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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26강 / 행 10장 / 이방인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26강 / 행 10장 / 이방인

정인순 2011. 7. 1. 11:46

 

 

110630 사도행전 26강 이근호 목사

음성1 

 

녹취:이한례

대전110630a행10장(이방인) 

대전강의 6월30일 사도행전 26강

 

10장 44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그렇게 돼 있죠?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성령’이라는 단어가 나오잖아요. 이방인과 성령의 만남, 이게 무슨 뜻으로 성경에 나와 있느냐 말이죠. 보통 사람들보고 이름 이야기하지 ‘당신 이방인 입니다.‘라고 말 안 하죠. ;어디 사십니까?’ ‘대전사십니까?’ 이런 이야기나 하지만 ‘이방인이군요.’ 이방인이라는 말은 특수 용어거든요. 무슨 특수 용어냐 하면, 언약에서의 특수 용어입니다. 이방인은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언약에서 빠져 있는 것, 노선을 한번 이야기 할게요. 이렇게 하면 성경이 알기 쉬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으니까 아브라함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안 나타났으니까 아브라함만 하나님을 압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뭘 주느냐 하면 언약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산에 저수지에 댐이 있다면 물이 위에서 흘러서 아랫동네에 흐르죠. 아랫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물을 구경도 못한 거예요. 처음에 아브라함 댐에서 물이 흘러가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밤의 별빛처럼 누구나 달보고 별 보고 있으니까 ‘달빛이다. 별빛이다.’ 하고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의 하나님이 아니다 말이죠.

 

그게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결국은 본뜻대로 이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사랑의 하나님이다. 왜?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으니까 하나님이 날 사랑해주면 그렇게 간단한데 뭘 그렇게 복잡하냐는 거죠. 아마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신이 계시고 신이 날 만들었으면 서로 통하면 되잖아’ 이러는 거예요.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뭡니까?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축복을 받는다 할 때 축복과 저주가 내 쪽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쪽에서 적용되거든요. 그런 것을 이방인들은 그걸 강력하게 거주하는 겁니다.

 

신이 있고 인간 있으면 다 같은 입장이지 누가 어느 특정 인간한테 종속된다는 것이 자존심이 굉장히 상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 믿으면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그래서 구원한다. 그러면 종결되고 끝난 문제이지, ‘하나님 보낸 자를 믿어라.’ 그럼 내가 지금 믿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뭐냐 말이죠. 내가 지금 사랑하면 됐지 하나님이 보낸 자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것이 도올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옛날에 고대 교수 했던 그 사람이 그 딸래미가 말썽을 일으켰지만, 도올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강의할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하나님이고, 우리 한반도에는 우리 민족의 하나님이 있고 일본에도 일본의 하나님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지금 십자가 마을에 일어난 거와 똑같은 거예요. 언약이고 십자가 말고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고 주께서 날 사랑하는 거 믿으면 되는 문젠데 뭐가 그게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와 관계가 없다고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강력하게 반발이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사도행전에 이방에게 성령을 주심이라는 말이 성령이 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성령 안 받아도 하나님 잘 안다고 마음으로 느끼면 되지, 무슨 성령을 받습니까? 필요 없죠. 그래서 성경을 안 보잖아요. 교회 와서 기도한 효과만 신경 쓰잖아요. 성경을 사람들이 안 좋아하니까 안 준다는 거예요. 고객이 원치 않는 상품은 줄 필요 없다는 거죠. 돈을 뽑아내려면 원하는 것을 줘야 되는데 성경을 안 좋아하는데 왜 성경을 들이대 밀어요? 안 되죠.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께 ‘예 맞습니다.’ 응용해서 커미션만 받아 챙기면 된다는 거예요.

 

제가 쓴 글에 이런 게 있어요. 사람들이 교회 오는 것은 천국에 자기 지분 하나 맡아놓기 위해서, 공간 하나 마련하기 위해서, 교회는 그걸 채워줘야 하는데 ‘예, 하늘나라에 당신 지분 하나 됐습니다.’ 하고 중간에 커미션 받아 챙기는 것이 교회예요. 살아있을 때도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고 천국 가서도 주님의 나라가 싫어요. 천국에 공원묘지 하나 마련하듯이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려고 해요. 이쪽에서 하는 행세 그대로 하는 거예요. 애굽에서 하는 행세 그대로 안 버리고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구원입니까? 애굽에서 구원 받아야 하는데 애굽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딜 가려고? 천국에서 애굽을 받아줍니까? 안 받아주죠.

 

애굽적 사고방식을 먼저 알아서 그것이 다 깨어져야 됩니다. ‘아하, 이것이 애굽적 사고방식이고 이것 때문에 놋뱀이 달려야 되고 이것 때문에 주께서 달려야 됐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애굽이란 환경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우리 한평생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의 한평생 이예요. ‘아 이것 때문에, 아, 저것 때문에. 아, 이것 때문에,’ 말씀과 견주어 보면 다 드러나니까.

