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일서 8강 (요한1서 5장 9절부터) / 07.4.2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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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강의(07.4. 27) 25-1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요한1서 5장 9절부터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여기에서 하나님이 증거했다는 이 대목이 약간 충격이죠? 하나님의 증거는 뭣과 대비되는가 하면 사람의 증거와 대비됩니다. 사람의 증거는 아니란 말이지요. 사람이 증거하는 것은 ‘너 뭐야? 너 잘났어? 네가 뭔데 너만 증거해! 너만 사람이고 나는 사람 아니야?’ 이러면 끝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증거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토를 달지 못하지요. 그리고 감히 반대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반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 모독한다든지 무시하게 되면 즉시로 저주받을 수밖에 없지요. 이 본문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다시 살펴봅시다. 10절부터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쉽게 말씀드리기 위해서 사도행전을 잠시 보겠습니다. 17장 30-31절을 봅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여기에서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일을 일관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사람의 증거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이지요. 유식한 사람, 무식한 사람, 남자, 여자 각양각색이란 말이지요. 일관성이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증거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다양성을 완전히 깨부수지요. 흔히 이런 소리 많이 해요. “저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이기에 목사님 설교를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잘 믿잖아요.”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요한1서에서는 ‘하나님의 증거가 있습니까?’를 묻는 것이지, ‘당신 똑똑합니까?’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할 만큼 똑똑합니까?’ 이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모습이 아닌(배운 사람은 많이 납득하고 못 배운 사람은 무식해서 모른다는 식이 아닌) ‘하나님이 하신 증거가 여러분 속에 박혀 있습니까?’ 이렇게 지금 묻고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이 대목이 굉장히 어려워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 대목이 굉장히 어려우니까 제가 쉽게 설명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자기 죄성일 수도 있고, 과거 경험일 수도 있고, 이것은 사람마다 성질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양각색입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되어야지.” 이것은 별 의미 없어요. “나도 저 사람처럼 똑똑했으면 좋겠는데--” 만약 똑똑해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천당 못갑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 안 넣어줘요. 유식하든 무식하든, 노숙자든 대기업 임원이든 이런 것들은 상관없고 하나님이 주신 증거가 있으면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밀려오면 ‘나는 똑똑해서 믿었어.’라는 증거는 퇴색되게 되어 있고, 이것은 스스로 밟아야 돼요. ‘역시 나는 교회 잘 다니고 착실하니까 구원 받았어.’ 이것은 완전히 박살나야 됩니다. 내 개성이 함유되어 있는 증거는 하나님이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나서겠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나섰다는 것은, 이제 인간들이 하는 개성 있는 증거는 무시하겠다는 뜻이에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질문, 답변에 오른 글을 정리해서 책을 발행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4권 분량이 마무리 되었는데 주제별로 다 나눠서 정리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분위기가 기독교적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보다 더 잘 믿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쉽게 복음을 접하고 믿음을 받아들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만약 이 사람의 말에 O.K된다면, 예수 안 믿는 육에 속한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으로 전환시키는 중간 단계에서 강제적으로 기독교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며, 만약 기독교 교육과 훈련이 필요치 않은 상태에서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고(가끔 있지만) 힘들다는 논리가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상담학’이 뭘 대체하는가 하면, ‘복음의 능력’을 대체해 버립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예수님만 있으면 되지만, 상담학이 구원 받는데 준비 단계로 필수적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목사들이 동원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교인들은 목사들의 권위를 진리로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의 종이 됩니다.