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강
어리석은 자를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잠언 19장 3절을 봅시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어리석은 자의 특징은, 여호와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반발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속성을 드러낼 때 그 사람 속에 어리석은 속성, 미련한 속성, 악한 속성이 들어 있다가 이것이 노출되는 거예요.
복음을 왜 전해야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왜 전해야 되는가 하면, 복음을 안 전하고, 하나님 하시는 일을 안 전하면 자기 속에 악한 뱀이 몇 마리가 들은 줄을 몰라요. 하나님을 전해야 이것이 들통 나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 “에이, 영 내 마음에 안 든다.” 라고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적은 주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기적을 베풂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뭘 원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일을 하셨어요. 대표적인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에게 나눠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찾은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배를 불리기 위해서 신을 찾았다는 것이 들통 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날 찾는 까닭을 내가 안다. 너희들이 떡 먹고 배부른 까닭에 날 따라오지?” “예” “어떤 기적을 원하는데?” “모세처럼 하늘에서 떡이 내려오는 기적을 원합니다.” “내가 모세보다 더 희한한 떡을 줄까?” “주세요.” “그 떡은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떡이다.” “댓끼리구나(최고다. 최상이다).” “내 살과 내 피다.” 못 알아듣겠다고 다 떠나버리고 두 번 다시 그분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때 반드시 신을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원망하는 것이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고 그것을 들춰내는 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의 표본이죠.
그러면 지혜로운 자는 뭐냐? 어리석은 자는 주체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신과 직접 연결한다면, 지혜로운 자는 구조를 생각합니다.
제가 두 가지 구조를 말씀드렸지요? 위에 있는 것은 불의 구조, 밑에 있는 것을 물의 구조. 이것이 뭐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전부 언약으로 이뤄집니다. 물의 구조는 물로 심판 당했던 그 모든 이유를 무지개를 가지고 보호하는, 보호막이 쳐있는, 일반은총 혹은 자연은총이라고 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햇빛을 주고 단비를 줌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선인과 악인에게 차별 없이 골고루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는 그런 보호막이 쳐있는 그런 시대가 물의 구조가 유지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불의 구조는 뭐냐? 그 보호막, 하나님의 저주를 막고 보호하시는 그것마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불의 구조에요.
‘너희들이 까불고 설치고 해도 내가 많이 봐줬다. 무당 짓을 하고 온갖 음행을 해도 내가 햇빛과 공기를 주고 은총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제 아들을 보내서 마지막 심판할 때는 보호막도 철거되고 완전히 작살 날 것이다. 그래도 너희들은 핑계치 못할 것이다.’
이런 구조를 어디서 찾느냐? 바로 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보호받고 있고, 언제는 보호하는 그 구조마저 철거되고 다른 것으로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언약을 통해서 알 때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 언약을 이야기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언약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왕’이에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 언약을 쥐고 있는, 이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조가 구조되게 하기 위해서 언약인데, 이 언약의 중심에 서 있는 유일한 인물, 왕, 다윗이란 사람이 받았던 언약, 그 언약대로만 앞으로 모든 우주는 결정 납니다.
잠언 1장 1절을 봅시다. 제가 읽어 볼 테니까 어디가 틀렸는지 알아 맞춰보세요.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뭐가 틀렸습니까? 뭐가 빠졌지요? ‘다윗의 아들’이 빠졌지요. 그래서 솔로몬은 솔로몬 개인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할 자격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전쟁에서 승리했잖아요. 승리 했을 때 여호수아가 자기의 승리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받은 약속대로 이뤄졌음을 나는 증거할 뿐이다.’ 그렇게 나옵니다. 모세가 받은 약속대로, ‘모세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언약하신 대로 모든 것이 이뤄졌음을 나는 그냥 증거할 뿐이다.’ 이렇게 합니다.
솔로몬도 같은 입장이에요. 솔로몬이 다운로드 받는 모든 하늘의 계시는 사실 솔로몬에게 준 것이 아니고 다윗이 갖고 있던 그 계시가 솔로몬 때에 와서 그게 구체화 되고 실제화 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구원 받은 것은, 자기가 잘나서 돌에 맞아 죽는 의로움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죽은 후에 누구를 만납니까? 하늘에서 예수님이 우편에 서서 받지요. 스데반이 죽고 다시 부활되는 것의 원천이 뭐냐? 스데반 개인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음으로 스데반 집사가 구원 받는 거예요.
