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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대전120830a-행16:35(자유)40강-이 근호목사
사도행전16장35절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그러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대목을 설명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상당히 개인적인 형편에서 난처한 형편을 벗어난 그것을 구원이라 했는데 사도바울은 그 구원의 개념을 확산시켜 버립니다. 확산시켜 버리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과거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냐, 이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왜냐 하면 과거의 상태라 하는 것은 어디서 발생되는 상태냐 하면 기존 세계에서 발생되는 상태가 과거의 상태거든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자체에서 벗어난 것이 구원이죠. 예를 들어서 지금 내가 만약 불행하다, 불행하다면 사람이 회복한다는 것은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행해지니까 불행하기 전에 행복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자, 하는 것이 정상이라 하거든요. 이걸 사람들은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말하는 뭘 얻느냐 하면 회복이란 뜻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구원을 회복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가 좋았던 것은 과거에 경험해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하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행복하다, 불행하다, 행복과 불행, 불행과 행복, 그네 타듯이 이 세상 안에서 나는 행복했었어! 지금 불행해! 다시 구원받으면 회복되면 다시 그 때 좋았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이렇게 돼 버리면 이 사람이 왔다, 갔다하는 자리는 역시 이 자리 자체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죠. 그러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행복이냐, 불행이냐, 자체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면 회복이 아니지요. 되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되돌아가는 게 뭐냐, 그걸 가지고 ‘창조’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이 나를 가지고 새로운 일,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내가 예상도 못한 새로운 것을 감행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선교단체나 교회에서 말하는 비전이라는 것, 꿈이라는 것 또는 소망이라는 것, 희망이라는 것은 전부 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전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기존에 있는 것을 근거로 해서 여기서 더욱 확장되는 것을 가지고 비전이라 하거든요. 지금 내가 여기 있는데 지금 내가 뭔가 모자라는 것을 하나님이 채워줬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기존에 있는 것을 꽉 쥐고 있는 형편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죠.
그런데 창조라 하는 것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거예요. 부수는 거예요. 잊으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왔던지 간에 그건 다 구닥다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걸 이야기하면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로 나아가는 쪽으로 간다 했지요. 사람들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가지고 소망이라 했고 비전이라 했고 희망이라 했고 꿈이라 했다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미래가 이미 실재하고 있어요. 우리가 보기에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주님은 이미 미래가 와있어요. 미래가 와 있는 것을 여기에 있는 자를 미래로 잡아당기는 거죠. 그러니까 시간 속에서는 설명이 안 되니까 공간적으로 차원을 나누어서 설명하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세계를 위에 놓고 인간이 행복이냐, 불행이냐, 만날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오늘은 행복할까? 어제보다 더 행복해질까? 어제 같은 재수 없는 일은 나타나지 않아야 돼! 오늘은 더 행운이 많아야 돼! 이렇게 이 안에 있는 전체를 위로 끌고 가는 겁니다. 끌고 갈 때, 아래 쪽 세계에서 위 쪽 세계로 넘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단절’이라고 설명하면 돼요. 단절.
우리가 생각하는 희망은 내가 기존에 있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어요. 아, 장차 내가 지금 이런 형편이니까 주께서 은혜주시면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상황이 될 것이다, 하고 짐작하고 예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창조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예상 못한 것을 제공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황스럽고 단절을 느끼지요.
아브라함이 애기를 가질 생각을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아브라함이 애기를 갖은 시점이 언제냐 하면 자기가 드디어 애기 낳는 희망을 접었을 때, 비로소 주께서 애기를 줍니다. 만약에 애기 낳는 희망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주질 않지요. 왜냐하면 단절이란 성사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내가 계속해서 애기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아직 자궁이 죽지 않고 재 기능을 한다 싶으면 아브라함은 자기 쪽 아기를 내 쪽에서 출발한 희망으로서의 내 자식, 이 꿈을 접지를 않지요. 그런데 아내도 이미 아기를 못 낳고 그렇게 됐을 때, 3명의 천사가 찾아 듭니다. 미래에서 날아온 미래소년 코난 이지요.
미래에서 날아와 버리지요. 천사 셋이 미래를 갖고 있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미처 모르는 미래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는 세 명의 천사가 방문합니다. 방문했을 때 아브라함의 손을 들어 줬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 계획에 아브라함을 집어넣었을까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후자지요.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은 나의 소원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 말은 나의 간절한 기도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내가 지금보다 더 우수한 존재가 되는 것에 관련돼 있어요. 이렇게 되면 단절이 아니에요. 연속이 돼요. 우리는.
