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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대전20120927a-행17장4절(양과 이리)41강-이 근호목사
사도행전17장3절하겠습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걸 그리스도가 했다. 옛날로 돌아갑시다. 옛날로 돌아가서 사도가 입에서 나오는 내용들이 무엇이었을까요? 나라 경제발전 그거 아니었지요. 여기 사도행전17장에 보면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거 하면서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추석대목에 시장골목이 바쁜데 사도가 만약에 시장통을 걸어가면서 전도할 때,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그런 이야기 안하겠지요. 뭐라 합니까? 어떤 분이 죽었다가 살아나는데 그 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갈 구세주입니다.” 그 이야기했다 말이지요. 무슨 이야기가 빠진 거예요? 교회이야기가 빠진 거예요. 사도에서는 교회이야기가 빠지는 겁니다. 교회를 어떻게 잘해볼까 하는 이야기는 완전히 빠지는 거예요. 교회 말고 누굴 이야기 하느냐 하면, 예수님 이야기에 바빠서 교회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요.
그럼 교회이야기가 나올 경우는 언제냐 하면, 예수님 이야기해서 믿는 사람들의 집합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 세 들어 놓고 간판 걸어 놓고 죽 목사 모아놓고 자, 이제 교회 합니다. 이게 아니고 교회를 증거 하는 게 교회가 아니고 “어떤 분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는데, 여러분 신기하지요. 그 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그 다음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 분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담겨있는 내용이 무엇이기에 이 죄 많은 우리가 그 거룩한 천국에 천사들만 간다는 천국에 어떻게 집합 할 수가 있고, 모일 수가 있고 거기에 갈 수가 있습니까? 그런 이야기가 죽~ 되는 거예요. 출입구 자체가 눈에 보이는 구원의 단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예요.
그 당시에 예수님은 승천하셨기 때문에 사도들은 사람들 앞에 “당신, 그러지 말고 예수를 우리 눈앞에 보여 달라”고 하면 사도가 보여줄 재주가 없습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제가 전하는 말을 들으시면 그것이 지금 예수님께서 나보고 이야기하는 그 말씀하고 똑같은 말씀이니까 예수님 보야 달라고 하지 말고, 제 말을 들으시면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왜?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고 제 말을 들으세요.” 라고 하신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한 번 질문 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다. 천국에 도착했다. ①번과 ②번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①번을 경로해서 천국에 도착했을까요? ②번을 경로해서 천국에 도착했을까요? ①번 사도를 믿었다. ②번 사도의 말을 믿었다. 몇 번입니까? 그 사람들이 사도를 믿었어요? 사도의 말을 믿었겠습니까? 어느 경로를 통해서 천국에 구원 받았겠습니까? 사도의 말을 듣고. 그렇지요!
왜냐 하면, 사도를 믿으려면 사도의 성장과정이나 키는 얼마고, 가족이 몇이고, 가족은 어떻게 되고, 결혼은 했습니까? 하면서 사도는 어디 출신입니까? 신학은 어디 나오셨어요? 집의 부동산은 어떻게 되고, 아파트 등기할 때 값 맞추어서 등기했습니까? 이런 거 볼 수 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②번은 당신은 결혼한 적 있습니까? 이런 걸 묻는 것이 아니고, 사도의 말을 믿은 거예요. 사도가 과거에 어느 파 출신인지 묻지 않고, 사도가 전하는 것을 이 사람들이 믿었는데, 사도가 전하는 말은요, 이거 복잡한데요.
사도의 전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신 말이라 했지요. 그리스도의 사도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을 사도의 말로서 전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사도의 말에 의하면 사람한테 버림받은 예수님이지요. 버림받은 자의 말을 어떤 사람이 곶이 듣는다는 말은 이것은 인간의 능력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은 버림받았기 때문에. 남이 버림받은 것을 내가 거두겠다, 이것은 없어요. 왜? 그 사람과 똑같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의 말이 사도의 말이 되고 그 사도가 전하는 말을 어떤 사람이 받아들였다면 이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와서 사도가 하는 말이 진실인 것을 받아들이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오심부터 시작이 돼요. 만약에 성령오심을 지워버린다, 모른다, 이리 돼 버리면 결국 사도행전은 사람과 사람과의 설득력이라든지, 말재주 잘하는 거 이런 재주로 구원받는 식이 되어 버려요. 이것은 성령님이 빠진 상태에서 사람이 재주부려서 사람들 꼬시니까 이것은 보험회사 영업사원 뽑는 거와 마찬가지인 거예요. 우리교회에 오시면 복 받습니다. 이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제가 다시 또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천국에 도착한 것은 사도를 믿은 게 아닙니다. 사도님은 아주 훌륭한 신학교를 나왔고 학위가 2개나 되고, 이런 걸 믿은 게 아니에요. 우리교회에 나오세요. 우리교회에는 변호사도 많고 의사도 많아가지고 헐하게 싸게 진료도 합니다. 이런 것도 없다 말이지요.
