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마가복음 1:1-8 / 복음의 시작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가복음

마가복음 1:1-8 / 복음의 시작

정인순 2011. 1. 7. 09:51

본문 : 마가복음 1장 1- 8절
제목 : 복음의 시작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01강-막1장1-8(복음의시작)-mar080224.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01강-막1장1-8(복음의시작)-mar080224.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01강-막1장1-8(복음의시작)-mar080224.hwp

 

 

복음의 시작

이근호
2008년 2월 24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1-8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막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막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막 1: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막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시작’이란 하나님께서 뭔가 새로운 일을 개시했다는 뜻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사모한 자들 같으면 그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에 했다는 점 자체만 놓고서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고 흥분할 것입니다. 원래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새로운 노래를 출시했다는 두 말하지 않고 얼른 구입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란 기존의 세계상을 무로 돌리는 새로움입니다. 기존에 인간들이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그런 엄청난 새로움을 하나님을 벌써 개시를 했습니다. 그것은 기존을 것을 없애버리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것을 그냥 두고 거기에다 새로운 것을 첨가하는 식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정죄하고 파괴하는 식의 새로운 질서와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복음이란 말은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특징 절망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면 더욱 더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스바냐 1:14-18에 보면,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를 화를 벌컥 내시고 그 화내심대로 실행에 옮기시는 날이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 때는 ‘자기 것’이라는 것을 따로 챙길 이유도, 필요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았고 하나님의 계심으로서 더 이상 부족함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갑자가 ‘자기의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와 ‘타인’을 구분했고, 독자적으로 수치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을 바라볼 때도 부끄럽고 불만족스럽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할 소리가 아닙니다.

마치 대중 목욕탕 안에서 혼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수치를 느낀다면 이미 고장난 사람입니다. 독자적인 자기만의 가치를 따로 염두에 두기 때문에 수치심이 생기는 겁니다. 원래 인간이란 독자적인 행함의 소산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주는 것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가 지고 저녁이 지면 찾아오는 ‘어두움’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칼 가지고 그 어두움의 한뭉텅이를 싹둑 잘라서 자기 것으로 삼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저 태양의 ‘나만을 위한 태양’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또 있습니다. 죽음이라든지 고통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부른다고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요 내가 안 부른다고 고통이 안 찾아드는 것도 아닙니다. 새벽녘에 골목골목을 장식하는 안개처럼 우리 인생이란 이처럼 들이닥치는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호출할 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라는 것이 우리 인간이 대비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안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인류 역사에 들이닥치는 식으로 이미 와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어찌 조정하거나 되돌려 보낼 수없는 때가 새벽안개처럼 우리 뜰 아래를 이미 점령해 버렸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마지막 때, 분노의 날을 인간 세계에 덮치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자신의 영속성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개별적인 입장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순전히 자기 중심이고 자기 행함 중심입니다. 뭐든지 자기가 행하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안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상황,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것을 그저 누리고 감사하는 그 세계에서 벗어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근원적인 죄가 자기 밖에 모르는 자기 중심성에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 율법이 주셨습니다. 율법이란 법이기에 모든 조항들이 하나씩 끊어져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따로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 따로요,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다 각기 따로입니다.

평생토록 살인하지 않았다고 장담해도 그것으로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을 준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른 계명도 다 지킨 것으로 간주해주지를 않습니다. 이 법을 받은 인간들은 법따라 자아도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를 잘 지킨 그것이 진정 자아인지 아니면 ‘탐내지 말라’를 어긴 그런 자아가 진정 자아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의 수치를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감추고, 모면하는 식으로 자기 내부에는 법적인 타협과 흥정과 선별작업을 치르게 됩니다. 그래서 단점을 깊이 감추고 장점만을 내 세우면서 “이것이 나다”라고 나옵니다. 남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이렇게 설득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의 날에 그런 짓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복음을 준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 계명으로는 우리 바깥에서 우리보고 준수되기를 요구하는 식이 아니라 아예 우리 내부로 들어와 버려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키워내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시기로 접어 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세례’의 결과입니다.   


이로서 율법 아래서 살다가 그 무서운 저주로 끝장날 인생이 있는 반면에, 복음 아래서 복음으로 영생 받을 자가 따로 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을 들여다 보십니다. 즉 네가 무엇이 들어있느냐를 물으십니다. 우리는 또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은 저를 아직도 살려두십니까’라는 식으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혜택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으로 확인됩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확인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내 자신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