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2강
(강의:이근호 목사)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예수님께서 지혜롭다 하는 사람은 공금 횡령하는 그 인간이 지혜로울 정도 같으면 나머지 모든 인간은 그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영 성이 안 차지요. 자기 딴엔 하나님 말씀 지킨다고 잠언서대로 성경대로 산다 하지만 그 장부 조작한 그 인간도 지혜로우면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 하신 말씀이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 간다’ 했습니다. 이 악하고 어두운 세대에서 전부다 어둡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제가 좀 낫지요’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가 잠언을 통해서 왜 성경 중에서 잠언에서 잠언대로 말씀대로 살면 복을 주겠다. 그렇게 신신당부 했건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보시기에는 왜 모든 인간이 죄인밖에 없으며 의인은 없느냐? 그만큼 말씀을 잘 지켰으면 점수라도 줘야 될 텐데 기본 점수조차 성립이 안 되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걸 이번 시간에 알아봅시다.
이 잠언서를 딱 대하게 될 때 사람들은 누굴 모델로 삼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모델로 삼아요. 자, 여기 잠언이 있습니다. 성경이 있습니다. 성경이 있고 여기 우리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실 때 우리는 무엇을 모델로 삼느냐 하면, 성경이 오기 전 이걸 A라 하고, 성경이 지키고 난 뒤에 번쩍번쩍 광이 나는 ‘아우라’라 하지요. 후광이 있는 이런 B란 상태, 나는 성경을 모르기 전까지는 A라는 상태였는데 성경을 알고부터는 B라는 상태로 새 사람 되었다. 인간 되었다. 그래서 내가 된 B란 상태, 우수한 상태가 된 이것을 나의 모델로 한 이걸 모델이죠. 모델로 삼는 거예요, 이걸.
그러니까 여기서는 말씀과 나, 나와 말씀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신이시여, 말씀 주옵소서. 종이 순종하겠나이다.’ 쉐마. ‘종이 듣겠나이다.’ 끝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 계시니 말씀하시고 우린 듣고. 그러면 ‘우수한 나, 진보된 나’가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이것이 정답인 줄 알았는데 막상 잠언에 들어가게 되면 제삼자의 모델이 등장해요.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지혜를 알아라. 그러면 너희는 참다운 인간이 된다.’ 이렇게 이쪽 노선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잠언서 자체에서 뭐냐 하면, 모델이 따로 있어요. 지혜가 이야기한 지혜자가 따로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가 돼버려요?
제가 이리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게 되면, 1장 20절을 봅시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 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이래 나온다 말이에요.
‘당신 누구요?’ ‘나, 지혜요.’ ‘왜 당신이 등장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그 당사자, 내가 지켜서 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이걸 로서 완결되는데 왜 지혜라는 작자가 등장해서 이 지혜 이야기하는 지혜하고, 지혜를 지키려는 나하고 여기서 경쟁관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관계에 들어가 버려요. 어려울 줄 알았어.
지혜가 말하는 지혜라는 분, 인격자라 하지요. 어떤 아저씨, 어떤 분이 들어와요. 지혜를 받아서 훌륭한 사람 되려는 나, 이 지혜라는 분의 지혜와 나하고 누가, 누가 지혜를 제대로 지키는가? 경쟁관계에 돌입한 겁니다.
그러면 경쟁관계라 하면, 그럼 좋다. 서로 협력하면 되지 않느냐? 협력의 문제가 아니에요. 협력하면 내가 말을 안 하지요. 협력이 아니라 1장 23절에 보면,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경쟁관계가 아니고 진짜 모델 되는 그 지혜자에 비해서 기껏 우리들이 하나님의 잠언대로 살아서 하나님에 영광 돌리겠다고 나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자한테 어떤 대상이 되느냐 하면, 책망 받아도 싼, 책망 받아야 마땅한 그런 존재로써 부각이 되는 겁니다.
잠언서 12장 1절에 보면, 잠언서는 많이 찾아야 돼요. 찾아야 남는 건 이거 하나 남아요. 나중에 수련회 끝나면. 성경 많이 찾는 이것 하나 남는데, 12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 이 짐승? 징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짐승과 같다? 징계를 좋아하는 사람 누군데? 징계 좋아하는 사람 나와 봐라. 없잖아요. 징계를 안 좋아하는 이유 때문에 ‘최 짐승’, ‘박 짐승’, ‘이 짐승’ 짐승이라.
