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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37강 / 사도행전15:16(다윗의 무너진 장막)20120531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37강 / 사도행전15:16(다윗의 무너진 장막)20120531

정인순 2012. 6. 1. 08:53

 

 

사도행전37강

 

음성1 

동영상

 

녹취:공은주

대전37강-사도행전15:16(다윗의 무너진 장막)20120531a-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15장 16절을 보면“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그렇게 시작되어 있지요. 성경에 보면 내려서 적은 것은 산문이 아니고 시 할 때는 이렇게 내려서 적어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되는데, 특히 16절 말씀은 기록된 바, 라고 해서 구약의 말씀 아모스 9장 11절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라고 누가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야고보가 이야기하죠.

 

구약에서 이런 것이 상당히 난해한데요, 이미 사도가 구약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구약 성경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구약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기 생각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구약 한 부분을 딱 떼 낼 때는 거기에 대해서 ‘아, 내가 한 해석하고는 다른데?’ ‘저렇게 함부로 깨달으면 안 되는데?’ ‘일방적으로 저렇게 해석하면 안 되지.’ 라는 온갖 의견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어요.

 

구약 성경을 딱 떼서 ‘신약에서 지금 이루어졌습니다.’ 라고 했을 때, ‘아니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대목은 그렇게 뽑는 게 아닙니다.’라고 반대의견을 청중에서 들은 사람이 제시할 가능성이 많지요. 그럴 때 이것이 하나의 야고보사도의 개인적인 의견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하는 그 문제가 남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될 것은 사도권이라 하는 것이 사도가 단순히 다른 보통사람하고 자기 의견, 자기 신학적인 이야기할 수 있는 개인적인 의견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사도가 아니라 성령의 권한이 있어요. 특히 이렇게 성경이 기록되어 있을 때는 그만큼 이것이 자기 뜻이 아니고 살아계신 성령의 이것을 성경에서는 영감이라고 하는데 성령의 영감, 하나님의 영감, 성령에 의해서 이렇게 기록돼 버리면 이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구약을 해석했을 때 이 기준에 따라서 해석해야 옳습니다, 하는 그 표준적인 기준이 정립됩니다.

 

그래서 구약에 있는 아모스 이 말씀을 우리가 해석하면서 이 부분뿐 아니고 다른 부분도 해석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시켜야 된다는 의무감을 우리가 지게 되어 있어요. ‘아, 구약은 이렇게 푸는구나!’ 구약이야 우리가 모르면 그냥 글자로 되어 있잖아요. 글자로 되어있으면 구약을 보는 것이 이렇게 사도가 해석하는 것 말고, 일반 사람들이 구약을 해석 하게 되면 뭐가 되겠습니까? 과거사건 되겠지요. 과거사건이니까 과거사건을 본다는 것은 이 과거란 말이 있다는 말은 내가 여기 있다면 남들이 나를 생각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이 과거와 과거사건의 과거를 그대로 연결시켜서 나한테 의미 있는 과거사건으로 일방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많다 이 말이지요.

 

과거라 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 모두를 과거라 하겠지만, 사람이 과거라고 발설한다든지 과거라고 말을 할 때는 경험한 것 중에서 현재 나한테 유리한 것, 현재 나한테 의미 있는 것만 따로 챙겨서 그걸 과거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청도에서 할 때 했지요. 차가 지나가면서 나무 잎사귀이야기 하는 것도 나한테 의미 없으면 비록 경험은 했지만 나한테 의미가 없으면 이것은 과거가 아니에요. ‘아, 그랬어? 나는 몰랐는데.’ 이러면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과거가 있었다 할지라도 지금 하나님께서 나한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을 구약성경의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언급할 때는 현재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과거는 접어야 합니다. 그걸 스스로 자기 부정돼야 되지요. 다시 이야기해서 우리는 어떤 과거를 생각할 때는 반드시 현재 자기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고, 자기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라고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이 의미라 하는 것은 존재의 의미인데, ‘나는 이 땅에서 살아가야 돼, 나는 마땅히 잘났어.’ 이런 것을 위해서 뿜어져 나오는 의미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정당한 사람이야, 누가 뭐라 해도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 것이 항상 마그마처럼 펄펄 끓고 있습니다. 이걸 변호해주고 옹호해 주면 ’그건 맞아.‘ 기억에 쏙쏙 들어오는 나의 과거가 되고 현재 나를 부정할 것 같으면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겠지요.

 

성경의 사도는 수요일에도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사도나 선지자들은 사람들을 긍정해 주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부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거론하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부정이 안 되니까. 갈라디아서1장에 보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했어요. 사람을 좋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했어요. 방금 이렇게 길게 한 것은 한 마디로 줄여서 이야기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안 믿게 한다.’ ‘못 믿게 한다.’

