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레 11:41-45 / 정결한 짐승(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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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결한 짐승(2) (레 11:41-45) 지난 시간에 음식의 먹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려서 먹는 것은, 단순히 먹는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즉, 날마다 자기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그러한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와 같은 성경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내리시면 그것을 듣고 기억하고 암송하면서 사는 것이지, 책으로 만들어서 매일 같이 본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책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불과 몇 백년 전의 일입니다.
이런 광야생활을 할 때는 지금부터 약 3,500년 정도 이전이니까, 책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생각도 못했고, 특별히 아주 부자들은 양이나 소가죽에 글을 몇 자 적어서 보관을 하던 그런 시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푸셔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의 하나로 이렇게 음식으로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돼지는 부정하고 소는 깨끗한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오히려 위생적으로 돼지는 소보다 훨씬 더 깨끗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지키라고 하신 것은, 다른 이방신들의 말은 듣지 말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의 말도 듣고, 나 여호와의 말도 들으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말도 듣지 말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기쁩니까, 아니면 힘이 듭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기쁘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고, 힘이 들고 억지로 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이지만,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억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억지든, 아니든, 아예 말씀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드리고, 말씀 가운데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만약에 우리에게 이런 연한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세상에 찌 들리고, 돈에 찌 들린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 어떤 때에는 화가 나기도 합니다. 물론 저 자신에게 제일 먼저 화를 냅니다만. 정말 우리들은 그렇게는 살아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돈과 물질과 명예 때문에 사는 것이 분명히 아닌데, 왜 우리는 항상 그런 것에 발목이 잡혀서, 오늘도 염려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지를 곰곰이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한 음식과 더러운 음식을 구별하셔서, 우리들 보고 깨끗한 것만을 먹으라고 하면, 우리는 따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 알겠습니다. 제가 깨끗한 것을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이것은 왜 더럽습니까?", "이것은 왜 깨끗합니까?", "발굽이 꼭 갈라져야만 깨끗합니까?" 라고 질문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그런 것까지 가르쳐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인도해 주십시오" 라는 모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꾸만 안 하려고 옆으로 빠지려고 궁리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빠지는 길을 만들어 놓겠습니까? 그런 길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먹는 음식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리고 율법을 가지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는데,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계속 음식을 가지고 가려서 먹어야 하는 것입니까?
신약시대에는 음식이 아니고,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가지고,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구원받고, 안 믿는 사람은 버리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무엇을 하고, 안 하고"의 지키는 차원이 아니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네가 이 십자가를 믿느냐?" 라고 주님이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러므로 이제는 음식은 자유롭게 먹어도 됩니다. 토끼고기, 돼지고기를 먹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구약시대에는 먹지 말라고 했다가 신약시대에는 먹으라고 하는, 이렇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음식을 골라서 먹는, 그러한 율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희생의 제물로 달리신 그 십자가가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죽은 십자가는 안되고, 오직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니까, 또 이 십자가를 몸에다 지니려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희생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를 가지고 목걸이, 반지를 하는 것은 그렇게 권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의 부적처럼,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드시는 분들은 얼마든지 목걸이, 반지를 만드셔도 좋지만 말입니다.
이 십자가를 악세사리로 달고 다닐 만큼 참 좋아하시는데, 그런데 사실 이 십자가는 무서운 사형틀 아닙니까? 십자가는 사실 무섭고, 겁나고, 징그러운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달려 죽는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유고' 라는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서 난리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잘 이해가 안 될 줄 압니다만. 같은 나라인데, 우리처럼 남쪽과 북쪽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인종차별은 뭐고, 종교는 뭐냐고 말입니다. 왜 전쟁까지 하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지금 서로 앙숙 관계에 있는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같은 유고슬라비아라는 연방국을 이루고 있지만, 같은 나라이면서도 혈통이 다릅니다. 그런데 혈통만이 다른 것이 아니고 종교도 다릅니다. 전 세계에 악마 같은 나라처럼 되어있는 유고의 세르비아계는 기독교이고, 코소보는 이슬람교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어떻게 한 나라에 들어 있겠습니까? 그래서 코소보라는 지역이 따로 독립을 하려고 하니, 유고 연방국이 박살을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독립은 무슨 독립, 다 없애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과거 유고 전쟁 상황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야 우리가 몰라도 상관이 없지만, 이 전쟁하는 모습입니다. 나토 연합군이 유고와 전쟁을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지난 이라크와 전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전쟁을 하면서 먼저 비행기를 보내서 상대방 나라에 폭탄을 퍼부어서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전, 후방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먼저 후방을 중심부를 완전히 박살을 내고, 그 다음에 육군이 가서 마무리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전쟁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가 마치 비행기가 떨어뜨리는 폭탄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폭탄을 지금 우리들에게 퍼부으시는데, 이 폭탄은 무엇을 파괴하는고 하니, 우리가 제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하나 하나씩 부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후방부터 먼저 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빼앗아 버리고, 직장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직장을 부수어 버리고, 그리고 자식에 푹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자식을 치시고, 심지어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까지도 하나님께서 폭격을 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용납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를 가차없이 징벌하는데, 성경은 이것을 가지고 놀랍게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사랑이 아니고 미워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해야, 이 세상의 모든 욕심들은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는 힘이 들게 다가와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다가옵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를 가지고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내 버려 두십니다. 그냥 내버려두셨다가 마지막 심판 날에 빗자루로 쓸어 담아서 지옥에 갖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무관심이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얼마나 당황스럽게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니까, 우리는 잘한 것은 없어도, 그래도 칭찬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몽둥이를 들고 오시니까 말입니다. 