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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45강 / 행 17:26 / 130131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45강 / 행 17:26 / 130131

정인순 2013. 2. 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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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대전130131a-행17장25(한 혈통)45강-이 근호 목사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게 옳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습니까? 방금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대부분 서민들은 자기 집안 일, 가정 일, 직장 일, 그 제한된 것만 신경 쓰잖아요.

그런데 성경 사도행전 17장 이야기는 범위가 갑자기 넓어져 버렸죠?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대상의 범위가 넓어져 버리면 사람은 지레 포기해버립니다. ‘아이구, 뭐, 우리 집이나 간수하지 뭐, 세상을 누가 만들건, 그런 건 애 때문에도 골치 아픈데, 군에 갔는데 면회를 언제 가냐 그게 중요하지, 온 천지를 누가 만들고 국가가 어떻게 생기고 그걸 내가 신경 쓴다고 국가가 달라질 것도 없고, 이렇게 돼 버린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도바울이 이거 하는 것은 공부하란 뜻입니까? 그게 아니에요. 네 일만 신경 쓰지 말고 세상 것도 두루 알아라, 그런 뜻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여기 25절 보면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이렇게 돼 있는데, 사람이 자기 집안 일, 또 자기 하는 일, 여기에 몰두하면 특히 20대나 30대 젊은 사람들은 코앞에 있는 것밖에 모르잖아요. 이럴 때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계 전체를 알라는 말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어떤 분이 지금 너희 일에 종사하는 너를 호흡을 주시고 지금 살려내고 있다.’ 라는 겁니다.

온 천지를 다 알아서 그래서 하나님 증명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이고, 하나님 있는데 왜 힘들어요?’ 온 천지 역사와 국가관, 모든 지식과 지혜를 다 알아야 겨우 하나님에 대해서 보이는 겁니까? 그게 어느 세월에 다 보입니까? 그러다가 교통사고 나서 죽어버리면 하나님 알기도 전에, 하나님 모르는 채 주님 만나면, ‘공부 하려는데 하나님 알기 전에 교통사고 일으켜서 내가 일찍 공부 못했습니다.’ 이게 핑계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죠.

이걸 이렇게 표현해요. 자연에 감정을 싣는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어요. 자연이니까, 나로 호에 감정을 묻는다. 질문한다. 이런 말도 되겠죠. 나로 호라 하는 것은 쇠붙이나 금속으로 돼 있잖아요. ‘나로 호야 그때 서 있으니까 기분이 어때?’ 이건 뭡니까? 마치 나로 호를 죽은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 물질로 보지 않고 인간이 감정이 있는 어떤 대상처럼 나로 호도 뭔가 감정을 주입해서 묻는 질문이잖아요. ‘어때 떨리지? 떨리지? 발사하니까 떨리지? 떨려.’ 이러면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카메라야, 니 기분 어때?’ 말이 안 되거든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와 닮은 같은 종류의 인간에게만 감정이 있어요. 또 감정을 구태여 찾는다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 요 정도 있죠. 그런데 돌멩이라든지 별, 달, 이런 것은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이 옳을까요? 하는 것을 사도바울이 묻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너만 감정이 있고, 너만 슬펐다 울었다 하고, 저 바다는, 저 강은, 저 나무는 아무 감정이 없고, 인간들끼리만 그렇게 느끼며 사는데 그게 과연 그렇게 생각해서  결국 니가 내린 결론이 뭐냐, 그게 뭐냐 하면 내 좋은 대로 사는 것이 곧 잘사는 것이고, 진리대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인간은 그런 식으로 정립해요. 왜냐 하면 자기 외에 아무도 자기를 같은 인간적으로 도와주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이 감정 없다는 자연에다가 감정을 불어넣어줍니다. 감정을 불어넣어주면 사람들에게 무엇이 되느냐 하면 파도가 친다. 20대 젊은 애가 밖에 나가서 친구와 농구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떨어졌을 때 ‘아이쿠, 내가 농구 하려고 하는데 비가 오네.’ 이럴 수 있잖아요. ‘농구 하려고 하면 비가 온다.’ 그렇게 20대가 이야기할 때 뭐를 빠뜨렸느냐 하면, 예수님을 경유하는 그 과정, 그 회로를 빠트린 셈이 돼요.

