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21강 / 행 10:36 (통제되지 않는 죄) 본문
사도행전 21강
이근호 목사
링크 :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1대전/대전 110127a.MP3
녹취:이한례 대전110127a행10장(통제되지 않는 죄) 대전강의 1월 27일 사도행전 21강
오늘은 사도행전 10장 36절부터 할 차례죠. 사도행전 10장 내용이 쭉 나오는데 10장 35절부터는 베드로 설교가 나오는데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해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는데 당신은 왜 설교하는데?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는데 잘 난체 하면서 강단에 서서 껍죽거리면서 누구 나무라는 것처럼 왜 그렇게 마치 자기가 뭐나 되듯이 설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구원 받는 사람 알아서 구원 받는데 당신이 왜 나서야 될 이유가 뭐냐? 확실하게 이야기 해 봐라.’ 거기에 대해서 성경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러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이 단순히 귀로 듣는다는 의미보다도 더 깊은 의미가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반드시 중간에 말씀을 통해서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은 말씀에서 난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은 기존에 있는 하나님은 없다. 이게 충격이죠. 하나님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없다는 말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계속해서 상상으로 조작해내는 겁니다.
유명한 ‘포이에르바하’라는 철학자가 이야기 했죠.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영상화 시킨 것이다.’ 그래서 열사람이 있으면 열사람 하나님이 다 달라요. 왜냐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기억의 뭉치거든요. 추억의 뭉치다 말이죠. 사람이 과거의 가정환경과 살아온 것에 바탕으로 해서 ‘나는 이런 하나님이었으면 무척 좋겠다.’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조작해내는 겁니다. 구성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열사람 만나면 열사람 하나님이 다 달라요. 천명을 만나면 천명의 하나님이 다 다르고.
그래서 옛날에 할머니를 보면 교회 다닌 적도 없고, 왜냐하면 교회가 없었으니까, 그거 구정 때 되면 비는 거예요. 뭐라고 비느냐 하면, 이름을 조물주라고 해요. 조물주 뜻이 뭐냐 하면, ‘물건을 창조하신 주여.’ 라는 뜻이거든요. 내 자식, 내 남편을 이렇게 만들어 주신 주여, 그저 올 한 해도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놀고 그저 하는 일 잘되?몸만 건강하면 최곱니다.‘라는 이게 조작해내는 겁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이걸 가지고 이방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신하고 성경에 나와 있는 신 이름이 있어요. ‘여호와’라는 신이 있죠. 차이점이 뭐냐 하면 차이점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뭐를 줬느냐 하면, ‘약속’을 준 적이 있어요. 약속!! 그런데 이방신은 약속이 필요가 없어요. 자기의 과거에 대한 미흡함을 빌어서 보충하겠다는, 자기 아쉬운 것을, ‘나는 이렇게 최선을 다 하는데 채워줘야 되지 않겠습니까?’하는 식으로 자기가 만들어내는 조작된 신이기 때문에 약속이 필요가 없죠. 약속이 있으면 자기가 만들어내면 되니까, 이걸 진인사대천명(盡 : 다할 진 人 : 사람 인 事 : 일 사 待 : 기다릴 대 天 : 하늘 천 命 : 명령할 명)이라 하죠. 인간은 인간의 할 도리를 다하고 결과는 누구한테 맡긴다? 신의 뜻에 맡긴다. 인간은 자기 할 일을 진하게 다하고 난 뒤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태도라는 것이 이방신, 또는 신이라 하죠. 확실히 차이가 나죠.
그렇게 되면 이방신, 그냥 신이라 합시다. 이 신의 내용은 누가 채우느냐 하면, 내가 채우죠. 신은 이렇게 돼야 되고 이렇게 해야 되고 날 사랑해야 되고 내 어려움을 알아줘야 되고, 내가 간청할 때는 응답해 줘야 되고, 이렇게 내 쪽에서 채워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교회 온다. 교회 와서 철야기도 한다. 내용이 뭐겠습니까? 자기 한 맺힘, 서러움, 이걸 가지고 보자기를 싸가지고 위에다가 ‘신이시여, 이런 괴로움을 들어주소서.’ 이러면 종교가 성사되는 거예요. 이 신은 항상 어떤 의미에서 인간과 같이 놀아나는 신이죠. 이걸 어려운 말로 ‘게임’인데, 일종의 게임축구를 하는 거예요. 심판을 두고 게임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주신다 했잖아요. 이 말씀이 낯설다. 이 말씀이 상당히 생소하고 낯설어요. 이건 우리가 평소에 ‘신은 이러이러 했으면 좋겠다.’하는 그런 기대치가 이 약속 속에, 하나님의 말씀 속에 하나도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십계명 아시죠? 십계명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십계명을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민족도 신에게 직접 돌판 받아 본 적이 있느냐?’ 너희들은 투사, 자기 자신의 희망사항을 투사해서 어떤 추상적인 신을 관념화 시켜서, ‘신이시여 저 기도하는 것 보이십니까?’ 이래 나오더란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는 신을 무슨 신이라 하는가 하면 ‘주관적 신’, 주관적 신이니까 열사람 다 신이 다르다는 거죠. 주관적 신!!
