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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마가복음 10:13-16 / 하나님 나라와 어린 아이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가복음

마가복음 10:13-16 / 하나님 나라와 어린 아이

정인순 2011. 1. 7. 10:37

 

 

본문 : 마가복음 10장13-16절
제목 : 하나님나라와 어린이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하나님 나라와 어린 아이
이근호
2009년 1월 11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0:13-16

(막 10:13,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4,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5,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막 10:16, 개역)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천국이라는 것은 반드시 이 지상의 나라와 반대되는 나라로 등장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드는 이 세상을 이미 포기했습니다. 이 세상을 잘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고 보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악마를 염두에 두고 이 세상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악마의 존재를 빼고서 이 세상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악마도 없고 신도 관여하지 않는 자기들만의 세상을 천국으로 발전시키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자신의 기대치에 의해서 그때그때마다 결정됩니다. 신의 계시도 필요치 않습니다. 신의 뜻도 필요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뜻과 자신의 욕망이면 그것으로 행복하게 사는데 있어 가치관은 이미 확립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자신의 관점을 탓하거나 나무라거나 정죄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 근거를 쏙 들이 미십니다. 그들이 누구냐? 대단한 신학자? 아닙니다. 대단한 설교가? 아닙니다. 대단한 전도자? 아닙니다.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어린 아이란 곧 ‘미성숙자’를 의미합니다. 눈이 덜 뜨인 자들이 어린 아이입니다. 철이 없는 존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 아이편을 어른들을 질책하는 자리로 삼아버리시는 겁니까? 그만큼 철이 덜 든 것이 아니라 세상 죄악에 그만큼 덜 때가 덜 묻은 겁니다.

그만큼 예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이 위험하다는 겁니다. 세상이란 실은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인간들 사이에 서로 통하는 의식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여전히 타고난 순수성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 지나면서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명령을 듣게 됩니다.

즉 그런 식으로 살면 빌어먹는다고 말입니다. 빌어 먹는다는 것은 얻어먹는다는 뜻이요 얻어먹는다는 말은 자립적인 노동이 이 세상에서는 값으로 쳐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이 살아가려면 세상에서 값으로 쳐주는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필요로 한다는 것은 세상 정신을 인정해주고 키워줄 만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무조건 발전을 외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발전이며 누구를 위한 발전이며 그 발전의 도착점이 무엇인지를 알길도 모르는채 무조건 발전을 추구합니다. 이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을 내놓아야 그 노동에만 값을 쳐줍니다.

실은 그 발전이라는 것은 자기를 신으로 인정해줄만한 증빙이 되는 힘을 두고 말합니다. 힘이 세면 셀수록 자신은 신됨을 뚜렷해지는 법입니다. 옛날에 딸을 낳은 여인은 아들을 낳은 여인보다 가문에서 기를 펴지 못했습니다. 그 때는 아들을 낳아야 가문의 세력이 커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힘이 세진다는 말은 가문 그 자체가 신의 경지, 즉 절대적 가치가 더욱 돈독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는 따로 절대적 신의 세계를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예들이 했던 일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아벨 계열과 전혀 다르지요. 가인과 그 후예들이 신경쓰는 일은 스스로 신처럼 행세하며 사는 겁니다. 즉 따로 신이라는 존재가 필요치 않는 것을 목표로 하여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 자기들 끼리 열심히 싸운다는 겁니다. 평화라는 것은 기껏 자신이 끌어모은 힘 안에서만 평화입니다. 즉 가정이라는 것이 아빠의 힘으로 유지된다면 아빠 중심으로 일시적 평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빠라는 자가 허랑방탕한다든지 경제적인 부를 외부에서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아버지로서 자격은 상실하고 대접도 받지 못합니다.

이처럼 인간 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무조건적인 힘입니다. 힘을 가져다주지 못하면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의 풍토입니다. 교회라는 것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에 만약에 세상적인 힘이 가득하다면 사람들은 구태여 가정에 몰입하지 않고 교회일에 열중할 것입니다.

교회에는 자신을 신으로 만들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하면서 자연적으로 교회에 관심을 끊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성인 사회에서는 각자 신이 되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입니다. 이런 힘만이 대우받는 인간 사회에서는 약한 자에 속하는 어린 아이는 아직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바로 힘없는 자편에 서서 같이 ‘힘없고자’ 하신다는 점입니다.

즉 ‘힘없는 편’에서 서서 힘을 키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힘다 빼고 힘없이’ 끝까지 밀어 붙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죽어실 때도 참으로 ‘힘없이’ 죽어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3:4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사시는 목적이 아니라 ‘힘없는 세계’를 통한 천국의 존재성을 알리시는 것이 사시는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경쟁과 다툼과 싸움판에서 희생자로만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그 어린 아이들의 세계가 도리어 천국을 말해줄 수 있는 적당한 예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란 바로 이곳에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세운 평화의 인물인 ‘어린 아이’는 본인의 욕망이 가미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잇습니다. 주면 주는대로 받아먹고 위협을 가하면 가하는대로 겁을 낼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즉 어린 아이는 운명을 자신을 결정지으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기대한 ‘선택’ 개념입니다.

