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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한례
대전120726a-행16장16(사도의 전도)39강-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16장 16절 할 차례입니다. 14절부터 이렇게 보면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이렇게 돼 있죠?
지금 사도행전 16장 16절 하는데 그 환경부터 제가 설명을 해드릴게요. 여기가 터키고 보스코로스란 해협을 건너면 여기 재정난으로 요새 어려운 그리스란 나라거든요. 그리스 나라 북쪽을 그때는 마케도니아라 합니다. 지금은 마케도니아란 나라가 따로 있지만 남쪽을 아가야라 하거든요. 마케도니아는 우리나라 같으면 북한을 말하고 아가야는 남한, 아가야의 중심 도시가 아테네, 고린도가 되고 북쪽은 데살로니가가 제일 큰 도시에요. 현재도 그리스에서 제일 큰 도시가 아테네고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데살로니가예요. 하늘에서 본 풍경을 카메라가 데살로니가를 보여주면 아주 큰 도시거든요.
지금 사도바울이 이쪽으로 여기부터 유럽인데 유럽 아닌 터키는 뭐냐, 아시아라 하면서 앞에 붙는 게 있어요. 소아시아, 작은 아시아, 아시아로 흘러가는 발판이 되는 겁니다. 이쪽으로는 유럽이 되겠죠.
사도바울은 자기 생각은 터키 쪽 이쪽에 소아시아 쪽으로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는데 여기에 드로아 지방에 있는 사람이 기도 가운데서 환상 중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와서 복음을 전해다오.’라고 하는 환상을 받고 난 뒤에 사도바울이 드로아 쪽에서 환상을 보고 난 뒤에 16장 9절에 나오죠. 그래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드로아를 떠나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겁니다.
전하게 되는데 여기서 복음을 전할 마음만 있으면 소용없잖아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야 되잖아요. 그저 북 치고 장구치고 옛날 노방 전도하듯이 그렇게 해서 사람 끌어 모으는 그것은 보험회사에서 영업사원들 건 수 올리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그런 식으로서는 사도바울이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구원받기로 작정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그 사람 만나기 위해서 나를 보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이 일을 하게 되면 잘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이런 생각을, 이런 사업적인 발상이 없어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요새 선교사하고 다릅니다. 그럼 선교사들이 화내면.....ㅎ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내 자리를 안정되게 해볼까 하는 건 없고, 사도바울 자체가 원래 자기의 소원이 뭐냐 하면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갖고 있는 목숨은 내놓기 위해서 있는 목숨이지, 간직하기 위해서 있는 목숨이 아니에요. ‘이 목숨 어디다 내놓을까?’ 하는데 복음 전하는데 목숨을 내놓은 것뿐 이예요. 그래서 자기 목숨을 내놓아서 받을 사람을 찾는 거예요. 자기 목숨을 가져 갈 사람을 찾는다 이 말입니다.
이거 해서 내 몫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에게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자기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빨리 죽는 거다 말이죠. 나한테 욕망은 하나밖에 없다.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요새로 말하면 더워서 못 살겠다 그런 식이죠.ㅎ 그런데 주께서 이렇게 환상 가운데 한다는 것은 ‘아, 내 목숨이 어디에서 이렇게 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 이걸 사도행전에서는 영생 주기로 작정된 사람, ‘영생 주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다 내 목숨을 내놓아야 되겠다. 주께서 그렇게 주선하셨구나.’해서 거기에 간 겁니다.
가는데 누가 누군지는 모르죠. 그건 주님만 아시지, 사도바울 본인이 누가 구원받을지, 누가 영생 받을지, 아무도 모르죠. 그러니까 이거는 사도바울이 배짱 중에 배짱, 그걸 똥배짱이라 하는데 아주 똥배짱을 부리는 거예요. ‘민기적하는 것도 치우고 나는 귀찮아, 빨리 떠나고 싶어. 자꾸 내 다리 붙잡지 마, 나도 덥다고, 시원하게 천국 가서 살고 싶어.‘ 그런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았었어요. 거기다 애도 없겠다, 장가도 안 갔겠다. 얼마나 홀가분하겠어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16절에 보면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있다. 여자 이름이 옛날에는 루디아라 하는 이름이 있었죠. 두아디라 하는 것은 7교회 중에 하나가 있죠. 여기 보면 네압볼리 있고 여기 빌립보 있고 행적에는 자세히 안 돼 있지만 대충은 이렇게 여기 빌립보가 있어요. 큰 도시 데살로니가는 아직 가지 않았고 중간에 빌립보가 있죠. 그 빌립보라는 그 동네에 루디아란 여자가 있는데 말을 이렇게 합니다. ‘ 사도님 보기에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사도님이 우리 집에 유하시고 어떻게 형편이 되시거든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을 사도님이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저를 믿는 사람으로 간주하시거든. 니 믿음도 아니야, 어디 이단 믿음을 가지고, 이럴 것 같으면 우리 집에 안 오셔도 되는데 제가 사도의 일행을 초청하는데 제 믿음이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라고 생각하거든 거절치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한 겁니다. 말을 얼마나 곱게 합니까?