믿은 것은 사도의 말을 믿었는데, 사도의 말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사도의 말을 믿을 수 없는 말을 사도가 이야기한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나오지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내가 당신들을 기쁘게 하지 않는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할테니까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마세요. 제가 사람을 꼬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람에게 기쁘게 하지 않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 예수님의 평소의 하신 말씀과 일치된다고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천국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고, 사람의 종일뿐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10절 말씀에 의하면 구원 받는데 방해되는 자는 어떤 자냐 하는 결론이 나오느냐하면, 우리가 죽어서 천국 가는데 가장 방해되는 자는 나를 기쁘게 해 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방해가 돼요.
그러면 교회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 하면 그것은 고객관리가 되어야 하니까. 점포를 세워났으니 손님이 와야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적인 축복이고 그 다음에 절망가운데 희망을 주는 거예요. 축복과 희망을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람을 기쁘게 해야 이 사람들이 단골손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희망도 주지 않고, 축복도 주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이 교회에서는 발을 끊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발 끊은 사람이 있는 사람보다 더 많아요. 그런데 현재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털고 나갈지, 그러던지 아니면 내가 나가던지. 어떤 수가 나겠지요.
그런데 시작과 끝이 항상 낯선 분이 왔는데 그 분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게 시작이고, 중간도 그렇고 끝도 마찬가지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 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을 예수님의 말로, 하나님의 말로, 받아들인다면 이 사람은 그 다음 순서에 따라 가야 합니다.
그 다음 순서는 뭐냐 하면, 우리를 구원하는데 왜 하필이면 죽어야 되느냐 하는, 이 죽음문제예요. 예수님의 죽음 문제와 살아있는 내 문제와 직접 연결을 시켜버려요. 우리는 죽기 싫거든요. 살고 싶거든요. 살아있는 사람이 계속 나를 살려줄 때, 우리는 그게 계속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라는 생각을 우리가 갖게 됩니다. 예를 들면 물에 빠졌는데 뭍에 있는 사람이 당당하게 기초가 있는 사람이 망태라든지, 대나무라든지, 밧줄이라도 던져줘야 든든한 분이 던져줘야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붙들고 든든한 분에게로 끌려 들어와서 구원을 받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란 분이 이 땅에서 오래 사신분이 아니에요. 밉상 받고 그냥 죽은 분이라고요. 죽어버렸어요. 죽어버린 분을 만약에 내가 스승이라고 모시고 따라 다닌다면, 내 목숨도 간당간당한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니 목숨 내 놓으라 말이지요. 니 목숨 산목숨이 아니고 이제 나를 위해서 죽은 목숨 될 때, 나와 같이 십자가에 질 때, 너는 내 있는 곳에 너도 있게 하리라, 이리 되는 거예요.
제자들이 웃는 것은 처음에 그 말을 할 때는 으쌰! 하고 자기가 결심을 하고 따를 수 있다고 장담을 했거든요. 장담을 했는데 아시다시피 베드로가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막상 현실에 부딪치니까 “아이고 살아야 되겠다!” 생각이 드는 거예요. 막상 챙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 혼자 죽고 나머지는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또 이야기합니다. 그 도망쳤던 베드로와 그 12제자가 다시 이것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을 위해서 과감하게 자기 목숨을 내던지게 된 것은 그거 다 누구 덕입니까? 본인이 결심한 덕도 아니고 본인이 회개한 덕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하니까 “아, 이게 예수님 배반한 것도 하나의 코스다.” 라는 것, 제대로 코스를 밟은 거예요. 배반의 장미란 노래 있잖아요. 내가 배반자로서 용서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착해서, 내가 너무나 똑똑해서 주의 말씀을 알아듣는 게 아니고 나는 배반자예요. 또 이런 노래 있어요. 배신자여! 란 노래가 있어요. 나는 배신자가 된 입장에서 용서받으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정리합시다. 구원받은 사람치고 배신자 아닌 자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모든 인간은 배신자입니다. 그러면 다시 더 어려운 문제 내겠습니다. 한 번 배신할까요? 2번 연거푸 배신할까요? 여러 번 배신합니다. 10년 갈까요? 죽을 때까지 갈까요? 죽을 때까지 주님을 배신하면 그 때마다 성령께서 계속해서 상을 새로 차려줍니다. 고기집에 가보셨지요? 고기 굽다보면 불판 갈아달라고 하지요. 불판 가는 것. 또는 상을 새로 차린다.
옛날 젊은 새댁들은 옛날에 우리 시대 때에 시집을 가게 되면 제일 짜증나는 게 저녁상을 한 번만 차리면 되는데 시누이, 시동생 늦게 오면 또 상 차려야 되고, 또 상 차려야 되고, 끝나고 나면 남편 술친구 와서 또 술 안주상 내놔라 해가지고 또 술 안주상 내놓고 그러면 꼬마는 손님이 가고 난 뒤에 남은 것 먹고 하지요. 상 새로 차리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모르겠어요.
