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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히브리서 (7) - 11장(3)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히브리서

히브리서 (7) - 11장(3)

정인순 2011. 1. 4. 15:24

 

 

[ 히브리서 (7)] - 11장(3)
                                                              

1998,6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믿음과 결부되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기에 특이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자기의 어떤 강한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믿음의 내용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믿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믿는 사람들의 고통점도 있지만, 갈수록 강조점이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다른 면에서 부각된다는 것이다.

* 11장 5절에서 에녹의 경우에도 죽지 않았는데, 7절을 보면 이 세상의 정죄함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8절을 보면 갑자기 하늘이 튀어나오는데, 그런 하늘로 가는 이음새는 죽음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 물론 에녹의 경우는 죽지 않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에녹보다도 믿음이 못한가? 그것이 아니라 하늘이 본향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목숨이 붙어서 가나 그렇지 않고 가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 지금까지 살펴본 11장 1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괴리되고 이별하고 헤어지는 자세로서 살아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 4장의 안식의 때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에 근거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들의 인생이란, 머물러서 최선을 다하는 인생이 아니라 스치고 지나가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 그냥 스치는 바람처럼 !

* 처음부터 다시 반복하면, 11장 5절에서 믿음은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는데, 그러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이 편한가, 아니면 죽고 나서 다시 사는 것이 편한가? 죽지 않고 바로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 그러니 지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내용들이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당이 되는가? 감당이 불감당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전혀 흉내도 안 된다는 것이다.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이 세상이 더럽고 지긋지긋해서 이 세상을 피해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있으면서 이 세상을 이긴 상태에서 지나쳐간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요소들을 지니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모습 자체가 예수님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이제 점점 더 복잡해지는데, 그냥 스쳐 가면 되는데 아브라함에게 어떤 지시가 내려온다는 것이다. 자기 아들인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 여기서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그것은 아브라함 자신의 자질이 아니라 '믿음으로' 라는 새로운 증거가 아브라함에게 작용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라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①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 !
                  ② 아벨의 경우는 제물로 증거 !
                  ③ 에녹의 경우는 죽음이 없이 천국으로 !
                  ④ 노아의 경우는 방주 !
                  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나그네와 이방인과 하늘 본향 !
                  ⑥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서는 죽음에서 살아남 !

*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가면 이 세상이 전혀 감당치를 모하고, 이 모든 것을 다 합치면 결국 누가 남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에서 이렇게 모든 것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 창세기와 히브리서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다른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 다시 살릴 줄로 알고 바쳤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창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 이것은 창세기와 히브리서가 서로 틀리다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창세기 22장의 초점은 '약속의 자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데리고 어떤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을 통해서 약속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모습으로 말이다.

* 그래서 창세기 22장에서는, 이삭은 약속의 아들인데, 그러면 '약속의 아들과 이스마엘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는 식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관리하는 차원에서 이삭과 이스마엘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초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태가 죽은 사라에게 태가 열리게 해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그 초점이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이라는 것이다. 이삭을 통해서 씨가 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 11장은 개인적인 죽음과 삶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창세기 22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어떻게 확대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으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지금 히브리서에서는 이삭이 믿음으로 축복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창세기를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별미를 요구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축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에게 축복이 가고 에서에게 저주가 가도록 한 것은 배후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삭이 나중에는 이것을 알지만, 그러나 이삭 개인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부시겠지' 라는 막연한(?) 마음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히브리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고 한 것을 멈추게 하셨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창세기 48장을 보면, 야곱이 어긋맞게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했는데, 창세기에서는 야곱이 요셉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두어서 그러한데, 요셉 때문에 자기 식구들이 모두 다 살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 여기서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죽은 자의 삶을 보여주고, 이삭의 경우는 선택된 자에 대한 축복이고, 야곱의 경우는 요셉의 두 아들들에게 대한 축복인데, 두 아들들에게는 저주와 축복이고, 요셉에게는 두 배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자기 두 아들들이 두 지파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조치가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증거로서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 창세기와 히브리서의 관계 !!