돌 판이 있다는 말은 뭔 뜻 이예요? 이것은 주관이 아니고 뭐가 있다? 객관이 있죠. 주관적 신으로 가게 되면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 믿는다는 증거를 주관적으로 소진을 하게 돼요. 예를 들어 간증거리나 방언한다든지, 암 걸렸는데 기도해서 낫다든지 자기만의 노하우가 따로 주관적막?생기고 있다 이 말이죠. 자 나만이 노하우기 때문에 옆 사람한테는 통한다? 안 통한다? 안 통하죠. 왜, 자기만이 체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객관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너 주관도 가. 목사님 주관도 가세요. 장로님 주관도 저리 꺼지세요.’ 오직 돌판 가지고 되는 거죠. 그러면 돌 판이 이렇게 있다면, 여기 천 사람이 있다면 돌 판은 객관적이고 천 사람의 주관이 있을 게 아닙니까? 객관 앞에 주관들은 전부 다 어떻게 되요? 배제가 되겠죠. 인정을 못 받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50만 명이 애굽에서 나와도 그들은 하나같이 움직였습니다. 그 하나가 뭐겠어요? 객관적 증거. 주관적인 체험거리나 간증거리 이런 것은 일체 거기서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오직 하나로 본 거예요. 그것도 여호수아와 떨쳐놓고 모세 혼자 올라갔는데 모세가 올라간 그쪽 세계는 상상도 못할 세계예요. 뭐냐 하면 40일 동안 물도 안마시고 잠도 안자고 아무것도 먹지도 않았어요. 내려올 때는 천사처럼 얼굴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까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밑에서 예상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도저히 예상 못한 일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하는 모든 성경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예상이 안 되는 겁니다. 그 십계명 중에 마지막 계명이 뭐냐 하면 ‘탐내지 말라.’ 돼 있죠? 이거 개나 소나 원숭이보고 이야기 했습니까? 아니죠. 누구보고 이야기했어요? 사람보고 했죠. 그러면 십계명은 새롭게 주어지는 계명이 아니라 현재 인간?하는 행세를 보고 인간이 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 주어진 거죠. 탐내고 있으니까 ‘탐내지 마라‘가 의미가 있다 이 말이죠. 거짓말 하고 있으니까, 십계명에 ’거짓말 하지 마라‘고 잔소리를 넣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계명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새로움이 아니라 현재 인간들의 속에 있는 죄를 들추어내는 새로운 방식의 의미에서 새로운 계명이 되는 겁니다. 어려운 이야기예요.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아까 이방신을 봅시다. 내가 가정이 어렵게 되었다. 이건 사람으로서는 원인이 규명이 안 돼요. 아, 그러면 이거는 내가 어릴 때 주일학교 크리스마스 때 빵 얻어먹으러 간적이 있는데 그 뒤로는 교회를 안 갔다고 봅시다. 그렇다면 사람 속에는 뭔가 안 될 때는 원인을 딴 데서 찾는 버릇이 있잖아요. 그러면 신이라 하든지 누구라 하든지 ‘당신 있으면 부르면 나와,’ 어떻든지 부르면서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신이시여,’ 교회 와서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그 신이라 하는 것은 현재 자기 의로움과 관련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자기의 죄 문제를, ‘나는 이렇게 죄인이니까 오, 하나님이여, 저 죄에 대해서 어떤 죄가 있는지 다 들추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뭔가 누구한테나 빌리거나 얻어먹을 때는 염치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일학교 봉사라든지 열심히 헌금을 해서 그걸 근거로 해서 이만큼 어려운 가운데서도 헌금 했으니까 이번 한주는 좀 이렇게 주께서 한번 봐 달라 이 말이죠. 특별한 행운이 주어지길 바라지 어떤 인간도 ‘주여 이번에는 제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런 십계명이 나한테 닦달을 내시는 방향으로 나에게 찾아옵니까?’ 라고 자진해서 요청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잘난 맛에 살아가지, 내가 ‘나는 이렇게 못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살려주십니까?’라고 살아있는 것을 황공스러워하면서 교회 오지는 않는다 말이죠. 있는 걸 더 달라고 요청하죠. 빌 테니까 더 내놓으라 하는 식이지, ‘현재 있는 것도 사실 가질 이유 없습니다. 빼앗아가도 당연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 문 열고 덜컹덜컹 오는 사람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와도 이건 교회가 아니고 뭐냐 하면, 절에 온 거예요. 이방신 절에 온 것과 똑같아요.