상을 차리는데, 왜 주님께서는 그 때 그 때마다 상을 차려야 되는가 하면, 오늘 강의 중 제일 중요한 첫 번째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상을 차리면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밀어 붙이는 식으로 상을 차립니다. 과거에 내가 이런 식으로 헌금했고, 기도했고, 이 정도로 성경 봤으니까 이 정도로 나는 상을 차릴 수 있는 자격이 됩니다. 라고 과거에서 이만큼 복 받았고, 과거에 이렇게 기도해서 응답받았고, 모든 상에는 자신의 과거의 잘난 업적들이 있고 목사한테 교회에서 칭찬받은 걸로 훈장들이 쭉 있어요. 전도 상으로 해서 돈 얼마 받고, 내가 주일학교 반상해서 몇 명 전도하고, 이런 게 쫙 차려있다 말이지요. 이걸 주님께서 발칵 차버리지요.
우리가 상 차리게 되면 여기서 항상 자기가 주인공이 됩니다. 주인공이 돼서 자기는 그냥 주인공이 아니라 잘난 주인공이 돼 버려요. 심지어 회개한 것도 회개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주 우상화 됩니다. 회개한 것도 우상화 되어 가지고 여기에는 자기가 잘났고 그리고 자기에게 잘해준 사람에게도 잘난 사람이라고 해서 배정을 해 놓고 너는 나한테 잘해줬으니까 지옥가지 말고 천국가고 일방적으로 자기 패거리를 만들어 놓고 상을 차려요.
그런데 주님의 상은 과거에서 상을 차리는 게 아니고 미래에서 상을 차리기 때문에 상을 차리는 동시에 발길질해서 상을 뒤엎어 버려요. 상 엎는 거 한 번 경험해 본 적 있어요? 밖에 나갔던 아버지 술 먹고 와서 아들, 엄마 앉아 있는데 “더러운 집구석! 집구석 꼬라지하고는.”하고 발로 차버리고는 지는 지 방에 가서 코를 골고 자고는. 상을 마당에다 던지는 사람도 있어요. “어디서 밥상머리에서 잔소리고?” 집어던지고. 폭력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 술 취한 남편보다 더 폭력적입니다. “어디서 니 자랑질이야!” “어디서 십일조 자랑하고, 기도 자랑하는 거야!” “어디서 교회 부흥 자랑하는 거야!” 차버립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주여, 내가 이렇게 성공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죄를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왔습니다.” 북한의 장군들처럼. 옷이 무거워서 축축 늘어져요. 북한의 장군들 봤지요? 온갖 더러운 고드름 같은 그런 것을 해가지고 칭찬한 걸 죽 달고 그 상을 발로 차버립니다. 차고 새로운 상에서는 뭐냐 하면, 다 줄여요. 숟가락, 젓가락하고 밥 하나만 딱 있어요.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 피로 니 상만 챙기는 더러운 너를 내가 대신 피 흘려서 이미 용서 다했다. 하고 쳐들어 와버립니다.
이 상을 딱 받게 되면, 우리는 부끄럽지요. 부끄러운 거 한 5초갑니다. 요 상 받고 난 뒤에 십자가상에다가 요거 믿었다는 지 숟가락을 삭~ 또 얹어요. 나 어제 은혜 받았다! 또 자기 공로, 또 상에 기어서 올라갑니다. 내일되면 그 상을 또 발로 차버립니다. 차서 또 십자가만 남아요.
이걸 쉽게 말해서 상을 차린다 했는데, 어려운 말로 ‘재 정렬’이거든요. 우리 자신을 항상 해체시키고 다시 재 정렬시켜 버리면 정렬이 안 된 상태에서는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입니다. 어제 수요일날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내게 맞는 세상을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라. 하나님이여! 세상이 나한테 맞는 세상으로 허락하옵소서. 이게 기도제목이에요. 성경 같은 거 이런 거 없어요. 무조건 내 새끼, 내 남편, 나한테 맞는 세상 돌아가기, 세상에 모든 돌아가는 것들이 다 나한테 딱 맞추어서 나한테 복이 되도록 돌아오게 해 달라, 하는 이런 기도입니다. 절에 가서 빌던 사람인데 지금은 교회 와서 이거하고 비는 거예요.
내게 맞는 세상을 할 때, '내게'가 상위에 올라와 있잖아요. 그렇다면 주께서는 재 정렬 돼요. 재 정렬해서 주께서는 이 '내게'를 어디에다 던지느냐 하면, 십자가를 가운데 세우고 여기다가 강도와 세리와 창기자리에 나를 여기에 정렬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나 같은 인간도 구원 받았으니까 나한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어떻게 저한테까지 신경쓰셔가지고 귀한 생명을 흘리셔가지고 그 생명으로 내 죄를 바꿔치기해가지고 저를 이렇게 구원하십니까? 하는 고백이 나오게 하는 겁니다.
