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22강 / 행10:39 / 베드로의 복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22강 / 행10:39 / 베드로의 복음

정인순 2011. 2. 18. 07:59

 

 

이근호 목사

 

110217 사도행전 22강 베드로의 복음

행 10:39-43

음성

 

녹취:이한례

 대전110217a행10장(베드로의 복음)

대전강의 2월17일 사도행전 22강

 

사도행전 10장 39절에 보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이런 내용이 나오죠. 어떤 사람을 나무에 달아 죽였다. 나무에 달아 죽였다.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그냥 파묻은 것이 아니고, 나무에 달아 죽였다. ‘나무에 달려 죽였다’ 가 ‘우리가 구원받는 것하고 연관이 있다’라는 이야기거든요. 안 믿는 사람들에게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이 우리를 구원, 천국으로 데려간답니다.’ 하면 그 사람들은 무슨 소린지 모를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들이 이걸 무슨 소린지 모르는 건 당연한데 교회 40~50년 다닌 사람들도 무슨 소린지 모른다는 사실, 이게 무서운 거예요.

 

교회에 계속해서 출석하면서 그 기대하는 것, 바라는 것, 원했던 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 말고 엉뚱한 것에다 거기다 마음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나무에 달린 자’를 늘 잊고 사는 거예요. 나무에 달린 자!! 왜 잊어버리느냐 하면 자기는 나무에 안 달렸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자기 삼촌이 나무에 달렸다. 아니 자기 큰 아들이 나무에 달렸다. 그 사람 평생, 잊지를 못할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자기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갖다 바친 것을 아브라함이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게 남의 자식이 아니고 자기 자식인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하나님이라는 게 모호한 추상적 개념 이예요. 보통 하나님을 신이라 하지 않습니까? 신, 영어로는 ‘God’라 하는데 추상적 개념입니다. 추상적 개념을 이렇게 실제로 이걸 변환이라 하는데, 이걸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변환하고 싶어 할까요 안 하고 싶을까요?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변화를 하고 싶어 할까요? 안 하고 싶어 할까요? 안 하고 싶죠. 왜? 신은 ‘신답게 놀아라.’말이죠.

 

신답게 노는 게 뭐예요? 제발 인간들 노는데, 애들 노는데 오지 마시고 그냥 고상하게 하늘에서 쪽 계시다가 죽을 때나 만나는 그런 신이 신다운 거죠. 그런데 신이 아주 천박하게 너무 노골적으로 만약에 우리에게 나타난다면, 우리의 머릿속에 갖고 있는 신다움, 이걸 Godness라 하는데 하나님다움에 대해서 어긋나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성악가가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는데 ‘테너 무슨 노래 부르실 겁니까?’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러면 너무 천박하잖아요. 성악가라면 성악가다운 면모를 유지를 해줘야 우리가 흠모할 수가 있는데 너무 천박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지 마시고 그냥 계시기만 해도 그 존재에 대해서 인정해 줄 테니까 꼭 ‘나 여기 존재한다. 나 여기 있다.’ 이렇게 안 나타나셔도 하나님답게 계셔주시면 우리가 얼마든지 교회 생활로 섬길 텐데 천박하게도 뭐라 했습니까? ‘나무에 달린다.’ 이렇게 되면 누가 화가 나느냐 하면, 우리가 화가 나는 거예요. 하나님은 고상하고 거룩하시잖아요? 재하씨! 고상한 하나님을 섬기면 누가 고상하겠어요? 하나님을 고상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 자체가 어떻게 되겠어요? 아주 지극히 고상하겠죠. 하나님이 고상해 줘야 그 하나님을 고상하다고 여기는 우리들도 같이 먹혀들어가는 거예요.

 

‘아! 거룩한 하나님, 따라서 나는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난 인간이 달라졌어.’ 왜? ‘ 거룩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 걸맞게 짝을 이루어야 하니까’ 아버지에 합당한 그 아들,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는 합당한 아버지만큼은 안 되지만 아버지만큼 따라가는 아들다움, 이게 바로 종교 생활의 묘미거든요.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과 뭔가 차별화, 그 차별화는 저쪽은 개떡같이 살지만 우리는 고상하게 살고 그들은 지옥 갈 인간으로 살지만 우리는 품위 있게 사는 것, 이게 교회 갈 때 우리의 어떤 노림수라 하면 심한 말이라면 뭔가 관심사였고 정결하고, 그래서 교회 올 때 추리닝 입고 가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통 정장이나 양복입고 가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조용하게 계시면 우리가 얼마든지 같이 병행해서 더불어 고상해지면 그걸로 충분히 우리는 하나님 믿으며 교회 다니는 것으로 충족하다고 여기는데, 왜 나무에 달렸다, 이 말이냐는 거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나무에 침을 뱉을 수는 있어요. 그리고 저주 할 수 있어요. ‘에이, 이 인간은 인간도 아냐. 죽어라.’ 이럴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을 꽉 잡고 나무에 못을 박을 정도로 그 미움과 분통함은 어떤 경우에 그럴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 오늘 교회 처음 왔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30년, 40년, 모태신앙 필요 없습니다. 처음 왔을 때 제가 하나님을 소개하는 겁니다. 처음 오기 전부터 하나님의 교회는 아름다우니까 내 마음도 정갈하고 아름답게 성가대는 너무나 웅장하잖아요. 나도 같이 마음도 감동받고 웅장한 것, 그거 생각하고 있는데, 그걸 완전히 없애 버렸다고 합시다.