제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란 책을 해석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같은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은 반복이 아니다.” 십자가라는 그 단회성이 반복이 될 때는 같은 유형은 아니지만 같은 질과 같은 위상은 계속 유지되는 거지요. 그건 뭐냐? “네가 죽어도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그 원칙은 십자가를 믿는 자 안에서 계속 그 생명의 작용이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지혜라는 것은 활동성입니다. 솔로몬이 받았던 그 지혜의 내막은 솔로몬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인터뷰한다고 해서 알 수 없고, 죽은 분이지만 누구와 인터뷰를 해야 합니까? 다윗에게 물어야 합니다. “다윗 임금님. 하나님한테 무슨 소리 들었습니까?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신데요? 나는 궁금해 죽겠는데 뭔가 말씀하셨지요?” “그럼, 내가 그분 말씀 들었지.” “내막이 뭡니까?” 그 내막, 다윗을 통해서 내려오는 그 내막이 뭐냐?
마태복음 1장 1절을 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거 잘못 되었어요. 제대로 번역하면 다윗이 먼저 나옵니다.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세계’는 world란 뜻이 아니고 ‘족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번역하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마저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그때 그분으로서의 구세주가 예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난 것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이 중간에 수정하거나 포기하거나 흐지부지된 적이 없이 과연 약속대로 되었다는 거예요.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그림을 그리면 이 그림 안에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가 창세기고 이쪽이 마지막 요한계시록이라면 창세기가 그냥 시간 단선으로 밀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내용이 덩어리 채로 밀려와요. 이게 뭐냐 하면, 지혜였습니다. 아브라함 뒤 430면 후에 뭐가 주어집니까? 율법이 주어지면서 지혜덩어리 안에 율법이 가미되면서 이 지혜의 본질, 내막이 점점 더 구체화 되지요. 율법과 지혜의 만남을 통해서 더 구체화 된단 말이지요.
율법이란 것은 우리 행함이 아니고 믿으면 돼요. 어린양의 피를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지혜라는 것은 뭐냐? 왜 믿으면 구원 받는가 하면 누가 죽었단 말입니다. 어린양이 죽었거든요. 그러면 그 어린양이 죽었던 죽음의 힘으로 죄인들을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잔소리가 나온다면 그 잔소리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죽음의 힘이죠. 우리를 죽임으로 우리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아까 제사에 대해 말하면서, 제사 드리는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제사를 드리면서 죄를 깨닫는 거예요. 죄를 깨달을 때,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이 죄 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뭘 보고 확인한다? 자기한테 안수 받은 그 양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양과 자신이 동일시되는 거예요. 양의 죽음이 곧 누구의 죽음이다? 나의 죽음입니다. 나의 죽음을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제사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꼭 관속에 들어가야 죽는 것이 아니고, 그때는 이미 늦었고, 앞당겨서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저주받는 그 모습이 내가 저주 받는 모습이에요. 그러면 그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디서 찾는가? 일상생활에서 찾아요. 일상의 모든 일들을 통해서 나로 하여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초점을 모으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는 것은 뭐냐? 십자가 은혜의 피로 구원 받지 나의 열정과 땀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낙타 무릎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죽음의 힘을 봐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자녀를 교육할 때도 무섭게 때려야 해요. 그래야 그 아이가 심각함을 알지요. ‘아버지는 조금 때리고 말더라.’ 이러면 안 돼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잖아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항상 죽음을 내포하고 생활해야 됩니다.
이 덩어리 채로 나오다가 이 덩어리가 다윗으로 말미암아, 마태복음 1장 이야기입니다. 다윗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시간이 정지되어 버려요. 시간이 두 조각 나버립니다. 하나는 정지된 시간과 이 정지된 시간이 품고 있는 그 그림자가 길어진 그림자, 쭉 길게 늘어진 그림자로서의 시간.
그러니까 이 시간은 소용없는 시간이죠. 더 발전성 없는 시간이죠. 왜냐하면, 발전성은 이미 완성되어 버렸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길어진 시간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고, 정지되고 완성된 그 약속대로 이 길어진 시간 속에 와버렸으니까 할 수 없이 예수님은 이 역사를 부정할 수밖에 없지요. 묵시가 역사를 부정하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정지된 시간을 가지고 이 길어진 시간 속에 와버리니까, 요한복음 4장 같은 경우에, 왕의 신하가 와서 “예수님, 우리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와서 좀 고쳐주세요.”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해서 가보니까 나았어요. 종들에게 “아들이 나은 시간이 언제였나?”고 물으니까 “7시에 열기가 떨어졌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 때가 바로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온 집이 다 믿었습니다.