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종이 된다고요. “목사님, 일단 믿음이 없으니까 준비 단계는 목사님이 책임져 주세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직접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1단계로 목사가 다가가서 구원하는 것이 돼요. 이것은 이단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케 할 때, 주님의 증거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지요. 하나님의 증거가 뭡니까? 아들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증거가 뭐라고요? 아들의 일하심이거든요. 사람의 증거는 뭐가 돼요? 사람의 일하심이 되지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란 말입니다. 사람의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가 아닙니다. 사람의 증거가 하나님의 증거 같으면 구태여 증거를 따로 내세울 필요가 없지요. 논리가 좀 어렵습니까? 하나님이 사람보고 증거하면 “아아고 잘 하는구나. 내가 뒤에서 후원해 줄게” 이러면 되지 직접 나설 이유는 없다 이 말이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 대학 졸업하고, 총신 대학원을 나와서 복음을 잘 증거한다면 하나님께서 준비단계로 모든 사람을 총신으로 보내서 목사 만들어서 목사를 통해서 구원 받는 방법을 사용하지 직접 그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을 사용 안 한단 말이지요. 왜냐하면 사람의 증거가 지금 잘 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나서겠어요? 건설 공사하는 목수가 일 잘 하는데 사장이 와서 “치워라! 내가 목수일 할 게” 이럴 필요 없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말한다면 ‘너는 이제 목수일 그만 해! 너는 잘렸어!’ 이런 뜻 아닙니까? 그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일반 회사에서는 사장님이 목수일 하고, 철근 나르고 이렇게 하지는 안잖아요. 감독 관리 하지요. “일 잘해.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렇게 한단 말이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은 월급 받고 철근 일 하고, 목수는 목수 일 하면서, ‘사장님이 날 알아주셔. 사장님이 날 인정해 주셨어. 내가 하는 일은 내 일이 아니라 사장님의 일이야.’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지금 한국교회가 방금 제가 예를 들었던 건설회사 식으로 그렇게 일한다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이단적입니다. 그렇게 일 안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제가 오늘 낮에 김포공항에 있는 [우리들 병원]에 갔다 왔어요. 그 가는 길에 돈 100원 주웠어요. 그러면 제가 돈 100원 줍기에 몰두하고 매진하는 목사입니까? 아니잖아요. 우연히 돈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줍는 것이잖아요. 내가 떨어뜨려 내가 줍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처럼 참된 주의 종은 사도행전 3장에 나오잖아요.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누가 낫게 했습니까? 1) 베드로와 요한 2) 주님. 누굽니까? 분명히 성경에 주님께서 낫게 했다고 앉은뱅이가 증언해요. 실제로 나았던 앉은뱅이가 증언한다고요.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 된 병자가 자기 자리를 들고 가잖아요. 그때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왜 담요를 들고 가는가? 안식일을 어겼다.’고 할 때, 병 나은 사람이 뭐라고 했던가요? “내가 들고 가고 싶어서 들고 간 것이 아니고 나를 낫게 하신 분이 ‘들고 가라’고 명령했다.” 이 대목에 정말 충격 받았어요. ‘들고 가라’ 누가 명령했습니까? 예수님이에요. 누가 병을 낫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한 거예요. 지금 병자가 머리 굴리는 게 아닙니다. 자기는 병 나을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병을 낫게 하시고, 낫게 하신 분이 ‘자리를 들고 가라’고 했단 말이지요. 그러나 당시 법으로는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면 안 되지요. 그러면 죽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어요. 막강한 국가적인 법이 있어요. 