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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5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08여름(잠언)

5강

정인순 2010. 12. 3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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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강의 : 이 근호 목사)

잠언 제 5강

잠언서 20장 4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 찌라도 얻지 못하리라.” 행운이라는 것은 없다는 거죠. 지혜안에 행운이 없는 이유가 그동안의 모든 혜택도 지혜자의 수고와 원칙과 노력과 법칙에 의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행운은 없고 은혜만 있어요.

행운이라는 것은 자기가 안 깨져도 헤헤거리면서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은혜 받는 동시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나쁜 놈이라는 것이 발각되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행운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금요철야기도회는 행운을 원하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금요철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테니 기도의 값을 달라는, 기도의 노동의 값을 달라’는 것입니다. 주고받고 하자는 것이고 대가를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조 안에서 아들 되게 하기 위함인데 인간들은 교회 와서 독립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돈이 없어서 독립 못해 신에게 끌려 다녔는데 이제는 돈 좀 있으면 신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내 맘대로 ‘내가 신이다’ 하고 외치면서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인간의 잠재되어 있는 본성이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잣집에서 자란 아이가 ‘우리 집이 부잣집이기에 내가 부모를 떠나가서 살련다’하는 그런 아이는 없어요. 이미 자기가 그만큼 혜택을 입었으면 그 다음에는 그 혜택 이상으로 독립하겠다고 밖으로 뛰쳐나가죠. 뛰어 나갔다가 얻어터지고 기어 들어오는 애들은 있죠. 탕자 같은 경우죠.

그런데 그 탕자 같은 경우는 옛날의 집나가기 전의 그 애가 아니죠. 모든 것을 다 상실하고 혹시 무엇이든 주어진다면 다 아버지의 은혜인 것을 아는 은혜로운 사람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나갔다가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더불어 사는 그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천국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입장에서 좋지요.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까. 탕자 본인은 본인대로 좋지요. 잘난 체하다가 깨져가지고. ‘아버지 없이는 내가 못살겠습니다. 아버지가 길러주신 것이 맞습니다’라고 아버지의 은혜를 알면서 들어오게 되지요. 그래서 잠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 없이는 못산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구조 자체가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지혜 줘서 우리가 살지 자기 힘으로 지혜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그런 잠재력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그것은 지혜를 거부하는, 구조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어리석은 자가 죽 나오는데 어리석은 자에 대한 징벌이 대단히 무섭습니다.

(교재 3쪽) (2) 방탕

“연락(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술과 기름’, 이것은 농업형경제구조에서 술과 기름이죠. 산업형경제구조에서는 뭡니까? ‘오토바이와 자동차와 요트를 좋아하는 자는….’ 이렇게 되겠지요. 어떤 결과가 지혜 되시는 하나님의 수고로움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안하고 그 위에서 즐기기만을 위해서 성급하게 달려들 때 그게 바로 지혜롭지 못한 겁니다.

어리석은 자는 남의 수고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 밑에 놓여 있는 희생을 몰라줄 때 그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부자가 되어도 괜찮아요. 부자 된 것이 내 덕이 아니고 지혜의 은총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부자이면서도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여러분이 침대에서 주무시면서 침대를 만든 노동자들의 수고를 아십니까?

모르잖아요. 마찬가지죠. 세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구조 안에서 보면 지혜의 고생담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만나보게 되면 사람들의 대화 속에 이 한마디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얼마나 고생한다고.’ 서로 서로 고생 시합을 해요. ‘내 고생 좀 알아줘.’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받기 위해서 사람들은 만나요.

그런데 잠언은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원래 없어’ 라는 것을 일깨워주면서 지혜, 너 대신 고생하신 분 때문에 긍휼을 입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지혜 속에 속한 사람이 지혜로운 자요 슬기로운 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럴 경우에만 누구를 겨냥하겠어요? 자기를 경외 안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요 생명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이것이 그렇게 풀리는 거예요. ‘너는 인간도 아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고등학교 정문에 붙여 놓았을 때 ‘여호와께 기도하면 서울대학에 많이 들어간다’는 그런 쪽의 느낌 같아요. 학생들이 서울대학에 많이 들어가 주면 그 학교가 유명해져서 투자금이 많이 들어오잖아요.

생명체의 확장에 나서는 거죠. 그렇게 나서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도용하는 거예요. 대구의 K대학 같은 경우에 교훈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거든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전제가 뭐냐 하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대해서는 일체 안 가르치는 학교입니다’라는 뜻이거든요.