그래서 아주 강권해서 그 집에 유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볼 때 사도바울이 여기 소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그러니까 그리스 쪽으로 마케도니아로 건너갈 때에 ‘어디 물주 없나?’ 이런 걸 찾은 게 아니고 ‘주께서 왜 보냈지? 아유, 난 가기 싫고 난 지상 사는 것보다 하늘나라 가고 싶은데, 왜 또 살게 하시나, 자꾸 내가 움직이나. 그런데 이런 분이 있다. 아, 이런 분을 위해서 봉사하라 그러는구나.’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여자의 말을 듣고 거기 갔었습니다.
갔는데 이 이야기가 우리가 보기에는 참 난처한 이야기가 많아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 했잖아요. 그럼 복음을 전하라 한다면 애로사항 없이 하나님께서 다 도와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자기 일 하려는 게 아니잖아요? 주님의 일 하청 받아서 대행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거룩한 주의 일을 아주 순종하면서 잘하면 세상 사람이라도 도와줄 건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께서 천지, 해와 달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 미물에 지나지 않는 사도바울 하는 일에 좀 수월하게 일을 해주시면 좀 좋습니까? 우리 생각에 괜찮잖아요?
그런데 일을 시켜놓고 일이 꼬이게 만들 때 이게 무슨 조화냐 이 말입니다. 목수한테 일 시켜놓고 연장 뺏어 버리면 이게 뭐냐 이 말이죠. 자, 요점을 먼저 이유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고 진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다른 민족과의 다른 점을 보여주면 돼요. 참~ 쉽죠? 다른 민족은 안식일이 없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키면 되고, 다른 민족은 할례가 없습니다. 할례 하면 되고, 다른 민족은 십계명이 없어서 안 지켜도 돼요. 그런데 자기들은 지키고, 다른 민족은 제사법이 없어도 자기들은 제사법 지키면 되고, 남이 하지 않는 거 골라서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번성하게 된다. 얼마나 간단한 계약입니까?
그런데 그 간소하고 간편한 계약을 왜 이스라엘은 거부했느냐 이 말입니다. 그거는 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람인지라 뭔가 이렇게 순종했으면 그 보상이 주변에 있는 이방나라보다 잘 먹고 잘 살아야 이게 일한 보람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니는 교회 다녀라. 그럼 복 줄게.’ 할 때 우리는 교회 다니는 자체가 복이냐, 교회 다녀서 얻은 보상이 복이냐, 를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교회 다니겠습니다. 뭘 줄 겁니까?’ 이러면 교회 다닌 것은 복이 아니고 얻어 챙겨야 그게 복이 되겠죠. 하나님 같은 경우에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게 복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 민족에게 물들은 이스라엘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테니까 뭐 주실 겁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뭐 주긴 뭘 줘, 사랑한 자체가 너는 내가 택하신 백성이고 사랑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복이다.‘라고 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이 튀어나와서 ’옆의 나라는 잘 살고, 우리는 그냥 밥이나 먹고 사는 수준이지만 옆의 나라는 너무너무 잘 살거든요.‘ 저쪽은 철기 문화고 이쪽은 청동기 문화기 때문에 문화적인 격차도 있고 촌스럽고, 저쪽에서는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집에서 그냥 손뼉치고 놀던지 수건돌리기하고 노는 것 같은. 그러니까 너무 촌스러우니까 요새 촌에 젊은 애들이 없죠. 왜, 촌에 젊은 애들이 없습니까? 집에 풀칠은 하지만 TV나오는 드라마에 나오는 삶 있잖아요. 재벌 2세, 3세들 연애하며 사는 낙, 그건 보장받을 수 없잖아요. 실컷 땡볕에 일 해봐야. 그러니까 서울에 가야 얻을 수 있는지 알고 거기로 한 둘 다 빠지니까 지는 안 가고 싶어도 놀 친구가 없으니까 다시 서울로 다 가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줬다는 말은 말씀을 지키고 싶어도 우리 인간 마음속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도 한 다른 꿍꿍이속이 누구나 있었다는 것을 들통 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셨던 겁니다. ‘하나님 믿을 테니까 저 사람들, 안 믿는 사람들 갖고 있는 것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제시하는 것,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망했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일에 뭔지 편하게 해줬으면 좋을 텐데 사도바울이 가는 길에 하나님이 분명히 시키는 일이고, 엉뚱한 길로 가지도 않았는데 때로는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광야처럼, 진짜 세상적인 어떤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그것은 뭐냐 하면 땅 = 어두움의 세계, 이 땅은 예수님을 살해했던 세상입니다.