 

분명히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지요. 그런데 하나님에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하면서 못 믿게 만들어버려요. 왜냐 하면 믿음으로 구원받아 버리면 구원받는다, 이야기해버리면 사람들이 믿고자하는 행위를 발휘해요. 그런데 믿고자 하는 행위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 이익과 자기의 존재의미에 이 땅에서 살지만 천국 가서 영원히 불멸하겠다는 그런 영혼을 사모하는 이런 의미, 이런 의미는 창세기3장에서 하나님에게 거부당한 거예요.

 

선악과를 따 먹은 존재가 생명나무를 따 먹어서 선악과 따먹은 그 입장이 계속 이어지겠다는 그 심보, 그런 의도, 이거 아담의 후손치고 지울 길이 없습니다. 어떤 인간이든 이것이 자기의 영혼불멸 그것을 노리고 교회오지, 내가 천국이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천국이 좋다고 느끼는 것은 항상 내가 있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만약 천국에서 빠지고 지옥 간다면 천국은 관심 밖이고 지옥인데 지옥은 힘들지만 내 영역만큼은 숨통 튀는 그런 지옥을 만들려고 애를 쓴다 이 말이지요.

 

남자들이 군에 가면 꼭 그런 일들이 있어요. 군에는 다 고생스럽잖아요. 고생스러운 가운데서도 고참은 또 자기 아지트가 있어요. 지 라면 끓여먹고 밤중에. 그러나 어렵지만 그나마 적응해서 나한테 이익 되는 영역하나 딱 갖추는 것처럼 옛날에 우리나라 못살 때 방 하나에 애들은 다 집어넣고 거실에서 부모는 자는 시대에 분명히 그 방에 아이들 셋 집어넣으면 그 셋 중에서도 꼭 이불 다 덮고 자는 아들 있고, 저 책상 밑에 이불 없이 자는 놈 있고, 그리고 곱살이 껴가지고 덮고 자는 애 있고, 전부다 다 달라요. 분명히 한 방에 집어넣어도. 그것처럼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 문제가 우선이지, 자기 빼놓고 하나님, 예수 찾는 사람 본능상 인간한테는 그렇게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천국이 좋은 것은 지가 천국 간다, 고 생각하니까 좋은 것이지, 만약에 너 천국에 못 간다고 선언하는 순간, 인간은 지옥을 천국 만들려고 애를 쓴다 말입니다. 자기 있는 곳이 천국이니까. 내가 있는 곳을 천국이 안 되더라도 천국 되게 만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천국, 예수님 계신 곳은 타인이에요. 예수님이 좋은 것은 싫어, 내가 좋아야 돼. 내가 좋아야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성은 변화가 없는 겁니다.

 

기존교회 아무리 비판해도 그 교회 돈 넣어놓으면 그 교회 가지 말라 하면서도 자기는 아직도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천국도 못갈 인간을 기어이 넣어주기 위해서는 먼저 무슨 작업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이 인간을 못 믿게 만드는 겁니다. 못 믿게 만들면 믿어야 되는데 안 믿어지니까 여기서 뭐가 생기겠습니까? 절망이겠지요. 못 믿게 하는 방법이 뭐냐, 참 아이러니하게, 모순되게 그걸 ‘복음’이라 하지요.

 

복음은 우리말로 하면 ‘기쁜 소식’ 이지요. 못 믿게 만드는 이야기가 기쁜 소식, 복음이 돼 버립니다. 그럼 누가 이것이 슬픈 소식이 되겠습니까? ‘진짜 나, 안 믿을래.’ 하고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이 복음을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거든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화로 이야기한다면, 등 뒤에다가 하나님께서 밧줄을 묶어서 예수님을 푹~ 잠기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푹 잠가 봄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기다렸던 그 나라에다가 집어넣어 보는 거예요. 필리핀이나 중국에 가지를 않습니다. 거기는 아예 언약 밖이기 때문에 거기는 가도 모르기 때문에. 소위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이스라엘 속에 삭~ 집어넣어가지고 이것은 완전히 피라미처럼 열대 식인 고기처럼 왁~ 달려들어 다 뜯어먹어 버려요. 거기서 죽은 게 십자가거든요.

 

오병이어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개 가지고 5000천명 먹이니까 좋다고 왔는데,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않으면 하니까 다 가버린 겁니다. 이것을 주께서 그대로 사용하십니다. 이번에는 낚시 바늘에다가 예수님을 빼버리고 우리를 집어넣어버려요. 사도를 집어넣어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와르륵~ 달려들지요. 그걸 통해서 예수님을 죽인 세대나 지금 성도를 핍박하는 그 세대나 똑같은 세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같은 세대라고.