그런 법이 있더라도 그 국가법이 그 사람을 낫게 했습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는데, 세 친구가 풀무불이 들어간 이유가 뭡니까? 그 사람들은 공무원이지요. 그러면 당시 느부갓네살 왕이 그 사람들을 구원합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우상에게 절하라는 말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는 사람은 따로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풀무 불에 들어가고 그리고 자리를 들고 갔다면 그 사람이 지금 자기를 증거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죠. 뭐냐 하면, 반드시 ‘내가 당신 앞에 나서고 자리를 들고 나서도 당신들 보기에는 내가 지금 자리를 들고 나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당신이 내 사정을 몰라서 그렇다.’ 일 하라고 시키신 분은 누구다?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시키니까 들고 간 것이지 내가 미쳤다고 법을 어겨가면서 자리를 들고 가느냐? 내가 죽으려고 환장을 한 사람도 아니고. 자리를 들더라도 남이 안보는 데서 몰래 들고 가지 왜 남들 보란 듯이 그렇게 하겠어요? 예수님이 찾아와서 명령해야 구원 받습니다. 목사가 구원하는 법은 없어요. 사도바울이 사람을 구원하는 법은 없습니다. 어디 성경에 바울의 능력으로 구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베드로의 능력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지요. 오늘 본문 요한1서에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증거는 아들에 관한 것이다.” 제가 지금 말을 만들었습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증거는 더 크다고 했지요? 9절에. 하나님의 증거는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직접 앞장서서 아들에 대해서 증거하면 거기에는 누가 빠져야 돼요? 사람의 증거는 빠져야 된다고. 이근호의 증거는 빠져야 되고, 사도바울의 증거도 빠져야 된다고. 성경을 해석하는데 이렇게 혼란과 혼선이 오는 것은 기존의 사람들이 지금 교회라는 가게를 차렸잖아요. 또 하나 예를 들면, 슈퍼마켓이 휴지나 라면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아까 보니까 비빔면이 많던데 비빔면 공장하십니까? 아니지요? 가게는 그냥 비빔면을 판매하잖아요. 비빔면을 생산하지는 않지요? 그러면 그 가게가 필요 없습니까? 필요하지요. 사람들이 직접 공장에 가서 사면 번거롭잖아요. 지금 사람들이 가게하나 차려가지고 물건을 팔 때, 비빔면 하나 팔더라도 슈퍼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아마 일을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그렇게 보는 거예요. 왜 그런가? 사람들이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믿음이 없으니까.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가르쳤고, 그래서 “교회 없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라고 칼빈도 그런 주장 했고. 그러니까 성경 어디를 해석해도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하십니다.’ 라는 말을 목사들이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하게 되면 진짜 그 말을 곧이듣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목사님, 교회 필요 없네요.’ 라는 말이 나올 것이기에. ‘직접 주님께서 주시면, 내 쪽에서 뭔가 바치고 열심 낸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네요?’ 라고 나오겠지요. 그러면 목사들은 ‘그러면 목사 왜 합니까? 교회는 왜 있는데?’ 이런 말 나올까봐 겁나는 거예요. 차라리 “‘주님이 직접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라는 말을 알려주기 위해서 목사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 괜찮은데 ---, 우리가 뭔가를 안 받쳐도 주님이 직접 증거로서 오셔서 우리에게 덮친단 말이지요. 예를 들면, 전봇대가 하얀데 어느 날 보니까 빨간 전봇대가 되어 있어요. 왜 빨간 전봇대입니까? 빨간 페인트를 칠해서 빨간 전봇대가 되었잖아요.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피로 페인트칠을 해버렸어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성도가 되지요. 어느 날 오셔서 예수님의 피로 우리에게 칠해 버리면 우리는 죄 용서 받고 구원 받잖아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데 예수님이 우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자 애쓴 것도 아닌데, 그냥 주님이 먼저 나를 납치하고 포획해서 값을 주고 사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이제는 네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 되었다.(고전6:20)’고 했잖아요. 이렇게 되면 우리 안에 아들의 증거가 있단 말이지요. ‘아드님에 나에게 이런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나에게 이런 짓을 했습니다.’ 라는 것을 증거한단 말이지요. 이 사람이 사도 바울이고, 사도 요한이란 말이지요. “우리가 본 바요, 만진 바요” 생명이 직접 왔단 말이지요. 이것을 그대로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이 아주 단촐하게 오해 없이 주님의 증거를 그대로 증거하면 그걸 ‘교회’라고 합니다.