 

자, 여기서 계속 이야기 해 봅시다.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제가 쉽게 저주 이야기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저주 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이렇게 언약이 흘러가게 돼 있죠. 흘러가게 되면 졸지에 아브라함 바깥에 있는 사람은 그때부터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이방인이라는 결정을 누가 하느냐 하면, 이방인 아닌 자가 등장할 때만 이방인이 등장해요. 이방인이 부각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빼놓고 다 이방인이라 하면 다른 사람은 기분 나쁘죠. 그러면 이걸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면 이방인은 언약이 없는 자고, 그리고 이방이 아닌 자는 뭐가 있다? 언약이 있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림을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사람이 있는데 언약이 이렇게 들어오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언약은 작고 사람은 크니까 큰 사람이 언약을 이렇게 소유하게 되는 양상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암세포 들어오면 주도권이 누가 갖고 있습니까? 암세포가 통제가 안 되니까 주도권을 갖고 있죠. 언약이 들어와 버리면 그때부터 이 사람은 자기가 언약을 소유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언약이 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겁니다. 소유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없으면 누가 주인공입니까? 나라는 인간이 누가 주인공 이예요? 내가 주인공인데, 그게 바로 이방인!!!

 

예수를 믿고 삼위일체 아무리 믿어도 자기가 자기의 주도권을 갖고 있으면 그것은 언약이 없는 성령 받지 않은 이방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준성 아빠 이런 소리 했어요. 모든 인간이 행함이라 하면 ‘숨 쉬는 것도 행함이냐? 했거든요. 숨 쉬는 것도 내가 숨 쉬면 행함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숨 쉬게 하시는 겁니다. 그걸 언제 아느냐 하면, 병원에 가면 이번에 신 OO축구 선수 의식불명이죠. 그 애 숨 쉬는 거, 지가 못 쉬어요. 주께서 숨을 쉬게 해야 헤, 하고 숨이 트여서 살아나는 겁니다. 전에 소말리아 선장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만 보는 게 아니에요. 대전에 사는 우리들도 주께서 매일같이 심장을 뛰게 하고 숨 쉬게, 밤중에 늘 깨워서 ’숨 쉬라. 숨 쉬라.‘ 하지 않거든요.

 

주께서 평소에 숨 쉬게 했다는 것을 병원이 가서야 ‘야, 숨 쉬는 것도 이게 내 맘대로 안 되는구나,’ 그때 아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숨 쉬는 것도 그냥 하나님이 한다 하지 말고 언약 안에서 이렇게  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희생 덕분에 지금 숨을 쉰다.’ 이렇게. 반드시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왜냐하면 지옥 가는 사람도 주의 뜻으로 숨 쉬고 있잖아요. 그 사람은 실컷 평생 동안 주님의 뜻으로 숨 쉬어놓고는 ‘난 주님 모른다.’ 했으니까 그럼 그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한테 돌렸으니까 그것은 은혜 몽땅 받아놓고는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모든 내가 사는 것과 죽는 것,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 내가 숨 쉬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준성 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숨 쉬는 것도 행함이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내가 숨 쉰다고 생각할 때 그건 행함이 되는 겁니다. 그건 믿음의 반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반드시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 참석 하고 안 하고도 내가 쥐고 있고 이게 주님의 허락과 환경과 조성 없이는 되지를 안 해요. 세상 모든 발걸음을 다 주께서 세시는 겁니다.

 

얼마 전에 우리교회 한 집사님이 친구하고 문경에 가다가 차가 굴렀어요. 굴러서 애하고 부인하고 가는데 타박상 입고 눈이 이상해졌어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서 제가 신방을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무슨 설교냐 하면 마태복음 10장을 가지고 설교를 했어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 해놓고 그 뒤에 말씀이 참새도 주께서 지키신다. 그 대목을 설교하면서 주께서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몸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것만 지킨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통해서 ‘내 몸이 내 것이다’ 생각하면 그건 사고가 나고 안 나고 관계없이 지옥 가는데 사고를 통해서 ‘야,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구나.’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주께서 천국 갈 요소기 때문에 주께서 지켜주신 겁니다.

 

평생 동안 교통사고 하나 안 나고 집안에 우환이 없고 부인과 말썽이 없어도 결국 도착하면 지옥 가는 것은 뭐냐 하면 ‘내 몸은 내 꺼고 내 인생은 내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한 번도 주님이 개입해서 주님이 주도권을 쥔다는 생각을 긴긴 세월동안에 그 생각이 들지가 않은 거예요. 어느 순간 들어 버려요. 어느 순간 뭐가 와 버려요? 성령이 오니까 ’착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하는 건 성령 받은 게 아니에요. 주도권 문제입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우리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7~8절 말씀이거든요.

 

성령을 받았다 할 때에 이 성령은 유대인들이 율법 지켜서 그렇게 얻고자 했던 그 마음가짐을 이방인에게는 한꺼번에 와 버렸어요.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유대인들이 율법 가지고 얻으려 한 그 시도는 그 시도가 잘못 됐다는 이야깁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다녀서 구원받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교회 다녀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교회란 결과물이지, 어떤 준비 단계나 과정이 아닙니다. 교회 안 가도 교회는 교회예요. 성령 받으면 성령의 전이 교회라고 에베소서 2장에 나와요. 성령의 처소와 서로 성령으로 연결되면 그걸 성전이라 합니다. 기억나죠? 에베소서 2장 끝에. 머릿돌 위에 사도와 성령으로 연결돼서 하나의 성전이 된다고. 이게 교회입니다.

