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사도행전 18강 / 행9장4절 본문
이근호 목사
101028a행9장4절 사도행전 1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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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101028a행9장4절
2010-11-22 10:56:58 녹취 : 이미아
대전강의 10월 28일 사도행전 18강
사도행전 9장 3절.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3절.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의 길을 가는데 갑자기 홀연히 빛이 저를 둘러 비췄다. 요대목 뒤에 앞으로 진행상태를 모른다고 합시다. 우리가 사울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때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고 하고 여기까지만 딱 봐버리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하늘에서 빛이 비췄다. 여기 이것이 과거입니다. 여기 이것이 미래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 미래에 대해서 알았느냐? 몰랐느냐? 그것은 간단하죠. 모르죠. 미래에 대해서 모른다 이 말입니다.
이게 우리의 행복이예요. 사실. 우리가 행복한 겁니다. 앞으로 이렇게 해야지 하고 그것 가지고 기도하고 매달릴 이유가 없어요. 미래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빛이 이렇게 끌고가야 합니다. 빛이 와서 사울의 인생이 있겠지만 이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철저하게 빛으로 인도할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은 인간무시.
이것을 알아야 사도바울이 한 복음을 이해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한다. 기분 나쁘게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쓰시는 거예요. 제가 대전특강에서 인간무시를 공구라고 했죠. 인간무시를 복음을 아는 순간부터 행복하게 받아들입시다. 내가 나를 무시해도 괜찮은 이유는 빛이 우리 미래를 끌고 갈 겁니다. 빛을 화살표로 왼쪽으로 했죠? 사실은요 요한복음에서 12장에서 보면 빛이 오면 수직적으로 올라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공구기 때문에 수직적으로 올라가는데 앞으로 미래를 거쳐서 빛의 세계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 증거가 뭐냐면 삼층천이라는 것이 나와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와요. 우리 재원이는 삼층천 가고 싶지? 삼층천이라는 것이 빛의 세계인데 우리 같으면 바로 올라갈 수도 있는 문제를 미래를 해서 올라가는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이유는 딴게 아니예요.
사울은 양적이 아니고 질적으로 인간이 달라져야 합니다. 인간이 달라질래면 아직까지 미래의 삶이 있어야 되요. 미래의 삶을 통해서 내가 육으로 생각했던 그 미래상은 깨어지고 아까 무시당하고. 주님이 마련해 주신 그 미래를 통해서 빛의 세계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있는데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육체로 아버지가 요셉이었고 직업이 목수였고 마리아는 어디 출신인지 몰라. 이런식으로. 소위 드라마나 패션오브크리스토라는 영화나 그리고 일반사람들의 소설가나 김동리의 작가나.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주고 예수는 기독교의 교주인데, 우리가 불교 교주의 석가모니 출생이나 성격을 분서하듯이 예수님도 하나의 인간으로 분석해서 "아, 어디 출신이구나." 나중에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거짓이고 사실은 인도에 가서 도 닦다가 마리아하고 결혼했다 이런 가설도 나오고 있거든요.
그런걸 가지고 한꺼번에 합쳐서 예수를 육으로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그저 이런것이 어려운데요. 예수님을 육으로 아는 그 이유가 나를 육으로만 알았던 그 버릇이, 집사님도 자기 자신을 육으로 보니까 나는 어느학교 출신이고, 키는 몇 센티고, 우리 부모님은...내가 육으로 나를 알듯이 상대방도 실례지만 어느학교 출신입니까? 부모님은 어떻게 되십니까? 성씨는 어디 성씨입니까? 이렇게 알아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돈을 하나님도 좋아할거고 만약에 내가 출세하는 것을 좋아하면 주님도 좋아할거고 주님도 같은 인간이니까 이런 식으로 교회 나오고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 얻고자 하는 예수님을 육으로 아는 그러한 시절들이 교회다니면서도 항상 그것이 남아 있더란 이 말이죠.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보면 "나는 예수님을 육으로 알았다" 그거 하나의 과정입니다. 바로 아는 사람 없어요. 전부다 육으로 아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나기 전에 이미 과거부터 예수님에 대해서 육으로 알았어요. 알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을 사이비 이단으로 쳐서 잡았고 죽였습니다. 살인자예요. 디모데전서 나는 살인자요. 폭행자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때문에 죽였던 살인자.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 자기가 적극 권장해서 옷을 맡을 정도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그 사울.