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이제 정리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거든요.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의 존엄성을, 인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이라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사람 되는 정도가 아니가 하나님이 죄인 되었습니다.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왔단 말이지요(롬 8:4). 하나님이 사람 정도가 아니고 죄인의 모습으로 왔다는 말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졸지에 죄인이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죄인은 구원 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냥 죄 값을 치러야 해요. 중립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고, 죄인 될 가능성도 있고 의인될 가능성도 있는 중립적인 사람 같으면 하나님이 사람 되셨으면 ‘야, 이제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구나. 역시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사람을 끝까지 책임질 모양이다. 역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야!’ 이렇게 되겠는데, 하나님이 사람 정도가 아니고 그것을 더 넘어서 죄인으로 오셨단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사람을 기어이 죄인 만드는 것이 하나님 뜻이에요. 고3이 되어서 ‘어디를 갈까요? 법대를 갈까, 의대를 갈까? 주여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의사가 되든 판사가 되든 그것은 각자의 개성에 불과하고 ‘너는 의사가 되든 판사가 되든 백수가 되든 죄인이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목사 되도 죄인이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말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방어하고 막아도 하나님의 뜻은 탱크처럼 쳐들어옵니다. 나는 졸지에 죄인 되고, 예수님이 저주받은 것은 사실은 내가 받을 저주이고 그런 거예요. 주님께서 내 죄를 덜렁 가져갔는데 위에서 하나님의 저주가 퍼부어졌으니까 결국 나를 저주받는 자되게 하는 일관성 있는 프로젝트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강력한 탱크처럼 밀어붙이는데 어느 누가 말릴 위인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못 말립니다. ‘하나님이 죄인이 되어 이 땅에 나타났다.’고 할 때, 우리가 그동안 관심 가졌던 모든 관심사는 다 뒤로 밀려나야 됩니다. 그것은 관심사도 아니고 사소한 일에 불과한데 이런 사소한 일에 목숨 바치면 안 됩니다. 금요일인데 전화를 안 했다. 청소가 안 되어서 집안이 엉망이다. 이것 사소한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죄인 되셨는데 그 사실 앞에 청소 안 되어서 지저분하고 이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사람 되셨는데, 오늘 교인 몇 명 안보이고, 예배 시간에 마이크도 꺼지고, 녹음기도 고장 나고 이런 것은 사소한 일입니다. 이런 사소한 일에 목숨 바치면 안 됩니다. 박근혜가 되든지 누가 되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죄인 된 사건 앞에 아주 사소한 일이에요. 만약에 진짜 복음을 아는 검사라면 그 검사는 싱글벙글 거리면서 수많은 사람을 교도소로 보낼 겁니다. 왜냐하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검사님! 한 번만 봐주세요. 우리 남편 교도소가면 우리는 굶어 죽습니다.” 사소한 문제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죄인 되셨는데 뭐. “한 5년 구형할 테니 고생 좀 하고 나오세요. 나중에 봅시다.”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복음이 없는 검사는 ‘나라 꼴이 이게 뭐냐? 주여, 목숨을 걸겠습니다. 내가 검사노릇 똑바로 해서 이 나라에 정의를 구현하겠습니다.’ 하고 신경을 써서 ‘저 사람은 5년 정도 형을 살아야 하는데 정상을 참작해서 3년만 구형하고, 저놈은 3년 살아야 하는데 반성의 기미가 없고 성질이 더러워서 5년 구형하고 ---’ 하면서 혼자 한국 전체를 구하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제가 제풀에 지쳐 죽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검사 일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사기 쳤어요.’ ‘15년.’ ‘너무 심한데요.’ ‘사소한 일인데 뭐.’ 별 중요하지 않아요. 왜? 너무나 중요한 일이 있기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났다는 이것보다 더 큰 사건이 없어요. 여러분, 비행접시 나타나보세요.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비행접시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것도 우리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사람 정도가 아니고, 사람으로 왔다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이렇게 위하시는 구나. 