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1) 요약 본문
하나님의 선택(1) 요약
1997,3,3 이근호 강의
* 하나님의 선택은 한 세트를 이루는데,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한 세트로 이루어서 언약을 만들어 낸다. 인간이 로봇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성경이 로봇 이전에 있었기에 이런 소리는 안 어울린다. 하나님이 인간을 계약 상대자로 정했다는 자체가 로봇이 아니란 것이 드러난다.
*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있다' 라고 해도 '있다' 라는 존재성, 이 자체는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의지가 지향하는 지향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코를 이야기한다면, 코가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왜 그 코를 가지고 엉뚱한 것을 냄새 맡고 다니느냐 하는 것이다.
* 인간은 간섭을 좀 받으면 늘 인간의 자유의지를 들고 나와서 반발을 한다. 우리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든 뭐든 간섭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에 대해서 용납을 하면 안 된다.
◈ 인간의 자유의지, 그 지향점이 무엇이냐?
* 인간은 나름대로 선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세팅을 이루어서 언약을 이루는 것이다.
* 노아 언약 - 노아는 자기의 무엇을 선택했는가? 노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향하였다. 이에 반해 세상은 약속을 포기했다. 여기서 노아 언약이 등장한다. 인간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세팅이 된다. 인간들이 늘 하는 먹고 마시고 장가가는 것이 죄냐 하는 것보다,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인간은 기존의 세계를 고수하려고 하는데 반해서, 노아는 홍수 이후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기반을 유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 폴 틸리히 라는 철학자는 하나님을 존재의 기반으로 보았다.
*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기반을 철저히 부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을 전제하지 않은 먹고 마심, 심판을 기초로 하지 않는 장례식, 결혼식, 영혼 불멸설 등, 이 모든 것 인간의 모든 선택은 자기 존재 기반의 성장과 발전을 지향한다. 그러나 심판은 그 존재 기반 자체를 부수고 만다.
* 인간의 기초를 부수는 데 있어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이러한 심판을, 죄를 기초로 하지 않는 삶을 두고,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 했다. 인간의 존재기반을 부수는데, 자기의 말씀을 기준으로 인간존재 기반의 허실함을 드러내셨다. 율법을 집어 넣어보니 인간의 존재기반이 얼마나 허술한가가 드러났다. 결국 심판의 근거로 간주하는 것이다.
◈ 왜 인간은 자기 존재의 기반을 가질 수 없는가? - 죄(罪)
* 그것은 죄(罪)때문이다. 존재기반을 대변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신학이 바로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을 대비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모든 기존의 조직신학이다.
*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비가 아니라, 의(義)와 죄(罪)의 대비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대비하면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의 겁주기 개념밖에 안 된다. 그러나 의와 죄의 대비는 완전한 말살이고, 말살 그 다음에 완전한 재창조이다. 의로서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기에 인간에게는 의가 없는 것이다. 의의 추진 주체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러한 주체자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 여호와 전쟁 - 성경의 모든 내용은 의가 죄에 대하여 벌리는 거룩한 전쟁, 즉 여호와의 전쟁이다.
* 여기에 대하여 인간은 자기의 존재기반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항한다. '하나님이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잠시 우리를 겁주려고 하시는 것이지요? 제발 우리 존재기반을 용납해 주소서!' 그래서 튀어나온 것이 '영혼 불멸설' 이다. 잠시 죽였다가 천국에서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이다.
* 그러나 죽음이란 것은 잠시 기절하는 것이 아니라,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흙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흙)이다. '제품명=흙' 인 것이다. 흙인데 흙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하나님의 창조성이 사라진 흙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하나님의 약속
*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 그러니 흙과 약속의 대비가 된다. 이것이 바로 의와 죄의 대비인데, 이를 흙과 의의 대비, 즉 아담(흙)과 하와(생명)인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아담을 살리는 것이다. 약속과 흙의 대비라는 것이다. 약속이라는 것은 새로운 창조인데, 즉 무(無)에서 유(有)인데, 이것은 죽은데서 살린다는 것은 같은 말인 것이다. 무(無)라는 말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죽음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죄와 의가 세팅이 되어 있는 이것을 그대로 언약체제에 집어넣으면, 인간의 모든 선택은 죄가 되고 하나님의 모든 선택은 의가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의 마지막 결정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인간의 마지막 최종적인 결정체는 아담이다. 아담 안에서와 예수 안에서 이것이 대비되는 것이다.