* 창세기의 경우에는, 아브라함의 시대가 끝나면 이삭에게로 그대로 중심이 넘어온다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장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이 아브라함을 은퇴(?)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약속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제 이삭으로 그 중심이 넘어오면, 복은 그대로 내려오지만 그것을 누가 방해하는고 하니, 이삭 본인이 복에 대한 장애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서에 대해서 축복하려고 했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에서는 축복의 대상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이런 이삭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이 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니까, 이삭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맞고 안 맞고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아무튼 야곱의 이방에서 보니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것이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 이제 야곱에게 모든 중심이 넘어오면서, 모든 복은 야곱에게 일임 된 것이다. 그러니 야곱은 얼마나 기분 좋겠는가? 그런데 그런 우쭐거린 야곱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복의 근원인 것이다. '이것은 아니구나!' 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 이렇게 되면, 야곱의 12 아들들에게 내려졌던 축복도 야곱의 손을 떠나버리고, 하나님께서 임의로 나게 한 아들을 통해서 약속이 성취되는데, 그가 바로 요셉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사항이 야곱에게 주어졌지만 야곱에 의해서 실행된 것이 아니고, 야곱의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 이렇게 되니, 요셉 자신도 야곱 언약의 혜택 자가 되는데, 그런데 이런 야곱 언약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유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지파와 유다지파가 일단은 투톱(?)을 형성하고 진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서, 요셉지파가 유다지파에게 밀리게 되는 장애물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므낫세 반지파인데, 그렇게 되면서 유다지파가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래서 갈렙이 유다지파로 나오게 되는데, 그는 사실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갈렙이 다른 모든 지파들의 믿음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 여기서 요셉의 경우에, 요셉은 자기가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야곱의 부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요셉이니 말이다. 마치 다윗의 경우에, 바세바와 간통해서 낳은 아들을 요셉으로 보고 솔로몬을 유다로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은 아들에 의해서 야곱의 공로 등은 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유다는 떠오르는 스타가 되고 말이다.

* 그렇다면 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시편 78편에 나오는 데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오직 유다지파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시 78: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 아브라함이 이삭을 지독히 사랑한 것처럼 야곱이 요셉을 그렇게 편애를 했는데,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렇게 하신 것처럼 야곱도 그렇게 하신다고 예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상을 하나님께서 엎어버린다는 것이다. 요셉은 기껏해야 야곱 정도밖에 안 되고, 유다를 따로 설정하심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그 사랑마저도 부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 이삭의 경우에 에서를 좋아했지만, 그러나 축복은 야곱이 받았으니 그 사랑의 원칙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그 원칙이 그대로 야곱에게 넘어와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좋아하는 요셉을, 그런 좋아하는 것을 빌미로 삼아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요셉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가 끝났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야곱언약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베냐민도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삭이 에서를 집착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 이런 것이 바로 인간적인 언약 달성의 모습인데, 하나님은 이것을 완전히 부수어 버린다는 것이다. 유다를 통해서 말이다. 즉, 하나님은 한번 쓰신 것은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한번 그렇게 되면, 그것을 자꾸만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조건은 변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우리가 자꾸만 놓치는 것은, 언약조건 중에 하나가 '인간들의 것은 부정을 당한다' 라는 것이다.

*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장자개념은, '하나님의 언약정신을 누가 담고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스마엘과 이삭을 두고보면 분명히 이삭이 되고,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도 야곱인데, 그런데 문제는 야곱의 자식들로 가면 유도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야곱이 사랑하는 자로서 맺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요셉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투톱으로 계속해서 연결되는데, 창세기 마지막을 보면 야곱이 12지파를 축복할 때 축복을 받은 지파는 유다와 요셉지파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투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다가 왜 부각이 되는가? 무엇을 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창세기에서 예언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유다지파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사사기까지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지난번에 히브리서 7장에서 십일조를 말하면서, 유다지파를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율법에 속하지 않은 엉뚱한 지파로 본다는 것이다. 레위지파와 비교해서 말이다. 유다지파를 살아있는 지파로 본다는 것이다. 요셉지파는 레위지파에 흡수된 것으로 보고서 말이다. 그래서 요셉지파를 말하는 여호수아가 끝나면 레위지파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 유다지파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까, 이 유다지파는 하늘에 속한 지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서 땅에 속한 것에 애착을 갖고 사랑을 갖는 것들을 모두 부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없앰'의 정신으로 하늘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예수님만을 선택하셨다 !!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택] 이라는 책에서도 밝혔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을 끊임없이 부정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허용하면서 말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만 선택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10분 휴식 !

* 다시 히브리서 11장을 보자.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구속사를 찾지 말고 예수님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믿는 자들의 개인적인 자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창세기에는 야곱이 지팡이에 경배한 것이 아니라 침대에서 축복을 했는데, 아마 지팡이를 축복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마치 모세의 지팡이처럼 말이다.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여기에서 나오는 증거는 '떠남' 이라는 것이다. 복 받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죽음, 떠남, 나그네, 갈 바를 알지 못함 등, 이러한 개념들이 전부 다 예수님에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 여기서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라는 것도, 예수님의 뜻에 의해 태어났을 때로 보자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모세는 어린아이이라서 믿음이 없으니 모세 부모의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는 태어날 때에 죽을 운명이었는데, 주님께서 살려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부모의 모습이 예수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여기서는 거절하는 모습과 고난을 사랑하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26절의 경우는, 지금에 신약시대에 와서 보니, 예수님께서 모세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 이러한 내용들은, 지금 히브리서 11장까지 오면서, 인내하라, 기다려라, 굳게 잡아라, 소망으로 나아가자, 라는 것들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후에나 동일하게 예수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히브리서 전체 몸통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경험했고 살았던 정신자세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모두 다 파급이 된다는 것이다. - (tape 5 끝)

