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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20강 / 행 10:9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사도행전

사도행전 20강 / 행 10:9

정인순 2011. 1. 19. 15:03

이근호 목사

 

101230  대전강의 사도행전  20강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10대전/대전 101230a.MP3

 

 

녹취:이한례

대전101230a행10장 


사도행전 10장 9절 할 차례입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 인고 하면 베드로가 육시니까 저녁 때 기도할 때에 하늘이 열리면서 그릇이 내려오고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와서 그 안에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한 거예요. 앞 뒤 다 끊어버리고 우리가 요 현상, 환상이죠. 베드로가 보았던 실제 있었던 이 이미지를 우리가 한번 분석해 보자 이 말이죠. 뒤에 정답 아는 것 말고 베드로가 누군지 우리가 안다고 치지 말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먹으라는 음성과 함께 보자기가 있는데, 부자기에 각종 구약의 인간이 먹을 수 있던 없던 간에 하나님이 먹으라는 내용물을 주셨다는 이 말입니다. 이 말이 뭔 뜻이냐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사건 하나를 기록할 때는 항상 묻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고 묻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와 우리 구원과 천국, 이런 것과 다 관련이 있잖아요. 무슨 뜻이냐, ’나 이런 것 알고 싶지 않아요.‘ 이러면 ’나는 구원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아요. 천국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아요. 같은 발언이 됩니다. 이 자체가 이걸 가지고 계시라고 해요. 계시의 특징은 뭐냐, 계시의 특징은 인간이 알고 있는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게 특징 이예요. 계시는 하나님의 아이디어, 생각에서 나오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에서 우리의 알고 있는 바로는 구원, 천국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냥 주시는 거죠. 그렇잖아요. 주실 때 ‘이게 구원이다. 이게 천국이다.’라고 주시면 되는데 보자기에 먹을 거 잔뜩 줘 貂?‘ 먹어라.’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구원과 천국을 설명한다 이 말이죠.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구원과 천국은 좋은데 보자기 내려오는 이런 거는 알고 싶지 않아요.’ 라고는 말씀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나는 천국과 구원에 대해서는 익히 알기 때문에 이 보자기 이야기는 그냥 넘어 갑시다.’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보자기 이야기와 천국과 구원 이야기가 있는데 그걸 우리가 임의로 중간에서 가위로 끊어버리듯이 중간에 잘라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죠. 잘라 버리면 이걸 자른 채 구원과 천국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걸 충분하게 오판할 가능성이 많죠. 이걸 잘랐으니까,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베드로에게 ‘베드로 구원 받았잖아요. 베드로 구원 받았으니까, 베드로야, 뭐 구원이 뭡니까? 논리적으로 설명하시면 듣겠나이다.’ 이러면 될 문제를 가지고 베드로가 경험했던 이야기를 가지고 설명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이나 천국이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가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는 채로 받아들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건 어떻게 되요? 이러한 베드로가 본 사건에 의해서 무슨 작업에 들어가야 됩니까? 수정작업을 날마다 해줘야 되는 겁니다.


자, 그럴 때 방금 이 보자기 사건의 의미가 뭐냐, 이런 것을 전제로 배경으로 해서 보자기 사건에서 ‘먹으라.’하는 것이 이 구원과 천국의 의미를 아는데 더 심도 있게 더 깊이 있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판할 소지가 적어지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던 구원성과에 대한 인식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아하, 뭔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과 천국에 대해서 뭔가 오해하고 잘못 생각했구나 하는 것을 우리보다 먼저 베드로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는 그러한 사건으로서 이 사건이 있는 겁니다. ‘먹어라.’  ‘예, 먹겠습니다.’ 하고 베드로가 이렇게 나왔습니까? 아니죠. ‘못 먹습니다.’ 이래 나왔죠. 그렇다면 베드로는 뭔가 천국과 구원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오판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오판이 베드로의 오판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오판일 가능성이 충분한 거죠. 그것 때문에 이 사건을 우리에게 배치돼 있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서 베드로와 하나님과의 하늘에서 소리가 있다 했는데 하나님이라 합시다.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서로 안 맞는 대목을 우리가 찾아보면 되겠죠. 그 안 맞는 대목이 우리에게 구원과 천국에 대해서 수정할 요소가 되는 겁니다. 자, ‘먹어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안 먹습니다.’  먹어라, 못 먹겠다. 중간에 있는 게 뭘까요? 중간에 있는 게 뭔데 하나님은 먹을 수 있는 걸로 봤는데 베드로는 중간에 있는 게 뭔데 자기가 절대로 못 먹는 걸로 봤을까요? ‘깨끗하지 않다.’ 참, 이렇게 이야기 해 주니까 제가 강의하기에 쉬워집니다.


적어 볼게요. 깨끗하지 않다. 는 것이 베드로 생각이고, 하나님 생각은 뭡니까? 깨끗하다는 거죠. 그럼 깨끗하다, 거룩하다. 에 대해서 이미 의견 차이가 났죠? 결론부터 말할게요.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도 구원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뭐냐 하면, 오늘날 교회처럼 행동을 똑바로 못하면, 자기 행동 똑바로 못한 것 때문에 지옥 가고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행동!! ‘내가 이렇게 기독교 신자고 성도인데 어떻게 내가 이렇게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더러운 것을, 나쁜 행동을 하겠습니까?’ 라는 베드로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니는 구원과 천국에 대해서 오해했다.’는 겁니다.