‘우리대학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일체 가르치지 않는 대학입니다.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합니다’라고 해야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맞아요. 가만 보면 대학이 아니라 학원입니다. 돈 되는 기술은 다 가르칩니다.

그게 이 산업화 시대에서 살아남는, 살아남기야 가난해도, 거지 나사로 같은 인간도 다 살아남지만, 산업형경제구조에서 살아남는다는 의미는 그냥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주체 값을 하면서 살아남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주체라는 그만큼 중요해요. ‘거지 되어도 천당 가면 되지.’ 그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의미는 ‘내가 살아남는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 말고 내가 사는 것을 살아남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게 혼자서는 여의치 않으니까 협회를 만들어서 촛불집회를 한다든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광우병 소를 수입하지 말라’고 집단으로 주장하는 이유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자동차무역업 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소리 하겠지요. ‘빨리 수입개방 하라’고 하겠지요.

(교재 3쪽)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헤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잠 23:20-21) 이런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잠언서 볼 마음이 싹 가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 아는 이야기니까. 그래서 잔소리로 들리는 거예요.

그런데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술 좋아하고 고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부한 자이기에 그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승진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에서 건수를 올릴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합니다.

술자리에서 업체 간 거래계약이 성사됩니다. 술을 좋아서 마시는 것이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참석해야 되고 담배연기를 들이마셔야 됩니다. 이 사회는 윤리 도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어느 것이 부자 되는 지름길인가, 성공하는 지름길인가’만 남긴 채 그 나머지 파일은 삭제되고 그것만이 진리로 계속 추려지고 남게 되면서 그 길만 보이는 것, 그것이 이 사회입니다.

그것이 주체로서의 성공입니다.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네가 만일 먹는 것에 길을 들였으면 네 목을 쳐라’ 그런 뜻입니다. 주체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제가 조절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겠지만 구조적인 것으로 해석을 하면 ‘내가 탐식을 하면 내 몸이 살찌고 안찌고가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싫어하시는구나’라는 쪽으로 해석이 됩니다.

‘나를 불쌍하게 봐줘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안 좋아하시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쪽에서 해석이 된다는 말이죠. “네가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잠 25:16) 이것은 성경말씀 같지 않고 어떻게 보면 꼭 병원의 처방전 같은 느낌이 들지요. ‘너무 드셨군요. 절제하셔야지 건강에 안 좋습니다.’

병원의 처방전은 주체를 무시하지 않고 주체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잠언서의 말씀은 ‘너 그러면 맞는다’라고 됩니다. ‘이 지혜의 구조가 너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해석 자체가 달라져요. 잠언서 20장 1절을 봅시다.

잠언 20:1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자기의 용기에 의존해 버리면 그것은 자기주체를 계속 유지하게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고백도 하고 청혼도 해야 될 텐데 자기 주체로서는 용기가 나지 않으니까 술에 의존하기 위해서 술을 한잔 먹어요. 술 두어 잔 걸치고 거나하게 취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집 창문 밑에 가서,

“연숙아! 나온 나! 사랑한다!” 연숙이가 문 열어 보고는,
“술 처먹고 저 지랄이야. 집에 가서 안 디비지나? 내일 맨 정신에 프로포즈 해라. 나 그런 식으로 프로포즈 받기 싫다.”
“맨 정신에는 용기 안 나서 술 먹었다! (비틀거리면서) 원수를 사랑하라!”

드라마에도 잘 나오지요. 표구 해놓은 성구 ‘원수를 사랑하라.’ 꼭 술 처먹고 비틀거리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죠. 자기 주체가 희구하는 욕망은 이루어야 되겠고 용기는 없으니까 포도주의 힘을 빌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조를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저 사람이 내 사람이다’ 싶으면 ‘나는 이렇게 말도 더듬고 말도 잘 못합니다’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주체의 허약함을 말하면서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당신이 내 아내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하나님의 뜻을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일단 바통을 당신에게 넘기는 차원에서 당신에게 청혼합니다. 결정을 당신 쪽에서 하세요’라고 좀 말 더듬고 못난 구석이 있어도 솔직하게 해 줘야 그게 바로 둘 사이에 지혜가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잠언서에 나옵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은 누구에게 맡기라?’ ‘여호와께 맡기면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실 것이다.’ 그래서 얻은 아내는 내가 선택한 아내가 아니라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는 잠언서가 이루어집니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들이 후회한다고나 할까, 예상치도 못한 일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있는데 자기는 일단 결혼해서 여자를 삼키면 자기사람 되는 줄 아는 착각들을 많이 해요.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까 연애시절보다 더 위해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그것이 남편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조성케 합니다.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어지간하게 해 주면 눈치 때려잡고 이제는 안 해줘도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알면 될 텐데 ‘연애할 때는 안 그러더니 왜 결혼하고 나서는 달라졌나’하고 자꾸 따지고 드는데 ‘그때는 니 잡을라꼬 했제.’ 그 소리도 함부로 못합니다. 그 소리 했다가는 자존심 상해서 삐져서 4주 조정기간 들어가 버린다고요.