정지된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 길게 늘어진 그림자하고 관계없어요. 천하의 바보 같은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 하면, 어떤 사람이 날 미워합니다. 미워하는데 때리지는 못하고 기껏 한다는 짓이 내 그림자를 발로 밟고 차고 난리를 쳐요. 본체는 따로 있는데 그림자를 밟는다고 해서 내가 아픕니까?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이런 짓을 했어요.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인다고 돌아 다녔는데, “사울아, 너 참 고생이 많다. 왜 쓸데없는 짓 하고 있니?”(행26:14) 사울이 아무리 설치고 예수님의 복음을 가로막아도 막을 수 없어요. 가시를 발고 차는 것처럼 본인만 힘들단 말이지요.
사람은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역사 밖으로 못 벗어나요. 모든 것을 해석해도 역사로 해석해요. 그래서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엉뚱한 소리 합니다. “그분이 오시는데, 그분은 우리보다 앞선 분이다(요1:15).” 나보다 앞서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한 술 더 뜹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거든. 아브라함이 나를 보고 얼마나 기뻐했다고(요8:56).”
이게 마치 어떤 말과 같은고 하니, “내가 얼마 전에 한산도에 갔더니만 이순신 장군이 나랑 차 한 잔 하자고 해서 다방에서 커피 한 잔 같이 마셨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순신 장군이 내 말 듣고 얼마나 좋아하든지 --” 이것을 가지고 다섯 자로 ‘정신분열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정신분열증 환자입니다. 자기가 아브라함을 봤데요. 우리의 소망은 이 시점에서 위를 쳐다보는 소망이지, 미래를 쳐다보는 소망이 아니에요. 위에 계신분이 미래마저 결정지은 것을 미래를 보고 아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재림을 믿으면 안 됩니다. 재림을 믿으면 휴거가 안 돼요. 재림을 믿으려면 십자가를 믿어야 그 십자가 지신 분이 재림 날짜를 자기 마음대로 확정 짓는다는 것을 보고 이쪽을 가야 돼요.
그분은 언제 오실지 몰라요. 언제 오실지 몰라도 상관없어요. 언제가 되었건 그것은 내가 믿는 그분이 주관하기 때문에 언제 오시든 상관없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아직 신랑이 안 와도 지금 왔다고 생각하고 기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처녀는 ‘오면 준비하지 뭐’ 이렇게 했지요.
내가 ‘올 때가 되었다’고 측정하는 그 시간은 허상이요 그림자 같은 시간이기 때문에, 이 그림자는 길어졌다 줄었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 변해요. 시간은 우리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관하십니다.
다윗 언약이 되면, 더 이상 다윗 뒤에 있는 솔로몬이나 다른 왕들은 다윗이 최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쁜 역할을 해야 될 왕으로서의 14대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족보를 보면) 다윗까지는 등산하는, 기어 올라가는 14대, 그 다음은 내려가는 14대, 그것이 다시 예수님으로 회복되는 14대. 이렇게 되잖아요.
최고의 정점에는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이 무슨 계시를 받았기에 다윗에 와서 모든 것이 결정 나버립니까? 그것은 시편 51편에 나오는데, 이 말이 잠언의 핵심일 수 있어요. 다윗이라는 완성된 시간의 그림자가 솔로몬의 잠언이에요. 그렇다면 솔로몬의 모든 잠언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실체를 모아보면 진정한 지혜자, 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지혜자는 잠언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잠언이 나왔던 다윗의 지혜, 다윗 언약, 다윗이라는 그분이 받았던 계시 안에서 잠언의 원천자, 지혜의 원천자가 계십니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다윗은 그분과 만나서 뭘 알았기에 더 이상 인간의 하는 모든 행위는 죄만 나열하는 그런 사건들이냐 하는 것이 시편 51편을 통해 밝혀집니다.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내 모친을 통해 죄악 중에 출생함으로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뭐냐? 인간은 어미가 낳은 것이 아니고 죄가 낳은 것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직 나는 주께만 범죄 했다(시51:4).’고 하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원래 이런 줄 아시기 때문에 그 죄의 해결책은 더 이상 인간으로부터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죄악 중에 있는 나를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제사?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내가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이다(17절). 예루살렘을 은총으로 쌓았듯이(18절) 은총을 베푸셔야 되는데, 그 은총은 꺾어진 뼈로 말미암아 나옵니다(8절). 이 짧은 시편 51편에 그리스도의 모든 역할과 기능이 함축되어 있는데, 그것을 양탄자 펼치듯이 쫙 깔아버려요. 그렇게 하면 그 시편의 내용대로 메시아가 오실 준비도 하고, 메시아가 오셨고, 십자가 지셨고, 마무리 재림까지 그 예언대로 갑니다.