연속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뭐냐, '자아 불면성'이라 해요. 죽어도 내가 죽지 아니한다. 내가 죽는다할지라도 다른데 가서 또 사는 영혼 불면성 또는 자아 불면성에 대해서 모든 철학에서 종교에서 하나의 미끼로 던지는 거죠. “어떻게?”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들은 영생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철학의 미끼입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니고데모에게도 이런 성향이 있었지요. 니고데모가 얼마나 집착이 강해요.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기어이 자기는 죽고 싶지 않다, 영생 얻고 싶다하는 거예요. 이럴 때 주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다시 말해서 밑의 차원이에요. 밑에 차원은 계속해서 아무리 몸부림쳐봐야 밑에 차원을 못 벗어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는 이걸 무엇이라 하느냐 하면 죄에 갇혀있다, 또는 율법에 갇혀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는 이걸 가지고 "너희들은 세간살이로서 주인한테 매여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갇혀 있다, 묶여 있다, 다 같은 말입니다.
로마서5장에서는 뭐냐, 죄 아래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전부 다 같은 말이에요. 이런 말들을 설교자가 불쑥 내뱉어버리면 그걸 내뱉는 설교자도 없지만, 하여튼 성경에 있으니까. 보통 내뱉어 버리면 갑자기 교인들이 교회 와서 자신이 기도 했던 모든 제목들을 스스로 수습하고 철거해야 될 판이에요.
교회 나온 목적이 뭐냐 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진다. 어제 설교에서처럼 이익을 얻기 위해서 오잖아요. 인간은 손해 보는 짓은 안 하지요. 어제 에스겔 선지자가 뭐라 했습니까? 이익 본다, 손해 본다, 자체를 초월해 버리니까 이거는 일반사람이 보기에는 정상적이 아닌, 비정상적인 사람인 거예요. 대전에 교회에 등록한 사람이 80만 이라고 했습니까? 그 80만 중에서 손해 보려고 온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교인이 아닌 거예요. 아무도 구원 못 받는 겁니다. 목사는 그것 가지고 장사하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소원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뢰기만 하면 언제든지 얻을 만반의 준비가 우리교회가 하나님에게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의를 표하시면 되는 겁니다." 성의를 표하는 것은 돈 내는 거지요. "성의를 표하시면 성의에 대한 보상은 얼마든지 줍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 보상차원에서 자기의 꿈들을 성취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구원된 게 아니고 갇혀있는 사태를 더욱 더 범위를 넓혀 가는 겁니다. 갇혀있는 범위를 좀 더 넓혀 보는 거예요.
이 강의실 홀 안에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아이고, 아이고 더워서 못 살겠다. 문 열고 대전거리에 나가버리면 그 사람은 요 지점에서는 구원받은 것 같지만, 그 사람은 어디에 갇혀 있는 셈이 되는 겁니까? 대전 시내에 갇혀 있는 셈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 육으로 드러난 것은 백 날 해봤자 여전히 육에 갇혀있는 꼴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니고데모는 주님만나서 절망을 더 키운 겁니다. 주님만나서 해결책 보려하다가 단절성을 더욱 확실하게 느낀 겁니다. 예수님께서 엉뚱한 이야기를 계속 하는 거예요. 바람같이 부는 성령이 아니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 해서 저 코앞에 있던 하늘나라를 주께서 저~ 쪽으로 치워버립니다. 아이고, 다 왔는가 싶으면, “오! 다 왔어. 내가 치워줄게” 해서 다시 하늘나라를 건널 수 없는 그 도랑 맞은편에 하늘나라를 치워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잡았는데 예수님은 사람 속에 잡히지 않고 사람들이 같이 동참할 수 없는 길로 가버리지요. 죽음이라는 길로.
우리 집사님 인테리어할 때 아름답게 했지요? 예술적인 것은 아름답게 하잖아요. 그래서 교회에서도 신에게 아름다움을 드리려하거든요. 그런데 보세요. 십자가가 아름답습니까? 그러니까 종교라는 게 기독교라는 게 수상해요. 뭔가 가짜 같아. 분명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에요. 모든 게 예술이다. 그런데 십자가는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흉합니다. 이사야 53장 나오지요. 흠모할 것을 집어내어도 집어낼 게 없어요. 흠모한다는 말은 마음이 당긴다는 거예요. 마음이 당기는 게 전혀 없어요.