그러니 그런 소리도 못하고 갈수록 ‘음매 기죽어’하고 자꾸 기가 죽는 거예요. 저쪽은 ‘음매 기살아’ 하고 있고. 한쪽은 ‘음매 기살아’, 다른 한쪽은 ‘음매 기죽어’ 하고 꼬리를 내리고 있고. 초반에 잡자고 하는데 저쪽은 초반에 안 잡습니까? 둘 다 초반에 잡는다고 둘 다 초반에 깨지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남자들이 결혼하고 나서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된다.’ 여자는 애완견이 아니고 내 위에서 노는 사람입니다. 잠언에서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 여인이 상징하는 바는 보이지 않은 세계에서 파견된 자의 비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나’라는 남자를 사람 만들기 위한 하나의 흔적으로서 날아온 것이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여인이 갖고 있는 지혜는 남자가 아무리 탐구하고 연구해도 도저히 생각 못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번뜩입니다. 그래서 항상 낯섦을 느끼고 신비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여인도 여인 나름입니다.

잠언서에서 슬기로운 여인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추구하지만 어리석은 여자는 만 날 아침부터 밤중까지 휴대폰 들고 수다 떨고 펑퍼짐 해가지고 놀고 즐기고 자기 몸이나 꾸미고 그런 세계에나 속하는 거죠. 다시 말해서 남자가 아내를 무시할 경우란 다 아는 짓을 할 때입니다. 이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존경받을 짓이 계속 나와 주면 좋은데 다 아는 짓을 또 할 때, 그 때 ‘나는 너 보고 살지 않고 자식보고 산다’는 말이 나오죠. 자식은 늘 새로운 것이 나오니까. 그래서 이 세상은 유입되는 것이 있어야 돼요. 사람들은 뭔가 내가 만든 것 말고 신비롭고 새로운 뭔가가 유입되는 것을 보는 재미로 살아요. 그것이 바로 지혜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교재 3쪽) (3)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느니라.”(잠 13:18)

이것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그렇게 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전체 구조 안에서 너는 어떤 인간이다’를 자꾸 이야기하죠. 우리 보고 애쓰고 힘쓰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이런 인간이야’라고 인간을 분류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B. 부

「부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살아계시는 증거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교재 3쪽) 이 말을 좀 설명해야 됩니다. 잠언 10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부자가 된다는 것은 중간 과정이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게 결과적으로 무엇까지 해결해 주십니까? 근심자체를 없애 버린다는 말이죠. 여호와께서 복을 주셔서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다? 근심이 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까 뭐가 없다? 근심이 없는 거예요. 비록 부자가 아니어도.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 부자 되려고 해서 부자 되는 것은 근심이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를 불러요. ‘이게 내가 번 돈인데.’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어느 농부가 부자가 되어서 하는 말이 ‘이제는 내가 근심이 없다. 든든하다’ 하니까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이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저 재산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했어요.

하나님의 지혜의 관심사는 우리의 영혼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않는 사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으로 살아도 충분하다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야 말로 희망사항처럼 들리죠. “세상에, 목사님,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불가능성이라고.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이 맞는데 혹시 그런 일이 생기거든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가능케 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내가 못하는 것을 해 주고 있다는 이 자체가 지혜라는 구조 속에 있는 유일한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잠 15:6)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그때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물의 구조에서는 이렇게 되지요. 불의 구조로 넘어가면 천국의 삶이 어떤가에 대해서 성경은 한마디로 이야기하고 있죠. ‘지난 것은 다 잊어버릴 것이다.’ 이렇게 한마디로 이야기합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사도바울보고,

“사도바울님 천국 다녀오셨지요?”
“예, 다녀왔습니다.”
“어떻든가요?”
“말로 표현 못하겠습니다.”