시편 51편의 다윗이 하는 고백 중에,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피에 적신)우슬초로 정결케 하소서’ 라고 하는데, 죄인은 무엇과 만나야 하는가 하면, 죄인과 피가 만나면 용서가 되지요(죄인 + 피 = 용서).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긍휼이라고 했지요. 이 긍휼이 바로 다윗 언약의 진수입니다. 그 다윗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 되어야 하고, 메시아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이렇게 피와 죄인이 만나야 다윗 언약이 완성됩니다. 이것은 바로 출애굽 때 유월절 피와 이스라엘의 고난과 더불어서 만나야 그들이 생명을 얻는 겁니다. 다윗은 바로 그 정점에 서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죄는 어느 구조에서 나오느냐? ‘은총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나온다.’ 이것이 무슨 구조라고 했지요? 물의 구조지요. 이게 나중에 뭐로 바뀐다? 불의 구조로 바뀌려면, 주님께서 이런 물의 구조 말고 불의 구조에서의 은총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나오는 그러한 피로써 나올 때 이 세상은 불에 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가 불을 불러요. 피가 심판을 부른다고. 이렇게 설명해서는 모르는 분들이 많지 싶은데, 사도행전 17장을 보겠습니다. 30절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 시대는 십자가 이전 시대지요. 그래서 ‘인자를 우습게 보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마지막 성령이 오는 시대에 성령을 훼방하면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눅12:10).’고 했어요.
뭔가 시대 구분을 묵시에서(시간을 초월한 그쪽에서) 시대 구분을 하는데,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뭔가? 계속해서 사도행전 17장 30절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여기에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신다.’는 것은, 안 믿을 사람을 믿게 한다는 말이 아니고, 진짜 내 믿음이 옳은 믿음인가 하는 증거는, ‘이 시대는 이제 맛이 간 시대구나.’ 라고 유일하게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이 소식이 우리가 처해 있는 구조에 대해서 확연하게 못을 박았다, 결정지었다는 말이지요.
다윗 언약이 죄인 되게 하고, 우슬초의 피로 정결케 해서 이스라엘이 계속 유지된다고 이야기하지요. 시편 51편에서. 지금 이 원칙을 하나님은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죄인으로 드러나고 메시아가 피를 흘리면 다윗 언약의 선에서 이미 하나님 쪽에서 손을 털어버렸어요. 보여줄 것 다 보여준 거예요. 뭘 더 보여 달라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뭘 더 보여 달라고 합니까? 갈3:1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지혜? 하나님의 지혜가 뭔 줄 알아? 십자가가 지혜야. 다른 것은 지혜가 아니야.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세상의 어떤 지혜도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지혜를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들은 십자가가 어리석다고 여기지만, 그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것이 구원의 능력입니다(고전1:18). ‘한 번 지혜 싸움 해 볼까?’ 이런 뜻입니다. ‘누가 지혜롭고 누가 어리석은지 한 번 겨뤄볼까?’ 라고 나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지혜라는 것은 반드시 다윗 언약을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 이야기를 제가 한 겁니다.
자, 그러면 다윗 이야기 조금 더 해 봅시다. 다윗이 받았던 그 체험 “주여, 저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원래 죄 지으라고, 죄 짓기 위하여, 죄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가 얼마나 다양하며 죄가 어떤 성질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죄인으로 태어나게 했군요.” 라고 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죄인이 섰던 그 직분이 뭡니까? 왕이잖아요. 다윗이 왕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흩어진 모든 죄인들아, 내가 총 두목 할게. 내가 죄인 중에 왕 될게.” 그런 뜻이거든요.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그렇게 시켰습니까? 하나님이 시켰지요.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던 때의 시점이 언제입니까? 다윗이 왕일 때 아닙니까. 왕은 백성의 대표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에요. 다윗은 왕이 될 때 기름 부음을 받았어요. 기름 부음은 왕, 제사장, 선지자가 받는데 기름 부었다는 말은 ‘나는 너하고 이야기 할게.’ 그런 뜻입니다. 중보자적인 모델로서. 예수님이 “내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고 하신 것처럼, 구약 때는 왕을 세워 ‘나는 너하고 이야기하겠다. 그러니 백성들아 너희들은 나에게 계시를 받을 생각은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구약에서 어려운 거예요.