나빠도 보통 나쁜게 아니죠. 예수님이 사도를 구원하지 않아도 누구하나 사울을 안타깝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예수님이 사도를 구원하지 않더라도 아무도 주님을 섭섭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포악한 사람이었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니까 사울은 그 때부터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이 원리 그대로 적용시키면 우리는 뭘 알고 있어야 하냐면 육으로 알던 시절을 잊지말고 딱 깔아놓아야 해요. 밑에 담요 깔듯이. 화투칠 때 담요 깔고 치잖아요. 밑에 먼저 딱 깔아 놓아야 해요.
나는 이런 식으로 예수를 알았다는 것이 딱 깔려야 되요. 교회 올 때 복받으러 왔고, 교회 오면서 내 자식 잘 되고 가정이 화목하고, 남한테 기죽지 않기 위해서 복 받은 것 가지고 경쟁적으로 붙어 가지고 자존심 안 상할려고 하고. 내가 더 복 많이 받았어. 내가 기도 더 열심히 해서 복 받았어. 이런 식으로 남을 꺾어 볼려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는 딴전이고.
뭔가 능력을 받아서 육으로 성공하겠다는. 그 내 자신부터 육으로 아는. 내 자신을 영으로 도저히 볼 줄 모르는 저쪽이 육이라면 나도 육으로 대결해서 이기고 싶은. 때려 죽여도 지기 싫어하는. 육으로만 나를 평가하고 육으로만 치장했던. 그 육적인 내가 예수라는 성경책에 예수 이야기 나오는 이것을 육으로 안 보겠어요? 예수님 저 육신의 욕망을 어떻게 다스릴까요? 이거 쳐다보면서 성경큐티하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거든요.
그런데 이게 육인데 육에 영이 온 거예요. 이런 방법 아니고서야 구원받는 방법이 저는 아무리 성경을 연구하고 봐도 이 방법 외에 구원받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을 곧이 듣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난 것이 너무 희한한 사건이 대전바닥에서 대구바닥에서 서울바닥에서 되풀이 된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 않아요. 저는 알죠. 예수님께서 반드시 그런 식으로만 구원한다는 것을 알죠.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이게 너무 놀라운 경우고 희한한 경우기 때문에. 너무 사람을 단체로 교회다 밀어넣고, 단체로 세례를 주었고. 물 뿌렸고. 성가대 시켰고. 주일학교 장로시켜 놓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일체 저는 육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난 그런 교회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결코 동의가 되지 않아요. 또 그런 신학교 출신 목사들이기 때문에 도대체 동의가 안 되요. 성경하고 너무 다르기 때문에 동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신하교 나왔다고 목사하고 이것을 신자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쓴 책 "시편 안에 그리스도" 라는 책에 신학자 보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니까 자기가 예수님 앞에 육으로 살았다 영으로 깨진 그 이야기를 해야 될텐데.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칼빈이 어떻고, 루터가 어떻고, 칼바르트가 어떻고, 몰트만이 어떻고, 신학자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하면 이런 판대기에다 목각인형을 만들어서 음악가들이 그렇잖아요. 슈베르트가 어떻고, 베토벤이 어떻고. 당신 음악을 내놓아 보라고 하면 자기 음악을 내놓지 않고 누구 음악이 어떻고, 누구 음악이 어떻고. 이런 것 가지고 장난감 소꿉놀이 하는 거예요.
정작 사울처럼 주님을 만나 본 적이 없어요. 근데 만나 본 적이 없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만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뭘 유도하느냐 하면 만나 본 적이 없으면서 믿는 척은 해야 되니까 그 때부터 신앙을 위장하고 박사학위로 위장하고 위장이 저 술집여자들 떡칠한 화장보다 더 덕지덕지 해서 설교단에 떡칠한 어느 유명한 카네기, 유명한 신앙적인 선비 인용하고. 그런 것이 설교가 아니고 "나는 이번 주간에 목사로서 이런것이 깨졌다." "이렇게 육으로 밀어붙이다가 영으로 이렇게 깨졌다." 그 이야기를 본문을 통해서 설교에 내놓아야 합니다. "아, 그러면 목사도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덕지덕지, 유식해 보일려고. 고상해 보일려고. 그런 교훈들, 멋진 예화들 총동원 시켜서 쓰레기장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나는 살인자고 나는 주님을 폭행한 사람이다. 내가 이 자리에 왜 서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도구로, 공구로 사용하겠다는 일방적인 조취지. 내가 예수믿고 천국가겠다는 것, 이것은 내 생각에서 나올수가 없는 일이란 말이죠. 나는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하지. 어떻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나올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호와로 충분했던 사람인데, 그 여호와가 우상이었다는 사실을 예수님 만나고 난뒤에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구조를 간추려 보면 이렇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 내려가기 전에 누구를 믿었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죠.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뭘 줬다? 밀씀을 주었고 자기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천국이라고 본 겁니다. 이 구조거든요. 그런데 이 구조에 예수님이 여기 바깥에 세워 놨습니다. 이 구조가 영이고 바깥에 있는 예수님을 한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육이라고 했죠.