 

그러면 성도라는 것은 성도 본인이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미끼로 낚아진 사람이에요. 낚시 바늘에 빼도 박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본인이 안 믿고 싶어도 믿어야 돼요. 어쩔 수가 없어요. 낚시하기 위해서 지렁이 하나 바늘에 끼웠는데 그거 지 힘으로 탈출이 안 돼요. 낚시 밥이 돼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 안에서 너희를 통해서 주께 영광을 돌리게 하심이라, 하는 그거 본분입니다. 그 낚시 바늘이 하나님의 의 또는 영생, 구원 이런 표현으로 성경에 나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구약에 있는 말씀을 방금 읽었던 말씀,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무너진 장막을 지으리니, 요 대목을 한 번 사도적인 관념에서 설명해 보면, 다윗이라 하는 것은 결국 다윗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끼였다. 미끼로 사용했다면 다윗을 사용한 그 주체는 뭐냐 하면 다윗의 자손 또는 다윗의 언약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인간적인 시간에서는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가잖아요. 하나님의 일은 거꾸로 들어갑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가 자꾸 과거를 만들어 내요. 그러니 우리 인간들 관점에서는 과거가 미래고, 미래가 과거가 된 셈이죠. 우리 인간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은 과거가 나를 현재 나를 밀어내고 현재 내가 미래로 나아가는데, 그렇게 당겨주는 것, 내 힘으로 간다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가지만 누가 와서 내 멱살 잡고 당긴다면 미래에서 계속 나를 잡아당기는 셈이 되지요. 미래에서.

 

다윗의 자손은 분명히 다윗이 먼저 있고 난 뒤에 그 육신의 자손이 다윗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 누구냐 하면, 다윗의 자손은 수천 명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성경에서는 1명으로 보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팔이 되어서 수만은 인구가 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를 미래에 계시는 예수님을 하나로 봐가지고 이 하나로 접근하니까 많은 다수가 있더라도 하나에 종속될 사람은 따로 뽑아가지고 이게 144,000명에서 줄여가지고 10이 되고 10에서 1이 되고 이런 식으로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러니 이 잡아당기는 관계를 뭐라 하느냐 하면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언약. 그래서 다윗언약입니다.

 

언약이라는 관계는 여러 명이라도 하나를 쳐다보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대학생들이 놀러가는 것을 MT라 하잖아요. 전부 다 복장 다 다르고 어떤 사람은 기타 들고 오고, 다른 사람은 텐트 들고 오고, 다 다르잖아요. 그런데 그 MT가면서 만약에 짝이라든지, 미팅한다면 각각 개성들이 있더라도 ‘자, 이번에 MT 하이라이트, 신입회원들 미팅 있습니다. 남녀간에 미팅 있습니다. 짝짓기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그 많은 학생들이라도 각자 자기 생각이 있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전부 다 귀를 쫑긋 세우고 모이겠지요. 하나의 의미에 전부 다 집중을 하게 되잖아요. 그게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전부 다 직업 다르고, 개성 다르고, 삶의 환경 다 다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입니다, 라고 할 때는 전부 다 귀를 쫑긋 세우면서 하나로 다 모이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의 머리되고 지체는 여럿인데 결국은 그 여럿 지체가 지체되는 것은 머리가 하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 지체여럿을 여럿이라 하지 않고 하나라고 하는 겁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분명히 여럿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한데 모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가 없어요. 복음이 하나기 때문에 아무리 상황이 다르다 할지라도 복음만 전해보면 같이 동의하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 동의되기 때문에 그걸 억지로 하나 만드는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그렇다면 정치적인 권력체가 됩니다. 정치적인 권력 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이건 주의해야 돼요. 정말 주의해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마을이 십자가마을 전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되고, 우리교회가 우리교회를 전하면 안 돼요. 복음을 전해야 되지, 어느새 갑자기 복음전하다가 우리교회는 괜찮다, 우리교회를 전해버리면 그거는 정치적 단체가 돼 가지고 그거는 적그리스도가 돼요. 우리교회 당회장은 적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난 누구한테 세례 준 적 없다. 바울파가 뭐며, 게바파가 뭐고, 아볼로파가 뭐냐,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 적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피 안 흘렸습니다. 이 말은 피 흘린 분이 따로 있는데 왜 사도에게 주목합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당신들을 구원하지도 않았는데 구원하지도 않은 우리를 가지고 정치적인 파벌을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잘못입니다. 보라하는 십자가 능력만 보세요. 하지만 세상 적으로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이것이 성령 안에서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오늘날도 이유가 되겠지요. 이제 여러분들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는다는 것을 알겠지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라 하는 것은 힘을 합치자가 아니라 이미 장막은 하나예요. 그게 복음이란 말이지요. 복음을 외치면 그것은 한데 모여도 안 모여도 상관없이 무너진 장막이 다시 세워진 겁니다. 세우기 참 쉽지요. 복음만 전하면 되는 거예요. 복음만 전하면. 그러니까 예배당 크게 지어서 수천 명 모여서 하나 된 게 아니고 그냥 복음만 전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되려면 무너져야 되겠지요. 그렇지요? 상당히 논리가 그렇습니다.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었다할 때 다시 지은 것을 가지고 자꾸 소유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이구, 어쨌든 다시 지었으니 나는 새 집에 들어갈래.’ 하지 말고 왜 무너져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무너졌는가? 그 이유를 아는 사람만이 무너진 장막의 취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왜 무너졌을까요? 방금 설명했지만, 이게 종교가 신앙이 뭐로 바뀌었냐 하면 이게 종교단체로 바뀌었기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권력단체. 단체가 되려면 시스템이 되어 버리면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서열 또는 계급이 일어납니다. 한 쪽은 지배하고, 한 쪽은 지배받는 거죠. 이게 바로 육적인 겁니다. 육은 반드시 힘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퇴니스라는 독일 사회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은 이야기하기를 20세기 초반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근대사회는 2가지 사회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이익사회와 혈연사회로 나눠졌다라고 이야기했어요. 혈연사회라 하는 것은 일종의 신분사회 비슷한데 그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 낳고 아들이 아들 낳으면 이거는 빼도 박도 못 하잖아요. ‘호적 파내라.’ 호적 파낼 수가 없어요. 호적 파내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고. ‘아이고, 니는 내 자식 아니다. 이제부터 내 자식 아니다.’ 아무리 큰 소리쳐도 혈연관계는 인위적으로 찢을 수가 없어요.

