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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역대기 <제2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09겨울(역대기)

역대기 <제2강>

정인순 2011. 2. 1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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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b-역대기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역대상 1장 5절부터 23절에 흐름이 이렇게 돼있습니다. 야벳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함이 나오고 그 다음에 셈이 나옵니다.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이렇게 나오는데 순서 배치를 야벳 먼저 하고 함하고 셈을 배치해놓고 셈에다 악센트를 치지요. 여기에 주목하라 이 말이죠.


족보에 있어서 마지막에 스톱되는 그 지점을 위하여 다른 것이 모아져 있는 겁니다. 단면 또는 단편 족보에서 넓이 족보에서는 마지막에 악센트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이스마엘과 그리고 이삭에 관해서는 1장 19절에서 34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서 이스마엘 족보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끝에 이삭을 여기다 해서 이삭에다 강조점을 두고 있어요.


35절에서 에서와 야곱 가운데서도 에서가 먼저 출발하면서 야곱과 마지막에 거론된 것과 관련이 있으면서 야곱이 출중하게 연결돼있습니다. 그래놓고 계속해서 2장 3절에 보면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야곱 이름이 바뀌었죠. 이스라엘로. 그렇다면 순서가 ‘노아에서 셈에서 이삭에서 이스라엘로’ 이런 라이너, 선형을 갖추면서 곁가지들을 몰고 다니며 이렇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 앞으로 가는 곳마다 단독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되게 했던 주변에 배치된 그러한 족보들,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에서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이스마엘 있었고, 함, 야벳이 있었던 이런 족보들이 앞으로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장소, 그 공간에서 계속해서 이들이 뭔가 관련성을 가지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면서 다른 주변의 곁가지들, 넓은 족보에 참여했던 자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돋보이는데 사용한다 이 말입니다.


여기 그림4에 보면 이 지도가 아주 좋은 지도입니다. 이것도 [피]라는 책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상세한 것이 좋은 지도가 아니죠. 필요한 것만 기록된 게 좋은 지도에요. 성경이 그래요. 성경이 세계 역사 기록한 게 아닙니다. 필요한 것만 돋보이게 하는 그런 것이 성경이고,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진짜 정작 필요한 건 따로 한다고.   


그래서 그걸 모르고 만날 ‘가인은 누구하고 결혼했습니까?’ 여자하고 결혼했지. ‘그 여자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담의 자식은 가인과 아벨밖에 없는데 왜 여자가 툭 튀어나왔습니까?’ 하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생명나무에 가는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여기 4페이지에 보면 암몬, 다메섹, 모압, 에돔 나와 있지요. 위치가. 그림이 여기에 동그라미 두 개가 보이는데 길쭉한 동그라미를 사해, 소돔과 고모라 이 지점에 있고, 작은 동그라미가 갈릴리 바다. 이 사이를 흐르는 강을 요단강이라 합니다. 요단 강 이쪽 편에서 더 나가 있는 암몬, 모압, 에돔 있고 저 위에 북쪽에 아람, 수도 이름이 다메섹인데.


이 역대기나 열왕기를 보면서 이 안에 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갈라지기 전에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라 하는데 어쨌든 처음에는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아람, 암몬, 모압, 에돔 이런 나라가 있어줘야 이스라엘이라는 가치가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 말고, 앗수르, 바벨론 나오지만 그런 나라가 위주가 아니라 왜 이스라엘을 주목해야 되고, 이스라엘 도처에 전 세계에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왜 하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느냐 말이죠. 이 안에 구원의 비밀이 들어있거든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단군의 자손 같으면 단군의 자손 된 줄 알지 남의 나라, 수입품 이스라엘을 왜 자꾸 따지느냐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 되셔서 오신 그분이 이스라엘로 왔거든요. 그분이 다윗의 자손 계통으로 왔다고.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에 이미 잠재돼있던 비밀이 있었고, 그것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1장 1절에 나오지요.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야기하는데 그 아들이 석가모니도 아니고, 공자, 맹자도 아니에요. 그 아들은 나사렛 예수란 분이 아들입니다. 못 믿겠다고요? 그거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 내려가다가 얻어맞았어요. 뭔가 천둥이 치는데 누구십니까? 하는데 ‘난 나사렛 예수다’ 했어요.


