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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마가복음 10:28-31 / 버린 자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가복음

마가복음 10:28-31 / 버린 자

정인순 2011. 1. 7. 10:49

 

 

본문 : 마가복음 10장28-31절
제목 : 버린 자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버린 자
이근호
2009년 2월 1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0:28-31

(막 10:28, 개역)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막 10:2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개역)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31,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베드로는 자신이 나름대로 예수님을 위하여 다 버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왜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자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괜히 짓을 하는 셈이 됩니다. 사람들은 ‘버림으로서 더 좋고 큰 것을 얻고자’ 시도합니다. 이런 버림은 예수님을 위한 버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버림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이 버릴 때는, 자기에게 덜 쓸모있고, 덜 중요한 것들을 처리하는 식으로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막상 중요한 것은 아무리 버리라고 해도 버릴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마치 강냉이 껍질을 버릴 때는 신나게 벗겨냅니다. 하지만 막상 강냉이 알맹이 덩어리를 버릴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을 나누는 버릇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버림이란 베드로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버림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아무리 멀리 버려도 그 버린 장소까지 자신의 애착이 떠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혐오한 것까지 자신이 사랑합니다. 단지 내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단지 내가 버렸다는 이유 때문에 절대로 그 버려진 것을 잊지 못하며 다시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버리라고 열거하신 그 항목’은 우리가 아무리 해도 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부모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자매와 형제를 버리고, 모은 재산을 버리는 것은 나만큼이나 소중하게 끌어안고 사는 것들이기에 예수님은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버리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동하고 세상 살아가기에 예수님께서는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약 억지라도 그런 것을 버리고 나면 과연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런 것, 저런 것 버리라고 하신 것은 진정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인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드러난 나 자신은 과연 안 버려도 될 대상입니까? 아닙니다. 33절에 보면,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받아 결국 죽게 되신다고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남아버린 우리들 자신마저 그냥 두시지 않고 예수님 자신의 길로 몰아가시려고 하십니다. 그 가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버림받는 현장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우리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처지에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 따라 가다보면 예수님이 죽으시는 그 현장에 도달된다는 겁니다.

그 죽음 속으로 같이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만 비로소 부활의 힘, 곧 영생의 세계와 만남이 성사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만난 영생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영생을 이미 받은 자들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마치 물을 넣은 고무풍선을 새로이 만나게 되는 순간, 그 고무풍선이 꽝하고 터져버리면 그 안에 있던 물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흘러내리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는 그곳이 바로 영생의 고무풍선이 대기하고 있는 곳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겁니까?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자들입니다. 이제는 이 사실에 대한 고백을 사람쪽에서 해야만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듯이 우리가 우리를 버려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순히 너희들이 이미 버림받은 자라고 하는 창세기 3장의 내용을 되풀이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그 버림받은 이유를 말해주고 그 버림받음과 죽음 속에서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즉 인간들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난 뒤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인간이 사는 세계에 창조를 계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쓰레기로서만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버림받은 사실을 잊고서 하나님의 창조가 멋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자신들이 걸치고 있으면서 결코 버리고 싶지 않는 것들이 멋있다고 하므로서 그 안에 들어있는 자신도 쓰레기 같은 인생이 아니라 멋있는 인생임을 자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전체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쓰레기 같은 것들을 만드시고 결국에는 그 쓰레기 더미에 불을 지르시면서 “여호와는 소멸하시는 불이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히브리서 12:29) 즉 인간 자신이 처음에도 버림받은 자요, 나중에도 버림받아야 하는 쓰레기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 3장에서 인간 구원에 나서시는 원칙은 구원 당사자인 인간은 완전하게 배제한채 오직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상대하셔서 성사시키십니다. 즉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어뜯어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속성을 우리 인간들이 그대로 물러받았습니다.

이로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지 않는 분은 메시야가 아니며, 그리고 그 메시야와 함께 이동하지 않는 자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이 쓰레기 같은 세상 속에서 가신 그 경로를 그대로 따라 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변의 풍경과 같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핍박’이라고 했습니다. 즉 인간이 자진해서 버리는 것은 실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버림으로 해서 자신이 돋보이는 존재로 부각되기 위한 위선에 불구합니다. 즉 자신을 쓰레기같은 존재가 아니라 대단한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용의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버림이란 이런 것이 아니라 울면서 애통하면서 버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어떤 때 울까요? 그것은 예상 밖에 낭패가 실패나 좌절을 맛보면서 자기의 것, 위신이나 체면이나 사랑하는 가족이나, 자신의 가치를 지켜주었던 모든 아름다운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날아갈 때 웁니다.

이 때 인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어뜯는 악마의 본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게 됩니다. 인간이 이 정도로 죄인이요 쓰레기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어뜯기면서 버림받지만 예수님의 버림받음 우리 인간들의 버림받음과는 달리 그 뒤에 ‘부활’이라는 용수철이 달려있어 영생으로 통하게 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사랑이 방출됩니다.

즉 이 끊어질리 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성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음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핍박하는 당사자임을 알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