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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역대기 <제3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09겨울(역대기)

역대기 <제3강>

정인순 2011. 2. 1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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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c-역대기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에게 하나님이 약속해서 ‘너를 영원히 축복하겠다.’ 근데 지금 다윗에게 전쟁을 많이 해서 레위 지파를 지키기 위한 전쟁,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점선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레위 지파가 들어가요. 땅 이야기를 좀 있다 하겠습니다. 야베스 기도


사실 솔로몬이 지었는데 다윗이 지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솔로몬 언약이라 하지 않고, 성경에선 솔로몬이 지어도 그걸 [다윗 언약]이라 한다 이 말이죠.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솔로몬이 다윗에 모아지죠. 이 방향은 바로 밑에 있는 르호보함도 다윗에 모아지고, 아비야도 모아지고, 그 다음에 아사도 모아지고, 여호사밧도 모아져요. 여호람, 여호아하스, 그 다음 아달랴 밑에 요아스, 그 다음에 므낫세, 그 밑에 히스기야 쭉 나오는데


모든 이 사람들이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지만 방향은 거꾸로 다윗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향의 역순을 지시하는 자를 ‘선지자’라 하지요. 그런데 이 다윗에 올라갈 때에 레위 지파가 여기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지파가 수종드는 식으로 사실은 유다 지파뿐만 아니고 모든 지파가 레위 지파를 지키기 위해, 레위 지파는 영원하니까.


레위 지파의 영원함은 결국 뭐냐 하면, 모세 언약이에요. 모세 언약의 완성을 내다보겠다 이 말입니다. 한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레위 지파 말고 다윗 지파를 하나님께서 주었는데 다윗 지파는 밑에서 올라와서 아담부터 연결된 이런 지파가 유다 지파가 아니고, 여기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유다 지파는 바로 하늘에 있는 멜기세덱과 연결돼있는데


멜기세덱이 어떤 분이냐 하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니까 이 지상과 끈이 닿은 그렇게 계신 분은 아니다. 지상의 인간 세계, 육의 세계와 관련된 분은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의 세계와 관련 없으면 그거는 사람이 안 된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담이 누굴 낳고, 누굴 낳고 이렇게 돼야 되는데 아담이 없는 상태에서 누가 등장하면 그건 귀신이지 인간이 아니잖아요.


만약에 마리아가 낳은 예수님 보고 누가 ‘실례지만 아버지 뭐 하십니까?’ ‘아버지 하늘에 있는데요.’ 이러면 곤란하다. 그리고 요셉은 아버지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야만 유일하게 아들이 있다 이래 보는 거예요. 다른 것은 인간의 아들이죠. 육의 아들이고. 하늘의 아들, 약속의 아들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돼야 된다. 이래 본 겁니다.


그러면 이 멜기세덱이라는 독특한 분이 있어서 이분은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서 유다 지파, 다윗이 태어났다 이래 보는 거예요. 보통 유다 지파는 아까 본 것처럼 노아부터 셈과 이렇게 보통 봤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 유다 지파는 멜기세덱에 반열에 들어가서 독특하게 등장했다 이 말이죠.


만약에 지상 같으면 지금까지 역사에서 뭐냐 하면, 유다 지파는 레위 지파, 모세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그걸 수용하기 위해서 전쟁도 해야 되고 선봉장이 되어서 지켰다 해서 유다에서 하나님이 가운데 레위 지파가 있는 반면에 방향이 다윗에서 레위에서 이렇게 가는데 이게 하늘의 멜기세덱이 돼버리면 방향이 뭐냐? 레위 지파를 통해서 다윗이 이렇게 돼버린 겁니다. 그러면 여기 멜기세덱에 의해 등장한 다윗은 이미 안에 뭐가 포함돼있어요? 레위 지파가 이루어야 될 모든 피의 제사를 완성된 채 이 땅에 태어난 게 돼버립니다. 그게 히브리서에요.


실제로 방향이 땅에서부터 인간 쪽에서 하늘에 올라가려면 뭔가 십일조도 받아 챙겨야 되고, 뭔가 재물을 받아야 되는데 그게 안산홍집단 아닙니까. 유월절 지켜야 된다는 집단이잖아요. 뭔가 있어야 된다는 건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레위 지파를 완성하고, 그러니까 율법 폐지된 거예요. 완성된 채로 예수가 등장해버리면 예수님 쪼개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피가 들어있고, 이 피는 무슨 피 입니까? 그냥 알에이취 플러스 에이 형입니까? 이 피 안에는 모든 구약의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인간의 부족한 것, 모자란 것, 못한 것을 다 이루는 피거든요.


