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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역대기 <제 5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09겨울(역대기)

역대기 <제 5강>

정인순 2011. 2. 1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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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2009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 : 이 근호 목사)

역대기 제 5강

 

역대상 10장 14절에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므로 저를 죽이시고 다윗에게 나라를 돌리셨’기 때문에 그 말속에 다윗은 늘 여호와께 물었다는 거예요. 죄를 안 지었다가 아니고 다윗은 완벽했다가 아닙求?

 

‘나는 주가 아닙니다. 내가 나의 구원주가 아니고 예수님이 나의 구원주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구원주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아가 내 자아를 건지는 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말이 좀 복잡하지만 복잡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 믿을 때는 예수 믿는 척 하기 위해서 예수를 잠시 이용하다가, ‘예수 믿었다’는 소리를 듣고서 부터는 예수는 차버리고 예수 믿은 자아가 예수를 대신해서 모든 절대자의 자리에 올라가요.

 

그게 지난시간에 말한 ‘옳으니이까?’ 라고 나서는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옳고 그름을 이제는 우리 차원에서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네가 뭔가를 옳게 해도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고 나쁜 짓을 했다 해도 그것은 원래부터 옳은 것이 아니었고 옳고 그름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겠다.’ 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의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다.’ 했잖아요.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 말 아닙니까?

 

마태복음 9:10-13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내가 옳게 행동을 했습니까? 그르게 행동을 했습니까?’ 라고 신경을 쓰는 것 자체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함으로 사울이 멸망했다면 앞으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을 보라는 말입니다.

 

사울은 여호와께 묻지 않았는데, 즉 그 나라를 자기 것으로 여겼는데, 그 나라를 인계받은 다윗은 ‘잘했다’가 아니라 항상 여호와께 나아가게 되고 여호와쪽에서 누군가 오게 되고,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누군가가 온다는 그 누군가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끊임없이 찾아오는 겁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입니다. 이게 구약의 특징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람이 올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구약의 특징인데 신약은 성령이 찾아와서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도 없고, 성령이 그 사람 속에 계셔서, 네가 그래서야 되겠느냐’(요일 2:27) 하고 말씀 가지고 따지시고 물으시잖아요. 지옥 보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백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꾸 이점에 대해서 오해하는데, 말씀대로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는 뭐고… 이런 식으로 말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관심이 없으면 아예 사울처럼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지 마세요.’ 라고 하나님을 밀치는 것이 된다 이 말입니다.

 

자기 쪽에서 밀치더라도 밀리면서 말씀으로 또 와요. 아까 본 그 그림(다윗을 정상으로 보고 아담에서 다윗까지, 그리고 다시 다윗과 솔로몬을 경유해서 내리막길로 북쪽과 남쪽의 왕들과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과정을 산의 모양으로 그린 것)에서 역대기가 분량이 많은데 ‘아담에서 다윗까지’ 할애되는 장수가 불과 열장입니다. 11장부터는 곧바로 다윗으로 넘어가서 계속됩니다.

 

저는 강의진행을 10장에서 잠시 멈추어서, 다윗에서부터 내리막길(멸망)을 가는 부정적인 사람들을 살펴서 그것을 대체하는 이 거대한 산봉우리,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부정적(벌받는것)인 것을 통해서 알아보자는 겁니다. 내리막길은 또 짧고 아주 급하게 내려가는데 마지막 왕 세명에 대한 기록은 몇 줄 되지도 않습니다.

 

역대하 9장 끝부분 31절에 보면 “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부친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기 보면 “그 부친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역대기가 참 재미있는 것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죽어서 어느 묘실에 묻혔느냐, 그것이 자기 운명을 확정짓는다는 말입니다.

 

죽음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서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떤 죽음 속에 편입되느냐, 어떤 죽음 속에 합류되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에 합류되면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 참여하게 되고, 그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합류된적이 없는 사람은 그냥 겉돌듯이 산 사람, 톱니가 맞물리지 않아서 그냥 헛돌듯이 살아간 셈이 된다는 겁니다.