그때부터 사울은 중심점,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중심점. 중심점은 하나님이 만들어줘야 되지 인간들끼리 투기해서 ‘어이 중심점 미국 할까, 필리핀 할까’ 이래서 중심점이 아니에요. 중심점은 하나님이 지정해주는 겁니다. 오래된 팥죽 딱딱할 때 젓가락으로 하게 되면 굳어진 젤 상태가 하면서 중심점이 생기지요. 하나의 무늬가 생기잖아요. 이렇게 젓가락 쑤셔서 흔들어 소용돌이 만드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중심점을 심어준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이 오실 때 ‘나는 이방인들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이래 돼있어요. 여전히 이스라엘이에요. 로마서 11장 26절에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에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뭔데? 이방인들은 개지 뭐. 개인데 왜 필요하냐? 중심점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중심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여기서 강이 하나 있고 여기에 뭐 있느냐 하면, 성경에서는 가사라 했고, 현대에서는 가자라 했거든요. 가자 이 지역이 블레셋이죠. 현대말로 하면 팔레스틴입니다. 이거 지금 조지고 있어요. 가자 지구. 이스라엘은 여기 있고 블레셋은 여기 있거든요. 블레셋 하면 기분 나빠하니까 팔레스틴이라 해요. 난민들.


여기 주변에 있는 국가들이 계속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거나 임의대로 조절하시고 하나의 야구방망이, 몽둥이 앗수르죠. 그땐 야구가 없기 때문에 몽둥이인데 요샌 야구방망이 같은 앗수르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진짜 이스라엘답게 강조점을 두는 것입니다.


[친구]라는 영화를 보면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오지요. 선생님이 시계를 풀면서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그때 ‘건달인데요.’ ‘이게 장난치나.’ 그때 가만있던 친구가 ‘선생님. 실수했습니더.’ ‘실수했어? 뭘 실수했는데?’ 애들은 알아요. 장동건 아버지가 진짜 건달인 것을. 그런데 선생님들은 모르지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이스라엘을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선생님 실수했다는 걔가 더 많이 맞았다고.


그래서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친구 대목이라면 만약에 여러분 같으면 어떤 사람이 와서, ‘권사님 아버진 뭐 하시노?’ 물으면, ‘하나님인데요.’ ‘이게 장난치나.’ 이건 ‘건달인데요’와 똑같은 짓이에요.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하나님이 아버지 됨을 원치 않아요. 왜? 너무 튀니까.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대신 남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거 실수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뭔가 달라야 되는데, 다른 나라 보면 건장 하니까 ‘아하 탁월한 지도자 있기 때문에 있구나’해서 우리도 멋있는 아버지를 해보겠다는 겁니다. 사람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하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 하니까 ‘이게 장난치나’ 하면서 얻어맞았거든요. 울면서 ‘하나님 안 해.’ 이제 하나님 아버지 안 하고 눈에 보이는 것 해. 그게 오늘날 교회 목사 아닙니까. 와 조용합니까?


교인들이 하나님, 예수님을 안 믿어요. 예수 하나님 믿는 것 가지고 뭔가 손이 심심해서. 눈에 보이는 어떤 지도자 있어서 일을 시켜줘야 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왜 교회가 아니냐 하면, 진짜 아버지는 피를 흘렸지만 목사는 피를 흘리는 게 아니고 침을 튕겨 설교시간에. 고함만 칠뿐이죠. 그게 무슨 교회에요. 진짜 성경은 설교시간에 피가 묻어야 돼. 피가 탁탁 튀어야지 목사 침이 나오지 말고. 왜냐하면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었다. 목사는 피만 튕기고 지는 빠져야지.


그걸 저는 그런 교회를 새로운 용어로 [허무 교회]라 합니다. 어디서 나온 용어냐 하면, 허무 개그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이 친목계. 이번에 강남에 많이 깨졌잖아요. 요새 교회에서 계모임 많이 합니다. 암웨이 들어와 버리면 교회 완전히 암웨이 교회 돼버려요. 허무 개그에서 나온 허무 교회에요. 교회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 요한일서에 나오죠.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 너희 속에 성령이 계시니 성령이 가르치시리라. 누가 감히 진짜 십자가 피도 흘리지 않은 인간이 누가 함부로 가르쳐요. 다만 목사라 하는 것은, ‘나 이렇게 삽니다’라는 것을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교인들은 참고로 할뿐이죠. ‘아, 저런 식으로 밥 먹고 사는구나.’


