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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마가복음 2:1-10 / 죄사함의 권세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가복음

마가복음 2:1-10 / 죄사함의 권세

정인순 2011. 1. 7. 09:57

 

 

본문 : 마가복음 2장 1-10절
제목 : 죄사함의 권세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죄사함의 권세
이근호
2008년 4월 6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2:1-10

(막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막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막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막 2: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2: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막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 2: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막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막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예수님께서 도를 전하셨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보통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한테 할 소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환자들도 자신의 병에 관심이 있지 결코 자신의 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사함’을 거론하셨습니다. 만약에 참으로 중풍병자가 이 예수님의 죄사함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면 이는 환자 본인이 ‘나는 죄인 맞습니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을 경우에나 해당될 일입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의 죄는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신다면 곧 우리들 자신보고 ‘네가 죄인인 줄로 알아라’라는 말린?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당시 서기관들을 발끈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권위있고 해석한다고 자부했던 자들입니다. 서기관들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반박합니다. ‘죄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몫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신학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에 계시고, 이 지상에는 인간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어느 인간이 구원받고 아니받고는 그 인간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했느냐 여부로 결정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들 서기관들이 사고방식 속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 인간 세계까지 오셔서 죄인을 일방적인 자기 권한으로 용서하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이들 종교전문가들은,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일들을 많이 구상해 두었기에, 자신들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이 주어진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 세계에 내려오셔서 자신의 용서함을 나누어주시는 방법으로 구원해내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6:44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과 만나게 되는 그런 인물은 자력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으로서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는 우리 내부에 불가능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불가능성이 어느새 가능성으로 바뀌면 안됩니다. 불가능성은 계속 불가능성으로 유지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예수 없는 자’로 그대로 남습니다. 곧 이 말은 “너에게 예수 없지. 그지?”라는 말로 들려야 합니다. 자력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곧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설치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자에게는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가 듣기 싫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죄사함’을 받아 드리는 사람은 참으로 자신이 ‘죄인 맞다’를 절감하고 있는 사람에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간 사회는 죄인을 의인으로 바뀌기 위한 노력만 인정해주는 그런 사회입니다. 죄인이면서도 아닌 척을 해야 인간 대접받는 그런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는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준 오늘의 본문 말씀에 대해서 요즈음 사람들의 심성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고침받은 중풍병자가 얼마나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지붕을 뚫었다는 대단한 열성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용서받아 낼 근거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입에서 결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대신 ‘네 병이 나았느니라’라는 말씀이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도리어 정반대로 말씀했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그것은 중풍병자가 아무리 지붕을 뚫는 열성을 보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죄의 수위가 조금이라도 낮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그 말씀이 자신에 대해서 정확하게 표현하시는 말씀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라는 말씀만 하셨더라도 중풍병자는 “맞습니다. 저는 죄인 맞습니다. 중풍병자되어도 마땅한 인간입니다. 저는 제가 죄인인 것을 인정합니다. 지붕을 뚫는 성의를 보였다고 해서 그 행동이 나의 죄를 경감시키지 않을 정도로 저는 죄인 맞습니다”라고 나오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서기관들은, 죄사함과 병고침을 별개로 보았습니다. 따로따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개의 현상이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병이 생긴 것은 인간에게 병이 생길 만해서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죄가 있기에 죄가 그 결과물을 내놓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자라면,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 무슨 말인지를 쉽게 압니다.

뿐만아니라 ‘네 상을 들고 걸어서 가는 행동’이 얼마나 쉬운 행동인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일단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되면 ‘병고치는 일’이나 ‘죄사함받은 일’이나 모두 어려운 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죄사람이 병낫는 일보다 더 근원적으로 근본적인 일로 보았습니다.

인간에게는 고집이 있습니다. 자기 구원은 자기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시도를 늘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곧 죄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합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게 올 수가 없다”라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곧 죄가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에 의존해서 자기를 구원할 방책을 취할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신학을 하던 무엇을 하던 자신의 죄가 나오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병에 관심두는 사람도 역시 자신의 죄인됨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신학을 말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예수님에게로 이끌 때는 그 과정 속에서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자존심이 될만한 것과 위신과 체면과 관련된 모든 것을 늘 빼앗기고 뭉개지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예수님과 결합니다. 그렇게 되어야지만 비로소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인, “네 죄 사라함을 받았느니라”가 이해가 될테니 말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이 가능한 일은 자력으로 종교단체를 만들고 예수가 있다는 교회까지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교회까지 왔어도 예수님께 온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로 오려면 하나님에 의해서 작용받아야 합니다.

그 작용의 현상이 곧 자신이 죄인됨을 알고 자기 십자가가 주어져 있음을 아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잃는 그 순간순간이 하나님께서 용서받은 순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 구원되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