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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4강 / 행 10:44 / 성령과 이방인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24강 / 행 10:44 / 성령과 이방인

정인순 2011. 4. 28. 23:26

 

 

성령과 이방인  

음성

 

녹취:이한례

대전110428a행10장-(성령과 이방인)-24강-(이 근호 목사)

대전강의 4월28일 사도행전 24강

 

사도행전 10장 44절부터 보면,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돼 있죠. 이게 신학교 때 공부할 때에 교수가 이 점을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성령이 어떻게 일하느냐, 어렵지만 쉽게 하겠습니다. 성령의 일하심 ①번, 사람하고 상대한다. ②번, 기적을 일으킨다. ③번, 말씀을 앞장세운다. 세 가지만 할게요. 몇 번이 정답이겠습니까? ③번이죠. 우리는 ③번인데 지난 번 같이 어렵다 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인간이 말하는 걸 말로 보기 때문에 인간이 넓고 크고, 그 중에 말은 그 일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 쭉 있으면 말하기, 듣기, 먹기, 잠자기, 이렇게 있다면 말하기는 그 중에 일부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하나님의 일이니까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이 일할 때는 사람을 상대로 해서 사람에게 기적을 일으킨다. 이런 식으로 할 때 이것이 쉬워지고 납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신학교 배울 때 그 교수가 분명히 언급했어요. 성령을 이런 식으로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거예요. 장사가 되려면 요거해서 장사해야 되거든요.

 

‘성령 받으시면 이런 기적 일어납니다. 성령 받으시면 이런 원하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들, 아쉬운 거 있을 겁니다. 아쉬운 거 성령 받으시면 아쉬운 것이 해소됩니다. 가정에 우환이 있습니까? 사업이 안 됩니까? 성령 받으시면 다 만사형통입니다. 항상 인간과 기적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 교수는 분명히 했어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성경 말씀대로 현실화 시키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내용을 이게 성경 문자로 머물지 않고 그것을 이 세상에 현실화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은 그것까지는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신학교 도서관에 있는 신학 책에 보면 더 나오거든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말씀의 깊이와 높이에서 더욱 더 거기에 대해서 풍성히 안다.’ 이렇게 돼 있어요.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의 세계 안에 깊숙이 들어간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렇게 되면 나라는 자아, 나라는 사람은 잊어버리고, 내가 잊어버리면 교회 가서 내가 뭔가 은근히 기적을 바라던 그 기적도 같이 소실돼 버리는 겁니다. ’아하,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내가 전에 알고 있는 세계는 내가 있고 내가 어떤 기적을 받아서 교회 와서 자랑 좀 하고 싶었는데 성령을 직접 받아보니까 이 세상, 나 중심의 이런 세상은 잊어버려야 될 세상이고 말씀 중심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말씀의 중심에 누가 있느냐 하면, 내 몸이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나의 몸과 만날 때 이걸 두 자로 그리워하던 ‘천국’이라고 합니다.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라.‘(롬14:17) 이래 돼 있어요.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주신 의, 예수님이 주신 평강, 화목,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 겁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죽어서 가는 그런 천국은 없는 거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세계에 접하는 겁니다. 이쪽에서 오는 공간에서 하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어느 장소, 이 장소가 있다는 어느 자리에 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천국에 사는 게 되는 거예요. 앞으로 우리는 영원히 예수님 앞에 면류관 던지고 영원히 찬양하며 살아야 될 거예요. 가서 예수님을 섬기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섬기는 목적으로 우리는 거기에 갈 수밖에 없고 그 세계는 미리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육으로는 알 수 없는 ’아!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구나,‘ 그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쭉 나와 있죠. 천사들도 예수님 받들어 모시고, 사람들은 천국가면 놀 생각만 하거든요. 고생 많이 했으니까 놀아보자는 거예요.

 

천국은 노는 곳이 아니고 예수님 섬기는 곳 이예요. 예수님 섬기려면 지금부터 섬기고 있어야 그 인간이 그 천국에 가는 거지, 지금은 교회 잘 섬기고 목사 안수 받고 자기 자신의 미비점을 채우려는 이것은 누구 섬기는 거예요? 예수님을 섬기는 게 아니고 누굴 섬기는 겁니까? 자기 자신을 섬기는 거죠. 그래 가지고 무슨 천국을 이야기 합니까? 그건 다른 사람에게 천국을 호도하게 만드는 거예요.

 

마태복음 23장13절에 나오죠.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든다. 그런 무서운 대목이 나와요. 다시 말씀 드려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내가 편히 쉬는 곳이 아니고 내가 어떤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그 세계를 예수님 세계라 합니다.