이 이스라엘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단선, 단면, 단편 족보로 들어가요. 넓이를 이야기했다가 갑자기 “이스라엘의 아들은 이러하니라” 해놓고, 그 다음에 2장 3절에 보면, “유다의 아들은” 하고 유다가 톡 튀어나와요. 유다 족보가 나온다고.


2장 3절에서 17절까지 유다의 선형 족보, 직선으로 돼있는 깊이 족보가 나와요. 그 다음에 여기 유다에서 다윗까지 이어지는 선형 족보가 나와요. 그렇게 나오고 난 뒤에 이거 어려우니까 설명 들어보세요. 라이너, 선형 족보인데 그 다음에 2장 18절부터 2장 55절까지는 유다의 넓이 족보가 나와요.


이게 지금 제가 말하면 여러분들이 강사가 무슨 뜻으로 이야기하는지 잘 모를 건데. 갈렙이라는 사람이 나오거든요. 이 갈렙이라는 사람은 직접 다윗과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족보상. 이 갈렙이라는 사람은 유다의 아들 가운데 하나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 그 계열에 속하는데 그게 다윗과는 실제 연관이 없어요. 하지만 나중에 이 갈렙이 누구보다도 다윗과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됩니다.


유다에서 다윗까지 일직선으로 앞뒤 안 보고 한 선으로만 족보가 나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넓게 펑퍼짐한 다른 족보 중에서 중요한 족보들을 뛰어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에 대한 선형 족보와 유다에 대한 단면 족보가 나오고, 그 다음에 3장 1절에서 24절까지는 또 다윗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4장 1절에서 23절까지는 다시 유다의 단면 족보, 넓은 족보가 또 튀어나와요. 이 두 개는 선형 족보, 이 두 개는 단면 족보가 나오는데


이렇게 해서 이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왜 이렇게 갑자기 유다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느냐 하면, 앞으로 그 뒤에 나오는 다른 이스라엘의 펑퍼짐한 족보들이 뭔가 유다 족보, 다윗 족보들을 ‘당신이 바로 중심점입니다’라는 그러한 암시를 주면서 ‘당신에게 기대를 겁니다’ 하는 그런 암시를 주면서 옹위하듯이 같이 포함돼있어요.


신명기 마지막에 모세가 죽으면서 열두 지파 축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유독 톡 튀는 두 개의 기둥 같은 지파가 나오지요. 바로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가 진짜 광채가 나는 지도자 같은 느낌이 드는 두 지파가 나옵니다. 그것이 나중에 과연 십자가에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는데

이 점을 지금까지 여러분이 잘 이해 안 될 것이니까 확실하기 위해서 뒤에 보면 아는 겁니다. 2장 3절에서 15절까지는 유다A라 하고, 3장 1절에서 24절까지는 다윗, 그 다음에 4장 1절에서 23절까지는 유다B, 4장 24절부터 43절까지는 시므온,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걸 4페이지의 지도를 봐주세요. 길쭉한 바다가 사해, 위에 있는 동그란 게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 바다고, 그 중간에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죠. 이쪽에 므낫세, 동쪽이라고 해서 요단 저편, 요단 동편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시므온과 유다는 어디에 속합니까? 남쪽에 속하죠. 그래서 이건 남쪽 지파에요.


왜 이렇게 역대기에서 족보를 남쪽 지파로 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설명이 끝나면 이해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니까 저보고 따지지 마세요. 저보고 복잡하게 한다고 따지지 마세요.


그 다음에 5장 10절부터 르우벤 계보가 나와요. 르우벤이 어느 쪽이냐 하면 지도에 보면, 이게 바로 동쪽에 나와요. 그 다음에 5장 11절부터 17절까지 이건 갓이 나옵니다. 갓이 어디 있느냐 하면, 르우벤 바로 위에 있어요. 그 다음에 5장 18절부터 23절까지 요단 저편, 요단강 동쪽이란 뜻이고, 그 다음에 5장 23절부터 26절까지는 그냥 동쪽. 이건 합쳐서 동쪽 지파가 되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있는 건 여러분 다 아시죠.


