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역대기 <제 4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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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오용익 (2009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기 제 4강
역대기상・하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것을 하나의 산이라고 할 때 다윗가문, 다윗과 솔로몬을 산봉우리에 해당된다고 보고 그 산봉우리를 아담으로부터 타고 올라가서 그 봉우리를 관통한 뒤에 다시 내리막길로 하산하는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역대상하 전체를 제대로 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역대기의 중심점은 이 산 정상에 있는 다윗, 그리고 그 다윗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 그 다윗가문에 중점이 있는 책이고, 나머지는 그것을 겨냥해서 다루어지는 내용으로서 야베스의 기도(대상 4:10)까지는 오르막길인데 그 이후에는 거기서 빠져 나왔기에 내리막길을 치달으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출애굽해서 생겨난 이스라엘의 거주지(땅)은 개인의 땅이 없고 지파의 땅입니다. 총 13지파인데 그중에 한 지파인 레위지파만큼은 땅이 없습니다. 각 지파는 총 48개의 성읍, 그 가운데는 6개의 도피성이 있었고, 그 성읍들을 배당받고 임시적으로 거주했습니다. 땅이 없는 레위지파에게 각 지파가 십일조를 내주지 않으면 그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개인 산당, 요즘 한국식으로 하면 명당자리인데 그 명당자리에 가서 점집 차려 놓고 점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당시 성직자들은 종교시세가 안 좋으면 그들의 인생도 따라서 망가지는 겁니다. 떠돌아다니다가 돈 많고 유력한 부잣집에 가서 사적으로 복을 빌어주는 개인적인 점쟁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이스라엘과 유다에 가득 찼었습니다. 그것을 요시아 왕 때에 총괄적으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지방에서 레위인들이 점쳐주고 재판까지도 했는데 그 기능들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한 곳에 집결시키고 그 외에는 다 철폐했습니다.
여기에서 반발이 일어납니다. 소위 서울(중앙)에서 노는 제사장들과 지방에 거주하는 하급제사장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지방의 제사장들은 생활의 궁핍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쉽게 하면 요시아는 레위지파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입니다. 구조조정의 명분은 ‘오직 하나님이 인정한 제사 장소는 예루살렘 한 곳 뿐이고 그 외에는 사기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제사장들은 일 년에 세 차례씩 중앙본부에 다녀가야 합니다. 유월절, 수장절, 맥추절 세 절기 때는 모든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성소에서 다 모여서 절기를 지켜야 된다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때 일반 민중들이 좋아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방제사장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민중들이 원하는 것, 민중들에게 희망을 팔아먹는 대가로서 커미션을 챙기는 일을 해 왔는데 그게 대중들에게는 더 편하고 좋았습니다.
일반 민중들에게 율법이라는 것은 골치 아픈 거예요. 먹고 살기도 힘든데 자기 생존이 우선인 마당에 거기다가 법까지 지키려고 들면 그 시어머니 잔소리 같은 것이 그게 뭐가 듣기 좋겠습니까? 사람은 법은 멀고 자기 희망이 우선입니다. ‘새해 복 받으세요.’ 라는 말은 ‘새해 희망을 받으세요.’ 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각 지방마다 산당, 즉 명당자리들이 다 있습니다. 옛날 계시가 임했던 베델, 세겜, 실로같은 장소들이 다 명당자리인데 계시가 임하고 언약궤가 한 번씩 거쳐 갔던 곳입니다. 그 명당자리에서 제사장들이 대중들에게 희망을 팔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당신에게 축복이 있을 겁니다. 올 한 해 내내 평안할 것입니다. 작년에는 집안에 재앙이 있어서 하는 일마다 잘 안 풀렸지만 올 해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당신의 하루하루가 다 복될 겁니다.’
오늘 아침에 해 뜨는 것을 보셨습니까? 오늘 해 뜬 시각이 7시 40분이었습니다. 그 태양이 오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희망도 함께 뜨는 것을 느낀다 이 말이죠. 그게 마음에 다가서고 편하지 율법이 어쩌고 단면족보가 어쩌고 선형족보가 어쩌고, 그런 것은 어렵다는 말이죠. 어려운 것이 나오면 제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닌데 좀 미안스러워져요. 성경에 이렇게 딱딱한 내용이 나오면 이 어려운 내용을 쉽게 못해주는 약간의 죄스러움? 미안스러움이 있습니다.