이 피는 역대하에선 [소금 언약]이라 합니다. 소금 언약이 피를 보호하고 지켜내는 겁니다. 소금 언약을 다른 말로 하면 ‘영원성’. 영원성이니까 오래간다는 말이 아니고, 그 출처가 어디 있다? 하늘에 있다. 하늘의 영원함이 포함돼있는 거예요. 그 소금 언약의 내막을 다음에 이야기할 건데 지금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음에 이야기하는 건 싫어요. 찝찝해서 듣는 사람이 딴 것 있는데 안 되잖아요. 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레위기 찾아보겠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폐기됐느냐, 아니면 아직도 존속하느냐’ 그 문제를 성경신학자들이나 조직신학자들은 만날 따지니까 인간이 아직 율법을 지켜야 되느냐 안 그러면 안 지켜도 되느냐? 안 지키면 폐기론자인가? 논쟁 하는데 이걸 수직적으로 봐버리면 아무 문제 일어나지 않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율법은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서 행해서 의를 이룰 수 있는 율법은 없어요.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것,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두 자로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라 하죠. 드디어 다윗 언약에서 약속대로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복음이다.


그 복음이 뭐냐 들어보니까 ‘하나님의 의’다. 그 의가 왜 기쁜 소식이 되느냐? 그거는 행함이 아니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 의해서 ‘어, 나타났네.’ 그게 구원받는 거예요. 열심히 행한 자가 아니라 ‘어! 나타났네. 멜기세덱이 하늘에 속한 족보로써 나타나버렸네.’ 그걸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의인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 같은 이방인들도 구원받지요. 유대인들은 그 소리 듣고 환장합니다. 그동안 그들이 쏟아 부은 십일조와 안식일과 법 지키기에 얼마나 많은 수고했습니까?


그 수고 중에 제일 큰 수고한 사람이 사울이란 사람이잖아요. 사울이란 사람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런걸 뭐로 봤습니까? 네 자로 이야기했어요. 똥∙덩∙어∙리. 나를 쓰레기로 배설물로 여겼다. 배설물이 거기 처음 나와요. 강마에보다 사울이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런 의미를 똥덩어리, 배설물로 여긴다 했어요. 똥, 오줌으로 여긴다 했습니다. ‘뭐 자랑할 게 없어서 그걸 자랑하나’ 이래 이야기한다고. ‘그래 너거들 그거 자랑해라. 난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할게.’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지요. 세상에 우리들 봐라. 잘난 사람 누가 있나. 하지만 우리 가운데 자랑거리가 있다. 그건 뭐냐? 자기의 행함이 아니고, 돈 많은 걸 자랑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자랑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한다.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이래 돼있어요. ①방부제 역할 한다. ②짠 맛을 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짭쪼름한 걸 좋아하시나. 잡은 제물을 무슨 방부제를 칩니까? 오래 묵혀서 홍어 묵힌 것 하려 합니까? 냄새 얼마나 지독한데. 영원함을 삽입시키는 하나의 마크지요. 이것은 하나님께 바칠 거다. 그리고 이 제물은 하늘에서 와야 된다. 소금을 침으로 말미암아 영원성 속성을 소금이란 것을 표시를 하는 겁니다. 그 소금을 침으로 말미암아 영원함이 담기신 것은 하나님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냥 인간의 음식물이 아니고. 그 소금 언약을 역대하에서 아비야란 사람이 여로보함하고 전쟁하면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


역대하 봅시다. 역대하 초반에 나오죠. 역대하 13장 5절 누가 읽어보세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아비야란 사람이 남쪽 나라 두 번째 왕인데 도대체 뭣에 근거해서 이렇게 소금 언약 영원함을 하느냐 하면


민수기 18절 19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역대상은 족보기 때문에 보기도 곤란하잖아요. 재미없어요. 이런 건 괜찮아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영원히 보여기 위해서 걸어놓는 제사, 영원한 거제에다 소금 언약이다. 하나님에 대한 응식. ‘응식’이란 음식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다. 이게 소금 언약이란 거죠.