하나님이 약속은 ‘왜 탐냈느냐?’ 라고 꾸짖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말씀으로 십계명가지고 쥐고 있는데, 이쪽에서 우리는 그 안에는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따지러 온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기에 왜 지난주에 애 성적이 안 나옵니까? 왜 몸이 갑자기 아파요? 뭡니까? 뭐가 그리 삐졌어요? 뇌물이 적었습니까? 돈 좀 더 쓸까요? 전도해야 되는데 전도 한번 안했다고 그렇게 삐지십니까?’라는 식으로 일종의 시위? 데모? 항의? 그런 것이 있는 겁니다. 물론 그걸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죠. 그걸 노골적으로 하면 까분다고 꿀밤주기 때문에, 그걸 점잖게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이런 멘트 있잖아요. ‘훌륭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도 은혜...’ 이러지만 속에는 뭐냐 하면 ‘내가 이런 좋은 기도했는데, 봐주소.‘ 라는 그런 마음이 깔려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 로마서에 있는 말씀이 뭐냐 하면, ‘너희에게 십계명을 준 것은 너가 자꾸 감추려고 하는 그것, 자꾸 감추려고 하는 그것이 오히려 네가 통제 못할 것이 된다 말이죠. 통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억누르는 것이거든요. 오늘 성경 봅시다. 38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렇게 예수님이 일 하신 것을 압축해서 베드로가 설교하는 대목 이예요.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자기 잘났다고 안 하죠. 내용이 뭐로 포함됩니까? 자기 간증이 아니고, 누구, 누구가 이렇게 하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 라고 되죠.
그렇다면 제가 방금 한 이론에 의하면 예수님의 행하심이 뭐를 대체한다 말이죠? 전에는 십계명으로 이야기하신 하나님이 이 마지막 때는 누굴 앞장세워서 일하신다? 예수님의 행하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계를 꾀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고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가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 가만히 있어. 내가 다가갈게.’ 그거예요. ‘자꾸 나한테 오지 마, 오지 마, 나한테 오게 되면 너는 가짜 신을 섬기게 되니까’ 가짜 신인 거예요. 우리 주변에 누가 방문하시는 게 중요하지, 내가 신에게 거리가 5키로, 2키로, 1키로, 500미터, 300미터, 내가 주님께 가까이 한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가까이 하기에는 주님이 너무 무서워요. 있을 수 없어요. 재판장에서 피고가 있으면 판사 가까이 오면 안 되죠. 멀찍이 있어야 되듯이 교회도 앞자리에 앉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고, 대부분은 뒷자리에 앉죠. 지은 죄가 많아서 말씀 하나, 하나가 자기를 찌르는 것 같아서 미안해서 못 가요. 그냥 뒷자리 앉았다가 설교 끝나면 문 열고 후다닥 가려고 만반의 준비하고 뒷자리 앉죠.
(어느 분이 오심) 다시 하겠습니다.ㅎ 사실 다시 하는 게 아니고 요약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은 다 놔두고 모세보고 올라오라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은 소외된 거예요. 별 볼일 없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산 밑에서 뭐하느냐 하면, 가짜 신을 섬겼잖아요. 가짜 신을 섬긴다는 말은 이미 그들은 신을 알고 있지만 이건 진짜는 아니고 조작한 거죠. 인간이 상상한 거기 때문에 진짜 신은 모세하고 하나님하고 독대해서 단독으로 만난 거예요. 이 밑에는 주관적 신이 되고 위에는 증거를 갖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십계명이라는 돌 판을 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십계명 돌 판 내용을 딱 뜯어보니까 맨 마지막 계명에 뭐라 돼 있어요? ‘탐내지 말라. ’탐내지 마라‘를 옆 사람이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우리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판사님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누가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이 이야기했으니까 하나님을 없애 버립시다. 없애 버리니까 남는 게 뭐예요? 하나님은 나타나도 소용 없어요. 하나님은 탐내지 말라 십계명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은 있으나 마나 없애 버리고, 남는 게 뭐가 하나님이 되는 겁니까? ’탐내지 말라. 탐내. 지옥 갈 거야,’ 이게 하나님 이예요. 이게 우리 인간들이 머리 맞대고 연구한 게 아닙니다. 탐을 안내면 이 사회가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그런 것을 예상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이야기예요. 탐을 안 냈을 경우에는 우리는 얼마나 살기 좋은 천국을 이루냐? 그건 얼마든지 우리가 이성이 있다면 공부만 좀 한다면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다 말이죠.