다윗을 중심으로 내리막길로 치닫는 왕들의 이야기는 주된 것이 아닙니다. 중심은 다윗가문을 구축하기 위해서 군대가 얼마나 동원되었으며 찬양대는 어떠하며 제사장들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중앙에 있는 제사장들만으로는 모자라기에 지방 제사장들이 순번제로 파견근무를 했습니다.
처음 출애굽 할 때 12지파(땅이 없는 레위지파 제외한)가 레위지파를 중심으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지킨다는 조건하에 하나님의 주시는 약속의 땅을 받아서 살 때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개인 소유의 땅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어려운데, 만일에 백성들이 왕을 구해서 왕이 있게 되면 왕은 개인 소유의 땅을 가지게 됩니다. 나봇의 포도원이야기에 그게 나옵니다.
아합왕이 보니 나봇의 포도원이 농사도 잘되고 그 땅이 탐이 났습니다. ‘어이, 그 땅 나에게 팔아라. 그 땅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지게 해 줄게.’ 그 때 나봇의 하는 말이 ‘제가 그 땅을 사고팔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땅은 개인 용도로 팔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신약이나 구약이나 이것을 기업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처음 보는 사람은 기업이라고 하니까 사업이라고 여기는데, 성경에서 기업이란 상속이라는 뜻입니다. 상속에서 중요한 것은 상속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누구가 주시더라’ 라는 그 ‘누구’에 해당되는 그 분이 중요합니다. 누구누구로부터 분배, 분양받은 상속분이기 때문에 그 상속분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로부터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그 관계성이 더 중요한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기업을 받았다’ 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옷으로 덧입혀진 사람은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가 관계없이 예수로 옷 입은 사람은 주님의 아들이 되고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종의 기업이 아니고 아들의 기업, 아들의 상속분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26-4: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자니라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래서 땅(기업)을 좋아서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어떤 분이 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나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것을 그 땅을 보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상속권의 신학이 어려운 겁니다. 그 상속권을 구약에서는 야베스의 기도에 나오듯이 땅으로 봤습니다.
역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을 줄때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통해서 주기 때문에 야베스의 기도이후에는 ‘군대가 몇 명이고, 군대가 몇 명이고’ 라는 기도가 족보에 따라 붙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상속이 약속의 땅인데 신약에서는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신약성경의 시대에 살면서 기도해서 부동산을 가지고 장사하려고 하는 사람은 신약성경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오셨냐?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런 식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안 상홍 집단 같은 경우인데 그들은 ‘당신이 저주받는 것은 유월절을 안 지켜서 그렇고 유월절을 지키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유월절 지키면 복 받으니까 돈 내놔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인정 못 하겠다’ 하는 주의입니다.
대순진리회를 비롯해서 어느 이단치고 돈과 결부 안 되는 설교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학생들이 그것 듣고 공납금 다 바칩니다. 심지어 달라이라마까지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수녀원까지도 그렇습니다. 수녀원에 들어갈 때 시험만 쳐서 들어가는 줄 압니까? 수녀원에 들어갈 때는 여자가 시집갈 때 혼수 챙기는 것 보다 더 많이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일종의 공동체인데 빈손들고 오는 공동체는 안받아줍니다.
한밑천 가지고 들어가서 저임금의 노동을 해서 단가를 내린 상품들, 참기름이나 된장 같은 것을 팔아서 공동체들이 운동을 벌이는 겁니다. 된장 참기름 같은 것 만들어서 파는 일은 박 태선집단만 하는 일이 아니라 수녀원에서도 다 하고 있는 일입니다. 서양의 자본주의가 5세기, 6세기 즈음에 수도원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자본주의가 뭐냐,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이 ‘자본주의는 멸망합니까?’ 라고 하는데 자본주의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보통 경제는 사물과 생산품이 있어서 그것을 주고받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초사물적인데 그 말은 ‘잉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잉여, 남아도는 것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자꾸 들어야 이해가 갑니다.
폴리네시아, 파푸아 뉴기니의 원주민들이 고기를 잡을 때, 하루 두 마리분량의 양식만 필요하면 하루에 두 마리만 잡으면 하루 일과 끝입니다. 그런데 호주에 있는 어선의 선원들이 그 주변의 고등어를 다 잡아갑니다. 원주민들이 보기에 그 선원들은 불쌍하다는 거예요. 호주의 원양어선 선원들이 하루에 고기 몇 마리나 먹습니까? 세 네 마리 먹으면 끝입니다. 그런데 왜 수만 마리를 잡느냐는 말이죠. 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느 것이 정상입니까? 하루 두 마리만 필요하면 두 마리만 잡으면 되고 내일되면 또 두 마리를 잡으면 되고 그렇게 살다가 늙어죽으면 되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natural) 아닙니까? 왜 두 마리만 잡으면 될 것을 가지고 수만 마리를 잡느냐 이 말이죠. 원주민들이 보기에는 이 점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전쟁을 합니까? 그게 잉여 아닙니까?
