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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45) - 새언약 19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45) - 새언약 19

정인순 2011. 1. 4. 12:18

 

하나님의 선택(45) - 새언약 19
                                                                       99,6,21 이근호 (김진철 정리)

☞ 하나님의 선택, 233 페이지

◈ 싸우시는 예수님 - 신약에서 예수님은 누구와 싸우시는데, 그러면 그 대상은 누구인가? 먼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건 적이 없고, 예수님이 먼저 사람들에게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해서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부터 이미 세상은 '회개하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불로 심판을 받는다'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역사의 끝 - 이런 이야기를 듣는 쪽에서는 역사(歷史)를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 보았는데, 세례 요한은 역사를 절벽으로 보는 것이다. 역사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절벽의 끝에 서서,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절벽 끝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 입장에서는, 목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이단이고, 바로 세례 요한이 가졌던 마음 자세가 안 되면 설교 자체가 엉터리가 된다는 것이다. 역사의 끝에 서서 전하지를 않으면 사기라는 것이다. 이 밤의 끝을 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전한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 때를 강조한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은 역사의 마지막을,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이고 불 심판을 받는 것 등을 이薩銖償?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가 있는가를 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전하면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정신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그러면, 예수님께서 누구하고 싸우셨는가? 예수님께서 무엇을 공격하셨는가?

  ① 바리새인 ② 이방종교 ③ 유대종교 ④ 육(肉)  

* 바리새인과 이방종교들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육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육을 공격한 근거는 바로 예수님 자신은 육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이다. 영이란 하늘에서 오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요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낯선 현실 - 또 다른 현실이다. 낯선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설교를 하거나 예수를 전한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참으로 낯선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땅에 속한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땅에 속한 것을 알아야 전혀 땅에 속한 것이 아니한 것만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기껏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데, 전부가 다 땅에 있는 이미 육에서 나온 이방 종교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면, 욕심을 버리고, 마음도 버려라 등 이미 불교에서 나온 것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불교, 유교 등 많은 종교를 두신 이유는,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공격하셨는데 지금은 바리새인이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없으니 우리는 그 당시의 유대교 상황과 다르지만, 그러나 또 다른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다른 종교인들을 우리 주위에 뿌려놓았다는 것이다.

*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동네에만 간 것이 아니고 다른 동네에도 갔던 것이다. 다른 동네는 역사가 이어진다고 보고 있는데, 그 곳에서 역사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끝이라는 증거를 대야 하는데, 역사가 끝났다는 증거는 '인간은 땅에 속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땅에 속했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길게 이어져도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 이것을 설교의 자세와 차원에서 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땅에서 도출될 수 있는 그 어떤 선행이나 윤리, 인간들이 만든 모든 종교적인 체험이나 기적, 땅에서 만들 수 있는 감정이나 분위기를 돋우는 것, 성장이나 부흥하는 것, 선교하는 것 등은 이 땅에 속한 것이라고 거부를 하고, 오직 하늘에 속한 것만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선택도 땅에서 생각한 선택이 있는 반면에 하늘에 생각한 선택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땅에서 생각하는 선택은 할례 등을 행함으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육신의 증표에 근거한 선택이지만, 하늘에 속한 선택은 예수님이 새로 뽑는 선택을 말한다는 것이다.

* 할례와 커플링 - 할례란, 요즘 신혼부부가 커플링 하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같은 반지에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할례란 바로 이렇게 예수님과 자기 백성과 커플링 하는 것이다.

* 그래서 골로새서 2장에서 육신의 몸을 죽이는 십자가를 할례라고 한다는 것이다. 육신 자체를 거부해 버리는 것이다. 各微÷?의미를 이런 식으로 본다면, 할례는 '내 몸은 죽어야 될 몸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할례라는 것이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육신의 할례를 행했다고 자랑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할례는 육신의 옷을 벗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할례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할례의 의미는 '너는 육이기 때문에 마땅히 역사의 끝에 서서 이 육은 무가치하고 소용이 없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육신이 소용이 없는데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큰 교회의 당회장 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선택론의 충돌 - 그런데 사람들이 역사의 끝에 설 줄을 모르는 것이다. 목사도 교회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역사의 끝에 서서 '회개하라' 라고 하는 것은, '육은 죽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몸은 죽은 몸이라고 할례를 한 것이다' 라고 증거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이 땅에 속한 그 어떤 것도 일체 인정을 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 속한 것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선택론인데, 여기서 선택론의 대충돌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 이방인 - 이방인의 의미는 구약에서 원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공격의 대상인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거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에는 거룩이 있는가? 그들은 할례를 행했기에 거룩하다는 것이다. 할례를 행했으니까, 이것이 육신의 증표인 것이다.