 

역대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역대기는 이미 열왕기서를 다 아는 상태에서 재편집을 하거나 가필했다’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 쪽에서 그런 소리들을 많이 하고 그들은 성경을 아예 역사책으로 바꾸려고 드는데 그 점을 잠시 언급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역대기나 열왕기는 역사책이다.’ 라는 주장을 하거든요. 저는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역대기나 열왕기가 역사책이 아닌 이유는, 역대기 열왕기가 하나님의 언약인데, 언약이 어려우면 약속이라고 하고, 새끼손가락 걸고 하듯이 약속인데, 그 약속은 일반 민중들, 백성들은 빠지고 그 백성들의 대표가 된 왕이라는 자와 진짜 왕이신 하나님과 체결된 이것이 바로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체결할 때 죄인의 자격으로 체결하기 때문에 죄인 같으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데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서 언약을 맺었다는 말은 결국은 죄인된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드러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 다 같은 말인데 이런 것을 드러내는 데는 죄인만큼 적절한 것이 없어요. 아버지가 가락지를 끼워줄 적합한 아들은 집에서 함께 늘 농사짓고 말 잘 듣던 큰아들이 아닙니다. 가락지의 가치가 계속 남아 있으려면 다 털어먹고 집에 들어온 둘째아들 탕자입니다. 그가 집에 들어온 모습은 이렇게(고개 빳빳이 세우고)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왔습니다.

 

아버지가 와락 껴안지요. 그런데 아들이 하는 말이 ‘저는 아들이 아닙니다. 그냥 종으로나 써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그때 가락지 끼우고 새 옷 입히고 한우, 순수 국내산 한우 잡아서 잔치 벌이고 동네방네 알리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자비와 용서가 드러날 수는 또 없잖아요. 그렇게 되려면 평소에 말 잘 듣고 농사 잘 짓던 큰아들보다 집나갔다가 들어온 탕자가 아주 적절한 거예요.

 

그 말 듣고는 이제부터 탕자 하겠다고 교회 안다니고 나이트클럽에 간다든지 그런 식으로 하지는 마세요. 왜냐하면 집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죄인입니다. 집에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는데 그것보다 더 탕자가 어디 있어요? 꼭 재산 날려야 탕자입니까? 가만있어도 주님 돈 아니고 자기 돈이라고 우기면서 살고 있는데 이미 탕자로서 살고 있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명령이 아니고 규범적, 신분적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명령을 지킬 때 구원하겠다.’ 가 아니라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되었기에 이런 명령들이 사후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이 말은 아무에게나 해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남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만 하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백성들, 민중들은 배제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백성들은 이미 왕을 구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의 운명은 왕에게 다 맡겨져 있고 왕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혜택만 입을 뿐입니다. 그러면 왕은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혜택을 입기 때문에 왕이 만약에 제대로 약속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받으면 야베스의 기도대로 복을 받습니다.

 

 

복을 복(복의 제곱, 곱빼기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은 고스란히 왕의 백성들에게 전달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처럼 온전한 죄인이 될 죄인이 인간 속에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분명히 죄인인데 그 죄인을 대표해서 제대로 죄를 보여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가서 제대로 저주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히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 세례를 받은 불세례에 의해서 아버지께 버림받죠.

 

 

보통 일반인들이 십자가를 지게 되면 십자가를 지면서 투덜투덜 할 것이라는 말이죠. ‘WHY ME? 왜 하필 나입니까?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는데 내가 그 고생을 해야 합니까?’ 어렵게 목회하는 분들 참 ‘WHY ME?’ 많이 합니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라는 가수가 목소리 저음으로 깔아서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필이면 왜?’ 그것은 부잣집 아낙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화장발이 안 받습니까?’ 이런 식으로.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은 아무리 ‘제가 순교를 하겠습니다.’ 해도 항상 ‘왜 하필이면 접니까? 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내가 고난을 받아야 됩니까? 억울합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님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쏙 빠지고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잔혹한 크리스마스입니다. 메리크리스마스, 흥겨운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위험한 크리스마스입니다. 폭력이 난무합니다. 술 먹고 난장판 벌이는 폭력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핍박받는 크리스마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여, 이 잔을 제가 마시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냥 지나가면 좋겠는데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제가 이 쓴잔을 마시겠습니다.’