이것이 『피』라는 책에도 나옵니다만 잉여가 어디서 생겼는가를 조사해 보니까, 어떤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질 때 일상에서 벗어난 어떤 파격적인 일이 돌출될 때 사람은 거기서 존재가치를 느낍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신사가 바나나껍질을 밟아서 철퍼덕, 하고 넘어질 때 사람들이 마구 웃습니다. 술에 쩔어 사는 노숙자가 넘어지는 것은 늘 상 일어나는 일이니까 사람들이 웃지 않는데 말끔한 신사가 넘어질 때는 웃어요.
“…… 자본주의에서 가치의 증식은 표상의 트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교환가치는 그때그때의 물가나 경기에 맞추어 정할 수가 있다. 그에 비해서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정체파악이 어려운 변화를 지니고 있다. 교환의 가치를 전혀 어기지 않고서도 노동의 과정으로부터 가치의 증식이 그야말로 합법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증식은 ‘웃음’의 생리작용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신사가 혼자서 흠잡을 데 없는 말쑥한 차림으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땅바닥에 버려져 있는 바나나 껍질을 보지 못해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고,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한다. 이러한 한가로운 장면을 생각해 보자. 즉 웃음이란 처음 상태와 마지막 상태에서 일어나는 잉여에너지로 인해 발생되는 것이다. 이 잉여에너지가 떠나니는상태인 것이다. 자본 증식의 과정에서도 이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 발생한다. 잉여가치는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의해 대신 발생하는 것다. 교환의 사이클로부터 넘쳐흐르는 여분의 가치가 창출된다.…….”(이 근호, 피, 대장간, 2008, 61쪽)
이게 뭐냐? 거기서 파격적인 잉여를 생산한 겁니다. 잉여란 욕망에서 나옵니다. 욕망은 창조성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해서 욕망을 불 질러서 잉여를 나타낼 때 자본주의는 돌아갑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단순히 그냥 돈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여분의 돈 때문에 돌아갑니다. 왜 그런지 몰라도 여분의 돈을 그냥 갖고 싶은 거예요. 왜? 내 욕망이 그것을 원합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살다가 자연적으로 사는 것이 권태로운 거예요. 권태를 벗으려면 자기 내부에 들어가 봐야 되는데 그 내부에 들어가 보니까 끝없는 마그마같이 분출하는 욕망이 있어요. 그 욕망을 경제구조로 바깥으로 끄집어내니까 이유도 없이 무조건 많아야 된다는 식으로 되는 거예요. 자본주의가 아닌 시대의 동양사상, 불교, 유교는 사람이 자기 욕망을 스스로 잠재울 수 있다고 봤습니다.
특히 불교의 중들과 토론을 벌이고 싶은 주제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이것이 없어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고깃집에서 고기를 칼로 다지고 쪼개듯이 다 산산조각 내면 결국에는 산산이 흩어져서 없어진다고 보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오온(五蘊)이라는 기로 되어 있기에 그 모든 것이 흩어지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걸 반박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흩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몸, 자아때문에 힘드니까 생각해 낸 것이 ‘이 자아만 날라 가버리면 이 모든 것도 함께 날라 가버린다’는 것이 불교사상, 동양철학, 노자사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만치 않아요. 사람이 현상학적으로 보면 죽으면 사라진 것으로 보이죠.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안타까운 것은 그동안 함께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 상당히 괴로워요. 하지만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져요. ‘사라짐 - 잊혀짐’입니다.
그런데 남들이 볼때는 ‘사라졌구나. 안타깝다. 그만 잊자.’ 이렇게 되는데 문제는 죽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보고, 사라지고 싶어서 죽는데, 문제는 안 사라지는 거예요. 안 사라지고 비로소 죽을때 타인이 없고 자기혼자만 있는 순수한 현실로 돌아오지요. 예를 들어서 친구가 죽었습니다. 죽으니까 땅에 묻었습니다.
무덤 파보면 흙이 되어 있겠지요. ‘아까운 친구가 죽었구나’ 하고 본인도 사라지고 흩어지기를 원했고 불교식으로 하면 흩어지고 사라지면 그만입니다. 다시 모아지면 환생하지만 어쨌든 흩어지면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죽은 부자 나사로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막상 죽어 보니까, (안 상태 기자! 안 상태 기자!) ‘난 지옥에 왔을 뿐이고, 난 불덩이 속에 있고, 목말라 죽을 지경일 뿐이고….’