‘날씨 잘 들어봐, 나 농구할 때는 비 오지 마.’ 미리 본인이 짐작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농구하려고 하니까 비가 오더란 말이죠. ‘에이, 간만에 농구하려고 하는데 비가 왜 오지? 아이, 날씨 보니 짜증나.’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 사람은, 그 20대는 성폭행 범이나 살인범이 아니에요. 아닌데 뭔가 빠트리고 있는 거예요. 뭘 빠트리고 있느냐 하면 자기를 포함해서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로부터 와서 주께서 감정적으로 다룬다는 사실을 이걸 누락해 버린 겁니다.

세상 역사를 다 알고 세상 과학을 알아서 하나님 찾아가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농구장에서 농구하고 싶다는 작은 코앞에 있는 자기 일 하면서도 빠트리고 사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시겠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겠다는데 누가 간섭해?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는 그것이 나는 제대로 사는 것이고 바르게 사는 것이고 누가 뭐래도 난 내 인생 행복한 거야.‘라고 할 때 빠뜨린 게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빠트린 게 있으면 괜찮은데, 이 빠트린 것 때문에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서면 심판을 받고 지옥 가게 돼 있습니다.

그걸 미리 이야기할게요. 30절에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아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공의로 그 뒤에 나오는 단어가 뭡니까? 심판! 심판할 날이 이미 작정 난 거예요. 심판 날이 결정돼 있는 겁니다.

재래시장에 고무줄 파는 것 봤죠? 노란 고무줄, 집에서 애들 속옷이나 수리할 때 하잖아요. 고무줄 팔 때 고무줄 여기(끝)를 묶고 여자들 머리처럼 늘어뜨리죠. 고무줄이 이렇게 100가닥이 되더라도 어디서 묶입니까? 결국 한 곳에 묶이는 곳이 있죠. 세상이 어떻게 각 나라가 어떻게 살던 간에 이것이 어디로 묶인다? 마지막 심판 날에 다 묶이게 돼 있단 말이죠. 일종의 우주론으로 빅뱅과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묶이니까 사람들은 세월이 가게 되면 한 쪽으로 오겠지 생각하는데 이것이 그냥 사실이 아니고 심판이 아니고 감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여기 묶이는데. 심판이란 말이 무슨 의미죠? 화난다는 거죠. 화난다는 것은 뭡니까? 기쁘다. 즐겁다. 화난다. 이게 무슨 요소입니까? 감정적 요소 아닙니까? 심판할 때 아무 감정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고 화나서 심판하시는 거예요.


그 감정적인 요소가 심판 날 오기 전에 이미 우주 대 자연에 이 감정이 퍼져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누락하고 빠트리고 산다 이 말이죠. ‘아유, 오랜만에 농구하려고 하는데 또 비가 오는 거야?’ 무심코 이야기하는 이걸 누가 나쁜 짓도 아니고 그냥 일상의 생활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그걸 빠트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규정된 심판의 날짜를 사람들이 알 수 있습니까? 언제 2012년도 12월 25일 날 온다 해놓고 오지도 않고, 마지막 때 오지도 않고 마야 달력에도 온다 했는데…, 마야는 기원전 3세기부터인가해서 서기 15세기까지의 현재 멕시코 근처에서 발달한 고대 문명 거대제국예요. 그런데 서기 9세기 때 가장 번성했는데 그때 그들이 캘린더를 만들었어요. 그 캘린더가 굉장히 정확해서 지금 1년 계산하는 걸 보면 23초 틀리는가, 아주 정확했어요. 그들이 2012년도 12월 21일인가 22일 날 지구가 멸망한다 해서 퍼져서 중국에서도 난리 나고요. 집 팔고 논 팔고 했는데 우리는 동지라고 팥죽 먹으려고 했는데 지구 멸망하는 건 모르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마지막 때를 미리 대비하려면 그 마지막 때 정보를 미리 알아채야 돼요. 이제 며칠 남았다. 이제 며칠 남았다. 이걸 알아서 미리 알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심판 날이 몇 일 날이기 때문에, 알았어, 내가 알아서 버티고 살자. 이렇게 돼야 되는데 지금 이 심판 날을 모르잖아요? 심판 날도 모를뿐더러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어디에 화내는지도 사람들은 몰라요. 모르니까 사람들은 이걸 모르는 상태에서는 언제 온다는 것이 아무 자기 변화에 도움이 안 돼요. 언젠가 심판 날이 온다는 것 때문에, 늘 긴장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그건 정신병자 아니면 없어요. 스피노자는 내일 종말이 올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오라 해’ 너는 너 할 일 하고 나는 나 할 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미리 안다면 그때는 하나님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고 내가 당할 일이기 때문에 내 일이 되겠죠. 요 심판의 고무줄 매듭을, 하나님께서 심판 날짜를 알려주면 참 좋겠는데 이걸 안 알려주고 심판 날이 정해져 버렸으니까 이건 하나님의 직무유기죠. 우리보고 뭔가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 말이죠. 상세하게 내용을 심판 날이 언제 오고 그때 이거 준비하고 이거 준비하고 캠핑 갈 준비하고 천당 갈 때 주민등록증 맡기고, 후레시 챙겨라, 구체적이면 그걸 안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제사를 지냈잖아요? 이게 참 어려운 게 제사 드리기 전에 ‘제사는 이렇게 드리면 받아줄게.’라는 게 사전에 있었다면 가인이 구태여 그걸 거부할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제사 드리고 난 뒤에 ‘그건 옳은 제사가 아니야.’라 해버리면 그러면 진작 이야기해야지, 아니 하나님, 신앙생활 하란 말입니까? 하지 말란 말 이예요? 꼭 못 돼 먹은 사장님 같아요. 이렇게 서류가 올라오게 되면 ‘요건 요렇게 고치고 요건 이렇게 하면 한번 봐줄게.‘ 해야 되는데 그냥 ’결재 가져와.‘ 아니면 ’다시 해와‘ 다시 어떻게? 다시 어떻게 해? 다시해가면 ’이건 아니야‘ 다시 어떻게 하래?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문제예요.