* 조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육신의 증표가 구체화된 것이 나중에 '원수를 발 아래에 둔다' 라는 것인데, 이 원수를 발 아래에 둔 증거가 바로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의 뜻은 원수를 발 아래에 두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육신의 할례를 행했는데, 이 육신의 할례는 '원수를 밟았다'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왕상 5:3) 당신도 알거니와 내 부친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을 그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이유는? - 다윗이 성전을 못 세우는 것은 원수를 아직 발 아래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원수는 이방인인데, 그런데 이방인이 굴복한들 이스라엘이 망하기에 원수를 이방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육신의 할례를 행할 때에 원수라는 개념이, 장차 성전에서 다윗이 원수라는 것이 이방인들인데, 이 이방인들이 원수가 된 이유는 할례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할례가 없다는 것은 거룩이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할례에서 하나님의 원수는 적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원수가 적들이라면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먼저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 왜 적들을 치기 전에 자기들에게 할례부터 행하여야 하는가? 왜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구하려고 가기 전에 십보라를 통해서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 그것은 원수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다 같이 하나님의 원수이라는 것이다.

◈ 할례 - 원수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다 같이 하나님의 원수이다 !

* 선택되었다고 할 때에, 하나님이 '모두 다 원수였었는데 선택한다' 라는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런 원수의 개념이 없으면 칼빈의 구원론적 선택론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냥 창세 전에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했다고 해버리면, 할례도 필요 없고, 그냥 '너 구원받았어' 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사람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다 원수라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다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 양자 - 양자라고 하는 것은,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아들이라는 것이다. 양자라고 하는 표현은 이러한 '예수님만이 아들이다' 라는 의미를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원수라는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 그래서 할례를 행하고 대신 죽고 그래서 우리에게 어린양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 그??십자가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그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양자의 영을 받아서, 우리가 종인데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 구원론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창세 전에 종으로 선택되었는가, 아니면 아들로 선택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라는 의미를 몰라서 그런 것이다. '예수 안에서' 선택했다는 의미는, 종이든 아들이든 예수님께 일임했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아들이고, 예수님이 누구를 선택하는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맡겼다는 것이다.
  
* 선택론이 욕을 얻어먹는 이유는, 모든 구속사를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은 역사의 절벽에 서서 외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정론이나 선택론에 의하면 역사라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 전에 예정한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 역사란 흘러가 보았자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 바깥에는 '태초' 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선택했다고 한다면 역사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고, 또 멸망을 시키고,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는,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도록 하시는 것인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일을 처리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정론과 역사가 어떻게 조화가 되느냐는 것이다. 둘 중에 하나는 때려치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 안에서' 라는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하시려고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했으니, 창세 전에 분명히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창세 전에 계신 분이 아니고, 그냥 몇십 년 전의 인물로만 본다는 것이다. 창세 전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세 전에 계신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었다고 본다는 것이다.

* 여기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것을 학자들은 예수님이 부활되심으로서 참된 메시야 반열이 올라갔다고 한다. 여기에서 메시야 반열이란 단순히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고, 태초에 있었던 계획이, 계시가 완전히 다 드러났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해와 달이 있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런 것은 나에게 물어보면 안 되지' 라고 하지 말고, 창세 전에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도록 예정하시고, 계획을 잡으시고, 선택이 마무리되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 '예수 안에서' 라는 의미는, 예수 안에서 있는 인물이 누구이냐에 주도권이 없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모든 주도권을 다 갖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주도권이 하나님과 예수님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 때에 그 주도권을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창세기에 있었던 그 주도권의 그 실체가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그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이' 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세분화되면서, 그것이 구체적인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라는 말씀을 하시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포함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객관적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는 태초에 종이었는가? 아들이었는가?' 라는 질문은, 우리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기에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들로 예정된 것인가? 종으로 예정된 것인가?' 그것은 아들로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 전에 아들입니까?' 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아들로 예정된 것은 맞지만 말이다.

* 선택론과 예지 예정론 - 선택론은 처음부터 적용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셨는데, 처음에는 종으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아들로 변경을 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들뿐만 아니라, 종으로도 예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감리교에서 주장하는 '예지 예정론' 이라는 것이다.