육이기 때문에 예수는 잡아 죽여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거예요. 이미 예수는 없으니까 예수 믿는 추종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요. 예수를 밖에 세운거예요. 보통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사도바울이 빛을 만난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하느냐면 사람들이 바로 막 이렇게 갈수가 없어요. 반드시 육을 거치고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구원받은 사람은. 사울이라는 사람이 이 경로를 거쳤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도 이 경로를 거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거칠 때 영을 받은 사람은 육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제가 지금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딴게 아니고, 이 하나님 말씀있고 하는 이 구조. 요 구조하고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구조하고 일치가 될까요? 안 될까요? 그것을 묻는 겁니다. 재아 이야기 해보세요. 인간이 여호와 말씀 믿는것 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는것 하고 일치가 될까요? 안 될까요? 둘 중의 하나니까 수능을 앞두고 있는데 잘 찍어야 돼. 찍는 것 밖에 딴 수가 없으니까. 된다? 안 된다? 안되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게 되면 이것은 무너져야 되요. 무너질 때 여호와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믿었던 내가 바로 육이라는 사실이 들통나야 되요. 쉽게 가면 하나님 있고 말씀 있으니까 내가 지키면 구원받는다 그것 자체가 이단이라는 뜻이예요.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주셨습니다. 왜? 쉐마, 들으라. 말씀 지키면 우리는 구원받는다. 이것이 이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전체를 대신해서 누가 왔는가? 이 전체 대신해서 이 자리에 예수님이 와버리니까 사도바울은 "나는 육이며 폭행자며 살인자며 죄인중에 괴숩니다." 이게 주님을 만난 사람의 고백이예요. 내가 만약 신학박사다. 신학박사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키고 연구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만약 신학박사가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주여 신학박사가 아니고 신학박사로 밥 먹고 살겠다는 이 사고방식이 육이며 그것이 주님 십자가 앞에 죄며 이 죄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할 때 그 사람은 자기가 깨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즐겨, 행복하게 인간무시에 동참해야 하는 겁니다. 너무나 고맙고 행복하고 하나님이 나를 무시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육이면서도 무시 안 당할려고 했던 이 오만함, 악마적인 행세를 우리는 자포자기 해야 합니다. 버틸수가 없어요. 십자가 앞에 못버팁니다.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은 사울이 갖고 있던 여호와 말씀, 이 룰(role)과는 전혀 상관없이 빛이 왔습니다. 난데없이 빛이 왔습니다. 난데없이 빛이 오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은 빛되신 예수님과 새로운 복음에 구조를 만들었어요. 이 구조가 뭐냐? 빛되신 예수님과 구조 사이에 자기는 육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이 안에 뭐가 필요하다? 십자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2장에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라고 했죠. 이 이야기를 어느 사이트에 글을 쓰니까 개혁주의 주장하는 사람들이 와락 달려들어서 "성경에는 십자가 말고 다른 이야기들 많은데 하라, 하지마라 많은데 왜 당신은 십자가 이야기가 그걸로 종결된다고 하느냐." 어떤 목사는 말하기를 "성경에 몇 구절 안되는 것 가지고 왜 전체를 카바하려고 하느냐" 라며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십자가가라 하는 것은 몇 구절 안되지만 구약 전체의 언약을 완성하는 새언약이 된다는 것을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발견하지 못한 거예요. 공간복음은 산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어느 산으로? 출생부터 시작해서 쭉 올라가서 십자가까지 올라가면 십자가에서 바로 승천해 버려요. 뒤에 있는 부활이야기는 아주 짧은 이야기 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마태,마가,누가복음 보면서 내가 지킬거만 뽑아낼 생각하면 육적인 사고방식이고. 예수님이 왜 자꾸 십자가로 기어올라 가느냐? 그걸 보게 되면 그것이 다 이루었다. 옛날 모든 말씀은 내가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말씀을 다 이루면 그걸 한자로 우리가 그렇게 고대하는 의가 되는 겁니다.