그런데 ‘탐내지 말라.‘라는 이 말에 어느 정도로 규율을 가지고, 여기서부터는 탐내는 게 되고, 여기서부터는 탐심이 아닌 게 되고 하는 기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없어요. 탐내지 말라는 것은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우리가 통제가 안 되는 그 무엇에 해당되는 이야깁니다. 지금까지 그 이야기 했어요. 다시 할게요. 우리 안에 우리가 통제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이번 수련회에서 ’색조화장‘이라 했죠.) 토핑, 또는 피자에 장식하는 것, 피자 판 밀가루 판 있잖아요. 그 위에 뭐를 입혀야 되지 않습니까? 고구마, 양파등을 얹어 장식하는 것, 우리는 통제되지 않는 것이 바깥으로 튀어나와 버리면 내가 경우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 예의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 어린애들 6~7개월 된 애들은 모르고 까불지만 가정교육에서 부모의 잔소리로서 억누를 필요가 있죠. 억눌러서 생기는 걸 가지고 그걸 주체라 하고 자유의지라 하는데 그걸 상징적 질서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통제되지 않는 게 있는데 바깥에서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사람답게 굴기 위해서는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윤리와 도덕이 가미가 돼야 되는 거예요. 윤리와 도덕이 가미된 가운데서 한 사회는 질서가 얼추 어느 정도는 유지가 되죠. 술 먹고 행패부리고 하면 경찰서 집어넣고 해서 사회가 원상대로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겨냥하는 진짜 하나님은 우리가 토핑할 수 있는 우리가 창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근원적으로 우리가 안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탐 내지 마,’ 사람은 탐내지 말라는 하는 것은 장님이 돼도 귀가 들리는 것을 탐을 내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은 우리 속의 ‘나’라는 껍데기를 통하여서 내 내부와 직접 휴대폰처럼 통화 됩니다. ‘어떤 애가 이번에 서울 음대 들어갔대, 어떤 애가 들어갔대,’라는 말이 이 고막을 통해서 듣기만 해도 엄마 맘은 어떻습니까? ‘아이쿠, 우리 애는 재수해도 안 되고,’ 이게 탐심이라는 거예요. ‘어떤 교회 이번에 부흥 돼서 이번에 별관 새로 졌대.‘라는 것을 개척교회가 들으면, 괜히 설교 음성이 높아집니다. ’10년째 왜 이 모양이십니까?‘ 그런 거예요. ’이번에 우리 남편이 승진했대,‘ 이러면 가만히 있는 아내가 갑자기 그릇을 깨든지 설거지가 난폭해지죠.
통제되지 않는 것, 이것을 본문 38절에서 귀신에게 눌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교회가 제일 오해되는 게 그겁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우리보고 ‘하라’ 하는 말씀이 윤리 도덕적인 말로 이해하는 거예요. 평소에 우리는 정신이상이 아닌 이상은 누구한테 들으면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그 사람의 말을 다는 실천에 옮기지 못하지만 그 중에 그 사람 보기에 반 정도는 실천에 옮겨주는 것이 그 사람과의 교제에 대한 하나의 예의, 에티켓입니다. 다리를 꼬고 앉을 수도 있는데 ‘우리 집에서는 바르게 앉습니다.’하면 ‘아휴, 더러워.’ 하면서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란 말처럼 해주잖아요. 이 말은 내 마음이 바뀌었다. 안 바뀌었다? 안 바뀌죠. 지는 지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사는데.
결국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어려운 말로 자아 따로 있고 ‘사회적인 자아’ 따로 있는 거예요. 사회에서 흥정할 수 있는 자아, 나, 이걸 지난 시간에 ME라고 했죠. 이 자아 따로 조작해 놓고 이건 공부를 따로 해야 돼요. 그 말고 사회적인 자아 만드느냐고 스트레스 받잖아요. 스트레스 받는 것은 퇴근하고 술 퍼마시러 가겠죠. ‘더러워서 한판 붙을라고.’ 하면서 노래방에서 한 소리하는 진짜 자아는 항상 누구한테 들키면 안 돼? 들키면 안 되는 이유가 결국은 ‘나’는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 바로 통제할 수 없는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내가 따로 있어요. 그럴 때 예수님이 딱 다가오니까 사람들은 예수님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한테 점심 대접하고 식사 대접하면서 ‘예수님 훌륭한 것 다 압니다. 저 어때요?’ 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거울처럼 생각해서 맞먹으려 하죠.