이 재 정렬은 우리가 스스로 재 정렬 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미래라 하는 것은 아직 우리 손에 잡히지 않은 거예요. 현재 우리 손에 잡힌 것은 과거입니다. 과거를 응집한 현재, 과거와 현재가 손에 잡혔는데 미래는 그냥 부딪힐 뿐이지요. 내가 여기 있음에 그냥 와서 박는 거예요. 10톤 트럭이 와서 쌔려 박듯이. 차 몰고 가는데 누가 와서 박은 거예요. 다시 정렬이 되는 거예요. 정렬이 되게 되면 내가 구원 받는다고 여겼는데, 내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어제 수요일날 했던가요. 우리가 구원 받아요. 어제 했어요. 나하고 우리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 나라 할 때는, 나만 바라볼 때는 나로 충분해요. 나 여기 있어, 나만 바라보면 충분한데, 우리를 바라볼 때는 나를 보고서는 우리가 발견이 안돼요. 내 옆에 있는 나의 가족들은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것은 나에 속하지, 우리에 속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강강술래예요. 실험판 이에요. 사람들이 빙 둘러 앉았어요. 가운데 십자가가 있다면 둘러앉은 사람은 뭐가 됩니까? 나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되지요. 우리라는 말은 우리를 서로 옆 사람과 다른 사람을 하나 되게 만드는 중앙지, 중심지의 능력 이게 바로 우리입니다. 이게 고린도전서12장에 보면, 우리가 같은 성령을 받았다, 성령 또 나와요. 한 성령을 받았으니 우리는 눈이 발더러 쓸데없다는 소리 못하고, 발이 눈더러 쓸데없다는 소리 못한다, 하는 내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집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 우리라 하는 것은 중앙에 누가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도의 말씀 복음이지요. 복음이 중앙에 있는 거예요.
복음이 중앙에 있는데 교회에서는 이 중앙에다가 뭘 차지하느냐 하면, 예배당을 지어 놔버렸어요. 여기다가. 예배당을 지어 놔가지고 예배당에서 나오는 우리끼리라는 새로운 교단이 만들어져요. 교회내의 자체가 하나의 교단이고, 그 목사는 교주가 돼 버렸어요.
예를 들어서 헌금 같은 것을 보세요. 중간에 십자가가 있다면 우리가 쓰는 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에게 돈을 준 거예요. 우리가 돈을 주는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돈 벌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해서 주신 돈이에요. 주님은 돈을 안 받습니다. 십일조고 뭐고 아무것도 안 받아요. 돈은 우리의 같은 지체에 필요해서 십자가 바라보는데 필요해서 쓰라고 준 돈이지, 하나님이 돈 받고 돈 놀이 하는 겁니까? 돈 받고 구원 받을 것 같으면 가난한 사람 지옥 갑니다. 부자만 천국 가지요.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는데 돈 한 푼도 안 냈어요. 차비도 안 냈어요. 버스 값도 안 냈다니까요. 환승 값도 안 냈어요.
복이란 뭐냐 하면, 예수님과의 관계를 복이라 합니다. 환난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면 그게 축복이에요. 사랑이에요. 이거는 안 끊어져요. 목자가 양을 먹이지, 양이 목자를 먹이는 게 아닙니다. 목자가 양을 먹이는 거예요. 그 목자가 말씀하기를 내 양은 어떤 권세라도 내 양을 내 목자에서 빼앗기지 않는다, 했어요. 내가 반드시 내 양은 내가 반드시 지킨다. 그 목자는 십자가지, 사도가 아닙니다. 목사가 아닙니다. 사람이 우리를 건지는 게 아니에요. 이거 너무 중요합니다. 적어 볼까요.