빛을 받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1장17절에서 말하기를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고 했습니다. 이 의를 받아들이면 구원된다고 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거예요. 받아들이면 된다는 거예요. 받아들이면 된다는데 왜 받아들여야 되느냐 하면, 여기 말씀이 있고. 하나님 있고. 나는 말씀을 지킨다는 이런 구조에서는 이 의를,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영광되는 의를 우리가 충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 만났으니까 자기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 딴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착한 사람으로 간주하겠지만 막상 하나님을 만났던 주님입장에서는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가 없어요. 이 개가 왜 이렇게 조용하냐? 개가 한 집에 살면 개가 사람 흉내를 내요. 그런데 백프로 어떤 집도 개를 사람처럼 키운다고 해서 개가 어느 날 사람됐다는 것을 안 믿습니다. 피노키오는 모르겠지만. 목각인형 피노키오는 사람됐지만...
인간이 아무리 해도 성경은 우릴 보고 개같은 인간이라고 했어요. "너는 개야" 그 때 수로보니게 여인은 뭐라고 했어요? "옳다구나! 나 저 개 맞습니다." 나를 제대로 이야기 하신 분을 처음 만난 거예요. 아까 인간 무시에 대한 즐거움. 행복하게 인간 무시를 해주면 되요. 그런데 이것을 타인한테 이야기 할 필요는 없어요. 같은 개끼리는 기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는 개같은 인간입니다.
이유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가 있는데 하나님이 거부해요. 하나님은 그 의는 완전한 의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의 율법을 지켜도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것이 되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율법을 방울덩어리라고 합니다. 방울덩어리란 말이 어감이 안 좋지만. 철조망에 방울 다 달아 놓아요. 한 오키로쯤 방울을 달아 놓고 방울을 흔들어요. 그런데 내가 방울을 흔들었다고 해서 한 오키로 되는 방울을 다 흔든것이 아닙니다.
몰래 철조망 통과한다고 요 끄트머리에 있는 방울 한 개 건드렸는데, 저 오키로쯤 달아논 방울 전체가 딸랑딸랑 "니가 율법 어겼다"고 저쪽에서 난리를 치내요. 나는 요것 하나 어겼는데 이게 연결연결 되어서 저쪽에서 온 천지가 다 들고 일어나서 너는 율법어긴 자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무슨 수로 이 율법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룹니까?
사도바울이 바보가 아니예요. 이 사람이 똑똑했던 사람이예요. 요새 말하면 서울대 나온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학구파중에 학구파입니다. 불교로 말하면 송광사 중들이예요. 사법고시 합격하고 행정고시 합격하고 중된 사람들 거기 많이 와 있어요. 그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파고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보들이 아니고 막 밀어부치는 사람들이 아니예요.
그만큼 사도바울이 뭔가 사전에 육으로서는 흠이 없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내 흠 잡아봐라" "없어" 완벽한 인간인데 그것이 졸지에 죄인 중에 괴수가 되었다면 우리가 이 심정을 이해를 해줘야 합니다. 뭐 성화했니. 완벽하니. 거 뭐 어디서 사도 앞에서 하면 뺨 맞습니다. 복음은 간단합니다. 즐겨 무시 당하면 되요. 그게 행복이고 기쁨이고 다 이룸 입니다.
우리가 좀 그래도 무시당하기 싫어 하면 그 다음에 말씀이 나와서 "니가 이 말씀 지켜봤어?"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로 알아?" "언제 알아봤나?" "돈을 사랑하면 일만악의 뿌리라는 것 알아?" 갑자기 말씀이 들이대면 우리는 또 음메 기죽네 기죽어 해가지고.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하면 이미 의로 다 이루었고. 이렇게 내가 육이라고 아는것도 내가 육을 연구해서 된 것이 아니고 영이 오니까 비로서 내가 육인 것을 아는 겁니다.