너무 좋아서 표현할 수가 없어요. 모세가 하나님 만날 때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밥을 안먹은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밥과 물이 필요 없는 세계에 왔다 갔어요. 하나님 만나고 내려올 때는 얼굴에서 광채(아우라)가 비치고 있었어요. 완전히 천국과 세상 구조가 달라요. 그 구조에 따라서 사고방식도 다릅니다.

그 사고방식을 천국 가기 이전에 지금 지혜를 통해서 심어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발 눈에 보이는 세상 따라가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만한 그런 사람으로 살라는 것이 지혜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부자라는 것은 자기의 부지런함(잠 10:4, 12:24, 13:4)과 절제(잠 23:20-21)뿐만 아니고 정직 의로움, 지혜, 겸손, 및 여호와를 경외 등에서 비롯된다.」(교재 4쪽)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부가 주어지는 겁니다. 부가 주어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내가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부지런할 때 하나의 목표가 있지 않습니까? 부지런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한 것과 그냥 얻기 위해서 부지런한 것과는 차이가 있어요.

뭘 얻기 위해서 부지런한 것 같으면 주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이 부지런함은 주체가 유지되지만 주께서 원하는 것이 게으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 맡은 일에 부지런하면 주시는 것은 누가 주신다? 여호와께서 주신다, 그 말입니다. 이미 구조론 속에서는 주체론은 사라져야 됩니다.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기에 하는 거예요. 부지런히.

그래서 신약성경에 보면 ‘군사는 얼마나 바쁜지 자기 가정 일에도 매이지도 않는다’(딤후 2:3-4)고 했습니다. ‘부지런함으로 너희 일을 다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이렇게 나오는 것을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구조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 말씀을 목사들이 할 때는 꼭 주체를 집어넣고 해요. ‘부지런하면 부자 된다’는 식으로 꼭 우리들의 욕망을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인데 약속을 믿어야죠. 부지런한데도 부자가 안 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려면 더 부지런해야 됩니다’하고 부지런떤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내가 보기에는 자기 욕망에 미쳐버렸어요. 자기 욕망에 도취되어서 돌아버렸어요. 자기 기도에 도취되나 술 처먹고 취하나 다 제가 보기에는 같은 종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욕망에 미쳐서 술 먹는 것이나 교인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 달라고 기도에 미친 것이나 둘 다 미친 거예요. 둘 다 주체가 살아 있어요. 그것은 엉터리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부지런하더라도 낮에 그렇게 하고 밤에는 제발 좀 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밤중에 잠 잘 시간까지 다 빼앗아 가요.

그렇게 해서까지 부자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어긋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매일 밤새워 기도했다’고 하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매일 매일 밤새워 기도한 것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특별히 밤새워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 뽑을 때하고 마지막 겟세마네기도 두 경우 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뭐냐? 주무셨지요.

산의 새들도 자고 금붕어도 자는데 주님도 주무셨습니다. 밤에 소리가 들려요. ‘얘들아 좀 자라.’ ‘(심야 케이블 TV 보지 말고) 좀 자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제발 좀 주무세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뭘 주신다? 잠자는 것도 지혜입니다(시 127:2). 잠잘 때도 부지런히 자야 복을 받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잠을 자든지 뭘 하든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하면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지혜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C. 가난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왜 등장하느냐 하면 사람들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여건에 의해서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발생한다. 이로서 이 세상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여유 가운데 찬양하기에 부적절한 문제투성이 세상임이 드러난다.」(교재 4쪽)

여기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여건’이라는 것은 본인이 방탕, 게으름, 혹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자기 욕심에만 이끌려서 그런 것 때문이 아니고, 자기 외부에 있는 여건과 구조에 의해서 가난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봐서 이 세상에 가난한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은 인간들에 의해서 자기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고 구조에 의해서 되는 세상이 분명한 거죠.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은 구조에 의해서 떠미는 대로 살게 되어 있다고요. 구조에 의해서 떠밀리게 되어 있어요. 만원지하철에서 자기혼자 편하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겁니다. 냄새나는 아저씨 옆에 찡긴 채 떠밀리면 그냥 내릴 때까지 참아야 돼요. 그것이 세상입니다.