 

부부야 이건 혈연관계가 아니잖아요.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 빼면 님이 되는 사연을. 부부는 일종의 동업이거든요. 자식 낳을 때 까지만 동업하는 거예요. 둘이 동업해야 되는데 한 쪽이 안 벌면 곤란하다 말이지요. 그리고 많이 버는 쪽에 종속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부부가 이혼할 때 제일 먼저 다루는 것은 증인 이런 거 치우고 재산분할 문제지요. 간음했다, 간통했다, 이런 것은 서양에서는 그런 보호도 없어요. 지가 좋아해서 사는 거. 그거 묻는 것이 아니고 문제는 재산권에 대해서 철저하게 피해입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미국 민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옛날 혈연관계는 뭐냐 하면 권력단체가 돼 가지고 서열이 있어요.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소만 키우면 돼요. 왜 남자가 하늘 되느냐 하면 옛날에 농경시대에서는 많은 숫자가 노동 집약적인 농업을 했기 때문에 모든 농업의 김매는 기술까지 제대로 전수되지 않으면 농토에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모든 식솔들이 그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내기할 때 보세요. 줄 맞춰서 하잖아요. 거기에 자기의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에 생존이 다 달려있은 거예요. 농경시대의 특징이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모든 농경시대는 다 그런데. 이게 산업시대가 돼 가지고 농사지어서 돈 벌이보다도 무역해서 장사해서 벌게 되면 신분사회의 서열이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럼 근본적으로 뭐냐 하면 권력이라 하는 것은 옛날 사회에서는 권력이란 생존에 유리하느냐, 불리하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유리하기 때문에 빌붙어 사는 거예요. 만약에 권력밖에 나가 버리면 생존에 불가 하는 겁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 보면 촌이나 도시나 딸 낳으면 빨리 뭐 하려 합니까? 식솔 숟가락 하나 줄이기 위해서 빨리 뭐해요? 16살, 19살 되면 어디로 보냅니까? 시집을 보내가지고 하루 세끼 먹고 이런 거 빨리 저 쪽에 책임을 밀어버리는 거예요. 밀어놓고 오지 말라고 뭐라 합니까? 한 번 시집가면 니는 그 집 귀신 되어 가지고 거기에 해당되는 거예요. 여자에게는 공부를 안 가르쳤거든요. 교육비가 많이 드니까. 공부는 안했지, 배운 기술은 생존기술은 시집에서 해결해야 돼요. 시집에서 농사를 잘 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을 받는 거예요. 아들 낳아주고 농사기술 잘 협조하면 그 쪽 사람이 되어서 사랑을 받기 때문에 친정에 올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만약에 그 서열, 남자 중심의 서열에 밉보이면 시댁에서 구박당하면, 친정에서는 튕겨나가지요. 완전히 탁구공처럼 양쪽에 가지도 못하고. 그러면 금순이처럼 서울로 가야지요. 보따리 싸고 서울로 노래방 가던지 할 수밖에 없지요. 이게 뭐냐 여자는 권력에 복종해야 되는 거예요. 그거는 남자한테 복종하는 게 아니고 시댁에 복종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집가는 거예요. 여자는 없어요. 시집의 하녀, 하인이에요. 그냥 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곡해지요.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혈육에 의한 생존에 근거한 권력단체로 이스라엘을 만들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고 그거는 이방나라들이 그 짓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의 본성이 만들어낸 나라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언약이 완성되는 언약의 나라에 가려면 바로 그 구조 통에서 인식 틀에서 너는 탈출해야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해서, 출애굽 아닙니까? 탈출해 놓고 그들끼리 모아보니까 또 마찬가지예요. 똑같이 된 거예요.

