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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강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08여름(잠언)

3강

정인순 2010. 12. 31. 12:26

cross08080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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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3강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 끝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제가 간단하게 언급했어요. 피가 묻어 있으면 아들이고, 피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다. 근데 이스라엘이 아들이라 할 때에 참 이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하실 때 상당히 어떤 의도인지 알아야 돼요.

아들이라 하는 것은 단수, 한 명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덩치지요. 여러 명, 수십만 명 아닙니까. 수십만 명이 어떻게 한 사람으로 화될 수 있느냐, 한 사람으로 지칭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철학에서 존재로선 안 돼요. ‘누굴 대표한다.’ 이건 되는데 덩어리 하나를 하나의 인격으로 묘사할 때는 중간에 무슨 이야기할 게 있어야 돼요. 논리가 있어야 돼요. ‘이스라엘이 아들이다’ 이리 하면 안 되고, 어떻게 다수, 아들들이라 이래해야지, 아들들이라든지 딸들이라 이래돼야 될 텐데 ‘단출하게 아들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결국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집단화죠. 아들 표현할 때 ‘집단’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 하나님 아들이 한 명은 아니잖아요. 여러 명이다. 여러 명인데 하나의 집체를 이루어서 집단, 집체, 몸체를 이루어서 그것이 하나의 아들로 간주될 때 여기는 뭐 여러 명 모이면 하나로 해줍니다.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게 아니고 잠언을 통해서 보면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처음부터 이스라엘 아들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문설주에 피를 발라서 하나님의 군대, 아들 되게 했던 피 흘린 자가 두 명도 아니고 세 명도 아니에요. 누구냐 하면, 단 한 명이 되는 겁니다. 한 명이 돼버리면 여기 이스라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이 한 명에 종속되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되고, 이 이스라엘 전체는 한 명 되시는 아들 됨을 보여주어야 될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겁니다. 맨 그렇게 해요.

그러면 집단 속에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 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지혜라 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말로 하면 어려우니까 제가 쉽게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지혜의 목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거예요. 집단 전체를 아들이라 보고, 이 전체가 조건이 ‘아들들’이 아니고 하나의 아들로 불려야 될 아들이다. 이것도 돼야 되고, 두 번째, 이 전체가 몽땅 여호와 경외로 나가줄 때 아들이 아들답게 되는 거예요. 아들들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전체 기능이 하나의 아들처럼 돼야 되고, 조건 하나, 둘은 뭐냐 하면, 이 전체가 여호와 경외가 되는 그 조건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줘야 잠언서에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 하는 말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도 된다 이 말이죠. 둘 중에 하나가 없어지면 안 되잖아요. 우리는 아들이라 해도 여호와 경외가 나오면 안 된다고.

그렇다면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쪽으로 뭔가 작용을 하시겠죠. 근데 잠언서에서 미리 뭐냐? 예수님은 지혜자로서 여기 계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여기부터 이해 될 겁니다. 주위에 종이 있을 것이고, 여기 아내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자식도, 부모, 왕 그리고 이웃, 이거는 더 나가면 여호와. 이렇게 사람들에게 주변에 있는 많은 집단 속에 누구나 관계를 맺는단 말이죠.

이런 관계 속에서 종을 대할 때 여호와 경외, 아들을 대할 때 여호와 경외, 자식을 대할 때 여호와 경외 이래 되거든요. 특히 잠언서 보면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는다” 이래 돼요. 그렇다면 누구 소유입니까? 슬기로운 아내는 나의 소유가 될 수 없거든요. 나의 소유가 될 수 없도록 아들 되시는 분이 속에 작용을 해줘야 그게 한 아들이면서 동시에 여호와 경외가 가능한 거예요.

만약에 내가 아내가 슬기롭다 해버리면 이거는 하나의 집단으로써 아들이 될 수 없어요. 나 말고 다른 분이 나를 대신해서 아들 노릇하는 그런 관계성을 우리가 잠언에서 찾으면 딩동댕 다 해결된 겁니다. 우리에게 좋은 아내, 자식, 이웃 모든 관계 속에서 어느 구석 빈틈없이 전부다 지혜 되시는 주님께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언을 통해서 확인하고 증명하면 되는 거죠. 내 힘으론 증명 안 되니까.

여기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 말씀하며 아셔야 할 것은 아하, 내가 교회에서 기도한다고 여호와 경외가 아니고 많은 관계를 갖게 하고 내가 원치 않는 그런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친구로서 오게 하고, 그 속에서 나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그 본색 드러내는 것이 아들답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을 반대하는 엉터리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 있는데 그것마저 하나님 경외하는 쪽을 바꿔주시는 진짜 지혜자의 작용, 그분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한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외를 달성할 때 우리는 너도 그러하고, 나도 그러하다면 너나 합쳐서 하나의 전체가 하나님의 집단적 아들이 된다 이 말이죠. 상당히 어렵지요. 문장이 길어졌잖아요.