 

성령이 관건 이예요. 주도권이 바꿔진 거예요. 그래서 그 교회 주도권이 없으면 각자 기름부음이 있으면 교회고 그 교회 목사가 주도권을 쥐고 있으면 교회가 아니에요. 그건 계모임 이예요. 동우회죠. 그래서 항상 놀러 갈 생각만 하잖아요. 친목 대회하고 김밥 싸서 놀러 갈 생각이나 하죠.

 

유대인들은 언약을 주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유대인들은 불쌍해요.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그 뒤에 성령이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언약 챙긴 사람에 한해서 성령이 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잘못이었어요. 이방인은 뭐가 없습니까? 언약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베드로도 헛갈리는 거예요. 언약 없이 성령을 줄 것 같으면 언약을 미쳤다고 왜 줬느냐 말이죠. 왜??? 애들한테 빈 쟁반을 준다 말이죠. 쟁반을 준 다음에 음식을 가지고 오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 음식을 쟁반 있는 사람에게 얹어 주는구나.’ 그런데 그게 아니고 쟁반 없는 사람에게 음식을 줘 버리면 이 쟁반이 왜 있느냐 말이죠.

 

교회는 왜 가고 성경공부는 왜 하고 헌금, 구역 예배는 왜 하고 주일성수 십일조는 왜 하느냐 말 이예요. 그게 소용없다는 소리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교회 다니고 십일조 하는 것은 취미 활동인 거예요. 남한테 믿는 위선을 보일 수 있고 티를 낼 수 있는 그거지 그걸 비껴서 따로 와 버리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성령 받고 난 뒤에 헌금 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이야기해요. 성령 받기 전에 헌금을 하면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가 자기 돈을 내는 거지만, 성령을 받고 난 뒤에 헌금을 하면 주도권이 성령으로 바꿔지기 때문에 자기가 헌금 못 해요. 성령께서 헌금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주 오전 설교에 했잖아요. 헌금을 하는 것은 자기가 미워질 때 하라고요. 자기가 안 미워지거든 헌금하지 마세요. 자기가 안 미워진 상태에서 헌금을 하면 헌금 한 자기가 그렇게 예뻐 보여요. 그러면 주도권을 자기가 또 쥐고 있는 게 돼요. 그러면 교회 헌금 한 푼도 안 나온다.ㅎ 그러면 그 교회에서 헌금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교회는 결국은 자기의 자랑거리처럼 평소에 생각했던 거밖에 안되거든요. 성령 받았으면 구원이 되는데 왜 교회를 목사가 지 자랑거리로 여깁니까? 이야기 해보니 맞는 말이죠? 성령 받았으면 구원받았잖아요. 그런데 교회를 왜 신경 씁니까? 그 자체가 교회인데 이게 어려운 말 아닙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애보고 저 사람이 니 아빠인 이유를 대봐라.‘ 그게 말이 됩니까? 아빠를 아빠라 하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어요? 아빠가 아빤데, 그럼 어떤 아저씨보고 아빠라 할까? 성령 받았으면 구원 됐는데 구원 된 사람보고 ’이거 해. 십일조 하면 구원 받는다.‘ 그게 말이 돼요? 그게?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이 뼈琯湧?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에 본인들이 예수님 믿는 걸 모르기 때??자기가 하는 식대로 해야 자기의 흠이나 티가 안 나게 거짓말로 사기를 치는 거예요. 방언 안 해도 되고 통역 안 해도 되는데 왜 그걸 굳이 해야 됩니까? 어디 그게 목회 장사 밑천인가요? 더 심하게 말해서 목회 안 해도 구원 받으면 되는데 왜 목회를 해야 되죠? 자기가 미워질 때 하세요. 나 같은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부끄럽다 할 때 그때 고 마음 가지고 목회 하시면 목회 하시면서 ’여러분, 나 같은 인간도 구원 받을 수 있으니 여러분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처럼 되면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나 같은 인간도 성령 주십디다. 얼마나 감사한지, 여러분들 교회 이따위 필요 없어요. 성령 받으면 구원 되는 겁니다.’라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바로 이방인 같은 경우에는 뭐가 필요 없었다? 언약이 필요 없었다. 놀라운 사실이죠. 성경 말씀이 필요 없이 와 버렸다는 이 말이거든요. 사실 성경 말씀은 성령 안에 이미 성경 말씀이 완성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 영이고 십자가 지셨기 때문에 비로소 오는 영이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뭐라 하셨어요? ‘다 이루었다.’ 는 것이 택배로 성령을 통해서 다 들어와 버리니까 이방인들은 언약 지킬 필요도 없이 구원 받아버렸어요. 이것을 가지고 요한복음에서 두자로 뭐라 하느냐 하면, 여러분도 잘 아시는 ‘사랑’이라고 해요. 이 사랑을 하나의 계명으로 삼아버렸어요. 다른 계명이 필요 없다.