 

그러면 지옥은 뭐냐, 예수님의 심판으로 저주가 임해서 영원히 예수님이 없는 세계, 그곳이 바로 지옥이죠.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서 천국 가고 있는 겁니다. 이걸 구약에서는 여호와가 없는 애굽에서 여호와와 동행하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이 구약적인 평지 위에서 구약적인 무대에서 드라마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그림자라고 하는데, 실제 신약에 나타나는 그 현상을 애굽과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라는 두 개의 같은 평지 위에다가 두 개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만들어서, 하나는 홍해바다를 설치해 놓고, 이쪽에는 요단강을 설치해서 그 홍해바다 건너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그 불가능, 불가능인데 앞에 갈 때는 바다가 갈라졌고, 뒤에 따라갈 때는 언약궤(약속)를, 약속을 믿는 자에게만 허용이 되고, 나머지는 ‘저리 가, 저리 가, 들어오지 마’ 하고 배척하는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그것을 지평적인 무대 위에서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평지에서 이렇게 이동하지만, 신약에서는 위로 올라가죠. 그 위로 올라온다는 것이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오해한 거예요. ‘예수님, 이스라엘이 회복됩니까?’ 아직도 자기가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언제 이렇게 회복되느냐, 거기에 신경 쓰고 있으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그거는 너희들이 알 바 아니요. 날 봐라 지금 구름 타고 올라가잖아.’ 구름 타고 올라가시니까, 제자들이 ‘오! 주님 우리하고 같이 일해야지, 먼저 가버리면 비겁한데,ㅎ 우리는 왕따 돼 버리고 어떻게 살지? 어떻게, 어떻게, 가시면 우리는 어떡하라고?’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배신당했다 느낌 들었죠. 같이 다니다가 승천 할 때도 배신감을 느꼈을 거예요. 그때 천사가 와서 ‘뭘 보는데?’ ‘위를 봅니다.’ ‘위를 보지 마라. 성령이 오게 되면 너희들이 바로 니가 있는 성령 안에서 이미 주님이 너와 함께 있음을 니가 알 것이다.’

그 성령이 바로 사도행전 10장 44절~46절에 나오는 그 성령 이예요. 성령이 한번 오고 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성령이 오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그림으로 쉽게 해 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전에 오셨던 아저씨가 들어도 어렵다 할 거예요. 그렇죠?ㅎ 아까 이유가 뭐라고 했어요? 인간 중심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나한테 어떤 이득을 줄 것이냐,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독교죠.

 

여기에 하나의 차원을 이야기해요. 이차원이라 하는 것은 앞 뒤, 개미 차원, 벌레는 앞 뒤, 좌 후, 이거밖에 모르는 이런 벌레들이 사는 세계라 합시다. 두께가 없어요. 벌레는 평평한 거밖에 없어요. 우리 인간은 삼차원이거든요. 높이 넓이, 삼차원을 내려다보면 이 개미들이 삼차원을 이해를 못하죠. 위로 간다는 게 이해가 안 되죠. 구름타고 위로 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냥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땅의 존재거든요. 땅에서 이렇게, 이렇게 이동하는 것이 위로 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럴 때 여기 장난 한번 쳐보는 겁니다. 여기 이차원 세계에 사거리가 있는데 삼차원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어떻게? 여기 손가락을 가지고 폭~ 쑤시는 겁니다. 폭~ 쑤시게 되면 삼차원에서 보면 평지 위에 손가락이 이래 들어오잖아요. 이게 벌레들 입장에서는 높이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뭐로 보이느냐 하면 하나의 점으로 보이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이게 바로 증상, 징후라는 거예요.

 

이차원에 사람이 왔을 때 그들은 점으로 보이는 겁니다. 이 위가 보이지 않아요. 모든 걸 자기 차원에서 다 해석하기 때문에, 육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증상, 징후라 이야기하죠. 예수님은 사도바울이 갔던 삼층 천에서 오신 분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그걸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육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하나의 증상으로 ‘이상하다. 어떻게 저런 일이,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되지?’ 하나의 흔적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되지? 어떻게 베드로가, 베드로 본인도 물 위를 걸으면서 ’어떻게 내가 물 위를 걷지?‘ 또 변화 산에 올라가니까, ’오! 엘리아하고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왜 등장하지? 야, 이상하다.‘ 축복하니까 계속해서 떡 나오고 고기도 계속 나오고, ’5천명을 먹여도 남지, 어떻게 그렇지?‘ 그 모든 것이 ’이상하다, 이상하다.‘하는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증상과 징후입니다.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표시했다 해서 표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을 표시하니까 적자 앞에 표자를 붙이면 표적이 되죠. 표적으로 흔적을, 흔적이란 말이 적당하네요.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들어왔다는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흔적, 오병이어 행하고 물 위를 걸으면 그걸로 구원을 받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최고의 표적 중에 기적 중에 표적은 예수님 말씀이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어요. 요나의 표적을 세 자로 하면 십자가예요. 십자가에서 못 박혔다. 그 사람은 분명히 죽은 거예요.