* 예지 예정론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인가?' 라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에, 구원론에 빠질 때에 이렇게 예지 예정론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지 예정' 이란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예지(豫智)와 예정(豫定)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같다고 한다면 이렇게 두 번을 쓰지 않을 것이다.

* 아무리 성경신학을 하고 구조주의를 해도, 인간이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것은 조직신학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조직신학을 제일 나중에 해야 하는데, 먼저 하고 나서 신학을 다 공부한 것처럼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야말로 선머슴인 것이다.

* 질문 - 구속사는 선택론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가?  

* 답변 - 물론 구속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 구속이라는 말도 문제가 되는데, 그러나 너무 이렇게 용어에 대해서 따져버리면, '데리라' 라는 학자에 의하면 용어라고 하는 것은 기호학에서는 은폐와 엄페의 치안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그 한계를 알고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 땅에 속한 선택은 항상 내 것이다 ?

* '예수 안에서 선택했다' 라는 것은 우리의 차원을 떠난 것이기에, 선택되었다는 것을 땅에 속한 우리가 내 것이라고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을 살펴본 것도,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땅에 속한 선택은 항상 내 것이다' 라고 해서 박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택은 예수님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선택을 받을 권리도 우리에게는 없고, 선택을 받은 증표조차도 우리에게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선택이 되고 안 되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허전해도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것을 땅에 속한 우리가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참 선택은, 주님의 선택이 밀려오고 우리의 선택은 밀려가는 것이다 !

* 그러면 사람들이 허전함을 느끼고 좌절을 느끼면서 무엇을 붙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붙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붙들어짐을 당하여야지 붙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것이 현실에 밀려들어오면서 내가 붙들고 있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선택이 밀려가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주님의 선택이 밀려오고 우리의 선택은 밀려가는 것이다.

*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이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짓는 자이고, 그래서 죄의 종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에서 나올 수 있는 선택론으로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교리나 조직신학이라면, 그것은 주님의 복음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시계가 저절로 간다고 할 때에, 어떤 사람은 그래도 그 시계의 태엽을 감아주는 사람은 있어야 하지를 않느냐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고 하면, '그래도 선택할 만한 선행이 있어야지, 내가 방탕의 길을 가는데 나를 선택할 리가 있나, 뭐라도 하나는 있어야지' 라고 하는, 즉 선택할만한 근거가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 우리들이 '역사의 끝에 섰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지금까지는 ?【?일했지만 지금부터는 하늘에서 일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직접 어떤 분이 와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땅에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자 했던 모든 것은 다 헛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다.

* 자기를 부인하라 ! - 이 말은 寬?【?나온 모든 것은 일체 받지 않으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일체의 찬양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께서 주신 찬양이 나올 때 주님께서 주신 사랑이 반사되어 나올 때에, 그 은혜를 주신 것이 나올 때만 받으신다는 것이다.

* 성령의 열매 -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그러나 나오는 것은 우리의 죄와 더불어 은혜가 같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항상 죄와 더불어서 은혜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온유와 화평과 사랑 등,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다.

*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들추어지고, 죄와 더불어 주님의 죄를 극복하고,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용서하심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선택을 소유하려고만 한다든지, 선택을 가지고 있으려고만 한다면 주님의 뜻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33 페이지

⊙ 육신의 씨는 택하심을 거부하는 씨이다. 그리고 선택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 아직도 태어나지 않을 때에 있었던 결정을 모독하는 자들이다. (책)

* 이 말은, 아직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의 결정은, 태어났어도 결정을 우리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어났으니까 이제는 선도 행할 수 있고 악도 행할 수 있으니, 그 결정을 인간이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예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그 사람은 예수 안에서 결정된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육(肉)을 죽인다고 하는 것은, 자살을 한다는 말이 아니고, 비록 내가 존재하고 있지만 나의 모든 일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미 태어나기 전에, 창세 전에 있었던 그 결정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활동을 하고 있어도 내 두 다리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어진 바, 거기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 결정된 바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에 나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그러니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라' 라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결정에 우리의 두 다리를 디디고 서 있어야 하는 것이지, 태어나고 난 뒤에는 내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도 선택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선택의 의미를 놓치고 행위로 나아가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이 주님의 선택이 우리의 육적인 선택 속으로 밀려들어온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의 죄가 밝혀지는 것이다. 내가 선행을 행할 수 있고, 찬양과 기도를 행할 수 있다는 죄와, 하나님의 선택이 한 평생이 다 가도록 우리 속에서 발생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선택된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택된 사람 중에는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된 사람은 죄의 종노릇하게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계획 - 그런데 이렇게 죄의 종노릇하는 그 인간이, 창세 전부터 결정되어진 사항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 즉 양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양자가 된 것은 몽땅 주님의 공로만으로 돌리는 작전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다.