그것이 우리에게 밀어 닥치게 되면, 아름다움을 흠모함으로서 나 자신이 같이 가치가 높아지게 되어 있거든요. 사람은 선한 것을 사모하면 사모하는 나도 덩달아 선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이 되는데 주님께서 흠모할 것이 없는 십자가가 쳐들어오면 이것은 반대로 나로 하여금 구덩이로 집어넣는 거예요. '이런 쪼다!' 이런 식이다 말이지요. '이런 죄인, 이런 막 되먹은 인간 있어. 이런 쓰레기 같은.' 이런 식으로 들어와 버리면 이건 오물을 뒤집어 쓴 것과 같은 거예요. 지금 방금 샤워하고 비누향기 냄새, 샴푸 좋은 거 써서 향기 팍팍 피워서 하나님의 향기라 해서 하는데 갑자기 십자가 오물 뒤집어 써 버리면 도대체 나는 아름다움을 추구할 자격도 없는 존재란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그걸 느낀 거예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내가 추구했던 모든 것은 방향이 달랐습니다. 다른 방향을 추구한 겁니다. 엉뚱한 방향, 주님이 계신 곳이 아닌 마귀가 있는 곳을 가지고 우리는 거기다가 마음을 거기다가 빼앗긴 겁니다. 마귀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 넓은 길, 좁은 길을 괜히 그냥 심심풀이 땅콩처럼 한 소리 한 게 아니거든요. 찾는 이가 없으니라, 는 말을 왜 했겠습니까? 니는 니 자신을 몰라도 이 예수 나는 너희를 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뭘 지향하고, 뭘 추구하고, 무엇 때문에 집회 열리고, 무엇 때문에 철야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주께서 다 아신다는 거예요. 그거 해도 그거 다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의 예를 들면,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 십일조, 바치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우리가 도리어 받고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한테 헌금을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한테 헌금을 하시는 거예요. 왜? 우리의 소망을 이루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예수님 자신을 다시 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닮아야 돼요.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닮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생겨났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쓰레기통을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그래서 십일조 덩어리 채 우리가 뒤집어씌워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십일조가 돼 버려요. 구별된 존재가 됐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허리에서 레위지파 나와서 아브라함 허리 안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레위지파가 아브라함허리에서 이미 십일조 한 셈이 되어 버렸어요. 레위지파가 십일조 한 적도 없는데, 이미 아브라함 안에서 십일조를 완료한 셈이 된 겁니다. 그 아브라함과 태어나지도 않았던 레위지파의 연관성을 히브리서 7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과 그 뒤 예수님 때문에 있었던 우리와 연관을 지어버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받쳤던 십일조가 된다면 우리도 여기서 십일조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족보와 멜기세덱의 족보입니다. 멜기세덱의 족보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두 발을 땅에 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분명히 걷는데 발이 땅에 대질 않아요. 그걸 뭐라 합니까?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거예요. 뭔가 붕~ 떠있는 상태인데, 땅과 단절되어 있으니까 '도대체 저 존재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라고 한다면 그 멜기세덱이 하늘의 제사장이거든요. 하늘에서부터 거꾸로 이 지상을 향하여 뻗어 나온 나무줄기처럼 그렇게 뻗어 나온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거예요.
생명은 위에 있고 땅에 살아가는 이것은 그냥 목숨에 불과하고, 목숨은 따라 가는 거예요. 나중에 가면 70,80 되면 치매 걸리고 병들고 요양병원 가서 퍼져 있어야 돼요. 뭔가 달아 지는 것이고, 그게 달아 질수록 저 쪽의 생명은 더 가까워지는 거죠. 이걸 물리에서는 도플러효과라 하지요.
앰블런스가 가까이 쫙 오게 되면 소리가 가장 짧아요. 멀어지면 소리가 길어지거든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빨리 이 몸이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이유가 원래 그 출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고향이 하늘에 있으니까 고향이 저 쪽 출신인 거예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 못간다는 말을 설명할 때, 육이 시도하는 모든 몸부림과 종교적인 그러한 노력과 대비시킬 때만 영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이 단절을 설명할 때, 부정적인 용어만 동원될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한계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헌금하면 되겠습니까?’ 헌금도 아닙니다. ‘전도 할까요?’ 전도도 아닙니다. 부정적인 용어만 사용하는 거예요. 예배참석도 아니요, 심지어 믿음도 아니요, 소망도 사랑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에 나오잖아요. 항상 부정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믿음도 아닙니다. 