 

 

유일하게 그 쓴잔을 마신 분이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윗이 있던 그 자리에 죄인의 입장에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저주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는 묻는 것이 아니고 다윗언약 안에 들어 있는 절규, 시편 22편에 있는 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거죠. 여러분은 다윗이 왕되었다고 좋아하지만 시편 22편에 보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그렇게 기도하죠.

 

 

시편 22: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때에 들으셨도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것이니 주를 경외하는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다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그 만큼 다윗은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자꾸 사울에게 쫒기는 거예요. 분명히 자기는 그냥 바른 말을 했고 옳은 일을 했을 뿐인데 마구 창이 날아듭니다. 안 피했으면 그냥 꽂혀 죽었습니다. 더 약을 올리는 것은 사울의 말이 ‘차라리 네가 밉다. 그래서 죽이고 싶다.’ 그러면 차라리 괜찮은데 ‘다윗아, 다윗아, 네가 장차 이 나라를 이룰 것이다. 내가 잘못했다. 너같이 훌륭한 임금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악신이 들려서 그럽니다. 악신이 들리면 자기 몸도 자기 맘대로 못합니다. 악신이 들리면 순간적으로 창을 들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찍어야 됩니다. 부부생활에 있어서 20년, 30년 잘 지내다가 한순간 말 한마디 삐딱해 버리면 ‘그것이 바로 너의 본심이지.’ 이렇게 나옵니다. ‘너, 나 갖고 놀았지. 네가 나를 이용했지.’ ‘그것은 오해야. 오해.’ 그렇게 해봐야 소용없어요. 한순간에 삐지는데 그 순간 악신이 들려서 그렇습니다.

 

 

십수년간 잘 살다가도 한 순간에 오해가 들어와 버리면 그간 살아온 것이 다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아무리 인간이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살았습니다.’ 해도 막상 십자가에 올라가서 주님 앞에 항변해버리면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영화)을 보면 그 내용이 이래요.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 보니까 겁나는 거예요. 그래서 살려달라고 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마리아를 데리고 프랑스 리용지방으로 가서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그 자식들 속에 예수의 DNA가 들어 있는데 그 피가 바로 예수님의 성배이고 그 성배를 찾는다는 것이 다빈치코드의 이야기입니다. 그 코드이야기가 사람들이 언약을 역사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겁니다. 역대기(성경)가 언약인데 언약을 역사로 바꾸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에 역대기를 언약으로 봐버리면 민중들이 소외됩니다. 왕과 하나님, 혹은 선지자와 하나님하고 이야기를 하지 백성들의 권리 같은 것은 다 소외된다는 말이죠. 민중들의 소원과 권리를 다 빼버리니까 근대주체사상에 의해서 개개인의 가치를 존중하고 우선시하는 이시대에 성경이 설득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현대성경신학자들의 고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언약책을 해체시켜서 역사책으로 봐버리면 ‘옛날에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들이 민중들의 애환과 고통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봉사한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 받은 우리 성도들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에 눌린자들, 억울한자, 고아, 과부등 이런 자들을 위해서 분투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라고 보게 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기억이 나지요?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책에서 해체시켜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재해석을 가해야 된다.’ 고 주장하고 그렇게 주장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정복설, 침략설, 쿠데타설등 온갖 이론들이 나오고 난리를 피웁니다.

 

 

“땅에 있는 민중들이 홍해를 건너오는 합비루 사람들의 기를 받아서 도시민에게 억눌렸던 노예들이 ‘야, 여호와가 그런 사람들이구나. 억눌린자 약한자를 돕는 하나님이구나. 저기에 붙자. 저기 붙어서 도시의 귀족들을 쳐부수고 이제는 우리에게는 왕도 필요 없는 이상적인 공동사회(공동체)를 만들자’라고 해서 생겨난 것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다.” 라고 그렇게 가르쳤고 그 가르침이 신학교에 있는 모든 교수들이 한결같은 주장입니다.