육이라 하는 것은 뭐가 임할 때? 영이 오니까 내가 육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아하! 내가 믿었던 예수님은 육으로 알았던 예수님이구나!" 그럼 육으로 알았던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함을 주지만, 영으로 안 예수님은 예수님이 행함이신고로, 행함이 곧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 앞에도 통과되는,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사실을 로마서 1장에서 그걸 복음이라고 사도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는데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전혀 경건치도 않은데 예수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복된 사람이냐고 감탄하면서 소개하는 대목이 나와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힘써 자기 의를 세우려고 헛짓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나와요. 이런 이야기가 어제일이 아니고 오늘날도 계속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기존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소위 복음을 알았다고 하는 우리도 매일같이 아침에 눈을 뜨면 "주여, 저 오늘도 이런 의를 쌓아 놓았습니다." 하면서 주님 의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완벽성을 흐뭇해 하면서 출근하고 이러죠. 그러다가 한 5초 지나면 깨지죠. 차 타고 가다 옆 사람하고 싸우고. 돈 안 좋아한다고 장담하다가 차사고 나서 한 오십만원 깨지면 "아하! 내가 돈을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고. 주께서 이렇게 사건사고를 일으켜서 하시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하는 것은 뭐냐하면 바로 내가 육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경로는 어디서 왔다? 빛이 임할 때만 내가 육인 것을 아는 겁니다. 빛이 임할 때만 내가 육인 것을 안다. 내가 육이라는 것을 알려고 나쁜짓을 할 필요 없어요. 나쁜짓 안 해도 날 때부터 죄인인데 왜 나쁜짓 해요. 가만 있어도 빛만 오면 우리는 죄인중에 괴수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주의할 것은 그걸 남들앞에 이야기 할 것이 없어요. 그 사람들이 한테 이야기 한다고 해서 무슨 도음이 되라고요. 불신자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 할 필요 없어요.주님앞에서만 하면 됩니다. 다만 전도할 때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이 호응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호응할리가 있습니까? 이것은 생뚱맞는 거예요. 정말 이것은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복음은 어리석다예요.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사람은 두 종류가 있으면 하나는 신이 있으면 반드시 인간에게 지혜를 주게 되어 있고. 하나는 신이 있으면 우리에게 기적을 준다. 기적을 통해서 신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유대인들이고 지혜를 통해서 신을 아는 것은 그 당시에 철학을 많이 했던 헬라인들이고.
지혜와 기적. 기적과 지혜. 이 두 가지 빼놓고 세상 학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의사들도 마찬가지로 수술하다가 실수하게 되면 속으로 막 기도한다구요. "하나님이여 여기까지는 제 할 일입니다만 하나님이여 어떻게 어떻게 기적적으로..." 그 때 기적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진정한 기적은 그런 기적이 아니고.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나는 지금 죽어도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나보고 육이라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누가 지적해? 그렇게 지적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숨어 있는 뜻, 복음의 능력이 나로 하여금 영으로 깨달을 때. 이 관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이고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성을 가지고 주님과 나의 관계. 그래서 나혼자 따로 떨어지면 안 돼요. 떨어지면 영으로 안 돼요. 늘 우리는 좋든 싫든 우리를 죄인이라고 규정짓는 주님이 있음으로서 주님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안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냥 안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보쌈 당할 때. 캡슐로 우리를 폭 할 때 우리는 의인되는 겁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서 죄인으로 즐겨, 아주 기쁘게,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그 전에 육으로 있을 때는 죄를 짓게 되면 뭘 걱정하느냐 하면 벌과 징계가 온다고 염려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죄지면 저주가 따른다는 것이 우리 선악과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이 벌과 징계 때문에 그 다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자기 일상에서, 자기 집안에서 찾기 시작해요. 지난 번에 교회를 안 나갔는데 사건이 한 수요일에 터질건가. 목요일 날 주식값이 폭락할건가. 그러니까 마귀의 밥이예요. 어머나! 주일날 교회 안 갔어? 깜짝 놀란다구요. 이게 뭐냐 평소에 버릇들이 내 행동 똑바로 하면 복 받고. 행동 개차반이면 저주를 받는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교회도 그렇게 가르치고.