이 문제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납득이 되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힌트를 줬는데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감정적이잖아요? 사도바울은 이 감정적인 것이 마지막 때, ‘마지막 때 심판 하는지 우리가 마지막 때도 안 됐는데 하나님이 어떤 감정인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알아야 대비를 하죠.‘ 이렇게 핑계를 못 대기 위해서 요 마지막 심판 날의 하나님의 감정을 심판한다는 감정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사도바울이 율법 중의 대장 아닙니까? 율법으로 구원받으려고 시도한 사람 이예요. 사도바울은 심판 날을 믿은 사람 이예요. 그런데 심판 날과 현재 자기 위치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율법이 레일처럼 깔렸다고 보는 겁니다. 저는 안 가봤습니다만 문경 폐광에 가면 유원지가 있는데 남자는 만원 주면 자전거 밟고 레일 타는 게 있어서 레일 타고 죽 가면 재밌는 체험이 되는 거예요. 그냥 기차 타는 것보다 레일을 깔아놨잖아요. 자전거를 타버리면 자기가 밟은 만큼 레일이 진행하니까 그 속도감을 만끽할 수 있어 재밌는 겁니다.

사도바울 이전에 사울이었을 때 율법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즐거움이 있어요. 뭐냐 하면 자기가 밟은 만큼 속도를 내면서 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회사 일이 바빠서 말씀을 좀 못 지켰다. 기도도 30분 하는데 25분에 끊었고 하루에 성경 4장 보는데 워낙 바빠서 2장 밖에 못 봤다 하면, 레일 속도가 적게 간 거예요. 자기 관리가 자기가 측정 가능한 그러한 것이 가능하려면 중간에 뭐가 깔려야 되느냐 하면 ‘하라, 하지 마라’가 자기 밑바닥에 깔려있을 때는 사람이 자기 신앙은 자기가 관리 하에 있는 거예요. 이게 좋은 거예요. 이게 사람들이 맘에 드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게 맘에 든다니까요. 당신이 처음에 교회 올 때 술, 담배 못 끊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한 달 뒤에 술, 담배 끊었을 때 당신은 레일을 밟은 거예요. 점점 더 술, 담배 하지 말라는 레일을, 율법을 거쳐서 점점 더 구원에 그만큼 가까이 간 겁니다. 가까이 갔는데 문경 폐광 레일 유원지에서 가장(저희 인간들끼리) 가까이 갔다고 부러움을 사는 그 파가 무슨 파죠? 바리새인파입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바리새인의 그러한 전통이 아직도 유대교에 있는데 제가 언젠가 설교 시간에 그런 예를 죽 들었습니다. 하시딤이라 해서 마카비 전쟁 때 협력했던 군사들, 거기서 두 파가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 파고 하나는 쿰란 공동체, 세상을 격리해서 수도생활 하는, 나중에 이 두 파가 나눠져요. 바리새인이 하시딤 출신인데, 지금도 그 하시딤 전통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있다 이 말이죠. 안식일 날 어떻게 지키는가를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가격은 물어볼 수 있어도 사지는 말고, 택배는 받아도 돈은 치러서는 안 되는 그 정도로.

