 없다 하거든요. 구약 옛날부터 계속 피 제사한 것은 구약이 재미있는 게, 참 중요한 게, 이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피 흘린 제사를 드리고 피를 내면서도 그 사람들은 뭘 주목하는가 하면, “하나님, 보고 있습니까? 제가 지금 제사 잘 드리고 있습니다.” 이걸 자꾸 보라는 거예요. 어린양의 피를 내면서도 피 내는데 수고한 자기 행함 있잖아요. 이걸 자꾸 부각하는 거예요. 하나의 이데 오르기라 하지요.
백성들에게 “나는 제사장, 너희들은 백성들, 나의 제사장말을 들어야 돼!” “봐라, 너희들 죄를 위해서 내가 제사 드리잖아.”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저자가 사도냐, 아니냐, 문제 있지만 일단 디모데 이야기하는 거 봐서는 사도 바울로 본다면 히브리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렇다면 왜 자꾸 제사장이 죽지? 제사장이 다수, 다수가 뭔 뜻입니까? 하나가 여러 명이라 했지요. 왜 제사장이 죽고, 다수였지? 하는 것은 반대편에 뭐를 하나 무슨 진리를 하나 딱 갖추어놨기 때문에 다수라 이야기했습니까? 제사장이 다수다, 라고 이야기한 말은 반대편에 뭐가 포진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영원한 한 분을 강조하는 거예요. 그 한 분에 우리가 끼어 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지요. 한 분 앞에서 우리가 기념촬영하면 안돼요. 안 되지요? 그런데 제사장은 기념촬영 한 거예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 이뤘습니다.” 라고 하면서 촬칵, 촬칵 기념촬영 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잡아끌어 당기지요. 왜? 뭐만 남기기위해서? 구약에서는 어린양만 남기기 위해서. “네가 제사 드리는 너도 죽어야 돼!“ 왜, 속죄 죄가 제사장에게는 외로 되는 것이 아니고 속죄라는 것이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에게도 속죄 죄가 포함되기 때문에 모든 제사에는 제일 먼저 뭐가 들어가는가 하면, 번제이전에 속죄 죄, 그 다음에 속건 죄, 그 다음에 번제, 화목제 들어갑니다. 그렇게 돼 있어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도 바울이 외치는 것은 뭐냐, 오직 누구만 바라봐라? 한 분만 바라봐라 이 말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한 분만 바라봐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한 분만 바라보는 누구를 바라봐요? 그걸 바라보고 있는 누굴 바라봅니까? 나를 바라보게 돼 있어요. 이걸 가지고 이렇게 합니다. 육이니까 여기 바람같이 누가 불어야 됩니까? 성령이 와야 되겠지요. 성령이 바람같이 불어야 되지요. 바람같이 성령이 불게 되면, 마지막 언약, 궁극적 언약, 최후의 언약이 뭡니까? 피언약이지요. 언약이니까 언약 빼면 피만 남지요. 우리 피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이 피언약이니까 옛날 같으면 제사니까, 성령께서 피를 가지고 십자가 피를 가지고 드리데 버리면 우리는 육이 영이 되는 게 아니고 육이 육으로서 발각이 되면서 고 현장이 뭐로 바뀌는가 하면, 영의 사람으로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워치만 리가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워치만 리를 아십니까? 지방 교회. 그 사람은 자기를 관람석에 둡니다. 두고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자아를 끄집어내요. 우리는 영화 관람석에 앉아 있고 거기서 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끄집어내면서 우리를 육이라고 만들어 놓는 거예요. 육이라 해놓고 여기에 성령이 오게 되고,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가 육이 뭐로 바뀐다? 영으로 바뀐다. 라는 이 사실을 그 다음에 우리와 일치시킵니다.
