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하나님의 선택 (5) - 칼 바르트의 [ 로마서 강해 ] 본문

저서 & 기타(이근호)/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 (5) - 칼 바르트의 [ 로마서 강해 ]

정인순 2011. 1. 4. 10:30

하나님의 선택 (5) - 칼 바르트의 [ 로마서 강해 ]
                                              97,4,28 이근호 (이명호 정리)


▣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읽고 ▣

* 하나님과 인간을 대비시킬 때는 서로의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위치에서 만나지고 관계되어 진다. 심판이란 인간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다. 인간이 내 뱉는 것, 신의 존재와 신을 향한 경건성까지 죄로 인하여 왜곡되고 있다.

◈ 여기 바로 이 점이 바르트의 독특한 창안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심판주인가' 하는 점은 '로마서 강해' 에서는 안 밝히고 있다. 초반부터 바르트는 저 쪽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일소 해버리고 시작한다.  심판주로 시작한다. - 이것이 바르트의 독특한 점이다.

◈ 하나님의 주권사상 - 이전까지 모든 학자들 즉 칼빈이나 루터, 즉 루터는 사랑도 아니고 자비도 아니고, 그냥 존재성 왜냐하면 칼빈, 루터 모두 로마 카톨릭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살아 계셔서 일하신다는 존재성에서 출발하였다. 이 존재성을 극대화하면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나온다. 그러니 주권사상이라는 말은 로마 카톨릭 사상을 집약시킨 것에 불과하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이 교회에만 계신다는 것이 아니고, 전 우주에 계신다는 것이다. 전 우주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 헬라신에 히브리신이 들어와서 만남으로 히브리신이 헬라신을 극복했다고 이야기해도 된다. 모든 그 당시 신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었다. 몸체부분과 깃털부분이었다. 헬라신은 깃털이었다. 몸체인 히브리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 주권사상은 성경적 용어가 아니라, 헬라철학의 소산물이다.

* 예를 들어, 교회에서 주차장 건립문제가 나왔을 때, 어떤 집사가 하나님께 물어 보았습니까 했을 경우 목사가 하는 말이, '몸통은 살아 있는데 깃털부분은 우리 담당이다.' - 이런 답변은 바로 로마카톨릭이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능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담당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몫이 아니란 것이다.  주님은 우리 깃털이 하는 것을 뒤에서 도와주는 분이라는 것이다.

* 여기 바로 이 점에 대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에베소서 강해' 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세상에 기도회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일방적인 자기들의 계획을 다 잡아 놓고 기도회를 하다니, 무슨 그런 하나님이 다 있느냐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들이 신학교 필독서이지만, 책만 사놓고 읽어보지는 않고, 읽어도 적용은 없는 것이다.

◈ 칼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앞뒤의 신학사상 다 내다보고 써놓은 책이다.

* 한마디 한마디가 어렵다. 몸통과 깃털 - 이런 사고방식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바르트 당시의 교회나 오늘날 교회나 마찬가지다. 해보고 되면 하나님의 뜻이고, 안 되면 아니라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시행착오를 통해 나아간다. - 칼 포프는 이것을 사회공학에 적용 시켰다.

◈ 이성의 기능  -  ① 이성은 대체로 옳다.
                   ② 이성은 자기 잘못을 안다.
                   ③ 그 잘못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이것이 인간의 이성이다. 그래서 신학이든 무엇이든 모든 인간은 이 이성의 바탕에서 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이성을 하나님이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 신은 존재한다 ! - 이데아 세계, 흔들림이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은 변화 무쌍하다. 이 변화 무쌍한 일은 인간이 담당하라는 것이다. 담당은 인간의 이성이다.

◈ 그래서 믿음+이성(행함)이 되는 것이다.

* 우리가 이러한 캐톨릭 사상을 얼마나 공격하였던가, 그러나 실생활은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모습이 바로 카톨릭이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목회 도움이 안 된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도움이 안 되는 이유가, 왜 이것을 배워야 하며, 그 문제가 자기 문제인지를 모르고 있다.

* 종교개혁을 하기는 하였지만, 종교개혁의 당사자들도 자기들의 이성으로 해결하였다는 것이 결국 드러난다. 오늘날 개혁을 부르짖는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개혁하고자 하는 것도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칼 바르트를 말씀의 신학자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이 땅의 교회 개혁은 포기했다는 것이다.

* 교회개혁이 왜 필요한가? 말씀이 있는데 말이다. 얼마나 똑똑한가! 말씀막?돌아가면 되지, 왜 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나오는가! 교회 개혁을 부르짖으니, 그래서 여기에 또 인간의 이성이 가미되는 것이다. 교회 개혁의 방법을 찾고, 또 시행착오를 들고 나온다.

* 그래서 바르트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말씀의 신학인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오는 바르게살기운동, 기독교윤리운동,  손봉호 등등, 모든 인간들이 과거 다 실패한 것을 또 다시 들고 나온다.

◈ 말씀으로 돌아가자! - 바르트가 목회가 해 보니, 예수의 심정으로 목회를 해 보니, 신학교의 책상신학으로 목회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과 루터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교회를 해보자는 것이다.

* 칼빈의 주권사상 - 칼빈이 말한 주권사상도 카톨릭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주권사상은, 하나님과 인간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한계를 지어 놓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고 우리는 보잘 것 없기에, 한계 상황으로 지어 놓는 것이다.

* 그러나 로마서 5장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지간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주권사상은 한계 상황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위대하고, 우리는 너무 초라하기에, 거리가 먼 개념이라는 것이다. 여기 주권사상에 빠진 사람들이 김홍전, 프란시스 쉐퍼, 바빙크 등이다. 이들은 신자라기보다는, 유신론적 철학자들이다.

* 그러나 성경은 심판주와 죄인으로 본다. 그래서 이러한 '무엇을 할까요' 라는 주권적 만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온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이지만, 만약에 심판주로 온다면, 우리는 우리가 왜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 다음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한다. - 우리는 왜 죽을 수밖에 없습니까?