그래서 이 잠언에 보면 뭘 허용하지 않느냐 하면, ‘나는 아들이다’를 허용하지 않아요. ‘우리는 아들이다’만 허용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들은 나는 아들이라는 것은 오직 한 분에게만 이미 허용이 되고, 그분은 왜 그렇게 허용되느냐 하면,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분을 모델로 삼아서, 그분을 중보자로 삼아서, 그분을 통해서 아들답게 전체 우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막이 그래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개입한다는 이 원칙을 하나님은 그 이후에도 우리한테 포기한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근데 우리는 예수 믿을 때는 ‘예수 믿습니다’ 해놓고 믿고 난 뒤에는 ‘이제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맨 날 지가 독자적으로 노선을 걸어버려요. 그건 뭐냐? 평소에 누구한테 잔소리 듣기 싫어서. 혼자 사는 버릇이 들어서. ‘예수님 고맙습니다. 이제 저 혼자 독립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지 마음대로 행동해요. 헌금할 때나 전도할 때나 예배 참석할 때나 자기 결정해요. 정말 부채도사보다 더 못해요. ‘오늘 교회 갈까, 말까? 간다.’ 이런 것도 없어.

정말 사정을 모르니까 그렇지만 목사입장에서 볼 때는 교인들이 교회 안 나오게 되면 바빠서 못 나오는 게 아니고 바쁜 일 생기라고 아예 기도를 하는 것 같아. 못 나오도록 핑계 댈 만한 그럴 듯한 게 그런 못된 심보가 있는 것처럼 목사들이 오해를 하지요. 그냥 오해입니다. 본인의 입장 바꾸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면서도. 왜냐하면 왜 목사한테 그렇게 보여주느냐 하면, 혼자 도 닦는 불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집단이 없으면 아들이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잠언에 근거해서.

너나가 모여야 지혜가 어떻게 구해줄지 본드가 연결시켜지잖아요. 혼자 있으면 혼자 도 닦는다고 바빠요. 그런 지혜는 없습니다. 누굴 만나야 내가 깨지잖아요. 이웃을 만나고, 종을 만나고, 아들을 만나고, 누굴 만나야 내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가를 들통이 나줘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죄를 용서하신 피가 묻힌 주님께서 지혜로 돌아다닐 때 그냥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피, 피, 피 묻은 채로 돌아다녀. 이러니까 피로 용서 받아요. 온통 피라.

제가 티브 거의 안 보는데. 보니까 어떤 영화가 있었느냐 하면, 초콜릿으로 만든 영화인데 이 사람이 어떤 나쁜 짓을 해서 범죄 저질렀어요. 초콜릿인지 사람들이 몰랐지요. 그냥 금장색, 은장색으로 번쩍번쩍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전부다 초콜릿으로 만들어서 집에 불나니까 초콜릿이 범벅이 되서 다 녹아내려 버렸어요.

이 우주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세워졌어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모든 게 천국에서 피로 이루어진다 게 어디 있느냐 하면,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7장 한번 봅시다. 7장 17절에 보면,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하수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이게 뭐냐 하면, 피라 하는 것은 죽은 거거든요. 생명이 끊어질 때 쏟아지는. 피가 났다는 것은 뭔가 생명이 끊어졌다, 생명이 파괴됐다는 그 흔적을 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날 때 얼마나 잘났느냐 이걸 묻는 게 아니고 점수 몇 점이냐 내신 성적 묻는 게 아니고 네가 죽을 인간이냐, 살 인간이냐? 단 그것밖에 안 물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룰 때는 죽음 안에서만 논의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이란 바탕을 떼버리고 ‘나 어때요’ 잘났어요. 그것만 내세우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자기 과시욕 그걸 없애기 위해서 밑에다 죽음 안에서 죽음의 논의를 집어넣어버려요. 피 위에서 ‘너는 어떤 존재냐’를 다시 보게 하죠.

우주전체가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살 인간이냐, 죽을 인간이냐를 결정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다 이루었다’ 하잖아요. 그리고 히브리서 보면 그걸 ‘언약의 피’라고 하죠. 모든 기준은 마지막 언약의 피로써 그 사람의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어린양의 피가 묻는 사람은 하늘나라 올라가서 종려나무 흔들면서 예수님 환영하고 있고, 그 피로 말미암아 옷이 하얗게 희어졌다고 했어요.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사람은 죄가 없어지고, 어린양의 피가 없는 사람은 죄 있는 그대로 자기 본성이죠.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은 뭐냐 하면, ‘제발 예수의 죽음에 빗대어서 나를 논하지 말라’ 이겁니다. 안 믿는 사람 하지만 사실은 말이 어폐가 있어요. 교회까지 포함시켜야 되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은 ‘제발 십자가 피, 그만해라. 많이 먹었다’ 이거에요. 그 이야기 많이 그만 하란 말이에요. 장동건이 그 말 했잖아요. ‘그만 해라. 많이 먹었다’ 안 합니까. 십자가 피 많이 들었다. 그만 해라. 이제는 십자가 피를 믿으니까 치워버려라. 십자가 피는 죽음의 우리 원천을 치워버리면 남는 건 뭐예요? 잘난 나만 남잖아요. 훌륭한 나, 가능성 있는 나 이거만 남잖아요. 계속 들이대야지. 우리의 기촌데.