흔히 교회 가면 도덕적으로 살면 복 받는다 하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기독교냐, 바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조를 집어넣어버려요. 만약에 내가 도덕적으로 살 것 같으면 피해자, 가해자, 하는 그런 구조 필요 없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반듯하게 살면 복은 오게 돼 있다. 이것이 도덕적인 구조죠. 내가 나쁜 짓하면 주께서는 내 것 가져가고 나한테 가져간 것도 내가 착하게 살면 착하다고 하나님께서 더 주시고, 그냥 더 주시는 게 아니고 30배, 60배, 100배라는 성경에 있는 구절은 보긴 봐서, 욕심도 많아, 요새 그런 장사 어디 있습니까? 30배, 60배, 100배로 채우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건 나만 잘하면 되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성경에는 피해자, 가해자 구조로 딱 와버리면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 내가 피해를 봤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피해자가 누구겠습니까? 피해자가 예수님이고 가해자는 누구겠습니까? 우리가 되죠. 가해자가 우리라는 건 상상도 못합니다. 왜, 우리는 항상 착하게 살기를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착하게 사는데, 예수님이 덜렁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예수님 옆에다 ‘피해자’ 라 딱 이름을 써서 와버리니까 졸지에 우리는 가해자가 됐어요. 이 구조가 싫은 거예요.
이 구조는 싫고 차라리 나 하나 속닥속닥, 나 하나 착하게 살아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릴 때부터 착하게 살아서 부자 됐는데 부자 되는 건 이만하면 됐고 앞으로 영생 얻으려면 어느 정도 착해야 내가 영생을 얻습니까?’라는 주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의 심리와 마찬가지예요. 주님께서 ‘니 가진 재산 다 내놔라.’ 니가 착해서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켜서 부자 된 줄 아는 모양인데 그 구조 자체, 나 혼자 착하게 살면 축복이란 보상이 주어진다는 나 홀로만이 구성될 수 있는 구조, 그 원칙 있잖아요. 여기에다 주께서는 피해자, 가해자 원칙을 집어넣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 교회 모든 것은 거짓이 돼 버립니다. 이 피해자, 가해자 구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냐, 아니면 본인이 도 닦느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본인이 도만 닦으면 나는 복 온다는 이 구조냐, 아니면 나는 가만히 있어도 주님은 나한테 피해자가 된다는 구조.
복음이냐, 복음 아니냐는 아주 간단하죠? 간단한 겁니다. 그 신학이고 뭐 복잡하게, 수련회 못 간다고 아쉬워하는데, 아쉬워하지 마세요. 간단한 구조예요. 피해자, 가해자가 내 인생에 들어오느냐, 아니면 ‘들어오지 마. 아무도 들어오지 마. 착해서 복 받을 거야.’ 하고 자기 혼자만이 자기 소박한 자기만의 세계를 꾸려나갈 것이냐, 살림 차려 나갈 것이냐, 하는 그런 문제.
그래서 말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이런 십자가 구조가 아니고 ‘나 지금까지 복 받은 것도 이만큼 복 따낸 것도 참 애 많이 먹었다. 교회서 내가 어지간히 봉사했기 때문에 복 받았다.’ 그게 아까워서 그걸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메시아를 주님이 보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기대한 모든 메시아는 전부 다 헛수고, 전부 다 50년, 60년 다녀도 헛수고다. 사람이 기대하지 아니한, 사람이 싫어버린바 된 메시아,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된 메시아를 보냄으로서 너희들이 엉뚱한 메시아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그 헛수고를 완전히 들통 내 버리죠.
12제자 보세요. 주님을 바짝 따라붙었어요. 완전히 보디가드처럼 이렇게 따라다니면서 예수님 지키겠다고 심지어 베드로는 칼까지 쥐고 예수님 지킨다고 말고의 귀를 베고 아주 대단한 일을 하셨잖아요? 그런 식으로 예수님과 한패라고 얘기했던 그들이 막상 예수님이 잡히니까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치는 그 꼴들을 보세요. 뭐, 무슨 예수를 기대했는데, 무슨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이용했지, 언제 주님을 사랑했어요? 귀한 내 몸 지키기 위해서 덜 귀한 예수를 갖다 이용한 거죠. 언제 우리가 예수를 나보다 더 귀하다고, 찬송가에만 나오잖아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하다고 찬송가에는 나오는데.
지난주일 낮에 설교하면서 찬송가 가사 인용했죠? 믿음이라 하는 것은 아무 소리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그러면서 약속 믿는 것이 믿음이라 했잖아요. 요새는 교회가 입에 안 채워주면 교회 오지도 않아. 이거 얻어 잡수시기 바랍니다. 이래야 와요. 완전히 백화점 세일 같아요. 70% 세일해서 아줌마들이 제일 먼저 문 열고 뛰어 들어가서 서로 먼저 명품 가져오려고 하는 그거와 똑같아요. 바겐세일이죠.