역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맞아.’ 하겠는데, 그것이 아니고 아예 죄인의 모습으로 와 버렸으니까 우리는 졸지에 어느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이 없고, 다만 전봇대에 포스터가 딱 붙는 것처럼, 주님이 사람 되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필요한 사람을 뽑아서 그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칩처럼 박아 넣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 외에는 성도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38년 된 병자와 똑같아요. 목사든 장로든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 왜 그렇게 했어?” “주께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법이 어디 있어요? “예수가 누군데?” “날 구원 하신 분.” 목사가 구원하는 줄 알아요? 예수님이 날 구원했어요. 제가 어제 아침에 산책을 하면서 멋진 예화가 될 이야기를 들었어요. 너무 좋아서 오는 주일에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미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두 사람이 산책을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 마을에 고목이 있었답니다. 이 고목은 옛날부터 전설이 내려오는 고목이라. 그런데 이 나무가 도로 한복판에 있어서 사고가 많이 나요. 그래서 도로공사와 구청에서 나무를 베고 길을 똑바로 내려고 하고,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면서 대립이 되었는데, 구청에서 보상을 굉장히 많이 할 테니까 나무를 자르자고 해서 결국 나무를 베기로 했는데, 나무를 자르기 위해 전기톱으로 작업을 시작했는데 작업자의 손가락이 전기톱에 날아가고,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또 다른 사람이 자르려다 톱이 부러지고 해서 더 이상 일이 진척되지 못하고 나무만 더 유명해졌어요. ‘이 고목은 누구도 손 못된다. 만약 고목에 손댔다가는 큰 재앙이 떨어질 것이다.’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교인들의 목사 보기입니다. 목사 손대가지고 전기톱 날아가고, 손가락 날아가고 하여튼 그런 것이 있으니까 분명이 썩어서 잘라야 하는데 누가 나서서 자르지를 못하는 거예요. 자르면 3대가 저주를 받으니까. 이것을 누가 이용하는가 하면 목사들이 이용을 해요. 하나님의 증거를 제쳐두고 누가 증거한다? 자기가 주의 사자래요. 지가 증거해요. 지가 심방하고 상담해서 ‘의인의 기도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가 기도하면 뿅 간데요. 이것을 세력화 하고 구체화 시킬 때 그 고목을 누가 손대겠습니까? 전에 우리가 존경하는 목사님은 대구의 큰 교회 아무도 손 못 대는 고목을 단칼에 잘랐지요. 아침에 당회장 목사(고목)가 설교하면 오후에 자기가 설교하고 했는데, 오후에 설교하면서 ‘오전 설교는 이단입니다. 여러분이 그 말 들으면 지옥 갑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어느 부교역자가 그것도 대구에서 아주 큰 교회에서 그런 소리를 합니까? 다른 부교역자는 고목 앞에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는데. 왜 그렇게 용감하냐 하면,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 그러면 그 시간에 설교하라고 누가 시켰습니까? 하나님의 증거가 시켰지요. 담임 목사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설교자는 누구를 증거해야 됩니까? 하나님을 증거해야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 증거 안 하는 사람은 이단 맞잖아요. 문제될 게 뭐가 있어요? 아무 문제없지요? 고목에 손댔는데 전기톱 안 부러졌어요. 바로 하나님의 증거가 인간의 증거로 바뀌니까 여기에서 도덕이 동원되고 윤리가 동원되고 체면과 법이 동원되는 거예요. 목회 윤리에 어긋난다든지, 목사이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등의 소리가 막 나오는 거예요. 인간은 없어요. 죄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세계가 어떻게 바뀌고, 석유 값이 얼마나 올랐고, 북한에 핵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런 것은 사소한 것이고, 진짜 관심사는 하나님이 죄인이 되셨다는 거예요. 이것은 쇼크입니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보다 더 큰 쇼크에요. 북한이 지금 쳐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큰 문제 아니에요. 하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앞에 모든 신학이고 법이고 다 끝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여러분에게 있느냐고 요한1서가 묻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누가 이렇게 하라고 하더냐?’고 물을 때,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하라고 하셨다. 왜?’ 이런 자신감이 왜 없느냔 말입니다. ‘저분은 내 주님이다.’ 왜 이 말을 못합니까? [파리의 여인]에 나오잖아요. ‘제는 내 남자다.’ 왜 이런 말을 못합니까? ‘저분이 나를 구원했다.’고 왜 말을 못합니까? 