잠언서에서 여러 가지 아내, 자식, 종, 왕, 모든 국가 모든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집단적인 이스라엘 속에서 왜 나는 독자적인 아들이 될 수 없고 집단적인 아들이어야 아들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이웃이 없이는 나의 본색은 나의 더러운 것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정말 교회도 안 나오고 집에 도 닦을 때는 도사 같은데 훌륭합니다. 하지만 교회 나와서 누구하고 별스럽지 않는 것,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 그런 게 있습니다만 커피를 왜 진하게 타느냐, 약하게 타느냐? 그것가지고 삐져서 오후예배 안 나오고. 하, 참.

그래서 집단적으로 구성하는데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이 집단적인 나의 개인적 아들 되지 말고 집단적 아들 돼야 되는데, 나 같은 못난 인간을 집단 아들로 삼아 줄 때 그 삼아 주시는 그분은 우리 속에서 어떤 모습을 띱니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갑니까? 그게 궁금합니다. 피를 질질 흘리는 것은 신약이고, 잠언서는 어떤 모습입니까?

구약에선 어떤 모습이냐면 바로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잠언서의 모티브, 핵심은 뭐냐? 크게 쓰겠습니다. 뭡니까? ‘가난’이죠. 이게 바로 오늘 주제, 오늘 교재 들어가는 거예요. 교재 들어가는데 두 시간 걸렸습니다. 이제 교재 들어가요. 가난입니다. 낮아짐입니다.

잠언에서 이야기하기를 인간의 모든 하나님을 왜 경외 못하는가? 하나님을 경외 못하는 이유는, 내가 가난할까봐.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굶어 죽을까봐.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고 예수고 뭐고 간에 내가 불안정하고 내 생계가 보장되지 않으면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나에게 가장 다급한 것은 내가 가장 두렵고 공포스런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 내가 가난한 자라는 것, 이 사실만큼 내가 쭈글스럽고 부끄럽고 내가 태어난 자체가 저주스런 게 없어요.

그런데 인간이 갖고 있는 지혜라는 것은 그냥 본성으로 담아두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거든요. 나오게 되면 내가 가난하게 되면 내 자식만큼은 안 가난하게 내 이웃한테는 기 안 죽게 내가 가난하니까 자존심 상하니까 이웃한테는 잘난 체하기, 왕들한테는 뽐내기, 내 아내한테는 스트레스 풀기. 지 가난하니까 술 먹고 아내한테 개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주위에 깔아놓은 것은 ‘내 가난하고 너 잘 되라’ 이건데 ‘내 죽을 게 너 살아라’ 이건데 막상 잠언서 지혜를 듣고 지켜서 복 받겠다는 인간들, 우리라는 인간은 그 안에 우리가 이기지 못하는 강한 본성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나는 가난하면 안 되고, 이유도 없이 무조건 나는 부자 돼야 돼. 부자 될 때 정서적 안정이 되고 마음에 평안을 얻게 돼요.

그러니까 신약성경의 진짜 하나님의 아들, 진짜 우리 속에 역사해서 우리를 아들답지도 않은 아들을 아들 되게 하시는 진짜 아들은, 가장 낮아지시고 우리가 가장 거부하고 우리가 되기 싫어하는 우리가 겁을 내는 가장 두려운 그 가난의 자리에 주저 없이 오셔서 그 가난한 자의 목소리로 우리를 자기 자리로 불러내는 겁니다.

몇 사람 갔게요? 정답, 몇 사람 갔느냐? 열두 사람, 칠십 명, 여자 둘이, 하나도 없다. 몇 번입니까? 하나도 없다. 하나도 없어야 됩니다. 왜? 하나도 없어야 우리 자력으로 아들 안 되기 때문에. 하나도 없어야 돼요. 그게 우리의 나만 몰랐던 나의 본성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 예수 안 믿어요.’ 이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박수~~~ 박수 한번 쳐야 돼요.

‘나, 예수 안 믿습니다.’ 그럼 니 누구 믿나? ‘나는 나 믿습니다.’ 뭐 때문에? 내가 가난하지 않은 것은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 내가 가난하지 않고 약간 여유라도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역시 믿을 놈은 나밖에 없지, 예수 믿다가 가난 되면 나는 내 자체가 인생실패로 보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가난 안 된다.