죽음이 제일 괴로운 것은, 죽으면 죽을 지경이라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잊기 위해서 죽는데 예수님의 부활에 의하면 사람이 한 번 죽고 난 뒤에는 그 몸이 악한 부활로 그 몸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사람의 실수가 뭐냐?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번 사람의 몸이 되면 그게 지옥 갈 몸이든 천당 갈 몸이든 그 몸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빼도 박도 못합니다.
운명적으로 새로운 몸인 영원한 장막을 입어야 합니다. 옷은 문화고 문화는 이 지상에서 만들어낸 껍데기입니다. 껍데기는 벗겨지고 알몸으로 가는데 그 알몸은 있어야 합니다. 그 알몸이 바로 ‘나는 …!’ 하는 바로 그겁니다.
지금 구약의 기업, 땅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잉여로 돌아가는 것이 자본주의인데 그 자본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으로 구약의 상속물인 땅(야베스의 기도)을 이해해서 부동산이나 재산의 확장을 노리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땅 없는 레위지파를 중심으로 그 나머지 열두지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땅 없는 레위지파가 하는 일이 제사입니다.
땅 없는 열두지파 전부가 하나가 되어서 제사, 그 업무를 보호하고 지켜 냄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땅을 추구하게 된 겁니다. 신명기 12장에 나오죠. ‘내가 지시하는 그 땅에 내 이름을 두겠다’고 합니다.
신명기 12:1-7, 18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쫒아낼 민족들이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찌니라.”
그런데 신약에 오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고 성령 안에서 너희가 나와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새로운 기업, 상속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봇의 이야기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기에 절대로 줄 수 없다’고 하니까 아합의 왕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왕비의 이름이 이세벨인데 그 이름이 얼마나 예쁩니까? 앞모습이 중요하지만 그 모습은 배제하고 뒷모습만 보고 이세벨, 하면 남자들은 다 끌립니다.
뒤에서 ‘저, 앞에 계신 분 누구십니까?’ ‘김 이세벨입니다.’ ‘어머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누가 함부로 이름을 짓습니까? 이것을 음파로 조정해서 장사 해먹는 수가 참 많습니다. 이세벨이 하는 소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왕이 가지겠다면 그냥 갖는 것이고 그게 법입니다. 여보, 당신은 왕이잖아요. 뭐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주저하고 그럽니까?’ 라고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왕이었지.’
하나님의 왕 되심이라는 것은 레위지파와 모세율법에 의해서 기업이 이미 확정된 상태에 있는데 거기에다가 사람이 왕이 되어 버리면 사람은 자기 개인적인 소유를 갖기 위해서 자기가 나서게 됩니다. 그러면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무도 손 못댄다. 네 농사는 네 지파에서 알아서 지어 먹어라.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네 먹을 것은 네가 알아서 지어 먹어라.’ 이것이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의 법입니다.
이것이 법인데 이 법이 다윗에 와서 깨져 버립니다. 다윗 대에 와서는 예루살렘이 다윗 개인소유의 부동산이 되어 버립니다. 예루살렘을 다윗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윗위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죠.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왕이 되는 그 체제를 보이기 위해서 다윗이라는 왕을 세워놓고 거기에 구멍을 뚫어서 다윗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뭘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될 왕으로서 등극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은 뭐냐? 그냥 들러리죠. 그것을 누가 아느냐? 다윗이 알아요. 물론 다윗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저도 명색이 왕입니다. 왕이기에 왕답게 절대적 권력을 행사해보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다가 갓이나 나단선지자에게 호되게 당합니다. 다윗이 혼자 다윗성에 있을 때에 우리야의 아내를 탐합니다. 그것은 왕으로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나중에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있는 자리가 왕자리가 맞기는 맞는데 그 자리는 하나님의 왕 됨이 나의 왕 됨을 후비고 파는 입장에 놓인 왕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열왕기나 역대기에 나오듯이 다윗이 이스라엘백성의 숫자를 셉니다.(대상 21장) ‘야, 내가 목회를 잘해서 우리 교인들이 얼마나 늘어났나?’ 하는 식으로 숫자를 셌는데, 성경에 보면 그것은 악마(사탄)의 역사로 인해서 숫자를 세었다고 했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이 재앙을 내려서 칠만이 죽었고 ‘다윗이 큰 죄를 범했다’고 할 그 때에 다윗이 제사를 드리는데 그 장소가 나중에 성전이 세워지는 장소입니다. 결론이 뭐냐? ‘다윗은 너의 죄를 알고 그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라는 구심점으로서의 왕이고 용서하고 말고는 다윗을 사랑하는 하나님, 진짜 왕이 다윗을 용서하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현상은 (지금까지 강의한 것 중에서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왕의 수하에 있는 왕의 사랑받는 모든 백성이 더불어 용서를 받는 혜택이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개개인을 보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 집합체를 하나의 인간으로 봐서 그 인간의 대표자로서 왕을 세워서 그 왕이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고 그 나머지는 그냥 운명이 결정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편리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편리하죠. 만약에 왕이 정치를 잘못해 버리면 12만명이 죽고 20만씩이나 포로 잡혀가고 포로잡혀 갔던 곳에서 오뎃이라는 선지자가 ‘돌려보내라’ 하는 일이 아하스 시대에 있었습니다.