주님이 구원하셨는데 왜 목사가 구원했다고 하고 왜 그런 식으로 하느냔 말이지요. ‘나는 목사가 아니니까 구원도 못시키고 --’ 왜 이런 소리가 나오도록 하느냔 말입니다. ‘우리교회 권사님은 기도를 많이 해서 얼마나 전도도 잘 하는지’ 그 소리 듣고 나니까 기도 적게 하는 나는 기도를 적게 해서 전도를 못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왜 이런 소리가 나오느냔 말입니다. 왜 전부 사람의 노동으로 다 바뀌느냔 말입니다. 주님이 일하셨는데 왜 사람이 일한 것으로 왜 다 바꾸느냔 말이지요. 이것이 교회에 장사가 되니까 그래요. ‘하나님이 사람 되심.’ 여기에 사도 요한은 목숨 걸었습니다. 이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미 확정된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을 취소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사람 되셨는데, 그분이 예수님이고 그것을 누가 취소합니까? 어느 목사, 어느 총회장이 취소를 해요. 안 됩니다. 취소 못합니다. 그리고 그 속력으로 하나님이 사람 되었던 그 멈추지 않는 속력으로 내 속까지 파고 들어와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로 인해 너의 모든 죄는 없어졌다.’는 이러한 기쁜 소식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길게 했는데 다시 한 번 봅시다. 5장 9절에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제가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얼마나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몰아요. 그래 신학자, 총신 교수여!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내가 수 십 번 이야기했어요. 신학생들 못 알아들어요. 교수는 물론 못 알아들어요. ‘하나님이 왜 예수를 증거 해. 자기가 아버지면 아버지가 우선되어야지 왜 아들을 증거 해.’ 글쎄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니까요. 이 말을 이해를 못해요. 대부분 사람들이 아들은 2인자고 아버지는 1인자니까 설마 1인자가 2인자를 앞장세우고 증거할 줄은 생각도 못한 거예요. 재벌 회사에 회장님 있고 아들 있으니까 회장님이 자기를 낮추고 자기 아들을 내세울 줄은 꿈도 못 꾼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증거할 줄 알았지. ‘나는 회장이다. 아들은 저리 가.’ 이럴 줄 알고 있어요. 오해십니다. 실제는 안 그래요. 실제는 하나님마저 예수님 증거합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지요. 12절을 봅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왜 생명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증거가 그것이니까.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고’ 이것이 아니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말이 굉장히 단촐하지요. 여기에 무슨 신학이 있고 깊은 논리가 있고 그런 것 아니지요? ‘믿을래, 말래?’ 그 뿐입니다. 이것은 구차하게 뭘 설명하려고 하는 그런 의도도 없습니다. ‘주는 대로 먹어!’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면 아이 감기 들어서 밤잠 못잔 것은 사소한 문제에요. 참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마음고생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자꾸 하나님이 죄인 되신 사건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수시로 잊어버려요. 그래서 중요치 않은 문제에 혼을 다 빼앗겨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기쁨이란 것이 없고 늘 초조와 불안 속에서 산단 말입니다. 실수한 것 때문에 깜짝 놀라고, 미래에 실수할까봐 초조하고 하는데 사람은 원래 실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실수 안한 것을 고맙게 여겨야지 사람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돌아서면 다 실수한 것이 파악 돼요. 그러니까 실수 하도록 되어있는데 실수 안 하겠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마음을 바꾸세요. ‘이제는 실수를 좀 다양하게 해 볼까’ 이렇게 마음을 가지세요. 그렇지 않고 ‘실수 안할게’라고 하면 귀신이 나갔는데 일곱 귀신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저놈은 실수 안 한데. 야, 재미있겠다. 놀려주자.’ 일곱 귀신이 쳐들어와요. 들어와서 막 자지고 놉니다. 이것도 실수, 저것도 실수. 다양하게 실수를 해서 귀신들로 하여금 ‘나도 몰라’하고 나가떨어지게 만들어야 해요. 귀신들이. 10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일이 내 결심하기 나름이다. 나는 무슨 일이든 내가 알아서 한다.’ 이렇게 되려면 자기 안에 거짓말은 자기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모든 일은 자기가 했으니까. 그리고 남한테는 거짓말을 해도 자기가 자기한테는 거짓말을 못해요. 자기가 아니까. 그런데 외부에서 침투했을 때, 외부의 어떤 진리가 혹은 생명이 침투하면 그 다음부터는 독자적으로 ‘내가 믿었다. 내가 파악해서 알았다.’ 이렇게 되면 이건 뭐가 돼요? 이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그래서 증거해야 되는데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주장을 해 버리는 거예요. ‘내가 믿는다.’는 말은 자기주장이지 증거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서 나를 믿게 했다.’는 것을 ‘내가 알아서 예수 믿었다.’