* 예수님을 모범적인 예수로 생각하면, 우리의 모델이 되고 만다. 깨끗한 분으로 오시면, 우리는 박수를 칠 준비를 하지만, 심판주로, 몽둥이 들고, 수류탄 들고 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 "수구리!" - 36계!!

◈ 이 차이를 알아야 한다. 바르트 이전까지의 주(主) 라는 개념은, 거룩하시고 우리 보다 윤리가 뛰어 나고 도덕적이고 깨끗한 하나님이신데, 바르트가 말하는 심판주라는 이 뜻은, 몽둥이에 맞아 죽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 수녀를 만나면 반갑지만 깡패를 만나면 도망을 가는 것이 상책이다. 그 차이점이다. 어떤 하나님을 소개해야 하는가? 신부같이 수녀같이 고상한 하나님을 소개하는가? 아니면 깡패 같은 몽둥이 들고 오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는가?

* 칼빈과 바르트의 차이점이 바로 이 차이점이다. 밥 퍼주고, 장학금 기탁하는, 그런 예수님을 소개하면 누구나 좋아한다. 무언가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 거룩한 신이 되어 버리면, '나도 본받아서 거룩해질 수 있구나' 하는 건방진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을 대비시킬 때는 서로의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위치에서 만나지고 관계되어 진다.

◈ 심판이란 인간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다. -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 심판주이기에 일체의 가능성을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몽둥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몽둥이 들고 오시는 하나님 앞에, 내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바르트는 이것을 인간에 대한 '전적 부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즉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잘 할께요', '내가 최선을 다 할께요',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이웃을 사랑할께요', 이 모든 것이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바르트는 인간에 대한 전적 부정을 로마서의 중심테마로 잡고 강해를 한다.

* 로마서 강해는 주석은 아니다. 주석은 케제만의 주석(국제 주석)이 좋다. 칼바르트의 로마서는 전체적으로 분석한 강해이다.

◈ 그러면 바르트가 본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 죽어가는 몸

◈ 하나님이 심판주로 오셨다면 인간의 의미는 무엇이라는 말인가? 바르트는 이 점에 대해 인간 속에 무엇이 들어온다고 보았는가? -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계시는 죽어가고 있는 몸이라고 본 것이다.

* 기막힌 발견이다. 시체를 모아 놓은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가 보여 줄 수 있는 유일한 계시는, '지금 현재 죽어 가고 있소!' 이다. 이러한 몸을 보여 주는 것이 유일한 계시라는 것이다. 내가 죽어가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할 때는, 기존의 모든 신학적인 용어나 개념들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 즉, 사람이 무슨 가능성이 있어야, 믿음이 어떻고, 기도가 어떻고..., 이런 것이 소용이 있을 터인데..., 죽어 가는 주제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 바로 인간이 죽어 가고 있는 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롬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율법을 수용한 이스라엘은 결국 말로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르트는 아담부터 모세이전까지는 율법이 없었다. 그런데 모세이후부터는 율법이 개입되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기에 자기들은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다.

◈ 그런데 바르트는 이스라엘의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즉 남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 기능적 이스라엘
  
* 그래야 로마서 9장-11장이 해석이 된다. 왜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안 되는가? 사도바울이, 내 동족이 지옥가면 안 되는가, 잠시 동안 복음이 이방인에게 갔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이기에, 민족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소리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본래 하여야 할 사명이 따로 있는 것이다. 사명을 마치고 지옥에 가던 말던 그것은 자기 소관이 아닌 것이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듣게 되는 것이 사람이 전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계획된 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롬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는 이 말은, 선교사가 온 땅에 전파하였다는 그 말이 아니라, 지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 그것이 9장부터 이스라엘이 나오고 있다. 지금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스라엘에 이미 복음이 온 땅에 펴졌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도바울아,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느뇨' 이렇게 질문을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의 소식을 들었느뇨' 하니까,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롬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 이 말씀이 신명기 32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신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 하리로다

* 이 신명기 32장을 가지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유대인이다. 그러면 이미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셈이 된다. 듣고 있는 가운데 있는 것이다.

(롬10: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사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 이미 그들에게 구약 성경이 있다.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 책이다. 로마서에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졌다' 라는 말은, 유대인 내에서 전세계에 확산된 것을 말한다.

*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졌으면, 유대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 '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찾는가, 아, 이것은 바로 신명기, 시편, 이사야 등, 성경의 말씀에 나오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회개할 차례구나!' - 이렇게 되어야 정상이지만 아니었다.

* 왜냐하면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 주관이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롬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이 말만 들으면 선교사 보내는 것이 정당한 것 같지만, 마치 주의 뜻인 줄 여기지만 그 뒤의 말씀을 보면 아니다.

(롬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전도와 선교의 주체는 보내시는 분이 따로 존재한다. 보내시는 분이 누구인가? 누가 보내었는가? 그 보내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누구한테 돈을 달라고 하는 지를 보면 안다.

* 바르트는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으로 계속 접근하여 나간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여기에 계속 접근해 나가는데,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도 전부 여기에 포함을 시킨다.

◈ 이스라엘은 무엇을 보여 주는 도구인가? 죽어 가는 몸이란 것을 보여 주는 도구이다.

* 죽어 가는 몸인데,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달리 율법을 받았다. 그러면 율법을 받은 가치를 해야 하는데, 그 가치를 하는 것이 '우리는 죽을 몸이다' 라는 '증거자'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못하니까 이방인에게 넘어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넘어 간 것도 임시 방편이 아니고, 사실은 구약 신명기에서부터 예언 된 것이라는 것이다.

◈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기에, 바르트는 교회의 신학자가 아니고, 말씀의 신학자인 것이다.