왜 그렇게? 특히 변화시키는 일은 하지 마라. 휴지가 떨어지면 주울 수는 있지만 청소할 때 쓸지는 말아라.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그 사람들에게 물으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우리가 이걸 지켜서 사실 지킨다는 뜻이 아니고, 이 정신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예요. 오늘날 목사들이 교인들한테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은 또 매일같이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이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그 작당들이 하던 그 짓을 지금도 목사 입에서 나왔다 하면 그게 나와요. ‘여러분, 십일조가 중요한 게 아니고 정신이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주일 날 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건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고 주일 날 섬기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야기를 바리새인들이 다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또 이런 생각하면 또 피가 마르죠. 참 가슴 아파요. 정말 속아 넘어가도 너~무 속아 넘어가요. 바리새인들이 레일을 앞장섰잖아요. 그러면 뒤 후발 주자가 무슨 생각하는 걸, 그들이 이미 경험하고 앞장선 사람 이예요. 그냥 앞장선 게 아니고. 도사들이예요. ‘너 나처럼 되려면 멀었어.’ 이 한마디로 우리는 ‘엄메 기죽어.’ 하고 다 기죽어 버려요. 뭐 교수랍시고 장로 됐다.‘ 목사가 그냥 안 둡니다. ’당신이 아무리 대학교수 박사라도 나 목사만큼 은혜 받고 기도 발 되려면 아직 멀었어.‘ 이 한마디에 게임 오버. 끝나버리죠.

그런데 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구냐, 그게 바로 사울이었던 사람 이예요. 그러니까 이 고무줄 다시 봅시다. 고무줄이 죽 있는데 전부 다 고무줄이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심판을 믿죠. 다윗의 자손이 심판한다. 구약 성경을 믿으니까. 그때까지는 뭐가 깔렸다? 레일이 깔려있으니까 레일이 깔리면 우수 직원들, 내신 성적의 등급을 매겼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미리 와버린 거예요. 미리 와버리니까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지가 언제 못 박혔는데? 못을 구경도 못 했어요.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은 일회성입니다. 예수님이 또 십자가 지고 또 십자가 지고, 그렇지 않아요. 이걸 반복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이십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 구경도 못했어요. 그런데 ‘저는 십자가 졌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십자가 현장에 없어도 같이 십자가 질 수 있도록 조치를 내린 것이 성령입니다. 왜냐 하면 성령은 십자가 졌었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주신 성령이기 때문에 이게 십자가 영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십자가를 모른다 했어요. 사람들이 여기서 또 오해하고 있어요. ‘나 십자가 잘 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로마 군병한테 당해서 죽었잖아.’ 그건 역사적인 사건 이야기고, 십자가의 본 취지와 관계없습니다. 십자가의 본 취지는 항상 은닉돼 있고 감춰져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이순신 장군은 죽을 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했다. 그 이야기야 초등학교 애들도 다 아는데 위인전 보면 다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죽을 때 이순신 감정을 누가 압니까? 이순신 부인도 모르고요. 아들도 모르고요. 이순신 본인밖에 몰라요. 그 본인밖에 모르는 것을 예수님 십자가 진 본인밖에 모르는 것을 예수님만 안다면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본인만 아는 그 아버지와의 심정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거기다 집어넣어 버렸을 때, 아!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는 자기 죄 때문이 아니고 자기가 구원해내야 될 사람의 죄를 아픔 속에서 십자가 지셨구나.’ 그렇다면 구원할 사람의 죄라는 게? 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바로, 나도 미처 모르는 내 죄를 위해서 주께서는 미리 조치로서 죄 알기 이전부터 이미 죄 씻는 조치부터 먼저 줬다 이 말이죠.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있다. 그러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그는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여자예요. 구원받은 여자인데 이 땅에 살면서 간통을 하게 하신 이유가 간통 해놓고 용서함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된 자는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감정을 같이 헤아릴 수 있도록 초대받은 거예요. 이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뭘 하기 이전에 내가 입을 떼고 발걸음을 떼기 이전에 미리 발걸음을 다 세시고 머리카락을 몇 개 빠지는지를 알고 계시는 거예요. 참새 운명은 참새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아까 참새는 감정이 없다 했는데 참새를 만드신 하나님은 감정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참새를 보면서 참새 만드신 분의 감정을 참새를 보고 알아챌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를 통해서 코끼리를 왜 만들었고 코스모스를 왜 만들었고 참새를 왜 만들었는가가 다 튀어나오는 겁니다. 아픔 이예요. 피조물이 썩어지는 아픔을 가지고 주께서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성경 해석한다는 것은 모든 성경해석 하는데서는 예수님의 자기 아픔을 집어넣어서 성경해석을 하시겠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문경에 레일을 깔아서 자기 잘난 맛에 가는 거예요. ‘내가 좀 바빠서 소홀했지만 내일 한꺼번에 밟아버리면 속도 팍팍 나서 저 앞에 가는 바리새인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실제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의 조절을 본인이 하는 거예요. ‘착한 일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태만해도…’ 워낙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잔고가 많으니까, 좀 나쁜 짓해도 거기서 빼서 씻어주면 되거든요. 또 어쩌다 보니까 나쁜 짓 했다 싶으면 바짝 사회봉사 200시간해서 바짝 자숙하게 되면 죄 진 것도 이렇게 다 희석이 된다. 그게 이미 선악과 따먹고 죽은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공통점입니다.