* 그러면 성경은 의와 죄의 싸움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담 안에서는 최종적인 것이 무엇이 나오는가? 바로 종교가 나온다. 종교적인 형태들, 즉 예배, 교육, 교제, 봉사, 전도 등, 종교의 4가지 요소가 나온다. 이것은 아담 안에서의 모든 인간에게 이런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 예를 들어, 영화 만들기 전에, 고사=예배, 고사 후 음식=교제, 선전=전도 등, 이러한 요소는 모든 인간 집단에게 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 강습회나 훈련하는 데 이런 것으로 시간을 채운다. 예배순서 등, 이런 종교적인 요소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인간의 선택 전체가 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자체, 그리고 기독교 자체의 역사가, 그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이러한 역사(歷史)가 없다. 왜냐하면 묵시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즉,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완성의 세계이기에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계이기에 역사가 없다. 시간이 멈추는 곳이 천국이다. 왜냐하면 완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는 시계가 없는 것이다.
* 이미 시간의 모든 목적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천사가 시계를 안 차는 이유는 시간의 목적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5시, 6시가 있는 것은 미완성이기에 그렇다. 그 시간적 공간을 메워야 하는 미흡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시계가 없고, 스케줄이 없다. 모든 것이 완전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쉬는 시간을 시간으로 안 본다. 안식의 때이기에 시간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 세상의 교회는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은, '교회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지 않느냐' 라는 의도가 짖게 깔려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 성경은 바로 예수의 의와 인간의 모든 선택과의 싸움을 보여준다.
* 이 선택의 싸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뽑혀 나온 사람이 선지자이고, 여기에 엑스트라 역할을 하는 이방나라이다. 그래서 구약은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은 왕이라는 정치적 수반이 제사장 역할까지 함으로 말미암아, 즉 종교기능까지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보려는, 죄의 본래의 목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 이것이 유대교인데 정교일치의 원리이다. 그들에게 4개의 분파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는 한결같이 한 목소리를 낸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들의 먹고 마시고 장가가는 존재의 기반을 부수려고 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최고의 율법(義)으로서 이들을 공격했다. 인간은 법을 가지고 인간의 행위를 첨가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결탁되어 최고의 이상적인 국가를 생각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행위자체가 죄에서 나왔고, 죄를 지향하기 때문에, 죄와 결부된 모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자체도 죄의 열매가 되고 만다.
*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율법이 있다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은 인간의 본색이 드러내게 하고, 숨어 있던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숨어 계시는 하나님 -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 표현했다(시편). 그러나 하나님만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도 역시 숨어 있다. [ 숨어 있는 하나님 : 숨어 있는 죄 ]
* 역사란 것은 단지 졸들의 싸움이었지만, 그러나 십자가가 등장하니, 숨어 계시던 하나님께서 완전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등장하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등장하니 저쪽도 마귀가 본색을 드러낸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와 대면하는 것이다. 마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악마가 바로 등장한다. 대장끼리 맞붙는 것이다.
* 악마는 창 3:15절의 '뱀의 후손' 인데, 그 본색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밝혀진다. 그래서 십자가만 전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직 십자가만을 전해야, 예수 그리스도가 의로서 나타날 때에 숨어 있던 인간의 죄성이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이것을 계시록 13장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이라 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용, 거짓 선지자 등으로 표현된다.
(계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 이렇게 여러 상징적인 그림 언어로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숨어 있기에 그림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용이 마귀가 아니라 용이 하는 행동이 마귀가 하는 짓이고, 짐승이 마귀가 아니라 짐승이 하는 행동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그 지향점이 중요한 것이다.
* 그들이 무엇을 제일 싫어하는가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계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 전쟁을 일으켜 짐승이 이긴다. 이 짐승이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두 증인을 죽인다. 그 죽이는 도시의 이름이 소돔, 혹은 애굽이라고도 한다. 벌써 구약의 구속사가 신약 십자가속에 포함되어 버리는 것이다. 십자가가 십자가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구속사를 함축해 놓은 것이다.