그런데 어떤 창녀가 여기 공부하고 있는데 창녀 한번 들어와 보세요. 그것도 음성적인 창녀가 아니고 소문난 창녀가 들어와 보세요. ‘아줌마, 나가주세요.’ 이럴 거예요. 갑자기 창녀가 들어와서 목사님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갑자기 교회도 안 다니는 창녀가 와서 흐흐 울면서 향수를 뿌리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겨줄 때에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 고상한 성경공부 배운다고 얼마나 닦달 내는지, ‘예수님 저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지 아십니까? 저 여자 거쳐 간 남자가 우리 동네에 한 둘이 아닙니다.’라고 비난했을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껍데기로 나 예수를 교제하려고 하지? 저 여자는 내 앞에서 자기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통제되지 않는 자기의 죄 자체를 예수님의 용서하심과 연결을 시킨 게 되잖아. 그래서 사랑함이 나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라고 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이유입니다.
‘제발 니가 니보고 손대지 마라. 제발 니 절제 좀 하지 마라. 제발 착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죄인으로 거듭나는 것이지 의인으로 거듭나는 게 아니에요. 한국 교회가 제일 오해하는 게 그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갑자기 전에 보다 더 의인이 돼 버렸어요. 더 착해져 버렸어요. 이것은 100% 위선자입니다. 성화라는 이름으로 100% 위선자입니다. 그래서 교회 가면 누가, 누가 착하나, 시합 붙었어요. 완전히 게임 판 이예요. 누가 기도 오래 하고 누가 헌금 많이 하고, 목사가 좋다고 살살 달래서 경쟁을 시켜요. 목사 말 듣고 구원 받는 사람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어요.ㅎ 목사는 성경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고 해석은 개판으로 하든 어떻게 하든 성경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이고, 그 증거 속에서 목사는 떼 내버려야 돼요. 나는 당신 말을 들으러 온 게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일을 하신다고 아까 분명히 이야기 했잖아요. 전제를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 오지 마라, 너는 가짜니까 오지 마라. 그 자리 그냥 있어라. 하는 행세대로 살아라.’ 하지만 다가서는 건 누가 다가선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 너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갈게,’잖아요. 갈 때 우리는 예수님을 ‘welcome! 대 환영, 메시야!’ 이렇게 환영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 받는 사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모든 말씀은 우리가 통제될 수 없는 그 무엇이 현재 우리 안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는 거예요. 그 발작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가 왔을 때 반발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믿어주는 거예요. 이거는 지?갑니다. 충격 받는 이야기지만 예수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님을 너무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주는 거예요. 예수님을 자기가 상상한 그런 고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납득이 되는 인물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그 믿는 순간 예수는 누구 손아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자기 손아귀에 내가 믿는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되죠. ‘내가 당신 알거든, 요정도, 요 정도까지 안다고’ 이렇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이죠. 그런데 만약에 자기 속에 통제되지 않는 이 껍데기 말고 윤리 도덕 말고 뭐든지 탐내는, 옆 사람이 잘 믿으면 오히려 화가 나서 그 사람보다 더 잘 믿고 싶은 그걸 두자로 ‘탐심’, 그 발작하는 그 탐심, 그것이 바로 너가 나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을 깨닫는 사람, 상대를 볼 때 상대방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싶은 대로 평가해요. 모든 인간관계가 다 그래요. 그 사람이 살아온 걸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같이 사는 부부도 몰라요. 같이 부부가 나란히 잠자리에 같이 자도 아침에 깨나면 다 꿈이 다르죠. 그것은 과거에 해석했던 것이 꿈이 되거든요. 내가 세상을 이런 식으로 틈틈이 봐왔다는 것을 나름대로 편집한 게 꿈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세상을 볼 때 나는 이렇게 보니까 이런 꿈이 나오고 남편은 이렇게 보니까 이런 꿈이 나왔잖아요. 세상을 그렇게 본다는 말은 평소에 한 집에 살아도 세상에 대해서 평가가 같지 않다는 거예요. 다 같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를 이야기하든 하나님을 이야기하든 전부 다 누구냐 하면, 결국은 예수? 하나님? 쉽게 말하면 뭐냐 하면 내가 갖고 나가는 하나의 심심풀이, 장난감 이예요. 종교라 하는 것은 장난 이예요. 장난감이고 친목단체고 놀이단체고 오락단체고 바쁘면 안 나오고 심심하면 나오고, 그래서 교회는 노인네들이 많아요. 밥 주죠. 교회 자체가 소유물은 아닙니다. 그게 스트레스 푸는데 도움이 됩니다. 사회적인 스트레스를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고 위로를 받으면 덜 심심하고 그 사회에서 자기의 존재를 알릴 수 있잖아요. 스트레스가 뭐냐 하면, 내 존재를 발산하는데 그걸 누가 방해할 때 발생하는 게 스트레스가 돼요. 나는 이런 인간이다. 안 알아줄 때가 스트레스가 되는 거예요. 안 알아주니까 술 퍼마시면서 도박하면서 화투치면서 기어이 내가 승자가 될 때 ‘그래,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은 이거였어.’ 10원, 100원내기 고스톱하면서 딸 때, ‘ 그래, 이것이 가장 나다와, 가장 나다운 거야.’ 승자근성 이예요. 인간은 모든 것을 게임으로 봤다고 비트겐슈타인이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모든 게임에는 뭐가 가장 우대받습니까? 승자죠. 승자는 반드시 뭐가 있어야 돼요? 비교가 있어야 되죠. 그래서 사람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못 사는 거예요. 왜, 내가 승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이웃이 없어요. 어디, 참새하고 이야기 할까요?ㅎ토끼하고 달리기 할까요?