만약에 버티면 어떻게 되는가? 버티면 두 글자로 이렇게 됩니다. ‘압사.’ 밟혀 죽어요. 직장에서 중간계층이 힘든 것은 진급하기 싫어도 진급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기 싫어서 버티면 아랫사람이 밟고 지나가 버려요. ‘뭐 밟고 지나가면 어떤데’라고 초월하면 괜찮은데 사람인 이상 기분 나쁘잖아요. 꼭 나보고 나가라는 소리 아닙니까?

식당 운영하는 중에 제일 기분 나쁜 것은 ‘단골도 있고 맛만 좋으면 되지 어떠냐. 큰 욕심 없이 은혜주시는 대로 식당 운영하리라’ 다짐을 하죠. 마음은 그렇지만 길가에 같은 음식을 파는 새 단장한 음식점이 들어서서 사람이 그리로 몰려 버리면 머리 돌아버립니다. 잠언이고 뭐고 없어요.

“당신은 왜 같은 업종인 해장국집을 왜 하필 여기서 합니까?”
“나도 다른데서 하다가 밀려 왔습니다.”

이제는 밀려온 그 음식점 때문에 도리어 내가 밀릴 지경이 되었어요. 만약에 가게 새 단장을 안 하면 단골 필요 없고 압사당하면서 가게는 문 닫아야 됩니다. 세상이 원래 그런 세상이고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혼자서 독한 맘먹고 완벽하게 착하게 사는 것을 이 사회가 허용하지 않습니다.

집단적으로 나쁜 짓을 해야 되고 심지어 더 억울한 것은 집단적으로 죽어야 됩니다. 특히 애들은 부모가 이혼하면 자연적으로 결손가정이 되어 버립니다. 사회적으로 가난한자로 몰려버립니다. 한번 가난한 자가 다시 부자 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해요. 가능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부르디외라는 사회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비투스’라 해서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연구한 사람인데 사회주의 주창자인 마르크스에 반대해서 이론을 세웠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하기를 ‘이 사회라는 것은 계급에 의해서 구성되는데 그 계급은 두 계급뿐이다. 하나는 자본가 계급과 또 하나는 그 자본가에 의해서 종으로 부림을 받는 노동자 계급밖에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그 계급론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어떤 계급이 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인간이 어떤 쪽이 좋을까를 선호하는 식으로 결정 된다’고 합니다. ‘책임을 미루지 말고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 ‘다 너에게 있다. 주위에 어떤 계급이 있든지 간에 그 계급에 복종하고 안하고는 너에게 달렸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계급이라는 것은 고정적이 아니고 유동적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계급을 그렇게 싫어하다가도 막상 노동자라도 그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주식을 구입하게 되면 졸지에 그 사람은 자본가입장에 서서 자본가의 입장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데모와 시위에 참가하도록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욕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부럽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가진 것이 없는 내가 밉다는 뜻입니다. 괜히 예쁜 사람 미워하는 것은 내가 못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죠.

예쁜 사람을 보고 ‘너무 약해보여서 싫다’고 하지만 본인이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그렇게 되어 보세요. ‘인간아, 너도 일주일만 빼면 나처럼 된다.’ 인간은 자기가 판단 기준이기 때문에 자기 위주로 모든 세상을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문제가 뭐냐 하면 사람은 구조가 주는 가난에 대해서 분노하고 역겨워하게 됩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나에게 해 준 것이 없지요? 이제 당신과는 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주체가 이렇게 강렬해지면 내가 원하는 내가 되지 못한 그 탓을 신에게 돌리게 됩니다. 여기서 제가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사람이 왜 가난을 싫어하고 가난한자를 왜 거부하는가?’

그것은 이미 에덴동산에 추방되고 난 뒤에 내 힘으로 살려고 용을 쓰면 쓸수록 그만큼 힘들게 산 그 자체를, 그 가치를 일시에 포기하기가 점점 더 힘듭니다. 창세기 3장을 지나 4장에 오게 되면 단번에 두 가지 인간형이 생겨납니다. 가인은 자기가 제사해서 신에게 인정을 받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본인 노력여하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찜하는 식으로 선택한 사람만이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 두 다른 인간형이 다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람이 가난한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 자립하려면 최소한 자기 생계는 자기 선에서 해결을 봐야 할 텐데 그게 주어지지 않으니까 인간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잠언에서 가난한 자가 어떤 설움을 받는가를 보세요.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잠 10:15) ‘가난한 자 = 실패자’입니다. 처음부터 자연적으로 사회적인 여건에 의해서 실패자로 출발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죠. 왜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예요.

