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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예레미야 애가 2:1-7 / 하나님의 분노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예레미야 애가

예레미야 애가 2:1-7 / 하나님의 분노

정인순 2012. 5. 23. 21:46

 

 

하나님의 분노

음성   

 

이근호
2012년 5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애가 2:1-7

(애 2:1, 개역)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

(애 2:2, 개역)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

(애 2:3, 개역)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 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

(애 2:4, 개역) 『원수 같이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를 살륙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애 2:5, 개역)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궁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애 2:6, 개역) 『성막을 동산의 초막 같이 헐어 버리시며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애 2:7, 개역)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 같이 하였도다』

축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것이 번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군신가를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동시에 그로 인해 내가 누군지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상대로 이야기하십니다. 결코 이방민족에게 이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어야 하는 자들에게 “야곱아”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존재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위한다면 이는 필히 하나님의 언약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하기 위햐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반드시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와서도 저주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복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왜 내려오는지 제대로 아는 나라라는 점에서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이방나라에게는 이런 혜택이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스라엘은 이런 축복의 취지를 알지 못하고 이미 자기를 위한 나라이어야 한다고 막무가내도 버티다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된통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이해하는 이스라엘은 진정 이스라엘의 실체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자기를 위하여 산다고 여기는 순간은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을 왜곡되게 이해하게 됩니다.

언약보다 자기 자신의 생존이 우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정없이 자신의 거처인 성전을 부셔버리십니다. 그것도 사람 사서 그렇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동안 신앙생활이라고 간주했던 모든 형식과 제도를 다 부정해버립니다. 사람들이란 뭐가 형식을 갖추어놓고 그것을 정기적으로 지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대신했다고 여깁니다.

아무 것도 없이, 아무런 형식이 없이 신앙생활해 보라면 뭘 어떻게 해야될 지를 모르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딛고 버티고 싶어하고 신앙생활이라는 내세울만한 모든 것들을 다 좌절시킵니다. 그러니까 지기 쪽에서 신앙생활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부인해버리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겁니까?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12아들에게 축복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또한 신명기 33장에 보면, 모세가 12지파에게 축복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축복의 내용들을 보면 결코 사적으로 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혹독하게 경험해야 하는 미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언약이 곧 축복인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따라서 언약에서 외면하면 언약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언약 아닌 것들을 무참하게 저주해서 파괴하는 능력이 나와서 하나님됨이 얼마나 일관된 뜻을 지녔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시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 같이 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훤화’라는 말은 연회하고 떠드는 소리가 퍼져 나오는 축제판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영광 돌리기 위해, 소위 말해서 신앙생활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 그 현장을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이 개가를 부르면서 자축하는 현장으로 만드십니다. 바로 이 모습을 보고 제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다니엘 5:1-4에 보면,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은 난데없이 손가락이 하나 나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신앙생활 제대로 하기 위해서 만든 그 제사기구를 가지고 이방나라의 잔치판으로 만들어놓으신 바로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자, 하나님은 어디계시는 겁니까? 이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됩니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여기 공간을 점유하는 것처럼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게 하시는 그 세계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금 엘리야와 모세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바로 이런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이 되는 이유는, 사전에 “우리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은 옳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난 받은 욥에게 하나님께서 막상 나타나니, “나는 억울하게 고난받습니다”는 말 자체가 의미없게 되어버린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두고 출발하는 모든 질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갖고서 시작하는 모든 신앙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내세울 모든 근거를 박살되시는 겁니다.