‘나보고 짐승이라 할 수 있는 니는 뭐요?’ ‘나는 지혜의 자체거든.’ 지혜 자체로 왔으면 우리보고 지혜대로 살지 말든지. 우리보고 지혜보고 살라고 하면 당신은 좀 빠져주든지 이래야 지혜 지킬 맛이 나는데, 우리보고 지혜 지키라고 해놓고 온전한 지혜는 등장해서 책망이나 해대고 그런다 이 말이죠.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잠언서를 보고, ‘잠언서를 읽어보니 소감이 어떻습니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잔소리 되게 심하네. 세상에 마누라 잔소리까지 듣기 싫어하는데 성경의 잔소리 들으라 하니까 잔소리 되게 싫어. 잔소리 얼마나 심한지 책이 한 권이라. 잠언서 31장의 잔소리. 처음부터 잔소리, 끝까지 잔소리에요.
여러분, 잔소리하고 생명하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생명’은 본성이지만 잔소리를 들을 때 그뿐이에요. 나의 본성이 아니고 하는 흉내 내는 시늉이나 내고, 안 보면 딴 짓하는 거예요. 자기의 생명의 본성 같으면 자기 안에 지혜가 발동하기 때문에 사람 의식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본성이 등장하는데. 잔소리라 하는 것은 꼭 눈치 보는 거예요.
그런 예가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비유’라는 게 나오지요. 달란트비유에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 있는데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말을 자기 생명으로 받은 사람이지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잔소리로 듣는 거예요. ‘안 보이기만 해봐라.’ 주인이 없으니 지 마음대로 놀잖아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목사님이 무슨 설교해도 이젠 잔소리라. 잔소리가 안 드니까 목사가 협박을 해요. 협박도 처음에는 먹힙니다. 근데 협박도 두세 번 하면 그것도 잔소리라. 약을 쓸 때 자꾸 쓰면 이게 면역성이 생겨서 나중에 효과가 없어요. 그래서 잠언서를 사람들이 안 보는 이유가 그렇지 않아도 잔소리 듣기 싫어 하는데 사서 잔소리 들을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뭐 해라. 뭐 해줄게. 뭐 하면 어리석은 자라. 우리는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아이 참. 너무 세다. 너무 심하다. 알았습니다, 그만. 내 알아들었다 안 합니까? 최선을 다 할게요.’ 이러고 마는 거예요. 본성화 되지 않고 흉내 왔다가 그냥 가버려요. 에프킬라처럼 뿌릴 때는 모기 갔지만 뿌리고 난 뒤에 오 분도 안 되서 모기 왱~ 하지요. 아무 효과 없어요.
지혜를 만약에 내가 지킨다면 그때 인간은 왜 참된 지혜한테 욕을 얻어먹고 책망을 받아야 되느냐 하면, 건성으로 지혜를 인간은 받아들이게 돼있습니다. ‘건성’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지혜가 우리에게 오게 되면 평소에 어떠한 나쁜 욕심을 내고 있었는가가 지혜를 지키려고 애쓰는 가운데서 발각이 돼요.
그 하나의 예가 잠언서 마지막에 보면 나옵니다. 잠언서 마지막에 뭐가 적혔느냐 그 정도는 알아야 된다 아닙니까? 세미나 하고 이러는데. 잠언 마지막에 30절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29절에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다시 한번 읽습니다. 내가 다시 읽을 때는 중요하기 때문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여기에서 뭐하고 비교했느냐 하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를 좋아할 여자 있으면 나와 봐라 그래요.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지혜를 A라는 모델에서 B라는 모델로 갈 때에 사람이 본인이 무엇을 끌고 가겠어요? 지금 나는 하나님 말씀을 몰랐는데 하나님 말씀을 지켰다. 따라서 보너스를 받아서,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아서 내가 A라는 지점에서 예상하고 기대했던 B가 되기를 원하는 거죠. 그러면 A라는 지점에서 여기서 뭔가 내가 고대하던 것이 확대되어서 B가 된다고요.
여기서 만약에 인물이 좀 못 낫다. 남한테 못 생겼다. 이러면 하나님 말씀 듣고 뭘 기대하겠어요? ‘전에는 네가 못난 인간인데 이제는 곱고 잘났다.’ 이걸 기대하지 아니하면 성경을 뭐하러 지킵니까? 내 속에 있는 욕망을 달성할 게 없다면 뭣 때문에 성경을 지키겠어요. 다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 나오는 것도 누구 때문에 나와요? 자기 교회 나오는 당사자 좋으라고 교회 나오는 것 아닙니까? ‘좋다’는 개념이 뭐예요? 내가 교회 나오기 전과 하나님 말씀 지키기 전과 후가 뭔가 내가 좋아하는 내가 돼야 되거든. 내가 평소에 남이 좋아하는 것 말고 내가 좋아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말씀을 지켰는데, 잠언서 마지막에 보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고운 것, 아름다운 것 나 그거 이제 포기했다’라는 식으로 인간이 결론에 도달하겠습니까?