 

 

이런 식으로 학문을 하지 않으면 박사학위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두가지 역사 인식이 나오는데 하는 신명기 역사인식이 나오고 또 하나는 역대기 역사인식이 나온다. 이게 서로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신명기역사란 신명기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 사사기 …, 이렇게 죽 나오는데 이것은 민중들을 위한 것이고 역대기란 것은 다윗(유다가문)의 정체성을 위해서 새로 편집한 것이다.’ 라고 설명하니 신학생들이 혹합니다.

 

 

‘야, 이것은 교회에서 부흥회 할 때 못 듣던 이야기이고, 기도원에서 기도원원장조차 몰랐던 이야기인데 이런 것도 몰랐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특수한 단체가 되어서 대중들, 민중들 개인의 주체의식 필요 없어요. 그들이 기껏 구한 것이 왕이었고 왕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감사할 때, 그 나라가 자기들의 나라가 아니라 언약의 나라, 다윗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으로 이어지지요.

 

 

만약에 역대기를 역사책으로 봐버리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민중의 나라가 되어 버리고 여기는 하나님도 필요 없는 자기들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역사라는 것은 그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가 인간개인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관점이 르호보암 시대부터 죽 나온다는 말이죠. 언약, 곧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역사만들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사람이 혼자 있을때는 상상으로라도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 다 되는 것 같을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둘만 생겨 버리면 여기서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 생겨나지 않고 타인의 욕망인데,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타인이 없고 혼자만 있을 때는 자기가 상상한 이미지, 자아이미지를 가지고 ‘나는 아마 이런 인간일 것이다’ 했는데 타인이 하나 등장해 버리면 ‘나는 저와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가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방향이 하나 더 나오면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깁니다.’ 라고 하든지 아니면 ‘왜 나는 저 사람처럼 그런 인생이 못됩니까? 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조실부모하고 왜 내 인생 이 모양입니까?

 

 

지난 중고등부 잠언설교를 할 때 이런 본문이 나왔습니다. 잠언에 부자와 가난한자 양쪽다 지으신 분이 누구라고 했습니까?(잠 22:2) 하나님이죠. 그러면 부자가 뭐라고 기도하냐면 ‘하나님, 제가 이렇게 부자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지요? 이게 성경말씀이고 그래서 제가 부자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고 참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절대로 가난한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요.

 

 

‘하나님, 제가 가난하게 된 것이 주님의 뜻이 맞지요? 그래서 제가 빌어먹게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가난한 그 사람이 부자를 한 단계 거쳐서 하나님 앞에 따지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성경대로 제가 가난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습니다. 씩! 씩!(분통터져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씩씩거리면서) ‘내가 지금 인간성이 좋아서 성경말씀 믿어주지 다른 사람 같으면 안 믿어줍니다. 내가 너무 믿음이 좋기에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계속 씩씩거린다).’ 이미 한 단계를 더 거쳤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감사하는 척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기도하는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여, 제가 저 가난한자와 같이 되지 않고 부자 된것이 주님의 뜻 맞지요?’라고 기도한다는 말이죠.

 

 

그 부자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는가 하면, 만약에 이 부자가 졸지에 가난한자가 된다면 ‘저는 제가 가난하게 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난 지금 가난할 뿐이고!’ 그렇게 나올 거라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잠언서를 지킬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부자 되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한다기 보다는 가난하게 되면 안 된다는 그 두려움이 수시로 올라오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교인들이 하나 와도 걱정이고 안와도 걱정입니다. 교인들이 하나도 없으면 가난하게 되니까 감사가 안 되고 막상 오면 그 교인은 두 번쯤 나오고 그 뒤로 안 올까봐서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역대하 10장부터 할텐데 여기에 나오는 여로보암을 비롯한 많은 왕들 욕하지 마시고 ‘반갑다. 친구야!’ 하고 악수나 하세요. 그들이 하는 일들이 어쩌면 우리보기에 더 솔직하고 순수 할 수도 있습니다.