 

사랑이 계명이란 말은 사랑은 계명이 아니라 너희들의 대한 계명이 아니라는 뜻 이예요. 계명을 없애버리는 계명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계명을 신경 쓰지 말라고 한 게 사랑 이예요. 간통한 여인에게 현장에서 잡힌 자에게 사랑을 해버림으로 말미암아 간음 했다는 그 자체를 없애버리는 그런 사랑 이예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게 사랑 이예요.

그때부터 주도권이 이제 성령이 쥐는 겁니다. 누가 몰랐나? 베드로 거기에 대해서 정리가 안 돼요. 물론 베드로는 성령을 받았으니까 그게 베드로는 말씀의 계시가 성경이 완료되기 전이기 때문에 베드로 전, 후서가 있어야 돼요. 거기가 좀 어렵죠? 일반인들은 성령 받았다 하면 끝나면 되는데 사도는 성경 계시가 아직까지 방언과 통역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성경이 끝나면 하나님의 계시가 성령께서 성도만 사용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사도가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방언이나 다른 추가적으로 더 보탤 계시는 없어요. 그래서 사도를 통해서 베드로를 통해서 모든 게 정리가 돼 있어야 돼요. 그게 하나의 성경이니까, 그래서 나온 사건이 그 뒤의 사건이니까 한 번 봅시다.

 

사도행전 11장, 베드로가 여기 있습니다. 이방인이 있는데 이방인에게 베드로의 설교(하나님이 계시니까)를 들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했다. 이게 무슨 의미냐? 그것을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베드로 니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베드로를 가지고 일을 하시는 거예요. 베드로가 일하게 되면 성령이 일하는 것하고 어떻게 돼요? 서로 마찰이 일어나겠죠? 안 맞죠. 성령이 일하시는 것은 이방에게 거저 무상으로 주는 건데 ’다 이루었다.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를 모든 사랑으로 다 주는 것이고 베드로는 ’이상하다‘ 언약이 있는 자에게만 성령이 오게 돼 있는데 베드로는 성령이 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있는 자에게만 성령이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언약이 있는 자에게만 성령이 온다는데 그렇다면 율법을 주신 취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걸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게 11장이예요.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 갈 때에 유대인들이 ‘무할례자, 이방인이 성령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례자들이 힐난할 때에 베드로가 설명을 하는데, 여기서 어렵지만 여러분, 반드시 거쳐야 돼요.

할례 받은 자들이 왜 자꾸 이렇게 시비를 거느냐 하는데 모든 율법은 할례에 집결 되게 돼 있습니다. 율법은 세 가지로 돼 있다고 해요. 할례가 있고 제사법이 있고 도덕법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거 거짓말입니다. 이거는 목사들이 사기 치는 거예요. 율법에는 도덕법이란 게 없어요. 성경에는 도덕이란 말 자체가 안 나와요. 이건 완전히 주님을 모독하는 甄? 율법 안에는 예수님이 들어있지 도덕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로 율법에 도덕이 들어 있으면 예수님이 ‘도덕적으로 살아라.’ 이렇게 이야기 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으면 내가 진리고 내가 길이고 내가 생명이지 도덕 지킨 사람에게 생명주는 게 아닙니다. 도덕 지키는 자가 길이 되는 게 아니에요. 도덕 자체가 이런 진리를 떠나 훼방하고 방해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정통은 뭐냐, 할례로 돼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할례에서는 뭐가 흐르느냐 하면 ‘피’가 나오거든요. 이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십보라라는 모세 아내가 자기 남편이 죽으려고 하니까 아들을 할례해서 생식기 끝을 잘라서 모세 생식기 근처에다 툭 던지니까 살아났다 말이죠. 그래서 살아나니까 아내 하는 말이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니고 무슨 남편이라고 했죠? ’당신은 피 남편이다.‘ 피 언약과 연관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율법 가운데서 뭐가 중요합니까? 할례에서 율법의 모든 것이 집결되겠죠. 왜? 피니까. 그 피가 골로새서 2장에 보면 무슨 피로 이어지느냐 하면 십자가 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가지고 몸의 허물을 벗는, 할례라 하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 끝을 벗기는 거거든요.  피를 흘림으로써 육의 몸의 허물을 벗는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설명을 하고 있어요. 사실 사도바울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르친 거지만, 육의 몸을 벗어버리면 육의 몸의 벗겨지는 육에 뭐가 박혀있겠습니까? 어떤 습관이 박혀있겠습니까? 여기 옷이 있다면 겨울옷을 입었습니다. 바깥이 겨울이었습니다. 그러면 겨울 외투를 벗는다는 것은 겨울옷은 겨울 생활에 필요했던 모든 요소가 외투에 담겨있죠.