* 왜 바르트는 교회의 신학자가 아니라고 하는고 하니, 교회를 생각하면, 곧 인간의 이성을 끌어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앞서 언급한 몸체와 깃털의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이성에서의 개혁은 백날 개혁해도,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이기에, 이성의 죄만 남는 것이다. 말씀과는 일체의 상관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은 언제까지나 말씀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인간의 이성과 교회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이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유대교에 들어와서 일을 하는 이것 자체도 말씀의 기록 된 대로,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11장 36절을 겨냥해서, 로마서 2장, 3장부터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누구에게 시비를 거는가? - 유대인들에게 시비를 건다.

* 어떻게 남을 판단하느냐 너희들의 판단이 너희가 판단 받지 못하겠느냐? - 유대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그 한 문장 한 문장만 보지 말고, 로마서 전체를 보면, 창세기부터 모세이전까지의 인간의 죽음의 이유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 모세 이후에 율법이 가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 따라서 이 사실을 제대로 아는 유대인이라면 무엇을 해야 되는가?

* 율법을 우리보고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준 것이라든지,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이니까 율법을 준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 아니라, -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가, 왜 하나님께서 심판주로 오셔야 되는가, 바로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심판계시가 우리 속에 담기기 위해서 주셨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애초부터 망할 수밖에 없구나! -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이란 인간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기에 말이다.

* 불트만은, 로마서 강해에서, 로마서 1장을,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구절 등을 보아서, 이것을 인간의 보편적 속성(인간의 전적부패, 하나님께 비영광 등)으로 보고 2장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로 전개해 가는 것은, 유대인에게 율법을 준 것은 유대인에게 구원을 줄려고 하였기 때문이라는 기존 유대교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 摸F?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이다. 로마서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으로 조명을 하지 않고, 교회는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론적인 접근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인데, 구체적으로 왜 죄인인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유대인을 택했다는 것이다. - 차이점을 명확히!!

◈ 즉, 바르트는 로마서의 주제를 이신득의(以信得義)로 본 것이 아니다. - 편집자 생각

* 이 차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까 '다른 놈들은 구원을 못 받는데, 교회만은 구원을 받는다' 라는 사고방식이 틀려먹었다는 것이다.

* 미국에 가신 주 목사님의 '바로의 강팍에 대해서' 라는 논문을 평하면서, '애굽은 망할 놈들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접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했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 '애굽 놈들, 이스라엘 놈들, 모두 다 망할 것인데,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여기서 애굽이 망해야 되는 문제는, 애굽나라에서 알려 준 것이 아니고, 애굽에 있다가 나왔던 히브리인들에게, '애굽나라가 왜 망해야 되는가' 하는, 그 이유를 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뽑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 이스라엘이 왜 광야에서 망해야 되는가를 알 수 있다. 즉, 기능적 이스라엘이다.
  
◈ 존재적, 구원론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기능적 이스라엘이다. 이것이 바로 육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 바르트가 맞는 이유가, 우리가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언어적, 기호적 개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직 남는 것은 우리의 죽어 가는 몸밖에 없다.

* 그래서 "죽어 가는 몸 자체가 계시다" 라고 말하면 될 것을 가지고, 죽어 가는 몸을 숨기고, 마치 의미 있는 몸인 것처럼, 이 몸을 가지고 - 어떤 일 할까, 어떤 일을 해서는 안될까, 명령법을 지킬까, 이것은 하지 말라고 했으니 하지 말까? - 이렇게 되어 버리면, 가장 중요한 죽어 가는 그 몸은 빼 돌린 셈이 되니, 이것은 반칙인 것이다. 퇴장감이다.

* 만약에 그렇다면, 교회란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민중을 속이는 아편이다. 대충 대충 덮어두는 것이다.
  
◈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 입에서는 '평안하다', '평안하다' 이런 소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망한다', '망한다', '죽자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 '다윗의 찬송도 듣기 싫어', '천 천의 수양도 소용이 없어' - 하나님과 동행해! - 이것이 선지서의 메세지이다.

* 이로서 모든 인간의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의를 지니지 못한 채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이 심판의 날을 맞이하는데 도와주는 것이 율법이다. 심판을 막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오도록 말이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 이 심판 날이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통해서 미리 앞당겨 왔다는 것은, 심판의 날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앞당겨 보여 준 것은, 그 곳에 율법뿐만 아니라, 구원도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선취(先取)라고 한다. 심판의 날이 선취되면, 여기에 동시에 구원의 날도 성취된다.

* 그러니까, 마지막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지금 심판 받고, 지금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야 로마서 6장, 7장이 해석이 된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 죽임을 당했다 ! - 지금 교인들은, '자기는 이미 살아 있는데, 내가 왜 죽었느냐' 라고 반문한다. 이것은 율법을 빼 놓고 생각을 하니,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율법을 빼놓고 이야기하면 아직 안 죽은 것이 된다. 지금 교인들보고, '당신 죽었어요' 하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로마서 7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이방인들도 일단 구약을 거쳐서 신약으로 와야 한다.  

* 구약을 거쳐와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율법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 펄펄 살아 있으니 성경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이해해야, 영 안에서 살았다는 말이 이해된다.

*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십자가를 그냥 통과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가는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라지게 하는 것이지 통과하는 것이 아니다.

* "십자가 믿고 살았으니, 이제부터 슬슬 전도, 구제, 헌금, 밥 퍼주는 사랑이나 해 볼까" - 이런 식이다. 십자가를 그냥 통과하는 사람들이다. 십자가가 사라지는 것임을 모른다.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 -  이 말은, 로마서 6장의 세례를 이해하지 못하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다.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보고는 곧장 떠난다. 십자가를 통과하고서, 나도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다. 알면 십자가의 열매가 나타나야 하는데, 십자가를 안다는 놈이 희한하게 이성의 열매만 고집한다.
  