* 요한 계시록 11장에서 죽은 장소가 8절에 보니 다음이다.
(계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 그러니까 구약의 소돔과 애굽의 의미가 신약의 십자가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니까 십자가란 것은 단순히 십자가 사건 그것만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된고, 구약의 모든 사건을 다 집어넣어야 된다. 이것을 구조주의학자들이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문자를 분해해 봐야 유대교밖에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자' 라고 해도, 이웃을 사랑해도 지옥밖에 더 가는가?
* 구조주의 - 구조주의란 자기가 던진 것을 자기가 회수하는 놈들이다. 아무 것도 없다. 구조분석에는 답이 없는 것이다. 구조분석에서, '2x=x+x' 에서 x의 답이 무엇인가? 없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분석이다.
* 아무리 언어의 직공이 되어도 지옥에 밖에 갈 데가 없는 것이다. 유대교와 꼭 같다. 육으로 해석을 해 보았지만 육만 나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구나' 라고 책망을 하니, '고아와 과부를 돌보자' 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이고, 구조주의이다. 십자가가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 여기서 십자가 달린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계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 죽은 자의 부활이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진짜 전쟁은 끝났지만, 이 전쟁 끝남을 그 뒤의 주의 증인들을 통해 재확인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증인들에 의해서 다시 복제가 되는 것이다.
◈ 예수님의 일생이 나의 일생이 되는 것을 두고 세례(합일)라고 하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 2:20의 의미를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을 하는 것이다.
(계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주의 증인들이 십자가만 주장하니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만 있어서 되느냐, 교회도 있어야지' 라고 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을 가지고 핍박하는 것이다. 저쪽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주의 증인들은 예수님 코스를 그대로 밟아 감으로 마지막에 부활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 계시록은 한쪽은 핍박받는 모습, 한쪽은 승리한 모습, 핍박 승리, 핍박 승리, 이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죄, 의, 죄, 의...'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되다가, 마지막에 전쟁 끝! - 이것이 계시록이다.
*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이러한 요한 계시록의 전쟁을 하는가? 마귀가 한국교회가 십자가를 모르니 전쟁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전쟁을 안 하는 것이다.
* 숨어 계시는 하나님만 아니라 마귀도 십자가 예수님 통해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그 마귀의 자식은 예수님을 율법으로서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 그렇게 완벽하게 성경을 읽었고 거의 외우다 싶어하고 땅 끝까지 가서 배나 지옥자식 만들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였던, 그 유대인들이 바로 마귀의 자식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 흥부가 기가 막혀 !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는 마귀에서 났으니
◈ [ 하나님의 선택 ] - 이 놀라운 사실!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했던 이 유대인들이 마귀의 자식이라면 다른 족속들은 볼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義)에 의해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행위에 대해서 소개한 책이 바로 이근호의 '하나님의 선택' 이다. - 못 믿겠다면 말고!
* 이 책에서는 구약의 모든 유명인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그냥 구원을 받는 법이 없이 반드시 죽이고 살린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핏줄을 인정하지 않고, 끊어 버리고, 죽이고, 그러나 다시 살리고 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나의 세팅이라는 것이다. 즉, 죄와 의가 하나로 세팅이 되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이루는 것이다.
◈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가 시내산을 모두 몇 번 올라갔는가?
1. (출19: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출19:20)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 이때 십계명을 모두 다 외워서 내려와서, 20장에서 바로 선포한다.
2. (출24:1)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과 함께 여호와에게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출24:2) 너 모세만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출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출24: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니라
(출31:18)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3. (출3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깍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출34: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대로 시내산에 올라가니
(출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 처음 올라가서는 십계명 다 외우다 시피하고 내려왔다. 그런데 두 번째 올라가서는 다 외우고 있는데, 무엇을 가르치려고 돌판을 들고 내려 왔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이미 출 20장에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이미 알고 있는 말씀에 세팅이 되기 위해서 인간의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올라가서 돌판을 받아 내려오다가, 다 깨어진다. 그런데 깨진 그 돌판이 모세언약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물으시는 것이다.
◈ 이 거룩한 말씀을 누가 깨트렸는가?