 

사람은 죽으면 두 번 다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무덤에 가 보니까, 무덤이 말짱 비어져 있었습니다. ‘어’ 그때 예수님을 찾아온 그 여인들도 이차원적으로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거예요. 이건 로마 군병도 마찬가지고 ‘어이, 시체를 찾아라.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간 모양이다. 그 시체를 찾아라. 지명수배를 했으면 시체가 없으면 예수님 부활했다고 착각들 하기 때문에 빨리 시체를 찾아야 한다. 완전하게 처리해야 한다.’ 시체 찾는다고 이차원을 돌아다니는데 예수님은 죽음에 갔다가 부활을 해버렸다 말이죠.

 

이차원을 통과해 버린 거예요. 통과해서 다시 나타날 때는 문을 닫아놔도 들어오시고 고기 잡을 때도 물 위를 걸어오시고 그리고 엠마오에 같이 가면서도 얼굴이 다른 얼굴을 하다가 눈 떠줄 때에야 예수님으로 나타나고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모든 누가복음 마가복음 모든 흔적들, 기적들이 결국은 뭘 하나 보여주려고 이렇게 하셨는가, 자질구레하게 예수님이 장난치듯이 ‘나는 삼차원이다. 너는 이차원이지? 날 잡아봐라.’ 어린애들 장난 하듯이 놀리듯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어떤 특별한 최후의 목적이 있어요. 그걸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십자가’라고 했어요.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기 때문에 십자가를 알지를 못합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지혜로는 십자가가 접촉되지 않는 식으로 십자가가 일을 하시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접촉이 안 되는 식으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한번 생각해 보면서 성경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1절 같이 한번 봅시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 그 다음에 무슨 자입니까? 비밀이죠. 비밀 같으면 아무도 몰라야 되는데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허락되었다’는 이야기, 이 ‘허락되었다‘는 말이 성경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것이 뭐냐 하면, 창세기 16장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한테 자식을 낳는 것을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했다. 아브라함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교재로서 살아갑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 특수한 일이 벌어집니다. 남들 다 가진 자식을 못 낳아요. 그런데 그걸 ‘아이쿠, 내 마누라가 불임여성인데.’ 라고 해석하는 것도 이차원적으로 해석하는 건데, 그게 아니고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삼차원적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해서 자식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뭣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그 애만 나의 혈통을 잇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혈통을 이어간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구원받을 반열, 노선이 되는 거예요. 구원 받을 자들의 긴 사슬이 되는 거예요. 허락하지 않으면 천국은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했기 때문에 추방한 자가 데모한다고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허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어요. 넣어주시라고 문을 두드려도 문이 닫혀 버려요.

 

성경에 보면 어떤 것은 진짜 말이 어려워요.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 열지 아니하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들여보낸 사람을 다시 원 상태로 빼서 지옥의 힘이 아무리 세도 주께서 구원이 허락된 사람에게 지옥으로 들어가게 할 힘이 없습니다. 본인이 힘이 세다고, 정신 차려서 오는 게 아닙니다. 정신 차려서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기도가 악마의 기도를 이깁니다. 누구한테도 지지를 않아요. 그래서 자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자랑하지, 자기기도 자랑하면 안 되죠. 매 순간 매 하루하루를 허락한 걸로 해석할 수 있을 때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흔적에 같이 합류돼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뭔지를 알기 때문에 ‘아! 십자가라 하는 것은 허락된 자에게만 천국의 비밀이 공개되는구나.’ 이건 어려운 건데 그냥 해 봅시다. 천국의 비밀이 제자들에게 허락되었다면, 그럼 제자들이 계속 이 세상을 은혜로 살아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천국의 비밀은 감추어진 것이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공개 아닌 공개가 되어버린 거예요. ‘천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겁니다. ‘천국의 백성은 없다.’라는 말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나 이미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 제자들이 최초로 집단적으로 성령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성령 받은 사람은 어느 집단에 소속되겠습니까? 그 제자의 집단에 소속되겠죠. 그걸 가지고 교회라고 합니다. 그걸 성전이라 해요. 제일 밑의 기초는 예수님, 그 위에는 사도와 선지자, 그 위에 성령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집을 이룰 때 그 안에서는 전부 다 성령에 의해서 철 구조처럼 단단하게 맺어지는 겁니다. 그 성령에서 나온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모든 흔적의 절정은 십자가고 이 십자가는 허락된 사람에게만 알아지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성령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에만 있다.