* 죽었다, 안 죽었다 ! - 이것을 무엇으로 보느냐, 로마서 4장에서 이것을 믿음으로 본 것이다. 왜? 사라의 태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통과가 아니고 사라짐이다. 사라의 사라짐이고, 자기의 사라짐이다. 그래서 할례를 행한 것이다. 그 다음부터 아브라함은 자기의 믿음을 안 믿기로 한 것이다. 자기의 믿음을 안 믿기로 작정한 이 상태를 믿음이라 한다.
  
◈ 믿음이 자기 믿음을 안 믿기로 한 것이라면, 믿음의 원천은 딴 데 있다. 그 원천이 바로 약속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은 것이다. 약속이란 자기와 대조되는, 또 다른 어떤 주체를 말한다.

* 네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긴다 ! - 내 믿음이 산을 옮기는 것이 아니고, 다른 주체가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것을 믿음이라 하는 것이다. 내 믿음이 산을 옮기는 것이 아니고, 일은 딴 곳에서 벌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마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막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 그러니까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무슨 믿음인가? - 내가 죽어도 내가 다시 산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이미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만약 안 살려 주면 어떻게 되는가? 사기가 된다.

* 그래서 인간들에게 이런 믿음 없는 것을 알기에, 예수님 자신이 직접 살아났고, 그것도 모자라 부활 이전에 나사로를 다시 끄집어내어 살려 준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믿습니다' 라고 해 놓고 울었다. 이것은 믿는다고 해 놓고 안 믿은 것이다. 마리아가 '믿습니다' 라고 한 것은 자기 생각이고, 자기 계획이다. 자기 생각은 믿음이 아니다. 불신앙이다.

* 모든 말씀이 선교가 되고, 전도가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이런 식, 저런 식으로 하면 안되겠는가' 하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운다. 다 믿음 없는 소치다. 믿음은 모든 일의 주체는,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인데, 전도의 주체를 자기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교의 주체는 '주님이 가지고 있다'는 이 말을 이해 못하고, 그래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되지 않는가를 생각한다. 매일 이렇게 생각한다.

◈ 이상의 생각에서, "나는 조용하게 이야기했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교회 종소리를 댕긴 것처럼 사람들은 반응을 한다" 는 바르트의 발언은, 이런 점에서 이해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무시!! -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교회 개혁을 원했던 모든 인간들의 시도를 바르트는 뒤에서 뒤통수를 날린 셈이 되는 것이다. 교회 부흥을 아예 무시했다. 교회의 신학이 아니고 말씀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바르트의 뜻이 자기 자신에게 이해가 되지를 않으니까, 자꾸 처음에는 바르트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주장을 한다. 왜곡시킨다.

* 하도 유명은 하고 반박은 안되고 하니, 자기들이 바르트의 뜻을 왜곡하여, 그래도 바르트도 인간 편에서 이야기를 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만큼 믿음이 안 받쳐 주니까, 성경의 뜻을 찾으려고 하지를 않고, 칼빈과 다르다는 등의 이유를 대는 것이다(반틸). 칼빈이 기준도 아닌데, 성경과 다르다고 하지를 않고 칼빈과 다르다고 한다. 모르면 돌을 던지면 되는데, 자꾸 맞먹으려고 한다. 한 수 배우려고 하지 않고 말이다. 이상한 놈들이다.

◈ '육으로 말미암아 죽었다' 는 이 사상이 이해되지 않으면, '성령 안에서 내가 지금 산 자로 여길지어다' 라는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 산 자로 여기는 자의 특징 - 어떤 것이 일체 나와서는 안 되느냐 하면, 옛날 아브라함이 決보뗄ㅐ?나았던, 그 때의 사고방식이 일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때의 모습은 일체 사라진 상태의 모습이 나와야, 이것이 바로 의의 종이다.

(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의의 종을 자꾸 칼빈으로, 부흥사로 표준으로 삼지 말고, 아브라함을 표준으로 삼으라! 아브라함을 표준으로 삼으면 의의 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 생활을 하게 된 이후에 아브라함이 의의 종이라는, 의의 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이삭을 바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삭은 곧 자아의 모습이다.
  
◈ 결론적으로 영적인 생활의 특징이 무엇인가?  

◈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는 것", 이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죽을 몸입니다" 라는 이것밖에 없다. 반면에 "내가 기도하니 되더라" 라는 것은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이 이삭을 바치는, 즉 날마다 자기를 죽음에 던져 넣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바로 이 모습이 영으로 다시 살림을 받은 유일한 모습이다. 이것이 믿음 생활이다.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을 던져 넣는 이것이다.

◈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이다 !

* 율법의 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있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그 심판 날을 현재화시키는 것이다. 옛날에는 율법으로 우리를 정죄하였고 우리로 입을 다물게 하였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면, 신약시대에는 무엇을 가지고 이 기능을 해야 하는가? 십자가로 해야 한다.

◈ 쉽게 설명하자면, '지금 아브라함이 믿는다, 안 믿는다' 를 무엇으로 기준으로 하는가?

* 두 가지이다.  ① 첫 번째 : 나는 죽은 몸입니다. 내 아내의 태도 닫혔습니다.
               ② 두 번째 : 약속은 내가 바친 이삭입니다.

◈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명령법과 모든 지시법의 두 가지의 의미는?
        
① 첫 번째 : 이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없다? 절대로 없다.    우리 몸은 죽은 몸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는 이것을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몸에는 없다.
  
② 두 번째 : 우리는 못하는 데, 우리 속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이것이 신약의 명령법    을 주신 목적이다.

* 그래서 성화란 말을 굳이 사용하려면, 오직 성령에게만 적용이 된다. 성령 성화, 즉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로운 형태의 사람을 소개한다. 즉 믿는 자의 표본이라는 아브라함이다.

◈ 아브라함은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가능성마저 넘어 섰다 !!

* 너무나도 중요한 말이다. 바르트는 이것을 로마서 강해 속에서, "하나님은 계약신학 속에도 갇히지 않는다" 라고 했다.
  