그리고서는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잘한 것은 물어 보시지도 않고, 가장 부끄럽고, 못난 부분만을 하나 하나 지적을 하시고 책망을 하시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과 제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는데, 오늘 한국교회는 같이 섬길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고 일이 잘 된다" 라고 하는, 전혀 십자가 정신과는 상관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저 자신도 이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고 항상 잘 된 것에만 감사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한, 돈에 대한 애착을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끊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다 부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때는 우리에게는 아픔이겠지만, 그것이 사랑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픔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고백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이여, 저는 빈털터리 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자식이 있고 집이 있고 직장이 있지만, 그것은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저는 주님만을 원합니다!" 라는 말이 터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말입니까? 천국에 가서 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고백되어져야 할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흐뭇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하나님께서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세상 부모들이 좋아하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기만을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일도 열심히 하고, 직장생활도 열심히 해서, 성실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마라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저축도 하고, 집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 "아,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보다도 더 열심히 살아야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을 사랑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천국에 비하면 보잘것없고, 썩어질 세상임을 깨닫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세상을 싫어하십니까? 도대체 왜 자기 자신 앞에 그 어떤 것도 두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1, 42절입니다. (레 11:41)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레 11:42)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땅에 붙어 다니는 것은 가증하니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더러운 정도가 아니라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땅에 배를 붙이면서 기어다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뱀이나 지렁이 등이 있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징그러워서 우리가 먹어라 해도 못 먹습니다만, 하나님은 가증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9절-12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물고기 중에서도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다는 것은 물고기의 특징이 아니고, 땅에 배를 붙이고 사는 육지의 동물과도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꾸라지나 뱀장어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고기의 생김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3절-19절을 보면, 독수리, 매, 까마귀 등은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이것들이 짐승의 시체를 뜯어먹는, 육지 동물과도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긴 것은 새 같지만, 하는 짓은 육지의 동물들과 같기 대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전부 다는 아닙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땅에 붙어살고, 땅에 가까이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땅에 붙어사는 짐승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땅이 더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농사를 두고 "천하지대본"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이 땅은 정직하고, 땅을 통해서 짓는 농사가 가장 복되고 근본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땅을 경작해서 살기에,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땅이 저주받은 더러운 곳임을 분명히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꾸 땅에 붙은 동물을 멀리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신분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을 날마다 깨달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물고기를, 새를 잡아서 먹더라도, 땅의 것을 멀리함으로, 자기들이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날마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만, 그런 땅에 붙어 다니는 짐승이나 물고기나, 새 자체가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말씀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뱀 자체가 마귀가 아니고, 나쁜 짐승이 아닙니다. 오히려 뱀은 보기가 징그러워서 그렇지 우리에게 해로운 병을 옮기는 들쥐 같은 짐승을 잡아먹는, 우리에게 유익한 점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뱀만 보면 마귀 대하듯 죽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땅의 시체를 뜯어먹는 것을 부정하다 하시고, 또 그 죽은 것을 부정하다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동물이 죽으면 흙이 되는데, 이렇게 흙이 된다는 것은 땅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정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땅이 저주를 받아 부정하게 이미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레위기 11장의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는 그 원리를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육지의 짐승 중에 발이 갈라지지 아니한 것과 되새김질을 못하는 것이 부정한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 같이, 갈라지고 나누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인데, 이러한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짐승은 부정하니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철저하게 위생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이렇게 짐승들을, 바다와 하늘의 것들을 갈라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언제나 그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의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늘에 속한 영생을 받기 위해서 땅의 것을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먹을 수가 있습니까? 21, 22절입니다. (레 11:21)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레 11:22)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땅에서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메뚜기나 베짱이 종류, 귀뚜라미 종류, 팟종이(메뚜기의 일종)종류는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왜 먹을 수 있습니까? 이 땅에서는 하늘로 폴짝 뛰는, 땅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려는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 줄 아시겠습니까?
이런 것은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메뚜기, 베짱이를 언제 잡아서 먹습니까? 그 조그마한 것을 말입니다" 라고 할지 몰라도, 요즘은 이런 곤충들이 공기가 오염되어 많이 없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것들이 떼를 지어서 다니기 때문에, 충분히 식량으로 먹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메뚜기를 먹으면서 그냥 먹지말고, 메뚜기를 바라보면서 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여, 메뚜기나 베짱이처럼(실제로 베짱이는 이솝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개미보다 게으른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개미보다 더 부지런하다고 합니다)살게 하옵소서!" 라는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땅에서 동물들을 구별한 것처럼, 구별해서 하늘로 넣어 주겠다"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짐승을 구별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창세기에 나오듯이,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가 아닌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그래서 땅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입니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런 저주받은 땅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이 얼마나 큰사랑입니까? 이보다 더 큰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에게 십자가로 찾아오셔서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십니까? 그러한 땅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빼앗는 것입니다. 버려야 새로운 것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왜 안 빼앗기려고 이리 감추고, 저리 감추고 하십니까? 아직도 여러분의 고집으로, 여러분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큽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보다 더 소중한 것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습니까?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 마음대로 살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음식을 가려먹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완성하셨기에,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말씀을 이루게 되고 영생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의 여러분들의 유일한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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