그게 타고난 본성입니다. 이 본성을 누가 줬느냐? 하나님이 주셨어요. 어디에서? 창세기 3장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도록 일하면서 얼마나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인간은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사람이 남이 주는 용돈 가지고 띵까띵까 살 때는 고상한 품위, 위신, 체면 다 차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회 나가서 일을 해보면 사람이 일을 하면 제일 자괴감, 뭔가 뭉개지는 느낌이 뭐냐 하면, 졸지에 치사하다는 거예요. ‘참 더러워 못 살겠네.’ 이것 아닙니까. 그리고 일하면 품위, 고상 그것 다 소용 없습니다. 다 버리고 더러운 땀 냄새에다가 서러움의 눈물을 피곤에 찌든 피곤스러워서 언 놈 걸리기만 해봐라. 짜증을 한 바가지 해서 집에 들어가서 ‘나, 왜 이리 사노?’ 하고 뒹굴다가 잡니다. 자고 아침에 또 기계처럼 일어나서 일하러 나가요. 품위가 무슨 품위가 있어요.

잘사는 남편 만나서 주로 의사겠죠. 의사 만나서 골프 홀인원 못했다고 짜증내면서, 이발 머리 잘 안 나왔다고. 하여튼 쇼핑, 그런데만 빠져있는 마나님들, 꿇어앉아서 이혼하지 말아달라고 빌기 전에. 꿇어앉아서 장미희처럼 발발 빌지 마시고, 안 봤는데 그냥. 콧대 높은 마나님, 니가 한번 일해보지. 나쁜 일이고 좋아요. 그런 게 없어요. 하여튼 일해 본다는 자체가 사람이 치사하고 아부덩어리고 남한테 굽실거려야 되고, 이것이 내가 용서가 안돼. 그런 내가 미워.

참, 목사 사모님들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냥 기도만 하고 고상한 폼이나 잡고 한복 입고 집에서 점잔빼면 부흥되는 줄 알았죠. 교인 하나 삼키기 위해서(‘삼킨다’는 말이 적당해요) 내 물주 만들기 위해서 온갖 김장 담아주고 칭찬 할 게 없어 온갖 것 다 끄집어서 칭찬해주고 아부해야 되는 그 치사함, 꼭 이래서 먹고 살아야 되나. 그래서 그 스트레스는 남편 된 목사 보고 풀지요. 거기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니 보고 사는 줄 아느냐 자식 보고 산다.’ 적어 볼까요? ‘난 자식 때문에 산다.’ 이거 하나님의 경외입니까?

잠언을 통해서 하나님은 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뭐냐?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이미 쫓겨난 신세에요. 쫓겨난 신세에서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마음을 먹는데 살아보려고 독한 마음을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더 여호와 경외와는 멀어져가요. 심지어 교회 와서 여호와 경외하겠다고 악을 쓰는 그 악도 사실은 여호와 좋아서 악 쓰는 게 아니고, ‘좀 살려 주이소. 경외해 줄게. 오 신이시여, 마음껏 경외해 줄게.’ 나 좀 살려달라고 아주 오기의 아예 독기를 품었어.

그걸 연세 많은 사람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교회 다니고, 젊은 사람들은 이미 알기 때문에 교회 안 나오고. 역시 돈이 최고야. 뭔가 모여야 집단 아들 되는데. ‘목사님, 저 바빠서 도 닦는데 소홀했는데 나중에 안정되면 도 닦을게요.’ 도 닦는 데가 아니에요, 교회는. 도 닦아서 아들 되겠다. 그건 불교라. 절에 가라에요. 잠언서 지켜서 아들 될게요. 그거는 도 닦는 데가 아니에요.

그거는 잠언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왜 내가 단독적으로 아들 될 수 없고,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우리 가운데 휘돌아 다녀야 되느냐 말이죠. 구석구석 내 직장, 내가 한풀이 하는 그 술자리에 내가 스트레스 푸는 아내하고 부부 싸움하는 그 자리에 왜 주님께서 나타나느냐? 어떻게 나타납니까? 낮아지시고, 낮아지시고. ‘내 아들아 싸우지 마라. 나도 살잖아. 하나님 아들이지만 나도 집 한 칸 없었다. 이런 안 살았나. 그래도 난 하나님 경외했다. 너는 왜 이러나.’ ‘네가 싸울 쨉이나 되나, 누굴 험담할 자격이 되나’ 이 말이죠.