①번 내가 육이다. ②번 성령이 온다. ③번 그 영이 바로 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지금 무슨 짓하고 있는 겁니까? 예수 빙자해서 뭐 닦는 거예요? 도 닦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해서 예수 덕분에 성령 덕분에 나는 이제 이런 새사람 되었다. 결국 증거 하는 것이 ‘나, 새 사람 되었다.’ 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이건 모든 인간들이, 교회 안가도 특히 절에 가면 많아요. 절도 교회도 안 가는 사람도 이거 다 있습니다.
절도 교회도 안가는 대신 거지에게 동양을 해줌으로 말미암아 그 거지동양을 그 날 밤에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왜 이리 착하지? 내가 언제부터 착했지?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헤겔이 말하는 ‘상호인정’이라 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인정 안 해주면 세상에 누가 나를 인정해 줄까? 노래 가사에도 있어요. 여러분도 여러분을 사랑해 주지 않으면 누가 여러분들을 사랑해 주겠어요? 자살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노래까지 나왔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 노래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박 종호 테너가 부르고 온 천지에 젊은 애들이 거기에 감동의 전율이 흐릅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사랑받기 위해서. “그렇다. 내가 원래 있었던 잠재적인 나의 욕망은 그거였다.” 결국 나의 욕망은 뭡니까? “제발 좋은 분이여, 내가 나를 사랑한 만큼이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세요. 성경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십자가로 데려가니까 우리는 관람석에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도리어 내가 관람할 내 관람석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습니다. 지금 계속 부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부활 이야기할 수 없어요. 소돔과 고모라의 성에서 롯이 있잖아요.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이미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롯이 이미 그 안에 있으면서 무슨 소식이 들려왔습니까? 유황불로 불살라진다는 것이 왔지요. 그런데 거기에 사위가 2명 있었잖아요. 사위는 농담으로 여겼지요. 누가 합리적이고, 누가 똑똑한 사람입니까? 사위지요. 왜 사위가 똑똑한 사람인가 하면, 사람의 기억이라 하는 것은 이미 경험한 것에서 줄여서 기억하게 돼있어요. 이미 경험한 거.
사람에게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당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을 고백해 보세요. 이것은 사람보고 미치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형사가 어떤 범인을 잡았어요. 취조를 하는데 형사는 이 범인이 나쁜 인간이라고 이미 간주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니는 그 가게에 왜 들어갔느냐?” 그 범인이 하는 말이 “불쌍한 내 동생이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럼 왜 돈을 훔쳤어?” “돈을 훔친 것이 아니고 주인이 훔친 것을 받으라고 했는데....” 하니까 그 형사가 나중에 뭐라고 합니까? 너무 범인이 불쌍해서 나쁜 남자, 나쁜 사람하며 때리잖아요. 개그콘서트에 나와요. 결국 뭐예요? 그 죄진 사람과 만남을 통해서 누구의 세상 판이 졸지에 바뀝니까? 형사의 기존 선입관이 어떻게 됩니까? 바뀌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성령을 통해서 누구를 이야기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은 내가 요런 식으로 하면 구원받겠다, 하는 사고방식을 완전히 어떻게 합니까? 판을 바꾸어 놓는 거죠. 내가 이 정도 죄인이어서 이 정도 반성하면, 반성했다고 아마 칭찬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가 앞으로 지어야 될 죄까지 몽땅 다 짓고 난 뒤에 우리가 미처 모른 죄까지 들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그 앞에서 할 말이 있어요? 없어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할 말이 없다는 말은 구원이 됐다는 말입니까? 안 됐다는 말입니까? 이미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하는 거예요. 이미 구원이 됐기 때문에.
그런데 구원이 안 된 사람은 구원이 안 됐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계속해서 예수를 본받아야 돼요. 왜? 내가 되고 싶은 예수 믿음이라 하는 이미지가 따로 있기 때문에, 또 교회 목사들이 그건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테레사 수녀나 주 기철 정도 돼야 예수 믿는 것이라 하면서 따라 붙이는 거예요.