자본주의 사회가 '힘들다, 힘들다 ' 하면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즐거운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지금은 실패해도 몇 년 후에는 따라잡을 수 있는 그만큼 여지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내가 사는 원동력 이예요. 제가 지난 주일에 했잖아요. 사람은 남을 미워하는 것이 삶의 원동력 이예요. 누구 하나 씹어야 돼요. 씹는 사람이 없으면 사람 사는 맛이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 바가지 긁는 건 아니겠지만...ㅎ 통제되지 않아요. 오늘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자기를 스스로 고상하게 연출, 연기력이 뛰어나서 예수님, 하나님을 믿는 척 하지 말라 말이죠. 물론 하지 말자 해도 할 사람 이예요. 그래야 남들이 알아줄 때 내가 이 하나의 조직사회에서 전열 등처럼 깜박이는 의미가 있잖아요. 교회에서 그냥 앉아 있는데 ‘오셨습니까?’라고 아무도 이야기 안 하면, 그 하나의 박스라 하는데 수련회 때 했죠? 박스, 격자 구조. 구조 속에서 방향이 네 방향이 있죠. 동, 서, 남, 북, 결국은 내 주변을 둘러싼 사람을 통해서 그때, 그때마다 나의 주체성은 재구성 되는 겁니다.
오늘은 동창회 갔더니만 ‘아, 인생 왜 사냐’ 싶다가 내일 되면 촌에 가니까 ‘ 야야, 니가 이렇게 성공 했구먼.’하면 살맛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결국은 인간은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나보고 뭐라고 시키느냐 하면, 니가 인생을 살았으면 승자가 돼야지 남한테 꿀리고 사느냐 바보야,‘라는 소리가 통제가 안 된다니까요. 이게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육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에요. ’자꾸 나만 가지고 그래?‘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러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제발 너에게 손을 떼라’는 말 이예요. ‘니가 기도하는 건 이해하는데 기도 아무 효과 없고요. 헌금하고 전도하고 예배 봉사하는 거,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거 알아요. 왜, 교회가, 목사가 칭찬해 주니까. 하지만 그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게 도리어 위선의 덕만 콘크리트 페인트 칠, 무덤에 회칠 두께만 증가할 뿐 이예요.
교회라 하는 것은 그냥 심심하시면 다니세요. 다니시면서 비교하세요. 그리고 거기서 남에게 안 꿀리는 정도만 행세하시면 거기서 또 주변에서 입 발린 칭찬 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살면서 테레사 수녀나 수단에 가서 죽었던 신부처럼 뭔가 고상한 일에 내가 종사했다는 속의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일부 부담했다는 뿌듯함, ‘역시 나 양심 안 죽었어.’ 양심에 대한 고양되어, ‘이 정도 양심이면 죽어서 천당 갈 거야. 이 정도 착하게 살 정도 같으면 아마 구원 받을 거야,’ 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 모든 것이 껍데기의 조화입니다. 알맹이는 손도 못 대요.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곳에 악이 나오기 때문에.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니가 선하세요? 악이 선보다 센 게 눈에 보이는데요. 아이쿠, 예수 믿으세요? 그러세요?’ 예수 믿기 싫다는 것이 곱 배기로 나와요.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세요? 대단하십니다.’ 하나님 있다는 생각이 5분 같으면 하나님 없다는 생각이 하루23시간 55분,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위로가 돼요. 이것이 목사도 그렇고 신학박사도 그렇고 교회 50년, 60년 다닌 사람도 그렇고, 죽기 전에 예수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도 마찬가지고 죽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요. 어떤 모든 인간이 결국은 자기가 들었던 풍월 가지고 연출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조작해 낸다는 겁니다. 예수를 안 믿어야 되는데, 자꾸 믿죠.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예수 믿고 이 믿음이 뭐로 인정하면 돼요?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인정해야 돼요. 제가 이런 말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런 소리 하는 걸 많이 들었어요. ‘예수 믿는 것도 죄 같으면 아무것도 안 해야 되겠네. 뭘 해도 죄라면 할 필요 없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당신이 예수 믿는 것이 내가 예수 믿고자 결심해서 된 것이 아니고, 속에서 죄가 발작해서 불뚝 튀어나온 거예요. 말썽꾸러기 애를 보자기에 담아 보세요. 보자기가 가만히 잠잠합니까? ‘왜 날 이렇게 하는 거야,’하고 주먹질을 하죠. 애를 보자기에 넣으면 애가 주먹질을 하고 여기서 불룩, 저기서 불룩 튀어나오죠. 이게 바로 우리 모습 이예요. 사는 게 힘들어 보세요. 교회 가지 말라고 해도 교회 문 열고 옵니다.