그렇게 잠언을 달달 외우고 시편을 달달 외우는 그 바리새인에게 주님께서 이같이 한 마디 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에. 마태복음 7장 3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 산상설교가 지혜 아닙니까? 하나의 지혜란 말은 모든 이웃과의 관계에서 속에 활동성이 나오는 게 지혜거든요.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어서 활동성이 나오는데 이게 더럽게 나오는 거예요.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 경외와 관계없어요. 하나님 경외는 없어요, 우린. 오직 자기 경외밖에 없어요. 이게 더럽게 나온다고. 더럽게 나오는 건 좋은데 아예 더럽다 하면 구원받는데 ‘주여, 나는 창기입니다’ 하면 구원받는데 더럽게 나오면서 이게 안 더러운 척 하니까 들보 이야기 나올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 따로 계시고 하나님의 지혜 따로 있는데, 지가 아들인 척 하고 지가 지혜인 척 하니까 주님께서 그걸 지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는 간음 안 했다.’ ‘에라이, 니가 마음속에 품은 건 간음 아니가?’ ‘나는 최선을 다 했는데.’ ‘오른 손 잘라라. 오른 눈 빼라. 하나님은 완벽한 걸 원한다.’ ‘잘해 볼게요.’ ‘맹세 하지 마.’ ‘어쩌란 말입니까? 나는 열심히 살게 기도해야지.’ ‘먹을 것 입을 것 위해 기도하지 마. 그건 이방인이 하는 거야. 아들이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누가 먹을 것도 없는데 무슨 그 나라, 의입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배가 뭐 들어가야 간식이라도 들어가야 그 나라와 의를 구하지.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무슨 그 나라, 의를 들어갑니까?

그래서 지혜가 어떻게 발전하는가? 산상설교 끝나고 난 뒤에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거기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문둥병자가 나와요. 문둥병자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들 됐어요. 그가 산상설교 지켰습니까? 산상설교 끝에 뭐라 했던가요? 누구든지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진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무너진다’에 문둥병자도 포함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마치고 나, 간다 하고 하늘로 가버렸습니까? ‘너희끼리 잘해봐라.’ 그렇게 되면 지혜가 지혜 값을 못해요. 지혜는 우리는 높아질지언정 지혜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낮아진 그 자리에 와서 우리를 잡아당겨줘야 돼요. 당겨서 같이 죽고 같이 살아야 됩니다. 그게 로마서 6장에 보면,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 됐다”는 이야기, 그게 세례라. 연합해서. 주님과 함께 죽고 같이 살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아요.

왜 함께 죽느냐? 그 이유가 바로 산상설교에 있어야 돼요. 하나님은 모든 율법을 일점일획을 다 이루시는데, 이루시기 때문에 그 이루심의 차원에서 나를 늘 다루겠다. 결국은 남는 것은 뭐냐?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에요. 선과 악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이 뭔 뜻입니까? ‘불쌍히 봐주는 것.’ 많이 봐줬다, 니.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주시는” 그 본질, 오직 다른 사람 말고 아들에게만 그렇게 하시는 것을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전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은 모든 말씀, 완벽한 말씀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예요.

긍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겁니다. 불쌍히 여김이 있으면 아들인데 불쌍히 여겨서 ‘내가 너를 대신해서 저주 받을게’라고 흘린 대신 저주 받은 피가 있으면 두 번 다시 우리에게는 저주가 없고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저주가 없고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하기 전에 앞에 깔라놓는 게 있어야 되는데 이걸 미리 결론부터 해서 저주함이 없고 정죄함이 없습니다. 하니까 교인들이 ‘고맙습니다’ 하고 지 마음대로 살아버려. 주님하고 흥정한 것 같아. 앞에 뭔가 깔아놓고 한 건데.

성경에 두 가지 노선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율법 노선이 있고 지혜 노선이 이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노선이 두 개 있어요.

지혜 노선은 하나님의 아들 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된 요셉에게 계시를 내리듯이 하나님의 계시된 자에게만 지혜가 주어지고 일단 주어진 그 지혜대로 지혜안에는 지혜자 되시는 하나님의 기능이 들어있어서 요셉은 본의 아니게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껏 다 보여줘야 돼요. 그야말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나야 돼요. 자기 때문에 남들이 살고 복을 받고 자기는 복 못 받고 희한하죠. 자기는 점점 더 일이 꼬이고, 꼬이는데 주위 사람은 일이 너무너무 잘 되고. 억울해 미치지.

그런데 그 모습은 요셉이 의도한 게 아니고, 바로 장차오실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 간운데 일하심으로 아들 되시는 한 분을 모시는 집단적인 아들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 한 겁니다.

여기에 출애굽 이후에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져요. 율법이 주어지고 다시 지혜로 들어가 버립니다. 여기서 십자가인데 십자가는 율법과 지혜가 한 곳에 모여서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 이래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율법은 뭐고, 지혜는 뭐냐? 이래 돼야 되는데 율법이라 하는 것은 ‘제사법’ 중심이에요. 제사법은 뭐냐 하면, 내가 대신 죽을게. 속죄죠. 죄를 없애주는 것, 대속, 대신 죽는 것. 속죄, 대속이 포인트가 됩니다. 여기에 몰려야 돼요. 계속 양을 잡고, 소를 잡고 자꾸 잡아요. 피를 낸다고.