 

다윗을 좋아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겁니다. 좋은 일을. 그럼 뭘 도와주느냐, 생존에 유리하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윗은 그게 아님을 알았지요. 나중에 시편51편에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나의 상한 심령에 불과함을 알았지만, 일반백성들은 다윗의 신앙을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다윗은 하나님이 도와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말은 나한테 이익이 된다. 그 다윗이란 존재가 나한테 이익을 주고 유리하다,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다윗은 주께서 나를 죄인 되게 만들어서 사람의 세상적인 힘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힘, 죄를 씻어주는 힘이 세상에 돈을 갖고 있는 내 죽어도 사는 힘이 안 죽어야 될 힘보다 더 센 거예요. 다윗이 보기에는 죽는 게 불쌍한 게 아니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불쌍한 거예요. ‘아이고, 죽어도 사는데 그걸 왜 몰라~’ 오히려 안 죽으려고 바둥바둥 모든 권력에 고개 숙이는 모든 인간들이 불쌍한 거예요. 그러면 나는 고개 안 숙여, 고개 안 숙이는 게 옳은 것이 아니고 나는 진작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 나는 나에게 고개 숙일 내가 없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남에게 고개 안숙이게 되는 겁니다. 자기 자신마저 포기될 때 남에게 굽실굽실하지 않지, 자기는 자기에게 포기 안하면서 남한테 굽실한다는 것은 되지도 않는 뗑깡 부리는 짓이지요. 오기지요. 오기.

 

그 오기는요, 유혹 앞에 다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유혹이 오면 유혹을 받으세요. 유혹을 이기려 생각하지 말고, 유혹이라 하는 것은 못 이기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마귀의 유혹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길만한 유혹 같으면 마귀가 주지도 않습니다. 유혹이란 말을 할 때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유혹도 아니에요. 그것은 장난치는 거지요.

 

저는 순대를 안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마귀가 와 가지고 ‘니 내한테 절 안하면 순대 안 준다!’ ‘니나 먹어요. 니나’ 대번 이러지, 그게 뭐가 부럽다고 꼬시겠습니까? 겨우 내가 정말, 제가 어제 수요일날 임재범의 고해 가사 이야기했잖아요. 차라리 내가 벌을 받을지언정 저 여자를 허락해 주소서. 있잖아요. 주께서 지금 보고 계십니까? 거기 내 말 듣습니까? 이러면서. 어찌합니까? 이리 시작하잖아요. 차라리 나를 벌하는 것은 좋은데 저 여자만큼은 내게 허락해 달라는 그런 노래잖아요. 그걸 제가 뭐라 했던가요. 전부다 하나님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 결국 자기 이야기잖아요.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뽑아내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게 바로 무너진 천막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유리한 하나님으로 조작하려는 모든 것, 그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죄를 씻어준다고 했으면 죄인인 줄 알아야 되는데 씻음 받을 것도 없는 의인으로 자꾸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잘난 사람 잔재로서.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그저 죽게 하옵소서.’ 예요. ‘주여, 거기 듣고 계십니까? 죽여주시옵소서.’ 이거였지, ‘보고 계십니까? 저 여자 허락하옵소서.’ 이 말은 그 여자가 자기한테 유혹이 된 겁니다. 그래서 잠언서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인간은 그리워하면 반드시 악을 악에게 넘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워하면. 그리워하면 언젠가 다시 만나는 것은 부활이 이야기한 거고. 그리워~하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부활이 부른 거고, 그거 말고. ㅎㅎ

 

그리워하면 반드시 그 그리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기대하고 희망하는 거, 그건 자진해서 늪에 빠지는 거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성령께서 성도에게는 그리워하게 되면 그걸 찢어버려요. 내가 희망하는 거 다 부셔요. 내 간절한 소망 다 부셔 버리시는 고마움. 이게 뭐냐 무너짐 위에 네가 서라, 무너질 때에 이 무너짐에서 비로소 구원이 시작되는 거예요. 개시되는 거예요. 그 현장은 바로 나의 모든 꿈과 희망이 무너지는 그 자리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그 때만 보입니다.

 

그리워하면 언젠가는 만난다는 그 영화처럼 그러니 이것은 그리워한다는 것은 기존의 자기가 받아왔던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지 맘대로 골라잡는 거예요. 나는 이런 은혜는 싫어, 저런 은혜도 싫어, 하지만 내가 그리워하는 여자만나면 하나님 감사! 이건 누가 선별하고 누가 선택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욕망에 따라서 버릴 것은 버리는 거예요. 그동안 자기가 버린다고 버렸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신거거든요. 내가 현재 소유했던 것을 차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다 말이지요. 우리가 꼴보기 싫다고 버린 것을 주께서 다시 우리한테 줘버릴 때 우리는 괴롭지요. 괴로운 것이 뭐가 기쁜가 하면, 은혜를 못 받아서, 죄 용서 안돼서 괴로운 것이 아니고 왜, 나의 소박한 작은 꿈조차 주께서는 허락을 안 하느냐,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지금 시위하고 있는 거예요. 데모하고 있는 거예요. 대들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눈만 뜨면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세상 재구성이지요. 범죄 재구성도 있지만, 우리는 항상 세상재구성, 항상 나의 꿈에 의해서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는 항상 꿈을 구성하게 마련입니다.