마태복음 1125-26에 보면,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감추어져 천국의 진리가 어린 아이 같은 자들을 통해서만 전달되는데 이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자신의 권리나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어린 아이

2009년 1월 11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0:13-16

(막 10:13,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4,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5,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막 10:16, 개역)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천국은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자들이 다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 같이 천국을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 성인들에 의해서 천시받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이 하루 빨리 속을 채워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야 한 사람의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내세웠는데 이 어미완료에서 완료로, 미성숙에서 성숙하는 자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어른들이 봤을 때, 어린아이들은 천국가지 멀은 존재입니다. 모든 면에서 덜 채워졌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어른들이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천국의 주역들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아이라는 겁니다. 천국의 모델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아이라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어른되어서 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라 어른이라도 도로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는 겁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어른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정반대의 주장을 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천국이란 사람들 보기에 쓸모없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노아가 만든 방주와 같습니다. 방주는 그 당시 일상 생활에 전혀 필요한 배가 아닙니다. 배 모양도 희안합니다. 유람선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관람용 전망대가 없는 배입니다. 그리고 고기 낚는 어선도 못됩니다. 방주가 요긴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시점은 이미 방주 타기에 늦어버린 시점이 되어버립니다.

방주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은 차후에 벌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만 알려집니다. 사람들이 왜 방주의 필요성을 몰랐느냐 하며는, 자기가 놓여 있고 살고 있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노아 방주는 인간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는 그 저주성에 대해서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방책이었습니다.

그 저주가 빗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집과 모든 것을 집어 삼켰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물속에 잠겨 있는 인간과 물 위에 떠있는 인간과의 차별성가 방주라는 존재가 말해주는 가치입니다. 쓸모없다고 해서 우습게 보았던 것이 방주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전혀 쓸모짝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원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쓸모있는 교회’가 되면 안됩니다. 신수사 훤해지고, 사업이 번창하고 가정에 화기가 돌게 하는데 있는 교회가 아무짝도 소용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무의미하게 보여야 합니다.

구원이란 원래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구원받을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을 유발해야 합니다. 10:26에 나오는 말씀대로, “그런즉 누구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절망적이어야 비로소 구원이 이미 그 사람들에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린아가 되지 아니하면 구원못받는다고 나온다면 그럼 할 수없이 나도 구원 안받을래”라든지, “나는 남들이 안되는 그것을 내가 도를 닦고 열심을 내고 정갈하게 해서 기어이 얻어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가짜입니다.

사람이 자력으로 구원되지 못하는 데는 다 그만한 내력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한번 어른이 되면 이미 방향성이 ‘우수한 어른’되는 쪽으로 잡혀 있기 때문에 인력으로 그 방향을 어린아이쪽으로 되돌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아이란 어른들이 볼 때에 어디까지나 덜 찬 존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주장에 의하면 ‘덜 찬’ 존재가 ‘더 꽉 찬 존재’을 제키고 천국에 그들만이 들어간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자신에게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까지 다 아십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인간의 본성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모여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탑을 쌓으면서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의견을 교환하면서 건축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 탑을 짓는데 있어 모두가 이의없이 동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바벨탑 짓고 있는 것을 인정한 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서 무슨 힘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말해주시기 위함입니다. 바벨탑의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이름을 하늘 꼭대기까지 높이게 하자”입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류는 다음과 같은 딩일한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즉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그 일로 인해 내 이름과 명예와 자존심 하늘끝까지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헤쳐버림을 통해 바벨탑 건립을 무산시켰습니다. 하지만 일관된 인간들의 바벨탑 본성은 그대로 남아있고 이제 인류들이 흩어져 가는 곳마다 바벨탑이 우뚝우뚝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단체의 공통점은 곧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하자”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 세계의 본성으로 볼 때, 어린아들은 쓸모가 시원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도리어 이 인간의 심보를 반대로 뒤집어버립니다. 즉 ‘어른들로부터 인간 덜 된 자라고 욕 얻어 먹는 그 어린아이들의 세계가 곧 천국이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신이 쓸모없다고 여기기 아니하면 천국을 받들어 섬길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동안 투자하고 곱게 가꾸어왔던 자기 몸 섬기기에 급급한데 따로 하나님 섬길 여력은 남아있지 못한 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도로 어린아이 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작용이 벌어집니다. 마태복음 1125-26에 보면,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감추어져 천국의 진리가 계시로서 작용하게 되면 사람들 닦달되어서 새 사람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들이 갖추어진 성인의 마음에다, 계시 능력에 의해서주어지는 어린아이 마음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누구에게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선택된 자에게만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11:27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계시는 잔소리를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숨겨진 천국의 내막을 새삼 소개하는 것이 계시입니다. 어린아이같은 성도는 이 천국 소식을 마냥 좋아하게 됩니다.

만약 계시를 잔소리라면 인간은 자기를 닦는다고 여전히 자기 쳐다보기에 급급할 것입니다. 받들어 섬기려면 어린아이처럼 아예 자신의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천국 계시가 주는 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이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예수님의 나라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