우리의 구원은 단독 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요. 구원은 우리가 안 되는 겁니다. 애써도 안 되는 거예요. 안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냥 은혜로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내가 시도하는 구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구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하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미 구원이 되었음만 구원으로 간주해요. 구원받도록 노력해봐라, 없습니다. 아직 구원의 때가 남아있다는 히브리서4장에 있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앞으로도 내가 다 한다는 이야기에요. 어떤 근거에서? 고린도후서1장22절에 의하면 보증금이 와있습니다. 아파트 보증금 주면 그 아파트 누구 겁니까? 보증금 준 사람이 들어가지요. 그 보증금을 두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의 인 맞음입니다. 어려운 말인데 성령에 인 맞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 있어요. 웃기지도 않아요. 성령은 우리 손아귀에 쥐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냥 찾아오면 그게 인 맞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죽었어, 라는 이미를 집어넣으세요. “이미 너는 죽었어.” 그 다음에 부활했다는 말은 “이미 너가 살았어.” 이런 뜻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는가 하면, 에베소서 2장5절에 나오지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살리셨고, 과거완료가 되지요. 그 다음에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받은 것이라, 되어 있지요. 왜 우리는 아직까지 천국이 멀었는데 이렇게 간증합니까? 그게 뭐냐 하면 바로, 8절에 보세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가 뭘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 은혜를 받았지요. 그러면 은혜가 한 번 오고 그 다음부터는 안 오고하는 은혜가 있습니까? 성령의 인치심이 중도금 안줬다고 계약 포기합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십자가 이야기 끄집어낸다는 말은 이미 너는 아무리 잘난 척해도 나는 너를 이미 나와 함께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살고 안 살고는 누구 소관이다? 예수님의 소관이니까 결국 우리가 사는 대전바닥은 뭐냐, 다니엘 세친구가 사는 용광로 속입니다. 불꽃 속입니다. 자기가 들어오고 싶다고 손들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느브갓네살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이건 어쩔 수없이 들어와야 돼요. 우리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4번째 사나이가 계셔가지고 우리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 분 때문에 룰루랄라 춤추고 있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4명이 미쳤다고 이야기하고.
우리의 선입관이라는 게 십자가 복음을 방해하는 쪽으로 마귀로부터 장난질당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 하는 것은 사도바울의 복음의 전부에요. 기도해서 얼마나 암에서 몇 일만에 낫습니까? 기도해서 십일조해서 얼마나 부자 됐습니까? 그런 게 설교시간에 왜 끼어듭니까? 미끼입니까? 할인마트에서 하는 미끼상품인가요? 왜 그런 소리를 합니까? 그런 소리하니까 사람들이 오는 거예요. 죽을 영혼을 살리면 안돼요. 죽을 영혼은 죽어줘야 되지, 지가 교회가 뭔데 죽을 영혼을 왜 살립니까? 그렇게 되면 살 영혼을 죽여 버려요. 그 교회에서.
“여러분, 성령이 임해서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성령이 오신 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한다면 과연 성령이 임했는지, 지가 뭔가 노림수 가지고 오셨는지, 제가 이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제 경험상 많이 나갑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참다 참다 못해서 중간에 욕하고 나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질문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달려드는 사람도 있어요. 무엇이 그들을 화나게 했던가요? 그래서 설교를 녹음하는 거예요. 혹시 무엇이 그 사람을 화나게 했던가, 딱 들어보면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고, 어떤 헌금을 하고, 선교사가 어떤 선교를 하던 간에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그것마저 죄입니다. 이게 화나는 이유는 자기가 이만큼 훌륭합니다, 를 인정받기 위해서 교회에 방문했는데 얼마나 감사하게도 헌금까지 준비해서 왔는데 수십년 믿는 그 신앙적인 연조로 생각해서 십일조까지 할 생각으로 왔는데 이 시대에 십일조하는 사람 없거든요. 지금 그러한 나의 신앙의 수십년 믿은 연조, 거기다가 모태의 신앙, 알거 다 아는 사람인데, 특히 장로 아들이고 목사 딸인데, 거기다가 주변에 집안의 전부다 목사가 3명이고 최소한 제일 못한 게 장립집사인데, 거기다가 여러분 지금 살아온 게 전부다 죄입니다. 라고 할 때, 화 안 날수 없습니다. 이 놈의 교회 잘되는가 보자하고 나가거든요. 교회가 안 돼야 돼요.