그래서 소금 언약이라는 그것을 구약 사람들은 자기 지파 중에 레위 지파가 있으니까 이 레위 지파가 그들이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자기들 속에 있는 레위 지파가 제사 드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 나라는 영원한 나라로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다’라고 영적으로 해석 못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근데 신약에 와서 진짜 아들이 나타났어요. 요단강 세례 받으면서 예수님 나타나서 해석의 모든 방향이 밑에서부터 위로 가야할 위에서부터 아래로 모든 방향을 완전히 바뀌어놓고 말았어요. 거기서 뭣이 튀어나와야 되느냐 하면, 왜 인간은 밑에서부터 위로 할 수밖에 없는, 어떤 명령과 어떤 규범을 줘도, 구약성경을 줘도 항상 밑에서부터 위로 할 수밖에 없는 왜 그런 속성이 들어있는가가 비로소 밝혀지는 거예요.


단순히 너희는 해석을 잘못했다가 아니라 그런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원천까지 그 메커니즘,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너희들 속에 악마 있다’ 이 말이에요. 단순히 너희들이 지식이 모자라고 지혜가 모자라서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 못하고 뭔가 영적인 해석을 가로막고 있는 악신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지요. 너희들은 지금까지 어두운 권세 속에 공중 권세에 속했으니. 그러니까 그 특징이 뭐냐? 항상 자기 의를 위한 자기 행위, 자기 정당성을 위한 자기 행위.


어제 제가 설교한 것 그거잖아요. 유대인들이 바리새인에게 묻잖아요. ‘남자가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게 옳으니이까?’ 뒤에 뭐가 붙느냐 하면, ‘옳으니이까’. 아내를 버리려고 작정한 것 같아. 항상 바리새인은 솔직하게 ‘옳으니이까’ 했지만 사실 우리는 말은 안 했지요. 뭔가 해놓고 뒤에 ‘옳으니이까’ 붙여요. ‘주여, 십일조 안 해도 옳으니이까?’ ‘회사 바빠서 교회 안 나와도 옳으니이까?’ 바빠서 교회 안 나오면 안 나오는 것이지 인간의 본성이 뒤에 붙여요. ‘옳으니이까’


자기 행동하면 되는데 누가 뭐라 했어요. 그 말만 붙이면 되는 거라고. ‘옳으니이까’ 일요일 날 손님 때문에 가게 문 열었습니다. ‘열으세요.’ 그러면 되는데 ‘열어도 됩니까?’ 왜 묻느냐 말이죠. 연다고 잘한 것도 아니고, 안 연다고 못한 것도 아니고, 문 닫아도 잘한 것도 아니고. 잘한 것 없어요.


어떤 분이 상담하기를 ‘아이고, 목사님. 제 남편 오늘 산에 안 가고 꼬셔서 교회 왔습니다.’ 어쩌라고? 옳으니이까. 교회 온 게 옳은 거 아니에요. 진짜 옳은 게 뭐냐 하면, ‘주께서 허락하셔서 왔습니다, 주께서 오게 했습니다’ 이게 옳은 거지, 항상 출발을 주님이 아니고, 항상 내가 꼬셔서 왔다는 거예요. 꼭 자기를 집어넣고 플러스 한 세트처럼 ‘옳으니이까’ 이거 붙이는 것.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당 간다. 이 말을 제대로 들으면 ‘아, 주의 의로 구원받는구나’ 이래 알면 되는데 그걸 어떤 창녀가 듣고 ‘창녀도 옳으니이까’ 하면 곤란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성령이 없는 사람은 출발을 하나님이 하는 게 아니고, 항상 자기 정당성을 밑에 깔고 이야기해요.


구약에 있는 이 구조, 역대상 모든 족보의 구조가 에스라, 느헤미야의 열심과 그게 하나님 뜻 맞아요. 맞는데 그들은 뭘 오해했느냐 하면, 학개 이야기하고 스가랴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고 스가랴에 보면 뭐로 짓는다? ‘하나님의 신’으로 짓는다 했습니다. 근데 하나님의 신은 그냥 오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오시려면 성령을 보내줄 분이 먼저 와야 돼요. 이게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메시아가 먼저 와야 그 다음에 메시아가 성령을 줘야 그 다음에 영적 예배가 되어야 이게 바로 다윗 언약의 성전 중심의 예배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메시아다’라는 이야기부터 먼저 하신 게 아니고, ‘내가 목마르지 않은 물을 줄게’라고 한 거죠.