천국과 구원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는 것이지, 너의 자전적인 노력, 스스로 정화시키는 노력이나 자기 절제하는 노력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조심을 합니다. 자기 조심이라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 시키는 원인이 된다니까요. 조심 없이 살면 돼요. 조심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다른 말로 하면 따지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상생활이 주께서의 음성이 다 포함된 겁니다. 어떤 의자가 탁 튀면, 안에 말이 녹음 돼 있어요. ‘먹어라.’ 의자는 하나님이 내게 주는 痼甄? 재하, 재원이를 볼 때, 주께서는 ‘먹어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자식이다. 모든 게 안에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게 어려운데 여러분이 실력이 되니까 이런 강의 합니다.


사람이 베드로 같은 경우에 뭔가 ‘먹어라.’하면 자기 안에 정결한 것, 자기가 바르게 살아온 역사, 과거, 훌륭한 업적, 이런 게 없었으면 ‘먹어라.’라는 명령이 그대로 온전히 복속됩니다. 그런데 ‘먹어라.’는 것을 딱 주게 되면, 자기 점검에 들어가요. ‘먹을 거냐. 안 먹을 거냐. ‘먹을 거냐. 안 먹을 거냐.’ 자기 점검에 들어간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자기 삶의 기준이 따로 챙겨 놨다 이 말이죠. 챙겨놓은 자기 기준이 하나님의 뜻과 마찰과 충돌을 일으킨다는 이야기가 오늘 이야기예요. ‘나 깨끗합니다. 못 먹습니다.’ 이래 되는 겁니다.


오늘날 이 본문을 가장 알기 쉽게 예를 하나 들게 되면, 청소 회사에 청소원이 있는데, 신입사원이 왔어요. 장화 신고 어부들이 입는 옷, ‘통으로 되어 있는 그런 옷을 입으세요.‘ 라고 사장이 지시했으면 ’사장님, 저는 폼 나는 옷이 아니면 안 입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자기는 옷을 입을 때 뭘 생각하느냐 하면, 사장이 직원한테 ’너는 그걸 입어야 깨끗해 보이고 정갈해 보이고 폼 나 보이고 근사해 보인다.‘ 이렇게 이야기 한 줄 아는데, ’빨리 입어.‘ ’아닙니다. 나는 폼 안 나는 옷은 입지 않습니다. 저는 이 옷으로 폼 납니다.‘ ’그게 아니고 그거 입고 정화조 청소 하러 가.‘ 이러는 거예요.


본인은 할 일을 위해서 신입사원을 뽑았는데, 신입사원은 오면서 자기는 ‘이 옷 어때요? 나 깨끗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만하면 내 인생 잘 관리하죠?.’ 그거 뽐내기 위해서 마치 청소회사 취직한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입으라’ 하는 것은 너가 입지 아니하면, 너가 이걸 먹지 아니하면, 만약에 이방인들, 너가 보기에 지옥 갈 인간들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니 방법 식으로 다가갈 위험이 있어요. ‘나는 니 같으면 지옥 간다. 너 같으면 거룩한 복음을 못 전해. 어디 감히 니가 구원 받아. 나 삐졌어.’ 이럴 가능성이 많아요.


천국에서는 고넬료를 바라보는데, 베드로는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식이죠. 자꾸 받는 것이 개 같은 인간이 구원 받는 걸 모르고 구원 받으려고 폼을 재려고 해요. 십일조 해야 되고 교회에서 남들한테 나쁜 소리 안 들어야 되고, 이왕 구원 받는 거 좀 멋지게 구원 받으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이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과 안 맞는 거예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누구죠? 예수님이 살았던 모습하고는 안 맞더라는 겁니다. 그 분은 죽기까지 십자가 지신 이유가 자기 하나 구원 못해서가 아닙니다. 구원 될 수도 없는 인간 구원하기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영광을 포기하기 까지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이 마음을 성도야 품어라’고 빌립보서에 이야기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사마리아에 강도가 나자빠져 있으니까 제사장. 레위 인이 그냥 지나가는 그 마음씨와 똑같은 겁니다. ‘아이구, 이거 만지면 피 묻으면 안 되는데, 율법에 보면 거룩한 날에 시체 만지면 안 된다는데 내가 어떻게, 피 묻으면 안 되는데, 내가 이걸 하면 시간이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자기 정당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때,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을 본받으라 하는 겁니다.