‘목사님, 도달한 사람 있습니다. 자꾸 부정적으로 보지 마세요’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A라는 지점이 아니고, A가 생각했던 그런 사람 있다면, A가 생각했던 B가 아니라 A라 생각했는데 C가 난데없이 중간에 끼어들었을 경우에만 그렇다 이 말이에요. 이 C는 어디서 나왔어요? 이 C는 바로 C에서 책망 받고 나온 거 아닙니까? 그러면 중간 중간 누구한테 책망 받아야 돼요? 중간 중간에 C한테 책망을 받아야 나는 B를 원했는데 C가 되었더라. C가 뭔데?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이게 잔소리가 아니라 진짜 내 본성으로 고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다 헛되더라.
연세 팔십 넘은 그런 소리 이야기하면 이해합니다만 이제 열일곱 살, 열여덟 살 먹은 처자가(처자는 나훈아가 썼는데) 만약 이 성경을 보고 ‘목사님, 나는 아름답고 고운 것 되기를 원했는데 그래서 나만 보기만 하면 휙휙 남자들이 넘어가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흥’하고 콧방귀만 해도 여기서 엄마야, 저기서 하고. 눈부셔서 보지를 못하겠다. 허리를 효리 허리고.’ 이래 돼야 되는데 이거는 잠언서 띠고 난 뒤에는 ‘엄마, 밥 줘.’ ‘왜?’ ‘뚱뚱해도 아무 상관없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뭔가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거는 스스로 자력으로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누구한테 심하게 책망을 받아야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책망을 받더라도 잔소리로 책망을 받는 것이 아니고, 뭔가 본성상 완전히 달라지는 책망을 받아야 되는 거죠.
그게 뭐냐? 1장 23절에 “내가 나의 신을” 운동화 그런 신이 아닙니다. 성신이죠.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준다 할 때에 여기에 부어주는 신이 누구 신이냐 하면, 바로 ‘나의 신’, ‘나’라 하는 것은 여기 있는 인간의 나가 아니라 지혜가 지혜자 되신 그 나, 지혜 덩어리 되신 나, 완벽한 나 그분의 신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우리 딴에 지킨다고 지키지만 우리 딴에 지키는 모든 것은 책망, 책망, 책망을 연속적으로 쉬지 않고 받아야 될 그러한 우리의 행함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잠언 8장을 봅시다. 8장 1절에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열심히 길을 가고 있는데 꼰대처럼 지혜가 불러. ‘너, 이리와, 이리와.’ ‘뭔데요? 저, 왜 부르는데요?’ ‘이 어리석은 놈아! 너, 징계 받고 싶어?’ ‘받고 싶지 않은데요. 징계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 짐승 같은 인간 이리와.’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참 골치 아프지요. 지혜가 턱하니 성문에 앉아서 길 가는 사람 오래. ‘와서 니 나한테 책망 받아야 돼.’ ‘당신 누구요? 누군데 나한테 함부로 책망하려고 하느냐?’ 말이죠. ‘나도 자존심 있는데 뭐요, 당신? 당신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당신 뭐요?’
잠언 8장 22절에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독보적인 존재라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하고 다르다’는 거예요. ‘내가 같이 길거리에 있으니까 너하고 나하고 맞먹으려고 하는데, 나는 하나님이 태초에 나를 처음 가졌으며.’ 가진 이유가 뭐냐? 나를 모델로 삼기 위해서 가졌다는 거예요. 나를 창조의 모델로 삼기 위해서 가졌다는 겁니다. 모델 없는 창조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생겨먹었다고 인간인 줄 알지. 니가 인간인 줄 알지. 네가 모델과 비교해봐. 내가 참된 인간이고 너 인간 짐승이야.’
불교에선 도를 닦지만 기독교는 도를 닦는 놈이 나쁜 놈이에요. 도를 닦는다는 것은 A에서 B로 가려 하는 거예요. 도 닦기 전에 자기의 어떤 목표지점이 있고 그 목표지점 A와 B 사이에 오직 불가능성이 아니고 가능성으로 밀어붙이려 하는 그러한 B가 되어봤자 그 사람은 B 되면 만족할 줄 압니까? B 되면 B′ B″ 또 있어요. 무한으로 나가요. 계속 나가요.
그런데 계속 나가서 이 노선이 누구 노선이야 하면, 주인공이 밑바닥에 자기 그림자만 계속 왔다갔다해요. A가 되든 B가 되든 B′, B″가 되던 전부다 자기 그림자에요. 제삼자의 그림자가 없어요. 여러분 밑에 한번 보세요. 지금 누구 그림자인가? 여러분 자신의 그림자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고, 만약에 옆 사람의 그림자가 있다면 여러분 귀신입니다. 우야꼬? 귀신이에요, 귀신. ‘당신 그림자가 왜 내 그림자가 되었어.’ 귀신이에요.