 

지금 성경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인간들이 딱 쥐고 못을 박았다. 못을 박을 때 살라고 박는 겁니까? 죽이라고 박는 겁니까?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하는 거예요. 아무리 자기 돈 떼먹은 사기꾼이라도 못을 박을 정도는 아니죠. 아무리 자기 모친을 정면에서 욕해도 못을 박을 정도는 아니란 말이죠. 그분이 하나님 이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고상하고 거룩한 하나님은 날아가 버렸습니다.

 

사도바울이 또 베드로가 전한 하나님은 바로 ‘나무에 달린 자’예요. 그리고 나무에 달리게 했던 자들이 누구냐 하면, 같은 인간이요. 그 같은 인간 중에도 막 되먹은 인간이 아니고 성질 더러운 인간이 아니고 앞장서서 고상한 거룩한 성직자들에게 대중들에게 고상하고 바른 행실을 가르치는 것을 평소에 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못 박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강력하게 요청한 거죠. 빌라도에게 요청했으니까 못 박아 죽였죠. 만약에 빌라도 아니었으면 예수님이 그들 손으로 했으면 갈기갈기 찢었을 거예요. 로마 처형 법에 따라서 그나마도 형식 갖춰서 돌아가셨지 그냥 했으면 스데반 집사같이 돌이 마구 날아왔을 거예요.

 

왜 미웠을까요? 이것은 이유도 없이 미움을 받지 않으면 이런 느낌이 안 올 거예요. 저는 구정이라는 것은 상당히 좋은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어요. 이번 2월달 구정은 좋은 인상을 못 갖고 있어요. ‘내가 너를 미워할 테니까 너는 미움을 당하기만 해.’라는 경험을 했죠. ‘내가 미워할 테니까. 너는 가만히 미움만 당하기만 해.’ 아마 저 아니라도 집사님들도 그런 경험 있었을 거예요. 이유 없이.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다른 애들 놔두고 이유 없이 나에 대해서 미워한다든지, 할아버지가, 또는 부모가 여러 형제들 가운데서 나만 미워하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하잖아요. 난 그거 거짓말이라고 봅니다.

 

믿음이라 하는 것은 상대적이거든요. 꼭 애들 둘 있으면 예쁜 애가 따로 있게 마련 이예요. 마침 우리 집은 애가 하나밖에 없어서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애 둘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더 예쁘고 더 미운 게 있죠. 한쪽이 예쁘다면 한쪽은 밉다는 거죠.

나무에 달린 자부터 시작을 하는데 이 나무에 달린 자가 하나님이었다. 그걸 약간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구약부터 나오는 ‘여호와‘ 구약에 나오는 ’주‘ 이것이 신약성경 사도행전이나 신약성경을 덮어버리면, 신약성경이 이만큼 떨어져나갔다고 한다면, 구약만 있다면, 거기에 나오는 여호와, 주는 항상 추상적 개념으로 나와요.

 

여러분, 아는 이야기 할게요. 시내 산 올라갔을 때 모세가 본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뭘 봤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를 모세는 시내 산 끌려올라가서 봤습니다. 혼자 봤어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왔으면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야, 내가 산을 내려갈 테니까 내가 거할 수 있는 장소 하나 집 하나 만들어 봐라.’ 그래서 ‘어떡해요?’ 만드는 그 양식과 건축기구는 네가 이 산에서 본 그대로 해라.‘ 그래서 시내 산 위에서 본 그대로 뚝딱 뚝딱 해서 보석과 여러 가지 나무, 패물들을 모아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에요.