간음한 여인을 구원한다는데 왜 간음한 여인을 구원 했을까요? 그 당시에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죽을 만한, 아래쪽에서 노는, 이건 어느 하나님이 와도 될 수 없는 존재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 이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구원 하신 겁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그런 자리에 사람들이 더럽다고 안 가는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예수님을 모방하란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왜 나는 그 예수님을 흉내라도 못 낼 정도로 나쁜 존재인가를 아는 게 예수 믿는 거예요. 또 모방해 버리면 側?잘난 사람이 돼 버려요. 그러니까 항상 문제점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먼저 일을 저지른 거예요. 이 종분 집사님 같은 경우는 어떤 모임이나 친구를 만났을 때, 성격상 말을 이렇게 툭 저질러 놓고 돌아서서 후회 좀 많이 하시죠? ‘내가 너무 심하게 너무 차갑게 했나?’ 하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먼저 일을 저질렀어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이거는 모든 인간을 두고 이야기 한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저질러도 예수님만큼 우리는 즉각적으로 일을 저지르지 못해요. 우리는 실력이 안 돼요. 주께서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용납하십니다. 그걸 잘했다는 것이 아니고 용납하시죠. 용납하시면서 그 가운데 뭐를 집어넣느냐 하면,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의 용서가 너희에게 고스란히 오롯이 남아 있기를 원하는 겁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이 남아 있기를 원하지, 혼자 잘 났고 혼자 깨끗하고 혼자 ’나는 못 먹습니다.‘라고 버티는 것, 바로 그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 할 때 16절에 보면 베드로가 세 번 거절하고 보자기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이게 무슨 뜻인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거든요. 여기서 한마디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면서 무미건조하니까 올 연말에 ‘꿈속에 이런 꿈이라도 이렇게 나에게 딱 떨어지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 본적 있습니까? ’나에게도 이런 보자기가 떨어지고 그러면 좋겠다.’ 하는데 그거 주의해야 됩니다. 만약에 그런 꿈꾸시면 베드로처럼 험한 꼴 당합니다.ㅎ 그냥 사시는 대로 사셔야지, 괜히 성경에 나온 사도들 멋있게 보이는 삼층 천 올라 간 것 좋아하다가는 진짜 빼지도 못할 가시 박힙니다.ㅎ


항상 하나님께서는 뭐든지 합력하여 그 모양새 하나하나가 합력하여 있잖아요. 디모데후서에 보면 부엌에 가 봐라. 사용에 따라서 그릇이 다 다르다. 냄비는 냄비다워야 하고 접시는 접시다워야 되지, 접시가 냄비 되려고 부러워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 어떤 때는 귀히 쓰이는 그릇이 있고 어떤 때는 천히 쓰이는 그릇이 있으니까 사람은 그릇대로 모양 따라 그 쓰임새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지, 괜히 베드로 이거 봤다고 해서 ‘나도 꿈에 그러한 보자기 내려 왔으면,’ 혼납니다. 주의해야 됩니다. 베드로처럼 험한 꼴 보려면...ㅎ 그냥 주어진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마을에 글 하나 썼는데 중요한 글을 썼어요. ‘소외’라는 글을 썼어요.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목적을 성급하게 쟁탈하고 보니까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소외당한다는 내용을 썼습니다. 읽어 보셨습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목적을 성급하게 쟁취하는 것,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구원 받았다 하니까, 아무것도 안하는 거예요. 왜? 목적을 쟁취하는 이 자본주의적 본성이 있어서 ‘나 구원 받았으니까 나 아무것도 안한다.’ 이래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목적을 거부해버리고 뭐냐 하면 항상 과정이 목적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 뒤로 가거라. 십자가 지고 가거라.’ 과정이잖아요. 이 과정 속에 주님이 동행하러 오시지, 목적만 주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과정 자체가 목적이 이끄는 사명입니다.


다시 말씀 드릴게요. 목적을 자꾸, 비전을 목적으로 삼아버리면, 만약에 피아노 치는 애들이 세계 최고 콩쿠르에 나갔다. 그러면 죽기 살기로 자기 나름대로 피아노 연습 하겠지? 그렇지? 그런데 동네 유성구 음악회 한다? 그런데 피아노 치는 애들이 거기에 4명도 안 나온다. 그 중에 3명은 중고등학생이다. 연습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아이쿠, 시시하다.’고 하는데, 이게 뭐냐 하면 목적, 1등, 상을 먼저 염두에 두다 보니까 뭐가 빠져 나가느냐 하면 유성구 음악회라면, ‘지금 내가 노력 안 해도 되겠네,’라고 하는 목적에 탐이 나다 보니까 중요한 과정 자체를 누락시켜 버리는 겁니다. 시험이 쉽게 나오면 애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게 거기 있어요. 버릇이 뭐냐 하면 목적부터 성급하게 쟁취하게 되면, 목적 따내면 자기가 수준이 높아진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주께서는 그 과정을 보시는데, 그래서 커닝하지 말라는 거죠. 커닝하지 말라는 것은 커닝으로 뭐냐 하면 정답으로 목적을 따잖아요. 16등에서 점수 좋게 나오면 이건 사기라 말이죠. 시험에서 정답은 아예 안 보는 것이 최고로 좋은 채점 이예요. 정답은 틀려도 괜찮아요. 과정이 충실하면 좋은 점수 주는 거예요. 사실 논문이 그래야 돼요. 논문이란 결론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 논문을 다하기 위해서 어떤 책을 봤으면 어떤 노력으로 어떤 새로운 사고를 집어넣었느냐를 그걸 봐야 되는 거예요.