예수님의 그림자가 여러분 바탕이 되는가? 여러분 불가능하지요. 신약성경에 성신을 받아야 돼요. 그게 가능이 돼요. 새로운 피조물이 인간이 얼굴 바뀐다고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밑에 그림자가 여러분을 받쳐주는 그 기초가, 루트가 여러분의 기초가 아니고, 예수님이 여러분을 받쳐주는 거예요. 그걸 ‘그리스도 안’이라 하지요.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죠.
사람들은 하죠. 그 말은 허무맹랑한 말이죠. 이게 허무맹랑한 말인 것을 누가 그렇게 자초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 안 되고 주님께서 받쳐줘야 진짜 구원받는다는 이것을 누가 자초했어요? 그 자초한 것이 구약성경 전체 역사라. 인간의 모든 도리와 종교적인 모든 역량을 동원해봤는데 결국 그들이 한 짓은 ‘반 지혜’ 반 지하 말고, 반대한다. 지혜를 반대하고, 지혜를 죽이고, 지혜를 욕하고, 지혜를 배척하는 그러한 인간의 아담적인 본성만 마음껏 발휘될 수밖에 없었어요. 왜 우리가 가능한데 자꾸 예수 당신은 불가능을 주장하느냐?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자기들 불가능성을 이해 못하고 베드로란 사람이 말하기를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유명한 말 아닙니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어디로 간다는 걸 이야기해봤자 베드론 몰라요. 중요한 것은 지금 떠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은 떠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지금 나는 너희가 갈 수 없는 너를 떠날 수밖에 없는 그런 세계에 가고, 너는 죽어도 못 따라오는 그런 세계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A에서 B 길은 이거는 베드로 노선이라는 거예요. 베드로 노선과 C란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덜어내는 그 대화를 하시는 겁니다. ‘너는 죽어도 내 곁에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가서 처소를 마련하마. ‘내 다시 올게.’ 아직 십자가 지기 전입니다. 그 이야기가. 갈 때 그냥 가는 줄 알았더니만 그냥 하늘로 구름 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속에 달려서 죽음 속으로 기어가는(기어가시면 안 되지만) 들어가시는 그것이 바로 사람이 못 따라올 수밖에 없는 이유였어요.
근데 베드로는 그냥 현상을 보고 죽음으로 가는구나. 나도 죽으면 되지. 주님이 가시는 죽음의 길과 베드로 지가 가는 죽음의 길이 이 노선이 달라요. 천만 번 죽었다 태어나도 우리는 육이고 육이에요. 영의 세계는 오직 주님만 가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언서 8장 이뤄야 되기 때문에, 성취해야 되기 때문에. 잠언서 8장에 보면, 주님만 예수님만이 창세전의 모델이 돼야 돼요. 그분의 모델에 의해서 제2의 예수, 제3의 예수가 거기서 생산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가지고 예수 천당 보내달라고 하면 안 넣어줘요. 우릴 아예 죽여 버려야 돼요. 이근호를 죽이고 예수님의 사람으로 태어나야지, 나의 이근호 사람으로서 이근호가 태어나면 그거는 지옥 갑니다. 그걸 쉽게 말해서 다른 이름으로는 못 간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내가 흰 돌에 이름을 새기는데 그 이름은 바로 내가 새로 새겨준 이름이다.’ 이거는 너의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 예수의 이름을 돌에 새겨서 예수의 이름이란 자격으로 구원받습니다.
천주교는 이것도 모르고 영세 받을 때 이름 바꾸면 되고 하는데, 박종국이 같으면 베드로바오로인데 베드로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베드로나 박종국이나 똑같은 인간인데 그래 바꿔도 소용없어요. 왜? 옆에서 옆자리 가도 소용없어요. 똑같은 인간인데. 둘 다 시험 백 점 내고 있는데 옆에서 봤다고 둘 다 백 점 되고. 뭘 컨닝해요. 컨닝할 게 있어야지. 모델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모델 있어요. 까불다가 얻어맞는 모델, 그런 모델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
8장 24절 봅시다.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서 천지창조가 이뤄졌다 이 말입니다. 그 중에 사람이 포함돼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지혜의 말을 들어야 된다. 왜냐하면 지혜라 하는 것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지혜라 하는 것은 인간 속에는 없고, 지혜는 바로 지혜에서만 오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지혜가 쏟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35절에 보면,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도 어려워요. 왜냐하면 여기 보면, “나를 사랑하라” 이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 중에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누굴 사랑해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게 돼있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에게 손을 대도 그 손대는 손은 내 손이에요. 아무리 ‘사랑한다’ 천 번을 이야기해도 자기를 벗어나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다고 우기는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네가 사랑하는 재산 팔고 나를 따라오라 할 때 근심해서 돌아갔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함을 탈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가 남긴 업적을 사랑하는 거예요. 자기 행위는 하나의 계속 어떤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은 남의 작품이 아니고, 자기 작품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믿음도 예수 믿는 믿음을 내가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아무리 누굴 사랑하고 싶어도 내 사랑을 떠나서 내 사랑을 버리고 그 사람 사랑하는 그러한 재주는 죄송합니다.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약을 올리는 거예요. 지혜를 가지고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약을 올립니다. 그림의 떡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기껏 말하기를 ‘최선만 다할게요.’ 최선을 다한다는 게 뭐냐 하면, 지가 지킬 만한 것을 골라잡겠다는 거예요.