* "누가 이 돌판을 깨버렸는가?",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예!" 그러면 여기에 거룩한 피가 묻히면서 거룩한 피와 법궤 상자에 인간의 죄의 증거물로 깨진 돌판이 담기면서 증거궤가 되는 것이다. 즉, 피와 인간의 죄, 이것이 한 세트가 된다는 것이다.
* 십자가를 믿었으니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끝까지 이 세트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임을 끝까지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항상 죄 앞에 있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 의를 알고, 은혜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래야 세트가 되는 것이다.
* 모세언약의 특징 -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죄를 폭파시킴으로 하늘나라에 가는 길은 갓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기껏해야 성소의 동쪽 문밖에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오직 제사장만 간다. 예수님을 타넘고 가는 법은 없다.
* 오늘날 제사장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하나님 만나는 것은 예수님의 독대인 것이다. 인간이 이제 예수님 믿었으니 예수님은 이제 제외하고 직접 하나님께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모세언약이 깨어지는 것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은 시시하게 여기고 하나님과 맞상대를 하려고 한다. 바빙크. 카이퍼, 스킬더 등, 조직신학자들은 하나님부터 시작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 바빙크에 있어서 하나의 예수는 부록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잘 믿는데 잘 못나가니까, 하나님을 하나의 다리로 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리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영리' 에 나오는 그림이 바로 바빙크의 신학인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맞상대 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가 없고,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을 받지 않는 것이다. 오직 예수의 몸만 받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무릎 끊고 손들고 있어야 한다. 오직 아들만 독대를 하는 것이다. 보좌가 두 개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의 보좌 앞에 영광을 돌린다.
* '무엇을 타넘고 간다' 라는 사고방식이 왜 있는고 하면, 바로 의와 죄의 대비가 아니고 인간과 하나님의 대비로 보니까, 이런 버르장머리가 없는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을 같은 인간으로, 같은 수준의 큰 형님으로 보는 것이다.
◈ 양자란 아들이 아니란 말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양자란 아들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은 양자를 아들로 안 본다. 아들이 아닌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서 구원했기에 다만 법적으로 양자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양자는 계속 양자로 남아야 한다. 다만 종은 아니라는 말이다. 더 이상 예수가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안에서 양자인 것이다. 계속 예수 안에서 의(義)인 것이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기독교를 모르고서 어찌 목회를 한다고 하는가? 사영리의 그림 가운데 십자가를 타고 올라가는 그림이 있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이 항상 문제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타고 가는, 건너가는 다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십자가를 모세의 율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니까, 그들은 보조수단으로 여러가지 전승들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전체를 숨겨진 마귀의 본색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란 말이다. 기껏해야 너희들은 예수인 나를 타고 넘어서, 이용해서 하늘나라 갈려고 하니, 너희의 본색은 마귀란 말이다. 이러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다.
◈ 믿음이란, 만약 교회에서 나왔다면 교회를 지향하고,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면 예수님만을 지향한다.
* 믿음의 근원이 어디냐를 따라서 그 열매가 나온다. 나에게 출발했다면 나를 위한 믿음이요, 주님에게서 받았다면 주님을 위한 믿음의 열매가 나온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일단 되었고, 서서히 성화나 해볼까" 하는 것은 진짜 예수님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안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이 단순히 이 땅에서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그냥 하늘로 올라갔다면 이런 이야기가 용납이 되겠는데,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나 성전주의자들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이 상처를 받은 영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교인들은 처음에는 주님만을 이야기하다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주님이 그만 수단으로 변화되어 특별한 배려를 기대하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기반을 또다시 기대하는 것이다.
◈ 그림1. 십자가 다리를 타넘고 - 엉터리 그림
그림2. 주님의 선택, 주의 이름, 저쪽에서 뻗쳐오는 손(주의 이름) - [ 그림 이야기 ] 참고
* 주님의 선택이란 다리가 아니고, 구약적 용어로 주의 이름이다. 신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것은, 주의 이름이란 성령이 오기 전에는 못 부른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기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을 왜곡시킨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오직 예수만을 주장한다. '그 분이 날 구원할 것이다' 가 아니라, '그 분에 의해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이다.