* 이것을 구원론으로 설명하면 설명이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수모와 고생을 당해도 그것 때문에 화를 내지 말아야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에 슬퍼하고 노한다면, 아직도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늘 우리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33 페이지

⊙ 그 선택을 한없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씨의 구별이 이루어진다. (책)

* 그러면 선택이 되었는데, 왜 자꾸 하나님은 고생을 시키는가? 선택되었으면 좀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시지, 왜 자꾸만 나를 난처하고 황당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이렇게 한없이 미워지는 환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이다. 철야기도를 했는데 장사가 안 되고, 헌금을 많이 했는데 자식이 다치고, 교인수가 10명이나 늘어났는데도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고 말이다.

* 바로 그 점을 우리는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팔자가 나를 속여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를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주님이 가신 길은 고상하고 거룩한 길이 아니라, 한없이 그 길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길, 주님이 한없이 미워지고 원망스러워지는 길로만 자꾸 몰아넣는 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육신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았다는 것을 더욱 더 깨닫게 하는 것이다. - 더 이상 우리가 무슨 걱정을 하리요 !

☞ 하나님의 선택, 234 페이지

* 드디어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종류의 언약을 소개하는 것이다.

(갈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어머니를 비교하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난 것은 종의 자식이고, 예루살렘은 자유하는 여자, 곧 하늘에서 났다는 것이다. 하늘의 어머니라는 것은, 종교학이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신을 향한 자기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하늘이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든 불교이든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 그러나 자유하는 여자, 곧 하늘이란 태초 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왜 종으로부터 난 것이 필요한가? 이것이 우리 모두가 육에 속하였고, 또 땅에 속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로 하갈과 같은 종년의 자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우리도, 우리가 잘나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따로 계신다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한 분인데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원래는 하갈의 자식처럼 종이었는데, 이제는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기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 이것을 구원론으로 생각을 해서, 어떻게 하든지 구원을 받으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또 하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고, '나' 라는 존재는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된 어떤 사항에 의해서 적용을 받는 대상이라는 것을 다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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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약속의 핏줄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이다. (책)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 자유와 해방 - 일반 사회학에서는, 자유라는 것은 자기가 아무런 구애 없이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해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억압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자유와 해방을 해방의 의미로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를 붙들고 있는 원수(하나님의 원수)는 죄이고 육신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방인으로 비유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종의 자식으로 비유하고 있고 말이다. 종의 자식은 죄이고, 죄는 종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 즉, 하나님의 자식은 예수님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 종의 자식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영을 받아서 종의 자식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 다시 한번 처음부터 반복해 보면, 역사가 이어진다고 보고 있는데, 세례요한은 역사의 끝에 서서 외쳤다는 것이다. 우리도 역사가 이어진다고 보는 쪽에 섰다가, 죄에서 해방되어 역사의 끝에 선다는 것이다. 땅에 속한 것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다. 우리를 너무나 홀가분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설교도 홀가분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모두 허수아비라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니까, 노회장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라고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집어넣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 성경은 우리에게 '너는 자유자이다. 너를 괴롭히는 것에서 해방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된 사항이기 때문에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역사가 없는 창세 전에 두 발을 디디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지금은 태어났다는 것뿐이지, 나를 장악하고 있는 운명은 이미 창세 전에 결정된 운명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허수아비들 때문에 심약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육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 답변 -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공관복음에서는 다른 것이다. 지금 이 강의에서는 사도바울처럼 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육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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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 여기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렇게 계집종의 아들과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아들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비유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갈라디아서의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예수님 이외의 모든 사람을 보여주는 하나의 비유라는 것이다. 이삭은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희선이 구두를 잘 만드는가? 그것은 토마토에서 맡은 자기 역할이라는 것이다.

(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그래서 이삭을 보고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했다고 해서 저주받았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삭의 배후는 누구인가?', '우리의 배후는 누구인가?' 라고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배후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마엘 역할을 하며, 예수님은 이삭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역할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비유로서 말이다.