 

육의 몸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말씀 쪼가리 하나 쥐려고 그걸 지켜야 실천에 옮겨야 그 행함으로 도움을 줘야 그걸 신앙해야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모든 그 버릇, 성경과 모든 버릇도 홀랑 벗어버리는 거예요. 벗어버리니까 그 뒤에 나온 말씀이 ‘누구나 안식일과 절기나 율법으로 인하여 너희들을 비난하지 않게 하라.’ 왜? 그런 것은 옛날에 있던 율법과 관계있지, 안에 들어있는 새로운 영의 몸하고 상관없는 거거든요. 진짜 이걸 알아야 되는데, 한국 교회가 이걸 알아야 돼요. 전부 교회 목사들이 장사하려고 눈이 벌겋게 있는데 거북스러우면 십일조도 안하고 주일성수도 안하면 광고 시간에 선교헌금 돈 내라고 해야 하는데 광고시간 다 가버리면 돈이 안 나오잖아요. 목사 퇴직한다고 퇴직금 내놔라 해야 하는데 광고 시간이 안 나오면 돈도 안 나오고, 지도 천국 못 가고 남도 천국 못 가게 방해하는데.

 

 성경에 얼마나 간편하고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광채예요. 광채가 뭐냐 하면 반짝반짝 빛난다는 말 이예요. 성경에 보면 복음으로써 반짝반짝 빛나요. 다이아몬드 구슬을 성경에 뿌려놓은 것 같아요. 시커먼 육질은 다 벗겨내는 거예요. 다쳐서 껍데기 벗어지고 속살 나올 때 기분이 얼마나 좋습니까? 기브스 했다가 안에서 새살 나올 때 기분이 얼마나 좋다고요. 그 육의 몸을 벗으라는 거죠. 거기다 율법을 준 것은 육은 아무리 노력하고 진력을 다해도 육이 요구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 없다? 채우지를 못한다는 거죠. 선한 줄 알았어도 악이 그 반대로 나가기 때문에 채우지 못한다는 거예요. 목욕탕에서 옷 벗지 말고 말씀 앞에서 허물을 벗어야 돼요.

 

벗어버리니까 나타난 것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나오면서 그 장막에서 육의 몸을 벗어보니까 우리 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몸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몸이 거기서 장막이 벗어지면서 드러나는 거예요. 니는 주도권이 니한테 있는 게 아니고 나한테 있다.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데, 예수님 관계는 뭐냐, 우리의 죄를 어떤 식으로 해서 죄가 의가 됐는가, 이것을 늘 이야기한 것이 외부에 바깥으로 알려지게 돼 있습니다. 알려지게 되면 이것이 예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내 증인 내 착한 증인이 아니고 ‘내가 행했다, 나 구원 받았다.‘ 이게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안에서 이런, 이런 일을 해서 나 같은 죄인도 구원된다는 예수님의 복음이 그런 식으로 전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나의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장 8절,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나의 증인이 되어라.’가 아닙니다. ‘증인이 되리라’란 말인데 전부 다 ‘증인이 퓸錚?’로 바꿔 놨다 말이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주도권이 성령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그렇게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행전 10장이예요. 베드로가 이걸 알아야 될 텐데 베드로를 사용하는데 베드로를 뭐를 봤죠? ‘지붕에 올라갔는데 시간은 제 육시였다. 저녁 때 쯤이 되었죠. 시장하여 먹을 거 없는가 생각하는데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짐승...’

 

무슨 말이냐 하면 보자기 안에 먹을 거를 들여놨습니까? 못 먹을 거를 들여놨습니까? 못 먹을 걸 넣어놨죠. 이게 이방인 이예요. 더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내가 율법을 지키려면 이걸 안 먹어야 돼, 율법 없으면 먹어도 괜찮아.’ 이것은 베드로 자기 입장이라면, 주님께서는 뭐냐, ‘이방인이 너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걸 ‘내 행동이 옳을까, 그를까,’ 사적인 문제지만 뒤에 나와요. ‘난 못 먹습니다.’ 이건 자기의 사명은 생각 안하고 어느 인간이 자기를 필요하다는 생각을 안 하고 ‘내 구원 내가 지킨다.‘ 식이예요.

 

이게 성령 받으면 이게 없어져야 돼요. 여러분 구원 성령이 지킵니다. 주님이 지키지 내 구원 내가 지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구원 지키려는 것은 한국교회가 그렇게 사기를 치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일조 해야 합니다.’ 또 돈 이야기 나옵니다. 하나님이 하면, 그 뒤에 ‘돈 내라.’ 예수님께서 하면, ‘돈 내라.’ 이게 붙어 있어요. 추임새가 붙어 있어요. 속으로, 안 들키지만, 추임새를 붙이세요. ‘여러분,’ 하면 ‘돈 내라.’ 이게 버릇됐어요. 마음속에 들어있어요. 왜냐하면 마지막 설교 끝이 결국 돈 내라 설교 아닙니까? 처음 설교 운을 뗄 때부터 한 문장 뒤에 뭐가 담겨있다? ‘돈 내라’와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제 논리가 맞죠? 마지막 주문이 ‘돈 내라‘이기 때문에 처음에 운을 떼면서 한 한 가지씩 한 가지씩 한 것도 그 안에 결국 '돈 내라’와 포함돼 있다는 겁니다.ㅎ

 

지금 베드로가 사적으로 자기가 얼마나 의로우냐, 의롭지 않느냐, 하는 그 문제를 따질 쨉이 못돼요. 이방인이 더럽다고 보는 겁니다. 베드로는. 쉽게 말해서 베드로는 ‘주여 저는 죄졌습니다. 마음속으로 간음했습니다.’ 이러면 주께서 ‘안 가나, 저쪽으로. 지금 니 문제가 아니야 저쪽 문제야.’ 성령께서 새로운 사명을 줘 버리면 그 성령께서 주는 새로운 사명이 그게 의로운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말이 ‘내가 먹어라. 하면 먹어라’ 이 말이죠. 여기 나오죠. 베드로 하는 말이, ‘ 하나님, 저는 깨끗지 않은 물건은 안 먹습니다.’ 이렇게 나오죠. ‘베드로야 먹어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깨끗하지 아니한 물건을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게 누구 이야기한 거예요? 사적인 이야기죠.