뭔가 아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수련회 때,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랜붕 스쿨에 나오는 갸루상 이야기를 했잖아요. ‘혈액형이 뭡니까?’ ‘O형 아닙니다. A형도 아닙니다.’ ‘그럼 O형도 아니고 A형도 아니면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사람도 아니무니이다.’ ‘누굽니까?’ ‘갸루상입니다.’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건너갈 수 없는 거예요. 건너갈 수 없다는 것은 언어로서 설득이 안 된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2장에 보면, 내가 하는 말은, 내가 하는 말을 ‘믿으세요’ 하면 간단한 말을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내가 하는 말은 사람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요, 또 아니요 라는 부정적인 용어가 또 집어넣는 거예요. 오직 성령의 나타남으로 하고 지혜로 한다. 자꾸 부정적으로 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설득해서 나를 구원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했더니만 구원 받았다는 소리를 이게 아니라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거예요. 권사님 아까 국수 먹었지요? 오늘의 본문 들어갑니다. 사도바울이 국수 먹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국수를 먹는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뭐하겠습니까? 육개장을 먹겠습니까? 뭘 먹겠어요? 국수를 먹는 거예요. 행여나 조금이라도 그런 모방이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될까봐. 그런데 사도 바울이 국수를 먹은 것은, ‘갸루상 사람이 아닙니다.’ 국수를 먹은 것이 보탬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사도가 사도됨으로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자기는 부득불 한다고 했거든요. 부득불. 이것은 인간의 육은 모방으로부터 해서 육은 육으로 종교라는 것을 전염시킨다는 것을 감안한 조치입니다. 인간 대 인간은 보편성이 있는데 그걸 설명하는 거예요. 지금 다음 본문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을 잡아두고 풀어주니까 사도바울이 로마의 시민이기 때문에 나는 그냥 나가지 않겠다, 하는 말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어려운 이유가 보통 신앙이야기하면 용어가 신앙용어이기 때문에 알기 쉽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실상을 집어넣어 버리면 더 어려워요. 실상이.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모든 행동의 의미를 물컹물컹한 죽, 수프로 녹여 버립니다. 파라핀이나 양초를 솥에 집어넣고 불을 피우면 뭐가 됩니까? 분명히 형태가 있었는데 불 피워버리니까 전부다 물 되어 가지고 휘휘 저어보면 길죽한 것, 네모난 것, 다 없어지지요. 모든 인간을 죽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음악가다, 나는 국회의원이다, 판사다, 의사다, 양초처럼 모양새가 다 달라서 모양새가 그들의 자존심이 되는 겁니다. 나는 직업이 목사다, 나는 사업한다, 있는데 이걸 솥에다 넣고 휘휘 저어보니까 로마서5장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전부다 죄인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로마서3장 말씀처럼. 이걸 지금 작대기로 사도바울이 휘휘 젓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그 당시 사도바울을 잡은 경찰이에요. 나는 행정관이고 경찰이다. 나는 당신이 죄 있다고 여기고 고소해서 체포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죄가 없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풀어준다. 이 말은 나는 당신을 풀어주고 안 풀어주고는 우리의 행정력에 우리의 갖고 있는 권한에 달렸다. 라고 할 때, 사도바울이 저 쪽의 권한을 어떻게 파헤쳐 녹여 버릴까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나는 로마시민이기 때문에 로마시민을 어떤 법적 절차 없이 함부로 구류한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을 져야 된다. 라는 식으로 나와 버리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윗 쪽 세계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율법이 없는 자는 율법이 없는 식으로 라는 선교방법을 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래쪽 세계 행복하면 불행이며, 불행한 자는 행복으로 바꿔주는 것이 아니고 불행자체도 이것도 행복인 줄 알아라, 해서 행복→ 불행, 불행→ 행복, 왔다 갔다 하는 개념자체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윗쪽 세계를 아래쪽으로 증거 되는 겁니다.
머리에 새치 났습니까? ‘주여, 안 나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우스운 기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기도할 게 없으면 이런 기도가 돼요. 심심하면 이런 기도라도 해야지. 하도 집안 잘 풀리니 기도는 해야 되겠고 집안은 잘 풀리고 기도할 게 없으니까 이런 기도라도 해야 되는 거예요. 버스가 빨리 안 오면 주여! 빨리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제발 내가 왔을 때 버스 안 떠나게 하옵소서. 하고 이른 아침에 출근하면서 온갖 기도한다고요.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은 어디에 매이게 되느냐 하면, 버스시간에 매여 있고 자기 두피에 나와 있는 머리카락에 매여 있는 인생이 되는 거예요. 갇혀 있는 인생이 되는 거예요. 누가? 자기가 자기한테.