그 다음에 6장 1절부터 15절까지는 대제사장 계보가 나오고, 6장 16절에서 30절까지는 레위 지파가 나옵니다. ‘목사님, 너무 재미없습니다’ 하는데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역대상 자체가 보게 되면 재미 되게 없어요, 하여튼. 그 다음에 6장 31절부터 55절까지는 레위 지파와 대제사장. 그 다음에 6장 56절부터 81절까지는 레위의 성읍이 나옵니다. 어떤 마을, 빌리지.


그리고 난 뒤에 7장 1절에서 5절에 보면, 잇사갈. 4페이지에 보면 잇사갈이 바로 북쪽에 있어요. 그 다음에 7장 6절에서 12절, 이건 베냐민A. 7장 13절은 납달리. 그 다음 7장 14절에서 19절까지는 동쪽과 서쪽에 있는 므낫세. 그 다음에 7장 20절에서 29절은 에브라임. 에브라임이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므낫세 밑에 에브라임이 있어요. 그 다음에 7장 30절에서 40절까지는 아셀. 아셀이 어디 있느냐? 그림 보면 이 위에 있지요. 그 다음에 8장 1절에서 40절까지는 베냐민B. 이렇게 되면 바로 북쪽 지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역대기를 쓰실 때 왜 이렇게 방향별로 지파를 묶어서 했느냐 하면, 그 도중에 남쪽, 동쪽, 그 다음에 북쪽 그 사이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레위 지파는 원래 자기 땅이 없어요. 땅이 없는 레위 지파가 이 중간에 들어갑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멸망되기 전에 처음에 통일됐는데 남북으로 갈라지고, 사해, 갈릴리 바다, 북을 이스라엘, 남쪽을 이름을 유다라 지었다 이 말이죠.


할 때에 이쪽은 전부다 누구한테 먹히느냐 하면, 아까 암몬, 모압, 에돔, 아람 다 먹혀요. 이 동쪽 이거는 의미가 없어져버리고, 남쪽과 북쪽이 마치 가마 태우듯이 중앙에 누굴 모시느냐 하면, 바로 레위 지파를 옹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 되어야 된다는 것이 그들이 나중에 멸망되고 난 뒤에 포로 잡히고 오고 난 뒤에 취지가 바로 이 취지였던 겁니다. 이 취지에 부합해서 지나간 역사를 다시 한번 전부다 재배치를 한 거에요.


이 동쪽은 레위 지파를 모실 자격도 없어요.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얘들 빼고 나머지 남쪽이 온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대표적인 것은 뭐냐? 바로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과 북쪽의 요셉지파. 요셉 지파는 둘로 나눠지지요. 에브라임과 므낫세. 역대상 9장 3절 누가 읽어보세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 중에서 예루살렘에 거한 자는”


그게 점점 더 계보가 장소가 가면 갈수록 왜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가 하나가 되면서도 유다 지파가 돋보여야 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그 동안 지킬 것을 못 지켰다는 거예요. 뭘 못 지켰는가? 중요시해야 될 땅 없는 레위 지파, 땅이 없으면서도 그들은 뭘 하느냐 하면, 제사 업무에 종사하지 않습니까? 이 제사 업무에 종사하는 이 중차대한 그것을 우리가 소홀히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해버렸다.


하지만 포로에서 다시 돌아와서는 바로 유다 지파가 주동이 되어서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서 레위 지파를 사수하세. 그래야만 그것 하라고 하나님께선 유다 지파와 더불어서 레위 지파, 그렇게 해서 그들은 칠십 년 포로 잡히고 다시 본향에 돌아왔고, 거기에 곁가지로써 온 것이 바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돌아온 거예요. 그게 어디서 확인되는가? 에스라, 느헤미야에 족보가 나와요. 에스라, 느헤미야의 족보에 보면 항상 중심점이 뭐냐?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족보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자칫하면 속아 넘어가는 수가 있으니까 조심해야 됩니다. 에스라 7장, 10장에 보면 하여튼 찾기 버겁더라도 이렇게 이번 기회에 찾아봐야. 에스라, 느헤미야는 진짜 보기도 싫어요. 재미 하나도 없어서. 거기에 10장에 보면 복잡하게 나오지요. 제사장 족보 나오지요. 그리고 7장에도 보세요. 아, 골치 아프잖아요. 읽을 때 보면. 7장 1절에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 에스라라 하는 자가” 쭉 나오지요. “제사장 아론의 십육 대 손이요”