 

그러면 사람이 이렇게 집을 만들면 ‘계십니까?’하고 대문열고 들어가면 누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래야 사람 사는 집이 되죠. 그런데 지상에 있는 성막으로 지은 집은 휘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뭐가 반기느냐 하면, 그룹(cherubim)인데, 천사예요. 위 천장에도 천사 모양이고 요만한 상자가 있어요. 5센티, 4센티. 그 상자에 날개가 마주보고 있는 조각품이 있습니다. 그 조각품도 cherubim, 다시 말해서 그룹, 천사예요.

그런데 그 천사가 창세기 3장에 보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오지 말라고 사수하기 위해 거기 천사가 있어요. 그럼 방금 이야기한 내용이 무슨 이야깁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도 인간들은 함부로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 신에 대해서는 빌면, 정화수 떠놓고 빌면 별이 왔다 갔다 하고 천사가 왔다 갔다 하는 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이건 우리가 상상한 거고, 우리가 원한 거고, 실제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서 실제로 하나님의 성막을 만들어 보니까 갈 수 있다? 갈 수 없다? 접근할 수가 없어요.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창세기 3장 24절에 여러분 이야기 했지만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죠?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킨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그동안 인간들이 하나님 섬기는 모든 방식이나 문화는 뭐예요? 사기죠.ㅎ 그 사기는 어디서 나옵니까? ‘내 하나님은 고상한 하나님이니까 적어도 이 정도 고상함 받아주면 하나님도 껌뻑 넘어가겠지, 하나님은 정성을 원하니까 내 이정도 정성이면 넘어가겠지,’ 전부 다 정성, 고상함, 도덕, 윤리, 그리고 자기 딴에 정갈함, 그리고 자기 딴에 절제된 마음, 이성적인 마음, 하여튼 총동원을 다 해야 돼요. 하여튼 예쁘다는 것, 진, 선, 미 아닙니까?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건 총동원 다 해요. 총동원을 다해서 무슨 문을 열어젖히려 한다? 무슨 문을? 그 생명나무 가는 길을, 또는 하나님으로 가는 소원을 이루는 문을 열어젖혀서 기어이 하나님 만나서 하나님 앞에 소원 아뢰고 그에 대한 반대 보상을 응답 받고, 그런 식으로 밀어붙인 거예요.

 

여기 ‘시편 속의 그리스도’있죠? 자, 살기에 바쁘시기 때문에 다 읽어보시라고 강요는 차마 못하겠고 표현할 길이 없네. 제일 첫 번째 보면 첫 번째 나온 게 있어요. ‘문들아, 열릴지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좀 더 가면 ‘문들아, 천국문아 열릴지어다.’ 두 번째는 문들이 그게 자동문이 아닙니다. 원래 사람이 서면 자동으로 열리는 게 자동문이니까, 천국문은 자동문이 아니에요. 그 문이 안 열립니다. 문을 열어주는 분이 있어요. 그걸 두자로 ‘열쇠’라고 해요. 그 유명한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 열쇠를 누가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안 갖고 있죠. 언제나 안 갖고 있으면 안 돼요. 교회서 천국을 모조품으로 만들어 내요. 만들 때 진 선 미 동원해서 만드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차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차단 된 것을 애써 무시해요. 무시하고 이 고상하고 정성, 이게 3요소인데, 고상함, 정성과 같은 말 열심, 절제, 절제는 성화라 하는 것, 이 세 가지 외에 한국교회가 하나님 섬기는 방법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없죠? 고상함, 정성 있고 열심, 그리고 서로 스스로 반성하는 것 절제 하는 것, 이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못 박은 사람들이 이랬잖아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게 이다? 아니다? 이게 아니다 이 말이죠. 왜 아니냐 하면, 인간의 방법으로서는 최선이라고 인정할게요. 하지만 최선의 방법을 동원해서 들이민다고 해서 그게 열쇠 되는 게 아니고, 천국 문에 통과 되는 게 아니다 말이죠.

 