고 하면 이것은 뭐가 됩니까? 이것은 거짓말이 되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 아들이 “엄마 때문에 나는 짜증난다.” 왜? “엄마 때문에 내가 나쁜 아들 되었잖아!”라고 할 때, 이것은 자기 생각만 하는 거죠. 그 때 엄마가 화냅니다. “왜 너는 너 생각만 하냐?” 엄마가 해 준 것은 잊어버리고 얼마나 엄마를 이용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엄마가 아들한테 해 준 것이 허사가 되어 버리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사람을 구원 했는데 ‘내가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를 구원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 되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더 쉽게 합시다. 예수님이 이미 “너를 구원했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선언을 했는데 ‘예수님은 구원했다고 하시는데 나는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졸지에 누가 거짓말 한 것이 돼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앞장세워 거짓말 한 셈이 된다 이 말이죠. 그렇게 이야기하는 취지기 뭡니까? 이것은 거짓말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앞으로 잘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앞으로 니 생각 안 해도 돼!’ 이런 뜻이에요. 한번 적어봅시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앞으로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 것 할 필요도 없단 말이지요. 왜? ‘내가 알아서 너 구원해 줄게.’ 그런 뜻입니다. 사람이 언제 헷갈리는가 하면 자꾸 ‘나’를 집어넣을 때 헷갈려요. ‘내가 지금 믿는 것 맞나, 안 맞나?’ 자꾸 ‘나’를 집어넣으니까 혼란스러워요. 나를 생각 안 해버리면 자연 그대로가 성경대로 이것이 ‘나’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안 보고 ‘나는 과연 예수 믿을까’ 이러면 혼란스러워요. 그럴 필요 없단 말이지요. 제가 KTX타고 왔는데, ‘운전을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런 걱정을 왜 합니까? 아니 내가 KTX타고 온 것이 아니고 고속버스 타고 왔다. 정신 봐라. 내가 지금 고속버스 타고 왔는데, ‘내가 운전을 어떻게 하면 더 빨리 갈까?’ 내가 왜 운전을 생각하느냔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누가 운전한 것이 거짓말이 됩니까? 운전사가 운전한다는 것을 거짓말로 만든 셈이 되지요. 사도요한이 지금 묻는 거예요. ‘네가 너를 구원 했냐, 하나님의 증거가 너를 구원 했냐?’ 이걸 묻는 거예요. “예수님이 증거했지” 그래, 그러면 입 다물란 말이죠. 왜? 처음부터 네가 구원 받고자 해서 구원 받은 것도 아니고, 구원 받으려고 애 써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면 네가 구원에 대해서 왜 걱정 하느냔 말이지요. 처음부터 그분이 알아서 한 것이면 끝까지 그분이 알아서 하도록 맡기지 네가 쓸데없이 왜 나서서 걱정하고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을 거짓말로 만드느냐 말입니다.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성경이 이렇게 어려워요. 어려운 이유가 사람들이 항상 이렇게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너 안에 내 있다.’ 이것으로 끝나버려요. ‘너 안에 예수 있다 됐잖아. 이것은 네가 속일수도 없는 일이야. 사도 요한처럼 이것을 증거하면 돼.’ 끝. 제가 방금 한 말이 11절에 나옵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달라고 해서 주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냥 도착했어요. 집에 오니까 택배가 와 있어요. 끝났어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혼자 못살고 주님과 동거생활에 들어갔는데 이것을 발로 차면서 ‘나가라, 나가라’ 할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다고 나갈 분도 아니고. “왜 오셨습니까?” “네가 죄인이라 구원하러 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러면 될 일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이 날 구원하려고 설치지 마세요.” 이럴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매일같이 ‘나는 오늘도 주님 생각 안 할 테니 알아서 하시고’ 북핵 문제가 어떻게 될까? 이번 대선은 누가 될까? 이런 시시한 일에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중요치 않는 것에 목숨 걸고 그것 때문에 자살 충동 느끼고 이런단 말이지요. 그래서 요한1서 4장 18절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무슨 사랑이? 그냥 사랑이 아니고 “온전한 사랑” 이 사랑은 타협적인 것이 아닙니다. ‘네가 사랑하면 나도 사랑하고’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온전한 사랑입니다. 거침없는 사랑입니다. 껌은 싶다 뺏어낼 수 있지만 우리가 받은 사랑은 뺏어낼 수가 없어요. 그분이 우리를 덮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 날에도 형벌이 없습니다. 