 

 

교재 제일 마지막에 사람 몸통같은 도표(열왕과 선지자들)가 나오지요. 열왕기서는 ‘르호보암시대에 어떻게 여로보암시대에는 어떠했다’는 식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증나게 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의 주제가 선지자가 양쪽의 왕들을 어떻게 양발차기 하고 있느냐, 거기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들이 그 나라를 자기들의 나라라고 하지만 자기들의 나라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일방적으로 자기의 나라라고 우기는 말도 안되는 짓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르호보암은 여호와의 존재감을 삼 년 만에 상실했습니다. 그때부터 자기세력을 더 넓히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이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기 때문에 제가 무력으로 저 북쪽을 치겠습니다’ 할때 스마야 선지자가 말렸습니다(역대하 11:1-4, 왕상 12:21-24).

 

 

여로보암왕은 북쪽의 왕입니다. 북쪽이라고 하니까 잘 감이 안오시니까 (그림 4)의 지도를 보시고 도표(열왕과 선지자들)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림 4)에서 유다, 베냐민으로 표시된 지역만 남쪽으로 보고 나머지는 다 북쪽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10지파 : 두 지파로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8:2니까 게임자체가 되지 않고, 우리나라 같으면 유다가 야당이 되는 겁니다.

 

 

이런 판국에 유다가 본토를 주장하니까 북쪽에서 보기에는 웃기는 일입니다. 여로보암은 단(북이스라엘의 북쪽경계)과 벧엘(북이스라엘의 남쪽경계)에 단을 쌓아서 자기백성들을 단속했습니다. 제사장 자격도 없는, 레위인 아닌 일반인들을 제사장 세워서 민중들의 종교적 욕망을 해소시키는 식의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여로보암이 르호보암하고 전쟁을 못하고 그 아들인 아비야하고 전쟁을 했는데 그 아비야의 군대 40만과 여로보암의 80만군대가 붙었습니다.(대하 13장) 누가 이겼겠습니까? 아비야의 40만 군대가 여로보암의 80만 군대를 이겼는데 무려 전사자만 50만입니다.(대하 13:17) 요새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하는데 이스라엘병사 한명이 전사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는 첨단장비로 보호되어 있기 때문에 잘 안죽고 하마스 병사는 맨몸으로 전쟁하니까 잘 죽습니다. 한 명 두 명 죽어도 난리가 나는데 여기는 무려 50만이 죽었습니다. 창원시 인구가 얼마입니까? 53만! 창원시 인구가 몇 명(이장우 목사님 내외분 하고 더하기 몇 명) 배놓고는 다 죽었어요. 싹쓸이 할정도로 아비야가 승리한 겁니다.

 

 

아비야 다음 왕이 아사인데 58만대 구스의 100만대군과 전쟁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성경이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군사를 그 당시에 모을수 있었겠느냐,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아사왕이 그 싸움에서 어떻게 이겼느냐 하면, 주의 이름만 의지하는 기도를 해서 58만으로 100만을 이겼습니다.

 

 

역대하 14:11,12

“그 하나님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려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 전쟁은 주의 이름이 개입하는 전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 선지자 아사랴의 예언이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대하 15:7) 고 합니다. 그래서 왕이란 항상 전쟁할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이 전쟁은 절대로 우리한테 속한 전쟁이 아니다.’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아사 다음왕인 여호사밧대에 나옵니다.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때에 그때 선지자가 야하시엘인데 그가 하는 말이 ‘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전쟁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는 것을 보세요.’ 라고 했단 말이죠.

 

 

역대하 20:15-17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그러니까 선지자가 하는 일이 뭡니까? ‘왕이여, 제발 나대지 마세요. 이 나라는 당신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렇게 선지자가 중심점(중심추)을 잡아 줍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현대인들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해 봅시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면 아예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아야 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병 주고 약주고 하느니 차라리 병이 아예 안 생기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아니하면 자기 스스로 자기 힘으로 다윗의 자리에 갈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죄인의 자리를 모르고 ‘주여,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라고 자꾸 자기를 자기 편한 쪽으로 생각하지 ‘내 몸은 주의 몸입니다. 주께서 알아서 하세요.’라는 이런 고백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죄짓는 것 밖에 모르고 자기 편한 것밖에 모르기에 뭔가 사건, 사태가 있어야 거기서 자기본색이 나와서 설치다가 그 순간에 말씀이 부닥쳐 와서 ‘아하, 이 전쟁은, 이 내 인생이라고 여긴 이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주어졌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중심잡기를 계속해서 해나가는 겁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곧 다윗의 나라인데 다윗이 죽었다고 시시하게 여기지만 다윗은 무덤 속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무덤속에서도 죽은채로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가를 똑똑히 보라는 말입니다. 여로보암 왕 다음대에 나답왕이 있는데 나답은 2년만에 바아사에 의해서 쿠데타로 살해당하고(왕상 15:25) 바아사 - 엘라 - 시므리(7일동안 재위) - 오므리/디브니 … 로 이어집니다.