그럼 뭘 알아야 돼요? 애초부터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던 추방의 취지를 알아야 되는데, 그 취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한 거예요. 언약을 위반하면 뒤늦게라도 지키면 될 게 아니냐? 이건 위반하는 것이 어떤 율법 한 조항을 어긴 것이 아니고, 위반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품성 자체가 위반할 수밖에 없는 품성으로 바뀐 겁니다. 아! 이 말이 너무 어려운데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재하가 싫어하는 음식, 안 먹는 음식이 뭐가 있어요? 굴, 예를 들어서 엄마가 굴을 하면서 ‘넌 굴을 싫어하니까 너는 컴퓨터 하지 마,’ 이게 말이 돼요? 안돼요? 말이 안 되죠. 굴을 싫어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고, 컴퓨터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하면 ‘너는 이거 하지 마, 이건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이걸 안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율법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품성, 인간성 자체가 달라진 거예요. 이래서 성경 해석이 어려운 거예요. ‘이거 안 되면 딴 거, 지키면 되지.’ 품성 지체가 달라요. 품성 자체가 달라져서 하나 율법 어기면 몽땅 다 어기게 돼 있어요. 정성, 고상함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난 것은 뭐냐 하면, 해도 소용없는 짓을 우리가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야, 참 강의 어렵다. 다시 한 번 적어보자. 해도 소용없는 짓, 고상함, 정성, 이 짓이죠. 해도 소용없는 짓을 필히, 평생, 늘, 해야만 한다. 늘 해야만 해요. 그럴 때 인간은 바로 말씀의 바탕에 참여합니다. 그림 그릴 때 도화지가 필요하죠? 어떤 화가가 물감만 들고 있다. 그림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죠? 도화지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도화지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못 간다는 그런 도화지가 있어줘야 ‘아, 내 피 묻은 자만, 용서 받아서 천국 문 들어가잖아.’라는 그것이 주님의 공로가 훤하게 높아지는 거예요. 그게 성경입니다.

 

이제 나무에 매달린 이유를 알겠죠? 나무에 죽어라고 예수님을 못 박아 줘야 돼요. 고 짓도 해도 소용없는 짓이지만, 무조건 해야 돼요. 예수님이 무너져야 되고 왜, 내가 생각하는 추상적인 신이 아니고 왜 너무 천박스럽게 구체적이냐, 33살이 뭐냐, 내가 아는 하나님은 수염 난 하나님인데 33살 직업도 누구의 아들? 목수의 아들, 너무 생생하고 구체적이라.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추상적인 것을 포기 못하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옵션으로 예수님 슬쩍 눈치 안채게 믿게 하였습니다. 죄 짓고 난 뒤에 예수는 쏙 빼버리고 전에 믿던 고상한 하나님이 ‘그래 이게 맘에 들어.’ 맘에 들죠. 왜, 고상한 정성과 절제는 해도 소용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라는 청년을 시위현장에서 길바닥에 묶어놓고 그 분이 메시야인줄도 몰랐고 그 사람이 하나님인줄도 몰랐어요. 아버지와 함께 영혼도 함께 계신 줄도 몰랐고 어떤 바리새인들이 와서‘이놈 죽어야 돼.’ 하고 못 박을 때 누가 감히 12제자가 ‘비켜라 이분은 우리 메시야다.’ 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12사도, 12제자의 길을 간 그것도 해도 소용없는 건데 그래도 하나님 뜻에 의해 평생을 했어야 한 겁니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돼요.

 

그런데 이거 하는 것 가운데서 비로소 뭘 아느냐 하면 나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 소용없는 우리 손이 해도 소용없는 짓, 그것까지 포용해버리면 우리가 해도 소용없는 죄도 주께서 이미 포용한 셈이 되죠. 그것마저 죄로 받아들여서 그 죄를 뭐로 바꿨습니까? 그 죄 속에서 의가 나오도록 하신 ‘예수님의 다 이루심’에 의해서 우리는 이런 짓을 하면서도 구원을 받게 돼 있다는 것이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복음 이예요.

 

그래서 베드로는 ‘나무에 달린 자’라 하는 것을 언급을 한 겁니다. 교회에서 해도 소용없는 짓을 늘 하는데 해도 소용없다면 누가 헌금하고 봉사하겠어요? 해도 소용없다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그럼 안 하지.’라고 하죠. 해도 소용없는 짓을 안 하는 짓이 해도 소용없는 짓 이예요. 하하~~ 인간은 빈 도화지기 때문에 이 도화지 영역 밖으로 못 빠져 나가요. 해도 소용없는 짓, 더 착한 짓, 이것도 소용없는 짓이라 난 안할래. 하고 놀든지 어떤 짓도 주께서는 전부 다 그림 그리는 도화지에 불과한 겁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전부 다 없어지죠.

 

제가 도화지라고 한 것은 바로 이 그림의 주체는 도화지가 스스로 알아서 자기가 구멍 내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그림은 도화지는 따로 있고 그림 그리는 분 따로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데, 그림 그리시는 분이 도화지에다 나무에 달린 분이 우리에다 예수님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의 형상을 그리는 겁니다. 그 그림을 그리는데 물감이 뭐냐 하면 피로써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우리가 오스트리아를 가든 어디를 가든 전부 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서 나온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도소 가도 그렇고 어떤 경우에도 예수의 피가 아닌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피만 증거 할 뿐입니다.