이것을 누가 하셨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 증거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 저주 받습니다. 예수님이 몽땅 다 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심판 받습니다. “누가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더냐?” “나를 낫게 한 예수님이 가라고 하셨다.” 이것만 아시면 그 사람은 한국교회 총회장을 이깁니다. ‘당신이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자, 그 다음 13절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영생이 이미 있음을 확인 작업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잖아요. 이것을 확인 작업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번에 돈 100원 주운 이야기 압니까? 이게 돈이냐, 쇠붙이냐 확인 작업 하듯이, 네가 진짜 내 백성이냐, 아니냐 확인 작업을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정에 어려운 일을 일으켜서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네게 생명이 있는지 한 번 보자. 어려워도 나를 믿는 구나!’ 확인 작업 하는 겁니다. 교회에 이렇게 어려운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구원 받았음을 믿는가 확인해 보자. 교회 어려운 일로 통해 ‘나는 예수 안 믿을 거야!’ 하고 나자빠지면 이런 사람은 그동안 자기 힘으로 믿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시험치 않으면서도 시험을 하시죠. 시험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무너뜨리기 위한 시험이 있어요. 이것을 유혹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다른 한 가지는 ‘내 것이 너 안에 들어 있는가를 딸랑딸랑 흔들어보는 시험’ 이것은 매일같이 이런 시험을 하십니다. 왜냐? 자기 몸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 안에 들어 있구나. 알았어. 온전한 사랑이 네 속에 있는가 확인해 봤어!’ 그런데 우리는 ‘겁나요. 흔들지 마세요.’ 라고 하고, 주님은 ‘자꾸 흔들어 봐야 돼!’ 라고 하시고. 여러분,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낫습니까, 아예 병 없는 것이 낫습니까? 병 없는 게 낫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꼭 병 주고 약 줍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지 않도록,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산다고 착각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조금만 더 하고 쉽시다. 14절을 봅시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한 마디 한 마디가 정말 죽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뭐가 있다고요? ‘생명’ 맞는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담대함’이죠. 부모가 자녀들이 사랑스러울 때 볼을 꼬집으면서 “요 예쁜 것” 하지요. 우리 속에 주님의 담대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속에 계신 분이 세상을 이겼느니라.” 요한복음 15장에 나오지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너희 속에 계신 분이 뭘 이겼다? 세상의 모든 권력을 이겼다. 청소 안 해놓아도 담대하세요. 사소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큰 문제 아닙니다. 예수 복음 아는 사람이 부부싸움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오늘 이00 집사님 안 오셨네요. 담대한 것이 없는 모양이지. 담대한 것이 있으면 “여보, 오늘 남자애인 만나서 오늘부터 한 달간 가출해서 그 남자하고 동거생활 할게.” “좋아요, 좋아!” 뭐 중요한 문제 아니니까. “어디가도 행복하고 나중에 그 사람 싫거든 다시 내게로 와.” 아주 담대하지요. 이럴 때 주님께서 볼을 꼬집으면서 “요 예쁜 것, 담대한 것” 하나님이 사람 되셨는데 그까지 것 뭐 중요합니까? 아내 바람난 것이 뭐 중요해요? 하나님이 사람 되셨는데. 아니 죄인 되셨는데. 그동안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맙다고 해야지. sbs [그 남자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있어요. 보신 적 있습니까? 자기 여동생 남편이 바람을 피우니까 언니(바람 핀 남자의 입자에서 보면 처형)가 함께 바람피운 여자한테 달려들 때, 바람 피운 여자가 화가 나서 처형을 프라이팬으로 때리잖아요. 저는 속으로 “잘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지 그게 뭐 중요하다고 '우리 집안 망신시킨다'고 난리를 치냔 말이지요. 그럼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중에 심판하실 때 어쩌려고요. 예수님 심판하실 때 자기 여동생을 지킬 수 있어요? 되지도 않는데.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했어요. 진짜 그것마저 담대하게 버틸 수 있는 것, 그 정도로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주께서 오신 겁니다. 10분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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