성경 골라잡을 게 없습니다. 여러분, 문어가 다리가 여섯 개입니까, 여덟 개입니까? 대충 여덟 개라 하고, 문어다리 여덟 개 중에서 ‘어이, 문어야. 니 다리 많네. 한 개 내가 밟을란다.’ 문어다리 여덟 개 밟아도 한 개를 밟아봤자 맨 몸통 밟은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지혜에서 나온 모든 말씀을 하나를 무시하면 그 말씀을 주신 분을 무시하게 돼요. 사람이 온 율법을 지키다 하나를 어기면 전부 어긴 이유가 그 율법이 전부다 한 몸통을 이루기 때문에. 어느 것 따로 떼어서 이건 따로고 그런 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기게 되는 거예요.
음식에 독을 풀어 넣을 때 국물에다 독을 풀 때 ‘니, 왜 국물에 독을 풀었나?’ ‘난 한 쪽만 풀었는데.’ 한 쪽만 풀었든 전부다 다 퍼진 기라. 태양은 하나지만 그 태양이 천지를 다 비추잖아요. 그처럼 위대한 영도자 우리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비춰버리면 예수님의 흔적이 아닌 것이 없다 이 말이죠. 도 아니면 모에요. 다 지키든지 다 어기든지 그렇게 해야 된다고.
그래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지혜에서 나오는 지혜가 이 잠언서에 따로 나와 있고, 그 다음에 우리보고 지키라는 지혜,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지혜가 있지요. 이 둘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면서 책망을 받아야 되고, 징계를 싫어하지 말고 징계를 받아야 된다. 어떤 상태가 되느냐 하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는 그런 수준에 도달되도록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의 여성으로써 여성이라는 게 원래 뭐냐 하면, 원래 출신본성이 여성이라 하는 것은 남성을 의식해서만 태어나는 게 여성이에요. 남성 없는 여성은 없다. 창조에. 따라서 여성은 뭐냐 하면, 항상 남성과 비교해 볼 때 아름다워야 되고 고와야 돼요.
우리 젊은 저는 젊은지 구분 안 합니다만 특히 젊은 사람들 볼 때 약간의 좀 민망하고 웃기는 이야기가 연세 팔십 된 할머니가 립스틱을 짙게 바를 때 그 립스틱하고 립스틱이 발린 주위의 피부조직하고 어울립니까? 피부가 고울 때 피부가 예쁠 때 그때 화장을 해야 먹어주는데 이거는 화장품이 화를 내. 진짜 내 가치 떨어진다 말이죠. 굳은살에다 립스틱 바르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래도 여자이기에 립스틱을 짙게 발라서 단체 에어로빅 하는 것 보면 노인학교에서 유니폼 해서 사교댄스 하는데 파트너 남자 없어서 여자들끼리 남자 없이 사교댄스 하는 것 보면 흉해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고. 정말 이것이 마지못해가 아니라 ‘진짜 헛됩니다.’ 이래야 될 건데 마지못해 ‘헛됩니다, 헛됩니다’ 하니까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속으로 씩씩거리는 거예요. ‘예, 내가 성경 압니다. 예, 고운 것도 헛된 것 맞습니다.’ 화를 퍽퍽 내는 거야. ‘예, 아름다운 것도 포기하겠습니다.’ 근데 화 왜 내는데. ‘내 인생 보람이 그것뿐인데 그것 하지 말라면 어쩌란 말이야.’ 이래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실감을 못하기 때문에 기쁨을 다른 기쁨에서 계속 찾고 있는 거예요.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그 기쁨이 너무 좋아버리면 다른 것은 진짜 그거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것, 다 시시하군’ 이래 되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체가 뻥하니 구멍이 뚫려있고,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성경말씀 흉내 내려 하니까 진짜 흉하잖아요. ‘나, 잠언 읽었다. 고운 거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고. 어쨌든 화장 안 할게.’ ‘씩씩’ 그게 뭐. 차라리 발로 차라 이 말이죠. 대신 억지로 하지 말고.
유월절 이야기해봅시다. 유월절에 죽느냐, 사느냐 그 문제 아닙니까? 아내 직업이 뭐고 직장이 뭐고 그거 문제 삼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그런 것 안 봅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했지요. 천사의 특징은 고집이 없어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냥 피 보면 넘어가는 거예요. 왜? 약속이 그렇게 지시 받았기 때문에.