 

그 다음에 진도 나갑시다. 나무에 달린 자라는 것이 추상적인 하나님은 아니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39절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결국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어떻게 처리했는가가 인간의 모든 본질이 드러나죠. 그 다음에 한글로 네 자가 나와요. 뭐죠? 한글로 네 자. 하나님이. 아니 하나님이 왜 거기에 개입합니까? 하나님이 할 일도 없다. 왜 개입을 해요? 하나님이 야구하는데 개입을 한다고 보세요. 참, 하나님도 할 일 없다. 야구하는데 왜 오지?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지, 왜 개입하지? 하나님이 개입하는 그 일이 하나님한테는 중심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호하잖아요? 모호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많은 사건이 있지만 하나님이 참된 증인으로 딱 개입한 사건은 무슨 사건밖에 없습니까? 사람 손에 죽었던 예수라는 사람을 살려낸 일에 하나님이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다, 이게 하나님이야.’ 라고 전부를 보여준 거예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란 말은 예수님이 하는 모든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모든 것에 누가 개입했다? 모호하게 계시던 하나님이 확실하게 구체화 되어서 ’아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작업을 계시하는구나.‘ 그러면 다른 사람은 계시한다? 계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계시하지 않아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계시했다고 해서 예레미야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 속에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겁니다. 그게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 나와요. 예레미야가 예수님의 영이 없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고 다윗도 마찬가지고, 모든 선지자들은 예수의 영이 있는 조건하에 예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관여하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관련해서만 자리에 나타나고 결코 예수님 빼놓고 다른 인간하고 상대한다? 상대 안한다? 일체 상대하지 않아요. 모세를 시내 산에 올리는 것도 모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시내 산에 올리는 겁니다. 이걸 유대인들은 몰랐죠. ‘예수? 33살 먹은 목수의 아들이 그 청년이 뭐 관계가 있는데?’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익히 느꼈으니까 이런 말이 혹시 거부반응이 안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말을 바꿔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문열 작가를 통해서만 계시를 합니다.‘하면 이문열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화내겠습니까? ’이문열 그게 뭔데? 뭔데?‘ 이래 나올 거예요. 그러다가  전라도 광주 가서 하면 ’하나님은 전두환을 통해서만 계시를 하신다.‘ 하면 광주사태 나는 거죠. 만약 그들이 반박하기 전에 왜 하나님은 모든 이들과 만나는데 특정한 한 인간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이제 사도들이 순교한 이유를 알겠죠? 순교할 때 그들이 사도나 스데반 집사나 이런 사람들을 비난할 때 그들이 하나님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자칭 하나님을 믿던 사람인데 뭐가 빠졌어요? 더 중요한 게 누락됐죠? 그 추상적인 하나님이 누구만 관여한다?  오직 예수님만 관여했기 때문에 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뭐가 없다? 하나님이 없다. 요한일서에 나옵니다.(요일5:12)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는 말을 그들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하나님 계시고 내가 지금 목숨이 뛰고 있고 이 목숨이 뛰는 것은 하나님이 주셨다. 이건 하나님 잘 믿는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사울일 때에 사고방식이라 말이죠. 이건 한국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봐서 아까 이야기한 ’정성과 절제와 고상함과 거룩만 갖추고 있으면 하나님도 뿅 하고 갈 거야.‘뿅 하고 감동 먹을 거야.’ 이렇게 한다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말이죠. 오직 예수님과 관련되어서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들은 제 말에 동의하죠. ‘그렇지 그걸 내가 부인하는 게 아니야. 나도 예수를 용인하잖아.’ 그러면 그 예수하고 우리하고 비교해 보자는 말이죠. 결국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었단 말은 누가 죽였어요? 결국 정성과 고상함과 자기 과시에 열중했던 자들이 예수를 죽였기 때문에 진짜 예수를 만난 사람은 그 모든 것이 쓸데없는 헛수고인 것을 고백하는 사람만이 진짜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보통 뭐하는 사람들이 교회 제일 먼저 가느냐 하면 이미 습관이 ‘이게 고상함이다. 이게 고상한 게 아닌가, 또 어떤 정성을 드릴까? 성가대 봉사를 할까? 무슨 정성을 드릴까? 내가  지난번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 한 게 뭐가 있을까?’ 이렇게 반성하는 것, 이거 하다 보면 예배시간 1시간 반 지나서 점심 먹고 집에 옵니다. 이게 예배예요.