그 어느 것도 참된 신앙이었다는 말을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참된 신앙은, 그동안 우리들이 신앙생활이라고 내세울 만한 모든 것이 무참하게 깨어지고 모독받게 한 그 현장에서 밝혀집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3강-애가2장1-7(하나님의 분노)12051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2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4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2:1-7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 원수같이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오른 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를살륙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주께서 원수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궁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성막을 동산의 초막같이 헐어버리시며 공회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또 자기제단을 버리시며 자기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 날과 같이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대상으로 해서 이렇게 짓밟는가하면 야곱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보시는 야곱과 이스라엘 당사자가 이스라엘을 보는 안목이 같지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신명기 28장, 대심방 할 때 자주 펼치는 그 신명기 28장,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그 대목이요, 신명기 28장의 앞부분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나머지 세배나 많은 분량은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와도 저주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은 제쳐두고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나라인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네가 이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와도 저주받는다.’ 달리 이야기해서 ‘다른 민족들은 저주를 모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복 받은 줄로 알아라.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인지를 아는 나라가 된 것이 너희에게 복이다.’ 창세기 끝에는 야곱이 축복하는 대목이 나오고 신명기 끝을 보면 모세가 축복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아는 축복이라는 것은 뭐든지 잘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실제 축복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고 혹독하게 자기 자식을 저주하는 운명을 예고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야곱이 축복하기를……’ 또는 ‘모세가 축복하기를……’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축복한다고 해놓고 실제 내용을 보면 망하고 찢어지고 도망가고, 그런 내용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무슨 축복이 되겠습니까? ‘야곱이 자기 열두 아들에게 축복하기를’ 라고 했다……면, 예를 들어서 어떤 아버지가 있는데 유산은 많고 아들은 열둘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너희는 다 모여라. 내가 축복해 줄게.’ 라고 했다면 은근히 노리겠지요. ‘축복 한단다. 빨리 가자.’ 큰 아들은 맞아죽고 둘째 아들 굶어죽고, 이런 것이 무슨 축복입니까? 그것은 축복이 아니지요. 축복이라 하는 것은 내 쪽에서 뭘 얻어 챙겨야 축복인데, 다시 말해서 내가 은근히 생각했던 나다움이 외부에서 오는 어떤 도움으로 인해서 융성해지고 번성할 때 우리는 그것을 축복이라 보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내 중심의 축복이고 야곱을 통해서, 또는 모세를 통해서 축복하신 것은 ‘네가 얻어맞든 어떻게 깨어지든 간에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 하고 알거든 그게 바로 축복이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다른 민족한테는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지 않았는데 너희들에게는 특별한 혜택을 줘서 하나님이 이렇게 무섭고 심판하시는 분이고 진노하시는 분이고 말씀에 위배되면 가만두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너희에게는 아주 실감나게 완전히 생활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범주 안에서 너희들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축복이라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 되고 싶은데 야곱이나 모세가 이야기하기를 ‘하나님, 이방민족들은 본인들이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데 제발 하나님 비옵는 것은 저희들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그들의 주인이 따로 계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들이 주인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기쁨으로 수용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에게 어떤 난처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이 다 주인 되시는 분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래서 그렇게 당하는 일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화내거나 분개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이 선택한 특별한 백성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스라엘 백성은 특별관리 조치에 들어가는 겁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다 깨어지고 부서지는 여정을 겪게 될 거예요. 그것도 정말 다행스러운 겁니다. 욥 같은 경우 자기가 가진 재산과 자식 열 명을 하루아침에 다 날렸습니다. 욥은 처음에는 그것이 축복인줄 몰랐습니다. 저주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 안 당한 친구들이 저주받은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일을 당했던 욥이 복 받은 겁니다. 구약에서는 욥에게 그렇게 일어났지만 신약에서는 그것을 간추려서 함축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고난 받으면 복이 있다. 성령이 너희와 함께 있다.’

 

성령이 찾아오시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내 나름대로 잡은 계획은 틀어지고 내 것이라고 여긴 나의 모든 인생은 깨어지고 주님에 종속된 존재로서 살게 하는 힘찬 다루심, 힘찬 재촉하심이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는 거기에 쫓기듯이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2절에 보면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신다고 하고 ‘원수로 대해서 모든 것을 삼키시고 모든궁들을 부수시고 심지어 시온산과 거기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만드시고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도록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여기에 야곱이라는 언급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야곱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에게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면 그것이 바로 축복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냥 이스라엘 자기들이 잘되면 그것이 복 인줄 알고 오해를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실제로 저주를 퍼붓는 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인 것을 깨닫는 그것이 진정 축복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자기 주제파악을 하는 것, 내가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계획하는 모든 것이 다 틀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면 그게 바로 돈으로도 바꾸지 못하는 구원받은 사람인 성도의 티가 팍팍 나는 겁니다.

 