피 보고 넘어갈 때 그야말로 애굽 사람 다 죽더라도 피 보고 넘어왔으면 관심사가 어디로 쏠리느냐 하면, ‘도대체 저 피가 뭐기에 나를 살리느냐?’ 여기에 관심을 두게 되면, ‘언니, 화장 안 하나?’ ‘화장이 문제가 지금. 아름다운 것도 거짓되고 다 헛된 거야. 지금 내가 죽었다가 살았어.’ 거기에 관심을 두면 나머지 문제가 그렇게 자존심 상할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그것은 뒷전이고 그것은 관심이 없고, 뭐 하지 마라 하니까 억지로 안 함으로써 ‘말씀 어려운 것 지켰잖아요. 복 주이소.’ 이런 식으로 우기고 있다 말이죠. 자,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죠.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징계를 받는 것도 봐요. 징계를 받기 싫으면 짐승이다 하니까 억지로 받는 거예요. 징계를 받을 때마다 씩씩거리며 싫어한다 이 말이죠. 징계를 주시는 분이 있다는 자체가 너무나 감사해야 돼요.
제가 첫째 시간에 했죠. ‘웅이 아빠는 죽었고.’ 그 자체가 지가 죽는 것이 아쉬운 것이 아니고 뭔가 창세전에 나보다 먼저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나보고 죽으라고 통보하는 어떤 분이 계시다는 그 자체가 나한테 감탄사로 와요. 명령으로 받지 말고 존재, 그분이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감탄사로 ‘나 말고 또 누가 있었네? 놀라워라.’ 그럼 나는 나만 살았다는 것이 헛짓이라. ‘나는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지.’
이렇게 나보다 먼저 계신 그분의 존재, 계시다는 그 자체 그리고 그분의 모든 계획에 따라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하는 이 사실 관계 이것 자체가 그냥 감격스러우면 나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세상에 그분의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면 우리의 평생 관심사는 뭐냐? 그 흠 없는 어린양의 피, 그것만 있으면 세상에 어떤 환란도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고민, 걱정 같은 것 할 필요가 없어요. 관심사가 거기니까.
자, 그렇다면 이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잠언서에 반영이 되느냐? 잠언서 진짜 1장 가봅시다. 1장 8에 봅시다. 거기에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 다같이 읽어봅시다. “내 아들아” 스톱, 됐습니다. “내 아들아” 이게 아무나에게 주는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를 하나님의 보호와 보디가드적인 가이드, 인도를 누구나 혜택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지목했어요. 어떤 특정 사람에게만 지목했어요. 그러면서 ‘내 아들’
이 잠언 전체는 아들일 수밖에 없고, 아들로 택정함을 받은 사람, 아들 되기 위해서 작정된 사람, 이젠 빼도 박도 못하고 아들로 돼야 마땅한 사람, 돼야 할 그런 팔자에 있는 사람에게 잠언서를 준 거예요. ‘아들아. 너는 아들다워질 것이다. 그런데 너는 아들답지 못해.’ 왜?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여기서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과 아들의 차이점이 뭐냐? 이걸 알면 되겠지요. 세상에 모든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 다 아들이 아니잖아요. 인간들 중에서 아들이 따로 있단 말이죠. 이 아들은 누구 아들이에요? 여호와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아닙니까? 여호와의 아들이죠. 여호와의 아들은 뭐냐 하면, 이 아들의 아버지가 여호와란 뜻입니다.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되풀이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 아들의 아버지가 여호와란 말은 아들의 존재나 아들 됨에 대해서는 책임을 누가 지느냐 하면, 아들이 지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지게 돼있어요. 아버지가 책임지고 아들을 낳을 때 비로소 이거는 ‘나는 아들 낳았다’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자기 뱃속의 애보고 ‘아기야, 힘들어죽겠다. 지금 삼 개월 됐는데 니가 알아서 나온 나. 아, 참 미치겠네. 니도 다 컸잖아. 삼 개월 동안 컸잖아. 다 컸잖아. 니가 알아서 기어 나온 나. 뭐 그렇게 힘주고. 아, 귀찮아 죽겠네. 빨리 몸매 관리해야 되는데. 빨리 좀 나와.’ 세상에 이런 어머니가 미친 여자 아니곤 없지요. 먹이고 입히고, 모차르트 음악 틀어주고, 이렇게 애를 쓰고, 하지도 않은 새벽기도 하고, 자식 위해서 과외공부를 세상에 애 있을 때부터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는 것 전부다 책임. 너를 아들로 태어나게 한 것은 책임지고 내가 낳는다. 내가 어미니까 내가 책임지고 나온다 이 말이죠.
여러분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여호와십니까? 그러면 여호와를 믿으신다면 여러분 아버지 믿으신다면 여러분 하나님 아들 맞습니다. 됐어요. 지금 교회 나오고 신앙이 없는 이유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버지 없이 살아가요. 왜 아버지 없는가? 지 마음대로 행동하니까 아버지가 없지요.