모든 것이 내 생각대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내질러버리는 것이 각자, 각자 인생 살아가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전체를 보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아! 짧은 문장 이예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병든 자라야 의사가 의미가 있듯이 내가 보기는 너희들이 병들었다.‘ ’내가 이렇게 병들었습니다.‘라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이 뭐로 보이느냐? 의사로만 보인다는 이야깁니다. 결국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를 극단으로 밀어버리죠. 마음속으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죄다. 최 진실이 죽었지만 ’저 여자 이쁘다.‘하면 간음죄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그보다 더 심한 건, ’탐내지 말라.‘ 탐내지 말라는 것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내가 가만히 있어도 뭔가 귀에 듣고 보이기만 하면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마치 남자라도 우리가 애 임신한 것 같아요. 임신해서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해도 내가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이런 일 있잖아요. 보기만 해도 미운 사람이 있잖아요. ’저 사람이 왜 미운데? 저 탤런트가 왜 미운데?‘ 그러면 우린 뭐라 합니까? ’미워하는 것도 이유가 있는가?‘ 괜히 미워하잖아요. 그 괜히 미워한다는 것이 통제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야기를 안 해요. 우리 이야기 해봐야 우리는 위선자니까. 우리 보고 이야기 하지 않으시고 우리 속에 들어있는 우리도 통제할 수 없는 그 힘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대화를 시도합니다. 그 대화가 뭐냐 하면 ‘말씀’이죠. 그 대화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러면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제가 죄인인데요.’ 그럼 ‘너 말고, 너하고 이야기 안 해. 니 속에 보고 이야기 한다.’고, 우리는 좋은 거라 하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좋다고 하면 다 하려고 해요. ‘주여, 목사님 말씀 하시면 다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실천 다 하려고 시도해요. 그거 실천 하든 안하든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저 그리스도가 우리를 지적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죄인이라는 겁니다.
자 봅시다.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은 크게 그리겠습니다. 우리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우리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우리 속에 있는 시커먼 요거보고 이야기 하죠. 하면서 예수님은 지적하면서 연결 지으면서 자신의 길을 갑니다. 자, 어디로 가느냐 하는 거죠. 예수님이 좋은 산상설교나 설교를 했었어요. 사람들은 ‘야, 설교 끝내준다.’라고 했어요. 그게 예수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하고 떡을 떼 줬습니다. 사람들은 ‘야! 이제는 농사 안 져도 떡 먹겠네.’하고 따라 왔습니다. 그것도 가짜입니다. 인간은 모두 가짭니다. 계속 갑니다. 제자들을 불러 모았을 때 제자들은 ‘야! 우리기리만 구원 받는구나.’ 그것도 오해였습니다. 결국은 다 떨쳐냅니다. 누구만 갔습니까? 마지막에 예수님 홀로 갔습니다. 홀로 가시면서 천국에 들어갔습니까? 안 들어갔습니까? 이게 문제예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고 반대로 저주의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요걸 세자로 뭐냐 하면, 십자가!! 십자가로 들어갈 때 그림 보세요. 우리하고 예수님이 가죠. 여기 뭐가 연결돼 있죠? 연결돼 있으면 계속 이동하죠. 어디로 이동한다 했습니까? 십자가죠. 그러면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왜 예수님이 바로 하늘나라에 가시지 않고 십자가로 왜 갔습니까? 내가 너의 ‘통제할 수 없는 죄’를 대신 지고 니가 죽어야 될 것을 내가 대신 죽는다.‘고 했죠. 그러면 십자가 질 때 그 앞에서 껍데기 가지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다 도망갔습니까? 안 도망갔습니까? 12제자 다 도망갔죠. 결국 주님께서는 ’나는 껍데기하고 상대 안한다.‘ ‘예수 믿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가면 어느 자리에 앉겠습니까?’ 전부 이거는 주께서 이야기 하는 취지가 자기 속에 들어있는 통제되지 않는 죄를 보고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지가 앞장서서 나서서 지가 껍죽대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 질 때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심지어 죽고 난 뒤에도 다 떨어져 나갔어요. 기껏 여자 몇 명가서 시체나 찾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宕湧?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안 믿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끝까지 자기가 통제 안 돼요. 예수님은 한 때 좋은 추억이었죠.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병도 고치고 좋았다.’ 마치 ‘10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목사님한테 사랑받고 교인들 신방 오고 그때는 좋았는데, 그런데 내 죄 성은 가기가 싫어. 