피해자 가해자 입장의 복음을 사도바울이 전하기 때문에 나는 복음을 전할 때 편하게 전하고 싶어요. 이건 사도바울도 다 마찬가지인데 항상 복음만 전하면 뭔가 일이 꼬여서 사도 본인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일이 그 복음 전하는 그 현장에 벌어집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사건이라 합니다. 앞에 붙으면 복음 사건, 십자가 사건.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가 다시 여기서 사건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현재 이 대전 바닥 전체가 우리는 몰랐는데 뭔가 대전 바닥 전체가 울렁울렁 거리는데 이 바닥 전체가 유전이었다. 그래서 푹 파니까 기름이 쏘옥 올라오더라 하는 것처럼 말씀 가지고 푹 파면 십자가 사건이 팍! 용출을 하는, 바로 그 현장을 사도바울이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에게 있던 그 사건마저 뭐가 되느냐, 계시입니다. 계시라 하는 것은 반복 되는 것, 이 계시의 원칙은 지금도 이 시대에도 반복됩니다. 물론 등장인물은 달라요.
오늘 분문을 하게 되면 여기에 16절에 보면“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하는 귀신 들린 이 여자가 귀신이 들렸는데 귀신같이 맞혀요. 그래서 소문났어요. 보통 점쟁이들은 돈 보고 점치는데, 이 여자는 돈을 초월해서 그냥 그분이 오셨기 때문에 그냥 치는 거예요. 요새로 말할 것 같으면 최영 장군 신, 또는 단군 신, 그분이 오셨어요. 귀신이 왔다 이 말이죠. 귀신이 오니까 귀신 같이 맞추는 거예요. 귀신은 귀신같아요. 다른 사람은 예수님 못 알아봐도 누구는 알아봅니까? 사도바울과 예수님은 귀신 같이 알아맞혀요.
여기도 나옵니다. 여기 17절에 나와요.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렇게 남을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 당신이 예수님의 사도인 것을 우리가 아니까 우리가 아는 처지에서 나 건드리지 마라.’ 이런 말 이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처음에는 남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그냥 놔뒀는데 자꾸 따라오면서 하니까, 그러니까 요새 어린애들 노는 거와 다 똑같아요. ‘형 때리지 마.’ ‘안 때릴게.’ ‘때리지 마.’ ‘안 때린다니까.’ ‘때리지 마.’ 하니까 때리죠. 그와 똑같은 거예요. 마귀가 사도바울이 그 빌립보란 곳에 등장한 이상 귀신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은 정상입니다. 정상인데 십자가 복음만 전해 버리면 안에 있는 유전이 터져서 시커멓게 된다니까요. 세상은 세속적일 때 가장 고요하고 질서 잡히고 제일 살기 좋아요.
그런데 십자가 영이 들어와 버리면 이게 악마도 덩달아서 발작을 하기 때문에 시끄러워요.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집안이 조용하려면 종교가 하나가 돼야 됩니다. 절로 하나로 몰리든지 교회로 몰리든지, 이래야지 교회로 몰리나 절로 몰리나 두 종류 다 복음 이야기는 ‘쉿’ 복음 이야기하면 안 돼요. 교회 이야기하면 조용해요. 화기애애한데 복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유전 터져요. 사건.
사도바울이 지가 터지고 싶어서 터졌습니까? 사도바울은 죽는 게 소원인데, 사도바울이 조용하게 사는 게 소원이 아니잖아요. 세상이 뭐 좋다고 날씨가 더운데 뭐가 좋다고 삽니까? 일찍 죽었던 마르다 오빠는 부활해서 예비군복 입고 좋아하고 변화 산에서 엘리아, 모세 보세요. 살아있을 때는 고생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면서 고생도 많이 했건만 지금 봐서는 변화 산에 보세요. 엘리아하고 아브라함하고 모세하고 주님하고 영원토록 같이 살잖아요. 거지 나사로가 그 사람은 의료보험도 안 됐어요. 완전히 죽을 때 개한테 무시당하고 하더니만 아브라함 품에 안겨서 팔자 고쳤지 뭐.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라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웃는 자. 중간 중간에 개 콘 보고 웃는 것은 소용없어요.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예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축구는 후반전이 끝나야 게임 끝난 거지, 전반전 5:0했다고 낙심하고 자살하고 할 필요 없어요. 자살 할 사람 아직 멀었어요. 게임 아직 안 끝났어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어떤 부부가 결혼할 때 ‘내가 저 남편 안 만나고 이 남편 만났으면 좋았겠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 남편 만나게 돼 있어요. 인간은 자기 팔자를 못 고칩니다. 이걸 주어진 거라 해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던져진 거. 주어진 거예요. 우리는 내 인생을 내가 주웠을 뿐 이예요. 내가 만들어 가는 게 아닙니다. 하루 살면 하루 것 줍고, 또 다음 날도 줍고 그렇습니다.
참, 젊은 부부가 애 낳고 사고로 죽어보세요. 통영에서 애가 죽었는데 진짜 이건 흙에 못 묻고 자기 가슴에다 파서 묻고 이 안에 품고 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힘든데 욥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래도 자식 둘 있다가 하나 죽으면 큰 아들이 있잖아요. 통영에도 애 둘이니까 하나는 있잖아요. 욥은 자식 열 명 있었는데 열 명이 하루 만에 다 죽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그 아픔을 감당 못하죠. 그런데 욥이 뭐라 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무책임한, 평소에 자식 사랑이 요만큼도 없는 거 같아. 어떻게 보면 잘 죽었다 하는 생각까지, ‘아이구, 더운데 자식 열 명이 골치 아픈데 잘 됐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들지만 평소에 욥은 자식들을 위해서 죄 짓지 말라고, 말씀대로 살라고, 하나님 뜻대로 살라고 그렇게 기도로 정성을 했던 거예요.