백 성: ‘왜 기도가 안 됩니까?’ 하나님: 하지 말라니까. 백 성: 왜요? 하나님: 언약이 그런 것이 아니야. 백 성: 언약이 뭔데요? 하나님: 연락책을 한 사람으로 집결시켰다.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은 바위고 나무고 산이고 간에 무조건 정성껏 빌면 돼요. 수돗물 떠놓고 정안수라고 하면서(얼마나 수돗물이 오염되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비는 거예요. “남산 위의 노루새끼처럼 자손들이 뛰놀게 하시고 ---” 하면서 종이를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내면서 빌어요.
왜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여러 명이 아니고 한 분으로, 연락책을 한 곳으로 정해 놓았는가 하면, 여러 군데로 정해 놓으면 내가 죄인인 것은 드러나지만 내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안 드러나요. 이건 몰랐죠?
부처에게 빌어도 “내가 잘못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이번에 아이 대학 떨어진 것도 다 내 잘못입니다.” 라고 빌 수 있어도, 나는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인정 안 해요. 왜? 지금 현재 기도하고 있는 이것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전적 부패, 전적 죄인은 통로가 아니면 안 돼요. 그리고 그 통로에 뭐가 설치되어 있습니까? 어린양의 피가 설치되어 있어요.
따라서 통로를 벗어나면 뭘 우회한다? 내 대신 죽어야 될 그런 어린양의 억울한 죽음을 피해버리니까 자기는 잘난 사람이 되어버려요. “주여, 저는 교회 나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만날 이런 식이에요. 복음을 비켜 가버리니까 자기가 교회 나온 것은 잘한 일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로로 통과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자기 의가 막혀요. 피 앞에서 “주여, 제가 최선을 다해서 교회 나왔습니다.” 하다가 박살이 나지요. “너는 죄 중에서 태어나서 모든 것이 다 죄야.” 이렇게 돼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알지만 그가 전하는 것은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수평적 시간관념으로는 십자가를 증거하면 안 되지요. 뭘 증거해야 됩니까? 부활을 증거해야 되죠. 왜냐? 부활은 십자가 졌다는 그 시점을 밀어내고 부활된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해요.
한 물 간 십자가를 왜 끄집어냅니까? 히브리서에는 언약의 피라. 부활의 능력이 아니고 언약의 피. 부활을 톡 깨보면 그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어요. 부활은 겉 포장지에요. 안의 내용물은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부활은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부활은 지혜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라”(고전1:17)고 했어요. 부활이란 것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영역을 부활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만날 인간들은 수평적인 시간만 생각하니까 순서가 ‘예수님 태어났고, 그리고 십자가 죽었고, 그 다음은 부활, 그리고 성령을 보내셨다.’ 그러니까 어떤 부흥사들은 부활도 한 물 갔다고 해요. 이제는 성령 시대니까 성령을 전해야 한답니다. 그래서 “성령 받아라!” 하고 떠들어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성령님의 완장에 뭐가 둘러 있다고 했습니까? ‘철거 반장’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아니면 제일 깊이 있는 지혜, 십자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성령 받았다는 말이고, 성령은 십자가에서만 나와서 십자가만 증거해서 우리로 하여금 다른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고 십자가의 길로 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의 대신 희생하신 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요15:8) 예수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우리를 책망하시지요. ‘너의 잘 잘못을 세상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과 비교해 보라.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너희는 뭘 잘했다고 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 받았다.’고 해요.
왕이라는 것은 죄인의 대표자로서, 왕이 죄인이 되었다는 말은 그 왕 밑에 있는 모든 백성은 왕 하나가 죄인 됨으로 말미암아 백성 전부가 일률적으로 죄인이 되지요. 이걸 지난 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집단 아들.’