 

천국은 사적인 공간이 없습니다. 그냥 사명과 사명의 그물구조죠. 사적인 '내가 얼마나 착할까, 내가 얼마나 악할까.‘ 그런 것은 이미 주께서 해결할 문제지 지가 나서서 지가 생각해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뭐라 하십니까? ’내가 깨끗하다 하면 깨끗한 거야.‘ 그런데 아직도 베드로는 무엇에 얽매어 있습니까? 율법과 자기의 사적인 구원 문제를 연결시킨 겁니다. 그것이 바로 누구 앞에서 깨어져야 한다? 이방인의 등장 앞에서 베드로의 이것이 깨어져야 돼요. 이 베드로가 깨어져야 한다는 말은 베드로의 뒤에 누가 있느냐 하면 할례 받은 자에게만 성령이 온다고 고집하고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있어요. 아직 그때는 계시가 완전치 않았기 때문에 과도기기 때문에 이런 혼선이 계속해서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통해서 뭘 교육시킵니까? 유대인의 사고방식 전체가 이게 구닥다리고 옛 부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거예요. 그 첫 번째 지점에 누가 있습니까? 베드로가 존재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알고 그걸 누구한테 보고해야 돼요?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성령께서 우리가 예상 못한 새로운 일을 비금 벌이고 있다. 우리는 옛날 과거 역사 속에서 알고 있었던 그게 전부하고 알고 있는데 지금 성령께서 새로운 일을 벌였으면 우리는 거기서 가타부타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은 이방인의 구원에 초점이 있습니까? 아니면 언약이 없는 이방恝“鍍?구원이 주어지게 하신 예수님 십자가에 있습니까? 성령께서 십자가에서 逃?때문에 어디로 가요? 예수님께로 가요. 주로부터 와서, 주로부터 왔으면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야 돼요. 결국은 뭡니까? 이방인을 예수님께 바치는 제물이 돼야 돼요. 그것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15장16절에 나와요.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방인을 주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데, 이방인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더럽잖아요. 그 더러운 제물은 제물이 될 수 있어요? 없어요? 안 되죠. 그렇다면 언약 없는 사람이 어떻게 깨끗한 성도가 되어 천국에 가게 됩니까? 그 언약을 대체하는 게 뭐냐, 다른 말로 언약을 완성시키는 게 뭐냐,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 했어요. 십자가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은 다 날아가 버렸어요. 폭파되었어요. 동독과 서독을 무너뜨린 문처럼 문이 떼어지면서 동독 서독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거예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 땅에서 증거로 남겨지는 화평이 언약이 있고 없고의 적대관계가 사라지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새로운 언약, 새 언약 예수님의 피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에베소서 2장에 나와 있습니다. 기억나시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8)

 

십자가에서 담이 헐어져서 모든 것이 화목 되었다. 그러면 십자가는 소유용입니까? 깨는 용입니까? 깨는 용 이예요. 십자가 앞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죄라고 본 이유가 자기들한테는 율법의 행함이 있잖아요. 율법의 행함을 뭐로 깬다?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 완전하다고 지금 애쓰고 있고 산을 기어오르고 있는 인간을 어떻게 합니까? 깨어버리는 거예요. ‘올라가지마, 올라올 필요 없어. 이미 다 올라왔어. 내려가 있어. 내가 줄게.’ 이런다 말이죠.

 

율법을 지키려 십일조 지키려 안식일 지키려 하는 것을 누가 깹니까? 성령이 오면 그게 깨져버리는 거예요. ‘아! 십일조, 안식일, 뭐하고, 뭐하고 이게 아~무 소용없는 거구나. 괜히 믿는 티내려고 남한테 뭔가 내 업적 쌓는 거구나. 육적 버릇에나 해당하는 일이지,’

 

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제 말 들었으면 어디에 올라가야 하느냐 하면 보자기 위에 올라가야 됩니다. 이 집에 큰 보자가 없죠? 양탄자 없죠? 보자가라 하고 이걸 우리가 타는 거예요. 머릿속에 상상을 해 보세요. 올라타게 된다면 그 보자기에 있는 우리는 졸지에 뭐가 돼요? 더러운 것, 누가 안 받는다? 하나님께서도 안 받는 더러운 것, 율법은 더러운 것 안 받거든요. 하나님도 거부하는 그 더러운 것이 보자기에 싸여서 내려오면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이 더러운 것도 그대로 천국에 올라가게 되죠. 이거는 우리가 으시 댈 문제도 아니고 당당해야 될 문제지 우리의 공유가 아니니까. 그 일이 실제로 베드로 시대에 일어났다는 겁니다.