여러분, 기도하는 게 뭐냐 하면 기도라는 게 딴 게 아닙니다. 자기의 목숨을 거는 거예요. 기도 내용을 위해서 내 목숨을 포기할 때만 기도하고 말할 수가 있어요. 주여, 이 목숨, 그 기도내용과 바꾸겠습니다.‘ 이럴 때만 기도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은 기도는 주문을 외우는 겁니다. 남묘호렌게교, 하는 것처럼 그냥 주문 외우는 거예요. 진짜 챙길 것을 딱 챙겨놓고 기도해서 이거 좋은 것은 추가해서 보탤까 싶어서 꼼수 쓰는 거예요.
진짜 기도라 하는 것은 살기 싫다는 거예요.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살기 싫고 그 기도의 내용이 있다면 거기다가 내 목숨을 그냥 건너가겠습니다.‘ 하는 게 기도의 내용 이예요. 그럼 그 기도 내용이 뭡니까? 그거 여러분들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잖아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 죄를 사함같이 용서해 주옵시며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여기에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왜, 그것만이 아버지가 기뻐하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 기도는 목숨을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있는 목숨을 가꾸기 위해서 뭐하면 내가 저 사람처럼 잘 될까, 이런 기도를 하는데 그건 기도가 아니라 아주 욕설을 하는 거예요. 그럼 주님은 피해자가 되고 우리는 뭡니까? 가해자. 주께서 힘 주셔서 밥 먹여주니까 밥 먹은 힘 가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니 그게 바로 우리가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애한테 용돈 주면서 ‘공부하라’ 준 돈 가지고 애들이 게임이나 PC방에 가서 게임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줄 때 이 돈이 어디서 나온 건지도 모르고 지는 자기 즐거움에 도취돼 버리면 그게 바로 가해자고 돈 준 사람은 그게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한평생 살면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가해자 입장에 서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 나라 의를 구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염려할까에 모든 정력을 거기다가 소비하고 말았어요. 참새만도 못해. 들풀보다 못해요. 솔로몬이 옷 맞출 때 얼마나 사전에 양복쟁이하고 얼마나 치수 잰다고 했겠습니까? 얼마나 가봉했겠습니까? 주님이 뭐라 합니까? 솔로몬이 입은 옷이 가봉한 적도 없는 들풀보다도 못하다. 우리는 주님이 못하다 해도 귀에 들리지 않아. 나만 좋으면 그만이야.
사도바울이 갈 때 그냥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 루디아 같은 사람과 이야기해서 구원시킵니다. 그럼 여기서 구원은 교회입니까? 말씀입니까? 루디아가 지금 얻고자 하는 게 뭐예요? 말씀이죠. 교회라 하는 건 이건 없어요. 교회란 자체가 없어요. 교회에 계급이 있다는 것은 키프리스, 유스티아누스 져스트마티... 그 사람, 그런 사람들 입에서 또는 로마에 클레네트라고 있어요. 그런 사람에 의해서 처음으로 3가지 계급이 등장했습니다. 키프리스는 이런 이야기했어요. 감독 없는 교회 없고 교회 없는 구원 없고, 따라서 감독 없는 구원 없다. 이런 소리 했어요. 이게 로마 교회의 수장 이예요.
왜 그런 소리하는지 알아요? 사람은 예배당이라는 눈에 보여야 그게 구원 받았다 해서 안심이 되고 예배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식과 제도가 나의 구원을 확정한다고 하는 거예요. 기계적이죠. 뭐 쳐 바르고 뭐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구원은 뭐 쳐 바르고 먹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먹으려 하면 예수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는 거예요. 왜, 말씀은 버리고, 하여튼 말씀에 관심 없으면 난 신자라고 보기 곤란해요. 말씀에 관심 없으면 대부분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교회에 관심이 있으면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으로 왜 말씀에 관심이 없느냐 하면, 구원은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구원 안 해준다는 굳센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를 50년, 100년 다니고 목사, 장로 소용없어요. 내가 교회 나와서 봉사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기도해서 복 받았다. 내가 납득이 되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방식을 계속 고수하고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인터넷 보니까 어느 교회 전도지가 있는데 전도지 그림에 이런 게 있어요. 예수님이 ‘니 용감함을 보여라’ 두 손을 위로 들고 있는 그림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신보라 나오는 개 콘에 보면 ‘용감한 녀석들’ 모습처럼 예수님하고 제자들이 두 손을 들고, ‘니 믿음의 담대함을 보여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애들 교회에 불러서 이 포스트 들고 하잖아요. 그럼 예수님께서 ‘니 담대함을 보여 달라’ 하면 애들이 주님 앞에 보여줄 담대함이 어떤 겁니까? ‘믿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거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내 의지와 결단으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결심 안 하면 아무도 날 구원하지 않느니라.‘라는 확신, 이게 용감함,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나 말고 어떤 누구도 구원해 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가만히 있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겁니다. 내가 설쳐야 된다는 거예요. 교회서 설쳐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다른 메시아입니다. 바쳐야 복 받지, 안 바쳤는데 한 푼도 헌금 안했는데 복 받는다. 그럴 리 없다는 거예요. 뭐가 그럴 리 없는데?