이 여자가 ‘물을 줄게’ 하니까 이게 H2O인 줄 알았어요. 수소 둘, 산소 하나 뭡니까? 물이죠. ‘야, 그분 있으면 두 번 다시 안 뜨러 와도 되겠습니다’ 하고 ‘물동이를 가득 채울 수 있는다’ 이렇게 했어요. 그 여자가 주님께서 메시아에서 성령을 줄 때 인간의 문자적 사고방식 속에 그냥 주는 게 아닙니다. 확 파내고 줘요. 지금 다섯 명 사귀는데 지금 사귀는 남자, 여섯 번째지요? 오케이. 기술도 좋다. 다른 사람은 한 사람은 없어서 장가도 못가고, 시집도 못가고 있는데. 완전히 엘리자베스 테일러쯤 되는 모양이죠. 일곱 번 결혼한 사람인데.


확 파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메시아로 성령 주니까 이 여자가 물동이를 채울 생각 안 하고 뭘 버렸습니까? 물동이 갖다 버려버렸어요. 물 뜨러 왔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미쳤어. 보통 이야기가 이래 되면 ‘야, 물동이가 채워져도 물이고, 채워져도 물이다’ 이렇게 돼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한국교회 원하는 게 아닙니까. 통장에 빼나가도 또 채워지고 빼나가도. 사렙다 과부인데 봐주소. 기름병마다 채우고, 채우고 하잖아요. 주께서 채우는 대신 망치 들고 참 기름병 다 부셔버려요. 다시는 자기한테 그런 소리 하기만 해보라. 다 부셔버립니다.


구약의 축복은 소와 양떼가 늘어나는 거죠. 신약의 축복은 뭐냐?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축복이에요. 에베소서 3장에 나왔습니다.


레위 지파를 옹호하는 것, 이 모든 관계성 속에서 이 자체가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셨느냐? 부셔지게 하는 성전을 왜 만드셨는가? 그것은 이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쫓겨난 입장이 안 쫓겨났다 하니까 벌써 문제가 시작이 된 거예요. ‘이만큼 살만하다.’ 이렇게 나온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돌아갈 본향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고, ‘뭐, 쫓아낸 채로 살지’ 이래 된 게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아벨을 죽어도 천국에 가는데 가인의 족속은 만날 이 땅에 살려고 하는 거예요. ‘너, 몇 년 살았노?’ ‘구십.’ ‘좋겠다. 우리 엄마 팔십 돼 죽었다.’ 이것 가지고 기 죽고, 기 살고 한다 이 말이죠. 중요한 건 생명나무죠. 생명나무 주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선악과를 따먹고    ‘너는 얼마나 착하노?’ ‘스무 개.’ ‘나는 서른 개.’ ‘어매 기 살아.’ ‘얼마나 훌륭하냐?’ 그것 가지고 싸움한다고. 창기와 세리가 너희들보다 천당 먼저 간다.  


거지 나사로가 착한 일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한 사람이에요. 거지 나사로가 노동한 것을 뭐냐 하면, 기껏 자기 다리 긁은 것밖에 없어요. 그것도 훌륭한 노동이지요. 그건 노동한 게 아니고 자기 편하느라 긁었어요. 아프니까 긁었고. 긁으니까 옆에 있는 개들이 와서 핥았다고. 같은 팔자라. 개 없었으면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지가 구원받을 짓을 한 게 없어요.


제가 아까 했지요. 몸이 아파서 치매 걸렸다면 그 사람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간단해요. 그 사람이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상관없이 항상 동일하게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우리에게 나온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주신 능력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요’라는 고백을 반드시 팔아먹게 돼있고, 그 믿음은 ‘주께서 주셔서 박혀서 구원받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레위 지파가 우대가 되고 왜 다른 지파는 레위 지파를 옹위해야 되는가? 그게 바로 유명한 야베스 기도에 나옵니다. 역대상 4장 10절에 나옵니다. 야베스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데 야베스 이전에 누굴 낳고, 누굴 낳고, 누굴 낳고 쭉 나오다가 뒤에도 마찬가지에요. 이 4장 1절에 “유다의 아들들은 베레스와 헤스론과 갈미와 ....” 쭉 나온다 이 말이죠.


다시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유다의 B에 선형 지파가 나오더라 이 말이죠. 여기에 나오다가 8절에 보면, “고스는 아눕과 소베바와 하룸의 아들 아하헬 족속들을 낳았으며” 신학생들 가운데는 시건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뭐냐 하면,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근데 성도가 말씀을 먹고 살아야 된다. 이 말은 곧 성경을 다 외워야 한다’라고 할 때 그러면 그 사람은 역대상 외워보라 하죠. 죽기 살기로 하면 한 시간 외울 수 있을 거예요. 한 시간 뒤면 다 잊어버립니다. 치매 걸리면 다 잊어버려요. ‘예수님이 누구시더라?’