나는 이런 존재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평생을 살면서 그렇게 고생했어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된 것을 내가 알았습니다.’ 하는 그 하나만 알아도 너끈하게 그것이 보상이 돼요. 자기가 누군지를 알았거든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 하나님 앞에서 뭘 더 원합니까?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깨어지면서 자기를 알았다면 신약이전에 구약 예레미야 애가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스스로 깨버립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지고 있던 성전도 깨지죠, 안식일과 제사장도 다 깨지고 왕과 제사장도 다 날라 갑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뭔가 격식을 갖추고 그것이 있어야 비로소 신앙생활이 출발이 된다는 인식, 신앙이라 하는 것은 법이나 규칙을 지켜서 모양새를 내고 시간 맞춰서 예배드리고 몇 퍼센트는 헌금을 내고, 이런 요소들이 집합하고 뭔가 갖춰질 때 그것이 신앙처럼 껴지는 그 느껴짐, 그러한 인식을 무너지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갖춰주시면 그것 따라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는데, 라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신다면 그것은 그것마저 다 깨어져야 됩니다. 신앙이란 형식과 규칙 같은 것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것은 신앙도 아닌 것이 신앙의 티를 내기 위해서 동원된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종교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은 헛껍데기요 위선입니다. 규칙에 맞추어서 어떤 법칙에 따라서 하는 것,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잘 합니다. 스케줄 짜는 것, 우리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고 세상 만사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규모 있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 섬기는 것도 규모 있게 섬긴다는 것에 대해서 하등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당황스럽지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니 오히려 더 당황스러운 거예요.

 

‘어떻게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것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겁니까? 사람들이 뭘 움직이면서 하게 되면 반드시 자진해서 형식을 만들어내게 되어 있어요. 내부에 있는 선악체계가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가 지키면서 그것을 선이라고 이야기하고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가 어기면서 그것보고 자기가 죄졌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겁니다. 그것이 선이 되고 악이 된다는 것은 언제 추정하는가? 자기가 법을 만들어서 실시해보고 자기 예상대로 복이 안 온다 싶으면 수정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에게 이득이 오게 되면 이것은 선한 것, 손해가 되면 악한 것이라고 맘이 이미 가 있는 상태에서 어떤 제도나 형식 같은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계단에 올라갈 때나 산에 오를 때는 뭔가 도움 될 만한 것을 잡든지 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뭘 붙들면 다 치워버려요. 의지하면 다 치워버려요. ‘나는 빡세게 사흘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했더니 효과 봤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효과 못 보게 만듭니다. 그 기도를 의지 못하게 만들어요. ‘기도원에 갔는데 기도원 뒷산 어느 바위에서 기도하니까 우리 애가 대학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역시 그 바위위에서 기도해야지.’ 해서 가보면 도시계획 들어가서 도로 나 있습니다. 없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거든요. 추억을 근거로 해서 미래로 발전해가려고 합니다. 과거의 추억을 도약판으로 여겨서 거기서 뜀틀처럼 뛰어서 과거에 그렇게 했던 그것대로 미래를 달성하는 기법으로 도입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그러한지 매사가 그래요. 교회 수련회 가서 게임을 했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더라, 그 다음에 또 하면 재미없어요. 그래서 사람이 자기 자신이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를 감추는 방법으로 과거에 효과 본 것으로 자기를 커버하는 식으로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남들에게 떠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버리게 해요.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자기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제단을 버립니다. 자기 제단이 없으면 어디서 예배하고 어디서 번제는 드리며 어디서 찬양은 하며,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왕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성전도 없고 율법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입니까? 방법은 여기 7절 마지막에 나옵니다. “……자기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헌화하기를 절기 날과 같이 하였도다.”

 