죄인 되었다는 말은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자기가 집단적으로 죄인인 줄 알고, 그래야 피가 필요합니다. 피가 왜 필요한지를 유일하게 아는 민족,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버리셨는지를 유일하게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제가 이슬람교를 공부하고 불교, 유교를 공부해보니까 그쪽은 뭐냐? 신을 모델 삼아서 도를 닦아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도를 닦아요. 기독교 내에도 자기부인을 하지 못하는 교회는 불교고 이슬람교고 유대교에요. 기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부인을 못할까요? 십자가가 안 보이니까 부인할 수 있는 기준점이 평소에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기껏 자기 과거를 떠올려서 ‘나는 과거에 이러했는데 오늘은 좀 더 나아져야지.’ 항상 기준점이 자기의 과거여서 자기와 자기를 비교해요. 십자가가 현장감이 없으니까, 십자가 지신 분이 안 보이니까 기껏 비교하는 것이 자기 실수한 것, 자기의 부정한 일과 비교를 하니까 ‘내일은 좀 더 잘 해야지.’ 이러고 있지요. 이것을 세 글자로 ‘성화론’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 칸트 철학에 보면 ‘반성하는 이성’ 실천적 이성이죠.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어제의 일을 반성함으로 보다 나은 내일을 도모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더 나은 생활을 했다고 자부하는 속에 내일 회개할 것이 들어 있는 모자람의 자부심입니다. 모자람의 자부심이 말이 됩니까? 지금 완벽하면 내일 회개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고, 그리면 내일 회개할 것이 없으니까 내일 반성하기 위해서는 오늘 모자라야 해요. 그러면 만날 죄 지어야 되고.
아무리 완벽해도 그것은 바로 내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모습이죠. 왜냐? 내가 성경대로 남을 구제해도 그 구제한 현장에 누가 등장합니까? 죄인인 내가 아니고 주체자, 구제를 행한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나지요. 그러면 내가 구제한 그 현장에서 의인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졸지에 죄인은 아니지요. 이렇게 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다 알아버렸어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바둑 잘 두는 이세돌하고 바둑 두면서, 이세돌은 왼손으로 두고 여러분은 오른손으로 둬서 이길 수 있습니까? 이세돌이 누군지 모르지요? 바둑 세계 최강인 24세 청년입니다. 바둑 두는데 왼손 오른손 구분할 필요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오른손 왼손을 이야기한 것은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기름 바르고 금식하고 해 보세요.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머리에 기름 바른 사람은 누구에요? 나잖아요. 지금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네가 너 딴에는 최고라고 하지만 내가 너희들이 깜짝 놀랄만한 최고를 이야기해 줄까? 최고는 이정도 수준繭燦?된다.’ 라고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헉, 놀랍도다! 누가 그런 걸 가르쳤나?’ 라고 합니다. 자기보다 수준이 더 높거든요. 완전히 그들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지요.
그래서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산상설교가 지혜인데, 지혜가 지혜와 대결을 한 번 해 본 거예요. 너희 바리새인들의 지혜와 예수님의 지혜는 다르다는 것을. 그래놓고 문둥병자가, 산상설교 지키지도 못한 문둥병자가 구원 받았잖아요. 산상설교 하나도 안 지켰는데 구원 받았잖아요.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문둥병이 깨끗함을 받거든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8:4)고 했지요. ‘나는 이 제물의 실체화 때문에 구원 받았다. 이 제물에서 예언한 그분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네가 그들에게 증거를 보여 주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장차 시나리오는 뭘 따라 간다? 그 문둥병을 낫게 했던, 거기에 동원되는 그 제물의 운명이 곧 누구의 운명입니까? 예수님의 운명.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완성되는 거예요.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보세요. 이 찔림 받은 분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꼭 우리를 끌고 가요. 그러면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의 효과를 보여 주기 위해 죄인으로 동원된 자이고, 우리는 죄인으로 동원되면서(죄인인 주제에) 할렐루야를 외칠 수밖에 없어요.
자신이 죄인 되었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어디에 동원 되었단 말이지요.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하는 자로 동원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항상 ‘할렐루야!’를 외칩시다.