‘사람이 나를 건지는 게 아니다.‘ 이거 다 아는 이야기 같은데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 곧 추석이 오잖아요. 추석이 오면 사람들 모이잖아요. 사람들이 나를 건져주고 지켜주는 것처럼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마세요. 고스톱 칠 때는 사람이 나를 돈 벌게 해 주지만. 사람이 나를 건지지는 못해요. 고스톱은 돈 따게 해 주지만, 나를 위해서 돈을 잃게 해주지만, 나를 위해서 구원해 주지는 못해요. 명절에 조상이 날 구원하지는 못해요. 날 위해서 기도하는 어머니가 나를 구원해 주지는 못해요. 오직 사도가 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 믿어라, 우리 어머니 믿어라가 아니라 사도 본인도 믿지 말라 해요.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나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라 할지라도, 사도라 할지라도 저주받는다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라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그 때마다 재 정렬되는 거예요. 분명히 다 같이 십자가 봤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다음부터 “나, 이제 그만 볼래. 교회 볼래.” 해가지고 난 십자가가 믿어지지 않고 교회가 믿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고 그 날, 그 때 주께서 재 정렬 하셨다고 보는 겁니다. “니도 갈래? 니도 가 버리지, 십자가 지겹지도 않나? 십자가 이제 그만 들어라, 십자가 했으면 이제 교회 만들어야지. 교회해서 니 밥벌이 해야지 언제까지 십자가 볼고? 십자가한다고 니 밥벌이 해 주는 사람 없고.” 이런 식으로 빠져 나오면 그 자리를 또 다른 사람이 채워서 재 정렬 돼요. 희한해요. “아이고, 형제 왔습니까?” 했는데 2개월 있다가 가 버려요. 대전 모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계속해서 분주한 정렬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상에 자기가 여전히 자기가 중심지에 눌러 앉아서 그래요. 과거에 내가 신앙생활을 이만큼 오래 했는데. 그걸 발길로 걷어찬다니까요. 그게 싫은 거예요. 10년 믿었는데, 내가 20년 믿었는데, 내가 적어도 목사인데, 그게 바로 과거에 누적된 내가 차린 내가 나를 멋있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장식, 쇼 윈도우예요. 백화점의 남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재 정렬하는 것은 과거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하는데 그 미래라 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빼서 죄인으로서 세리와 창기와 이런 사람으로서 주변에 배치 받으면 돼요. 그냥 쳐다볼 수 있는 사람 되잖아요. 그림 생각하면요, 딱 생각나는 게 모세가 바짝 들었던 광야에서 놋 뱀 이지요. 놋 뱀을 들 때, 만약에 놋 뱀 든 손목을 보고 있으면 구원 못 받지요. “야, 모세 힘세다. 그걸 어떻게 들었지?” “야, 모세가 놋 뱀 만들 때 저 금속 누가 제공 했나?” “누가 헌금 했노?” 쓸데없는 이런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놋 뱀을 그냥 보라하면, 모세도 보지 말고 그냥 봐야하는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라하면 자꾸 목사를 봐요. 목사를.
자꾸 목사를 본다고요. 또 어떤 책보면 한국교회 비판하는 사람 있어요. 비판하면 상당히 믿음 좋은 줄 알고. 이것은 한국교회를 비판할 것도 없어요. 한국교회는 비판하든, 아니하든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의 산물이 이렇게 상 차려줘야 그걸 걷어차는 주님의 발길질도 같이 아울러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방교회 같은 경우는 매일 하는 것이 우리는 거듭난 새로운 집합체라고 구원을 외치는데 그것은 거듭난 집합의 교회를 보는 거예요.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게 아니고 예수님 덕분에 거듭났다고 자부하는 자기들끼리의 집회, 그러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매일같이 발로 걷어차야 정신 차리지, 매일같이 우리자신을 걷어차야 됩니다.
일반생활,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해줬는데 나중에 배신 때린다든지 그런 사람 직장에 많거든요. 심지어 아파트 이웃 사람들 가운데서도 내가 누구더러 한 것을 그 사람에게 일러서 그 사람이 달려들고.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가 이건 교회뿐만 아니고 세상 자체가 매일같이 재 정렬돼요. 매일같이 재 정렬되니까,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점을 믿으세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된다 하고 멀리하지 마시고 믿을 것이 못 된다 하고 믿어버리면 그 순간 그 사람이 “고맙습니다. 나란 인간을 뭘 보고 저렇게 도와주시나!” 고맙게 여겨야지 “계속 도와줘야지 계속, 어디가든지.”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이거 또 지가 상에 올라가는 거예요.
여러분 집에 강아지가 상에 올라가면 아무리 귀여운 강아지라도 발로 차잖아요. 어디서 사람 밥상에 올라가! 꼭 우리 식이에요. 예수님이 계시는 상에다가 매일같이 찔끔찔끔 올라가가지고 거기서 지가 호령하고, “너, 지옥 가! 너, 천당 가!” 마치 예수님 가만히 계세요. 제가 알아서 처리 할게요. 지가 알아서 다 해서. 그래서 설교에서 자기 교회자랑하고 자기 목사자랑하면 사실은 교인들이 그 목사 강단에서 잡아끌어내려야 해요. 우리교회 역사자랑하고 우리교회 전통자랑하고 우리교회가 이렇게 덕을 끼쳐서 숫자가 많이 왔다고 하는 그런 목사는 지옥의 하수인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만, 여기에 누가 발끈하는가 하면, 바로 유대인들이 발끈했어요. 사도를 죽이려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 사람들이 바보예요. 사도가 중요한 게 아닌데, 사도가 전하는 말이 중요한데 이 사람은 사도를 죽이면 그 말도 끊어지지 않겠는가,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이러한 버릇은 옛날 예수님을 죽여 버리면 하나님이 일을 안 하는 줄로 생각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예수님을 죽였다고 하나님의 일이 중지되지 않는다는 말이거든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중요하고, 말씀대로 죽었다가 살아나서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말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도바울 잡으려하다 없으니까 대신 누굴 잡으려고 하느냐 하면, 5절에 보면, 야손이란 사람을 잡았어요. 이게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건인데, 야손이란 사람을 잡아서 집어넣어버렸어요. 집어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여기도 있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우리가 손을 봐야겠다. 해서 야손이란 사람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야손과 사도바울은 같은 편이고, 야손을 공격하는 사람은 사도바울을 공격하다가 사도가 없어지니까 대신 야손을 공격한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왜 성경에서는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성도가, 성령 받은 사람, 이걸 신의 혈통, 성령의 노선과 율법의 노선으로 2노선으로 나뉘어져요. 3번째 노선은 없어요. 율법에 있느냐, 성령에 있느냐, 둘 중에 하나에요.