그런 것 때문에 여기서 주눅들어 사는 것을 성경에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두려움이 찾아 오는 겁니다. 시편 안에 그리스도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예물을 드리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것은 목사가 그런 것이지 하나님은 안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책망하지 하나님은 절대로 책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물을 또는 헌금이라고 합시다. 헌금을 안 드린다고 책망하는 핑계가 뭐냐 하면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은 가르쳐야 아, 헌금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본분이라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구원 문제거든요. 다른 말로 구출입니다. 구출 같으면 사람이 질이 바껴야 합니다. 현재 이런 상태로 안 되고 천국 갈려면 질이 바껴야 되는데. 질이 바낄려면 나의 의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는 것으로, 하나의 질이 되어서 우리 속에 삽입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여기서 목사가 헌금을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헌금을 한단 말입니다. 이 사람이 뭘 오해하느냐면 억지로 헌금을 하는 것까지 보태야 이것이 온전한 천국가는 사람이라고 오해를 유발시키는 거예요. 거지나사로 헌금을 얼마 했어요? 십자가에 있었던 강도가 십일조 했습니까? 안 했거든요. 그래도 오늘밤 낙원에 간단 말이죠.
그렇다면 문제는 교회가 잘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목사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구원받느냐가 문제인 거예요. 관심사가 저 사람 구원 받을까? 이게 우리 교회 올까 안 올까가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이 오늘밤에 연탄가스 먹어서 죽으면 천국갈 사람인지 그게 중요해야 되거든요. 중요하면 질적으로 이것을 떼내 버려야 해요. 이걸 붙여서 모델로 보지 말고. 이것이 떨어져서 "이런 것 없어도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해야 성경에 나오는 성도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이 모델을 가르치고 이야기 하고 소개하고 정리해야 할 책임이 목사인데 이 목사가 모델을 변경시켜 놓아 버렸습니다. 왜? 당장의 눈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서. 자기 생계를 위해서. 그런데 그 목사는 바로 그야말로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사실은 양의 탈을 쓴 악마의 종일 뿐입니다. 관심사가 구원에 있지 않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교회에 웅장함과 교회 큼을 자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거로서 사람한테 현혹을 시키는 겁니다.
교회 큰 것이 기적이 아니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고. 나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가볍게 행복하게 느끼는 것. 남들 앞에서가 아니고 주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 최초로 처음으로 나는 개뿔도 없는, 개같은 인간입니다. 처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그러한 빛과의 마주침. 어두움이니까.
참 그 이야기 빠졌네. 빛이 오게 되면 주안점이 뭐가 됩니까?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나는 처음부터 어두움에 속했어요. 내가 나쁜짓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 자체가 어둡기 때문에 어두움에 속했어요. "빛이 오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주님의 세계만 빛이고 사실은 우리는 이 대전바닥이 다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알게 된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어요? 세상에!!
어두운 쪽에서 헌금한다고 그게 하나님께 더 의가 되겠습니까? 아니죠. 의는 예수님만이 간직했고 그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해야 그게 구원받는 모델이 되는 거예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것을 변명하면 안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이 헌금하고 안 하고는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헌금하는 것 조차도 자기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하는거니까 헌금했다고 해서 헌금하는 것에 치중하면 십자가가 왜곡되겠죠.
이것과 관계없이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은 내가 낸 돈보다 십자가가 더 크게 보일 때만 가능한 이야기겠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헌금을 할 때 즐거히 하라. 너 행함에 신경쓰지 말고 하라는 이 말입니다. 남이 얼마나 했는가 신경쓰지 말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두렙돈. 요새 같으면 50원을 다른 부자 돈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 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안해서 툭 던진 말입니다.
십자가로 올라가면서 툭 던져서 헌금하고 관계없이 너는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보여주는 거예요. 이것을 바로 소급해서, 바울이 빛 받고 난 뒤에 소급해서 예수님의 공생애와 구약성경을 재해석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서신, 바울의 편지입니다. 그 촛점은 이 사건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나는 십자가 외에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이 맞아요.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 이 모든 신구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십자가로 풀어내는 겁니다.
그 다음 진도 나가 봅시다. 17절 봅니다.
17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이것을 설정이라고 합니다. 설정이라는 것은 무대설정, 배우설정이 있죠. 하나님께서 얼마나 주도면밀한지. 사울에게는 빛내리고 장님되게 만들고. 빛내려도 장님 안 되도 되는데, 일부러 장님되게 만들고. 아나니아한테는 누가 너를 찾아 온다는 설정, 배치를 해놓고. 둘이 주님 안에서 만날 때에 뭐가 떨어져 나가냐면 내 행함으로, 저 사람 안수해서 구원시켰다는 인간들의 각자의 행함이 다 떨어져 나가요. 그 훈장들이. 그 업적들이. 흔히 교회에서 자랑하는 그런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가죠.