 

 

시므리는 엘라왕을 죽이고 왕을 세웠는데 오므리가 쳐들어와서 왕궁을 포위하자 왕궁을 불질러서 자살한 사람입니다.(왕상 16:15-20) 오므리와 디브니는 그 당시에 야전사령관격인데 그 두사람이 서로 정권잡겠다고 다투었던 인물들입니다. 그 뒤에 오므리가 디브니를 이기고 정권을 잡아서 왕이 됩니다.(왕상 16:21-23)

 

 

어쨌든 이쪽에서는 힘이 있는자가 최고입니다. 여호와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선지자가 잘 나타나지도 않고 그냥 힘만 있으면 무조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나’라는 것이 뭐냐? ‘나’라는 것은 타인이 있을 때 그 타인을 통해서 내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냐, 그걸 봅니다. 만일에 나보다 타인의 힘이 월등하면 힘을 키워서 점령하면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위대해지겠지, 그리고 나보다 더 힘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면 종으로 부리게 됩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누구냐, 그것을 남이 내 앞에 얼쩡거리는 것을 통해서 관계를 맺으면서 자아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거예요. 비트켄슈타인이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가지고 ‘게임’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게임이다.’ 『피』라는 책에도 나오지요? ‘예정인가 게임인가.’ 비트켄슈타인은 ‘인생은 게임이다. 모든 것이 게임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적과 동지, 잘해주면 동지요, 못해주면 적입니다.

 

 

이제까지 적이었다가도 잘해주면 다시 동지고, 이제까지 동지였다가도 못해주면 다시 적이 되어버립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절대화시키기 위해서 타인을 측정하고 점검하는 그것이 바로 인생인데 그것을 북쪽 나라를 통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남쪽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마찬가지인데 북쪽 나라가 있는 이유는 육적(비언약적)인 나라가 이 남쪽 나라를 얼쩡거릴 때 이 남쪽 왕들도 인간 아닙니까?

 

 

‘저것들! 우리가 정통인데 저 이단들 맛을 한번 보여줘?’ 하면서 치려고 할 때 선지자를 통해서 ‘저 사람들 칠 생각하지 말고 네 죄가 뭔가를 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적들이 적이 아니라 실제 적은 어디 있습니까? 항상 자기 내부에 적이 있는 거예요. 항상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주여, 옳으니이까…’ 하면서 ‘내가 이정도 했는데 내 인생이 겨우 이게 뭡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한 달 수입이 이게 뭡니까?’

 

 

만날 자기분수를 모르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모르고, 뭔가 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욕망에 미흡하다면서 화를 내는 그 상태, 그런 상태를 왕들이 내 보이지만 그때마다 선지자를 통해서 중심을 잡도록 말씀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선지자가 많이 말리고 또 왕이 말도 잘 듣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선지자가 말려도 말을 안 듣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사라는 왕이 58만 군대를 가지고 100만 대군을 이겼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후에 북쪽 바아사왕이 남쪽 아사왕을 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면 될 텐데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고 아람군대에게 도움을 청합니다(대하 16:1-6). 아람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림 4) 이스라엘 지도에 보면 제일 위에 다메섹이라고 있는데 그것이 아람의 수도입니다.

 

 

아람에게 군대를 요청해서 북쪽을 대신 쳐달라고 해서 아람군대가 개입해서 이스라엘의 성읍들 몇 개를 치니까 북쪽나라가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선지자하나니가 말합니다. ‘아사왕이시여, 하나님을 의지하면 될텐데 왜 아람군대에게 도움을 청합니까?’ 다윗때는 아람군대와 싸워서 이겼습니다.