아들과 인간의 차이는 아들이 있기 전에도 여호와가 먼저 계셔서 없는 아들을 여호와께서 역사 안에서 역사 속에서 만들어내는 그 과정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마지막 종말 때까지 교회 역사라 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아들 성장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구속사죠. 이스라엘 역사죠.
차이가 뭐냐 하면, 차이는 아들한테는 피가 있고, 인간한테는 피가 없어. 차이가 달랑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출애굽기 4장에 나옵니다. 4장 22절부터 23절까지.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라라 하셨다 하라”
이 여호와께서 그냥 아들을 저 깊은 산속에서 몰래 낳으면 될 텐데 ‘이스라엘아 내가 여기서 낳을게. 니는 내 아들이다’ 하고 부부끼리만 애를 낳으면 되는데 여호와께선 그리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아들 낳는데 어디서 낳느냐 하면, 여호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애굽나라 한복판에 애를 낳아요. 그건 뭐냐 하면, 내 아들 낳겠다는 취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 아닌 놈은 다 죽이겠다는 게 다 포함돼있습니다.
네가 내 아들 싫어하기 때문에 네 아들 죽이겠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들 낳으면서 깊은 산속에서 혼자 낳으면 될 텐데 아들 낳는 것을 아예 유세를 떨어요. 유세를 떨어서 악한 마귀들이 있는 이 세상의 한복판에 낳음으로 말미암아 악의 본성, 악한 본성, 이 세상이 왜 저주받아야 될 이유를 ‘나, 아들 낳았다’ 이거 하나로 ‘나는 내가 원한 아들 따로 있다’ 그런 표시를 하시면서 ‘그러니까 너희들 다 죽어야 돼’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할 이유를 내가 친히 낳은 아들이 존재한다는 걸 가지고 세상나라 다 죽어야 된다는 이유로 삼는 거예요. 아주 특이한 여호와 하나님. 이건 다른 신에게 없는 거예요. 다른 신은 좋은 게 좋은 거예요. 서로 평화하고. 그런 신 아닙니까.
여호와는 그게 아니고 한쪽은 생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죽음을 더불어서 같이 병행해서 죽음을 이야기해요. 그게 왜냐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는 발꿈치를 물고 뜯고 난리나. 한쪽은 물고 뜯고 한쪽은 대가리 깨지고.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이 아들은 그 속에 속성이 뭐냐 하면, ‘싸움꾼’이 돼요. 야곱처럼 싸움꾼이 되는데 그 싸움꾼이 바로 출애굽기 7장 4절과 12장에 보면 뭐냐? ‘이스라엘 곧 나의 군대’라 해요. 군대에요. 칼 한 자루 없고, 총 한 자루 없는 군대에요. 군대면서 이거는 하나님이 벌인 전쟁판에 뛰어든 군대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 문제 던집니다. 여러분, 완벽해야 됩니까, 아니면 군인이어야 돼요? 여러분 도 닦아서 완벽한 것이 주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전쟁판에 싸워야 되는 것이 성도의 임무입니까? 이스라엘이 뭐예요? 싸운다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싸우는 사람이에요. 교회에서 도 닦고 완벽한 게 아니고 뭔가 적이 있어요. 나의 사적인 적이 아닙니다. 공적인 주님의 하나님의 적과 싸우는 일을 해야 돼요.
그런데 요즘 교회가 싸우는 사람이 없어요. 도 닦는 사람만 있어. 스트레스 풀고 마음의 평정 얻는 사람, 어디 참선하러 왔습니까? 교회에. 설교가 전부다 도 닦는 걸로 오해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헌금하라 하니까 ‘도 닦는데 돈이 뭐 소용 있노?’ 이카는 거예요. 도 닦는데 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싸움에는 ‘군자금’ 필요해요. 총알 떨어지면 손도 못 대요. 싸움에는 군자금 필요하거든요. 만주에 있는 독립군도 경성에 있는 사람이 나이트클럽해서 보내서 독립군들 군자금 댑니다.
‘집에서 도 닦으면 안 됩니까? 교회 바빠서 못나오면 인터넷 보면 안 됩니까?’ 다른 말로 번역하면, 집에서 도 닦으면 안 됩니까? 지금 도 닦는 데가 아닙니다. 교회가. 참, 헌금이야기 처음 한다. 헌금하란 말이야. 군자금을 대줘야 앞에서 하든지 말든지 하지. 우리교회 군자금 다 떨어져서 마이너스에요. 월급 받는데 민망해서 못 받아. 괜히 많이 책정해서 장로님께서. 처음에 오십 만원 하면 아무 일 없이 우리교인들 다 좋은데. 마음 편히 도 닦는데. 괜히 올려서 군자금 나오지 않고.