 

성경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성경책을 덮어버리고 이 이야기를 그대로 해보는 겁니다. 옛날에, 옛날에 꿈을 꿨는데 세상에 보자기가 내려왔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다 들을 거예요. ‘아이구, 목사님 놀라운 체험을 하셨네요.’ ‘이게 다 언약 없어도 성령이 오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그냥 그 자리에서 죄도 묻지도 않고 구원됐습니다.’ ‘야, 목사님 좋은 체험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성경 사도행전에 나오거든요.‘ 그런데 성경을 안 봐요.ㅎ

 

성경은 전부 다 인증 받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보증 받은 계시 체험만 있어요. 성령으로 보증 받은 더 보태고 뺄 수도 없습니다. 끝났어요. 성령께서 보증한 것은 성경인데 이걸 안 본다는 것은 다른 악마가 이야기하는 그러한 체험을 가지고 ‘소도 걸겠다. 천국을 걸겠다.’  하는 것은 무지무지 수상하죠.

 

 자, 계속해 봅시다. 10장 17절에 봅시다. 그래서 세 번 하고 난 뒤에 올라갔습니다. 그 더러운 것은 뭐라 했습니까? 이방인들이다. ‘이방인을 먹어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나타나게 해서 베드로와 유대인의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성령이 벌이는 새로운 일을 알려주는 역할 이예요. 그럼 결국 누가 누구한테 전도한 거예요?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전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께서 이방인을 앞장 세워서 누구 전도한 겁니까? 베드로에게. 우리는 평생 동안 전도 받아야 돼요. 누구한테? 예수님한테. 예수님한테 전도 받아야 되고 같은 안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을 통해서도 전도 받아야 돼요.

 

복음이라는 것은 늘 관심을 둬야 하는데 관심을 우리가 안 두거든요. 관심을 안 두면 주께서 작대기 가지고 슬슬 비 복음적인 이야기가 슬슬 십자가 마을에 쑥 뜨게 만듭니다.ㅎ 그렇게 되면 다시 잊어버렸던 것이 다시 생각나게 돼요. ‘아~! 씨.’ 그러면 신나서 ‘그렇지, 이래서는 안 되지,’ 이런 말이 있어요. ‘물들었던 모자’라는 말이 있어요. 물 빠진 모자가 돼야 물이 드는데 물들었던 모자라는 것은 이를 갈 때 복음 전하는 척 ...,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잘 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그러면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잘하는 나한테 관심을 둬요. 정말 못 살게 굴고 할 때 ‘아이구, 하나님 너무 하신다. 이럴 것 같으면 난 안 삽니다.’ 가만히 있어보자, 주도권이? 또 어느새 무의식중에 주도권이 주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편안하길 좋아하고 그냥 행복하길 원하는 내가 나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순간이 되죠.

그래서 누구 집에 갔어요. 가니까 거기서 희한한 일이 있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고 오니까 고넬료라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도 천사가 와서 베드로를 모시라고 하는 계시가 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만남의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바로 주님한테 있죠. 사도행전이라는 것이 결국 사도들의 행전이 아니고 성령의 행전이죠.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고, 사도나 베드로나 고넬료나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한 사람을 부리는 거예요.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이 이상하게 일이 잘 안 돼요. 원래 하나님께서 회당 장 딸한테 계시를 줘서 ‘예루살렘에 가지마라, 가면 잡힌다.‘고, 그런데 기어이 고집을 부리면서 ’내가 잡히더라도 가야겠다.‘해서 ’니가 받은 계시도 있지만 나도 받은 계시가 있다.‘고 기어이 간다고요. 예언된 그 길로 결국은 로마로 갑니다. 그래서 죽어요. 전설에 의하면 죽었다고 돼 있어요. 끝이 안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중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상한 말로 여기죠. ’니가 반드시 로마에도 니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풍랑이 일어서 전부 다 인간적으로서는 죽었다 싶지만 걱정하지 마라. 풍랑도 하나의 니가 사도임을 주와 니가 함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중간에 흑인들 섬에 가요. 그 섬에 가서 독사에 물렸는데 살게 되므로 복음을 전하고 그 다음에 로마 가게 만들어요.

 

그러니 주님께서는 복음만 생각하지 인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걸 내가 자주 이야기했어요. 주님께서는 복음만 생각하지 인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불평스럽고 짜증스러울 때 기도해 보세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나한테 신경도 안 쓰는데 난 나한테 신경을 너무 써서 ‘이러다 못 삽니다. 이러다 자식들 놔두고 훌훌 떠나고 싶습니다.’ 이러고 있는데 주님께서 멀뚱하게 ‘뭐 일 있나?’ ‘나는 니 생존에 아무 관심이 없어. 난 니가 죽든 살든 복음만 관심 있지.’ 니 생존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걸 사도행전에 보여준다니까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 돌아가시기 전에 많이 잡숴 놓으세요.ㅎ

 

그 다음에 봅시다. 그 다음에는 베드로가 유대인에게 전도를 하는데, 이방인과 베드로와의 만남은 그 경계선에 베드로가 이방인을 만나러 가지 않고 자기 유대인에게로 가 버려요. 이 방 인 몫은 누구 몫입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몫 이예요. 그래서 이방인에는 사도바울이 몫이고 여기까지 모아서 사도바울한테 한 수 배우고 면박도 받고 이방인도 만나고 다시 자기한테 자기 민족에게 돌아갑니다.