세상에 성경을 외워서 지키는 것은 유대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면 성경 안 읽어도 됩니까? 이 말은 아까 했지요. ‘안 잃어도’ 뒤에 ‘옳으니이까?’ 주께서 성경을 알게 하십니다. 평소에 성경 못하다가 실직하고 난 뒤에 성경 본다든지, 기도에 응답한 거예요. 기도가 무슨 기도라 했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내 뜻은 뭐냐 하면, 직장 생활 오래는 거고, 아버지 뜻은 직장생활 그만하고 성경 보라 하는 거고. 그러니 모든 것이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잖아요.


가장 선한 모습이 거지 나사로입니다. 아주 멋지게 선을 이뤄요. 왜냐하면 봐라 거지라도 천당 가잖아. 그처럼 양극화 된 모습을 통해서 복음의 위력이 생생하게 드러난 것이 별로 없지요. 거지 나사로 이야기 앞에 예수님 언급 하신 말씀이 있죠. “너희들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좋아한다.” 재물을 더 좋아하는 인간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거는 참 웃기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재물을 좋아하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전하는데 전하는 방법이 뭐냐? 재물 하나도 없는 인간이 천당 간다. 이것보다 재물 있는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더 좋은 방법 없어요. 건강한 사람이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간단하죠.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는데 천당 갔다. 이게 최고의 방법이에요. 교인수가 늘지 않아서 고민하십니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자기 마누라마저 마지막 교인이 떠나고 난 뒤에 그 사람 굶어 죽어 천당 갔다. 그것처럼 기막힌 복음도 없다.


저의 어느 글에 있었지만 인간은 항상 속에 뭐가? 이거에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 올라옵니다. 두려움의 실체는 몰라요. 이유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꼭 멜기세덱 같아. 뭔가 아무것도 잡히지도 않은 두려움, 표현되지 않은 공포, 알 수 없는 공포. 여기와도 십자가마을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혹시 가스 안 끄고 왔는가? 알 수 없는 두려움, 이거 육으로 해결하면 이거 성화론입니다. 두려움을 착함으로 메우려 하는 것은 선악적 사고방식이죠.


복음적 사고방식은 두려움을 하는 그 인간, 죽었단다. 십자가로써 그걸 두려워 벌벌 떠는 진동이죠. 못 박아 놓고 떨고 있죠. 우리는 구경하면 되죠. 쟤는 못 박아 놓고 떠는구나. 성도의 삶은 뭐냐? 평생 동안 못 박혀서 떠는 거예요. 구원받는 것은 떠는 걸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고. 혼자 계속 떨고 있어요.


우리 어머니도 그런 이야기해요. ‘내 죽으면 너희들 모르면 우에겠노?’ 진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일주일 내에 발견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어. 우리 어머니가 열다섯 살 때 그런 생각 안 했을 겁니다. 열다섯 살 땐 ‘얼굴 예쁘냐’ 그것 생각했지, 나 죽고 난 뒤에 발견 될까, 안 될까 그것 걱정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수시로 전화해요. 나 살아있다고. 어쩌라고요. 빨리 발견하라고.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어요.


야베스는 땅에 관한 기도했어요.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잘못 더해버리면 복불복 돼버립니다. 복수에요.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야베스의 기도는 무슨 기도냐 하면, 바로 ‘없다’는 현재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이에요. 이걸 만약에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강남의 부동산중새사들의 기도에요. 땅값 오르게 하옵소서. 내 부동산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한동안 한국교회에서 크게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육관 지어야 되고, 주차장 넓히는데 다같이 야베스 기도하자고 통성기도했어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나님께서 성령을 줄 때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줄 때는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 있는 상태에서 물 주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상태를 못 벗어납니다. 후벼 파서 ‘더 이상 내가 메시아를 만날 자격도 못 되고, 나 같은 여자가 메시아 만나서 구원받으면 횡재다’라는 인식을 갖는 그러한 작업, 그게 다윗 언약이거든요. 그 작업만을 위한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에요. 모든 게 감사할 거리지, 내가 불평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0.5초라도 깨닫게 하는 그 일만 주의 일이고 나머지는 주의 일이 아니에요.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내가 아무 도시에나 가서 이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그게 악한 일이에요. 어떤 도시에 일년을 유하며 이익을 보리라 한다. 참된 흐름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하리니. 완전히 자기를 뭐로 봅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습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피]라는 책에 보면 나와요. 기도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기도는 어떤 상태에서 한다? 하나님이 기도를 시킬 때 성령께서 할 때는 반드시 우리로 무능과 무소유로,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전혀 아무것도 못하니까, 쉽게 말해서 치매라. ‘아무것도 못하니까 주께서 거절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마음껏 사용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게 주기도문이에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내 이름 말고 주의 영광을


그 주기도문이 우리는 못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안 해도 하게끔 만들어요.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이 이뤄지게 하는 거예요. 성령이 말씀을 가지고 이뤄지게 해요. 우리의 가짜 기도 다 퍼내요. 물론 몇 초나 가는지, 2초 가는 사람 있는데 대단한 사람이죠.