지혜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변에 깔려있는 이 세상의 모든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활동성을 하나하나 전부다 긍정하고 활동성을 받아내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다 받아내는 거예요. 모든 활동성을.

그래서 사람이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제사 드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의 지혜 속에 포함이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란 지혜, 그 다음에 아브라함 이후에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집니다.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나오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거는 그냥 지혜에 묻혀가는 겁니다.

자, 그렇게 돼보면 여기에 예수님께서 볼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오자마자 어린애가 기저귀 차고 죽는 게 아니에요. 구유에 태어나자마자 이래서 잡아봐라 하고 죽는 게 아니고, 인간이 하는 것을 낱낱이 지적해야 되죠. 모든 일어난 것이 하나님하고 상관없는 걸. 지적을 하는데 그냥 지적을 하는 게 아니고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서 종교분야, 제사분야 모든 분야에 다 스며들어서 그래서 그 속에 사람들이 그렇게 본인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그러면서도 뭔가 하기는 해야 되는데 여호와는 섬겨야 되는데 뭔가 발목을 잡고 있고. 이런 것을 낱낱이 다 아시죠.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질고와 고통을 다 아신다 하시잖아요. 뭐 때문에 슬퍼하고 무엇 때문에 한숨을 쉬는지 주께서는 다 아시니까 내가 모르는 게 아니고 아니까 나만 믿어라 이거에요. 그 이야기를 잠언 쪽에서 이야기하면, ‘너희가 지혜를 받아라. 그러면 너희가 생명을 받으리라’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래서 잠언서 1장부터 5장까지 쭉 보면서 나를 믿어라, 나를 쫓아라, 명철을 얻어라 이렇게 쭉 하면서 막상 제일 궁금한 것, 뭘 어떻게 할까요? 그건 안 나와요. 잠언서 초반에. 마치 술 잡숫고 온 아버지가 아들에게 잔소리하는 것 같습니다. ‘너, 내 말 들어.’ ‘예.’ ‘똑바로 들으란 말이야.’ ‘예.’ ‘잘 들어야 돼.’ ‘예.’ ‘아버지는 너를 생각해서 하는데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예.’ ‘내 시킨 대로 해야 돼.’ ‘예. 그럼 뭘 시켰는데?’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야기 안 해줘. 하여튼 내 시킨 대로 하지?’ ‘예.’ ‘뭘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아들다워야 돼.’ ‘예. 아들다운 게 뭘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처음에 잠언서 첫 부분에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 훈계를 들으라’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아들다워야 하는데 너는 지혜가 없고 너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그 사정을 내가 안다는 거예요. 아는데 막상 본론에서 지혜가 뭐냐고 들어가면 바로 교재에 ‘가난’에 대해서 시작합니다. 자, 교재 한번 봅시다. 나도 너무 잔소리 많이 했다. 본론에 안 들어가고.

가난에 들어가기 전에 잠언서에 나오는 재물에 대해서 여러분 듣기만 하세요. 잠언서 11장 4절에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한다.” 재물은 진노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잠언서 11장 28절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 그 다음 잠언 23장 4절에 보면, “부자 되기를 애쓰지 말고” 부자 되기를 애쓰지 말래요.

그럼 사는 보람이 뭐가 있어요. 생물에게는 보존하는 본성이 있거든요. 생존본성이죠. 그 생존본성이 유지되기 위해서 재물을 모아놔야 그만큼 든든한데 재물이 인생의 목표인데 부자 되기를 애쓰지 말면 죽으란 말입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뭐냐 하면, 난감~하죠. 진짜 대략 난감처럼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그는 창고도 없지만 주께서 기르시지 않느냐?” 그걸 듣고 있는 인간은 이렇게 대꾸하죠. ‘참새야 날개나 있지 날개가 없잖아.’ 주님께서 참새 이야기한 것은 ‘친히 기르시나니’ 여기에 포인트를 두고 줄 그어놓고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 너희일까 보냐. 너희를 기르신다는 이 말인데 계속 인간은 참새 이야기하고, 들풀 이야기해도 인간은 뭐라 하느냐? ‘나는 내 힘으로 내가 살아야 믿을 만 하다’ 그것만 고수하는 거예요. ‘기르시나니’를 인정 안 해요. 못 믿겠다는 거예요.

왜 못 믿느냐? 믿을만해야 믿지. 몇 번 시도도 해보거든요. 보통 교인들이 교회 올 때 십일조 하거든요. 그게 주님을 시험하는 건데. 진짜 십일조 내서 복 받는가 해보는데, 머리 좋은 사람은 세 번만 하고 안 하죠. 왜? 안 된다는 걸 아니까. 돈만 날린다는 것. 애들 피아노 값도 없는데 그걸 왜 내요. 그래도 하는 사람은 직분 때문에 목사라는 것 때문에. 평신도 되면 대번 안 할 사람이에요.