인생이란 뭐냐 하면 ‘인생’ 에 뭐가 들어 있지요? ‘인’자가 있지요. 인생은 누가 피워내는 냄새입니까? ‘인’ 자기가 피워내는 인생이라 하잖아요. 이것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인 틀과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탠다면 공간, 공간은 뭐냐 하면 새들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요. 귀소본능이에요. 인간은 연결되면 자기 집에 오잖아요. 또 자기 집을 떠나서 멀리 가있으면 그 쪽은 고향으로 느껴지지 않고 자꾸 타향에 왔다고 느껴지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공간개념이 출생한 공간개념을 그대로 지니고 서울에 유학간다든지 미국에 이민 간다든지 해요. 내가 죽을 땐 그래도 한국에 가서 죽어야지. LA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 땅의 흙과 차이가 없는데. 아니야, 거기는 내 추억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기억둥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이 특히 비 오거나 날씨가 흐릴 때, 차타고 기차 타다보면 갑자기 불현 듯 옛날 생각이 나지요. 그 때 옛날 생각을 분석해 보면 그 때 그 생각이 아니에요. 이걸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2012년도에 기차를 탄다. 갑자기 어느 지점을 가는데 기차를 타고 가는데 2005년도에 날씨 흐리거나 비 오게 되면 변화가 주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정지되어 있지요. 그 시간이 정지되면 그 시간을 매우기 위해서 자기 기억의 저장고에서 기억을 끄집어내게 됩니다. 그 때 그 시점은 그 때 그 시점의 느낌이 아니고, 그 때 그 당시의 인생관에 준해서 봤던 그 기억이 그 때 느꼈던 기억이 되는 거예요. 그 전까지 누적된 그 인생관.
그래서 그 기억이 접하다고 하는 동시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 때 잠시 느꼈지만 그 때 그 인생을 조립을 해줘야 이 느낌이 오기 때문에 조립이 이미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조립이 불가능해요. 조립이 안 돼요. 그래서 잠시 눈물만 흘릴 뿐이지요. 다시 깨면 2012년도로 돌아와 있지요. 이럴 때 여기서 뭐가 오느냐 하면 박탈감, 상실감, 우울증의 전조가 됩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정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우울증이라 하는 것은 과거가 모여서 지금 현재를 말로 설명 못하는 지금 현재를 대체해서 과거 속에 묻혀있으면 과거의 흘러간 것과 지금의 흐르는 것과 다르니까 다른데서의 그 간격을 자기 몸을 과거에서 벗어나서 현재로 바꿔줘야 되는데 바꿀 수가 없는 거예요. 바꾸지를 못하니까 과거는 없지요. 정신과 몸은 과거가 되고 지금 현재는 낯서니까 자기 위치가 없으니까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하는 겁니다. 인간의 과거가 기억이 문제라~ 기억이 문제예요. 정박아들은 자살 안하잖아요. 기억이 문제예요. 그래서 비 올 때나, 흐릴 때는 사람을 굉장히 위험한 시기가 되는 거예요.
로마시민인 나를 이렇게 함부로 보낼 수 없다고 해서 너희들이 갖고 있는 권력이라는 것이 이것은 내가 증거 하는 구원의 세계에 부합되지 않는 그 아래쪽의 세상에 속하는 구분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구원 받을 때, 결국 뭐가 됩니까? 구원 받게 되면 ‘자유’지요. 그러면 구원이란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경계’거든요. 경계.
너는 경찰관이고 나는 피고다, 라는 경계. 나는 판사고 나는 너를 풀어주고 내가 가둬두면 니는 감옥소에 가는 거야. 라는 경계를 사도바울은 넘나들지요. 이게 뭡니까? 자유인 거예요. 이건 대통령 앞에서도 할 소리 다하고, 시장 앞에서나 심지어 자기 돈 주는 사장이나 자기 구매자 앞에서도 지 할 소리 다 하는 사람이에요. 사람을 대할 때, 죄인으로 보는 거예요.
왜 죄인으로 보는 줄 알아요? 무시해서가 아니라 평소에 자기 자신의 육을 심하게 무시해 버리면 상대방의 기에 눌릴 이유가 없어요. 그걸 자기 부인이라 합니다. 자기는 쪼다고 자기는 주님을 죽였던 가해자고 나는 내 자신이 꼴 보기 싫으면 남이 나한테 잘난 체 하는 것도 꼴 보기 싫어요. 왜냐 하면 내 자신부터가 이미 죄인이라고 정리가 돼 있잖아요. 이미 인생관에서.
정리된 이상 상대방이 잘난 체 하는 것도 수가 다 보여요. 만약에 자기가 잘난 체 하고 살려면 상대방 만날 때는 상대방에게 내 잘난 체 하는데 보탬이 되는 식으로 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대접하게 되면 저 쪽에서 나한테 대접하니까 상대방이 대접하는 거 끌어 모으면 잘난 내가 더욱 더 잘난 존재가 될 것이라는 그런 통밥, 계산이 서 있다고요.