구약의 모세법에 보면 이웃사랑이 뭐냐, 이웃이 누구냐 하면 그 이웃이 잘사는 사람을 이웃이라 하지 않아요. 이웃이 안도와주면 생존이 힘든 쪽을 이웃이라고 합니다. 그냥 이웃이 아니고 남의 긍휼과 남의 사랑이 없으면 살수 없는 여건에 있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강도만난 사람 같은 경우입니다(눅 10:25-37).

강도만난 사람이 이웃을 결정해요. 옆집에 산다고 이웃이 아닙니다. 내가 어려울 때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그분이 바로 이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라’하는 것은 어떤 문자가 있고 그것을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과정 속에 들어가는 것이 이웃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도 있고, 반대로 그 이웃에 의해서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조 속에 포함이 되어 있으면 이미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니까 고아원 방문하고 구제하는 것이 이웃사랑이 아니고 내가 남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완전히 망한 자가 될 때 이미 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테마 속에 하나의 역할극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구조적으로 만들어요.

그래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평소에 그 사람이 나를 ‘이 근호 이 나쁜 놈’ 이라고 욕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조 안에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그런 예를 많이 들잖아요. 여호와의 증인은 이단이고, 안식교도 이단이고, 통일교도 이단이라고 그렇게 욕을 했건만 막상 차 펑크 났는데 지나가다가 차 세워놓고 펑크 다 때워주는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더라는 겁니다.

그럴 때 나에게 도움이 필요 없을 경우에는 내 평가에 의해서 이단이지만 막상 내가 도움이 필요한 입장에 서서 볼 때 그 사람은 나의 다정한 이웃이 되는 거예요. 차 다 고치고 난 뒤에 보니까 뭡니까? 역시 이단이죠. 어떤 마을에 갔다. 배고픈데 식당이 아무데도 없고 딱 한군데 식당이 있는데 ‘김밥왕국’이 있어요.

거기 들어가서 맛있게 먹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여호와의 증인들이 운영하는 ‘김밥왕국’이었어요. ‘김밥나라’는 아니고 ‘김밥왕국’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는 가게(?). 그러나 배고프다는 결핍이 있을 때, ‘누가 나를 도와주지? … 여러분!’

‘이웃사랑’은 누가 시행하느냐 하면 나도 아니고 여호와의 증인도 아니고 이미 그런 구조에 집어넣어 주신 지혜자가 나로 하여금 이웃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케 해서 이제 내 사랑 안하고 여호와 사랑을 넣어주신 그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목표, 지혜의 성취죠.

‘웅이 아빠는 죽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웃사랑 속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가난한자가 부자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이것이 서인석교수와 다른 점입니다. 서 인석교수는 『가난한자』라는 책을 지으면서 가난한자에게는 뭐가 있다? 권리가 있다. 무슨 권리? ‘가난한 자에게는 부자의 것을 빼앗고 강탈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 주장을 신명기에 나오는 ‘이웃환대법’을 들어서 주장하는데 그 해석은 잘못되었습니다. 절대로 가난한자는 부한 자에게 부한 것을 달라고 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지으신 분이 누구이기에? 여호와이기에 권리가 없습니다. 다만 부르짖을 뿐입니다.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 도움 줄 사람을 줄 수도 있고, 안주면 그것으로 ‘웅이 아빠는 죽었고’, 그냥 죽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한마디로 ‘주께서 기르시나니’(마 6:26)라고 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마 6:30) 들풀이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것도 주께서 들어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찬란하게 들풀을 입히시는데 그 들풀의 옷이 솔로몬의 옷보다 더 귀한 옷을 입히잖아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오늘 이렇게 귀한 옷을 입히면 내일도 보장되리라 생각하는데 오늘 입히는 것은 오늘로 감사하고 옷 입혀 놓고 내일 죽일 수도 있어요. 그게 ‘기르시나니’에 포함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이런 것 생각하지 말고, 자기의 존속, 자아라는 자기 존재의 존속에 기대하지 말고 그 나라와 의를 항상 구하면 그것이 오늘밤에 죽더라도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의 성취가 되는 겁니다.