친히 기르신다는 것이 안 알아듣는데 아무리 십일조 하고 뭐고 시험해 봐도 그거 안 통합니다. 친히 기르신다는 못 믿어지는 거예요. 왜 친히 기르심이 안 믿어지는가? 본인이 안 가난해서 그래요. ‘목사님,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저 가난합니다.’ 죽기까지 가난합니까? 그건 아니지요. 주님처럼 낮아보세요. 진짜 주님처럼 낮아지면 스데반처럼 돌에 맞으면 진짜 사는 게 비행당하죠. 주님께서 그것까지 더 내려야 돼. 엘리베이터처럼 더 내려야 돼요.

내려서 그야말로 ‘아, 진짜 내가 사는데 내 힘으로 안 사는구나.’ 깨닫는 순간은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느끼는 순간 그야말로 난 참새에 불과하다는 것, 지금까지 내가 자식 키우고 이런 것이 다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걸 아는 것, 그럴 때 그것이 바로 주께서 원하는 지혜의 완성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일하는구나.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아들 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구나’를 느끼게 된다 이 말이죠.

제가 청도에 무슨 교회입니까? 갑북교회에서 요한계시록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지요. 죽도록 충성하란 말을 우리가 지키기가 힘들다는 것. 왜냐하면 나름대로 죽도록 충성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죽도록 충성한 건 아니에요. 왜? 안 죽었으니까. 아직 살아서 입을 나불나불하니까. 진짜 죽도록 충성하려면 죽어야 돼요. 그러니까 그 말씀을 못 지킵니다. 아직 살아있는 이상 ‘죽도록’은 아니에요. 죽을 지경이지만 죽도록은 아니란 말이에요. 죽을 지경하고 죽는 것하고 달라요. 천지차이입니다.

잠언서 27장 24절에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잠언서 28장 22절에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죠.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 급급한다.” 펀드매니저는 다 나와. 상하이 펀드고 뭐고 펀드매니저 직업 바꿔야 돼요. ‘목사님, 술집 하는데 신자가 술집해도 되겠습니까?’ 그것만 질문하지 말고, ‘목사님, 펀드매니저인데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이래 돼야 돼요. 앞으론 잠언서를 알았으니까. 잠언서 28장 22절 알아서 ‘내가 지금 펀드매니저인데 금융계에 있는데 꼭 이거 다녀야 되겠습니까?’ 질문 그래 해야 돼요. 아무도 안 합니다.

돈의 문제 아니고 자존심 문제거든요. 사회에서 어떻게 날 인식하느냐? 사회구조의 문제지 성경에 비춰서 살지 않아요. 사회구조에서 존경하면 성경적 아니라도 버팁니다. 인간은 사회가 만들어주는 그러한 위선과 감정을 곱게 지니고 살아갑니다. 사회가 만들어준 사회가 입혀준 옷이 좋아요. 사회가 인정해준다는 것, 남에게 인정받는다는 것, 그것이 남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오는 본성이에요. 자기 사랑이에요.

그런 자기 사랑을 가지고 잠언을 대한다? 나오는 것은 자기한테 구속되는 자기 자랑밖에 되지 않는 그걸로 끝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 잠언서를 사람들이 고를 때 방금 읽었던 것은 안 고르고, 뭘 하느냐 하면, 바로 ‘뭐 하면 부자 된다’ 하는 부자 된다는 게 쭉 나오죠.

잠언서 10장 15절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 ‘거 봐라. 하나님께서 복 줘서 견고하게 하잖아. 역시 부자 돼야 돼.’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11:16) 야, 완전히 토정비결, 유월달이라. 칠월달에 귀인이 와서 재물을 얻는데 운세가 재물을 얻을것이다.

그 다음에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다”(14:24) “부자의 재물은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리라”(18:11) ‘역시 부자 되고 볼 일이야.’ 든든한 성벽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생계에 안정이 되겠습니까?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22:4) ‘야, 겸손하게 여호와를 섬기니까 부자 된다’ 이 말입니다. 사람을 아예 유혹을 만들어, 이 잠언이. 심방용이라. 대심방용이라. 멋져! 잠언 들고 대심방 다 끝내버려요. 골라잡아서.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3:16) 대심방 첫째 시간부터 해서 계속 되풀이 “네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어떻게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면. 보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면 우에 된다는 말이 조건이 뭡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조건하면 뒤에 이런 결과가 생긴다는 것. 사람들은 내가 그 결과를 탐하고 결과를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지, 앞에 있는 여호와를 경외는 완전히 이거는 수단이요 도구에 불과한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그렇게 본다는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안목에서 뭘 보느냐 하면, 교회의 가난한 자를 보는 거예요. 저 인간은 저주 받아도 싸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가난한 중에 누가 들어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죠.