* 객관적인 것 - 성경의 문자이다. 쉽게 말해서 성경의 구조 분석이다. 십자가를 구조 분석으로 붙잡아 낼 수가 없다. 어떤 신학적인 틀이 십자가를 꺼집어 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모든 것을 계속 부정해 나가기 때문이다.

◈ 바르트의 성경관 - 성경은 오직 십자가만 소개한다. 십자가만 소개하기 때문에 문자가 여기에 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가 아니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라고 하였다. 성령을 통해서만 말씀이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성령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주실 때 성경이 말씀이 된다고 본다.

◈ 이근호의 바르트의 성경관 비판

* 그러나 여기에 동의를 할 수 없는 것은, 계시라는 용어 자체가 모호하다. 성경이면 성경이지, 성경을 제외하고, 또 계시라는 개념을 끄집어내었다는 자체가, 이미 둘 사이는 그 자체가 갈라지는 것이다(비튜겐 슈타인의 언어철학). 이러한 성경에 대한 태도를 용납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근본주의에서는 돌아서야 한다.

* 보수주의 - 보수주의, 자유주의, 둘 다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먼저 보수주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다!" 라고, 이렇게 되면 성경은 무엇이고, 말씀은 또 무엇인가? 이미 분리시켜놓고 접근하려고 하니, 말이 아예 되지를 않는다.

* 자유주의 - 자유주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箚?하는데, 이들 역시 개념을 분리해놓고,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둘 다 지금 관심을 예수님께 두려고 하지를 않고, 관심을 성경에 두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채우려고 한다.

* 예수님을 통해서 영광을 받는다고 하면, 예수님께만 관심을 두면 되는데 엉뚱한데 관심을 두고 있다. 예를 들면, 농구 선수가 열심히 게임만 하면 되는데, 음료수가 먹고 싶어서 공을 안 쳐다보는 것이다.

* 아브라함의 믿음 - 믿음의 조상을 아브라함 했다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야지, 칼빈을 왜들고 나오고, 주기철을 왜 들고 나오는가!

◈ 행함과 무관하게 새로운 가능성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 로마서 3장에서,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면서,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라고 했을 경우에, 그 행함이란 것이, 어떤 행함을 부정하는 말인가 하면,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이 남을 판단할  때의 판단 기준이 바로 믿음에 기준 한 것이 아니라, 바로 행함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이 놈들아, 너희들의 그 행함도 같이 판단을 받지 않는 줄 아느냐' 할 때, 그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 로마서를 볼 때, 원래 이방인까지 확산하지 말고, 유대인들에게 제한하여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믿음은 인간 긍정이 아니라, 약속 안에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다. 그 약속은 예수님이시다. 그 분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인간과 관계하신다.

* 예수님의 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는, 하나님의 선택을 떠오르게 한다. 로마서 9장에 가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그 자유로움이 인간들로부터 육적인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롬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이미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시기에 육적인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즉, 죄수 주제에 판사의 옷을 간섭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토기장이와 토기의 비유 - 존재론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존재론 적인 것이 아니고, 구원론적으로 보자는 말이다. 토기와 토기장이와의 관계를 칼빈은 존재론적으로 보았지만, 바르트는 구원론적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주권사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헬라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 칼빈과 바르트 - 사실 시대적으로 칼빈이 훨씬 앞선 것을 생각해 보면, 칼빈이 바르트보다 못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바르트는 이미 칼빈의 그러한 것을 다 답습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주장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십자가라고 해 놓고는 그 수습을 못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자유로운 상태로 붕 띄워 버렸다. 주님의 자유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사랑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님도 자유롭고, 그 자유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도 자유롭고, 둘 다 행함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셈이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유대인들이 화가 났다. 자유롭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데, 자기들에게는 왜 그러한 율법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신명기, 이사야 등,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로 돌아간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죽을 몸만 남는다.

◈ 십자가 죽음은, 인간세계의 모든 죽음을 지상에서 표현될 수 있는 하늘나라의 유일한 비유이다.

* 예수님께서 홀로 죽은 자 가운데서 깨어나심으로 그 분이 이제 행할 수 있는 심판은 의의 심판이다. 인간의 육은 철저하게 죄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영인데, 이는 영 안에서 성도는 이미 사형을 집행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인간은 자기 행위의 어떤 가능성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영 안에서 사는 생활이다. 오직 기다림뿐이다.

◈ 자기 십자가를 지고 - 사형틀을 지고 - 사형틀은 우리의 운명의 고정틀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이다. 신약의 모든 말씀은 그 밑바닥에 십자가가 들어 있기 때문에, 신약의 어떤 명령도 십자가를 보여 주는 쪽으로 최종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다. - 이것을 영이라 한다.

* 영이란, 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죽임이다. 감사하게도 우리를 죽이시는 말씀의 성취력이다.

* 아브라함의 경우는 이삭을 죽임, 이 이삭 죽임이 아브라함 안에 들어 있을 때, 이 관계를 믿음의 관계라 한다. 신학적으로 영적 관계라 한다. 이삭을 죽인 사실이 아브라함에게 영원히 남아 있을 때, 그것이 믿음의 관계이고 영적 관계이다.

* 사도바울 - 그러니 영적 생활의 특징은 십자가만 증거한다. 나는 다른 것은 알지 않는다. 오직 십자가 외에는 모른다. '너는 죽을 몸이다'라는 것을, 이것이 도를 전하는 전도다.

◈ 이렇게 죽음이니까, 무엇이 남아 있는가? 오직 기다림이다. - 소망

* 로마서 8장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은, 그 소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소망 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철저한 배척이 들어 있다. 이 소망은 보이는 것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들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재, 즉 보이는 것은 다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을 전제한 소망이다. 이것이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다. 그래서 탄식이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그래서 성령의 기도가 하나밖에 없다. 탄식이다. 그러면 일반 목회자들은, '뭐 이런 것이 다 있노!' 라고 하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기도이다. 우리는 '주여, 목회 성공하게 해 주이소!' 라는 기도에 대해서,  '뭐 이런 것이 다 있노. 네가 교회이고 성전인데 뭘 더 원하느뇨!' 라고 해야 한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영은 성도를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예수님의 죽음이다. 그 모습을 따라 살게 하신다.