성령 받은 사람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성령 받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구원만 받으면 안 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단독입적으로 이야기할게요. 우리가 구원 받는 게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중심에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내 구원이 중심이 돼 버리면 “헤헤,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나는 이제는 감사합니다.” 하고 자기 생각에 몰두해 버려요. 그러면 주님은 뭐냐 하면, 그냥 사람들만 위하고 다시 자기 위주로 사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만드는 게 되거든요. 예수님은 십자가 위주이기 때문에 갈래가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 받았다는 오른쪽 오른손에 있어야 하고, 양이기 때문에, 십자가 왼쪽에는 염소가 있어야 돼요. 이 염소부분을 위해서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는 겁니다.
“아이고, 구원받았으면 됐지, 편하게 삽시다.” 그건 우리 생각이고,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것이 과연 왜 생겼느냐, 얼마나 세상이 악했으면 십자가가 생겼느냐,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구원받은 우리를 염소라든지 이리 가운데 집어넣어서 이 세상의 권세와 증거를 까발리도록 하는데 우리를 하나의 미끼로 사용하십니다. 그 미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노하거나, 분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인생이 너희를 속일지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하지요. 세상이 다 그런 거. 누가 우리를 다루게 되는 겁니다.
이건 안 돼요. 나 예수님도 챙겼고 하나님도 챙겼고 삼위일체도 챙겼으니까 나는 이제 여기까지고 따로 나만의 세계 만들어야지, 이건 안 돼요. 요거는 우리 구원이 아니고 자기를 쳐다보고 자기구원에 불과한 겁니다. 우리 구원이라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원형으로 둘러서서 중앙에 있는 분을 보는 것이 우리구원이지, 구원받은 나를 쳐다보는 것은 이건 자기구원이지, 우리구원이 아닙니다. 항상 형제들을 생각해 주셔야 돼요.
아까 빠졌습니다만, 십자가 가지고 강강술래 하듯이 빙 둘러서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으면 A라는 사람에서 B라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하느냐, 우리는 직접 사랑 할 수가 없어요. 개개인이 다 떨어져 있어요. 인생사는 것이 다 달라요. 고집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다 달라요. 같은 성령안의 형제라 해도 한 몫씩 다 합니다. 괜히 10년간 잘 사귀다가 복음 안다고 하다가 한 순간에 말 잘못하면 삐끗하는 수가 있어요. 한 순간에. 말 한 번 삐딱하게 해서 그것 가지고 10년 깨지는 수가 있어요. 부부도 마찬가지지만,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럴 때 어떻게 사귀는가 하면, 우리 쪽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아니고 방향이, 예수님 쪽에서 와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거쳐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미래상이에요. 우리 쪽으로 가면 과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안돼요. 새로운 사태를 일으켜서 십자가를 알게 하고 십자가 아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가도록 주께서 주선을 해요. 베드로하고 고넬료하고 만나지요. 만날 때 베드로가 전도 하려고 했어요? 안 하려고 했어요? 전도 안 하려고 했어요. 나는 더러운 인간하고 안 만난다 했거든요. 사람을 가려가면서 만나야지 내 위신이 있는데 내가 왜 그런 걸. 그런데 주께서 강제로 주선을 하니까 빠방하고 가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사울이라는 사람을 누가 전도하려고 하겠어요. “사울님, 예수 믿으세요.” 누가하겠어요? 아무도 안합니다. 주님께서 다메섹에서 사울을 변화시키니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고 개과천선해서 전도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개과천선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주님께서 “나도 죄인입니다. 당신이나 나나 똑같아요.” 라는 마음으로 다가갈 때, 이게 바로 전도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누구만 증거 되니까? 십자가만 증거 되니까.