 

단, 성도는 그걸 믿으셔야 됩니다. 뭐냐 하면 내가 꿈꿨다하면 안 되는 줄 믿으셔야 됩니다. 내가 기대하고 꿈꿨다 하면 아예 그건 틀려먹었다고 간주하시면 예상 밖에 기대하지 않은 은혜를 주십니다. ‘아, 이런 기쁨 있을 줄이야~’ ‘아, 내가 죄 용서 받았다는 것이 이토록 기쁘고 감사한 일인 줄이야 몰랐다!’

 

그 다음에 17절 봅시다.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너지게 해서 그 와중에 이방인들을 돌아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우쭐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쭐대면 안 되지요. 만약에 ‘아이고, 이스라엘 꼴 좋다, 얼레리 꼴레리 이스라엘 놀리고, 지는 마치 당당한 개선장군처럼 구원받을 만해서 구원받는다면 그 이방인 교훈은 무슨 꼴이 되겠습니까? 망해버린 이스라엘 그 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이방인들은 나는 아들에서 떨어진, 나는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개가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언약밖에 있는 자인데 이스라엘이 그걸 배신함으로 말미암아 TO가 생겼고 그 TO자리에 이거는 덤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자리가 나왔다는 그런 마음으로 원래 개는 못 들어가거든요. 원래 호텔 같은데 개는 못 들어가잖아요. 천국에는 개 끌고 못 들어간다 말이지요. 그런데도 개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자리가 빠졌으니까 그 빈자리를 주인이 채운 겁니다. 미안하지요. 미안하고 감사하고 그런 마음입니다. 이게 로마서 11장에 보면 그런 이야기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의외로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신앙이라는 것이 의외로 교회라는 친목단체 만들어서 활동하는 거하고 전혀 이거는 별도의 별개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노닥거리는 것도 별개지만, 일상에서 24시간 동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도 신앙이야기는 별종 같은 특수영역을 주께서 일부러 만들어 내는 거 같아요. 특수영역을. 특별한 영역을. 그것을 틈새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이거는 분명히 없는데 없는데서 뭔가 땅이 갈라지면서 숨겨져 있던 것이 솟구쳐 나오는 세계! 이게 바로 말씀세계입니다. 왜, 평소에 우리는 성경말씀에 관심 없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관심 있고, 내 사는 사업에 관심 있고, 내 일에 관심 있고, 내 가족에 관심 있거든요. 그래서 24시간 성경이야기 생각하고 관심 있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없는데 그걸 비집고 땅에서 뭔가 죽순이 올라오는 것처럼 갑자기 가는데 발바닥이 아파, 뭔가 솟아오른 게 있어, 압침이 솟아오른 것처럼.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평범한 이 세상에 갑자기 종기처럼 불쑥 튀어나와서 여기에 붉게 새로운 영역이 튀어나오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자극하지요. 신앙생활을 이걸 소유하려 하지 마세요. 신앙은 소유가 돼서는 안 됩니다. 소유해 버리면 또 무너진 이스라엘 꼴이 되어 버려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오류와 과오를 선배 격으로 먼저 다 보여줬다는 겁니다. 이러면 너희는 망하느니라, 하는 것을 다 보여줬어요. 다 보여줬어요. 그 기본은 뭐라 했습니까? 권력. 나를 위한 권력. 권력이 있으면 반드시 서열, 집단 거기서 지시하는 자와 명령 받는 자 이런 계통, 그건 딱 교회지요. 교회라 보면 돼요.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 와서 목사한테 구절 하는 것이 목사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쪽 단체에 순종함으로서 내가 나한테 복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노림수 때문에 복종하는 겁니다. 옛날에 권력이 나의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그러한 육의 본성이 계속 습관화 만들기 때문에. 교육이라는 것은 바로 교회라 하는 것은 좋은 습관 만들기입니다. 좋은 습관이라 하는 것은 학습에서, 반복적인 학습을 해서 몸이 익히면 습관 되고 습관이 되면 좋은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학교 안가고 퇴학당해서 저희들끼리 놀게 되면 누가 교육해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면 담배 안에는 15가지 발암물질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잖아요. 간접적으로 피우게 되면, 암이라 하는 것은 기존세포는 지 자리에 앉는데 모든 세포는 자리가 있어요. 자리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백혈구밖에 없습니다. 자기자리는 안 있고 돌아다니는 놈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암세포입니다. 그 암세포는 자꾸 전이돼요. 가만있지를 못하고 자꾸 돌아다니는 거예요. 오히려 혹 같으면 괜찮아요. 피를 타고 돌아다니니까 온 몸에 두뇌까지 안 걸리는 게 없다는 거예요. 다 전이되는 거예요.