◈ 바르트 - 하나님의 형상을 죽음으로 본다.

(롬 8:29) 하ご纛?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형상을 본받게 하려 함이라 ! - 형상을 본 받는 것은, '죽자!' 라는 것이다. 모두 십자가 중심이다.  모든 이 지상에서의 성령의 기도하는 것은 소망을 소망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죽는 것밖에 없다. 안 죽으면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이 소망이 되니까,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고 했으니까, 이것을 위해서 성령이 기도하신다.

◈ 성령의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죽게 만든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안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게 하는 것이 성령의 기도이다.

◈ 형상  ① 이근호 - 주님의 영화로운 몸
         ② 바르트 - 예수님의 죽음

◈ 이근호의 칼 바르트 비판  

* 그러나 영원하고 영화로운 주님의 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고전 15장에 아담에 속한 형상이 있는 것처럼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다고 하였으니까, 하늘에 속한 형상이 예수님의 형상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기도하는 것도 하늘의 영광스런 몸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지, 지상에서 끝나는 이런 죽을 몸을 최종적으로 했겠느냐, 하는 것이다.

* 만약 죽음을 형상으로 본다면 십자가까지만 기도하는 셈이 되고, 나머지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영원한 몸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바르트는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 형상으로 보고 있다.  바르트의 주장대로 하면, 로마서 8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이 학수고대하는 것이 사라지게 되어버리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롬8:19) 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 그런데 바르트가 로마서 9장부터는 좀 이상하게 빠져 버린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한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지 않고 교회로 보아 버린다. 여기서부터 논리적인 문제가 발생된다.
  
* 성경은 분명히 이스라엘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바르트의 이러한 태도는, 아마 그 당시 교회를 공박하기 위한 것으로 본 것 같다. 교회를 둘로 보는데, 하나를 '에서의 교회', 또 하나를 '야곱의 교회'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교회를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람은 말이 안되면 논리를 맞추기 위해 개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경향이 바빙크가 많다.
  
◈ 바르트가 주장하는 두 가지 교회는 무엇인가?

* 야곱적인 교회는, 진노 받아야 마땅한 에서적인 교회 내에서 사랑에 의해 출현된다. 에서교회에서 나온 것이 야곱교회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 에서가 먼저 태어났고, 야곱이 나중에 태어났다고 본다. 비록 쌍둥이이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로 나온 것은 뭔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난 놈을 부정한 것은, 야곱의 사랑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서 어두운 배경역할을 하는 것이 '에서' 라고 하는 것이다.

* 즉, 그 당시 독일 교회를 생각해보자. 말씀을 따라가는 교회를 야곱교회라 하고, 그 당시 릿츨계통의 교회를 에서 교회라면, - 너희들 교회가 아니야 - 그러면 따로 목회하지- 아니야, 에서 교회 안에 야곱교회가 있는 거야 - 어떤 식으로, 고난받는 식으로 진행되어진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어야, 예수님이 이방인 마을로 가지 않고 잃어버린 양에게 왔는데, 오히려 잃어버린 양한테 버림을 받고, 안 믿어야 될 이방인들은 믿고, 본 자손들은 거부하고, 이런식으로, 야곱따로, 에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쌍둥이로 태어난 것은 헤깔리지만, 하나님이 정리하신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교회라고 방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미움 속에서 사랑을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에서 나오는 이중 선택론이다.
  
◈ 이중 선택론 -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했다. 예수님의 선택 안에서 말이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후5:21).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선택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따로 선택하는 것이다. 어떻게? 야곱과 에서를 말이다. 그러니까 선택을 두 번 한 것이 된다.  

* 바르트가 이런 이중 선택론을 펼치게 된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라고 하는 정통주의 신학의 틀을 가지고, 그 다음 죄와 의를 또 생각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두 가지를 복합시키려고 하니까,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  칼 바르트 평가  ▣

* 로마서 9장에서 이스라엘은 교회라고 바꾸어서 해석하는 것이 상당히 무리이다(아마 그 당시 교회의 변질성을 공박하기 위한 시도인 것 같다). 거기에다 교회를, 에서의 교회와 야곱의 교회로 나누는 것도 부자연스럽고, 선택론의 논리 전개의 한계를 보여 준 것이다. 에서의 운명과 교회의 운명을 같이 나란히 연결시킬 수가 있을까?

◈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는 것은, 구약에서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그 어떤 패역과 강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즉, '참 이스라엘이 누구이며 어떤 것이냐' 라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하구나' 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논리였던 것이다.
  
* 에서교회, 야곱교회로 나누는 것 자체가 상당히 무리다. 에서는 이스라엘 속에도 포함이 되지를 않고 있다. 바르트는 참된 교회, 나쁜 교회를 언급하려고 하는데, 참된 교회, 나쁜 교회를 구분하려고 시도한 자체가 바르트의 실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니 좋은 교회이고, 이렇게 하면 나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과 같다.

◈ 로마서가 여기 9장에서, 에서와 야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에서를 미워했다! 왜 불만인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롬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이근호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한 것이 되고, 바르트는 참된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한 단계 거쳐서 또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논리를 펴면 안되고, 위의 본문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엡1:4).

* 칼빈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예수 안에서, 즉 언약 안에서 선택이다. 언약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한 것이다.

◈ 바르트는 참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선택했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참된 교회를 만들기 위한 선택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한 선택으로 보아야 한다.