이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은 오해예요. 목적이 뭐냐 하면 ‘ 잉여의 돈을 벌자’ 이거 아닙니까? 잉여의 돈을 벌자 하니까 사람들이 취직을 왜 합니까? 부동산 투기하고 펀드하지, ‘취적은 아직 과정이야, 아이쿠, 때려 치워, 월급 얼마 받는데?’ ‘내 친구는 부동산 투자해서 7억 벌었어. 치워, 나도 그만 두었어.’ 부동산 투기하고 상가 투기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지만,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자본주의는 과정을 무시하고 목적만 쟁취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가 애들을 학원에 보내는 이유가 거기 있잖아요. 엄마하고 애들하고 같이 부딪히는 그 과정이 애들 정체성, 애들이 ‘내가 누구냐’의 정체성에 내용물로 추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문 학원, 피아노 학원에 다 보내고 엄마는 저녁때에 드라마나 보고 있으면, 애들은 학원에 보냈는데 뭐가 빠졌습니까? ‘엄마는 나한테 돈 대주는 것 외에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배워 놓고는 자연적으로 누굴 무시하겠어요? 엄마 아빠를 무식하다고 하는 거예요. 엄마 아빠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학원을 보내는 게 나쁜 게 아니라 학원을 보냈으면, 그 다음에 엄마가 같이 공부를 해야 돼요. ‘뭘 배웠느냐’ 묻고 어떻게 하느냐, 하나하나 묻고 체크를 해야 돼요. 체크해서 사랑이라는 것이 같이 고행과 고생을 나누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부터, 여자가 ‘직업이 뭐냐?’ 목적부터 먼저 잡아 챙기려 해요. 조건 보려고. 결혼이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서 같이 고생하는 것이 결혼이고 사랑이라는 겁니다. 같이 울고 같이 웃고, 이건 완제품을 원해요.‘나 이렇게 돈 있습니다. 나 이렇게 잘났습니다. 누구 이 조건 보고 나한테 올 사람?’ 서로가 달라요. 서로가. 이게 자본주의가 만든 변태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장 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적의 내용, 보자기가 내려와서 ‘그걸 먹어라’ 할 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하고 먹었습니까? ‘못 먹습니다.’ 했죠? 그걸 뭐를 갈망한다? 바로 구원과 천국에 대해서 베드로가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한번 정리해 보면, 천국과 구원은 내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명과 임무와 역할 제공이라는 과정에 동참시키는 그 메카니즘의 하나하나가 구원을 받는 여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내가 저 더러운 것을 안 먹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이제 내 포켓에 담을 수 있는 물건처럼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야, 너 먹으라 하는 것은, 너 구원 문제가 아니야.’ 너가 전도해야 될 뭔가 숨어있는 하나님께서 선택해 놓은 고넬료를 만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용도로 한 거예요. 그게 하나의 뭐가 되요? 하나의 목적이 아니고 과정으로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장 한나 같은 경우에 첼로 했죠? 첼로 할 때 부모가 어릴 때 뭐라 했습니까? ‘니가 이번에 상 타면 니는 최고야, 니는 천재야,’ 이런 식으로 목적의식을 집어넣어 줬잖아요. 그러니 장 한나가 하버드 철학과에 입학했죠? 뭘 배웠겠습니까? ‘아하, 음악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소리로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거구나,’ 하나의 과정이죠. 장 한나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이것이 철학적인 의미와 음악을 결부시키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봉사하기 위해서, ‘아름다움이 여기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에 푹 빠져 돈 밖에 모르는 인간들아, 음악은 이렇게 여러분들의 영혼을 정화하게 만들고 순수하게 만듭니다.’ 라는 그 사명감을 가지고 그렇게 뛰는 거죠. 늘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나중에는 그것도 허무라?걸 알 때가 와야 되겠지만, 어쨌든 음악이든 뭐든 간에 하나의 남에 대한 희생과 봉사이죠. 모든 직업이라는 게 어떤 모든 직업도. 애 낳는 것도 애 낳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애를 어떤 선에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 엄마가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그렇게 하죠. ‘난 우리 애한테 관심도 없었고 그냥 팽개쳤는데, 지가 알아서 잘했어요.’ 보통 그렇게 이야기 하죠. 그러나 남들 보기에는 지가 알아서 그렇게 잘 했는데, 그 아이의 마음속에 엄마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 쓰는가를 애는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이만큼 될 때까지 ‘엄마는 얼마나 나를 위해서 애썼다.’ 아니면 ‘엄마는 소홀했다.’라는 것을 자식은 어떤 경우에도 잊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나중에 자식이 엇나갈 때 잘못된 길로 갔을 때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엄마의 전화 한 통화가 감동을 주죠.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가 자기 되는데 기여 했으니까, .‘ 남들은 말이야, 니들이 나한테 뭘 해줬다고 나한테 간섭을 해?’ 라고 선생도 치우고 교회 목사도 치우지만 진정으로 고생을 같이 한 사람은 늘 배신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나쁜 길로 갈 시점에 갑자기 엄마의 음성이 들린다든지, ‘아, 이러면 엄마가 싫어할 건데,’ 그런 음성이 들리는 거,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 하나의 목적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뭐가 아니다? 소유가 아니다. 하나의 친구와 함께 같이 길을 통과하는 과정이다. 과정을 가면서 우리는 항상 자기 잘난 맛에 ‘아닙니다. 못 합니다. 못 하겠습니다. 내 수준에 안 맞습니다.’ 라고 이런 식으로 계속 가지만, 주님 가신 것은 십자가의 길로 ‘니가 하기 싫은 것도 니가 원치 않는 길도 동행하는 것 때문에 너도 이 일을 할 수 있어. 너무 니가 수준 높게 놀지 마. 너는 아무리 수준 놓고 높아도 이런 일도 할 수 있어. 왜?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라고 수준 낮은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우리가 교만 떨었고, 오만하게 살아오면서도, 구원을 논하고 사랑을 논하고 천국을 논했는가를 날마다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이 사건입니다.