그래서 역대상하를 앞으로 쭉 보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해요. 왕들 기도 안 합니다. 언제 왕들이 기도하느냐 하면, 꼭 아람, 암몬, 모압, 에돔, 앗수르 이런 주변의 나라들이 쳐들어올 때에 그때는 그들이 기도를 해요. 므낫세 같은 사람은 그렇게 까불다가 앗수르한테 쫓겨서 호되게 혼나고 난 뒤에는 겸손해져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 손으로 부셨던 성전을 다시 수축하고 이렇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빼꼼이 야베스 기도를 이뤄줬어요. 그 기도를 다시 한번 읽어볼게요.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말은 곧 지금 나에게 뭐가 있다? 반드시 근심이 없게 하기 위해서 근심이 있어야 되고, 근심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근심은 누가 유발해요? 남의 백성 같으면 근심 안 합니다. 근심 하면 안 되지요. 주의 백성이기 때문에 본인은 근심 안 할 줄 알았더니만 막상 모압, 암몬, 앗수르 쳐들어오니까 갑자기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이만하면 걱정, 근심 없다 돌아서는 순간에 걱정, 근심이 또 오고, 이만하면 이 일 해결했으면 걱정 없다 하면, 애 셋이 있으면 첫째 문제없으면 둘째가 생기고, 둘째가 없으면 셋째가 생기고, 셋째가 없으면 첫째, 둘째 생기고. 그러니까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항상 흔들리게 돼있다. 자식 많을 경우에는.


‘자식 적게 낳으면 게 옳으니이까’ 하면 곤란합니다. 옳은 게 아니고 그런 자식 줘도 하나님 은혜인 줄 감사히 받으면 그만이다 이 말이죠. 받는 방법에 인위적이 있어서 문제지만. 인위적이든 뭐든 간에 백성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인위적도 주께서 허락하셔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사람 골격 모습으로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 오른쪽에 유다, 왼쪽에 이스라엘 족보 했지요. 제가 뭐라 했습니까? ‘중심점’을 찾으라 했지요. 이 중심점 역할을 하는 게 선지자입니다. 여기에 역대상, 역대하, 열왕기상하를 보면서 일반 교인들이 뭘 오해하느냐 하면, 목사도 마찬가지지만. 현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역대상, 역대하를 많이 봐요. 현대적 사고방식이라 하는 것은 어렵게 말해서 ‘주체의식’이거든요.


주체의식이란 것은 내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내 가족, 동심원 그려가면서 점점 중요하죠. 국가가 중요하지만 국가가 세금 너무 때리거든요. 미국 이민가는 수가 있죠. 내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남편이 사랑스럽지만 남편이 애를 먹이면 도망가잖아요.   


‘내가 제일 중요해’ 이런 의식 가지고 바라보면 만약에 왜 역대기, 열왕기에는 백성들은 가만있다가 얻어맞아요. 아하스 같은 경우에 베가라는 북쪽 이스라엘과 르신이라는 아람 왕이 와서 무려 십이만 명을 죽이고 이십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요. 엄청난 것 아닙니까. 그걸 보면서 현대 의식 가지고 아하스란 왕이 잘못했지 죄도 없는 백성들이 죽느냐 이 말입니다.


이건 멀리 갈 것도 없어요.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뭐가 나옵니까?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억울하게 죽은 애들 있지요. 저는 강호동의 [스타킹]에 나오는 애들 보면 그 생각나요. ‘아이고, 참, 스타킹 때문에 애들 많이 버려놨다.’ 스타킹이란 프로 여러분 거의 안 보잖아요. 저도 거의 안 보는데 가끔 보면 나와요. 애들 나와서 트로트 부르고 하잖아요.