* 성경해석이 어려운 것은, 이렇게 구원론과 그리스도론이 섞여 있으니, 그것을 하나씩 갈라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이삭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고, 이스마엘은 시내산 하갈의 자녀라는 것이다. 즉, 율법의 종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영을 받기 전에는 율법의 종이었다는 것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장차 올 예수님과 우리를 구분하기 위한 비유라는 것이다.

◈ 즉,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마엘이었는데 이삭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자꾸만 '내가 착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배후의 인물을 등장시켜야 하는데, 그래서 그 분만을 자랑하고 말해야 하는데, 자꾸만 자기 자신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 어제 헌신예배에 설교를 하면서 반응이 하도 이상해서, "하나님께서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는데,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도록 만들었는가, 아니면 예수님만을 자랑하게 만들었는가? 천한 사람을 택하여 귀한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천한 것은 그대로 있지만 예수님을 자랑하게 만들었는가?" 라고 고함을 쳤던 것이다.

* 우리 운명을 탓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배후에 예수님만 있으면, 우리가 거지가 되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예수님만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예수 믿는데 왜 이 모양이냐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과 비교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로 뜨거운 맛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험악한 것을 당하고 나면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진짜 구원의 능력이 이러한 나도 구원해 주시는구나', '구원의 배후에 계신 주님의 창세 전에 결정한 사항이 이렇게 놀랍구나',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 바로 이 일이구나',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 현실화 될 때에 이런 처지에 있는 나도 구원하시는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해석이 모두 다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라고 우리를 뽑아서 일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목사는 사창가에 가면 안 된다는 말이 틀렸다는 것이다. 갈 때가 있고 안 갈 때가 있고, 술을 먹고 취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 가지고 죄를 지었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인이 그리스도만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이런 엉터리(?) 목사라고 할지라도 창세 전의 일로 구원을 하신다는 것이다.

* 나는 지금까지 바람을 한번도 안 피웠다든지,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성경해석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관심사가 땅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35 페이지

⊙ 자유자의 자식이 되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활동으로 생겨난다. 인간에게는 법이 운명이며, 체질이며, 사슬이며, 본능이며, 충동이다. (책)

* 인간이 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이종의 충동이라는 것이다. 목사는 점잖아야만 되고, 다방에 가서는 안 되고, 나쁜 영화를 보면 안 되고, 화를 내어서는 안 되고 하는 것이 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육신의 증거라는 것이다.

*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들어가게 만든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안 되더라' 라는 사슬을 주님은 호되게 깨신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도록 말이다. '심방을 갔더니만 그 사람은 안 나와도 다른 사람이 대신 나오는 것을 보니 참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 라고 하는, 그런 사고방식도 역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 자유자는 노는 동네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 평생을 다 가야만 아는 것이다. 죽을 때에 십자가만 붙드는 것이다. '한 평생 기도 많이 하고 심방 많이 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주여, 바른 복음 전하고 바른 목회만 한 이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라는 것이다.

* 십자가의 능력으로 창세 전에 예정된 대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어떤 목사를 보면서 '저 목사는 매일 저 모양이고, 공부 좀 하지' 라고 한다면,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은 목회를 잘 한다는 법을 자기가 만든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분이 표준이 아니라 자기 행위가 표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샘솟듯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징그럽지만 말이다.

⊙ 가정에서는 가정의 법을 존중하고, 학교에 가면 학교의 법을 순종하려고 하고, 사회에 나가면 국가법에 복종하려 하고, 교회에 나가면 교회의 질서에 맹종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다. (책)

* 가정을 자기가 잘 다스려야 하는 것으로 여기면, 또 하나의 법을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아무도 정죄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우리가 간음을 해서라도 그것을 깨달았으면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사람이 없고, 주님 이외에는 정죄할 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자유자라는 것이다. 정죄할 자가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예수님과 비교하라 !

* 계속해서 남의 눈치를 보면서, '목사가 이러면 안 되지' 라고 하면서, 스스로의 잠금 장치를 만들어서 자기를 감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왜 다른 사람하고 비교를 하는가?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예수님하고 자신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도 죽음의 두려움과 날아드는 질타가 금방이라도 저주로 바뀔 것 같은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하고 한 평생 지내왔기 때문이다. (책)