역대하 28:1-11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세라 예루살렘에서 십륙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 자녀를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한지라 그러므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람 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가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이는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과 총리 대신 엘가나를 죽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중에서 그 아내와 자녀 합하여 이십만 명을 사로잡고 그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그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저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를 진노하신 고로 너희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 노기가 충천하여 살육하고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압제하여 노예를 삼고자 생각하는도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그런즉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너희가 형제 중에서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한지라.”
그러니까 백성들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특징입니다. 그것을 즐겨하고 그것을 고마워하는 사람이 오늘날의 성도입니다. 내 인생의 운명을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쥐고 있다는 것을 감지덕지 고마워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 쥐고 있는 분을 ‘주여!’라고 합니다. 구체화 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여!’ 라는 말은 ‘내 운명은 내 행함과 관계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말로만 주여, 라고 해놓고 ‘아이고, 오늘도 성경을 못 읽었네. 오늘도 교회를 못나갔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주여!’ 하고 있는 겁니다. 역대기에서 내리막길로 가는 왕들의 잘못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나 유다라는 나라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이고 자기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용서를 구하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 다윗언약인데 그 나라가 자기의 나라인양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르호보암, 발음도 어려운데 북쪽에는 여로보암, 남쪽에는 르호보암, 먹음직 보암직한 두 사람이 있는데, 이 르호보함의 경우에 바짝 3년 동안 신앙생활 잘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대로 신앙생활 잘하니까 땅도 넓혀지고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라를 자기에게 돌리려는 심산으로 ‘정치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정치자문을 구했습니다.
신하들이 현명한 대답을 해 줬습니다. ‘당신이 왕이라고 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 말고 설치시지 마시고 백성들의 쫄따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해서 백성들의 존경은 강요로 되지 않고 우러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거든요. 백성들은 왕을 다윗을 모델로 해서 다윗과 비교합니다. ‘다윗처럼 하는가 어디 한번 보자. 솔로몬처럼 하는가 보자.’ 한다는 겁니다.
‘이미 다윗과 솔로몬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리 왕이라도 다윗과 솔로몬처럼 하지 않으면 당신을 왕으로서 취급 안하니 당신은 그냥 백성들의 쫄따구 노릇만 하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왕이 자기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솔로몬은 회초리로 때렸지만 너는 아예 전갈로 내리쳐라.’ 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아파트 각 호마다 택배로 전갈 하나씩 택배로 보내보세요. 애들 무서워서 못살죠.
그만큼 공포정치를 감행한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잊어라, 하는 겁니다. 다윗도 잊고 솔로몬도 잊고 다 잊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너의 시대는 없어. 이 나라는 여호와가 왕이지 너희 시대, 너의 것은 없다.’ 그 말입니다. 그게 바로 과거완료라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 배웁시다. 과거와 과거완료와의 차이입니다. 어렵더라도 배워야 합니다.
과거-현재-미래가 있을 때, 여기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갈 때는 시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움직입니다. 내가 현재에 와 있으면 과거는 과거가 되고 내가 다시 미래에 와 있으면 현재도 과거가 되어 버려요. 여기서 주인공이 내가 되어서 내가 과거 현재 미래를 내가 판단하는 겁니다. 칸트는 이것을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을 가지고 강제로 시간을 자르는 행위를 가지고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시간을 자르는 폭력적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이고, 내일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기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잘라서 정해놓는 폭력을 행사해 놓고 걱정은 혼자 하고 있는 거예요.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속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진동(vibration)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도 진동, 벌벌 떨면서 70, 80평생 사는데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십자가 못 자국 때문에 구원받지 자기 하는 일로는 구원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두려움을 없애겠다.’ 하는 그것도 그냥 하지 마세요. 두려움으로 진동하면 운동도 되고 안 좋습니까? 그냥 벌벌 떠세요. 걱정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사람이 걱정 없으면 뭐가 걱정되는 줄 압니까? 걱정 없는 그것이 걱정이 됩니다. ‘분명히 이 시간에 걱정이 있어야 되는데 ….’