그래서 고넬료를 만났죠? 24절에 가이사랴에 가니까 고넬료가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절했습니다. 28절에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 야, 여기 참, 중요한 단어가 나오네요. ‘위법’이라고 나와요. 위법(違 어긋날 위 法 법 법)이니까 법을 위반한 거잖아요. 그러면 위법은 법이 있잖아요. 법을 뭐라 부를 수 있느냐 하면, ‘권력’이라 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법을 논하면 안 돼요. 꼭 법을 논할 때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어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웠다. 내가 가서 ‘담배 피우지 마세요.’ 하면 안 먹힙니다. 왜 안 들어 줄까요? 내 말이 법에 위반이 될까요? 아니잖아요. 맞잖아요. 그런데 왜 안 먹힙니까? 지난번에 식당에 가서 옆에 담배 피우는 거 봤죠? 그래서 우리가 일찍 나왔잖아요. 보건법에 의하면 담배 몇 미터 안에서는 담배 못 피우게 돼 있어요. 왜 내가 말하면 안 들어 줍니까? 그런데 만약에 경찰관이 옆에 서서 ‘실례합니다. 담배 피웠습니까?’ ‘담배 피우지 마세요.’라고 말 안 해요. ‘담배 피웠습니까?’ 하면 ‘어이, 경찰관이 출두해서 나한테 알려주지,...술 한 잔 하다 보니,,,’ 얼른 버리죠. 똑같은 문장인데 똑같은 한국말인데 먹히고 안 먹히고 합니까? 뒤에 뭐가 있습니까? 권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위에서 뭐가 내려왔다? ‘먹지 마라, 먹어라.’하는 그 보자기가 내려왔죠. 보자기가 결국은 하나님이 만들어 준 보자기지만, 결국 그 보자기는 하나님께서 왜 만들었습니까? ‘베드로야, 지상에 아직도 권력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니가 아직도 전도에 나서고 있다.’는 그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현재 나는 그들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 기존의 권력을 쥐고 있는, 유대 땅 경찰이죠. 유대가 종교 나라니까, 종교적으로 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그쪽에서 베드로가 다가가면, ‘내 맘대로도 못하고 복음도 못 전하니까 내가 양보 타협을 해서 이방인들을 만나는 것은 조심을 해야 되겠구나,’ 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이미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걸 누가 노출 시켰습니까? 들통 냈습니까? 주님께서 그걸 일부러 발각시킨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경우 많습니다. 어느 집에 가서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그 집이 불도가 심한 집안이다. 그럴 때 ‘불도 집안이니까 내가 말을 조심해서 둘둘 돌려서 하고 직접 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느 순간 그만 내질러 버리죠. 집에 와서 약을 먹든가, 그런데 왜 내질렀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주님께서 함께 동행 하게 되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게 만들고 ‘니 속에서 말하는 이는 곧 누구다?’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하나의 역할로 ‘내가 이렇게 하면 이익이냐, 손해냐,’ 분주하게 죽을 때까지 따지지만, 그 따지는 것을 초월해서 따지기 전에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말이죠.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해서는 엉망이 되었든, 좋게 되었든, 나중에 조용히 인사를 받든지 결과에 관계없이 본인이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아, 세상만사의 발걸음 같은 이것이 내 뜻대로 내가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나를 다루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거 하나하나를 알 때가 은혜가 더 뿌듯해지죠. ’야, 내가 스스로 내가 나를 조종해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구나, 내 인생이라는 게,‘


그래서 위법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불러서 왔다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이 이야기를 왜 끄집어냅니까? 베드로는 뭐까지 계산합니까?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신학적인 문장을 그대로 되풀이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느꼈던 거, 자기가 경험했던 것까지 전부 다 포함해서 전하는데 다 적어져 있어요. ‘내가 이렇게 해서 깨졌다는 거, 나 이렇게 해서 잘났다가 아니라 이렇게 해서 훌륭하다가 아니라 나 이렇게 해서 주님한테 혼쭐났다. 그래서 내가 잘나서 전도하는 아니라 나도 이렇게 죄인입니다.’를 겸하여 증거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사도행전 10장에서 쭉 찾아볼 수 있어요. 그래서 자기의 그 이야기가 34절까지 쭉 나오죠.