 

 

다윗이 모델이고 다윗때의 영토를 유지해야 하나님이 복에 복을 더하시는 야베스의 기도가 응답되는데 아람군대를 요청하게 되니까 그 때부터는 아람이 유다의 밑에 있는 나라가 아니고 같이 맞먹는 나라가 되었지요. 그렇게 되니까 이것은 원래 모델, 다윗언약에서 이탈한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나니를 보내서 ‘임금이여, 당신은 다윗의 노선에서 벗어났는데 당신이 이 사태를 책임질거요?’ 이렇게 나왔어요.

 

 

그 때 아사왕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잠시 생각을 잘못했구나.’ 이럴 줄 알았지롱? ‘여봐라, 저 놈을 당장 하옥하라.’ 이렇게 되었습니다(대하 16:7-10). 그래서 아사왕이 발병이 심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왕 발병 난 것,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피부과 전문의를 찾아간 겁니다. 사람들이 이 역대기, 열왕기를 사람들이 봐도 문제이고 안보면 더 문제인 것이 있습니다.

 

 

병이 나서 병원에 갔을 경우에, 치료받기 전에, 간호사가 의료보험증 달라고 하기 전에 기도먼저 해서 ‘하나님, 제가 먼저 찾은 것이 병원이 아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는 절차를 밟아서 병원에 가야 할 것인지, 그렇게 안하고 곧바로 병원을 찾으면 병이 더 도지는가, 이런 것 때문에 근심하면서 난리를 떨고 있습니다. 이것을 몇 번씩 이야기 해줘도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신약에서는 성도라도, 예수님 안에서 의인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병에 걸려도 무조건 감사하면 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 지킨다고 ‘하나님 제가 병원에 오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역대기에 나오는 선지자 하나니가 하는 말처럼 제가 기도하고 병원에는 아예 안 오려고 했는데 병이 이렇게 도졌는데 목사님도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이렇게 병원에 온 겁니다.’ 하는 식으로 자꾸 핑계대지 마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여, 가까운데 병원이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병원이 20km 거리에 있거든 ‘이런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다니 감사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병원이 50km 거리에 있거든 ‘이런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다니 감사합니다.’ 이러면 됩니다. 그러니까 신약에서는 사람이 뭘 해도 죄인이니까 죄인입장에서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은 다 감사, 감사, 감사로 이어지면 되는 겁니다.

 

 

아사왕은 자기 어머니가 우상을 섬긴다는 이유로 태후자리에서 쫒아내 버렸습니다.(대하 15:16) 처음에는 이렇게 개혁적으로 잘 나갔습니다. 아사랴선지자의 말도 고분고분 잘 들었습니다.(대하 15:1-9)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대하 15:11) 구스군대에게도 승리하고 바아사왕에게도 승리했지만 마지막에는 제 맘대로 막나가고 말았습니다.

 

 

아사 다음왕인 여호사밧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사왕처럼 개혁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압, 암몬, 에돔 연합군이 쳐들어옵니다.(대하 20:1) (그림 4. 지파경계) 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동쪽에서 위로부터 암몬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죽 내려오면 모압, 그 밑에 에돔이 있습니다. 역대기공부하고 나면 이 그림이라도 여러분 머릿속에 남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꾸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압, 암몬, 에돔, 이 나라들이 연합해서 유다를 쳐들어옵니다. 그 때 유명한 선지자 야하시엘이 ‘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전쟁입니다.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지켜보세요.’ 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20:15-17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여기가 중요합니다. 이 때 여호사밧이 그 소리를 듣고는 찬양대를 동원해서 여호와를 찬송하니까 그래서 승리하게 된 거예요.(20:18,19) 우리가 지금 역대상의 다윗과 솔로몬을 뺐잖아요. 다윗과 솔로몬을 보게 되면 다윗이 왕 밑에 배치한 레위인들 가운데 전문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의 족보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원형이고 모델입니다.