 

예배라 하는 것은 예수님 앞에 내가 죄인인 걸 모르고 내가 할 수 있는 내 할 도리를 다 하나님께 퍼주고 그다음에 집에 와서 한주일 동안 복만 기다리면 되겠죠. 어떤 행운이 찾아오는 것, 그게 억지가 아니고 오히려 굉장히 자연스럽잖아요. 그런 식으로 되풀이하면서 50년, 60년 예수 믿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해줘야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나무에 달린 자’ 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참 그 당시 사람 나빴어.’ 그 당시 사람 탓을 해요. ‘참 그 당시 사람 나빴어.’ 지금 본인이 교회에 와서 하는 행세가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세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왜? 목사가 그걸 장려하니까, 상상을 못하고, ‘참 그 당시 사람 나빴어. 참, 아담 하와가 왜 선악과 따먹었지?’ 자기가 지금 하나님하고 막 대들면서도 ‘참 왜 선악과 따먹었지?’ 지도 이미 따먹은 주제에.ㅎ

 

여러분, 교회와도 소용없습니다. 교회 오면 천국 못갑니다. 십일조 해도 천국 못갑니다. ‘오직 천국은 예수님 피가 여러분 가슴팍에 새겨져야 합니다.‘라는 그런 설교를 했을 때 수천 명 교인이 그 다음주에 2명 나오면 많이 나오는 거예요.ㅎ '성가대 시끄러, 시끄러. 가운 벗어, 가운 벗어.’ 젊은 애들한테 가운이 왜 좋은가 하면 성가대 가운을 입으면 속된 인간을 졸지에 거룩한 인간으로 돌변하는 하나의 멋진 아이템이 돼요. 그래서 연애할 때 믿는 남자애가 안 믿는 여자 친구와 교회에서 만나면 일부러 성가대 옷을 안 벗고 나가요. ‘니는 나하고 달라. 나는 성가대야,’ 성가대 옷이 천사복장이라. 자기 신분 확인하는 거예요. 자 둘(재하, 재원)이 잘 들어봐요. 이게 오스트리아 교회 이야기라. 한마디로 할게요. 오스트리아 교회는 성만찬 되풀이하는 것으로 끝나요. 만날 성만찬 되풀이하다가 끝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애(진주)가 다 선교 보고를 하고 있어요. ‘그저 와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 거예요.

 

여러분들, 성경은 어디를 가도 봐야 됩니다. 왜 삼손이 요새 목사들은 그렇게 대우받는데, 왜 삼손은 그렇게 미움을 받았는지, 그 차이가 무엇인지 보자 말이죠. 아, 미움 받으면 뒤 골 땅깁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이게 바로 베드로가 전한 복음입니다. 너희들이 죽였던 예수님은 하나님이 개입해서 살려내서“ 그 다음에 42절에 ”산 자와 죽은 자의“ 그 다음에 유명한 말, 이 말해서 참, 나도 욕 많이 얻어먹었다. ”산자와 죽은 자의” 뭐로 돼 있어요? 재판장!!!

 

아~~ 우리가 갑자기 피고가 돼야 돼요? 왜 우리가 착한데, 절제하고 정성 드리고, 교회 잘 다니는데 왜 졸지에 피고가 돼야 되는데? 언제 음주운전을 했어요? 영화에 나오는 깡패들 말고 사법고시 붙어서 공부 잘하고 서울 의대생들이 공부하는 것 보세요. 걔들이 공부하는데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아니 공부도 죕니까? 또 예술 중학교 애들 보세요. 그 바이올린하고 연주법 공부하고 연습 많이 하고, 특히 예술 하는 사람은 시끄러워요. 연습하는데 가면 온 방마다 동당 동당 동당 하면서 연습한다고 하고 삐삑 불고 가 보면 온 데가 다 시끄러워요. 트럼펫, 클라리넷, 단련하고 숙련하는데 그 바이올린 하는 게 죄야? 바이올린 하는 게 죄 맞아? 아니잖아? 그렇지? 그 사법 연수 학생들 공부 많이 해요. 하루 14~15시간 잠도 4~5시간 자고 공부 많이 해요. 고시 있고 또 고시 있어요. 왜 공부 하는 게 피고가 되고 그게 왜 죄가 되느냐 말입니다. 사법 연수나 의사들이 공부하는 만약 그것마저 피고하면 일반 시장에 장사하는 사람 전부다 죄인 되고 공직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사업하는 사람은 이건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자,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예수님을 뭐로 봤습니까?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삼았다.’ 이것이 복음에 들어가는 내용입니까? 안 들어가는 내용입니까? 복음에 필히 들어가는 내용이죠. 이거 들어가 버리면, 사람들은 정성과 절제와 고상함으로 오는 이것 자체도 하나님이 주신 기준과 안 맞는 또 다시 예수님을 못 박는 쓸데없는 죄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재판장으로 삼았다는 말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장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기준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자체가 기준이란 말입니까? 어느 쪽 입니까? 어렵죠? 예수님 자체가 기준 이예요. ‘예수님 말씀 하시면 순종해서 지키겠나이다.’ ‘무슨 문제가 나왔는데? 그래야 내가 지키지,’ 그런 질문을 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지옥 보낸다. 예수님 자체가 기준이 돼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님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말을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이 주신 기준을 내가 준수를 했더니만 준수해서 시험을 100점 맞아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 자체가 나에게 도달된 사랑 자체가 이게 곧 기준 이예요. 예수님이 곧 기준 이예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앞에 지워버리고, 길, 진리, 빼버리면 뭐만 남습니까? 예수님이 생명 이예요.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를 묻지를 말라니까요. 아! 이거 엄청나게 어려운 이야기예요. ‘내가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합니까?’를 묻지 말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다가오면 그 자체가 생명 이예요. 시험치고? 시험 안 쳐요. 시험을 안친다니까요.