걱정은 맘껏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여유만만하게 걱정하고, 말이 좀 이상합니다만 기분 좋게 근심하고. 이렇게 자신이 과거, 현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그 몸이 움직여서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 몸 말고 멜기세덱의 반차라고 하는 하늘에 속한 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를 과거 완료에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과거완료의 결정은 우리한테 있지 않고 예수님한테 있기 때문에 30을 살든, 40을 살든, 80을 살든 이미 이루어진 상황, 이미 결정된 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 입장과 은혜와 혜택을 입고 사는 거예요.
그것이 에베소서 2장에 보면 ‘하늘에 앉히시니’(6절) 라고 과거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절) 합니다. 이미 과거완료라는 체육관 안에 놓여져 있으면서 우리는 그 몸이 따라가면서 이미 주님이 이루신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아, 이래서 내가 천국 가는구나.’ 라는 확인차원에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 과거완료를 성경에서 표현하는 방법이 부정사, 영어로 하면 to-부정사입니다. to-부정사는 동사를 명사나 형용사로 바꾸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묵시적으로 이미 그렇게 되었음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do-한다.’가 ‘to do-했음’ 이 됩니다. 이미 확정된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은 변하지 않고 우리는 만 날 변하죠. 걱정하면서 만 날 변해도 그것은 상관없는 겁니다.
칸트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과거완료는 발견 못하고 인간이 왜 고민하는가를 철학적으로 따져 보니까 인간이 자기 맘대로 시간을 조정하기 때문임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제 강의시간이 짧더냐?’ 어떤 사람은 ‘난 짧더라.’ 어떤 사람은 ‘나는 길던데.’ 이것이 왜 그러냐 하면 전부다 각자 각자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시간관 때문입니다. 몸이 아플 때는 길게 느껴지고 몸이 건강할 때는 짧게 느껴지는 식으로 다 달라요.
그렇더라도 과거완료 속에서 그분의 입장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처럼 르호보함시대부터 ‘내가 왕이다. 그러니 과거를 잊어버려라.’ 하고 백성들은 ‘너는 다윗언약에 의해서 왕이 되었을 뿐이야.’ 라고 합니다.
(르호보암) “아니야, 내가 잘났어” (백성들) “당신이 잘난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다윗이 잘나서 그런 혜택을 입고 있는 거야.”
이게 다윗언약이거든요. 선지자들이 계속 지적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왜 이탈하느냐?’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왕(아마샤)은 ‘너 맞을래? 너 죽는다.’ 라고 나옵니다. 심지어 요아스라는 왕은 여호야다라는 제사장이 쿠테타를 일으켜서 일곱 살 밖에 먹지 않았을때 세워진 왕입니다. 아달랴라는 이세벨의 딸로 인해 온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었을때 다시 원상복구를 시킨 쿠데타입니다.
그런데 그 요아스가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제 어미의 유전자를 받은 탓인지 하나님을 버리고 마구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때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 선지자가 있어서 요아스를 말렸습니다. ‘임금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과거를 생각하셔야죠.’ 하니까 ‘이게 어딜 왕에게 대들고 까부는가!’ 하면서 죽이고 말았어요. 죽으면서 스가랴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억울함을 갚아 주옵소서.’ 그 기도대로 일 년 만에 갚아줍니다.
아람군대가 쳐들어가게 하는 식으로 징벌하니까 그 전쟁 통에 요아스는 부상을 당하고 침상에서 부하에게 죽임을 당합니다(대하 22-24장). 그 다음 왕 아마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웃시야, 요람, 아하스, 왕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에서는 그게 안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 자꾸 여기서 이탈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를 보기 위해서 역대상 9장을 보면 그 족보의 명단은 이미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돌아올 때 꼭 유다지파와 제사장이 짝짝꿍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유다지파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뒤에 바벨론 시대가 지나고 메대, 바사의 시대가 되어서 고레스의 특명에 의해서 성전 짓기 위해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온 사람들은 유다지파와 레위지파가 짝을 이루어서 돌아오고 유다는 어찌되었든 간에 레위지파가 하는 일이 중단되지 않도록 성전 짓는 일에 애를 씁니다.