* 바르트가 언약에 기초를 하지 않는 신학을 전개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인간의 구원론에 편중되어 논리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여러 신학자들은, '인간이 구원되는 데는 그만한 긍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인 반면에, 저자는 반대로 주장을 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전적 부정이 하나님에게 새로운 긍정을 제공할 가능성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부정이 긍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본인(이근호)이 볼 때, 또 하나의 눈속임에 불과하다. 에서에 대한 미움이나, 바로의 강팍함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주장은, 인간의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는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약속의 신실성을 말해 주는 구성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영광이 된다.

* 그러나 珦渼?말하기를, 야곱의 입장에 선 사람에게는, 에서를 버리는 것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지를 안다는 것이다. 에서는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야곱의 자리에 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으로 이어진다면, 에서의 자리에 선 사람이 자기가 지옥 간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이쪽 저쪽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한 쪽만을 이야기한다.

◈ 모든 것을 언약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두발을 모으게 되는 그 한계성을 저자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그냥 현실적인 이스라엘 국가와 그 가운데 약속에 따라 은혜를 입은 '남은자' 개념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 바르트는 야곱의 자리에 선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택의 의미를 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엉터리다. 에서의 자리에 선 사람이, '나는 마땅히 멸망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몽땅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입을 막고 있는 것이다. 땅 아래 있는 자나, 하늘에 있는 자가 다 무릎을 꿇고 있기 때문이다(빌2:10). 지옥 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린다? 지옥에서도 지옥가야 마땅하다고 영광 돌리고 천국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영광 돌린다는 것이 로마서 8장의 주장이 아닌가? 그런데 바르트는 한 쪽만(야곱) 이야기한다.

*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더 죄를 더 증가시키는 이유가 명확하지를 않다. 즉, 바르트는 개인이 자기 행함의 '의' 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말기를 당부하는 조치인지, 아니면 율법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이기 위함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 만약 전자의 논리라면, 율법을 좆지 않고 영의 사람이 되고 부터는 다시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둘 수 있지만, 후자의 논리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기 위함이라면, 더 이상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악마성을 지적하였지만, 인간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 창3:15절을 모르고 있다. 악마가 나올 때까지 인간의 죄는 계속 증가되고 있는 것이다.

◈ 인간이 처음부터 죄인으로 출발한다고 한다면, 이런 식으로 죄인을 규정할 수 있게 한 로마서 내용 자체가, 또 다시 은폐적이고 심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율법적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 여지를 마련한 논리 위에 전개하고 있는가?

* 바르트가 인간은 죄인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바르트가 이야기했다. 바르트 자신도 죄인이다. 그렇다면 바르트 자신의 사고방식도 왜곡될 수 있다는 이 말이다. 왜곡될 수 있는 놈이 인간은 죄인이라고 했으니, 죄인이 규정한 이 개념도 왜곡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이다.  
  
* 만약 위의 사실이 옳다면,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죄인 됨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 즉 인간 쪽의 어떤 것도 안되고 오직 십자가의 영을 받아야 됨)으로 죄인 됨을 먼저 인식하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율법을 통해서 죄인 됨을 안다는 논리 전개를 하지를 말고, 십자가의 영을 받아야 비로소 죄인 됨을 안다고 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 왜? 신약시대이기에 그러하기 때문이다!  만약 율법으로 죄인 됨을 안다고 한다면, 여기서 규정된 죄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원래 하나님이 원했던 죄인 개념에서 왜곡되게 이탈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하나님의 의가 율법 외에 다른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말은, 율법의 기능을 제대로 기능답게 유발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최종 율법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 따라서 로마서 전체 전개는 논리상 로마서 6장인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로마서 1장부터 차례 차례로 해석해 들어가는 것은 전개 논리상 난맥이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사도바울의 로마서 내용 전개는, 일단 정리된 개념들을, 로마서 6장에 의해서 하나 하나 깨어지고 부정 당하는 방식으로 진전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

♣ 기도 - 없음 ! ♣

[ 로마서 강해 ]                                   칼 바르트 저,  조남흥 역,  한들 출판사  
                                                      
                                                                        서평 : 이근호 목사   97, 4, 28

▣ 본 책의 내용 ▣

  하나님과 인간을 대비시킬 때는 서로의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와 죄인이라는 위치에서 만나지고 관계되어진다.  심판이란 인간에 대한 전적 부정이다.  인간이 내뱉는 모든 것, 신의 존재와 신을 향한 경건성까지 죄로 인하여 왜곡되고 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변질된 하나님이다.  이러한 딜레마가 결국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남을 평가하고 자기를 자기답게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율법을 사용하겠끔 했다.  그러나 율법의 세계는 이러한 인간의 정죄 기능마저 부정해 버리고 정죄시켜 버린다.  이로서 모든 인간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에 의를 지니지 못한채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심판의 날을 기준해서 볼 때에 기쁜 소식이란 딴 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가져다주는 의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을 인간이 행함으로서 주어지는 의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새로운 형태의 사람을 소개한다.  믿는 자의 표본이라는 아브라함이다.  그는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가능성마저 넘어섰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홀로 다 하셨다는 것이다.  행함과 무관하게 새로운 가능성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믿음은 인간 긍정이 아니라 약속 안에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다.  그 약속은 예수님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인간과 관계하신다.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세계의 모든 죽음을 지상에서 표현될 수 있는 하늘 나라의 유일한 비유로 사용케 하신다.  예수님께서 홀로 죽은 자 가운데서 깨어나심으로 그 분이 이제 행할 수 있는 심판은 의의 심판이다.  인간의 육은 철저하게 죄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것은 영인데 이는 영 안에서 성도는 이미 사형을 집행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그 어떤 가능성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영 안에 사는 생활이다.  오직 기다림뿐이다.  영은 성도를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형상이란 예수님의 죽음이다.  그 모습 따라 살게 하신다.  이 고난의 삶은 성도에게 낯선 것이다.  이 고난은 교회 내에서부터 시작된다.  교회(이스라엘)가 곧 복음을 대적하는 단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교회가 스스로 불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만이 진리이다.  이 진리성으로 인해 이 지상에서 에서적인 교회가 있는 반면에 야곱적인 교회가 있다.  야곱적인 교회는, 진노 받아야 마땅한 에서적인 교회 내에서 사랑에 의해 출현된다.  하나님은 사랑은 이런 진노의 대상이라는 배경으로만 표현된다.  이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로서 이방인들이 의를 얻는 데서 드러난다.  그들은 의를 추구하지도 않았던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된 것은 그들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성 때문이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온종일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신 이유는, 파탄된 교회 내에 다시 하나님의 긍휼의 부요함으로 충만케 하기 위해서이다.  교회의 이러한 은혜성은, 교회를, '그리스도 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일 존재로 평가된다.  따라서 교회 내의 모든 개별적인 사귐은 단일성을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반해 또 다른 권세가 교회밖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곧 국가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세는 악을 극복해야 한다는 부정적 역할만을 담당할 뿐이지 선한 교회로서는 그들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세상 권력이란, 악으로 악을 물리칠 수밖에 없는 죄악된 이 세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교회 내의 사랑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으로 자리잡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되 자신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위치 때문에 그러해야 한다.  특히 이방인의 제사장으로 나선 사도의 마음속에는 새삼스럽게 자기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하기 위할 따름이다.