그 다음, 35절 봅시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것은 착한 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도라면, 남들 다른 문화보기에 잘못된 게 아닌가, 틀린 것이 아닌가, 생각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의를 올리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죠.


자, 여기서 한번 주의하고 넘어갑시다. 미드라는 사회학학자, 인류학자인데 이 사람은 인간을 ‘I'와 ’ME'로 나누었어요. I(나는) ME(나를)로,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ME가 뭐냐 하면, 대외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나를 ME라고 해요. ME라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나를 ME라 합니다. ‘넌 누구야?’ 하면 ‘저 이러 이러한 사람 이예요.’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뭐냐? 이것은 대외적이고 사회적이고 관계없이 인간의 욕구와 욕망에 의해서 굳어지는 나를 ‘I’라 합니다. 그러면 ME는 나를 보여주기 나인 반면에 I는 내가 홀로 있을 때, 내가 상대하는 나, 그러니까 남하고 대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점잖 빼죠. 그런데 난 나하고 상대할 때는 굉장히 극렬하고 사납고 그렇다 말이죠.


어떤 남학생이 있는데 이웃집에 이사 오는 것을 보니까 세상에 자기 또래의 여학생이 이사를 왔다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2층에 있는데 그 여학생이 2층에 올라왔다. 자기 방에 불을 꺼놓고 그 여학생 방을 보고 싶어 하죠. 그런데 그게 뭡니까? 남의 방을 보는 것은 나쁘다는 것을 알죠? 지금 방에 누가 있습니까? 엄마 아빠가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 밖에 없는데  행동이 왜 주저주저 하는 겁니까? 자기밖에 없는데 행동을 왜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하는 겁니까? 누가 자기 행오?자제 시키고 누가 격렬하게 다투게 만들어요? 자기 내부에 자기가 두 개가 된다고요. 이 ME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이미지니까 이것은 위장하면 돼요. 나는 속일 수 있어요. 속일 수 있는 게 아니라 늘 속이죠. 자기 중에서 나쁜 건 자제하고 좋은 건만 골라서 편집해서 남한테 보인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나는 나를 속일 수 없는 거예요.


바로 이 I와 ME를 나누느냐 하면, 이건 베드로에게 뭐가 왔습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보자기채로 왔죠. 왔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ME를 칩니까?  I를 치는 거예요? I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나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랍니까? ‘나는 착하다’고 하죠. 이 말이 뭐냐 하면 이 말이 어려워요. 베드로가 하나님을 대할 때, I로 대하기를 바라는데, 자기는 습관이 뭐냐 하면 자기 빼고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누구든 뭐로 대합니까? ME로 대하게 돼요. ‘주여 저는 깨끗합니다. 왜 이런 더러운 걸 먹으라 보냅니까? 주님 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깨끗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ME 말고 I, 너 말이야, 너.‘ 너를 뒤집어 버리죠. 뒤집어버리면, 직삼각형을 뒤집어버리면, 꼭지 점이 밑에 내려가니까 아슬아슬하죠. 불안정하죠. I는 프로이드에 의하면 항상 내부적으로 편집하고 정치적으로 편집해서 안정성을 유지하지만, 안정성을 상징 계(라캉)라 하는데, 하나님은 이 안정된 이걸 어떻게 합니까? 이걸 꼭지 점을 밑으로 해서 항상 불안하게 만들어 버려요. 사실은 이 꼭지 점이 없어요. 사실은 이 자체가 구멍이 되고 말아요. 아무것도 없어요.


쉽게 말해서 자아를 본인이 모르고 그때, 그때마다 상황 따라서 항상 자꾸 구성을 하는데 구성한 이것이 허무해요. 내 몸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누군지를 평생 살아도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누군지를 알아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만 알면 돼요. 우리는 예수님, 하이카가 다 알아서 다 해주니까. 차타고 가다 고장 나면 하이카가 알아서 다 해주지, 내가 알아서 고치고 땜질하고 뜯어고치다 사고가 더 납디다. 그래서 주님한테 버티다가 더 깨지고 나중에 천부여 손들고 또 오잖아요.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그 노래 생각하니까 우리 엄마 생각이 나네요. 연말 되면 그 노래가 생각나요.


주님께서는 너가 따로 정립한 너가 나한테서는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왜요? 내가 나한테 정립해 버리면 정립했다는 그 과정이 나에게 의로움이 돼요. 자기 의가 된다고요. ‘주여 저 이런 인간입니다.’ 하고 실실 웃으면서 그렇게 나온다고요. ‘제가 오늘도 2명이나 전도했습니다. 저 이런 인간입니다.’ 2명 전도케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셨는데, 그걸 근거로 해서 자기가 훌륭하다는 자아정립의 재료로 그것을 가져와 버려요.