제가 성경을 같이 보면서 이런 거, 저런 거 다 끄집어내려고 하니까 속이 뒤집어집니다. 정말 어디서부터 틀렸다는 게 아니라 맞는 게 없으니까 이걸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문제가 아니고 이건 엉터리라도 너~무 엉터립니다. 한국교회 전부 다가 너무 엉터리예요.

제가 오늘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렸잖아요. 자기가 왜 성령의 열매를 소지하려고 하느냐 말이죠. 우린 자랑할 것은 예수님만 자랑하면 되는데 자기 성령의 열매를 자랑하게 되면 그건 바로 우리 선배 바리새인 했던 짓하고 똑같은 짓이 돼 버려요. 성령의 열매 많이 해서 움직일 때마다 훈장이 뚜두둑 떨어져요. 그거 빡세게 기도해서 주워서 단다고, 이건 뭐 어디 북한 노동당 입니까? 북한군인들 보면 애들 딱지 따먹기도 아니고 요새 애들도 시시한 놀이는 안 해요. 이건 무슨 그런 놀이가 있어요? 훈장 주렁주렁 달고, 무겁지도 않은지 몰라. 우리도 훈장 많이 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주님 앞에서 털어버리면, 십자가 앞에서 바로 이것 때문에, 이거 달려고 남한테 이 세상에서 폼 내서 살려고 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이 말이죠. 그게 우주를 만드신 감정 이예요. 슬픈 감정 이예요. 아픈 감정 이고.

그걸 헤아리지 못하면 천국을 가도 못 살아요. 짜증나서 못 살아요. ‘아유, 천국에 나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전부 다 주님 중심이고, 아이, 이럴 것 같으면 천국에 오지 말지.’ 천국 가서 후회한다니까요.

사도바울은 그들 철학자들이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 그들 인간들이 주장했다 이 말이죠. 감정을 아느냐? 진짜 세상 만든 감정을 아느냐? 모르죠. ‘모르면 입 다물고 있어. 내가 이야기해줄게.‘라고 이야기를 한 거죠. 25절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이 있다. 그게 하나님 믿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지어낸 것이고.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성전에도 계시지 않고 인간의 손으로 섬기는 것도 안 받습니다. 왜, 친히 주시는데 진짜 너희들이 받을 걸 받아야 되는데 받을 걸 거부하고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마지막 때 주께서 분노해서 심판한다는 그 감정을 너희들은 지금 못 받고 있다는 겁니다. 준다 하니까 자기 필요한 것만, ’내일 농구 할 테니까 주께서 알아서 날씨 개게 해주세요.‘ 전부 다 자기 생각만 달라는 거예요. 가뭄 때 온 나라가 비가 안 오는데 하필 가뭄 때인데 그날이 자기 행사 있는 날, 가뭄이라 비와야 하는데 제발 그날만큼은 비 안 오고 그 다음날 오늘 못 온 거 한꺼번에 다 내려달라. 꼭 인간이 자기중심이라니까요.

어떤 아주머니에게 아들이 두 명 있습니다. 하나는 택시 몰고 하나는 버스를 몬다. 이럴 때 아주머니 처신이 난처해져요. 택시를 특별로 가니까 버스가 파업해서 ‘엄마, 나 직장 안 나가, 파업했어.’ ‘왜?’ ‘택시 때문에’ 이건 버스가 가니가 택시가 파업했대.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느냐 엄마가.