 

그러면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를 믿는 나에게 있습니까? 없죠. 성령은 우리 소유용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 줘 놓고 ‘니 알아서 해라.’ 하는 게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령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거기서 성령 안에 들어가 버리면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독립적으로 나 혼자 살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동행하기 때문에, 주인공은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보면 인간들은 육에 속해서 세상적인 것밖에 몰라요. 대전 사람이나 옛날 애굽 사람이나 대구 사람이나 마찬가지예요. 육에서 흐르는 이 사람들의 특징은 혈통, 혈육,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이 육인데 여기서 인간의 행함만 이야기해요. 행함으로 건물 짓고 행함으로 발전기 만들고 행함으로 배 만들고 행함으로 빌딩 세우고 행함으로 텐트 만들고, 전부 다 행함의 세계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미 애굽에서 사람들이 ‘애굽의 말과 사람의 숫자를 의지하지 말고 동행하시는 여호와 이름을 의지하라.‘ 했거든요. 그러니까 구약에서부터 이미 육적인 것과 하나님의 동행함의 흔적이 이렇게 차별화 된 겁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로 성령이 오게 되죠.

 

마태복음 다시 가게 되면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천국의 비밀은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으나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다.’ 허락이 되었으니까 앞으로 남은 인생도 계속 어떻게 됩니까? 허락하신 인생이죠. 허락하신 인생이니까 내 인생이 허용이 안 되죠. 내 인생이 허용 안 되면 내 인생은 뭐냐, 천국의 비밀이 나를 천국 가도록 인도하는 것이지, 내가 나를 천국 가도록 인도하는 게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천국의 비밀이 주도권을 쥐죠. 모든 게 천국의 비밀 이예요. 누구 만나고 자식 태어나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전부 다 천국의 비밀과 관련 돼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그러한 상태가 성령 주심을 인하여 놀라게 돼 있습니다. 지금 놀라는 사람이 누굽니까? 베드로가 놀라죠. 베드로가 맞죠? 맞으면 맞다 하세요. 사도행전 10장 44절 맞죠? 베드로가 놀란 거 맞죠. 그러면 사도들이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죠? 성령 받은 사람이 놀란다는 것은 이것은 신기해서 놀란 것보다도 어떻게 이방인이 언약이 없는 나라와 똑같이 천국에 들어가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 언약이라는 것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해서 언약의 대상자가 유대인이 아니고 언약이 없는 사람도 언약 혜택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겁니다. ‘아! 천국 같은 동기생이구나.’하고 대단히 놀란 겁니다.

 

그렇다면 뭐를 이 땅에서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돼요? 유대인만 구원한다는 입장에서 성경, 언약을 해석한다든지 하면, 이건 반칙이 되는 거죠. 뭔가 하나님의 뜻하고는 안 맞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 더 이야기해 봅시다. 이 사람이 베드로라 합시다. 이 베드로가 ‘유대인만 구원받는다.’ 요 앞에는 뭐냐 하면 ‘언약은 유대인을 선택했다. 언약 주신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고 언약은 유대인을 선택하고 유대인만 구원받는다.’ 이게 전부였죠? 이게 어디 있느냐 하면 베드로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새 언약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를 위한 예수님(메시야)이죠? 유대인만 위한 메시야가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시죠? 그렇다면 유대인의 반대말이 뭐냐,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지옥 갑니다. 왜, 뭐가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보통 이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나올 텐데 이제는 아시죠? 언약이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지옥을 가게 됩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가 보세요. ‘우리 유대인이 구원 받는다. 받는다. 받는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은 ‘이방인은 구원을 못 받는다. 못 받는다. 점점 더 또렷해지겠죠. 그런데 하나님이 심술궂다 할까, 개살궂다 할까, 장난 끼가 많은지 이방인이 언약이 없이도 구원을 받았어요. 성령을 받으니까!!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베드로 생각이 뭐가 잘못됐느냐 하면, 노아언약, 그 다음에 모세언약, 그 다음에 다윗언약, 그래서 예레미야 언약, 그 다음에 예수님 십자가 언약이잖아요. 이 노선을 거쳐서 예수님이 오고, 특히 모세언약 같은 경우에는 유대인이 선택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유대인만 몰치고 구원받는데 이 노선이 없이 십자가가 그들에게 왔다는 것은 이 노선으로 거쳐서 온다는 이 해석, 이 사고방식이 예수님으로부터 정면으로 꾸중 들을 해석이 돼 버려요. 이게 잘못된 해석이 돼 버리는 겁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여호와 생각하면서 언약을 생각하면서 언약, 여호와, 하나님, 이 모든 것을 어디다 집중시켰다는 겁니까? ‘나 구원 받았음.’ 이 목적을 향하여 성경의 모든 것을 잘못되게 해석하는 겁니다.