 

평상세포가 암세포 되는 것을 발암물질이라고 하는데 담배 피우는데 15가지가 들어있다 말이지요. 그걸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막대한 세금 떼고 나라에서 담배 피우게 만들고 발암물질이다 하면서 신문에 크게 내면서 담배피우는 것은 그냥 방치하고 이런 것은 학교에서 가르쳐 줘야 되는데 선생님이 담배피우니까 아이들도 마치 일찍 어른 되는 것처럼 공명심, 그렇게 되는 거예요. 가정에서도 남편이 피우니까 결국 하늘같은 남편이니까 간섭도 못하고. 이 세상에서 기대하지 맙시다. 이걸 가르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인간을 가르쳐봐야 이게 다 인간의 유리와 불리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지 욕심 챙겨가면서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합니다. 우리는 성도건 아니건 관계없어요. 지 욕심만 챙기다 죽어 가는데 그럼 구원은 어떻게 되느냐, 밑에서 새롭게 주께서 사건을 만들어 준다니까요. 사건을.

 

내가 24시간 말씀 생각한다고 그게 신앙이 아니에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돌출이에요. 돌출. 돌출이 그 때 그 때마다 쑤셔줘야 돼요. 언제부터 우리가 예수를 좋아했습니까? 지만 좋지, 예수님 안 좋아해요. 그런데 자기가 미워지게 만들게 함으로서 주께서 그 짧은 순간 좋아지게 하는 사건들이 있어요. ‘아이구, 내가 죽어야 되는데, 안 죽고 내가 미워.’ 그렇게 그걸 유발시키면서 그게 ‘나는 개 맞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개인데, 지옥의 개인데, 천국의 개 된 것은 누가 안 믿으니까 다이아몬드인지도 모르고 ‘으이구, 이거 반짝이는 게 유리 같아.’ 하고 버렸는데, 이거 주워보니까 왠 횡재, 다이아몬드라, 이처럼 누가 버린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혈에 용서함을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눈에 번쩍! 띄어서 알아볼 수 있는 영안을, 성령을 통해서 그걸 보게 해가지고 ‘십자가 버렸어! 그럼 내가 주우께. 니는 십자가 말고 많이 행해라, 나는 십자가만 믿을게.’ 이렇게 줍게 된 겁니다.

 

주워온 그 다이아몬드가 내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맘껏 빛을 반사하니까 우리의 더러운 것들이 그게 더러움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게 20절에 나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것은 바로 이방인들이 율법은 없지만 적어도 이방인들이 성도가 되었으면 자기가 어떤 죄악된 문화 속에 있는가를 스스로 자각 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다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성도답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이런 그야말로 이방적인 문화 그런 것하고는 이렇게 거리를 둬라 말이지요. 거기에 흠뻑 빠져서 까불지 말고 그 정도만 당부했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하고 사도바울사이에서 하나의 협약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타협적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가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유다나라 본부에서 누굴 보냈느냐 하면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유다까지 예루살렘으로 내려왔으니까, 지도로 봐야겠어요.

 

안디옥이 지중해고, 여기가 이스라엘이잖아요. 위에는 시리아, 터키 있고, 이라크,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왔다 말이지요. 내려왔을 때 이방인들 성령 받아서 구원받았으니까 당신들 유다나라에서 율법 안 지켰다고 그렇게 시비 걸지 마세요, 라고 타협을 봤잖아요. 보고 난 뒤에 동의한다는 뜻에서 실라와 유다 두 사람을 사도바울이 다시 안디옥 갈 때 따라 보낸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23절 보면, 안디옥과 수리와 길리기아 이런 지방을 다니면서 전도를 하게 되지요. 37절에 보면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안디옥에 와서 바나바하고 사도바울하고 전도를 하는데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했고 마가복음 지었던 그 마가입니다. 바울은 데려가지 말자해서 서로 싸웠어요.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수리아와 길리기아, 터키 쪽으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16장 6절에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갈라디아, 브루기아 이쪽인데, 사도바울이 가면서 북쪽으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16장 7절에 보면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는데 바다 건너서 반도 위에 마게도냐 사람이 꿈에 나타나서 우리를 도우라 했다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신학교 때 이 대목을 보면서 굉장히 가슴이 아팠던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아시아, 특히 작다고 소아시아 이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바다 건너서 현재 그리스 마게도냐 이쪽에 여기는 뭐가 있느냐 하면 빌립보가 있어요. 빌립보로 가게 되거든요. 누가 그렇게 지시했습니까? 사람이 했어요? 누가 했어요? 성령이 그렇게 했지요. 그럼 생각해 보세요. 성령이 그렇게 했으면 앞으로 이 정도 하나님께서 뭔가 뒤따르게 했으면 편하게 해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오늘 우리 집에 잔치 있는데 오세요. 해놓고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으면 말이 안 되잖아요. 이거는 예의가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성령께서 마게도냐로 갔으면 ‘야! 앞으로 하는 일마다 복음 전하면 주께서 도와주시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하라 했으니까 이제는 잘 풀릴 것이다.’ 했거든요. 죽을 뻔 했습니다. 죽을 뻔이 아니고 아예 그걸로 죽었지요. 사실은. 그걸로 건너가 로마에서 죽었으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사람을 잡자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냐, 우리가 구원의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에요. 우리의 십자가는 항상 머리속에 지식으로만 담겨있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십자가거든요. 교과서에 든 십자가가 흘러내려서 온 몸을 적시는 십자가가 되려면 예수님의 가신 그 상황이 우리에게 들이 닥쳐야 됩니다.