주부가 자식 키울 때, 자식이 말을 잘 들을 때는 엄마가 기뻐해요. 그런데 엄마는 알아요. 저 애가 언제까지 말을 잘 들을 애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다만 감사할 뿐이죠. 지금은 아직 소강상태고 요행히 사건이 없고 학교에서 말썽이 없어 좋구나,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를 모른다 이 말이죠. 하지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온전한 애가 되기 위해서 목적을 당겨서 채집하지 말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그게 인생이라는 거죠. 앞으로 그 애가 어떻게 되고 재하, 재원이가 어떻게 되는가를 미리 당겨서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부대끼고 움직이고 싸우고 뛰고 하는 그 자체가 이게 바로 주께서 주신 인생입니다. 과정 자체가 인생 이예요. 미리 당겨서 마치 하늘의 별을 딸 것처럼 하는데,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들, 들어보세요. 기쁘죠. 몇 개월 안 갑니다. 산더미처럼 밀려드는 업무량과 외부에서 사법고시 합격했다고 동네방네 끌고 다니는 친 인척들의 꼴 보기 싫은 거, 사법고시 합격자답게 처신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부담감, 이런 것은 말할 수가 없어요. 이런 것은 ME는 몰라요. I는 알아요. 본인은 알아요. 이게 암, 좋다 하는 것,


검사라는 게 ME 실 이예요. 검사라는 ME가 KTX타면 아주 운전사가 부러워하고 하지만, 검사들끼리 모인 직장, 검찰청에 가 보세요. 이 ME는 뭐라 합니까?  쫄다구로 侮杵底?온갖 험한 일을 다 해야 돼요. 그 안에서는 자기가 ‘검사네,‘ 하는 이런 것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정직해요. 일 못 하면 자격도 박탈당합니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못 치면 피아니스트 말 들으면 안 돼요. 바이올리니스트가 바이올린을 못하면 바이올린을 하라 마라 하지 말아야 해요. 실력이 없으면 내용물이 없으면 껍데기는 소용없는 게 자본주의는 용납을 안 해줘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하나의 자본주의적인 멋진 이익이기도 하지만 비참하기도 하죠. 왜냐하면 초반에 한번 회사나 조직에 어떤 큰 기여를 하게 되면, 승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승진 자체가 이게 인생 완료가 아니고 그 값을 해야 되거든요. 과장되면 전에 있는 성과, 인사성과를 내야 되는데, 과장은 됐는데, 평사원보다 더 성과를 못 낼 때는 조기 퇴직해야 되죠. 왜?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잖아요.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데,


이건 목사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신앙생활 해야 돼요. 신앙생활 뭔지 알아요? ME를 포기하는 것, 목사에서 ME가 뭡니까? 목사직이잖아요. 이걸 포기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 뭐로 나타내야 합니까? I로 돌아서야 되죠. I로 돌아서면 아슬아슬한 꼭지 점이 밑에 있으니까 아슬아슬하잖아요. 아슬아슬하면 누굴 의지해야 돼요? 오직 누구를 의지해야 돼요? 자기 힘으로 설 수 없으니까 누굴 의지해야 돼요? 주님만 의지해야 됩니다. 이것이 목사의 신앙생활 이예요. 그냥 주님만 의지해야 돼요. 교인이 오든 안 오든 신경 쓰지 말고 ‘주님, 오늘 뭘 할까요?’ 이것만 신경 써야 한다고요. 이게 바로 신앙생활 이예요.


그런데 일반 교인들은 목사의 목회가 신앙생활처럼 그렇게 오해하면 안 돼요. 목사가 그렇게 위장을 했어요. ME를 마치 I처럼 동일시했거든요. 설교 잘 하면 설교 잘하는 걸로 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설교 시간에는 ME가 나오면 안 되고 목사는 목사(ME)로 서되 뭐가 나와야 돼요? ME를 부정하고 ME는 죄라고 이야기하고 뭐가 나와야 됩니까? ‘나는 주님 아니면 이래도 이만큼 살아도 이만큼 신앙생활 해도 난 주님 아니면 나는 도저히 못 살겠어요. 나 이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라는 말을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증거 해야 합니다. ’여러분, 수천 명 교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이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게 나와 줘야 돼요. 그런데 목사가 I가 아니고 ME로 나와 버리면 ’이 교회는 내가 이만큼 선교해서 무릎 닳도록 기도해서 이만큼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내 그늘 밑에 내 권력 밑에 2010년에 그런 것처럼 2011년도에도 내 권력 밑에 있으세요.‘ 하겠죠.


이것이 베드로가 오해했던 바로 뭡니까? 법이라고 해요. 베드로는  법을, 이 권세를 주께서는 ME에서 I로 바꾸면서 이 권세도 날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니는 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니가 소유한 권력이라든지 소유한 법 같은 것은 니한테는 하등 남아 있으면 안 된다.’ 는 거죠.