 

28절에 봅시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풔?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자 이방인이 깨끗합니까? 안 깨끗합니까? 안 깨끗하죠. 더럽죠. 참 이런 말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이방인은 개’라 했어요. 더럽습니다. 그런데 그 더럽다는 것이 어느 쪽에서 더럽다는 거죠? 깨끗한 유대인 입장에서 더럽죠. 그런데 오늘 28절에 보니까 이방인보고 하나님께서 뭐라 합니까? ‘더럽다 하지 마라. 깨끗하지 않은 게 없다.’ 다 깨끗하다고 한 거죠. 그러니까 유대인 입장에서는 이방인이 더러운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방인이 안 더러운 거예요. 성령 줬으니 안 더러운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유대인 너도 이방인처럼 ‘나 더럽다’고 한다면 안 더러울 수가 있다는 겁니다. 아이고, 어려워라.ㅎ

 

유대인 입장에서 자기들은 깨끗하고, 왜? 할례를 행했으니까, 이방인들은 더러운데 그 더러운 이방인이 깨끗하다는 말은 다른 기준을 우리한테 적용시킬 때가 되었다. 그 기준은 베드로가 너희에게 알려줄 것이다. 다른 기준이 뭐죠? 율법 쥐고 있는 그들에게 다른 기준은 뭡니까? 오직 십자가죠. 십자가 피로 깨끗하게 되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나오죠. 유대인들은 자기의 의를 그리스도의 의를 모르고 실컷 자기 의를 세우다 잘린다는 거예요. ‘그래, 그래 울법하고 잘 놀아라.’ 하다가 저주받죠.

왜 저주받을 것을 쥐고 있습니까? 바보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예요. 왜 자기에게 저주를 안겨주는 것을 왜 그렇게 꼭 쥐고 있느냐 말 이예요. 안식일이고 십일조고 왜 저주 받을 짓을 쥐고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 자기만 나타나면 되는데, 그게 고객 확보거든요. 이게 베드로는 고객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36절 봅시다. 앞의 이야기는 쪽 지나간 이야기를 하고요.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8절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40절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그렇다면 이건 설명이 필요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자기가 율법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을 받은 걸로 여기죠. 그런데 베드로가 하는 이야기는 이 이야깁니다. 이 그림만 보시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구원 받은 걸로 여기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유대인을 통해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면 그러면 이 세상에 의인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바로 예수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칭 구원 받았다는 인간들아, 새로 시작하자, 이 예수를 믿어라.‘ 이 말 이예요. 간단하죠? 이것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마다 다 잘난 체 하는데 여기다가 진짜 복음을 아는 목사님이 예수를 전하는 것은 이 잘난 체 하지 마시고 자기 보지 말고 예수님 이야기 해보면 ’아! 예수 믿으면 되겠구나.‘ 하는 그건데 그걸 가지고 뭐라 했습니까?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살리사” 여기에 뭐가 단절입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삼일이란 단절이 있죠. 삼일 단절, 왜 삼일 단절이냐 하면 이 세상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떤 인간도 이 계곡을 건너 뛸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만 죽음에서 살렸습니까? 누구만? 예수님에게만 죽었다가 살게 하신 거예요. 다른 사람은 부활의 의미로 산 게 아니고 소생하신 것이고 이 삼일이라는 계곡을 통해서 이 모든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이 된다? 안 된다? 이건 하나님 보시기에 절대로 구원 될 수 없었다 이 말이죠.

 

구원 될 수 없는데 그들은 지금까지 잘만하면 구원 된다고 그렇게 거짓말을 해온 거예요. 누가 오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거짓말을 해온 겁니다. ‘열심히 기도하시면 되고 계시 받으면 되고, 천사 숭배하면 되고, 뭐든 전부 다 숭배하고, 어떤 거, 전부 다 숭배하고,’ 그런데 숭배하든 안하든 율법을 지키든 안 지키든, 이방인은 율법도 없으니까 지킬 것도 없고, 하여튼 이방인처럼 안 지켜도 마찬가지고 지켜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없다. 어쨌든 없는 거예요. 주의 천사를 봤든, 꿈에 예수를 보든 어쨌든 없어요.

 

구원 받는 것은 이 삼 일의 간격을 인정해야 돼요. 제 힘으로는 안 된다는 거. 이 삼 일의 간격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돼요. 절대로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에 우리?구원받지 내가 나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이것은 인간은 아까 숨 쉬는 것도 지 맘대로 못 쉬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로로 지금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가 믿어져야 돼요. 매일같이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 숨 쉬는 것, 잘 때 꿈꾸는 것, 모든 것도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주께서 함께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것이 믿어져야 됩니다. ‘십자가 피’ 때문에 ‘지금 내가 살아있구나’라는 것을 ‘주의 것이구나.’라는 것을 알 때 그것만이 주의 십자가의 영,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