그런 것을 추구한다고해서 덜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쓰시는 공구요, 도구이기 때문에. 그냥 즐겨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죄인으로 하고. 모든 것은 전도를 하고, 예배참석하고 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서 설졍한 그 구조에서 우리가 움직이기 때문에 그 구조를 파악하는 순간 매사에, 범사에 주님의 살아계심에 다시한번 놀라죠. 주께서 살아계셨습니니다. 우리는 항상 앞의 일을 몰라서 조마조마 깜짝깜짝 놀라죠.
제가 십자가 마을에 글 하나 올린 것에 "아, 아슬아슬한 인생이여!" 기억 안 나십니까? 의존교회 김창길 성도님 글에 댓글 단 내용인데 기억 안 나세요? 늘 아슬아슬한 인생. 행함 이것 아니면 벌 받는데. 아니야 십자가로 우리는 의인되었어. 이 갈등. 아슬아슬한, 육으로 살거냐. 영으로 살거냐. 늘 독촉받는 그런 인생. 쉽게 나오는 것은 관성인데 그것을 저지하는 것은 주님의 설정. "그만해라. 그만해라. 니 그거 육이다."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시는 것. "너 그거 한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야." "의로움은 끝났어. 이미 예수 안에서 의인이야."
의가 없으면 저주가 없어요. 모든 저주는 벌이 있을 때, 죄가 있을 때 저주가 오는데 이 죄가 예수 안에서 의가 되어 버리면 저주가 합력하여 선이 옵니다. 합력하여 축복이 오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축복으로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설정입니다.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시나리오로 짜여져 있어요. 누굴 만나고, 누가 타락해야 하고, 다시한번 깨달아야 하고, 너는 눈물 흘려야 하고, 너는 웃어야 하고. 전부다 하나의 주께서 만든 구조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예수 안에서 움직여야 되죠.
골로새서에 보면 우리는 뭘 하든지 간에, 어느 자리에서든지 간에 예수님을 바라 보도록 새롭게 지음받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팔짱끼고 빙그레 웃으시면서 "사실은 내가 했거든 욕 봤지?" "내가 지금 마귀 보냈잖아? 그 마귀 내가 보낸거야." 하시면서 실제로 웃으면서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주께서 그렇게 해주신 겁니다. 그래서 진도 빨리 나가보면 아나니아와 만남을 통해서 하시는데 15절 봅시다.
15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게 주님께서 사도바울에 대해서 아나니아에게 이야기 한 것이죠. 여기 그릇이 나오죠. 그릇의 특징은 뭔가 담긴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받는다. 열 몇자 되는 이것을 세자로 줄이면 십자가. 십자가의 역사성. 십자가의 반복. 십자가의 재현. 십자가의 현상. 십자가의 표현. 사도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해라는 것은 폭력적으로 피부로 와닿는 신체적인 해도 포함되지만 특별히 정신적으로 혈육과의 분리, 정신적인 비난. 모욕, 핍박, 배척, 무시당함. 이런 것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냥 허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편지속에 보면 다 나와 있어요. 한가지 예를 들면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해를, 다른데서는 쓰레기. 만물의 쓰레기라고 해요. 자진해서 쓰레기 되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없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님 이름을 위해서 쓰레기 되게 하신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쓰레기될 정도로 나쁜짓 했을까요?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손수건으로 죽은 사람을 살렸고 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사도바울이 남한테 금이나 은을 탐하지 아니했고, 사도행전에 보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어떤 것도 탐내지 아니했다. 그정도 같으면 이렇게 해를 받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해를 받아요. 이것은 격이 달라서 그렇게 노는 세상이 달라서 그래요. 육으로만 평가하는 세상에서 영이 침투하니까 영은 육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그러한 마주침이 있었어요.
이게 오늘날 진짜 복음을 알면 나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함께 있어요.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있다면 여러분들은 육의 사람과 마주치면서 본의 아니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해 받음이라는 것을 겪어야 해요. 특히 제사문제, 고3 같으면 자식들 교회 보내냐 하는 그런 문제도 있을 것이고, 나중에 자녀들 결혼할 때 안 믿는 애하고 연애해서 난 죽어도 이 애 아니면 안 된다고 나왔을 때, 그 집안에 보냈는데 그 사람 보살 집안이고. 하여튼 우리가 상상한, 예상한 것 보다 더 이상으로 더 풍성하게 우리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러한 해 받을 일들이 굉장히 많이 옵니다.