 

이렇게 언약 노선 없이 바로 이방인에게 구원이 와 버리면 해석을 노아언약 뒤에 십자가를 세울 게 아니고 십자가를 어디 세워야 됩니까? 맨 앞에다 세워야 돼요. 맨 앞에다 세워서 이런 노선 거치지 않고 바로 이방인에게 바로 연결돼 버리죠. 그건 바로 역사 위에 묵시는  역사의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이런 역사적인 순서, 그것의 사람들은 ‘그래, 그렇지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아.’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러한 노선 없이 괘도 없는 열차처럼 바로 등장해서 십자가의 효과를 줘 버리면 노아언약 이후의 십자가가 아니라 처음부터 십자가가 있었고 다만 이방인에게는 거저 주게 돼 있고 유대인들은 언약, 율법을 통해서 구원에 가도록 그렇게 조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창세전 언약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착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착각이 그럼 유대인들은 혼자 손해 본 거라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그 다음에 벌어져요. 뭐냐 하면 이방인들에게 십자가가 거저 왔죠? 그 다음부터 이방인 안에 잠복돼 있던 이방인의 속내가 유대인을 뒤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십자가로 구원 받아 놓고 나오는 것 보니까 옛날 유대인들이 죄 짓던 것을 되풀이 반복하는 그런 속성들이 솔솔 실 뭉치에서 실 나오듯이 솔솔 풀려 다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어떤 인간도 자기가 생각해서 구원되는 법은 없습니다. 오직 주께서 허락해야 돼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분의 고유권한이지, ‘내가 예수님과 가까이 밀착했잖아요. 이런 것은 어드밴티지, 구원 받는 데 전혀 도움 되는 게 없어요. 하나님이 허락해야 돼요.

 

그런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더 놀라운 게 있어요. 이걸 물리학에서 ‘동조성’이라 하는데 동조하는 것은 같이 떠는 것, 어떻게? 공간이 다른데, 위치가 다른데도 같이 떠는 것을 동조라 하는데, 왜 공조는 아닌가, 공조라 하는 것은 같이 뜻을 모아서 같이 까부는 것, ‘니 공조했지? 공모했지?’ 하여튼 공조죠. 그런데 동조라 하는 것은, 저 멀리 한쪽은 캘리포니아, 한쪽은 서울에 있다면 쌍둥이가 떨어져 있다면 이쪽에서 알레르기 걸리면 저쪽에서도 알레르기 걸리고 감기 걸리면 저쪽에도 감기 걸리고, 이럴 때는 공조가 되겠죠. 하여튼 이 뜻을 알겠죠? 떨어져 있는데 서로 원인 결과 관계없었는데 한쪽에서 일어난 현상들이 똑같이 일어날 때 이걸 공조라, 또는 동조라 한다 이 말이죠. 같은 말인데 동조라 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공조라 하는 것은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건데 쌍둥이 키우면 그런 일이 있다고 해요. 하나 아프면 같이 아프고 그런데 이걸 믿을 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데 이 동조현상이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게 반대로 일어난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한쪽이 은혜를 받으면 한쪽이 복음을 저주하게 돼 있다는 그러한 동조현상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이 천국 가면 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는 동조현상이 일어나면서 가는 거예요. 만약에 어느 사람이 복음을 깨달았다면 어떤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저주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언약 안에서는 이게 짝을 이루게 돼 있어요. 어떤 짝이냐 하면 천국과 지옥 이 둘밖에 없어요. 다른 제 3의 중립지역이 따로 형성돼 있지 않습니다. 천국 가는 숫자와 지옥 가는 숫자가 똑같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에요. 하나 가는데 만 명 떨어져도 괜찮아요. 하여튼 현상은 뭐냐 하면 복음을 전하게 되면 반드시 만약에 배가 바다를 가게 되면 왼쪽 오른쪽으로 물이 그 순간에 배 앞쪽에서 갈라지잖아요. 한쪽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고 반드시 갈라지듯이 복음이 똑같은 거예요.