요새도 문중에 가면 젊은 사람들 제일 싫어하는 게 문중 사람들 족보 이야기할 때 젊은이들 그것 때문에 문중 근처도 안 가려 합니다. 안동 하회탈 근처도 안 가려 합니다. ‘이리 오너라.’ 시대가 어느 시댄데 ‘이리 오너라’입니까? 그런데 에스라, 느헤미야는 아직까지 ‘이리 오너라’에요.


레위 지파가 중심이에요. 에스라, 느헤미야에서도 족보 이야기하는 것은 두 번밖에 없어요. 유다 지파 하고 레위 지파만의 족보를 이야기해요. 이거야말로 순전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마지막 흔적으로써 남겨준 거다 이 말이죠.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 끝난 시점에 등장하는 마지막 선지자가 있습니다. 말라기에요.


말라기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핵심이 뭐냐? 말라기 보면 되죠. 말라기 2장 8절 누가 읽어보세요.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마지막 4장에 보면 저주가 임하죠.


자, 그렇다면 여기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준 것은 첫째 시간에 무슨 그림 그렸습니까? 말씀을 재미없다 할 수 있느냐 하는데 재미없는 건 재미없는 거예요. 말씀이 필요 없단 소린 아니잖아요.


제가 아까 그림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아담부터 해서 보통 족보가 수평적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는데 역대상은 그게 아니라 했습니다. 뭔가 점점 더 경사면을 가지고 수직선으로 올라간다 했지요. 올라가는데 다윗에 와서 스톱이 돼버려요. 다윗과 그 위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사이에 점선으로 돼있다 했지요. 그리고 다윗 이후에는 다시 미끄러지듯이 자꾸 내려간다 해서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돼버려요? 멸망해버리죠.


그런데 올라갔는데 왜 다시 청룡열차 타는 것도 아니고 내려갔느냐? 뭘 놓친 거예요. 뭘 놓쳤는가? 받들어 모신 것을 놓친 겁니다. 이 점선 부분에 뭐냐 하면, 땅이 없어요. 땅이 없는 지파가 들어갑니다. 그 지파가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땅 있는 지파들이 땅 없는 지파를 가마 태우듯이 모셔야 되는 이유는 뭐냐? 영원한 땅은 바로 땅 없는 지파의 어떤 자격, 업무 거기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 지파는 레위 지파가 하는 것을 받들어 모실, 점선으로 표현한 것이 사실 구체화되면 뭐냐 하면, 이게 레위 지파가 되는 겁니다. 레위 지파가 하는 업무 지키기 위해서 다른 지파는 전쟁을 해야 되고, 그 전쟁에 앞장서서 그 전쟁을 완료시킨 자가 다윗 장군입니다.


그런데 다윗 장군은 피를 많이 흘렸어요. 전쟁한다고. 그렇다면 레위 지파를 영원히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피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피가 없는 사람, 누구겠습니까? 솔로몬이죠. 그런데 솔로몬이 지은 건 아니에요. 누가 지었느냐? 다윗이 지었어요. 역대기에 보면 다윗이 준비 다 해놨습니다. 솔로몬은 차린 밥상에 숟가락으로 퍼먹으면 됐어요. 성전 짓겠다는 그 대화도 다윗이지 솔로몬이 한 게 아닙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꼬리에 지나지 않아요. 다윗이란 몸통에 포함된 하나의 일부라 보면 돼요.


다윗의 언약에 완성은 결국은 모든 피 전쟁이 마감되고 완료된 상태에서 다윗이 흘렸던 피의 효력이 바로 성전이 되고, 그 성전 안에서는 레위 지파가 이루어야 될 모든 작업이 순조로이 이루어지는 그 상태가 바로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까 처음에 했던 에스라, 느헤미야가 왜 돌아와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해서 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전을 왜 지어야 하느냐 하면, 성전에는 다윗의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거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인데 그 하나님의 이름이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신다 이 말입니다.