항상 그럴 때, 그 때 설정을 하셨고 배치를 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요. 그것을 잊어 버리면 주님을 원망합니다. 원망하면 그것이 마귀가 노리는 점이었어요. 여러분 아시죠? 욥기. 욥은 몰랐습니다. 그냥 착실하게 살 뿐이죠.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 의해서 욥은 친구들을 만나고 그 친구들과 기어히 원수가 되어야 하죠. 이런 경우가 계속해서 사도에게 주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2절
22절.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이렇게 되니까 배신자가 되겠죠. 그 다음에 23~25절 보면
23절. 여러 날이 자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
24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절.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바로 이것이 뭐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끝난 사건이 아니고 자기의 그릇. 자기를 보여주는 임무를 가진그릇. 사울이라는 그릇에다가 예수님이 당했던 그 형편을 그대로 되풀이 해서 그릇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여야 되고. 사울은 제자들의 도움으로 광주리에 해가지고 구차스럽게 탈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사울은 참 믿음 좋다 해놓고 믿음 좋은 것이 아니고, 나 같으면 죽지 왜 도망치느냐?" 하는데 사울의 개인적인 구원문제가 아니고 사울은 연출을 해야 해요.
그만큼 복음을 이 세상은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 했고 사울이 그렇게 쫓겨다니는 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죽였던 어두음의 세력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예요. 이것이 슬픈게 아닙니다. 그만큼 주님이 함께 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그 다음 32절에 베드로가 활동을 합니다.
32절.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이것을 말로 하지 말고 그림으로 하면 예수님께서 출생하셨잖아요. 출생하시고 한 서른살 쯤 되서 공생애 했죠. 성령의 힘에 의해서 병들린 자, 귀신들린 자를 고쳤죠. 고쳤는데 환영 받았습니까? 고쳐 놓고 환영받기는 커녕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강도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대중들에게 미움받아서 죽었잖아요. 이 과정, 예수님의 공생애 이 과정이 열 두 제자들에게 그대로 그릇으로 다 담기는 거예요.
담길 때, 열 두 제자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물론 권능을 행했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뒤에도 열 두 제자가 이런 능력을 행했다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일까요? 열 두 제자들의 능력일까요? 재원이한테 물어볼까?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이죠. 제가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 했죠. 어린애 도시락을 예수님이 축사하셨다는 대목이 나와요. 그래서 오천명 먹였는데. 만약에 거기에다가 예수님 앞에 괄호 해놓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축사하셨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었을까요?
보이는 예수님이 축사하셨다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시 예수님! 예수님이 해! 하고 나왔는데. 만약에 그 자리에 예수님은 뿅하고 안 보이게 해놓고 제자들만 있을 때, 과연 사람들은 그 모든 칭송과 감사를 누구한테 퍼부어 댓겠습니까? 제자들에게 했겠죠. 바로 예수님이 보이나 안 보이나 주님이 하셨는데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예수님에게 갈 공로가 인간 목사나 인간 제자들에게 쏠리는 그 대목이 사도 행전에 그 다음부터 이어집니다.
꼭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면 예수님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면 메시야로 취급하지 않는 그 유대인들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 구름타고 계실 때도 예수님이고 이 땅에 와서 매맞을 때도 주님 메시야인데. 이거는 시험에 낙방한 이도령 행세라. "니 어디서 보니까 구름타고 오는 줄 알았는데 구름타고도 안 왔네." "우리는 구름타고 오게 되어 있어. 니는 왜 구름도 안타는 거야?" "그래놓고 니가 뭐 인자야? 다니엘에 보면 인자는 구름타고 온다고 했어."
얼마나 조롱하고 무시했습니까? 심지어 같이 있던 베드로도 나는 당신을 저주한다고 세번이나 저주했잖아요. 역시 아무래도 모험하기는 싫었던 모양입니다. 눈에 보이는 초라한 행색보다는 지금 거창한 가야바의 권력에 꺼뻑 넘어 간 거예요. 아무리 주님을 따르고 싶어도 그 간격, 틈. 이거는 육으로서는 안 되고 성령이 오순절 날 임해야 바로 주님이 나를 그릇으로 사용하고 함께 있구나를 비로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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