* 예를 들어서, 히브리서 5장 7절 이하에서, 예수님이 육체의 몸을 입었을 때 당했던 어려움과 고난이 예수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다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그러니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야말로 끊어지지 않는 밧줄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 끈적끈적한 관계,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렇게 하시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그러니 이 히브리서의 말씀이 그 당시의 환난을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는가?

* 요즘같이 배부르게 예수님을 믿고 아무도 핍박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실은 세상교회가 성도를 줄곧 핍박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전혀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성장세미나, 제자훈련, 찬양집회 등이나 인기가 있을까 말이다. 오직 말씀 안에서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모습만이 참된 예수님의 모습이지, 소위 한국교회가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이 아니라 고질라(?) 라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이렇게 히브리서 11장을 살펴보면 참된 예수님의 모습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25절에 있는 것처럼, 아니 언제 모세가 언제 백성과 더불어 고난받기를 좋아했는가? 예수님이 그렇지 말이다. 모세는 살려고 광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으로 좋게(?) 봐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보여주시는데, 이제는 우리들 차례라는 것이다.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 여기에 나오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참는다' 라는 것 등은, 모두가 예수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니 인간들의 힘으로 어떻게 이렇게 살아가는가?

* 이런 것들을 목회의 현장에 한번 적용시켜 보라. 사람들이 좋아하는가? 사람들은 뭔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때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늘어나고, 예배당을 재건축하고 주차장을 넓히고 말이다. 이렇게 해야 기가 살아서 일을 하는데, '여러분, 무서워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시고,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미 교인들은 두려워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미 한국교회는 눈에 보이는 덩치 큰 것들이 다 장악해버렸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어떤 외국인이 와서 '맛있는 치킨을 먹고 싶은데 소개시켜주시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보신탕 집을 소개해주면 되겠는가? 안 되는 것이다. 많이 모인다고 해서 교회인가? 지옥에 갈 사람들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제대로 된 말씀이 먹고 싶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먹고 싶은 것은 개고기가 아니라 닭고기라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는 제대로 말씀을 전하는데 온 힘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다가 치킨 가게는 부도가 나겠지만 말이다. 항상 먹으려고 오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 인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 출애굽기에서 과연 유월절과 피 뿌리는 것을 믿음으로 정했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것을 믿음으로, 즉, 미리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습으로서 보신다는 것이다.

(히 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 그러나 사실 모세만 믿음으로 건넜고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덜렁덜렁(?) 건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너고도 죽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믿음으로' 라는 것은, 심판에서 벗어남이고, '건너감' 이라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히 11: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히 11:31) 믿음으로 기생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 여기에서는 '멸망치 않았다' 라는 것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히 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 여기에 나오는 입다나 다윗 등의 특징은 무엇인가? 전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했는고 하니, 맹탕(?)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이길 만한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누군가 도와주어서 이기겠지'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이러한 생각이 오늘 우리들에게 얼마나 필요한가?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전쟁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교회에 나오는데 아무도 방해를 놓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기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싸운다고 했다는 것이다.

* 그런데 교인들은 너무나도 타협을 많이 하니까 도무지 싸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비록 연약하지만 주께서 싸우라고 하시니, 그분만 믿고 나가자' 라고 하면 되는데, 싸우지도 않고서 벌벌 떤다는 것이다. 모세의 부모는 바로 왕의 명령이라도 무서워하지 아니 했는데, 요즘 교인들은 전혀 그런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성도들은 언제나 싸움꾼이다 !!

*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는 것인가? 분명히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사는가? 예수님의 모습도 보여주지 못하면서 말이다. 차라리 죽지 말이다. 그래서 사실 '죽자' 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말이다.

* 사람이 어떤 글을 써도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담대하게 쓰는 글이 있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쓰는 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글에는 오히려 자기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서 가짜 자신감을 남발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특히 선교단체의 글을 보면 이런 글들이 많다는 것이다. 일종의 과민반응이라고나 할까?