 

복음은 한쪽은 망하는 자를 더욱 더 망하게 하면서 한쪽은 그 망하는 쪽을 보면서 그 덕분으로 이쪽이 구원을 받는 거예요. 제발 좀 지옥을 가 줘야 돼요. 복음에서 반대를 해줘야 된다니까요. 그게 하나의 물살이고 하나의 물결이라니까요. 그럴 때 주님의 움직임을 우리가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주께서 지금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내 복음에 동의한다고 해서 그걸 믿을만한 게 못돼요. 동의해도 내일되면 딴소리 한다니까요. 교회 다니는 사람 한둘이 느낀 게 아니잖아요. ‘나는 복음에 모든 걸 걸었습니다.’ 해놓고 몇 개월도 안 돼서 그만두고, 이건 뭐하고 마찬가지냐 하면, ‘복음을 좋아한다. 나는 호감 있다. 나는 궁금하다. 더 배우고 싶다.’ 이런 것 가지고 은혜 받았다 하면 안 돼요.

 

십자가에서 복음에 대해서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어떻게 했습니까? 제자들도 도망하는 거예요. 제자들도 도망갔는데 만약에 제자들이 구원받았다면 이것은 오순절처럼 오직 성령이 왔기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이건 아까 하나님, 주님이 허락하신 거예요. 성령이 와서 구원받기 때문에 성령 받는 그 바탕은 반드시 아무도 복음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항상 명백하게 전제가 돼 있어야 돼요. ‘나는 너무 머리가  좋아서 복음을 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또 탈락할 사람 이예요. ‘나는 절망 가운데 주님을 보았다.’ 이것도 아닙니다. ‘나는 복음에 대해서 정말이고 자시고간에 복음 자체에 관심조차 안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나예요.’ 복음에 대해서. 교회야 재미나게 노니까 거기 가서 사람이 인지상정으로 서로 대화하고 내 존재 보람도 느끼고 하는데.

 

복음에 대해서는 그게 교회가 아니고 교제 나누는 것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구제도 아니고 예배드리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십자가 피예요. 피 흘리는 사건이지, 어떤 남자 나사렛 예수가 죽는 사건이지 그걸 영광 돌리고 그걸 모여서 찬양하고 하는 것은 복음하고 관계없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대번 전제가 나오죠. ‘주여 누구십니까?’ 하니까 전제가 뭐였습니까? ‘나는 니가 핍박하던 예수다.’ 전제가 이미 핍박이 전제가 된 거예요. 그런데 핍박이 예수님을 데모하는 핍박이 아니라 예수님한테 아무 관심도 없는 것도 똑같이 핍박 이예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거예요. 왜, 사람이 왜 예수님한테 관심이 없을까요? 모든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2차원인 육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관심 있어요? 나의 몸, 나의 혈육, 내가 이 세상에서 남한테 기 안 죽고 인간답다 소리 들어가면서 그저 빌어먹지 않고 살아가야한다는 그 관심사에서 우리는 한 순간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펀드 넣어놨는데 졸지에 망하면 안 되지, 가난하면 안 되지,’ 그 심리가 기본으로 돼 있습니다. 언제 피 이야기 생각을 했습니까? 십자가 죽은 거하고 우리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자기 아들 죽었다 하면 화들짝 놀랄 일이지, 예수님 죽은 것은 아무도 놀랄 일이 아니잖아요.

 

그처럼 인간의 바탕은 언약이 아니고 육입니다. 육에서 봐서, 육이 밀가루 덩어리라면 여기서 볼록 튀어나온 것, 이게 인간이라 보는 겁니다. 육을 살짝 잡아당기면 융기, 돌출된 거예요. 그러면 단단한 뿌리는 어디에 박혀있습니까? 육에 박혀 있어요.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다만 구원받으면 이 사람이 피의 의미를 알죠. 그 사람은 허락됐으니까.

 

성령이 온다는 것은 바로 니가 뺄 수도 뺄 수도 없는 육, 이걸 죄라고 규정되는 겁니다. 이게 성령이 와서 아는 게 이거예요.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다고 했잖아요.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구약은 주로 누구 이야기입니까? 이방인 자기 이야기고 유대인들은 자기 육의 이야기를 대변해줬던 긴긴 역사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람을 꼬이려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은 말씀을 앞장세우잖아요. 그런데 그 성령이 베드로가 있고 이방인이 있는데, 성령이 베드로에게 말씀을 전하라 했잖아요. 말씀을 전하라 하는데 베드로의 말솜씨가 좋아서 이 사람이 성령을 받은 게 아니고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라 해서 성령이 와 버렸으니까 이 사람과 베드로 사이는 주종관계나 제자 스승관계가 아니고 뭐냐 하면 말씀을 주고받았던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이 베드로 본인의 것이 아니고 성령이 허락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모든 공로를 누구한테 돌립니까? 바로 지금 살아계신 주님께 돌리는 거예요. 여기 주인과 노예관계가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들에게 절하려고 하니까 베드로가 금하잖아요. ‘왜 저한테 절합니까? 내가 해준 게 뭐 있다고 나한테 절해요?’ 다만 사도를 도와주는 것은 곧 복음을 돕는 게 되는데 어려울 때, 추울 때 도와줄 수 있는데, 사도에게 절하고 당신이 날 구원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엄청난 잘못인 거예요. 그만큼 아직도 영을 받은 흉내를 내고 있지, 정말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같은 육끼리, 육끼리 옛날 했던 행세를 또 발휘한 겁니다. 아무 보탬도 안 되는, 성령 못 받았기 때문에 성령 받은 흉내는 내는 거예요. 성경을 보고, 이것을 패션 잡지로 봐서 이걸 통해서 연기 하는 거예요. 이걸 대본으로 봐 가지고. ‘아! 성경 한 구절 외우면 은혜 받는구나.’ 해서.