그런데 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해버렸어요. 나는 그야말로 똥이라는 빌립보서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배설물이다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배설물에 지나지 않다, 그리고 구원은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긍휼로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문에 구원된 것이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붙잡고, 소망하고 이런 것 때문에 구원된 게 아닌 것을 안다면 누가 예수 잘 믿는다고 잘난 체 하는 그것도 전혀 부럽지 않아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타인에 대해서 억매이지 않는다. 그리고 타인의 것이 부럽지 않다. 그렇게 되면 주께서 직접 제작에 나선 성도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제작에서 관계가 끊어진 사람 같으면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남들이 호응이 있어줘야 되거든요. ‘아~ 나, 이거 되고 싶은데.’ 하면 다른 사람이 와서 붕~ 붕~ 띄워 주면 ‘아~ 저 사람은 나의 친구다!’ ‘저 사람은 나의 은인이다.’ 이렇게 된다고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모든 은사, 은혜라 하는 것은 명심하세요. 이것은 개인용이 아닙니다. 이게 모든 성령의 은사에 기본입니다. 개인 지 자랑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남한테 나를 남의 구원에 잘되기 위해서 내 자체를 걸음으로 쓰레기로 내놔야 되는 그런 존재로서 은사라는 겁니다.
성경한 번 봅시다. 고린도전서4장 9절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있습니까? 구경거리. 잘 돼서 구경거리가 아니고, ”우리는 저들처럼 저런 팔자 되면 안 된데이.“ 하고 말리는 그 쪽 길로 가는 구경거리입니다. 인간이 가는 노선이 있는데 그 노선에서 이탈하는 사람들.
그래서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미련한 게 아니지요. 그 쪽에서 보기에 우리는 미련하게 살고,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가 미련하게 됨으로서 너희가 지혜로우면 좋겠다는 것,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우리는 내 권한을 행사하지 않을 테니까 그로 인하여 너희가 새로운 강하기를 원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고“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 상식 같으면 뭡니까? 같이 지혜롭고 같이 강하고 같이 존귀해 졌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의 은사 그런 식의 은혜는 없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나는 소용없고 니는 미쁘다 그런 식이다 말이지요.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몰아넣습니까? 좋은 게 좋은 것인데. 그게 아니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라는 그것이 사도 바울이 본인이 원해서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사입니까? 은사라니까요. 교회에서 은사 자랑하는 사람 있거든 와보세요. 그 사람 퇴출시킵니다. 이 은사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 봤어요? 이것은 그야말로 퇴보예요. 퇴보.
정진이 아니고 반대로 퇴보잖아요. 우리가 벗어나기를 우리가 구원받기를 애쓸 수밖에 없고 저런 자리에서 후딱 벗어나서 다시는 그런 자리로 안 돌아가고 싶은 그 자리를 주께서는 은사와 지혜로서 그것을 집어넣는 거예요.
빌립보서 2장6절이 뭡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무도 십자가에 죽으려고 나선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사가 임하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그 자리를 자기자리로 점령하신 겁니다. 차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제가 이렇게 하면 제가 마치 그 자리로 가시라는 이야기인데, 가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시니까 우리가 알아서 그 자리에 가지 맙시다. 우리는 우리의 본심 그대로 우리는 강하고 지혜롭고 존귀하고 그 쪽으로 그냥 가세요. 그냥 가시면 그 때 그때마다 주께서 이 말씀대로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힘으로 했다고 하지 말고 주의 은혜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앞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이 안하려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이에요. 당신이 하고 싶어도 못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기피하는 그런 모든 것.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교회에서 하게 되면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해요. 이걸 또 시나리오를 짜요. 어떤 시나리오를 짜느냐 하면, 전에는 절에 갔을 때는 병든 어머니,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안 돌봤는데 이제는 교회 나오고 난 뒤에 이 말씀 듣고 ‘주여, 제가 감당하겠나이다.‘ 이래 가지고 병든 어머니, 시어머니 모셨는데, 병든 어머니 요양원에 보내면 되고 형제간에 돈 모아서 보내면 되는 거예요. 그게 자꾸 마귀의 시험에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상한 모든 시나리오는 주께서 일체 그걸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 기쁜 소식이지요. 굉장히 기뻐요. 우리가 예상한 모든 것. 더럽고 “나, 싫어, 싫어 이런 사업은 안했으면 좋겠다.” 예, 안 옵니다. 왜? 우리가 이미 예상했기 때문에. 예상한 것은 주께서는 두 번 다시 사용 안합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어떤 식으로 갇혔다가 풀려나온다는 것을 몰라요. 사도바울은 모르고 다만 모든 것을 파라핀처럼 물로써 녹여 버리는 것은 그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은혜로운 자유, 자유라는 것은 고린도후서4장에 보면,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그 때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내가 참 의심돼요. 왜냐 하면 그 이야기 듣는 것이 뭐냐,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환경입니다. 전부 다. 그 이야기 듣는 사람은 로마의 압제라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는 말은 우리가 독립나라 따로 만든다는 뜻인지, 온갖 정치적인 개념, 경제적인 개념이 자유고, 여유 만만한 이런 것 까지도 고려될 수가 있고, 아니면 죽는 것 이런 것을 원했고.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고 자유라 하는 것은 어떤 자유의 세계를 자꾸 꿈꾸지 마세요. 자유라 할 때는 단절된 상태에서는 ~~이 아니고, 경계선을 넘나드는 그 자유. 여기 아니고 저기 가면 저기가면 그것도 아니고 여기. 행복합니까? 이건 행복이 아니야. 불행합니까? 불행은 불행이 아니야. 자꾸만 새롭게 만드는 경계선을 그걸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그 자유의 능력, 그것이 바로 멜기세덱에 속한 족보가 달라요. 육의 족보와 하늘의 족보가 달라요.