거지 나사로가 십일조 얼마 했습니까? 안 했죠? 탕자가 집에 돌아오려고 적금 부었습니까? 적금 불 돈 있으면, 돼지 먹는 것도 뺏어 먹는 판에, 탕자가 집에 돌아와서 금가락지 하고 좋은 옷 입고 한우고기로 잔치 벌일 때 그 참여하기 위해서 사전에 펀드나 적금 들었습니까? 없죠.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뭐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죠. 기생 라합은 국가를 배신, 자기 나라를 배신한 여자입니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삼위일체 이번에 강의할 텐데 삼위일체는 개인을 위한 게 아니고 국가를 위한 겁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신성한 국가라고 삼위일체가 있는 것이지, 개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삼위일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로마 국가는 국가가 제정한 삼위일체를 인정하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장치를, 국가적으로 시스템을 자동적으로 가동하는 겁니다.
마치 북한에 가서 김일성 동상 앞에 절하면 우리 북한 사람이고 절 안 하면 아오지 탄광, 이건 귀양 보내는 것처럼. 국가적인 단결력을 그것도 신앙이란 이름으로 삼위일체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럼 교회서 삼위일체 거론하는 것은 교회 자체를 국가화 시키기 위해서 한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받느냐,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십자가를 인정해야 돼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교회 문제, 국가 문제 아닙니다. 개인이 성령 받으면 그 개인이 받는 순간 그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교회의 일원이 되고 지체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지금 모여서 교회 세우는 건 의미 없어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귀신이 등장해서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 했다 말이죠. 자, 루디아가 이 모습을 볼 때 루디아가 ‘이 나쁜 여자야, 이 점쟁이 여자야, 왜 우리 교회를 왜 그렇게 훼손하느냐.’ 이렇게 했습니까? 제 질문이 중요한 질문인데, 무슨 뜻이냐 하면 귀신이 설치면 내 구원이 잘못 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소란스러운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만약에 어떤 교회에 미친 여자가 들어있다 하면 내 구원에 지장이 있는 겁니까? 우리 교회에 지장을 주는 거예요? 교회에 지장이 있으니까 자기 구원에는 지장이 없죠.
그러면 그 귀신 설치는 것이 누구 뜻이다? 하나님 뜻인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뭔가 지켜주고 교회가 안정되고 커가면서 사도바울도 재미있을 거 아닙니까? 이왕 천국 가지만 갈 때 가더라도 재미있게 살고 싶다 이 말이죠. 그런데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귀신이 나와서 설칠 때에 루디아가 그걸 보고 ‘아, 참 사도바울도 소용없네, 사도바울 모셔서 교회 한번 해보려고 했는데 교회도 안 되고.’ 이래서 루디아가 삐졌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교인부터가 예수님과 직접 내통하고 소통돼야 될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돼야 된다 말이죠. 사도바울도 그렇게 된 상황이고 루디아도 그렇게 된 상황이기 때문에 귀신이 마음껏 공격을 가하는 거예요. 귀신이 흔들어 놓고 싶어서, ‘봐라, 예수 믿는 자들아 교인 얼마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 흔들어 놓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것을 보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18절에 보니까 “내가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죠. 그가 누굽니까? 그가 귀신 들린 여자입니까? 안에 들은 사탄, 귀신입니까? 그가? 베드로가 “그럴 수 없나이다” 할 때 예수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사단을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베드로보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럼 베드로가 사탄이란 말입니까? 아니죠. 예수님 눈에 누가 보입니까? 베드로 속에 있는 사탄이 보이고 베드로는 그게 안 보이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주님께서 만날 나보고 꾸짖었으면 좋겠어요. 만날 꾸짖고 있지만. ‘사탄아 니 속에서 나와라’
그 정도로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누구보기에? 주님 보기에. 이 껍데기가 치장을 해봐야 그 뭐, 선크림 발라봐야 타지만. 껍데기는 돼지 껍데기가 맛있지만 사람 껍데기는 맛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껍데기밖에 없는 이 인생, 그것도 아무리 좋은 외제 랑콤인가 발라봤자 세월가면 어떻게 돼요? 이게 쭈글쭈글해져서 나중에 지도 사진 찍으려고 안 하죠. 사진은 순간을 놓치지 않잖아요. 찰칵, 우리는 항상 의식은 연속성이고 순간이 아니고 연결돼 있기 때문에 앞이 커버하는데 사진을 찍어버리면 그 늙은 모습이 찰칵, 우리는 사실 산자가 아니고 죽어가는 죽은 자, 죽은 자인데 서서히 죽어가는 자, 따라서 죽음으로 이끌려 가는 자, 멈추지 않는 멀미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빠르게 진척이 되어 우리는 점점 가속이 붙습니다. 그래서 이거는 아무리 땅바닥을 치면서 ‘청춘아, 내 청춘아, 가슴을 치면서 청춘을 돌려 달라’고 나 훈아가 백날 쳐봐도 주님께서 남의 청춘 가지고 니 것도 아닌데 니가 왜 니 것처럼 ‘니 게 어딨어. 니 게 있어야 돌려주지. 처음부터 니 게 아닌데 뭐.’ 돌려줄 게 있습니까? 쓰여 지면 되는 거예요. 쓰여 지면 되지 자꾸 내 것이라고 간직하지 마세요.