이걸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으로 오실 분은 이미 하는 작업이 확정돼있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남자를 여자로 바꾸고,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게 일이 아닙니다. 성전환 수술하면 돼요. 하나님이 하는 일이, 우리나라 100미터 기록이 30년인가 안 깨지고 있어요. 10초 3인가 그럴 거예요. 다른 나라는 9초 9 뛰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교회 다니면서 청년이 열심히 기도해서 ‘주여, 지금 저는 100미터 10초 7인데 9초 9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 되게 해주십니까? 해주죠. 마귀가 해줘요.


하나님이 하신 전능하심은 그게 아니고, 이미 전능해야 될 그 일 폭이 범위가 확정돼있습니다. 뭐라고? 다윗의 언약으로 오기 때문에 다윗에게 약속된 것만 전능하게 다 이루어줘요. 이걸 간편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성도의 일에 도와줄 어떤 경우냐 하면, 십자가 복음에 관한 일만 도와줘요. 그 외는 안 도와주십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할 건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을 느끼게 하고 ‘야, 이건 기적이다’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십자가 복음의 효과가 나타난 그 현장만 노리고 주께서 도와주고, 나머지는 절대로 주의 뜻이 있기에 우리의 뜻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면 백발백중 기도응답 됩니다. 속에 하고 싶은 것 다 이야기하고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면 백 퍼센트 다 이뤄집니다.


새해가 되었는데 ‘주여 오늘도 잘 되게 해달라’고 해 뜰 때 빌고 이러잖아요. 좋아요. 비세요. 해 뜨는데서 비는 것이나, 교회 안에서 비는 것이나 비는 건 마찬가지죠. 같은 수준이기 때문에. 창문 열고 해 뜨는 것이나 창문 닫고 해 뜨나 알아서 뜨거든요. 해는 물어보고 안 뜹니다. 십자가마을한테 해 뜨길 기도합니까? 이래서 뜨는 게 아니거든요. 비는 건 지 자유인데 ‘절대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 하면 그 기도는 백 퍼센트 이뤄집니다.


그 아버지 뜻이 무엇이냐? 다윗에게 약속한 그것만 이뤄주십니다. 이걸 가지고 복음이라 합니다. 로마서 1장 3절에.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분이 다윗에게 약속한 것만 이뤄주십니다. 그 다윗의 혈통으로 다윗에게 이룬 게 뭐냐? 다윗이 했던 일이 레위 지파가 해야 될 업무를 보좌하고 받들어 모신 일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포로 잡혔던 망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희망을 갖고 칠십 년 만에 다시 돌아와서 ‘우리도 성전 짓는다, 우리도 성전 짓는다’ 그렇게 한 겁니다. 예수아라는 사람 그리고 스룹바벨이란 사람이 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성전 짓는 거예요. 거기에 도와준 사람이 학개, 스가랴 이런 사람들이 도와줬습니다. 그 다음에 에스라 와서 부흥 운동했고, 그 다음에 왕에게 술 따르고 시중들던 느헤미야란 사람이 총독으로 와서 에스라는 부총독 되서 둘이 합심해서 성전 지었는데 산발랏, 도비야란 그 당시에 노는 껄렁이들이 있어요. 원래 텃세 있잖아요.


바사란 큰 나라가 통치할 때 밑에 떼 주고 통치한다고. 먼저 통치한 사람이 자기 땅인 것처럼 행세하는 거예요. 나중 온 사람들이 성전 짓겠다하니까 ‘바사 형님들이여, 자들 성전 왜 짓는지 압니까? 세금 안 바치려고 짓습니다.’ ‘그래. 그러면 중단시켜야지.’ 이런 모함을 해서 성전 못 짓게 했어요. 그래서 다시 또 조서 꾸며서 도장 찍어서 ‘그게 아니고 옛날 선배 임금님이 약조한 게 있습니다. 찾아보이소.’ 찾아보니 나와. 성전 지을 때 모든 자재 다 동원하고 모든 인력 다 보장해줘라. 그래서 성전 지은 거예요.