세상 모든 것, 참새든 뭐든지, 하나님 자기 좋으라고 만든 변화입니다. 나 좋으라고 만든 변화가 아니고, 우리가 살다보면 주님을 믿어야 되는데 자기 일어난 일을 믿다 보니까 짜증과 짜증의 연쇄 고리가 된 인생이 너무 많았어요. ‘왜 이거 안 해줍니까? 왜 내 뜻과 배치됩니까? 내가 힘들게 주님 섬겼는데 이래서 주님 섬길 맘 나겠습니까?’ 자꾸 따지는 것도 나중에는 버릇이 돼서 먼저 따질 준비를 하고 따지거든요.

그런데 세상만사는 오직 심판 날과 그리고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모든 고무줄, 모든 자연은 묶음으로, 십자가 묶음, 심판의 묶음을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렇게 재연되는 겁니다. 온 천하를 다 연구해서 과학과 문학과 인류학 다 공부해서 하나님 달라지는 게 아니고 한방에, 인생은 한방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남자, 좋은 여자가 나이트 가서 한번 부르스 추면 인생 게임오버 아닙니까?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팔자 확 펴지고, 부르스 한번 잘 춰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인생도 한방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냥 한방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어디 갔죠? 천국 갔잖아요. 그러면 신학박사가 신학공부를 미쳤다고 왜 합니까? 웃기는 거잖아요. 신학박사해서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신학박사도 아니고 삼위일체도 모르는데 천당 가 버리고, 결국은 승자가 누구냐 하면 한방 받은 사람이 승자예요. 사울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지만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인생 한방에 끝났어요. 이제는 40대 감하는 매를 맞아도 괜찮고 도적의 위협과 강도의 위협과 바다의 위협과 좀 당해도 괜찮아요. 왜, 이미 강도도 세리도 천당 갔는데요. 뭐.

구원 받으면 된 거예요. 그 한방! 내 죄 때문에 주께서 화를 내셨는데 그 화를 나한테 퍼부어야 될 화를 사랑하는 자기 독생자에게 퍼붰기 때문에 나는 거저먹었다. 그냥 뻔뻔스럽게 거저  먹은 거예요. 그래서 주일 낮에 올해는 누가, 누가 뻔뻔스러우냐를 시합해보자. 이 뻔뻔스러움에서 지는 사람은 자기 의 챙기는 사람이고, 뻔뻔스러움에서 이긴 사람은 자기 생각 안 하는 사람입니다. 올해는 자기 생각 안 하기! 왜? 하나 안 하나 구원 받았는데. 자기 생각 몰두한다고 자기 정신만 혼미해지지, 아무 효과 없어요. 그냥 주신 것도 전부 다 주께서 주신 것이지, 내가 챙겨서 얻은 게 아니거든요. 그냥 안겨준 거예요.

26절 해봅시다.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 했죠? 이거 국가론 아무리 연구해도 잘 몰라요. 아트란티스란 옛날에는 과학자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대륙이 하나였다는 겁니다. 하나인 게 그럴 듯해요. 인도양이 있고 여기 아프리카 있고 인도양 아프리카가 비슷하고 여기 남미하고 아프리카 경계선이 너무 유사해요. 여기(남미)서 나오는 철광석과 여기(아프리카)서 나오는 철광석이 똑같아요. 지금은 브라질하고 아프리카가 떨어졌지만 옛날에는 전부 다 붙어있는 거예요.

그리고 언양에 가면 옛날 신석기 사람들이 고래 그림 그려놓은 게 있어요. 거기 보면 언양이 울산서 육지 쪽으로 10키로 떨어져 있거든요. 그런데 언양에 가면 거기 고래 담는 게 있어요. 그게 옛날에 해변 가였어요. 얼음이 녹으면 수면이 높아지고 현재는 얼음으로 바뀌었으니까 수면이 낮아지니까 이게 육지가 많이 드러나고, 빙하기 녹으면서 현재 언양이 옛날 울산 앞바다였어요. 빙하가 녹으니까 수면이 올라가서 그렇게 된 거예요. 또 옛날 다른 시대에 보면 황해바다가 육지였어요. 대마도는 없고. 그런 걸 조사하는 사람들은 바다 밑에 인간의 거주지를 밝혀내면서 알 수 있어요. 어! 바다 밑에 무슨 사람이 살았네. 옛날에는 육지였으니까, 수면이 높아지니까 다른 데로 간 거예요. 그런 걸 조사해 보면 세상의 모든 대륙이 하나였는데 이건 지리학적으로 그렇게 되고, 인간이 안 태어났을 때 하는 것이고.