그 명단이 9장에 죽 나옵니다. 역대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역대상 9장에 나오는 바로 이것, 이것이 표준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서 역대기를 기록한 거예요. 역대상 9장 3절 이하에 보면 유다를 대표하는 네 지파가 레위지파 하나를 모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왔다는 겁니다. 맞지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온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데 그리고 나서 10장에 보면 지긋지긋하게 보이는 족보의 숲에서 벗어나서 이제부터 사건위주로 기록됩니다.
왜? 모든 족보는 다윗과 레위지파를 위해서, 레위지파가 하는 제사와 다윗이 그 기능을 보좌해야 된다는 것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그 뒤로부터는 사건을 배열할 때 ‘왜 다윗이어야 하느냐, 왜 유다지파이어야 하느냐를 증거 하는 쪽으로 죽 이어져 가는 겁니다. 어제 강의한 히브리서 7장이 좀 어려웠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레위지파(율법) 중심으로 모세언약이 왔다가 신약시대에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은 율법(레위지파)말고 다른 지파, 유다지파를 세워서 이제는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수고했으니 이제 그만!’ 하고 정지를 시켜놓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레위지파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속했지만 유다지파는 남들 보기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온 지파인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이 땅에는 족보가 없는, 육적인 족보가 아니고 영적인 족보인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서 툭, 하고 돌발적으로 나타난 것이 유다지파였다는 겁니다.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그리면 다윗이 유다지파인 자기 고유의 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장소는 모압, 암몬, 에돔 등 아무리 침입을 당해도 관계가 없습니다. 다윗의 땅만 다시 확장되면 새로 이스라엘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소는 다윗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냥 땅은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내 땅이다’ 할 수 있지만 다윗의 땅을 분배받아 버리면 ‘이제는 내 땅이다.’ 라는 것이 없어요.
전부 다 다윗의 땅이 됩니다. 이 다윗의 땅을 가지고 신약에서는 그냥 다윗이 아니고 ‘다윗의 자손의 땅’이라는 것이 붙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땅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고 아들, 개인 소유의 나라입니다. 개인 소유의 나라에 이방인이 들어가서 사는 것,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아들, 어린양의 공로만 높이는 곳입니다. 개인적인 부동산 거래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끝까지 개인적인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면류관은 반납해야 됩니다. 한번 쓰는 것은 괜찮습니다. 한번 쓰고는 반납하는 반납용입니다. 반납 늦게 하면 벌금 뭅니다. 제 때 쓰고 쓰면서 바로 벗겨서 바로 반납해야 됩니다. 그냥 벗어 던지면 삐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반납할 때 멘트를 해야 합니다. ‘주님, 이 면류관은 제가 쓰기에 합당치 않고 주님만이 쓰시기에 합당합니다.’ 라고 던지면서 고백할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이라는 것은 천국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땅에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지금 이 세상에서 과거완료 속에서 바뀔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 안 바뀌면 천국 못갑니다. 인간이 인간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거든요. 인간은 자기 고통을 피하기 바쁘지 스스로 자기를 바꿀 생각은 안하는데 고맙게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만들어서 바꿉니다.
죄인이 의인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기에 그냥 죄인으로 죽 가면 됩니다. 성도로 살기 참 편합니다. 왜 성도가 신앙생활 하기 힘 드느냐 하면 죄인으로 죽 나가주면 참 편한데 죄인에서 의인인척 하려 드니까 이게 힘들어요. 마일리지 쌓으려고 하니까 힘 드는 거예요. 항공사 마일리지, 항공사 파업해 버리면 그것 다 소용없습니다. 마일리지 쌓지 말고 그냥 죄인으로 사시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의인되게 해 주십니다.
왜냐? 우리가 주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 따로 계셔서 그분이 언약대로 우리를 용서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는 안 받아도 주님의 기도는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기도의 효력을 톡톡히 봅니다. 그 관계를 뭐로 보느냐?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봅니다.
신부보고 돈 벌어 오라고 하는 것은 요즘 남편들이나 그렇지, 주님은 자기아내 보고 돈 벌어오라, 그런 소리 안합니다. ‘너는 내 사랑만 받아라.’ 그겁니다. 그런 이상적인 남편이 이 세상에 있는가? 그런 남편은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에게 속했기 때문에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틈만 나면 돈 벌어 오라고 하고 좀 놀면 구박주고. ‘전에는 좀 벌더니 요새는 왜 안 버나?’ 이런 식으로요.