그들이 성전 짓게 된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느헤미야 총독이 본국으로 소환되어서 총독도 없어요. 총독도 없고 백성도 비실비실 하더라도 항상 성전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선지자의 말씀을 이룬다. 그래서 ‘성전 사수하자’라는 의미에서 했고, 그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와해, 불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낸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이방인과 결혼했고,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거 나오지요. 십일조.


십일조 하면 교인들 닭살 돋아요. 무서워라. 다음 중 교인들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①귀신. ②김정일. ③흡혈귀. ④십일조. 십일조가 제일 무서워요. 왜?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가 계급이 있습니다. 인도에 가면 네 가지 계급이 있잖아요. 카스트 제도해서. 교회도 카스트 제도 있어요. 제일 높은 자리는 십일조. 그 다음에 하는 사람이 이십일조, 이십분의 일. 삼십분의 일, 제일 밑에 천한 사람.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 최곤데, 뭐. 그래서 목사들도 교인들 십일조로 계산해서 신앙 측정한다고 리스트 작성하고 혼자서. 어떤 목사는 리스트 작성해서 커튼 쳐놨는데 어떤 장로님 와서 들춰보니까 리스트 다 나왔어요.


이방인하고 결혼하고 십일조. 그 다음에 에스라가 바로 율법을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에 율법이 없으니까 욕망대로 살아요. ‘사람이 법이 없으니까 욕망대로 산다.’ 그렇게 생각해서 우리가 왜 남의 나라 지배를 받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운동을 벌였는데 그 중심은 뭐냐? 레위 지파가 하는 일에 적극 십일조를 모아서 레위 지파로 하여금 두 번 다시 월급 없어서 일반 기업체에 취직하거나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말씀 증거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주자 하는 운동이 에스라, 느헤미야 운동입니다.


성전 유지하려 하면 그냥 건물만 지으면 안 돼요. 성전이 가만있으면 관광 그게 하잖아요. 성전은 활동, 돌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성전이 그냥 성전으로 있으면 안 되고, 성전답게 돌아가려면 제사가 이뤄져야 되고. 그리고 그 제사에 전념하는 전문가들이 있어야 돼요. 전문가들이 제사장과 레위 지파고. 그들을 먹여 살리려 하면 돈이 필요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돈을 받아서 바로 이웃 사랑,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함으로 말미암아 옛날 포로되기 전에 그 시절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성전을 지은 취지를 우리가 지탱해야 한다는 것이 에스라, 느헤미야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망했잖아요. 그래도 망한 이유가 히브리서 7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십일조 이야기가 나와요. 참 오늘 성경 별거 다 나온다. 이것이 알고 싶다. 그것을 알려주마. 히브리서 7장 11절, 다같이 읽어야 돼요. 너무 중요해요. 359페이지. 시작.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진짜 유대인들이 보면 이 성경책 잡아 죽이려고 할 거예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처음도 율법인 동시에 레위 지파, 다윗도 레위 지파를 위하여 성전 지었고, 그 성전 회복하기 위해서 레위 지파가 주동이 되어서 지었고, 에스겔도 레위 지파고, 제사장 계열이고, 이제 말라기도 이 세상의 믿을 자는 누구밖에 없다? ‘성전에서 일하는 바로 레위 지파 제사장밖에 없다’라고 철떡 같이 알았는데 그 모든 것이 근거가 뭐냐 하면, 바로 남북의 모든 지파는 가마 타듯이 땅 없는 지파를 모셔야 돼요. 모셔야 될 지파가 레위 지파에요. 족보상 구조가 레위 지파가 중간에 들어가야 된다 이 말이에요.


아까 참 지루하고 재미없었지만 이 이야기 보니까 중요하죠. 남쪽의 지파 있고. 그 다음에 북쪽 지파 있는데 그 사이에 뭐가 낍니까? 레위 지파가 들어있고, 이 구조가 에스라, 느헤미야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단 말이죠. 그것도 유다 지파가 와서 레위 지파를 모시는 그런 구조로 에스라, 느헤미야. 그러니까 포로 잡혀 온 칠십 년 돌아온 사람들이 치밀하고 이상적인 모델이다,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한 게 뭐냐? 레위 지파만은 살려야 된다. 십일조 내고 하여튼 레위 지파만은 살려야 된다. 피의 제사죠.


