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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마가복음 1;21-28 / 새 교훈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가복음

마가복음 1;21-28 / 새 교훈

정인순 2011. 1. 7. 09:55

 

 

본문 : 마가복음 1장 21-28절
제목 : 새 교훈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새 교훈
이근호
2008년 3월 23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21-28

 (막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막 1: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막 1: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 1: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 1: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 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막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막 1: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성경은 예수님의 하신 일을 말해줍니다. 이로서 인간들이 생각하고 하는 일들은 항상 된통으로 예수님에게 당하기만 합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과 행동은 옳고 인간들이 하는 일들은 옳지 않다고 말해줍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성경을 본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말을 듣고자 함이 아닙니다. 즉 인간들이 이렇게 저렇게 일하면 하나님이 일이 되더라 라는 것을 듣고자 해서 성경을 봐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라는 분이 어떤 일을 벌렸는가를 보기 위해 성경을 봐야 합니다. 문제는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라는 분을 미워서 죽여 없애버렸습니다.

즉 더 이상 예수라는 자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기억할 필요도 없게 만들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편지에 보면, 사람들이 죽였던 그 예수님이 도로 살아났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람들은 좋든 싫은 또 예수님의 말과 하는 일을 들어야 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로서 성경을 놓고 다음과 같은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이 세상에 사람만 있다”라는 측과 “아니야. 예수님도 계셔”라는 측이 서로 다투게 됩니다. 우리들은 평소에 사람들만 살핍니다. 교회에 와서도 목사 설교하는 것, 사람들이 봉사하는 것을 살피면서 ‘아, 교회란 저렇게 해서 운영이 되는구나’로 정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과 같이 실제로 살아있다고 한다면 교회에 대해서 잘못 살피신 것이 됩니다. 즉 ‘살아 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지를 교회에서 찾아봐야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의 일환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사람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사람을 진흙에 집어넣고서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자는 인간도 아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9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보이는 인간들만 눈에 보입니다. 그 보이는 인간들의 원하고 최고 지점에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최고의 자리라 할지라도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면 사람 취급을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분이 와서 고요한 인간 세계에 풍파를 일으키는 겁니다.

‘더 아더스(The Others)라는 영화를 보면, 어떤 호젓한 주택에 부인 한 사람과 두 남매, 이렇게 세 식구가 삽니다. 나름대로 완벽하고 반듯하게 자식을 키우기 위해 절제가 있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왠 난데없이 노인 한 사람과 두 아주머니가 찾아와서 일을 돕겠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이 남매가 뭔가 불길한 조짐을 느낍니다. 우리 집에 왠지 유령이 산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과연 이상스러운 자꾸만 벌어지니 보다 못해 주인되는 부인께서 엽총을 들고 새로 들어온 세 사람을 추방시키고 맙니다. 그러나 우연히 추방시킨 자의 묘비를 본 순간, 부인인 자신이 이미 과연 죽었던 존재임을 압니다. 즉 자신이 두 자식은 모두 유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유령이 산 사람 노릇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지상에 사는 모든 자들이 하늘에서 모두 귀신들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태어나면서 100일 떡하고, 돌잔치하고 공부시켜 대학보내고 시집 장가 보냈지만 결국에 죽음으로, 한 줌의 흙이 되기 위해 우루루 몰려 갑니다.

왜 죽는 지도 모르는채 마치 살아있으니 산 사람처럼 행세하고 사는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거짓이며 정말 산 분은 하늘에서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과 만나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자체를 몽땅 바꿉니다. 이승을 저승으로, 저승을 이승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살았다 하는 자는 실은 죽은 자요, 죽었다고 자신을 아는 자만이 실은 산 자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여기 ‘산 자’의 리스트에는 이미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에 예수님이 올라가셨는데, 이미 죽은 자 하고만 이야기하십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결코 여기 변화산 밑에 이 세상에 사는 자를 산 자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이미 죄로 인하여 죽어버린 귀신들이기 때문입니다. 동네가 죽은 자의 동네이요, 예수님 계시는 곳은 동네가 ‘산 자’들의 동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일들은 우리들보고 ‘너희는 귀신이야’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므로서 현재 살아있는 내가 죽어서도 더 살려고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나아와 하는 말이, 자신은 영생을 얻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왔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했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난 뒤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 청년이 생각한 ‘영생 얻기’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고 거기에다 덧입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신이라는 것은 마치 카스테라 빵 밑에 붙어있는 얇은 종이처럼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귀신이며 이미 죽은 자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인간들은 인간들의 과학적 업적과 문명과 예술의 창조력을 마음껏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자신을 더욱더 산 자로 찬란하게 증거하는 ‘자기 증거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본다고 하니 소경이요, 소경이라고 하는 보는 자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 해체당해야 합니다. 집 나간 탕자처럼 아예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 어떤 기대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주님으로부터 강탈당하고 빼앗기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자존심과 위신과 인격을 빼앗겨서 온전히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으로만 휘감고 살아가고 있음을 자랑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예수님의 속성이 담긴 사람입니다. ‘거저 주시는 속성’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귀신에 불과한 자들이 무슨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탕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