마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을 천사들이 빼돌리고 2년 밑에 태어난 것 뒤늦게 헤롯 군대 와서 두 살 밑에 애들 다 죽였습니다. 그 엄마 입장 생각해 보세요. 거기 오대 독자, 육대 독자 있을 건데 그것 생각 안 하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현대적 사고에서 성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들지요. 나한테 어떤 이득이 와야 될 텐데 하나님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오직 폭력에서 폭력밖에 없어요.


왜 폭력이냐? 매 맞을 만 하거든. 지옥 보세요. 지옥만큼 폭력적인 있습니까? 하나님이 폭력이라고 외치는 그들도 폭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겁니다. 너무나 폭력적이에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메시아는 사라지고 폭력이 없는 메시아를 크리스마스에만 오시는 분이 있어요. 울지 않는 애들 선물 주는 누굽니까? 산타클로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가운데서 폭력적인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없습니다. 무슨 조폭이 이것 덮어쓰고 선물 줍니까? 없지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항상 어떤 경우에도 인자하시고 웃습니다. 울면 안 주지만 울어도 줘요.


진짜 메시아는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절할 수밖에 없는, ‘난 너하고 안 놀아’란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메시아에요.


폭력 중에 폭력은 뭐냐 하면, 모압이란 나라를 다윗이 점령할 때 어떻게 했느냐? 두 줄 사람은 죽이고 한 줄 사람은 살려줬어요. 줄 그어놓고 2/3는 죽이고 1/3은 살려줬어요. 사람들이 다윗 앞에 붙이는 게 있죠. 두 자로 무슨 다윗? ‘성군 다윗’ 무슨 성군이 그런 성군이 다 있습니까? 사람 죽이면 그냥 죽이지 사람 죽일 때 개미 죽이듯이 어떻게 그렇게 죽입니까? 성군이라고 이름 붙이려면 ‘성군 세종대왕’ 이렇게 하지 그걸 다윗에게 붙여요?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입니까? 저나 여러분들이 다행스럽게 여겨야 돼요. 그 무서운 분한테 사랑을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귀싸대기를 때려도 괜찮을 우리가 오히려 피라는 이름으로 그분의 생명을 얻어먹었습니다. 이래도 주님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주 극도의 폭력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폭력이 어떻게 사랑으로 변했는가? 그 놀라운 기적을 성령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라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의 꿈은 폭력적인 하나님이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바로 ‘하나님이여, 땅을 넓히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땅 넓히는 게 복이 되게 하옵시고, 우리로 근심과 모든 환란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유다 지파 속에 포함돼있는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한숨 쉬어가면서 뭐가 낳고, 뭐가 낳고 하다가 후~ ‘주여’ 야베스의 기도가 나오고 난 뒤에 그러자마자 또 뭡니까? “수하의 형 글룹이” 뭘 낳고, 낳고 한다.


뒤에 ‘낳고’가 나오는데 그때부터 나오다가 그 뒤에는 23절에 보면, “이 모든 사람은 옹기장이가 되어 수풀과 산울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거기서 왕과 함께 거하여 왕의 일을 하였더라” 이렇게 나온다고. 그렇다면 역대기를 하신 그 취지가 나오지요.


야베스가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야베스 기도 이전에 이 사람들은 뭐가 있느냐 하면, 사람만 있지요. 야베스 기도의 응답이 되면 뭐가 주어진다? 지경, 땅이 주어지죠. 그런데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이 사람들로 환란과 근심에 잠기게 하죠. ‘환란과 근심이 잠긴다’는 말은 자기가 할 도리를 다 해봤는데 백날 소용없다는 말 아닙니까.


그때 그들은 야베스의 기도에 하나님께 참여하겠지요. 그러면 야베스의 기도는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다윗의 언약 속에 포함된 기도가 된다 이 말이죠. 앞으로 어떤 다윗 언약도 무슨 언약대로 된다? 야베스의 기도대로 될 것이다 이 말이죠. 그걸 사람들이 미리 참여하는 거예요.


미리 참여해서 그때 땅이 주어지게 되면 이 땅은 누가 주어진 거예요? 자기가 얻어서 한 겁니까? 아니죠. 하나님 거저 주시는 땅에 자기는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사실은 거저 주시는 땅이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결과가 됩니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사명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교회 누가 이뤘느냐, 이 교회 누가 세웠느냐? 만날 자랑하죠. 사실은 그래 하면 안 되고, 야베스의 기도에 들어가 보면 뭡니까? 이 교회도 주님 주신 것이고, 자식이 세 명 있으면 세 명 다 하나님 주신 것이고. 그 중에 하나 잃으면 하나님께서 욥기처럼 데려간 거고, 또 주시면 주시는 거고.