인간이 태어났을 때 하나라 하는 것은 유명한 거 있잖아요.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무슨 탑? 바벨탑이죠. 그래서 성경을 보고 어떤 사람이 힌트로 알기를 사람이 그때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은 흩어져 있다가 이벤트 연다고 한 곳에 모인 게 아니고, 원래 땅이 한 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 곳에 모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벨탑 그 지경이 지금 어디 있느냐 하면 메사포타미아라 해서 강사이라는 뜻이거든요.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이 사이, 지금도 여기에 바비라는 지역에 지구라타라는 게 있어요. 피라밋을 이야기합니다. 흔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서 사람들이 탑을 쌓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원래 하나의 혈통이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성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원래 언어가 하나였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분리시켜서 다르게 된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 때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의 말로 하게 되면 비록 영어, 중국어, 다른 단어라고 마음가짐은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하나의 천국 백성으로서 서로 통한다. 라는 이야기를 오순절 성령과 바벨탑을 연결시켜서 그렇게 이야기를 신학 책에 많이들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요. 인류의 모든 혈통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근거를 저는 어디서 찾느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를 가지고  제사장 나라라고 했다는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를 봅시다. 이스라엘 나라는 제사장 나라다. 그러면 다른 나라는 제사장 나라이다? 아니다? 아니죠. 그렇다면 제사장 나라라면 제사장이 무슨 역할을 하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다른 나라 말고 이스라엘 나라에만 제사장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들어가 보면 다들 제사장이 아니에요. 제사장 따로 있고 아닌 사람 따로 있죠. 숫자를 비교해 보자 말이죠. 숫자를 비교해 보니까 제사장의 숫자와 다른 사람들의 가장 숫자와 엇비슷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빠진 부분은 뭐냐 하면 세금(성전 세)을 냄으로서 거기를 메우게 돼 있습니다. 어떻게 신기하고 낯섭니까?

민수기 3장 39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개월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명이었더라” 4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고 돼 있죠? 그렇게 하게 되면 모자라는 걸 속하게 되면 결국은 레위인 한 사람마다 그 가정의 첫 맏이가 한 사람당 1 : 1 로 맞아 떨어지죠. 그러면 레위인은 자기 직업이 뭡니까? 농사짓는 직업이 아니고 제사 직이죠. 제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와 그 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첫 아들(가문을 잇는) 숫자와 일치되는 거죠. 그러면 제사하는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죄를 씻어주는 역할을 하죠. 그러면 그 첫 아들은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 가문을 잇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해줘서 태어난 게 맏아들 이예요.  맏딸은 안 됩니다. 딸은 안 되고, 할례 때문에. 맏아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유지보존하게 하신다. 라는 취지를 보여주는 의미에서 주께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태어나게 하셨는데 태어났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났어? 태어났으면 레위인하고 숫자가 맞춰서 제사장한테 가서 제사해서 용서를 받아야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만큼은 태어난 아이가 하나님의 제사법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용서받은 자로서 설 수 있는 그런 기능이 작용하는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라 이 말이죠. 아시겠죠?

계속해서 어떤 공장이 가동되는 공장인데 어떤 공장입니까? 태어나는 족족 용서가 되는 그것이 가동되는 공장, 그 공장 장치의 주요부품은 바로 제사! 성전에 의한, 성막에 의한 제사.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그렇게 할 때 거기에 가동하는 원칙을 가지고 무슨 언약이라 하느냐 하면 그게 바로 모세언약 이라 해요. 다른 말로 율법이라 하거든요. 이건 아시죠?