♣ 책에 대한 평가 ♣

  이 책이 그 당시나 오늘날 교회에도 늘 충격을 주게 되는 것은, 인간 세계에 고정적 잠겨 있는 영원한 우상성을 직접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가치와 가능성을 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와 하나님을 거론한다.  
  거기에 반해 저자는 오직 '사망의 몸'을 유일한 명시적 계시로 내세우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죽어 가는 주제에 무슨 가치와 의미를 남길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면에서 저자는 두고두고 칭찬을 받을 만한 신학자이다.  그러나 자기 시대상을 고려하다 보니 핵심 부분에 있어 논리 전재가 세밀하지 못한 면이 엿보인다.  

  대중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에 의한 의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같은 의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만약 같은 의라면 전달 방식에 있어 두 계통으로 나누어서 따로 흘려 온다는 주장이 애초부터 억지가 되어 버리고, 만약 다른 의라면 율법의 목적이 그리스도라는 결론과 맞지 않게 된다.

  (2) 믿는 자의 계통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의 존재성에 관여했는지 아니면 아브라함에게 믿음에 관여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만약 아브라함의 존재함에 羚횰÷?있다고 하면 율법과 행위의 대립 논지는 도중에 약화되어 버린다.  반면에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생겨나도록 은혜를 주었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실질적인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믿는 자의 모델 케이스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믿음으로 자기가 구원받는 행위자의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락된다.  아브라함 존재 자체가 은혜의 산물이 아닐까? 그래야 이삭의 죽음에 참여하는 약속의 내용에 충실한 아브라함 상이 확립될 것이라고 본다.
  
  (3) 이스라엘을 교회라고 바꾸어 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이다. (아마 그 당시 교회의 변질성을 공박하기 위한 시도인 것 같다.) 거기에다 교회를 에서교회, 야곱교회라고 나누는 것도 부자연스럽고 선택론 논리 전개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에서의 운명과 교회의 운명을 나란히 연결시킬 수가 있을까?  성경에서 이스라엘로 표기한 것은 구약에서의 언약은 인간의 그 어떤 패역과 강팍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즉 참 이스라엘이 누구이며 어떤 것이냐 가 초점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하구나 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논리였던 것이다. 저자가 언약에 기초하지 않는 신학을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인간의 구원론에 편중되어 논리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여러 신학자들은, 인간이 구원되는데는 그만한 긍정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인 반면에, 저자는 반대로 주장한다. 즉 인간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될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전적 부정이 하나님에게 새로운 긍정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지닌 사실이라는 점을 저자는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부정이 긍정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이 볼 때의 또 하나의 눈속임에 불과하다. 에서에 대한 미움이나 바로의 강팍함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주장은, 인간의 구원론과 관련되어 있는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약속의 신실성을 말해 주는 구성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영광이 된다. 그러나 저자는 말하기를, 야곱의 입장에 선 사람에게는, 에서를 버리는 것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옳지 않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야곱의 자리에 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과 이어진다면, 에서의 자리에 선 사람이 자기가 지옥 간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반드시 알아야지만 종합적으로 이쪽 저쪽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언약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두 발을 모으게 되는 그 한계성을 저자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그냥 현실적인 이스라엘 국가와 그 가운데 약속에 따라 은혜를 입은 '남은 자'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

  (4) 율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더 죄를 증가시키고 있는 이유가 명확하지가 않다. 개인이 자기 행함의 의에 더 이상 기대를 걸지 말기를 당부하는 조치인지, 아니면 율법이 진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이기 위함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만약 전자의 논리라면, 율법을 좇지 않고 영의 사람이 되고 부터는 다시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둘 순 있지만, 후자의 논리라면 더 이상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5) 인간이 처음부터 죄인으로 출발을 한다면, 이런 식으로 죄인을 규정할 수 있게 한 로마서 내용 자체가 또 다시 은폐적이고 심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율법의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 여지를 마련한 논리 위에 전개하고 있는가?  만일 위의 사실이 옳다면,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죄인 됨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죄인 됨을 먼저 인식하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만약 율법으로 죄인 됨을 안다고 한다면 여기서 규정된 죄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원래 하나님이 원했던 죄인 개념에서 왜곡되게 이탈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의가 율법 외에 다른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말은, 율법의 기능을 제대로 기능답게 유발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최종 율법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간이다.

  따라서 로마서의 전체 전개는 논리상 로마서 6장인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로마서 1장부터 차례 차례로 해석해 들어가는 것은 전개 논리상 난맥이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내용 전개는, 일단 정리된 개념들을 로마서 6장에서 의해서 하나 하나 깨어지고 부정 당하는 방식으로 진전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