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레 11:1-8 / 정결한 짐승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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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정결한 짐승 (1) (레 11:1-8)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아무나 믿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이 하나님의 약속을 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 약속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약속을 함부로 여기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들도 이런 유혹에 마음이 이끌려서, "나도 내 마음대로 한 번 살아보자" 라는 그러한 마음이 불쑥 불쑥 생겨 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주인공을 하시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마음껏 가슴을 펴고 이 세상을 한 번 살고 싶은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그렇게 못할 뿐이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강한 것 같지만 들어오는 것이 바로 마귀의 시험이란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을 주면서 유혹하고, 자식을 목 말라하는 사람에게는 아들을 주면서 유혹을 하고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아주면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참으로 우리가 막기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것들을 가지고서 접근을 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막아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약속만은 그대로 유지하는 분임을 믿고, 우리도 이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가 때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할 때도 있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말고, 끝까지 약속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라디오를 듣는데, 퀴즈시간이 되었습니다. 전화를 해서 맞추면 상품을 주는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6.25 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운 나라로서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한 분이 전화를 해서 답을 말하기를, "영국" 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나이가 드신 분들은 영국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시겠지만, 영국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는 아니지 않습니까? 유럽에 있는 나라인데, 지도를 몰라도 흑인, 백인만 생각을 해도 그런 대답이 안 나올텐데,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아는 나라가 영국밖에 없었는지, 영국이라고 용감하게 대답한 것입니다. 물론 영국에는 흑인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 다른데서 전화가 와서 "에디오피아"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답이라서 상품은 그 사람이 가지고 가고 말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망신만 당한 것입니다.
저는 이 라디오 프로를 들으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돌이켜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무엇을 하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저렇게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약속을 정해서, 자기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서 저렇게 기고만장하게 살아간다면, 그런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방금 예로 든, 한 아주머니가 영국이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라고 말해서 틀린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귀를 기울이고, "혹시 저 사람들이 맞는 지도 몰라" 하면서 기웃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있다는 아주머니의 말은 엉터리인 줄로 알고 있으면서, 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틀렸다고는 한마디 말도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분명히 아프리카에 없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망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서 살자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약속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분들이 없을 줄 압니다만, 요즘처럼 관광 다니기 좋은 5월에, 주일이 되어서 성경책 들고 교회에 오려고 신호등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휙 하고 관광버스가 지나가는데 보니까, 춤도 추고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나도 놀러 한 번쯤 가 보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들어서는 안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몸은 아 교회당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거제도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이 아닌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맞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관광 버스를 타고 놀러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주일에는 예배드리는 모습이 맞다는 것입니다. 놀 때는 놀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까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예배에 관심이 없어도 우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엉터리라고 외칠 수가 있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있는지 유럽에 있는지, 정작 그것은 몰라도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면 망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세상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박살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죽느냐, 사느냐" 라는 것입니다. 약속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갈 곳은 한군데 밖에 없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는 지옥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고서, 그 약속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드리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말씀이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보면, 이 말씀은 들었다하면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연속극은 머리 속에 너무나 생생한데, 이야기하라면 줄줄 나오는데, 그런데 설교내용은 그 제목조차도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지난 주 설교내용이 기억이 나십니까? 아니 제목만이라도 기억이 나십니까?
어떤 집사님이 저에게 부탁을 하기를, "목사님, 밤에 잠이 잘 안 옵니다. 어떻게 하면 잠을 잘 잘 수 있습니까?" 라고 해서, 그래서 저는 "잠이 안 오면 말씀을 보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잘 안 오는 시간을 뒤척이지 말고 성경을 묵상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목사님, 기가 막힙니다. 성경을 보니 5분도 안 되어서 잠이 왔습니다. 편안하게 잘 잤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한 편으로는 웃음이 나오고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잊어서 안 될 이 약속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을 너무 잘 잊어버리고도 아무런 느낌도 없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성경책은 주일날에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의 양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더불어 살라고 말씀을 주신 것이지, 들고 다니라고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잊어버리고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셨는고 하니, 미리 하나님께서 동물에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정하셔서,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도록 만든 장치가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루에 두 번 식사시간마다(우리는 세 번이지만 그들은 그 당시에 두 번 식사를 했습니다), 부정한 것은 피하고 깨끗한 것만을 골라먹도록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떤 음식을 더럽다고 합니까? 그것은 땅에 떨어져서 흙이 묻은 음식을 더럽다고 합니다. 