너의 적은 관심도 없어요. 우리 개인적인 사적인 사기 당한 것, 이런 것 관심도 없어요. 하나님의 원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원수에 의해서 ‘봐 이 같은 죠다도 아들 됐잖아. 저렇게 못난 인간도 아들 됐잖아.’ 그걸 가지고 ‘저처럼 아들 되지 못한 것, 내 가만두지 않겠다. 작살내겠다’라고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그 전쟁터의 중심에 군대라는 이름으로 다른 말로 하면 아들 이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의 모델이 누구에요? 바로 요단강에서 예수님 세례 받을 때 뭐라 했습니까? “이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아닙니까. 모델이 또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도 닦았습니까? 이 땅에서. 혼자서 도 닦았습니까? 부처처럼. 보리수 밑에 앉아서. 주님께서 야자수 앞에서 한 것은 뭐냐 하면, ‘이 무화과나무 저주 받아라’ 구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성전에 가서 엎어버렸어요. ‘이게 무슨 성전이야. 내가 성전이지.’
‘내가 길이고 진리고 내가 곧 생명인데 너희들 뭐하고 있느냐’ 말이죠. 도대체. 그래서 장부 조작한 저 인간이 이 세대의 지혜자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잖아요.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게 아닙니다. 오죽 못났으면 오죽 엉터리였으면 같은 레벨이다. 너희들이 저렇게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나쁘다고 지적하는 인간이나 너나 같은 레벨이다. 지혜 없기는 마찬가지다 말이죠. 왜 우리 시대에 지혜가 없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 자체가 나 이외에는 달리 사랑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아까 잠언서 할 때 잔소리라 했지요. 잠언서 31장 다 읽었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나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 이 말씀 좋다. 지켜야지. 몇 시간 가겠어요? 몇 시간까지 너무 줬다. 몇 분 가겠어요? ‘이 말씀 지켜야지.’ ‘쌍꺼풀 하나 마나. 턱을 당겨?’ 이거 몇 분 못 갑니다. 진짜 몇 시간 못 가요. 안 됩니다.
여기서 바로 이 잠언서 1장 23절 말씀처럼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겠다.” 신을 준 이유가 뭐냐 하면, 아들 아닌 자에게 아들 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적어볼게요. [그동안 너희는 지혜 없이 살았다.] 전부다 지혜 없이 하늘의 원천이 뭐며, 우주가 어떻게 지었으며, 뭘 목표로 뭘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이런 걸 모르고 살았다.
그러면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압니까?’ 여러분 앞으로 잠언을 볼 때에 어떻게 읽느냐 하면, 잠언서에 보면 ‘미련한 자’, ‘어리석음’에 해당되는 것만 다 골라보세요. 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에요. 자꾸 좋은 쪽에 가지 마시고, 저주 받는 쪽을 보시면 우째 판박이처럼 우리 살아가는 모습과 우에 똑같은지.
결국은 잠언이라 하는 것은 항상 선과 악, 악과 선을 대비를 시켜놨는데 그 대비는 뭐냐? 참된 모델들, 아들, 참된 지혜자, 그 지혜자와 그 지혜자 빼놓고 나머지 전부다 그 양쪽의 면을 동시에 들어내는 것이 총체적으로 지혜의 전부를 다 드러내는 게 되는 겁니다. 빛과 그림자에요. 선과 악. 이게 항상 붙어서 나오지요.
항상 붙어서 나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지혜가 활동하는 그 활동으로써의 지혜와 우리가 행동하면서 툭툭 튀어나오는 우리가 잠잘 때나 먹을 때나 뭘 하든지 간에 튀어나올 때는 항상 자기 사랑, 여호와의 경외라는 게 없잖아요. 우린 여호와 경외가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경외는 있지만 자기만 섬기고 자기를 우대하지 자기를 빼놓고 누굴 우대하는 법이 없어요.
여호와를 섬긴다 하는 것도 하나의 중간과정에 들어가죠. 나를 최종 섬기기 위해서는 나를 B에서 B′ 되기 위해서 A에서 B 되기 위해서. 그러니까 중간과정으로 내가 초청해서 잠시 이용했다가 써먹을 건 써먹으면 갖다버리고 다시 내 길을 가는 거예요. 이것밖에 못하죠.
그렇게 행동하는 결말, 그 결말을 보자 이 말이죠. 제가 첫째 시간에 했잖아요. 스캐너 가지고 한번 쫙 훑어버리면 야, 잠언은 내가 횡재하고 부자 되고 생명 얻고 좋은 책이다. 라고 하더라. 한번 좀 더 보니까 그런데 제삼자 지혜자가 왜 튀어나와. 우리가 잘 지킬 수 있는데 지가 왜 책망을 하는데. 세 번째 보세요. 세 번째 볼 게 있어야지. 뭔가 해결점이 없어. 해결점은 어떻게 해결이 나느냐? 그건 십 분 쉬다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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