◈ 주(主) 개념 - 끝까지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의 기능을 다 해 내어야 주가 되는 것이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려고 하는데, 그 당사자가 '삐쳐서 못 불렀다' 라고 하는 것은 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 해 낼 때 비로소 주가 되신다. 그런데 성령은 이것을 반드시 다 해 내시는 것이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질문 - 반틸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접촉점이 있다' 라고 주장하는데, 예를 들어,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의 경우나, 아벨의 믿음의 제사와 같은 경우인데, 과연 그러합니까?
* 답변 - 다 한 세트를 이루는 것이다. 접촉점은 없는 것이다.
(고전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 라고 하면, '아무 것도 안 하면 되겠네' 라고 하지만, 인간은 아무 것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아무 것도 안 한다는 의미도 아닌 것이다. 엑스트라라도 자기 역할 다 해낸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아야 하는 것이다. 이스마엘이 없는 이삭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하나님의 약속이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약속이 아닌 것을, 소위 인간이 스스로 약속이라고 기대하는 것을 집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있어서 스스로 만든 약속은, 즉 존재의 기반은 바로 핏줄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약속이 한 세팅이 된다. 아브라함에 있어서 존재의 기반은 핏줄인데, 그런데 이 핏줄은 약속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기에 존재의 기반인 핏줄을 끊으라고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자인 이삭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역할 극은, '존재의 기반을 부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이삭을 바쳐라' 라는 것이다. 그제에서야 아브라함은 비로소 믿음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이삭은 자기 씨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씨라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면 아벨의 경우는? 아브라함과 같은 기회도 없지를 않았는가?
* 답변 - 아벨은 아브라함과는 다르다. 아벨의 취지는, '그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에 목적이 있다. 한 쪽은 받았고, 다른 한 쪽은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래서 가인은 삐치고, 그래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이다. 드디어 창 3:15의 복수가 시작되는데, 이러한 역사 속에 복수혈전을 노아가 한다.
*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에 반드시 인간의 선택하는 속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겠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 질문 - 요한복음 14장 6절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했을 경우에 하나의 교량적 역할로 볼 수 있지 않는가?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답변 -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반드시 그 앞에 하나의 세트가 되어 있다. 교량적인 역할을 베드로가 먼저 이야기하였다. 예수님 '제가 죽어도 주님 따라 가겠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안 된다' 라고 하신다. 너는 나를 따라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순교라고 할지라도 베드로가 예수님 타고 천국 갈려고 하는 그 시도를 거부하셨던 것이다.
* 그러면 베드로에 있어서, 자신의 이 순교의지와 대치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성령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라고 하신 것이다.
◈ 베드로의 순교 의지와 성령이 새 언약에서 하나의 세트를 이룬다.
(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천국에 가는 길은 분명히 예수님인데, 그러나 그 길은 '네 사고방식대로 하는 그런 다리' 는 아니란 말이다. 즉, 인간이 타서 넘고 갈 수 있는 다리는 아니란 말이다. 성령은 타넘고 갈 수 있는 다리가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이기에 공간적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성령 안이면 끝이라는 것이다.
* 이 성령 안에서는, 믿음이 향상되고 성장하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즉, 처음부터 생명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촌이면 처음부터 삼촌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 점차 삼촌으로 만들어지는 그러한 관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 관계란 것에는 이렇게 시간적 개념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 들어가면서부터 생명이라는 것이다. 시간적인 의미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오직 시간적인 관점을 배격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미-아직' 이 아니라, '이미-이미' 인 것이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점차 성화가 된다는, 그러한 논리를 무시할 경우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들은 꼭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아이디어만을 생각한다. 너무나 자기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고난과 핍박이 생기는 것이다.
*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고 지식을 쌓아야 될 이유는, 철학, 경제학, 의학, 고고학, 사회학, 그리고 창조과학 등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십자가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모든 학문이 바로 죄의 집합체이기 때문인 것이다.
* 이러한 죄가 십자가와 한 세팅이 되어야 그 본질이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죄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정신까지 다 죄의 모습들이기에, 이런 것을 까부수기 위해서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을 다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 너무 과했나?