 

 

레위인들의 찬양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한 몫 할 수 있다는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여호사밧이 다윗이 했던대로 찬양을 했더니만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자꾸 치근대니까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한 일이 이스라엘이 추천하는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한 일입니다.(대하 18:1)

 

 

그 며느리가 아달랴입니다.(대하 21:6, 22:2,3) 그 며느리로 말미암아 전쟁 없이도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이 정책에 대해서 선지자가 충고를 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사람을 왜 도와줍니까? 하나님이 원수취급하는 사람을 왜 사랑합니까? 그것은 안됩니다’(대하 19:2,3)라고 했습니다. 남쪽 유다의 여호사밧왕의 시대가 북쪽의 아합왕 시대입니다.

 

 

아합의 부인이 이방여인 이세벨인데 그 이세벨은 뵈니게(페니키아)여인을 며느리로 들였는데 그 여자가 들어올 때 몸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뵈니게의 신, 바알신이 함께 수입됩니다. 옛날에는 신(神) 수입될 때는 신만 수입되는 것이 아니고 캘린더(calendar)가 같이 들어옵니다. 요새같이 그냥 날짜와 요일을 알기 위한 용도가 아니고,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캘린더, 달과 해의 운행, 적기에 밭 갈고, 파종하고, 추수할 수 있게 알려주는 달력입니다.

 

 

그러니까 바알신은 농사꾼들이 농사를 지을 때 적기에 필요한 일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하늘의 신(폭풍의 신이라고도 함)인데 서열상 엘 바로 밑에 있는 신이 바알신입니다. 바알신은 남자신인데 그 바알신 들어올 때 여자신도 같이 들어오는데 그게 아세라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사이고 이 부부신이 같이 들어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유목생활이 아니고 전문적인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전문가가 필요한데 농사전문가란 절기에 따라서 적기에 밭 갈고 파종하고 추수할 수 있는 경우에 전문가라고 합니다. 그런 전문가가 되려면 이미 선진농업문화에 익숙해져야 되고 그래야 농사짓는 전문테크닉을 한수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농촌마을의 할머니들이 교회에 나가면서도 옛날 전해지는 풍습이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것을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너희들이 사귀는 것은 좋지만 궁합은 봐야 된다.’ 이런 소리를 합니다. 옛날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 며느리를 볼 때의 풍습, 사주팔자 보던 습관들이 다 함께 들어온 겁니다.

 

 

따라서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유목민의 신은 별 쓸모가 없습니다. 농사짓는 전문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신도 함께 다 수입됩니다. 그 당시 이방신당의 제사장들은 단지 신만 섬기는 역할이 아니라 농사짓는 전문기술까지 전수하는 일종의 당대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농사 잘 되니까 돈잘벌고 배부르게 되고, 그 신이 제대로 된 신이다. 여호와가 해준게 뭐가 있느냐? 아무것도 없다’ 라고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작물은 이 작물과 함께 심으면 안 된다. 이 시기에는 이런 작물을 심어야 좋다. 왜냐하면 다 농사를 주관하는 바알 신께서 일러주신 것이다.’ 라고 어떤 기술이든 바알 신께서 일러준 것이라고 연관 짓는데 막상 해보면 그게 잘 되거든요. 그렇게 되니 대중들은 막상 겉으로는 이름 짓는 것은 여호와 쪽으로 이름을 짓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다 바알종교의 테크닉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교회 다녀도 영화 만들 때는 고사지내면서 돼지 코에다 만 원짜리 팍, 꽂아 버리고, 술도 따라서 붓기도 하고, 교회 건물 지을 때 석가래 올릴 때 예배드리는데 그게 고사지내는 것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막걸리 안 뿌리는 것 뿐 입니다. 그러면 막걸리 대신 예수님의 피라고 포도주를 뿌릴까요?

 

 

어느 사회든 그 사회에서 왕따 되지 않고 적응해서 살아가려면 그 사람의 문화를 존중해 줄때 그 문화 속에서 소통이 성사됩니다. 그렇게 소통될 때 인간의 욕망 중에서 소속의 욕망, 소속함으로서 안정감을 느끼는 욕망을 이룰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역사? 민중? 그런 것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마세요.

 

 

그들은 돈만 주면 다 따라올 사람이고 중요한 것은 뭐냐? 선지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여호와를 찾아라! 왜? 용서하기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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