항상 우리에게 모든 게 거저 주시는 거라는 생각을 가질 때 그 거저 주시는 거저 주심이 그 바탕이 뭐냐? 그 뒤에 나오죠. 바로 6장에 보면, 무슨 족보 나옵니까? 아까 봤지요. 레위 지파 또는 누구? 아론의 제사장. 그 제사장은 뭐가 없다? 딴 사람은 땅을 주는데 그 사람들은 땅 주시는 대신 땅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피 제사를 드리는 그 작업을 그들은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거는 죽으나 사나 레위 지파를 우리가 지켜야 되고, 레위 지파의 하는 일을 우리가 무시하면 안 되고, 마지막까지 모세 언약이니까 하나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윗 같은 그런 분이 오셔서 이 레위 지파가 영원히 안정되게 보장할 수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 섬기는 생활을 해야 된다’라는 그런 흐름으로 이 족보가 이어진 겁니다. 동서남북 봤지요.


역대상 1장부터 처음으로 돌아가서 흩어보면 흩어볼 때 넘기면 돼요. 사람 이름이니까 못 본 척하고 흩어보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아까 다 했잖아요. 드디어 9장에 들어갑니다. 9장에 넘어가게 되면 진도가 갑자기 빨라지지요.


9장 17절 뭐가 나오지요? 레위 지파 나오잖아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여기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포로 잡히고 난 뒤까지 족보가 하여튼 나와요. 9장 넘어가고 레위 지파 쭉 나오고, 그 다음에 10장에 들어가면 드디어 본격적으로 사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족보 전체가 레위 지파로 끝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을 이루는 그 목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재배치를 해서 이어지는데 그 레위 지파를 이루는 작업이 성전에서 이뤄지고, 그 성전이 현재 유지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떠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확보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10장부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성전 짓기 위해서 어떻게 다윗이란 인물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가? 어떻게 유다 지파에서 다윗 한 사람밖에 없는가? 그 이야기가 쭉 이어지면서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에 레위 지파를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행정체제를 바꾸었느냐? 그 이야기가 족보 이야기보다 분량이 더 많아요. 솔로몬하고 다윗 이야기가 거의 역대기 전부 차지합니다.


그건 뭐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소소한 이야기다 말이죠. 이것은 하나의 정상 문제고. 저 눈 덮인 산 정상의 문제는 다윗이 있고 그 밑에 솔로몬, 솔로몬-다윗, 다윗-솔로몬 이 둘만 주인공이 돼요. 그러다가 성전을 통해서 레위 지파 하는 일을 돕게 하기 위해서 둘만 우뚝 솟아나 있는 이 형국이 바로 역대기의 전체 내막이 됩니다.


역대하에 들어가면 뭐냐? 내리막길로 치닫는데 이게 뭐냐? 어떻게 해서 왕들이 내려갔느냐? 제가 하고 싶었던 건 그거에요. 아까 남쪽, 북쪽 나라 중간에 누가 있다 했습니까? 선지자가 중심점이라 했지요.


현대의 사고방식에서는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잖아요. 특히 앗수르의 산헤립이라는 사람, 이 사람이 히스기야에게 쳐들어와서 하루에 십팔만 오천 명이 전사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느낀 점이 뭐냐 하면, 그놈 잘 죽었다가 아니라, 그 십팔만 오천 명 죽은 가운데서 그 젊은애들 군대 보냈다고 위문편지 보내고 있던 누이동생들, 엄마, 아빠 얼마나 가슴 아팠겠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팔만 오천 명을 한꺼번에 죽여 버렸다고.


결국은 역대기나 구약은 뭐냐 하면, 백성들은 뭘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왕이 제대로 다윗처럼 왕답냐는 겁니다. 그래서 드디어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왕하고 이야기해요. 백성들은 도와주기만 하고.


그래서 내일 아침부터는 뭘 하느냐? 왕과 선지자의 대결을 어떻게 선지자 방향성이 다윗 쪽으로 왕은 이 나라는 내 것이라는 왕의 자기 이기주의적 사고방식, 그걸 조사해보는 겁니다. 하기 전에 사울이 있는 것은 바로 왜 사울이 아니고 다윗이냐? 사울 같은 사고방식이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역대기는 전부다 남쪽만 이야기해요. 그쪽 왕들에게 사울적인 정신이 어떻게 퍼졌는가? 그것이 쭉 내일 이어질 겁니다, 그걸 조사해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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