* 구속사도 공부를 해야 한다. 신학을 하면서도 전부 죄를 아는 신학이어야 한다.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학문도, 신학이라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십자가 다음에' 라고 하면서 그 다음의 다양성을 추구하지만, 그 어떤 다양성이라도 죄의 다양성밖에 나올 것이 없는 것이다.
* 질문 - 오스카 쿨만에 있어서 시간이란?
* 답변 - 오스카 쿨만은 이런 영원과의 관계 속에서의 시간이 아니고, 구속사를 강조하기 위해서 기존의 시간개념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미-아직' 의 수준이다. 다만 역사적으로 한 번 따져보자는 것인데, 구약용어의 개념들을 잘 모르면서 신약을 역사적으로 이해를 하려고 하니까 제대로 되지를 않는 것이다. 다 죄의 한 모습들이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 우리가 신학을 하면 할 수록,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죄를 아는 기독론, 죄를 아는 성령론, 죄를 아는 신론으로 나아가야 제대로 조직신학을 하는 것이다. - [ 복음의 회복 ] 참고
* 그런데 인간들은 죄를 인정하면서도 자꾸만 그 다음을 찾는 것이다. 자기들의 생각에는 "그 다음에 뭔가를 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아직 죄를 모르는 것이다. 그 다음의 한 세트를 놓치는 것이다. 다양성을 찾지만, 죄의 다양성밖에 없는 것이다.
◈ 존재의 기반을 끊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고, 존재의 기반에서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선택이다.
* 존재의 기반에서 출발하면, 나의 선함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반드시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다. 이것이 인간 선택의 한계이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하는 그 자체는 의(義)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의 기반을 부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 새우깡을 다 먹고 봉지를 불어서 터주는 경우는 무엇인가? 그 봉지 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네 인생에 기대를 걸지 말고 목회를 하면서, '네 인생을 터트려라' 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설교를 얼마나 잘하는 가?'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나하고 같이 죽자' 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무엇 때문에 연연하는가? 주님의 부활이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나그네가 아닌가' 하고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하는 것이 나그네의 모습이다. 우리는 현재 남의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방인이요, 객인 것이다. -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자 !
* 자아실현의 욕구 - 그런데 존재의 기반으로 목회를 하려고 하는 자들은, 목회를 잘 해서 이 곳을 정착지로 여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잘 하려고 하는 것은 주님께 영광이 아니라, 마아슬루가 말했듯이, 인간 최고의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 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 30, 40대에 신학교에 온 사람들 목회해서 성공하려고 옥한흠, 김인중 등을 따라다니면서 제자훈련을 받는다. 반틸, 바빙크 등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이다. 선교사들도 사랑 찾아 삼 만리인 것이다. 세상에 대한 애착, 존재기반, 그리고 이 땅에서의 온갖 고상한 것을 다 찾는 것이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것이다. 사업하다 실패한 것을 보상받으려는 일종의 보상심리이다. 언약은 전혀 없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의 설교를 다 듣고 난 그 교회 목사가 교인들에게, "여러분,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 정신을 딴 데 두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터트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주님이 머리인데, 왜 자기가 머리가 되려고 있는가?
*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위해서 몸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인데, "왜 내가 특정한 교회를 위해 아가동산의 교주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디 출신이라는 것이 왜 중요한가? 천당에 파벌이 있다면 천당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왜 교인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가?
* 이러한 현상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오히려 그리스도를 막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막는 자 때문에 한 세트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목회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목회를 해서 발견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늘 회개하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결국 존재의 기반을 끊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 존재의 기반을 끊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비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너는 죽어라' 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러한 선택을 오해했다. '떠나면 키워 줄 모양이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애굽에 가서도 '아내 그대를 위해 나도 살고' 라고 생각을 해서, 자기가 스스로의 약속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의 존재 기반을 위해서 아내까지 파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계속 쥐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의 이러한 모습은 아담의 재탕인 것이다.