여기 상표를 달지 마세요. ‘내 꺼’ 라고 상표 달지 말고, 그래서 저는 인생은 ‘육포’라고. 육포를 돌섬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마구 두드리면 너덜너덜해지죠. 다 구멍이 숭숭 나서 찢어지잖아요. 육포, 지포를 패버리면 갈기갈기 찢어지잖아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바람이 쉭쉭 불죠. 성령의 바람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날씨 더운데 바람이 쉭쉭 불면 좋잖아요. 그런데 꽁하고 있으면 이게 근육이 뭉쳐서 쥐 되면 아프잖아요. 뭐든지 내 마음이 아프다 할 때는 꽁하고 뭉쳐지니까 아픈 거예요.
사랑하게 되면 이게 마음이 아파요. 왜, 상대방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긴장해서 아파요. 사랑은 그놈이라. 바비킴의 사랑 그놈이란 노래 있습니다. 사랑 못됐다 그놈. 사랑은 아픈 거예요. 왜 아픈가, 주님의 사랑은 개 패듯이 패는 사랑인데 내가 어떤, 어떤 것을 갖고 싶은 사랑은 아파요. 백화점에 어떤 좋은 옷이 나왔다. 물건 나왔다. 그걸 얻기 위해서 난 아파요. 아파서 조마조마하고 불안합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긴장 연속 이예요. 그걸 성취를 못했을 경우에는 나중에는 우울증 걸리고 나자빠지고 자살충동이 일어나죠. 우리가 새삼 자살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자살 할 것도 없어요. 있어야 자살하지, 처음부터 육포인데.
주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마귀야 나온나. 주께서는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마귀보고 이야기하죠. ‘ 나와, 나와. 나와.’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예요. 사도바울도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서 어려운 거 합시다.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는 성립이 안 되고 누구한테만? 예수 안에만 안에가 성립이 돼요. 우리 안에는 안이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우리라 하는 것은 환경의 일부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있는 배경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소통이 되기 때문에 안 밖이 없어요. 우리는 누가 ‘욱’하면 겁냅니다. 개가 갑자가 나타나도 우리는 놀래듯이 우리는 바깥 환경과 분리가 안 돼 있어요. 분리도 안 된 것을 억지로 꽁꽁하게 딴딴하게 이게 완전히 담석생긴 것처럼 내 걸 갖고 있으니까 누가 와서 ‘욱’ 하면 깜짝 놀라서 경기 날 정도로.
철야기도 이런 걸 하게 되면 점점 더 새까맣게 굳어져요. 이건 아주 고질병 걸립니다. 미칠 정도로 기도 안 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돼 버려요. 주의 기도는 우리가 꽁꽁 만든 것을 육포로 만드는 게 기도의 응답인데 우리는 내 여기 꽁꽁 묶어있고 내 것을 더 채우기 위해서 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그런데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한테 뭐가 있어야 될 것을 누가 아신다? 이미 아버지께서 아신다. 이방인들 기도하는 걸 왜 자꾸 하느냐, 자꾸 중언부언하고, 다고 하고 너한테 뭐가 있어야 할 것을 주께서 이미 아신다 했어요. 그것조차 믿는 사람이 없어요. 마지막 때에 그것조차 믿는 사람이 없어요. 실제로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기도를 하겠어요.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기도는 하는 게 아니고 하게 하셔요. 하게 할 때는 언제냐 하면 육포가 덜 돼서 다시 돌섬에 딱 올려놓고 패려고, 패기 위해서 ‘엎드려’하거든요. 완전히 군대에서 ‘엎드려뻗쳐’ 하는 것처럼. 줘 패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팰 때 그냥 패지 않고 탄식하면서 팹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아버지 뜻 기도할 줄 모르는 걸 위해 대신 기도합니다.‘라는 그 내용이 기도를 통해서 받아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귀신 쫓아내니까 그 다음에 주인들이 19절에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끌고 갔죠? 제가 아까 했잖아요. 왜, 말씀만 전하는데 교회 세우는 것도 아니고 말씀만 전했는데 어떻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뭔가 사도바울이 잘못된 걸 했으면 시키지도 않았는데 귀신을 쫒아내지 말라한 것을 쫓아냈다면 벌 받아서 체포되는 것을 인정하겠는데, 지금 귀신도 쫓아내고 복음만 전했는데 왜 가는 길이 이렇게 형편이 나아지질 않습니까? 꼭 우리 인생하고 똑같은 거 같아. 뭐 하나 기도한 대로 되는 일이 없어. 기대한다는 자체가 나쁜 모양이라.