“아이고, 집사님, 전도도 많이 하시고.“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상은 주님이 차렸지 내가 차리는 게 아닙니다. 이 원리를 잊지 마세요. 이렇게 항상 십자가로서 되는 겁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저한테 이렇게 달려들어요. 이 근호목사는 전도도 하지 말라했다. 헌금도 하지 말라 했다. 전도도 하지 말라했다. 봉사도 하지 말라 했다. 기도도 하지 말라 했다. 하지 말라고요, 하지 마! ㅎㅎ 니가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주께서 지금 벌리고 있는 헌금과 기도 이것이 다 막혀버린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제 야손이란 사람이 잡혔어요. 잡혀서 보석금 받고 풀려났다는 이야기가 뒤에 나오거든요. 나오는데 그 사람들이 이렇게 잡힘으로 말미암아 아까 이야기했듯이 그럼 그 당시에 반대한 유대인들은 어떤 식으로 여호와하나님을 믿었기에 그렇게 예수님 믿는 것을 싫어했는가 말이지요. 그게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슬람교 보면 참 웃기지요. 웃기지만, 그래도 나서서 반대하고 이슬람교인을 죽이고 그럴까지는 없다 말이지요. 괴롭히는 여호와증인을 만나서 3시간, 4시간씩 설교하면 그거 짜증나지요. 그렇다고 총 들고 여호와증인을 죽이고 꼭 그래야 됩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여호와증인 집회하는데 가서 경찰 불러서 잡아다가 철장에 넣고 그럴 필요까지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유대인은 단순히 예수님 믿는 사람을 “아이고, 너는 니 종교 믿고, 나는 내 종교 믿자.” 이게 아니고 잡으려고 죽이려고 했다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그 당시 우리가 알겠느냐, 이렇게 넘어가면 안 되고 유대교라는 것이 무슨 종교인지를 우리가 알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히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성령 받은 사람과 오늘 또 중요한 거 나옵니다. 성령 받은 사람과 유대인의 만남은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안 받은 사람과의 만남이에요. 그러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유대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 신학자, 교인들, 거기 수두룩 있잖아요. 그렇잖아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만 증거 하는 반면에 이쪽은 성령 안 받은 티를 뭐로 내는가 하면, 십자가는 이제 그만 이야기하고 이제는 교회 부흥이 중요한 거야. 이런 도덕적인 삶이 중요한 거야. 이리 나오는 것은 아니 도덕적인 삶을 살면, 누가 핍박합니까? 그렇잖아요. 아! 도덕적으로 나만 착하게 살면 누가 핍박해요? 그런데 야손 이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다른 것 다 치우고, 어떤 분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그 분만이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라고 그 이야기 했잖아요. 그 이야기하면 큰 교회는 큰 성당은 뭐가 돼요? 성당 없고 예배당 없어도 예수님으로만 구원 받는데, 그러면 그들이 교회 성당해서 장사하려는 모든 심보가 전부다 노인들한테 약품 팔아먹는 다단계하고 너무나 같잖아요. 다단계는 돈만 빼먹지, 이거는 영혼까지 빼먹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5천원짜리를 60만원에 팔아먹는 그거하고 뭐가 다르냐 이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 받지 않은 자의 대표자가 유대인이니까 유대인들이 뭐라고 주장했는지를 제가 조사를 해온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유대인들이 안식일날 어떻게 지키느냐 하면, 차 운전 못하고, 빵 굽기 못하고, 요리 못하고, 물건 사고파는 것 못하고, 가방 들고 걷는 것 못하고, 휠체어 타고 아이 안고 타는 것 못하고, 공중전화기는 수화기를 들 수 없고, 장례식도 안 되고, 담배에 불을 켜서는 안 되고, 책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글 쓰는 것은 안 되고, 전기 사용 안 되고, 엘리베이터 탈 수 없고, 청소는 되지만 빗자루 부러지면 수리는 안 되고, 나무나 식물에 물주기 안 되고. 과일냄새는 맡아서는 안 되고.
그 다음에 유대인들이 못 먹는 것은 뭐냐 하면, 독수리, 솔개, 매, 까마귀, 타조, 갈매기, 올빼미, 따오기, 학, 황새, 박쥐 못 먹고 밤에는 메뚜기, 베짱이 뜯어 먹을 수는 있는데 족제비, 쥐, 도마뱀, 악어는 못 먹고, 그리고 유제품, 우유제품은 고기와 같이 못 먹고 그런데 10시간 지나면 먹을 수 있어요. 10시간 되면 소화가 되니까. 유제품을 고기와 같이 못 먹는 정도가 아니고 가정에서 유제품 다루는 포크와 찻잔과 행주는 따로 만들어요.
그 다음에 돼지, 토기, 낙타는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이 안 되니까 못 먹고, 말고기는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못 먹고, 생선에는 지느러미, 비늘 없는 거 못 먹고, 상어, 고래, 미꾸라지는 비늘 없어서 못 먹고, 새우, 굴 낙지, 오징어, 꼴뚜기, 조개는 지느러미 비늘 없어서 못 먹고.