 

세상에 어느 엄마가 갓난애보고 ‘야, 이제부터 니가 내 자식이지? 니가 내 자식인지 내가 니 엄마인지 시험 한번 쳐보자.’ 이런 엄마 없잖아요. 내가 낳았으니까 이젠 이유도 없이 뭡니까? 내 자식 아닙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들을 낳아버리면 그게 어디서 톡 튀어나온 아들 이예요? 십자가에서 능력으로 새롭게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시험이고 자시고 할 것 없어요. 그 자체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그 창조의 효과를 가지고 믿음이라 해요. 내가 믿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그 여파, 그 파동 중에 하나가 믿음이고 그 파동 중에 하나가 소망이고 그 중에 하나가 사랑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갑자기 지진이 나서 흔들리는데 그 흔들리면서 구원 받는 게 아니잖아요? 뭐가 터졌기 때문에 흔들렸잖아요. 흔들렸다는 말은 이미 내 속에 뭐가 없다? 생명의 사건이 터져버리고 예수님이 내 안에 이미 장악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사람이 순종을 못하는 이유가 사람은 뭐든지 순종을 하게 돼 있어요. 사람은 남의 시선을 따르고 남의 욕망을 따르기 때문에 ‘당신은 나한테 뭘 원해?’ 묻잖아요.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내가 들어줘요. 들어주면 그게 순종한 걸로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순종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남는 게 뭐냐 하면 순종 넘어 나한테 명령을 한 분의 너머에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게 돼요. ‘하나님‘ 하면 그 다음에 뭐를 생각하는지 알아요? ’그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을까?‘ 이게 인간의 주체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이런 짓하고 있는 거예요.

 

항상 나는 없고 타인이 구성한 나거든요. 타인이 구성하다 보니까 타인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새로운 타인을 가다보면 기존의 어떤 사람을 모델로 삼아서 벤치마킹해서 내 모델로 삼아서 내가 되고자 하던 내가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 누구 본받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만날 바뀌죠. ’아이 그 사람은 파이라, 딴 사람 더 원해.‘ 벤치마킹을 그 사람을 모델 삼다가 새로운 타입이 오면 바뀌게 되는 겁니다. 바뀌게 되면 전의 것과 지금의 것의 틈새가 갈라져요. 분열된 거예요. 그러면 새롭게 확정된 그것은 또 며칠 갈지 몰라요. 이것도 또 바뀌어요. 그래서 인생은 어지러워요.

 

고호가 한 말 중에서 유명한 말이 죽을 때 유언을 한 것 중에 무슨 말이냐 하면, ‘산다는 자체가 힘들다.’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힘들다는 거예요. 그걸 저는 이런 말로 고치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회전목마처럼 어지러워요. 제가 젊을 때 유명했던 여자 가수가 있었어요. 이 연실의 노래가운데 ‘백열등 흔들리는 ... ’그런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가 의미 있는 노래예요. 뭐냐 하면 왜 나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만날 기뻤다가 슬펐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왜 자꾸 흔들리느냐, 누가 흔들리게 했어요? 원인은 내 것이 없기 때문에 흔들리거든요. 그럼 안 흔들리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지금 어떤 일에 몰두하게 되면 그 몰두한 그 순간만큼은 일을 처리해야 되기 때문에 흔들릴 수가 없죠.