인간의 가치를 측정할 때 이거 좀 어렵지만 어려운 거 해야 되겠어요. 중요한 거니까. 사람은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란 격자망, 어떤 망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사회란 격자망 여기는 순서가 정해져 있어요. 인간의 의미와 가치의 순서가 정해져있습니다. 서울법대 출신들, 이렇게 위 순이죠. 사법고시, 의사들 또는 수능 점수순서입니다. 밑바닥엔 목사들 가는 신학교. 순서가 있다고.

이 격자망이 어릴 때부터 우리를 뒤집어씌웁니다. 어릴 때는 누가 씌우느냐? 부모가 씌워요. 순서는 학교에서 세웁니다. ‘오 분 더 공부하는 남편이 달라진다.’ 이런 것. 학교에서 뒤집어씌워버려요. 학교 씌우고 다음에 뭐냐? 교회에서 뒤집어씌워버려. 이 격자망이 우리의 심성에 모든 사고방식을 결정해버려요.

이 결정한 상태에서 여기에 뭐가 들어오느냐? 잠언이 들어오니까 자기의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정당화되고 말아요. ‘그렇지. 나는 이 정도 벌었으니까 이만큼 복 받을 만해서 벌었지.’ 이렇게 돼버린단 말이죠. 그래서 이 잠언에 보면 뭐냐 하면, 가난과 부를 나누면서 ‘가난’을 보는 관점과 ‘가난한 자’를 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되고, ‘부’를 보는 것과 ‘부한 자’를 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된다는 겁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가난한 자가 된 거예요. ‘가난’은 나쁜 거지만 ‘가난한 자’는 나쁜 자가 아니에요.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을 온 몸으로 짊어지고 가는 그런 메시아적인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내가 혈기내서 말로 할 것이 아니고 교재 있으니까 잠도 슬슬 오고 눈 감은 분도 몇 분 계시는데 봐야 돼요.

[본론] 2페이지에. [가난에서 멀리 벗어나고자하는 인간의 본성을 겨냥한 하나님이 내리시는 중압감]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 하느니라”(15:15) 여기 중간에 앞에 생략하고, [이 세상은 너나 할 것 없이 궁핍한 사정을 겁낸다.] 두려운 거예요. [세상 자체가 가난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교회 가고 예수 믿는 것은 가난을 피하기 위해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이 네 힘으로 안 되는 것을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교회 나옵니다.

‘나오지 마라’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본성이 그러니까. ‘교회 나오지 마라’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나오지 마라’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교회 안 가면 절에 가기 때문에.

따라서 이 주의 특징은 뭐냐? 생생하게 현실을 여과 없이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 가난하게 오셔서 하는 말이, ‘무섭지.’ ‘예.’ ‘사는 게 힘들지.’ ‘힘듭니다.’ ‘내 생명 줄게.’ 이게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부한 자들은 가난하면 안 돼요. ‘가난한 자’가 돼야 됩니다. 참, 좋은 말 늘 나오는 게 아닙니다. 부한 자들은 제발 가난하면 안 되고, 집 팔아서 교회 바치지 말고, 바칠 사람도 없지만 우리 십자가마을엔 그런 사람도 없지만, ‘가난한 자’로 살아야 돼요.

제가 했지요. 요셉이 총무대신 되더라도 모양은 어떤 상태다? 옥에 갇힌 상태 돼야 된다고요. 그럴 때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형들이여,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형들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날 이용했다. 그러니 두려워마세요.’ 그게 창50장에 나옵니다. ‘형들이여,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을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저도 이용당 한 것 밖에 없어요.’

이 말은 뭐냐? 다른 말로 할게요. ‘부한 자들이여, 가난한 자가 되라.’ 이 말은 가난한 자들아, 가난하지 말고 그냥 가난한 자 되세요. 사람이 가난하게 되면 자꾸 부자가 되려고 해요. 근데 성경에 보면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누가 지었다? 여호와께서 지었다. 하나님이 개입한 거예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소말리아의 중간층이 추리닝 입고 돌아다닙니다. 한국의 못 사는 것이 소말리아에 가면 중산층입니다. 동대구역 앞에 나가면 꼭 이런 단체가 있어요. 천 원만 있으면 아프리카 아이들 한 달 양식입니다. 도와주세요.

가난한 자를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지었기 때문에 원망하지 마시고, 가난 자체를 정당화 하지 마세요. 왜? 성경은, 가난은 나쁜 거니까.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여, 그 나쁜 것이 나한테 주어졌거든 나는 그렇게 가난해도 싸다’ 그런 정신을 가지시고 주무시기 바랍니다.

시간 좀 넘었지만 좀 더 하고 싶은데. 아, 미치겠다. 참아야 되나. 가난에는 여러 가지 게으름과 뒤에 방탕과 이런 것이 도박한다고 다 날리고, 나옵니다. 특히 게으른 것, 게을러빠진 것 이거 가난의 원수입니다. 성실과 배려하는 것 이게 없으면 가난하게 돼있어요, 사람이. 그거는 좀더 읽어보시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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