7절 마지막에 보면 원수들,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그들의 궁전을 다 부수고 성전을 다 부수면서 그 성전에서 뭘 하느냐, 승리에 도취되어서 부어라 마셔라 건배를 하고 축하하는 소리를 듣게 하는 거예요. 자, 제가 질문 던진 것이 뭐냐, 우리가 이것 치우고 저것을 치우고 나면 우리가 뭘 근거로 어떻게 해서 신앙생활 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 성전도 없고 율법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목사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 우리가 뭘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근거가 될 만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규칙은 무엇이 있습니까? 있으면 우리가 지킬 것인데.’라고 질문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네가 하고 싶은 그 현장에 바로 법당이 들어선다든지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모독하고 미워하는 그런 사람들이 술판 벌이는 모습을 네가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아직 제 질문을 이해 못하십니까? 내 쪽에서 뭘 합니까, 라고 질문했잖아요. 내 쪽에서 내가 신앙생활 하고 싶은데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신앙생활해서 영광 돌리고 싶은데 내가 뭘 해야 됩니까,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입을 탁 틀어막으면서 ‘네가, 하는 그 자리를 잠시 비켜봐라. 네가, 하는 그 자리에 너의 원수들이 술판 벌리고 떠드는 소리가 있다. 그것을 목격하라.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얼마나 엉뚱합니까? 내가 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잘 하고 싶은데, 정말 하나님께 헌신하고 싶은데 내가 뭘 해야 됩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네 자리는 이미 원수에게 점령당했다.’ 하는 겁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여기에 벨사살 왕이 자기 선대 왕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왔던 금, 은, 기명들과 제사 드리는 도구들을 가지고 부어라 마셔라 훤화하고 술판이 벌어졌어요. 거기에 귀족들 왕후들 빈궁들 다 불러다 놓고 성전 그릇들로 술 마셔가면서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 찬양하면서 하나님 여호와를 모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2장 8절의 말씀에 그대로 예언된 거예요. 그때 갑자기 나타난 것이 손가락이죠. 그러면 스스로 질문해 봅시다. 지금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는 질문자체가 우리에게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질문할 때 가 앞에 우리가 은근히 숨기고 있는 사항이 있어요. 그게 뭐냐, ‘나는 여기 있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렇게 질문하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누구 생각이냐 하면, 내 생각이에요. 저희 아버지는 이 분입니다, 라고 할 때 그게 하늘나라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알지요. 영적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육적인 아버지는 여기 계시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은 참 말귀를 못 알아 들으셔.’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도 맞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 생각하는 것도 맞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내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그 근거가 없다니까요.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는 것은 나는 여기 있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거기 있다는 것이 틀린 것’이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데 엘리야는 어디 있습니까, 모세는 어디 있습니까, 지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전에 신앙생활 잘 하다가 하늘나라 가신 신앙의 선배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라는 그 문제자체가 ‘나는 여기 있다’는 것부터 전제하기 때문에 그 질문 자체가 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타나는 거예요. 손가락같이 나타나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나타나는 그곳에 있는데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나느냐, 소위 하나님 잘 믿겠다, 하는 사람을 박살내고 그 현장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써 충분하게 그 자리를 채울 때 그게 바로 나타나신 하나님 일의 증거가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왜,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붙잡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붙들어서 같이 동업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예배당 지어놓고 하나님 모신다든지 그런 것은 안 됩니다. 예수님을 어디에 모신다든지 그런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시려고 했어요. 붙들려고 했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이 하나님 모시고자 하는 현장을 하나님 모르는 다른 군사들이 술판벌이는 연회장으로 만들어놓았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저게 바로 네가 믿어야 될 신앙생활이다. 제가 바로 네가 목격해야 될 신앙생활이다. 저런 것을 목격하면서 네가 신앙생활 해 나가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쫒아내 버리고 복음이 아니고 인간의 영광과 인간의 번영과 인간의 잘남과 인간의 자기 의와 자기 충성과 자기공로를 자랑하는 현장으로 그 교회를 만들 때 그게 바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쫓겨나야 될 이유를 발견하는 그 현장인 겁니다. 교회가 바로 술판이에요. 인간의 영광만 추구하는 단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를 그렇게 만드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시는 것을 목격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착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는 신앙생활의 부분으로 우리는 수용할 수 있습니다. ‘아, 저게 신앙생활이구나.’ 한국교회가 이단인 것을 알게 한 그 자체가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로 투입되는 거예요.

 

믿을 것을 믿어야지, 예수를 믿어야지 왜 교회를 믿었느냐 그 말이지요. 왜 예수 나를 안 믿고 같은 인간을 믿었느냐는 말이지요. 왜 목사를 믿었고 장로를 왜 믿었어요? 합세해서 여럿이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줄 알았지. 그런 것 아니거든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 성전을 다 부숴버리고 그것을 원수의 술판으로 전환시키는 예레미야애가 2장 7절의 말씀의 그 취지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것 이해 못하면 우리는 신앙생활 다시 해야 돼요. 엘리야가 보고 싶습니까? 모세가 보고 싶습니까? 우리고 보고 싶다고 해서 우리가 보고 싶은 의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지를 않아요.

 

그런데 변화산에서 모세 나타났고 엘리야 나타났잖아요. 이것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보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냥 보여주고자 하신 겁니다. 엘리야 모세 두 양반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는 여기 있는데 엘리야는 어디 있지, 라고 찾을 경우에는 이미 그 질문자체가 잘못된 영역에서 나왔던 질문이기 때문에 그 영역 자체를 부정하는 식으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해버리지요. 말을 제가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 말을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분명하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들어버리면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에요. 베드로 너의 자리가 먼저 있고 그 앞에 엘리야와 모세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세 엘리야 주님 자리가 먼저 있고 거기에 필요해서 베드로가 있는 것이거든요. 내 자리에 천국이 종속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천국이 나타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자리가 마련된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느낄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은 뭐냐 하면, ‘어, 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데 주께서 은혜 주시면 주께서 나타나시는 것, 주께서 계시는 곳에 내가 함께 있다.’ 이럴 때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자리로써 그것이 신앙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내 자리 따로 장만해 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초빙해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타나시면 내 자리라는 그 실체자체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어렵게 이야기할 것 없이 교회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교회라는 실체는 없고 주님이 계시는 곳이 교회에요.