 

엄마가 이렇게 컴퓨터하고 인생이 뭐냐 하고 있을 때 애가 에, 하고 똥 싸면, 그때는 인생이고 뭐 없어요. 당장 뭐해야 돼요? 애 기저귀 갈아줘야 되잖아요.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를 ‘예수님 죽으심으로 딱 확정’짓는 것은 더 이상 환상 속에 흔들리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단 말이죠. 네가 어떻게 살든 너는 도화지에 불과하고 네가 어떻게 흔들리든 안 흔들리든 상관  없이 이미 하나님은 재판장, 예수님 자신이 이미 우리의 재판장이 되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판장인 것을 수용하면 이미 그 사람은 세상 생명을 얻는 게 아니고 이미 생명을 얻은 자가 돼 버려요. 예수님은 재판장이다. 제가 아까 엄마가 똥 싸면 기저귀 갈 때 정신을 온통 거기다가, 이란 테에란에서 데모를 하든 말든 지금 북한이 미사일을 올리든 관계없이 지금 중요한 것은 애 기저귀를 빨리 갈아줘야 안 축축하고 불편하지 않으니까 거기에 몰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위와 관계없이 ‘예수님 자신이 재판장으로 오셨다‘라는 그것을 확정해 버린 겁니다.

 

그럼 성경에 나오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사하고 유학가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 뭘 잊지 마라. 그 하나의 흔들리는 백열전구지만, 아, 제목이 목로주점처럼 흔들리는데, 인자가 올 때에도 노아 홍수 때같이 그렇게 자기 일에 분주하게 몰두하다가 홍수가 터질 줄을 몰랐잖아요. ’인자가 올 때에도 이와 같으니라.‘ 이것은 늘 이렇게 흔히 교회에서 긴장해서 기다리란 이 말이 아니고 이미 긴장돼서 기다리는 것도 순종의 일종이라니까요. 만약 긴장돼서 기다리면 나중에 긴장이 도가 차서 폭발해버려요. ’에이, 씨,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그런데 성경에 그 말은 맞기는 맞아? 구름 타고 온다는 게 맞기는 맞아?‘

 

그게 뭐냐 하면 뭐든지 하면 순종하는 체 하지만 그 너머, behind, 거기에 성경 말씀에 ‘예수님 오신다는 말씀이 구라 아니야? 사기 아니야? 성경 누가 줬어?’ 그때부터 성경 비평에 들어가요. ‘성경 이건 구라야,’ 이런다니까요. 그 너머에.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 하면 그 말을 한 그것을 비평해요. 이게 본인 자체가 사건이 안 터지니까 늘 지금도 주님 십자가 앞에서 자체가 폭파돼야 되는데, 본인이 자꾸 흩어지면 다시 주워 모아서 재구성하고 새로운 거 나오면 다시 재구성하고 만날 재구성이야. 범죄 재구성 하듯이 만날 재구성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복음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다음에 43절 봅시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모든 선지자 나왔죠? 이미 이전의 선지자들이 누굴 증거 했다? 예수님을 증거 했죠. 그러니까 구약 성경에서 뭘 빼면 안 됩니까? 구약 성경 어떤 대목을 해석해도 예수 십자가 안 나오면 구약 성경 해석이 말짱 거짓말입니다. 별미가 어떠니, 아브라함이 양떼가 많아서 어떠니, 이런 것은 다 거짓말 이예요. 별미를 바쳤더니만 이삭이 야곱에게 특별... 보너스를 줬다. 전부 다 거짓말 이예요. 모든 선지자는 그 안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재판장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다 그의 힘을 입어서 죄 사함을 받는다.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가 뭐냐 하면 죄를 안 짓겠다는 게 죄가 되겠죠. 그렇죠? 맞잖아요. 쓸데없는 일이 평생의 일이니까 죄를 안 짓겠다는 것이 죄가 되고 ‘맞습니다. 내가 죄인 맞습니다.’라고 수용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현 재판장으로 수용하는 하나의 새로운 의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렇게 지나간 것,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전한 복음입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복음의 구성요소가 뭐죠? 첫 번째, 나무에 달린 자가 추상적인 모든 신을 다 호출했다. ‘다 저리 꺼져버려,’ 모든 추상적인 관념적인 신은 없어지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뭐했다? 천박스럽게 보이지만 나무에 달린 자를 아들로 보냈고, 그 나무에 달린 자에게 누가 개입했다? 하나님이 개입해서 죽은 분을 사흘 만에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사람 손에서 정성과 고상함과 절제는 절대로 천국 문을 열어젖힐 수가 없다 말이죠. 칸막이를 뒀으니까.

 

세 번째,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는가? ‘예수님 자체에서 나오는 힘이 우리 믿는 사람을 죄 사함 받게 해서 건진다.‘라는 내용 이예요. 이런 요소로서 베드로가 복음을 구성했습니다. 이 복음에 구성된 것은 사도바울이나 다른 야고보나 다른 요한의 복음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같아요. 왜 똑같을까요? 모두 다 예수님이 친히 성령을 통해서 알려줬으니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알고 있는 복음하고 베드로 복음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똑같죠. 왜? 성령께서 알려주니까 똑같은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