혹은 만든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부패한 음식을 더럽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먹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는 음식과 더럽다고 하는 음식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짐승을 그렇게 구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 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 1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짐승 중에서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것은 먹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낙타, 사반(오소리의 일종), 토끼, 돼지 등은 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짐승들이 특별히 사람의 몸에 해롭다든지, 동물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부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짐승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구별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아무리 돼지고기를 좋아해도 먹지 않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양고기는 노린 냄새가 나서 싫어해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9절서부터 보면, 물고기, 새, 그 밖의 다른 여러 종류의 짐승들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먹어도 좋은 것도 먹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구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날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아, 이것은 먹는 것, 이것은 못 먹는 것"으로 구별을 함으로서 말씀을 기억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이 상구 박사라는 안식교 교인이 나와서 하는 말이, 물론 이단입니다만,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먹는 것과 먹지 말라는 것을 구별하여 놓으셨는데, 연구해보니까 과학적으로도 성경대로 그것을 구별해서 먹는 것이 건강에 훨씬 좋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엔돌핀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T.V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 끄덕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돼지를 키우는 농가에서 손해를 많이 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괜히 멀쩡한 돼지사육 농가만 피해를 본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그런 음식들을 구별해서 먹어야만 합니까?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말씀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은 율법자체에서 해석을 하면 안되고, 신약 성경까지 연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 10절-15절입니다. (행 10:10)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까, 이제는 음식을 가지고 깨끗하고 더럽다고 구별하던 때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믿음으로 얼마든지 다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먹을 수 있다고 까지 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까, 조금 어려운 내용입니다만, 지금은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날마다 말씀가운데 거하시게 함으로 과거 구약시대처럼 음식을 가지고 말씀을 기억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도 가금 교인들 중에서, 오늘 본문말씀인 레위기 11장에 있는 것처럼 먹는 음식을 가려서 먹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돼지고기, 토끼고기, 비늘이 없는 생선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음식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사람의 처음 음식은 식물성이었습니다. 동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가 끝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까지 모두 다 먹도록 하셨습니다(창 9:3). 하나님께서 모두 다 먹도록 허락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보신탕, 삼계탕, 내장탕, 보양탕, 모두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드시기를 바랍니다. 가금 사택에도 갖다주면 더 고맙고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구 박사의 말은 성경적인 말도, 가학적인 말도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식물보다 동물이 몸에 해롭다고 건강적인 측면에서 동물들을 구별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차원입니다. 말씀과 더불어서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데, 구약의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율법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음식에는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구별을 하셨습니까? 굽이 갈라진 것 그리고 되새김질하는 것만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제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의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날마다 잊어버리기를 잘합니다. 원래 우리는 말씀과는 상관없는 자들 아닙니까?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먹는 음식을 구별하심으로 그런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기억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건강상의 문제로서 구별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통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구별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언제부터 구별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지금과 같이 이렇게 광야 생활을 할 때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바로 노아 홍수 때부터입니다. 노아 홍수 때부터 이미 구별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7장을 보면, 노아가 동물을 정결한 것들과 부정한 것들을 심사해서 넣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정결한 것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방주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때는 기준을 노아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몰랐는데, 이렇게 레위기 11장에 오니까 기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했습니까? 더러운 것을 왜 방주 속에 넣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방주가 복잡한데 말입니다. 모든 짐승들의 종족의 씨를 보존하기 위해서, 요즘 말로서 하자면 환경 보호를 위해서입니까?
환경보호로 이야기를 하자면, 노아 홍수로 전 세계를 물바다로 만든 하나님만큼 환경파괴자가 어디 있습니까? 불이 탄 자리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남아 있지만, 홍수가 지나가면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함께 태우도록 하셨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홍수가 끝나고 1년 뒤에 노아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장면을 보면 압니다.
창세기 8장 20절입니다.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깨끗한 짐승을 잡아서 더러운 모든 것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짐승들이 살아난 것은 바로 깨끗한 짐승의 대신 제물이 되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신 죽음'의 원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정한 것들이 노아 방주를 탈수 있었고 다시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식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해서 깨끗하게 구별 된 것들을 먹으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하는 것입니까? 그 말씀의 원리대로 살면서, 그 깨끗한 음식을 먹으면서 "아, 이놈이 대신 죽어서, 나도 이 고기를 한 점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의 대상이 되는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성전에 가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하루에 두 번씩 식사를 할 때마다, 대신 죽는 희생의 원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제사를 드리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면, 깨끗한 짐승의 특징이, 첫째는, 굽이 갈라져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되새김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굽이 갈라진다는 것은 두 쪽으로 구별되어진다는 의미이고, 되새김질한다는 것도 들어갔다가 도로 나와서 구별되어 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따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매일같이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음식에 대한 법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만 됩니까? 안식일 교회처럼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지켜야 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이단의 모습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러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율법을 다시 지키겠다는 것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율법을 지킴으로서 입니까? 아닌 것입니다. 오직 그 모든 말씀을 100% 지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자들입니다. 음식을 가지고서 아무런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음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합니다. 그 약속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항상 설교 마지막에 강조하는 말입니다만, 예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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