그러면 모세언약에서 모세 떼버리면 언약이 원칙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 살과 내 피로 새 언약 세웠다 하잖아요. 새 떼버리면 언약 남잖아요. 그럼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성도 삼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뭐를 하려고 합니까? 이 세상의 제사장 역할을 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준 거예요.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러면 저는 모든 민족이 하나 된다는 의미를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나 됨이 단지 태어났다고 해서 하나 됨입니까? 아니죠. 왜냐 하면 광야에 가면서 반항 하는 인간들은 탈락이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민수기 보면 인구수를 헤아려요. 그 다음에 끝날 때 인구수를 헤아려요. 차이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당연히 나죠. 원망해서 잘려나간 사람들. 학교 집어넣으면 퇴학당하는 사람들, 학교 폭력 때문에 말썽피우는 사람들. 저도 교사해서 압니다. 처음에 출석부 보면 60명 됩니다. 나중에 4월 달 8월 달 되면 벌건 줄로 퇴학, 자퇴, 퇴학, 자퇴, 나와요. 사립학교는 공납금 때문에 교장 선생이 담임한테 질책해요. ‘애들 어떻게 해서 다 무조건 퇴학이냐, 잘 해서 계속 공납금 나오도록 해라.’ 이런 게 있어요.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 나 이스라엘 백성이다.’ 안 돼요. 이스라엘 백성을 유지하려면 언약이 부합돼야 된다 말이죠. 그 언약이 부합되는 것이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말이 아니고, 제사에 대한 의미를 계속 갖고 있을 때만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제사장 나라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이렇게 맏이를 위해서 제사로 죄를 씻어주는 원칙은 이스라엘이 처음 만들어질 때,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떤 이벤트를 벌렸죠? 어린양의 피를 발랐는데 양을 몇 마리 잡았습니까? 한 마리 잡았죠. 그 어린양은 뭐를 대신하느냐 하면 그 집의 맏딸 아닙니다. 둘째 아들도 안 돼요. 맏아들을 위해서 어린양 하나가 숫자가 맞아서 딱 하거든요. 그 어린양이 신약에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천당 가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언약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증거물로 우리를 채택한 거예요. 옛날 언약이 ‘너 죄 용서 받아야 돼.’ 그래야 율법 모세 언약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새 언약의 완성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피로 용서받는 사람이 등장할 때, 이 세상에 성도 있는 그 자체가 지금도 주님이 오직 주로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돈 없다고 너무 기죽지 맙시다. 이래 봐도 주의 일에 부름 받은 사람들 이예요. 우리 개인의 일에 부름 받은 게 아니고 거룩한 주께서 하시는 제사장 숫자 맞추는 작업에 우리가 뽑혀서 감히 숫자로 딱 아귀 맞추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는 뭐냐 어린양이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자만이 유황불에 안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행위 책에 있는 사람은 지옥 불에 다 들어가고 오직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천국 갑니다.

그러면 생명책에 명단이 왜 기록됐겠어요? 1:1 대응하는 거예요. 예수님 한분, 우리, 예수님 한분, 집사님,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고 우리는 다수인데 어떻게 되느냐, 성령을 통해서 같이 십자가 성령을 통해서 한 성령을 마셔버리니까 너, 나 두 명이라도 성령은 한 성령 안에서 같이 있으니까 우리 전체가 한 몸이 돼 버립니다. 한 몸! 그게 형제 사랑이고, 이웃 사랑 이예요. 우리는 대전, 대구 있어도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집사님, 한 몸 아시죠? 돈 빌려줄래요? ㅎㅎ실속을 챙겨야지. 교회에서 이런 말도 위험하다니까요. 여러분,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하면서 ‘장로님, 우리 형제 아닙니까? 한번만 도와주시면…’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래서 항상 주의해야 돼요.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은 모든 말은 악마적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돈 빌린다. 이거 악마적이죠. 반대로 우리를 경유해서 예수님한테 고무줄 묶음이 돼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를 찾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맺는 이것은 내 훈장이라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께서 하나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그 열매조차도 누구 공로입니까? 다 예수님께 공로를 드리는 거, 이것이 바로 면류관 바치는 천국에서 우리가 해야 될 천국의 일상입니다.

천국 가서 베란다에 꽃을 심어놓고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에스프레소 커피 마시면서 생각하는 그 우아함, 그 고상함, 그건 할 일 없는 주부들이 집에서 하는 거고, 천국은 우리 뜻대로 우리 좋아라고 있는 세상이 아니고, 주님께서 모든 걸 이렇게 지옥 가는 것조차도 주께서 알아서 했습니다.‘라는 걸 고백하는, 어느 것 하나 주님의 감정과 느낌과 기쁨과 슬픔이 개입되지 않은 구석이 없다는 것, 우리는 그 속에 사실은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걸 미처 모르고 있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모든 게 바로 십자가 공로를 보여주기 위해서 배치돼 있던 의자였고 컴퓨터였고 카메라였고 다 그런 겁니다. 이것을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