멜기세덱의 족보에 속해 버리면 인간의 모든 행함이라 하는 것은 니는 니 자신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요, 라는 것이 우리세계에 파이프로 흘러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그걸 통해서 내가 나 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라는 것을 주님을 증거 할 수 있는 그런 자유.
그래서 자유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반드시 나오는 것이 나는 죄인이며, 주님의 보혈의 피로만 구원됐습니다. 라는 고백으로만 자유를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들어가야 돼요. ‘나는 아니고’ 가 반드시 들어가야 돼요.
어제 수요일날 마태복음20장 포도원 비유 했지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시작했다고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하고 포도원 비유 나왔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먼저 질문을 던지는 거죠. 아침 10시에 12시에 오후3시에 오후5시에 온 사람 중에서 그 네 사람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천국을 표현했느냐, 어느 것이 가장 포도원에 기여를 했느냐, 보탬이 되었느냐, 라고 제시했을 때, 모든 사람이 누구를 뭘 보겠습니까? 노동시간이 길었던 아침 10시에 온 사람 했지요. 보세요. 주님께서는 얼마나 철저하게 ~ ~ 이 아니고를 먼저 깔아버리잖아요. 그걸 먼저 깔고 간다고요.
천국은 살기 좋다 이 이야기하면 얼마나 듣기 좋습니까? 그게 아니고, 천국은 ‘~~다’ 가 아니라 ~~가 아니요, 로만 설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아래쪽의 육의 세계에서의 천국의 전파모습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알긴 알아도 보지 못한다. 라는 문제를 먼저 깔아놓고 이야기 해버리면 그 이야기 왜 합니까? 그럼에도 너희가 들을 수 있으니 복이다! 이렇게 하지요.
베드로가 신앙고백 하니까, 네가 혈육에서 난 것이 아니요, 라고 먼저 깔아놓고 니가 알게 한 것은 아버지가 알게 했다. 자꾸 뭔가 깔아버려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부정해 버립니다. 우리의 모든 종교적인 열심과 신앙적인 노력을 부정해 버려요. ‘신앙생활 안 해도 구원받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교회를 안 다녀도 구원받습니다. 교회를 부셔도 구원받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그 이야기를 목사가 할 수 있어야 돼요. 그 이야기를 달리 이야기한다면 교회 안 나와도 구원 못 받고, 교회 나와도 구원 못 받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말이 어렵지요.
헌금 안 해도 지옥가고, 헌금해도 지옥 갑니다. 그 말이나 헌금해도 천국과 상관없고 헌금 안 해도 천국과 상관없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항상 우리는 ~~ 아니요, 라는 것이 그것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앞장세우면서 주께서 숨어있는 주님의 자기 공로만 드러나는데 그 관계가 ‘자유’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것들을 보면 사도행전16장35절~40절까지는 두 자리로 이야기한다면 바로 ‘옛 사도의 자유다’ 그냥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나오는 게 아니고 ‘나는 너희들이 로마식으로 이렇게 하는 것은 안 좋다’하고 반발하고 행세하면서 경계선, 사람이 처 놓은 권력이란 경계선마저 뛰어넘는 자유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사도바울의 항상 그 때, 그 시대 전하는 복음전파에 대한 삶에 모습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바람이 대문을 못 열겠습니까? 바람이 대문을 못 부스고 돌아가는 법이 없어요. 대문이고 뭐고 하늘에서 부는 바람인데, 지붕마다 다 하고 바람이 테러가 공산당이 무서워서 돌아가고 하는 법이 없어요. 바람 앞에서 성령 앞에서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 그 경계선도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종도 죄인이고, 여자도 죄인이고, 남자도 죄인이고, 남편도 죄인이고, 아내도 죄인이고, 자식도 죄인이고,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니라, 하고 같은 말을 전제로 하고 나온 말이지요.