다윗의 이 모습, 다윗이 죄인의 괴수로 왔을 때, 그 괴수보다 더 높은 괴수가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에요. 다윗이 이스라엘이란 그 죄인 집단의 총 두목으로써 자기가 원래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면, 예수님은 그 자리에 서슴없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면서 그 자리에 다윗의 자손으로, 그 죄인의 자손으로 뛰어들지요. 의인이 죄인의 자리에 뛰어들지요.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이게 참 엄청난 일입니다. 죄 없는 자기 아들을 ‘이제부터 너는 버림받은 자식이야.’ 라고, 남이 지은 죄를 몽땅 끌어당겨서 자기 아들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죄인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도록 하신 그 사랑, 이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목사님! 이번 수련회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 맞는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한 마디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사실입니까?’ 라고 되물어요. ‘이것 믿고 병 낳았다.’ 이런 것은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 믿고 교회 부흥되었다.’ 이것을 증거로 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 했느냐?’ 이게 관건이에요. ‘나는 느꼈는데 기분 좋더라.’ 이런 것이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기분은 한 순간이고 변하기 마련입니다.
다윗은 바로 죄인으로 설 때에 그 죄를, 아까 죄가 무엇과 만난다고 했습니까? 피와 만나죠. 이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릴 때 두 가지가 있지요. 첫째, 죄인으로 하여금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고, 두 번째 그 죄인을 용서해야 되지요. 죄인임을 드러내게 하고 자비(용서)를 베푸는 이것이 바로 잠언 전체의 내용입니다.
잠언의 모든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 악한 자’ 이 모든 것을 지적하는 것을 보시면, 반대로 ‘슬기로운 자, 지혜로운 자’에 대해 들어보시면, 슬기로운 자는 자기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에요. “여호와 하시는 일이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군요.” 하고 찬양하고 박수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것이 슬기로운 자고, 그 외 모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어리석은 자를 뭐라고 했습니까? 8페이지.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줄 여기는 자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밖에 몰라요. 다윗 언약을 몰라요. 다윗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다윗이 받은 은혜가 뭔지, 하나님이 앞으로 다윗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도 모르고, 지혜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요. 모든 지혜는 다윗 언약을 통해서 오니까.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중심인줄 알아요.
그 밑에 봅시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29:7). 왜 이런가? 다윗 언약을 통해서 죄인을 용서하는 긍휼이 있다는 것을 슬기로운 자는 아는데,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용서도 본인이 알아서 용서를 해요. 자기가 알아서 ‘나는 나쁜 짓을 했다. 어떻게 할까?’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해요. ‘성경 3장 읽고, 30분 회개기도 해라.’ 이런 식으로.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자기한테 벌을 내리고 심판해 버리니까 남들 보기에는 반성하는 자아, 또는 성화되는 자아로 보이지요. ‘술 끊는 것은 착한 일이다. 술 끊어야지.’ 자기가 자기한테 명령을 내려요. 이렇게 되면 갈수록 점점 더 자기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자기가 중심이니까.
다윗 언약을 몰라요. 정죄하는 것도 예수님께로 가고, 본래 다윗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는 것도 몰라요. 그래서 제발 부탁합니다. 여러분 제발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에게 벌을 내리지 마세요. 왜냐하면, 여러분들을 용서하신 분의 손이 머쓱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참 처참하게 보고, 인간답지 못하고, 참 괴롭게 보지만 그것보다 더 심하게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을 동정하고 굉장히 관대하게 대하지만 그럴 자격이 여러분에게 없어요. 얼마나 주께서 우리를 꼴 보기 싫었으면 그 꼴 보기 싫은 것을 표한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버리시겠습니까? 그 때 하시는 예수님의 외침이 바로 우리가 외쳐야 할 외침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봐도 해결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그 짓입니다.’ 버림받을 짓을 하고 있으니까 앞당겨서 버림받은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웅이 아빠는 죽었고 ~” 하는 그걸, 이제는 내가 웅이 아빠라. 계속 버림받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버림받은 자가 다시 회복이 됩니다. 주님은 회복이 되고 부활 되셨지요. 그 회복하시는 성령께서 이제는 우리에게 찾아왔다고 고린도후서 마지막 대목에 나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여기에서 문제는, 살리시는 근거가 뭐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보냈다는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살리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감사하리로다.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노라.’
로마서 8장 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지은 책 이름이죠? 제발 우리 자신이 우리를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허접스럽게 보시기는 하되 정죄하지는 마세요.
항상 우리는 오른손이 한 것을 떠벌이고, 왼손 오른손 총 동원해서 떠벌이고, 금식하면 금기한 티를 내고, 한 번 헌금하고 구제하면 큰소리 치고 이런 우린 줄 아셔야 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나타난 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작용하신 결과로서, 지혜가 작용했기 때문에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그 면면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줄 아시고, 그때마다 십자가 바라보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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