 

오늘 아침에 어느 가게를 갔는데 앞에 뭐가 붙어있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ㅎ 내가 물건 사러 갔으면 한 소리 하겠는데, 내가 도움을 받으러 갔기 때문에 말을 자칫 잘못해서 안 도와주면, 컴퓨터 뭐 배울 게 있어서, 동영상 편집할 때  자르는 법을 몰라서 일부러 가서 말은 못하고, 나중에 배워놓으면 나중에 한 소리 해야죠.ㅎ

 

그것이 마귀가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비 언약, 욥을 반대했던 사람의 사고방식이라는 걸 몰라요. 그게 바로 육에서 말씀 들으면 이게 육이 된다는 사실, 똑같은 육인데 똑같은 육에 말씀 들어가서 성령 받았는데 말씀 들어놓고 육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것은 성령은 말씀을 주지만 이 말씀에 대해서 똑같이 해도 한쪽은 동조현상, 한쪽은 말씀을 육을 위한 말씀으로 해석하고 한쪽은 ‘아! 주님께서 다 이루셨구나.’ 라는 쪽으로 갈라서는 것, 이것이 동조현상 이예요. 똑같은 말씀을 줘도 쫙쫙 갈라지는 거예요. ‘어렵도다.’ 하고.

 

이것이 사도행전 끝부분에 가면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고 설교하니까 똑같은 현상, 다 가버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도 예수님 말씀 듣고, 예수님이 말씀했는데도 ‘어렵도다.’ 하고 두 번 다시 그 5천명 되는 사람 중에서, 그게 남자만 5천명이거든요. 여자, 아이까지 합쳐서 8천명이라 한다면, 교인 8천명이 그 다음 주일 날 한명도 안 왔다 이 말 이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들도 갈래?’ 그러니까 ‘영생의 말씀이 계신 데 누가 가겠습니까?’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나에게 올 수 없다. 나한테 접촉할 수 있고 제자는 될 수 있어도 나한테 온다는 것은 너희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아버지가 보낸 자만 예수님만 알고 예수님을 영원히 주로 섬길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 방주에 8명 들어가도 그것을 주님께서 섭섭하다 않는 이유가 그 8명도 본인의 능력으로 들어온 게 아니고 주께서 그 시대에 그들만 허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예요. 만약에 노아가 8명 들어가야 될 방주에 옆집 아저씨 넣어주고 한다면 아마 홍수 안 옵니다. 홍수 안 오면 노아가 거짓말쟁이 돼요. 성령 받은 사람만 들어와야 돼요. 성령 받은 사람만 들어오기 위해서는 십자가 복음만 전해야 돼요. 왜, 그게 어리석기 때문에 그래요. 똑똑한 사람이 들어와선 안 돼요. 어리석어 보면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야 자기가 안 생기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가 똑똑해버리면 천국가면 누구 섬기게 됩니까? ‘역시 나는 똑똑해.’ 계속 자기 똑똑함을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그럼 그건 지옥이죠. 천국 간다고 갔는데 폴짝 뛴다고 뛰었는데 천국이라 도착했는데 여기는 지옥에 온 거예요. 지옥에서 와서 지옥 가는 거예요. 육에서 와서 육으로 가는 거예요.

 