그러니까 목사직을 목사가 소유하면 안 돼요. 그러면 그것이 ME가 돼요. I가 안 되고 ME로서 행세하게 돼요. ‘나는 주님뿐인데, 주님만 의지합니다.’ 이래 돼야지, ‘나에게는 교회라는 게 있습니다.’ 하고 있어 버리면 이건 하나의 권력이 돼 버려요. 권력이 돼 버리면, 상대방은 그 권력 따라서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법이 나오죠. 법이 나와 버리면, 천국은 뭐가 없는 곳입니까? 법이 없는 곳 이예요. 그래서 제가 항상 말하는 것이 교회가 노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하는데, 교회가 히히덕 거리며 노는 거 좋아하게 되면, 거기서 뭐가 없어지냐 하면 천국과 구원의 의미가 거기 농락당해요. 노는 게 우선인 입장에서 천국과 구원이라는 것이 아무 연결점이 없거든요. 논다는 것은 이미 넉넉하게 뭐했다? 소유했다는 뜻 아닙니까? 이미 논다는 것은.


사실 연말 망년회, 이걸 간단하게 말해서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12월 31일 해와 1월 1?해가 차이가 없죠? 설문 조사 하면 별 차이 없죠. 그 해가 그 해니까. 성분 조사 해 보면, 그러면 또 설문 조사 해 봅시다. 12월 31일 날 나의 패하고 1월 1일 날 패하고 두 패가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렇다면 망년회가 왜 필요 하냐, 망년회를 왜 5월 6일에는 왜 안 하느냐, 7월 5일 날 왜 망년회를 안 하죠? 12월 31일 날 망년회 한다고요. 망년회는 끊는 거잖아요. 2010년과 2011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는 게 아니고 일단 끊고 넘어가자 이 말이잖아요. 왜냐, 해가 다르니까, 1월이니까 해가 다르니까 끊고 넘어가자, 이 끊고 넘어가자는 요 이미지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여기까지는 이 해이고 이후에는 다른 해라는 이미지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세포도 동일한 세포고 모든 게, 해도 달도 별도, 달도 망년회 안 하거든요. 별도 망년회 안한다고요. 예수님도 망년회 안 해요. 예수님도 신년 예배에 참석 안 합니다.ㅎ


그런데 왜 이렇게 하는 겁니까? 이것은 내가 들여놓은 이 구획, 구획이라는 말 알죠? 끊는 것, 내가 정해 놓은 구획을 정당화 하는 거예요. 이건 무조건 옳다는 거예요. 내가 12월 31일부터 1월 1일을 끊는데 내가 끊는 이 행위는 무조건 옳은 거야, 정당한 거야, 하면서 선수치고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왜 정당하냐 하면, 내가 끊었으니까, 그러면 당신은 뭘 끊었는데? 2010년도와 2011년도를 내가 끊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2010년와 2011년도의 시간의 흐름은 누가 갖고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 시간을 소유한다 하니까 여러분 생소하게 들리죠? 민족들마다 시간이 달라요. 다르다는 말은 그 이미지를 각 민족마다 각기 달리 소유하고 있다는 거예요.


저 멕시코의 원주민들, 아즈텍 문명의 시간이 다 달라요. 66 2개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12주기잖아요. 다 달라요. 그래서 아즈텍에 의하면 2012년 10월 2일 날 그쪽 달력에 의하면 세상 멸망당합니다. 요새 그것도 유행합니다. 펀드 넣은 것 있으면 대충 정리해야 돼요. 미리 빼서 맛있는 거 사 잡숴야 돼요. 세상 주기가 민족들마다 달라요. 그러면 예외는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 민족이 만들어 낸 것은 무조건 정당하고 무조건 우리 시간을 해가 지고 뜨는 것을 시간으로 만들어 놓고 그 만들어진 시간을 누구 소유?, 내 소유, 누굴 위하여? 바로 나를 위하여, 여기 ‘나’라는 것은, I가 아니고 ME를 위하여, I는 지가 누군지를 몰라요.


이래서 정체성의 사회학,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주는 것이다. 사회가 하라 하는 대로 거기에 맞춰 살다 보면 그것이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예요. 좋은 가정과 나쁜 가정이 아이 상황이 다 다른 이유가 그 가정이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까지를 정리해 보면, ’나는 어두운 세상의 작품이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2장 4절에 ’우리는 세상 신에 의해서 진노의 자녀‘ 우리는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무슨 뜻입니까? 우리 아비는 마귀였다. 뭔 뜻입니까? 어두운 세상이 뽀루지 나는 것, 종기 나는 거죠. 어두운 세상에 툭 불거져 나온 것, 이것이 바로 ’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다.’ 모친의 죄 중에서 뾰루지가 났죠. 그럼 최고의 모친은 누굽니까? 하와, 부친은 누굽니까? 아담이죠. 결국 아담의 사건이 지금까지 계속 '나'라는 뾰루지를 하나의 동기로 붉어지죠. 지금도 갇혀 있는 겁니다. 죄 짓는 I와 ME, 여기서 우리는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제발 부탁인데 빠져나오지 마세요. 왜? 구원은 내가 알아서 빠져 나와서 절제해서 자기가 정갈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주의용서의 능력으로 우리가 십자가 피로 구원 받는 겁니다. 절대로 빠져 나오지 마세요. 죄~~ 안 지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어떻게 살아도 ME와 I를 속이면서 나를 속이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평생 우리의 본 모습 이예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