* 우리가 어떤 집단 속에 들어가 버리면 그 조직을 위한 구성원이 되어서 충성하려고 한다. 삶의 보람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 속에서 나오면 죽음이란 것을 느낀다. 이러한 것을 '구속사' 라는 깊은 연못 속에 깊이 담겨 넣으면, '내가 죽는 것은 죄의 삯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 집에 있을 때에는 자기 자신을 남편과 자식과 비교한다고, 직장에서는 상사를 욕한다고, 교회에서는 당회장을 비판한다고 몰랐지만, 이 말씀에 비추어보니까, 구속사에 자신을 넣어 보니까, 내가 내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변화산상에서 한 이야기는 의인, 즉 예수님의 별세라는 것이다. 결국 모세, 엘리야 잘 났지만, 이들이 구약을 보면, 자기들이 살아가면서 한 것은 죄인의 역할극이라는 것이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 구약의 인물들인 것이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신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역할극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죄인 역할을, 예수님은 의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이 의인을 만나서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이 오는가?
* 구속사가 없는 설교는 자기의 존재기반을 위하여 신약, 구약 할 것 없이 성경을 마구 파헤치는 것이다. 자기의 존재 기반을 위하여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마의 하는 짓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유대교의 모습이다.
◈ 목사의 임무는 육적인 교회를 부수는, 해체시키는 것이다.
* 목사의 임무는 이러한 교회를 부수는, 해체시키는 것이다. 가정을 부수는 것이 가장의 역할이다. 돈을 벌어서 회사 부수는 것이 사장의 역할이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의 의만 드러내는 것이다.
* 이러한 구속사 속에 집어넣으면,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야곱은 한 세트로서 죄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죄의 심판이 들어 있다. 그러나 야곱은 처음에 오해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야곱은 야곱 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결국은 살려달라고 비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새 창조를 하신다. 결국 야곱의 핏줄을 잘라버리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핏줄로 시작을 하시는 것이다.
* 새 핏줄로 도약을 하는 것이다. '룻, 기생 라합... 에게서' 라는 것은 기존의 핏줄 계속 부수는 것이다. 재충전이라는 것이 없다. 고치고 수정하는, 개혁하는 정도가 아니고, 날마다 예수의 죽은 것을 짊어지고, 날마다 자신을 부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 인간에게는 자기의 존재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 재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는 그 소유가 덫이 되는 것이다. 자식을 소유하게 되면 그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소유하면 그것이 자기 죄를 보여주는 함정(늪)이 된다. 그러나 또한 무소유는 자기 자신이 덫이다. "아무 것도 소유 안 하면 되겠네!" 라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사상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다.
*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방식, 자기 실현을 하나의 시범 조교로서, 하나의 증거로서 계속 보여 주는 것이 구약의 선택된 인물들인 것이다.
◈ [ 정 리 ] ◈
* 선택이란 우리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만이 의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누구를 뽑는 것을 말한다. 역할극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 한다. 그러니까 '아간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사울이 어떤 역할을 합니까?', '이스마엘이 어떤 역할을 합니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물론 이삭과 이스마엘에서 이삭은 약속의 자식이고 이스마엘은 종의 자식의 역할극인데,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삭이 자신에게도 의가 전혀 없기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은 원래 에서를 좋아하도록 했다. 입맛도 에서의 사냥감을 좋아하게 했다.
* 결국 이 말은 이삭을 하나님이 선택해 놓고, 이삭이 배출할 수 있는 죄의 몫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약속의 자식이라고 생각하였던 이삭은, '자신이 하는 선택이 전부 의롭겠지' 라고 하다가 작살이 난다. '주여 내가 죄인이군요!' 라는 고백을 하나님은 받아 낸다.
* 그러나 오늘날 인간들이, "주여, 내가 술 끊고 답배 도 끊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착하지요!" 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이삭의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 욕도 한번 안 했습니다" 라는 이 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몰라보아서 지옥에 갔다고도 하는 것이다.
* 질문 - 혈통을 자른다고 하셨는데, 하지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하든지 해서, 실제적으로 그 혈통이 잘린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 답변 -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기존의 핏줄을 무(無)라고 본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의 핏줄로 본다는 말이다. 즉, 죽음의 핏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핏줄도 동시에 있어야 세트가 되다는 것이다. '라합에게서...' 라는 것을 굳이 집어넣어야 하는 것은, 라합 앞에서는 기존의 핏줄은 죽음의 핏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러면 죽음의 핏줄이라면 예수님이 바로 와야 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이 당장 오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까지 죄가 다 안 밝혀졌기 때문이다. 죄를 밝혀 내려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유를 창조하여 생명의 핏줄을 만들어 의와 세트가 되는 죄를 또 밝혀 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언약이라 한다. 새로운 언약을 위해서 새로운 핏줄이 또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윗언약을 위해서 룻이 있고. 이스라엘은 모세언약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때 그때마다 발생을 시키는 것이다.