복음을 아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옛날 생각하면 돼요. 왜냐하면 자식들이 복음에 대해서 싫다는 게 아니고 아~예 관심도 없는 그것이 자기가 성령 받기 전에 똑같아요. 같은 혈육이니까. 아이, 그 아들에 그 자식이지, 어디 딴 데서 튀어나오겠습니까? 그런데 그 전에도 분명히 복음을 전했지만 때가 안 되매, ‘무슨 소리했나,’ 라고 무시했던 그 순간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사람이 고생한다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에요. 고생은 고생한 만큼 육으로 복음을 흉내 낼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게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오는데 씨를 뿌릴 때 받으면서 ‘야! 좋다.’라고 받았잖아요. 그런데 그 밑에 바위가 있을 때는 자기 속에 바위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경우에만 복음이 좋았지, 환란이 올 때도 복음이 좋았다는 것을 본인이 미처 몰랐죠. 나중에는 환란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그 사람의 본 모습 이예요. 그 다음에는 더 유혹입니다. 환란도 이겼어요. 문제는 세상사는 사업이 잘 되고 세상의 너무 행복한 재미에 빠져서 이제는 예수님 죽었다는 소식도 이제는 언제 적 들었는지 안 들리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 ‘아! 나는 애초부터 내 속에 가시 넝쿨이 있었는데 환란 이기고 말씀 좋아하는 그걸로 구원이 된 줄 알았는데 씨가 계속 내 속에 진짜 들어있는 것을 맞닥뜨릴 때 나는 그 복음을 절통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발각시키는 그것, 그 역할을 말씀이 해대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는 말씀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을 애쓴다고 한다면 우리가 힘듭니다. 속에 바위가 들었는지 가시 넝쿨이 들었는지 복음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그저 전할 뿐이죠.

 

그렇게 해서 47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여기 보면 뭐와 같이 돼 있습니까? ‘우리와 같이‘로 돼 있죠? 그러면 베드로가 ’우리와 같이‘라 할 때 그 우리라는 것은 베드로 자기가 본부가 디는 겁니까? 아니면 베드로도 포함돼 있는 어떤 새로운 모임 이예요? 베드로도 포함되죠. 그러면 베드로가 거기서 주인공이 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주인공이 될 수 없죠. 우리라는 개념이 먼저 있는 선배들이나 터줏대감을 여기서는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서 주인이란 있을 수가 없어요. 사람이 성령 줄 수가 없거든요. 사람은 그냥 말씀만 전할 뿐이지, 성령을 주고 안 주고는 사람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그 사람한테 얻어먹은 것도 없는데 왜 그 사람의 종이 돼야 합니까? 그건 말도 안 되죠. 그 사람이 말씀 전하는 데 돕는 건 좋은데 말씀 전했다고 내가 구원받은 건 아니잖아요.

 

그것은 구원 받는 것은 말씀을 전했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누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되는데, 성령은 인간이 줄 수가 없습니다. 왜, 줄 수가 없는가 하면, 성령은 주님의 자리에서 주님이 주시는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이렇다는 말은 소용이 없어요. 인간의 마음이 우리의 구원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목사가 ‘집사님, 내 마음 알아주세요.‘ ’지 마음 알아서 뭐 할 건데?’ㅎ ‘내가 왜 십자가 지지도 않은 사람 마음을 왜 알아야 되는데?‘

 

인간 사회에서 서로 마음을 알아주고 서로 도와주면 언젠가는 도움 받을 때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 도움 받는 걸 계산해보면 도와주는 것도 큰 손해가 아니라는 계산이 서요. 그런데 천국은 허락된 사람에게만 성령이 왔기 때문에 거저 받았다고 제발 보답하지 마세요. 이건 보답한다는 자체는 이는 거저 주심을 모독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기 오신 분이 우리 밀을 사왔잖아요. ‘아이쿠, 이걸 사오시다니, 보답을 해드립니다.’ 이걸 왜 보답해요? 이걸 보답 받으려고 한 겁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국과 은혜와 구원은 보답하라는 게 아니에요. ‘이런 은혜 받고 니가 입 싹 닦고 염치없이.’ 그걸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 자체를 아예 하나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줘서 그 사람이 독립해서 따로 할 것 같으면 보답이 되겠는데, 이걸 줬다는 자체를 하나님께서 이미 소유했기 때문에, 자기 것인데 이미 점령을 해 버렸는데 몽땅 다 가졌는데 뭘 새삼스럽게 보답을 해요. 사람이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다 주의 것이 되었는데, 이미 주님의 것을 공급받고 사는 건데, 뭘 공급해 준 사람한테 지가 준다? 무슨 말입니까? 지가 재미나게 쓰면 되지, 아이, 부모가 자식에게 용돈주면 자식이 맛있는 거 사먹으면 부모도 맘이 좋은데, '이거로 부모님께 보답해야지, 세배 돈 받아서 엄마 몇 % 떼 줄까?‘ 이건 말도 안 되죠. 뭘 하나님께 드려요? 하나님이 다 주시는 것이지.

 

로마서 11장에 나오죠? 먼저 바쳐서 대가 얻는 식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바쳐서 복 받는 건 없어요. 그건 교회 목사나 사기 치지, 성경에 그런 것 없습니다. 그저 잠자고 목욕하고 밥 먹고 살고 다 그냥 받았으니까 받은 걸로 만끽 하세요. ‘고맙습니다.’ 하고 만끽하면 그게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