잡아갑니다. 잡아갈 때 베드로 같으면요 천사가 와서 얼마나 신납니까? 뭐 옥문을 열어주고 그러는데 이번에 잡힐 때는 그것도 없어요. 전에 봤던 그런 영화 장면도 안 나온다니까요.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죠. 천사가 와서 강제로 데려가는 식으로 데려가면 좀 수월한데 이건 천사가 오지도 않고 데려가지도 않고 지진이 일어나요.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니까 간수가 지진에 놀라서 도망치는 줄 알고 간수가 깼다 말이죠. 사도바울은 드라마틱한 것도 다 귀찮아요. 빨리 죽는 게 소원이라니까. 루디아고 뭐고 다 귀찮아. 자기 소원은 죽는 게 제일 좋은데, 자꾸 뭔가 옆에 관계가 걸쳐요.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오면서 ‘이번에는 공무원, 간수하나 구원해 볼까?’ 뭐 이런 생각도 없었다니까요. 기대했으면 기대대로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간수가 자기가 죽으려고 지진이 일어나서 다 도망갔으니까, 그런데 보니까 사도바울하고 실라는 안 갔거든요. 안 갔으니까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어, 당신 몸 상하지 마세요. 우리가 도망 안 갔어요.’ 왜 이럽니까? 옛날에는 죄수를 보내면 간수가 대신 갇히든 죽어야 돼요. 옛날에는 간수도 할 짓이 못 돼, 누가 탈옥하면 지가 감옥소 그 자리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니까. 아주 동물적이죠. 그래서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여 벌벌 떨면서 보니까 바울과 실라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 이게 버스 정류장에 보면 교회가 세워놨죠.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대목, 좋든 싫든 간에 한국 나라 사람 중에 예수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특히 이 장림 1998년 10월 18일 날 재림한다고 광고해서 우리나라 전역에서 재림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재림이 뭔지 다 알아요. 알면서도 안 믿지만.
여기에 보면 상당히 난해합니다. 뭐냐 하면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이까, 여기서 간수가 의미하는 구원이 뭐냐, 간수가 어떤 뜻에서 구원을 의미하느냐, 사도바울을 지가 처음 만난 사람입장에서 그것도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이면서. 사도바울의 답변이 ‘주 예수를 믿으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이렇게 돼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나올 때 ‘구원을 받습니까?’를 원인으로 보고‘ 니 구원 받으려면 예수가 있어야 돼,‘ 하고 예수님을 수단, 또는 결과로 봐 버리면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돼야 돼요. 사도바울은 이번에 지진이 일어나고 그리고 귀신이 물러가고 옥에 갇히고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이 되죠. 그럼 예수 안에서는 모든 원인과 결과가 누가 독점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어요. 어제 수요일 날 했잖아요. 인생을 아무리 바꿔보자 해도 다시 태어나도 그 인생 갈 수밖에 없고 그 남편 그 아내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계획 잡힌 대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제가 무거운 철로라 했죠? 무거운 철로! 무거운 철로를 낑낑 거리면서 옮기는 인간 없듯이, 깔아놓은 철로를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받아들이면 굉장히 편해요. 예수님은 모든 것이 원인이고 모든 게 결과예요. 이걸 성경에서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이라. 가락교회서 이걸 뭐로 그렸습니까?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에 걸쳐 있는 축 늘어진 전선이라 했잖아요. 이 사이서 왔다 갔다 할 뿐이다 말이죠.
이 간수는 자기 살 궁리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살겠습니까?’ 하는데 왜냐 하면 옥이 개판되고 자기는 쫓겨나고 죽을 판이니까 자기 살 궁리 했는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되신 것도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것을 당신이 믿으면 당신이 죽든 살든 관계없이 구원받습니다.’ 그런 뜻 이예요. ‘당신 살 궁리하지 말고 주께서 이미 예정한 그대로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났고 내가 잡히고 귀신 쫓아내고 지진이 일어났고 그리고 난 도망 안 갔고 당신은 나를 만났고 나 만나서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천기누설, 구원받는 비밀을 당신은 귀에 들리도록 돼 있는 것.’ 이것이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오면서 주께서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이 준비된 것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것까지 그런 결과마저 자기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주신 결과대로 미끄러져 가고 있다는, 자기는 그냥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죠.
이 말은 다시 말씀 드려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구원받기로 작정돼 있는 것을 제가 수용하겠습니다.’ 그 뜻 이예요. 창세전부터 구원되기로. 내가 몸부림치고 설친다고 구원 더 잘되고 나태하면 구원 못 받는 게 아니라 구원은 내 손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이미 창세전에 주님의 손에서 결정돼 있다는 사실을 내가 뒤늦게 주님의 작품으로서 내가 이렇게 수용하게 된 건데 이것마저도 주의 은혜고 공로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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