 

복음 때문에 모독하고 우리는 그냥 주웠는데 십자가를 주워가지고 ‘야, 이거다!’하고 끝나 버렸는데, 다른 사람은 그걸 보배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고 지옥가려고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 있는 척하고 그러면서도 복음 사랑하는 사람들 핍박하는 그러한 것에서 수모를 당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늘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외로움입니다. 그리고 외로움보다 더 심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움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차라니 내가 관심을 아예 안 두면 저 쪽에서 나를 미워해도 밑천을 들인 게 없어서 마음 편한데 계산을 맞춰보니까 손해 볼 것은 없는데, 실컷 전하고 사랑해 줬건만, 이것이 나중에 배신으로 되돌아 올 때 우리한테는 어떤 살 여망이 없지요. 비록 힘들어도 가족이라는 게 뭡니까? 밥 못 먹어서 가족이 아니라 힘들어도 내 희생을 알아주는 그런 보금자리가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살잖아요.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는 그 덕으로 산다고요. 신혼 초에 한 달에 수입이 천만원 되고 그러지 않는다 말이지요. 신혼에는 전부 다 어렵고 하지만, 그래도 신혼 초에는 단칸방에서 웃고 재미나는 이유가 그대 있음에 나는 그걸로 족하다 이 말 아닙니까? 다들 그랬잖아요. 그까짓 흑백 TV면 어때요. 그냥 같이 한 곳을 바라본다는 그 자체로 이미 사랑인데. 신혼 초에 커플티 부터해서 사진 찍어 하트모양 해놓고 촌스런 액자 해놓고 그림도 해놓고 옛날 여자 같으면 수놓아서 당신은 돌보고 나는 집에서 하트수놓다가 퇴근하면 앞치마입고 밥상 차리고. 고거 알콩달콩 사는 그거 있잖아요.

 

국민하고 1학년 2학기 때 나오는 순이엄마처럼. 삽화에 나오는 철수엄마 있잖아요. 초등학교 때는 그 순이엄마가 최고예요. 얼마나 예쁜지, 삽화에 나오니 예쁠 수밖에 없지요. 영희야, 철수야, 놀자, 나하고 놀자, 거기에 나오는 삽화, 그 아빠 보세요. 양복입고 넥타이 메고 그 아빠 보세요. 옆에 가방 들고. 직장 회사 갔다 와 가지고, 그 회사 짤린 줄 모르고. 짤려서 공원에 놀다온 줄 모르고. 어쩠든 간에 이 세상에서는 그래도 힘들지만 참을만한 것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를 주변의 인물들이 나란 존재에 대해서 내 희생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고 응답을 해준다 이 말이죠.

 

언제부터인가 무시하고, 모독하고, 자기의 스트레스를 나한테 풀고 그럴 때는 우울증 걸려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 때는 죽던지, 기차에 뛰어들던지, 약 먹던지, 물에 빠지던지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안 그러면 가출하던지. 그런데 그 모든 모양새, 그 모든 모양새를 주께서 익히 아시고, 구원이라는 게 뭡니까? 구출이잖아요. 그 갇혀있는 것이 기껏 아는 전통적인 나의 과거, 추억, 현재, 미래라는 틀 속에서 그 시간의 틀 속에서 이걸 거기서 끄집어내서 바깥으로 바람이 부는 시원한 변화산위에 세우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로 하여금 그런 수모를 당하게 한다고 나의 개 같은 내 모습을 진솔하게 보게 하는 그것은 바로 말씀의 몫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요약하면, 무너짐 속에서 비로소 주님을 본다는 거예요. 그 무너짐이라 하는 것은 모든 걸 내 위주로 살던 그것이 무너지고, 그것도 반복적으로 돌아서면 또 내 위주로 내 위주로 안 선다 해 놓고, 또 내 위주로 아침 되면 눈만 뜨면 또 내 위주로 가는 것을 밑에서 죽순 올라오듯이 발바닥에 또 쑤시고 들어오지요. ‘아, 이게 바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지, 내가 결심하고, 용기내서 다짐하고 마음에 다짐하고 다짐해서 천국이 뚫리는 데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