「잠언에서는 빚을 지거나 남의 보증을 서는 것도 경고한다.」(교재 4쪽) 옛날에도 일가친척 보증서서 많이 망했던 모양입니다. 왜 보증서서 같이 망하는 경우가 생기느냐 하면 자아가 저촉 받는 영역이 넓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여기 있는데 만약 이웃사람이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보증 서주기 전에는 자아의 영역이 이 작은 테두리에 머물렀는데, 보증을 서서 내 돈이 저쪽으로 전달되면 내 자아가 이쪽까지 넓혀져서 나에게 어떤 태풍이 안 몰아쳐도 내가 돈 빌려준 사람에게 어떤 태풍이 몰아쳐 버리면 네기 함께 가난하게 되어 버려요.

이 말은 ‘네가 남의 인생을 보증해? 건방지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도 네 일을 모르면서 네가 건방지게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일을 알 수 있느냐는 말이죠. 왜 쓸데없이 자아를 이렇게 확장시키느냐는 말이죠.

보증이라는 것은 결국 투자개념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믿고 투자한 거예요. ‘믿을 것을 믿어야지 그 사람을 왜 믿느냐’는 이야기죠. 왜 그것이 투자개념이냐 하면 ‘지금 그 사람을 도와주면 내게 어떤 일이 있을 때 그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라는 것을 계산 하에 하는 거거든요.

사회라는 것은 서로 돕고 도우니까. ‘친구 좋은 게 뭐고?’ 친구 좋은 게 뭔데? 친구 좋은 거 없어요. 만날 하는 소리, 그것도 맨입에는 못하고 포도주의 힘을 빌려서 ‘친구 좋은게 뭐고? 정수기 하나 팔아줘.’ ‘나, 부동산 중개업 새로 시작했는데 집구할 때 나에게 맡겨줘. 동창 좋은 게 뭐고?’ 간만에 동창한테 전화 왔다 하면 반드시 그런 쪽 이야기입니다.

‘보증서 줘, 팔아 줘, 부동산 새로 개업했다’는 그런 이야기들. 나이 50대가 넘어가면 그런 것이 많아요. 목사한테는 그게 별로 없습니다. 나올 것이 없으니까요. 가난이라는 것은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서 자기가 성실해도 가난이 주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TV에 ‘이것이 인생이다’ 보면 눈물 나요. 전부 다 타의에 의해서, 사회적인 여건 때문에. ‘30년 동안 논, 밭을 가꾸어 왔는데 갑자기 도로가 나게 생겼다. 토지수용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생겼다’고 할 때, 사람 사는 게 수입이 이사 가기 전과 얼추 비슷하다고 해도 30년동안 사는 동안 단지 돈만 생산된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함께 살던 친척도 있었을 것이고 서로 의지하면 살던 마을 친구도 있었을 것이고 동네 돌봐주던 이장도 있었을 것인데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새로 이사 간 곳에서 채울 수가 있습니다. 수입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걸 못 채우니까 이사 간 뒤에 못 견뎌요. 사람은 돈으로만 사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사료로 사는 겁니까? 개처럼 사료 먹이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사람은 짐승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그 동네에서 못살고 다시 와서 거기 살아요. 도로가 났든지 수몰이 되었든지 거기 다시 가 보면 옛날의 그 영화, 아름다운 추억, 밤새 노닥거리면서 이야기 하던 친구들은 벌써 다른 데로 가고 없어요.

과거가 없다는 것은 뭐가 없다? 내 자아가 없다. 내 자아가 사라졌어요. 그러니까 이제 하는 것이 뭐냐, 만 날 도박하는 거죠. 그 허전함을 메워야 하니까요. 잠언에 도박도 나옵니다만 도박이라는 것을 왜 하느냐 하면 자기 존재감을 찾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돈을 벌기 위해서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도박을 합니다.

‘나는 아직도 살아 있어. 봐라. 나는 패배자 아니고 승리자 맞잖아. 돈 따잖아. 이 판 확 쓸었잖아. 봐라.’ 도박이라는 것을 왜 못 끊어 내느냐 하면 그 도박이 없이는 자기존재감을 찾을 길이 없어서 그래요. 적어도 내가 이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는데 그 나다운 것, 이정도 내가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그 가치를 어디서 찾겠습니까? 찾을 데가 없어요.