그냥 죄인으로 살면 얼마나 편합니까? 배운 재주가 죄기 때문에 그냥 죄 지으면 누가 죄지었다고 해서 지옥 보냅니까? 어차피 지옥이고 어차피 진동(vibration)인데요. 죄 지으면서 가시면 군데군데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알게 하게 되면 용서해 달라고 쳐다보는 그 대상자가 자기보다 더 크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돈이 영생주지 않고 예수님이 영생 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마일리지를 쌓아놓고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까불고 있으니까, 주님이 ‘네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빈털터리 되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때부터 그 부자청년이 근심이 되어서 두 번 다시 안 왔잖아요.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뭔가 삐진다는 것은 분명히 말로는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어요. 십자가복음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학생이 신학교에 다닐 때는 예수를 믿어요. 신학교 졸업한 뒤부터는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믿습니다. 졸업하고 난 뒤에는 교회를 소유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리막길이고 그 근성이 르호보암 - 아비얌 - 아사 - 여호사밧 - 여호람 - 아하시야 - 아달랴 …, 계속 나옵니다.
북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로보암 - 나답 - 바아사 - 엘라 - 시므리 - 디브니 - 아합…, 이런 사람들이 죽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이 죄짓는 것은 우리하고 똑같은데 고마워해야 될 것은 그 사람들의 중심점, 그것을 누가 갖고 있다고 했습니까? 선지자들이 있어서 자꾸 중심점을 맞춰 주는 거예요. 고층건물을 지을 때 한가운데가 비어있고 그 한가운데에 무거운 추를 달아요.
무거운 추를 달아서 지진이 있어도 같이 흔들려 주기 때문에 중심점이 붕괴하지 않습니다. 제가 고층건물을 지어보지 않았지만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 중심, 심지가 뭐냐? ‘다윗의 등불’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등불이 있어야 된다는 말은 그만큼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겁니다. 집에 초가 많다는 말은 그 집이 자주 정전된다는 뜻이 되잖아요.
다윗언약, 그 등불 때문에 그들은 꺼지지 않는데 역대기에서 희망은 뭐냐? 그 등불 때문에 포로생활 70년 만에 돌아왔기 때문에 그 등불 지키세. 어떻게? 에스라, 느헤미야는 세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1) 성전 짓는 것과 십일조 2) 안식일 지키는 것 3) 신앙 없는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경우 강제이혼 시키는 것. 그때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것이고 위자료 문제로 가정법원이 아주 바빴을 것 같습니다.
강제로 이혼시켜서 신앙 있는 사람만 오게 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신앙 있는 사람만 오게 한 것이 아니고 율법적으로 살 사람만 모았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들은 신앙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냥 율법적으로 살 사람들만 온 거예요. 사람들이 결혼할 때 신앙 따지고 인물 따지고 다 따지는데 그런 것은 다 용서가 돼요.
하지만 돈 없는 것은 용서가 안돼요. 신앙을 따지는데 그것은 깊숙하게 감추어 놓은 비장의 카드는 내어놓지 않고 자꾸 엉뚱한 것을 가지고 그러는데 사람이 돈이 없으면 모든 여자가 다 좋아 보이고 돈 좀 있으면 여자를 골라서 가려고 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좀 있으면 미쳤다고 결혼합니까? 그런데 돈이 없으면 살아 보려고 남자 찾고 신앙 찾고 그렇게 하는데 그만큼 지금 생활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닙니까?
역대상 10장을 봅시다. 왜 다윗인가?
역대상 10: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신 이유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했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물었는가? 13절에 보면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그러니까 점치는 여자에게 간 이유가 뭐를 거부했다? 그게 ‘나 여호와의 말씀은 부담됩니다.’ 라는 뜻입니다. ‘나 여호와 별로입니다.’ 라는 여호와에 대한 존재감 상실입니다.
‘여호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내 머리에 두고 싶지도 않습니다.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한 것이 답답할 때 점치는 여자에게 간 거예요. 하나님께서 남의 나라 같으면 그냥 봐줍니다. 하지만 그 나라가 누구 나라입니까? 하나님 자기 나라이기 때문에 그 사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죽이고 이미 준비된 사람 다윗을 그 자리에 대치하는데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할 때 명령으로 하지 않고 규범적으로 한다고 했지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명령으로 했다면 다윗도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규범적으로 해버리면 다윗은 잘못해도 백성이기 때문에 봐주는 것이 있고 사울은 잘못했다는 것을 빌미로 해서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전략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요. 알 수 없을때는 10분 쉬면서 생각해 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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