*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아니, 적이 없는데 적을 만들라는 말인가?' 라고 하는데, 아니라는 것이다. 적은 반드시 오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문으로든지, 전화로든지, 인터넷으로든지 말이다. 반박의 글을 준비했다가 발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32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라는 것이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및 선지자들, 이들 중에서 싸우지 않은 자들이 어디 있었던가? 전부가 다 싸움꾼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러한 싸움을 유발시켰는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 그래서 지금도 이근호는 집에서 '묵시문학의 기원' 이라는 책을 보면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스갸랴 등을 언급하는데, 그래서 이 책을 보면서 내가 평소에 소홀히 한 본문은 없었는지 돌이켜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고 말이다. 이렇게 비판하면서 보니까 머리 속에 다 들어온다는 것이다.

* 이렇게 책과 혼자서 밤을 새워 싸움을 해놓으면, 나중에 이사야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놈을 만나면 충분히 대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반드시 날아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도 전투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방을 공격하고 방어를 하면서 공부를 하면, 모두가 자기에게 그대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것도 뜯어고치고 말이다.

(히 11: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 여기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인가? '치열한 싸움'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과 더 좋은 부활'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앞으로 오실 분을 증거한 것이고, 우리는 이미 오신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 어떻게 그렇게 증거하는가? 세상의 왕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같이 하고 말이다. 물론 조직에서는 칼을 갈지만 말이다. 그것이 바로 허위권력이라고 하는데, 권력도 없으면서 있는 체 한다는 것이다. 그런 헛것을 가지고 남에게 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 오직 예수님의 증인만 되면 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분을 더욱더 생각하고 보이는 것처럼 살아감으로 말이다. 그분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구차히 살고자 하지 않고 말이다. 너무 어려운가?

(히 11: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 여기에는 희롱과 채찍질이 나오는데, 물론 변태들에게는 채찍질이 기분 좋은 것이지만 말이다. 아니 희롱이 무엇인가? 그러나 논에 허수아비가 서있다고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허수아비가 백이 모이면 백 개의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보통 '당회', 혹은 '노회' 라고 하면서, 사람을 지배하려는 어떤 초월적인 권위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헛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목사가 있고 장로가 모여있는 것이지 말이다. 노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고, 즉,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허수아비인지, 개인적으로 만나면 모두가 다 'OK'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명 이상만 모이면 'NO' 라는 것이다. 희한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 여기에 하나 첨가를 한다면, 세례요한이 어떻게 죽었는가? 목이 베어져서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비참한 최후가 마가복음에 자세히 나와있는데, 그 모습이 과연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가, 안 되는가? 위로가 된다면 신자지만, 위로가 안 된다면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 저렇게 비참하게 죽어도 예수님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니고, 증인이 되는구나!' 라는 것이다.

* 이렇게 관심이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면, 세례요한의 죽음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살려고 하는 자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보이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증거되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 '용기' 라는 것도 두려움의 일종이다 !!

* 어떤 사람들은 이 히브리서 11장을 해석하면서, 이것을 믿음의 차원에서 보지 않고 '용기'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도 사실 일종의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두렵기 때문에 용기를 내려고 하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어두운 밤에 누군가가 집에 몰래 들어왔다면 용기를 내어야만 방에서 거실로 밖으로 나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두렵기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냥 자기 방에서 거실로 나간다면 새삼스럽게 무슨 용기가 필요한가?

* 그러니 용기를 낸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용기조차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뒤에서 마귀가 얼마나 웃겠는가? 믿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때문에 따로 용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히 11: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 이 본문을 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 한번씩 사용하는데, 기존의 내용들은 다 외워서 앵무새처럼 대답하니 별 의미가 없고, 여기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다짐을 받는다는 것이다. '정말 이렇게 되어도 좋습니까?' 라고 말이다. 물론 그때가 지나고 나면 그만 이지만 말이다.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으로 나가는데, 이렇게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노골적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다니엘, 이사야, 예레미야 등이 이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미리 다 그렇게 증거를 남기게 하셨다는 것이다.

* 그리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었다는데, 가죽코트를 입었음을 말하는 것인가? 이 세상에서 헐벗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히 11: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 믿음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 증거가 믿음으로 왔기 때문에, 믿음은 그 증거를 주기 위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습니다' 라는 용기가 아니라 말이다. 그러니 믿음이란 증거를 유지하기 위한 주님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알아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끌려나왔지 말이다.

* 그런데 증거는 받았지만 약속을 못 받았다는데, 여기서 말하는 증거는 무엇인가?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 등을 말하는데, 그런데 증거가 왜 이리 험악한가? 그렇다면 그들이 왜 이렇게 당하는가? 오직 약속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오늘 지금 이 시간, 과연 우리에게 때문에 유발된 증거가 무엇인가? 그러니 맹탕 놀지만 말고 평소에 그런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