그 다음에 유난 떠는 사람은 더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삼치, 고등어, 꽁치, 정어리, 가자미, 넙치, 갈치 안 먹습니다. 결국 못 먹고, 안 먹고, 못 먹고, 안 먹고 그런데 그들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거든요. 예수님 누가 죽였습니까? 못 먹고, 안 먹고, 못 먹고, 안 먹고 그들이 죽였다고요.
행함 가지고 의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영광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행함의 도사, 정결의 도사, 극치, 거룩의 극단을 보여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유대인이지요. 오늘날 교회는 어설퍼요. 극단도 아니고 착한 것도 아니고, 유대인보다 형식주의에요. 솔직한 심정으로 하지 못하고 형식으로 때워요. 유대인들은 그 정도가 아니에요. 인내를 요하지요. 그리고 일주일에 10명만 모이면 회당을 만들어요. 하루에 세 번씩 회당에 가서 기도를 해야 돼요. 옛날에는 안식일에 전쟁도 안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유대인 사회 속에 오신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팔짱끼고 봤습니다. 가관이죠. 가관이에요. 왜 가관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까 이야기한 것은 레위기에 나온 이야기잖아요.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무얼 하려고 했습니까? 기어이 어디 가려고? 죽어서 좋은 나라 가려고.
인간은 이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요.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저런 애도 다 알아요. 오늘날 교회모인 모든 사람들은 성령 받아서 몰려온 게 아니고 유대교의 확장이라고 보면 돼요. 유대교의 연장이라고 보면 돼요. 종교심의 범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팽창이라고 보면 돼요. 그걸 보고 예수님이 웃기지도 않아요.
토요일까지는 마음대로 TV보다가 일요일 딱 되면 보던 TV 안보고 끄고. 웃기지도 않아요. 그 후 12시 이후에 TV켜고 안식일이라고 돈 쓰면 안 되고, 안식일이라고 걸어오고, 요거는 10분에 일이라고 해서 다리미질하다 돈 태우고, 그 짓하고 있고, 앞자리에만 은혜 받는다하고 뒷자리에는 은혜 없다 하고, 성경쓰기하고, 방언하기 하고, 온갖 재주는 다 피우는데 유대인이 보기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초보 수준 운전도 초보운전 붙였잖아요. 유대인이 보기에는 초보운전이에요. “아이고, 그것도 금식이라고. 아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종교적인 것은 유대인이 다 한 거예요. 그것은 자기의 의를 세우는 거예요. 자기의 상을 차리고 거기다가 자기 숟가락을 놓기 위해서 천국 갈 때 자기 숟가락만 번쩍번쩍 빛나는 거예요.
예수님은 딱 보고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지 그래 저 쪽으로” “잘하고 있네. 니도 가지 왜.” 그런데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말은 잘해요.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배반하잖아요. 배반의 장미 했잖아요. 배반의 장미. 가시 있는.
나중에는 딴소리한다고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런 소리 할 때는 하여튼 저런 식으로는 구원이 안 되는데 어쨌든 뭘 챙기겠다? 내 구원만 챙기면 그만이지. 이런 뜻이라니까요.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성령 줬는데 지 구원만 챙기면 이제는 예수님도 별 볼일 없다하고 내가 구원받은 내가 더 중요하지 이왕 구원 챙겼는데. 자기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 심보, 그 사고방식 매일같이 우리가 상을 차리기 때문에 주께서 말씀을 가지고 미래에서 또 그 짓한다고 이 종국이 축구 할 때처럼 슛~ 하고 차 버리지요. 그러면 내가 차린 상 다 내동댕이치고 내가 좋아했던 친구들만 모였던 것 다 떨어져나가고 새로운 재배치하고 또 재 정렬해서 엉뚱한 사람이 오고 알던 사람이 나가버리고 한 번 공들였던 사람이 나가보세요.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심방 한 100번 갔는데 안 나와 보세요. 심방계산하고 차비 계산하고, 기도 100번 했는데 돌아보지도 않으면, 아이고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믿기에는 여러분이 우리가 믿기에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택한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꼭 함께합니다. 내가 일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혼자 일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주의 종으로 나 혼자 다 일할 필요는 없고, 반드시 주의 일은 차질이 없습니다. 그걸 믿어야 돼요. 어떤 이단들이 설치던 간에 택한 백성 건지는 데서는 하등의 주님은 어떤 차질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믿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농땡이 부리고, 우리가 게으름 피우고, 주님을 미워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런 모습이라고 해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난, 니 고집에 못 이기겠어, 난 이제 질렸어.” 이런 거 없습니다.
이미 아시고 우리가 얼마나 농땡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밖에 모르며, 죽을 때까지 지만 잘났다고 자랑거리만 뽑아내는 그런 속성으로 평생 간다는 걸 익히 아시고 미리 다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 피를 믿으시면 우리는 십자가를 위해서 우리가 뽑힘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