그래야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목회자는 망해야 그 순간에 비로소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비로소 보인다. 어디에 근거해서? 스데반 집사, 12사도들, 이 사람들 교회해서 1년 해서 얼마 했습니까? 스데반집사 연봉 얼마 받았지요? 스데반 집사가 논문 표절했습니까? 박사학위 논문. 총회장 했어요? 투표해서 승리했습니까?
도대체 오늘날 교인들이 뭐를 모델로 삼아요? 스데반집사를 모델로 삼습니까? 또 스데반집사를 모델로 삼지 마세요. 삼으면 자기 의가 돼요. 그냥 대전바닥에서 장사하면서 사세요. 왜냐 하면, 시집을 갔다 안 갔다 관계없어요. 그냥 사시게 되면 내가 왜 나 대신 십자가 못 박아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주께서 늘 상 밀물처럼 밀려와서 잠시 깨닫고 썰물처럼 쓸려가고 다시 내 자랑하고 내 사랑에 완전히 도취될 때, 다시 밀물처럼 밀려와서 니가 또 신앙 쪽에서 자랑했구나, 선교한다고 자랑했지, 전도한다고 자랑했지, 헌금한다고 자랑했지, 라고 또 깨닫게 하셔서 주님이 이왕 시작한 거 주님이 끝내도록 우리는 주의 십자가 앞에 늘 작아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 모습이 온유와 양성과 자비와 형제우애입니다. 지가 그것을 이루는 게 아니고 십자가만 봤을 뿐인데 나는 뭘 해도 죄 있는 것을 알게 될 뿐인데, 주변에서 그렇게 봐주시는 거예요.
니는 오직 십자가밖에 모르고 니는 맨날 뭘 해도 잘해도 우리보고 잘한 짓인데 니는 내가 이거 내 자랑하려고 한 짓이라고 스스로 과도하게 왜 그리하느냐는 오해를 받지요. 마지막 이거만 하고 쉽시다. 내가 8년 동안 주의 애를 키웠습니다. 라든지 내가 이번에 이 여자하고 결혼한 것은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했습니다. 있잖아요. 기도의 응답으로 당신 같은 남자 만났습니다. 그거 억지로 끊지 마세요. 왜냐 하면 그 순간에 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내뱉으세요. 내 뱉으시고 기다려보세요. 그 전에 기도할 때 미처 몰랐던 내 자랑질하기 위해서 기도해 왔던 것이 기도가 누적이 돼 있었던 겁니다.
내 기도의 누적이 결국 내 자랑질로 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된 내가 원인 제공자로서, 가해자로서 지금 이 여자와 결혼한 거예요. 그래서 가해자라는 입장에서 결혼하시면 아주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이 이야기 듣고 헤어지지 마시고. 내가 이 여자를 만난 것은 내가 미처 몰랐던 얼마나 내 위주로 나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이 여자를 이용하고 있는 나쁜 놈인가를 살아가면서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49강 / 행 18장 (지정된 백성) 130528 (0) | 2013.05.29 |
---|---|
48강 / 행 18장 1절(말씀에 붙잡혀) / 130425 (0) | 2013.04.25 |
사도행전 46강 / 행17장30절(사망이 원수) / 130228 (0) | 2013.03.01 |
사도행전 45강 / 행 17:26 / 130131 (0) | 2013.02.01 |
사도행전44강 / 행 17:24 / 121227 (0) | 2012.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