첫 번째 아담이 모든 것을 녹였듯이 두 번째 마지막 아담은 하나님의 의로 모든 것을 녹여 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17장 3절에 나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야손 집에 들어가서 횡포 부리는 거예요.
여기서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뭐냐 하면, 3절에 보면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것은 뭐냐 하면 지금 여기가 유대인 회당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 회당에 예배순서를 봐야지요. 유대인 회당의 예배 순서의 초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토라, 토라라는 것은 율법을 말하거든요. 말씀가지고 풀어주는 것이 그게 핵심사항입니다. 핵심순서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세울게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민족에게 세울 것은, 직접 하나님과 만났다는 것! 다른 사람은 누가 하더라, 누구한테 들었더라, 하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직접 돌판을 하나님 손에서 그들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그 직접 쓴 돌판이 기초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 선지자들은 이중, 삼중 경로가 아니고 직접 하나님한테 말씀을 들은 거예요. 에스겔, 다니엘, 예레미야, 이사야, 직접 적어 준 바룩이란 사람이 누구 비서냐 하면, 예레미야의 비서인데,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예레미야가 직접 받은 계시를 문자화하는 책으로 두루마리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바룩이 하게 됩니다.
그것을 상상해 봐야 돼요. 말로는 안돼요. 여기서 어느 날 밤에 우리 이집사님에게 직접 천사가 와 가지고 이사야의 원본말씀을 다 줬다 할 때에 전 세계에 누구도 그렇게 직접 천사가 와서 준 게 없다면, 지금 집사님은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 원본을 믿겠습니까? 원본을 믿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게 힘든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걸림돌이라 하는 거예요. 걸림돌.
유대인들은 그 기록을 자기 몸에다 새겨버렸어요.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할례’라고 합니다. 일종의 문신이지요. 구원받은 티를 한 거예요. 이방인들이 유대인에게 들어오려면 두 가지를 해야 돼요. 할례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되는 두 가지 일을 해야 돼요. 와도 좋은 자리 못 받아요. 그것도 유대인 밑에서 물 길러주는 사람하든지 그래야 돼요. 이러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을 풀어서 하는 거예요.
자, 여기서 한 번 봅시다. 성경을 풀면 뭐가 나옵니까? 성경을 풀었다. 성경을 풀면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이건 제가 미리 알려 드립니다. 토라, 율법이지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풀면 뭐가 나오는가 하면 율법이 나옵니다. 토라를 풀면 토라가 나와요. 잠언서에 대한 모든 해석이 유대인이 해석한 것을 제가 공부했거든요. 해 보면 뭐가 나오는가 하면 모든 것이 토라입니다.
생명나무도 토라고, 모든 것이 토라고, 다시 말해서 율법이에요. 율법 같은 법이 되는 겁니다. 잠언서에 나오는 “내 아들아!” 하지요. 아들아, 뭘 지켜라? 법을 지켜라. 하나님의 법을 지켜라. 모세오경을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한계예요. 이 법은 모세가 하나님에서 받은 법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은 과거 지향적 이지요. 모든 그 뒤 선지자가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방법은 뭡니까? 구원받으려면 방법은 뭡니까? 다시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 된다는 거예요. 모세를 극진히 높이는 겁니다. 요한복음 7장,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모세를 섬기나 모세가 오히려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 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보고 뭐라고 했는가 하면 모세의 법을 어긴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해석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은 율법만 도드라지게 다시 귀한데서 나타나게 되어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에서 시작해서 뭘로 돌아옵니까? 자기 자신을 겨냥하니까, 이 노선이 율법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가는 것은 인간의 육의 능력입니다.
간통한 여인은 현장에서 죽여라, 율법에 나오잖아요. 죽였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뭐라 합니까? 갑자기 율법의 노선에서 빠져 나오지요. 죄로 빠져 나오지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하니까 율법의 노선에 있던 사람이 자기 노선 유지하면서 예수님노선으로 오지 못하고 다 떠나버리지요. 그럼 예수님 노선에 남은 사람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인만 남고 그 다음에 누구 남습니까? 그 현장에 예수님 남지요. 예수님이 여인을 용서하지요. 이 용서가 율법의 완성이었다 이 말이지요. 그게 십자가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방인인데 율법의 노선에 있지 않지만, 뭐는 받았습니까? 죄인인 것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인 것을 알아서 죄인에게 주신 주님의 자비와 용서와 긍휼을 우리는 입어버리면 이거는 율법의 완성체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같이. 주님과 더불어서.
이 해석을 하면서 모든 성경을 풀 때, 모든 율법을 풀 때, 그게 뭐다? 그리스도가 왜 죽어야만 하는지 쪽으로 결론을 맺는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 전파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도 모든 설교자는 그래야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