* 이것이 평생 종노릇하는 모습인 것이다. 아직도 예수님의 좋으심은 모르고,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는 평가는 너무 좋고, '다른 사람이 내게 대하여 훌륭한 목사이다' 라고 하는, 신앙이 좋다는 평가는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죄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죄함이 없다고 하신 주님의 낮은 목소리는 좋지 않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것이 육의 한계이다. 육을 지녔기에 그 사회에서의 추방은 죽음과 저주로 해석한다(창 4:12,13). 그러니 사회적 박탈감이 주는 느낌은 공포 그 자체이다. (책)

(창 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 퇴출을 당하는 것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노숙자들이 자기 자신을 내팽개치는 이유는, 일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내가 남에게 패배했다는 그 패배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외수, 중광 등이 자유자가 아니면서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욕망이 있는데 자기 욕망을 사회가 충족시켜주지 않으니까 반발심으로 다른 면으로 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약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 개척교회를 했으면 열심히 공부하면 되는데, 개척교회를 하면서 노는 이유는 내 스타일은 1000명인데 왜 20명밖에 안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논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삐지는 것이다.

* 자기는 자유자라고 하는데, 사실은 자유자가 아니고 아직도 남이 보는 시선과 자기 욕망의 사슬에서 못 벗어난 것이다. 자기 할 일만 하면 되었지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말자는 것이다. 하키 선수가 하카만 열심히 하면 되지, 관중석에서 콜라를 1000원을 받든, 2000원을 받든지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박탈감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창세 전에 있었던 일에 ?발을 디디고 서자 !

⊙ 오직 성령이 오실 때만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저주를 무서워하지 않고 헤어지게 된다. (책)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 성령이 오면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기쁨은 법을 이긴다는 것이다. 성령이 왔다는 기쁨은 정죄함이 없다는 기쁨은 법을 이긴다는 것이다.

* 사창가에 가도 아가씨들이 몸을 파는 여자로 보이지 않고 친척으로 누이동생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런 여자들과 섹스를 할 수가 있겠는가? 모든 범죄는 사랑이 없을 때에 일어나는데, 아내에 대한 섹스도 사랑이 없을 때에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면 상대방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대 앞에 서기만 하면 나는 왜 이리 작아지는가' 이렇게 되지, 가지고 놀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 우리나라의 가부장 제도의 나쁜 점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자에게 고귀하게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를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한 것이지, 사랑하기 위해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날이 날면 갈수록 배려해주고, 함부로 다루지 말고, 성질을 풀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는 고추포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 사랑에는 스트레스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를 법으로 생각하기에, 목사이기에 참는 것이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그 사슬에 아직도 매여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목사가 세상으로부터 해방되었다면, 아내를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사랑으로 다가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내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남에게 짐이 되고 죄가 된다 !

*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면 율법에 매이지 않을뿐더러 부부싸움도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유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것이 남에게 짐이 된다는 것이다. 그 예? 방 하나에 혼자 있으면 시원한데, 두 명이 있으면 덥고, 세 사람이 있으면 더 덥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 자체가 남에게 짐이 된다는 것이다.

* 성경은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짜 자유자로서, 성령의 인도함으로 받는 자로서, '이 죄 많은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희들은 허수아비이다' 라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본문을 설교하려면, 정말 모든 법에서 초월한 사람이 되어야, 자유자가 되어서 이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 이러한 사람 같으면 그 소망은 합당한 소망이 되고, 사랑도 합당한 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었다고 하는 것은, 또, 늘 마음에 사랑이 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도, 이제는 구원의 용어가 아니고, '이제는 나는 완전히 하나님의 사람이지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라고 하는 그 하나님이 주신 기쁨의 연속으로 설교가 된다는 것이다. 선교회비를 내라고, 바자회를 잘 하자고, 그런 말이 안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냥 '여러분,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235, 236 페이지

⊙ 땅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미 저주에서 벗어난 채 태어났다. 어머니가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세계에 계신다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곧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책)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성경과 우리의 실생활을 견주어 보게 하옵소서. 남과 비교하지 말고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를 비교해 볼 때, 오직 십자가만 붙드는 저희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 MORE AND MORE - 남자는 아내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해야지, '너는 내 것이다' 라고 하지를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적 전통이라기보다도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여자에게는 예수, 하나님보다 사실 오직 남편의 사랑만을 바라는데, 여자는 그 역할이 남자의 사랑을 입도록, 남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남편의 사랑을 못 받으면 여자는 아무리 요조숙녀라고 해도 바람을 피우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 없이는 못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관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남자는 여자가 바람을 피우도록 유도를 해서 자기도 바람을 피우려고 하는데, 특히 바닷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이고,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하나의 오락에 불과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