 

주님이 계시는 곳이 교회라 하니까 ‘그러면 이 땅의 교회는 교회가 아니냐.’ 하는데 그것이 교회냐 아니냐의 질문자체가 주님한테는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저쪽에 교회 있고 이쪽에도 교회가 있으니까 교회 두 개 합치면 그게 교회인가, 그럼 두 개의 교회인가, 합친 교회니까 하나인가, 그런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시온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은 하늘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지상의 이스라엘은 하늘에 있는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그림자라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실체가 아닌 그림자를 가지고 실체라고 우기는데 그 실체라고 우기는 것을 그림자로 바꾸는 작업을 오늘 본문이 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찾던 이스라엘, 이스라엘, 이스라엘, 너희들이 그렇게도 찾던 유다, 유다, 유다, 봐라, 없잖아!’ 없단 말이지요. 없게 하시는 그곳이 이스라엘이고 그것이 유다라는 거예요. 없게 만드시는 그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자꾸 나 있는 곳에 하나님이 온다고 하지 말고 주님 계신 곳에 우리가 있으면 그걸로 된 겁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그리고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와 함께 있고 우리는 죽어서 믿어도 살고 살아서 믿어도 살고.

 

그 마리아 마르다가 살았을 때도 주와 함께 있었고 죽을 때도 주와 함께 있었어요. 그 나사로가 어디로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냥 살다가 그냥 잠자고 있었지요. 주께서 잠자는 사람을 나흘 만에 깨웠지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나와 정 반대의 나라에 있어요. 나를 생각하면 나타나지 않고 나를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으로 나타나시는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곧 내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한다든지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는 의도자체가 하늘나라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요구와 질문을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먹을 것 입을 것,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밤중에 잠잘 때 자율신경에 의해서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심장이 뛰어서 아침에 눈떠 보면 내가 열심히 뛰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뛰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우리한테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면 누가 했느냐, 발걸음을 세신다고 했어요. 참새도 내 허락이 아니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평소에 우리는 늘 주님의 살려주심 안에서 이미 함께 있는데 우리가 자꾸 세상에서 남들 찾는 것 찾다보니 내가 납득이 되는 나만의 것이 따로 있어야 그것이 내 세계라고 자꾸 오해를 하다 보니까, 그것이 출발이 되다 보니 나를 위한 신앙생활 한답시고 율법과 계명을 집어넣어서 ‘이러면 신앙생활이 되고 이러면 안 되고’ 자기혼자 소꿉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한 허상과 허구와 위선을 깔끔하게 다 부숴버려서 아예 나는 쓸데없는 존재요 주님 안에서만 성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축복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주와 함께 있음을 새삼스럽게 무릎을 치면서 아는 겁니다. ‘참, 주와 함께 지금 있잖아. 바보같이 내가 또 엉뚱한 걱정을 했네.’라고 기쁨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영화에 보면 폭격장면이 있지요. 그 장면 보고 잠시 슬퍼서 울 수는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영화 속에서 인민군이 전투기 동원해서 서울 서대문 일대를 폭격할 때 ‘큰일 났다. 내가 서대문 사는데.’ 하고 뛰어나갈 바보는 없잖아요. 그것이 얼마나 큰 바보짓입니까?

 

영화하고 현실하고 착각을 했기에 그 사람이 뛰어나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거의 정신병 수준이죠.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는 거예요.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 안지겠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것은 평소에 우리가 허상 속에, 허구 속에,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가짜의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기 때문인데 제발 그 가짜 기준에서 손 좀 놓으라는 거예요. 그 가짜기준에서 손 좀 털라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뜻대로 안되게 하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내(주님) 덕인데 너는 자꾸 네가 착하고 신앙생활 잘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영화 속에서나 나올 가상적인 것’이거든요. 실제는 그것이 아니고 맨 날 죄짓고도 맨 날 살려주고 죽을 때까지 살려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용서해주시고. 그것이 성경이야기고 그것이 바로 택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는 말이지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심’ 5월 20일, 21일, 23일, 계속 의롭다 하실 거예요. 이것은 배워서 될 문제가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이해가 될 문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에 관심을 우리가 둬야 할 텐데 우리는 맨 날 내가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는가, 그래서 행여나 벌이나 받지 않을까, 행여나 내 인생 꼬이지 않을까, 그 걱정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여, 남은 세월이 몇 년 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용서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