* 질문 - 아브라함이 애굽을 갔을 때 하나님이 애굽 왕을 박살낸 것을 사라의 자궁을 보호하는 것(박영선 목사의 견해)으로 보는데, 그 분의 이러한 시각을 어떻게 보십니까?
* 답변 - 이것은 기존의 핏줄 수호 개념이지 구속사 개념은 아니다. 인간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는 성화개념이다. 믿을 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 분의 책도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아이디어가 내 속에 늘 남아 있을 수 있다. 그 사람 모습 속에서 진솔한 나의 부족한 죄 된 모습을 늘 발견해야 한다.
* 질문 - 우리야의 아내이지만 엄연한 다윗의 씨로 연결되지 않습니까?
* 답변 - 이렇게 생각하고 다윗의 후손을 고대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다. 마태복음 족보에서 강조점이 우리야이냐 다윗이냐 할 때에, 마태는 액센트를 우리야에게 두어 버렸다. 우리야가 다윗의 혈통을 이용해서 기존의 혈통을 공격하기 위한 새로운 혈통으로서 우리야를 등장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혈통을 타고 죽은 혈통을 타고, 생명이 죽은 혈통을 타고 어떻게 번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자른다는 말은 죽은 체로 계속 남겨 둔다는 말이다. 세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고 되어있는데, 다윗과 아브라함을 통해서 생명이 어떻게 흘러들어 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족보다. 세트를 이해해야 한다. '이놈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엉뚱한 사람을 붙여 주는 것이다.
* 연결이 되는 것처럼 보여도 단절이다. 이러한 세트를 생각하지 않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다면 좋다! 다윗의 자손이다. 자손이면 어떻게 다윗의 주가 되겠는가? 답변해 보라" 그렇게 나온 것이다. 걸림돌인 것이다.
* 여기에 대해서 그 잘난 유대인들이 답변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껏 그때까지 유대인들인 조상 대대로 간직해온 성경 해석법인 것이다. 우리야의 아내를 집어넣음으로 다윗을 공격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 '고아 과부 돌보자!' - 이것이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법이고, 구조주의의 육의 한계인 것이다.
* 여디디아(솔로몬) - 다윗이 첫 아들이 죽고 난 뒤의 밧세바의 둘째 아들인 여디디아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없는 데서 있게 된 상황이다. -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다.
* 다윗 본인은 자기의 핏줄로 이 다윗 계통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후손들인 유대인들은 이러한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솔로몬을 다윗이 밧세바와 합궁한 그 사실만 가지고 육적인 계통을 가지고 다윗 자손으로 보더란 말이다.
◈ 방사능 탐지기 - 설교는 단순히 남을 납득시키는 작업이 아니다. 오직 방사능 탐지기의 역할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을 찾는 작업이다.
* 사울과 다윗이 대결해서 다윗이 이기니까 '다윗 만세' 라고 하지만, 다윗을 선택한 것은 이제까지 감추어 졌던 인간의 죄를 폭로시키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더욱 더 죄를 밝혀 내기 위해 다윗을 왕으로 세웠는데, 인간은 그저 다윗으로 말미암아 승리했다고, '다윗 만세', '다윗 만세!' 라고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하였다. 물고기와 떡을 줄 때는 좋아했다. 그래서 왕으로 삼고자 했지만, 그러나 예수님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들 나를 따르는 것은 먹고 배부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인간들은 다윗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와도 사람들이 이 모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 유대인들이 아니라, 자기가 날마다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성도인 것이다. 내 존재의 기반을 부수는 사람이 성도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도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했는가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임을 아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소릴 하니까, '이런 소리하는 나는 옳잖아!' 하는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십자가 피만 의지하는 것이다. - onE WAY !!!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서 보낸 것은 주님 홀로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살린다는 것을 증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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