이거는 내가 불쑥 불쑥하는 이거는 내가 통제가 안 돼. 어쩔 수가 없어. ’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고 난 뒤에 십자가 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죽은데서 부활했죠. 자, 죽은데서 부활할 때, 이 시간, 제일 중요한 겁니다. 저주 받은 데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제쳐두고 저주 받았다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저주 받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했죠.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모든 인간은 저주 받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 시켰다 이 말이죠. 부활을 시키면, 아까 요 끈 보세요. 여기, 자기 택한 백성하고 예수님하고 영적으로 연결 지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 이 부활 속에 누구와 줄이 연결돼 있습니까? 결국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 돼야 할 사람과 줄이 예수님과 연결되어서 부활했죠. 이게 로마서 6장 이야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실 때 우리도 부활했다는 말이 이 말 이예요. 살아났거든요.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는 거예요. 모르니까 부활 하시고 난 뒤에 뭐냐 하면, 부활하신 성령이 있어요. 성령이 와서 ‘야, 축하해라, 너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이 살아나셔서 너는 이제 죄가 이 선(파이프)으로 해서 죄가 소멸됐어.’ 라는 통보를 이 성령을 통해서 통보를 해주게 되면, 요 관계, 파이프 관계를 뭐라 그러느냐 하면,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믿음은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없죠. 왜냐하면 파이프가 누구한테 나왔습니까? 예수님께 나왔죠. 그러면 내가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 이예요. 내가 믿는 것은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어요? 나에게 있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믿어버리면 오후 2시에 믿습니까? 오후 2시 반에는? 오후 3시에는? 내가 믿으려 하면 항상 벌벌 떨면서 오후 3시에는? 3시 반에는? ‘아냐, 또 믿어야 돼.’ 왜? 만약에 4시에 안 믿으면, 그때 예수님 재림하시면 나는 구원 못 받으니까. 그래서 항상 내가 만들어서 믿으려면 물론 그걸 믿음이라 하지 않고 이걸 ‘신념’이라 해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건 헛짓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진짜 믿는 사람은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지 않고, ‘주여,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게 아니고 ‘그냥 믿어졌습니다.’라고 하죠. 그럼 다른 사람이 ‘누가 누군데?’ ‘주께서 그렇게 믿어지게 했습니다.’라고 하죠. 자, 요 이야기하고 10분 쉽시다. 자 그렇게 믿어지게 했으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더 심각한 문제, 더 낭패로운 문제가 앞으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론상 없어야 되죠. 왜 없어야 되느냐 하면, 이미 죄인 줄 알고, 죄를 이미 가져갔잖아요. ;앞으로 너는 2년 뒤에는 잘해야 돼. 5년 뒤에는 훌륭해야 돼.‘ 그런 조건을 걸었습니까? 안 걸었습니까?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런 조건은 교회 목사가 걸어요. ’예수 믿었으면 제대로 헌금하고 십일조 해야 천국 가지, 예수 믿었으면 이런 나쁜 짓 안 해야지.‘라고 하는 것은 목사가 그 사람을 교회 자기 등록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돈 빼내려고 정기적으로 헌금 빼내려고 하는 그 짓이지, 성경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냥 하는 대로 하게 되면, 탯줄이라는 게 있죠? 탯줄은 아이가 가위 들고 지가 끊습니까? 나는 의사가 아니니까 모르지만,ㅎ 아마 아이한테 그런 힘이 없죠. 탯줄은 끊어도 바깥에서 끊지, 이 탯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왜냐 하면 이 믿는 소유권을 예수님이 줬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마귀마저 통제되는 부활의 능력으로 믿음을 줬기 때문에, 내가 내 죄를 통제 못하듯이 더더구나 내게 주어진 주님의 용서하심을 내 손에서 취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기쁜 소식’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 내 행동을 바꿀 부담을 질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더러운 행세를 마음껏 발산해 내기 마련입니다. 여전히 돈 좋아構?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지가 좋아하는 거 좋아하고 마누라 개 패듯이 패는 것도 못 고치고 그 버릇 그대로, 그대로~~ 가져가요.
그런데 뭔가 달라진 게 있다면 내 속에 이질적인 거, 이제는 내가 조작해내지 않는 뭔가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에서 믿음만 생각하면, ‘참 난 인간도 아니야.’ 남들한테 그런 이야기 할 필요는 없지만, 주님 앞에 설 때, 십자가 앞에 설 때는 ‘참 나도 뻔뻔스러워, 이래 가지고 산다는 게 웃겨.’라고 주님 앞에 미안스러워하고 그런 이런 인간을 구원해주신 고마워하는 그 마음은 소멸될 수가 없죠. 그걸 가지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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