‘피의 제사에서 살려야 된다’라고 했는데 이게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누가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아닙니다. 마지막 때는 다윗이 이야기한다? 아닙니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실체를 비밀을 알고 싶다. 그 비밀을 다 들춰보니까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이전에 십일조를 받은 분이 있어요. 레위 지파 이전에 십일조를 받기도 하고 드린 분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끝이냐?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드린 분이 있어요? 이건 점선입니다. 왜? 여기는 아브라함이 십일조 바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멜기세덱이에요. 이 멜기세덱을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이렇게 설명했어요. 그는 애비, 어미도 없다는 거예요. 호로 자식입니까? 그렇습니다. 호로 자식이에요. 애비, 어미도 없어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는가 생각이 안 나는데. ‘육서깐 문 열어놨습니까’ 하는 식으로.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란 분을 만났어요. 그러면 자기가 그 앞에 세례 받으면 자기는 구원받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세례 받으면, 그걸 에스겔은 영적 세례, 성령의 세례라 하는데 메시아가 주는 세례가 영적 성령의 세례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부어지면 요엘서에 나오지요. 그러면 자기는 구원받는다 해서 받으려 하는데


이거는 역전이 되어서 네가 나한테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한테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 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 속에 흡수됨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메시아가 없습니다. 무서워 사라져버렸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가라입니다. 가라요 구라요.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보낸 적이 없어요. 아담의 족속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보낸 적이 없어요.


그러면 메시아가 어디 있느냐? 인간의 죄성에 숨어 있어요. 자기 죄를 알 때만 본인만 알아요. ‘내가 이렇게 내 죄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주님이 죽는구나’ 하는 것을 두 사람만 알아요. 메시아는 내 죄 때문에 피 흘렸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찾는 ‘주여, 저 건강합니다. 저 잘났습니다. 저 훌륭합니다. 훌륭한 내가 천당 가는데 메시아 어디 있습니까?’ 그 메시아는 어디가도 없습니다. 메시아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랑스러운 메시아가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한테는 숨으시고 어린아이한테는 나타나죠.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했어요. 이건 아버지와 아들 계시 외에는 숨어있는 메시아를 찾을 길이 없다 했습니다. 지금은 메시아가 없어요. 사기고 구라쳐버려요. 전부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바리새인들 에스라, 느헤미야 정신으로 완전무장한 사람이에요. 딴 걸 손대라. 예수님이 죽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을 일 있어 죽은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마지막 손댄 게 있어요. 손대면 다치게 된 걸 건드렸습니다. 뭘 건드렸습니까? 성전을 건드렸잖아요. 그거 예수님이 실수한 거예요.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늘에 있는데요.’ 그거 실수한 거죠.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늘에 있는 아버지께서 하늘에 있는 정도가 아니고, 성전을 통해서 이미 주셨기 때문에 성전이 있는 마당에 하늘이라 하면 안 되지요. ‘성전 주셔서 성전 지키고 있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덕분에 우린 삽니다.’ 이래 나와야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래 나와야지. ‘할례하고 십일조하고 안식일 지켜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해야죠.


에스겔에 보면 율법은 다 폐해져도 안식일은 영원하리라.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지켰잖아요. 지금도 제칠일안식교에서는 그 구절 대서 세상 모든 법은 없어져도 안식일은 유지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성전이다’ 이래 나왔습니다. 감히 성전을 엎어버렸습니다. 치워라. 성전을 도둑놈 아지트를 만들었다고 치워버렸습니다.


제 [피]라는 책에 이 대목 나와요. 유대인들은 침착하고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숲을 보며,  합리적이며 인내성을 갖고 참을성 있는 사람들이며, 이성적이고 함부로 화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고, 왜냐하면 이 세상 인간들이 의롭다, 의롭다 하지만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운 사람 없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예수를 죽였다는 말은 죽인 바리새인 탓하지 말고 주님이 얼마나 떠버렸는가 생각해 보세요. 그 점잖으신 소 같은 양반한테. 사울이란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는 자기는 아예 흠이 없는 거예요. 뭐, 주기철, 손양원 바둑 몇 점이라도 깔아야 돼. 게임이 안 돼요. 사울한테 게임이 안 돼요. 주기철, 손양원 비교 안 됩니다. 어데 사울이 흠이 없다 했는데요. 어데 거기서 붙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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