부교역자들이 제일 서러운 것은 교인들의 모든 인기가 당회장 한 인간에게 다 쏠린다는 거예요. 부교역자뿐만이 아니고 그 부교역자의 사모가 가장 모멸감을 느끼는 경우가 그 모든 좋은 것들, 인삼주스, 꿀, 프로폴리스 등 귀한 것들 전부 다 당회장에게 쏠릴 때 ‘돈 백 만원 받으면서 내가 더러워서 이 짓 하겠나. 어디 가서 돈 백 만원 못 벌겠나. 이 짓은 안 한다.’

때려치우고 선교사 갑니다. 선교사 가면 교인 몇 명 안 됩니다. 안되어도 사람 사는 맛이 납니다. 왜? 흑인들 서너 명 모여도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알아줍니다. ‘사람은 사랑 받는 재미로 사는 구나’ 사람은 사랑받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죠. 사회적인 여건 때문에 도로가 난다든지 댐이 생겨버리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이 다 날아가 버리죠.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잠 17:5) 가난하게 만들기는 하나님이 가난하게 만들어요. 가난하다고 해서 ‘저 게으른 놈, 방탕한 놈,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가난한 놈, 천벌을 받았지. 업보다 업보’라고 비웃음을 주는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치신다는 거예요.

‘가난한 것은 나쁘지만 가난한 자는 절대로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해서 가난한 자를 욕해서는 안 됩니다. 부한 자가 가난한자를 욕한다고 해서 자기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잠 19:4) 야, 이것은 흔히 들었던 잔소리이기는 하지만 너무 실감나지 않습니까?

재물이 많을 때는 ‘장로님, 집사님’ 하다가 그 집 망했다는 소리 듣고서 발길 끊거든 ‘웅이 아빠는 죽었고’, 그 지혜가 작용된 줄 아시고 그냥 받아들이면 돼요. ‘이런 나쁜 놈들, 괘씸한 놈들, 내가 베풀어준 은덕을 모르고….’ 자꾸 이렇게 씩씩대지 마시고 ‘참, 잠언대로 되는구나. 마땅한 거다. 이게 사회고 이게 세상이다’ 하고 친구 없더라도 그냥 수용하세요.

사람이 주체를 버리지 못하면 가난하게 될 때 가난한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뭔가 사회에 복수를 해요. 그 대부분의 복수란 ‘나도 돈 벌어서 부자가 되어서 복수 하겠다’는 겁니다. 이거 자기 망하는 꼴입니다. 평소에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 한번 안 찾아오다가 꼭 자기가 사회에 나가서 좋은데 취직했다든지, 백수 같은 친구 말고 잘난 친구 오면 데리고 아버지 산소에 갑니다. 드라마 같은데 많이 나오는 장면이죠.

‘아버지, 보세요. 제 친구에요. 아버지 이거 원했잖아요. 이제는 이 친구가 나에게 말하기를 평생 눈물 흘리지 않게 해 주겠대요. 아버지, 이제 편히 고이 잠드소서.’ 이러고 있어요. 결국 남자친구 사귀는 이유가 남자친구의 입장과 사정을 고려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결핍된 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남자친구를 하나 옆에 걸친 것 밖에 안 되거든요.

세상이 자기가 중심입니까? 자기가 지혜자입니까? 아니지요. 어리석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의 집합이 십자가마을입니다. 잠언을 배우는 이유가 우리는 본인이 ‘아니다. 아니다’ 하지만 이미 사회에서 떠미는 대로 떠밀려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 십자가마을 수련회 끝나고 가도 우리는 십자가마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마을입니다.

다시 그 동네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기죽지 않기 위해서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해서 괜찮은 남자, 괜찮은 여자 만나서 생전 안 찾아가던 아버지 산소 찾아가서, 도로 새로 나서 마지막 산소 이장하기 전에 찾아가서 ‘아버지, 이제 편히 잠드소서. 아버지 원했던 것, 이거였잖아요. 제가 기어이 해내고 말았습니다. 자기 뭐해? 절 안하고.’

생전 보지도 못한 영감한테 절? 벌써 잡혀서 꼼짝없이 시키는 대로 절을 하죠. 가난한 자의 위험은 기어이 부자 되고 말겠다는 복수심이 이글거린다는 겁니다. 태양열처럼. 이것은 하나님의 경외가 아닙니다. ‘절대로 나는 부족하다’가 아닙니다. ‘나는 하면 되잖아’라는 자기중심이 강렬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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