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일서 7강 / 07.3.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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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강의(07. 3. 23) 24-1 자, 시작합시다. 요한1서 4장 마지막에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것까지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이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자기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여러분들이 꿈을 꿈 때 꿈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은 여러분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했을 때 나오는 것이 꿈이에요. 살아있는 것을 함축하다보니까 꿈은 굉장히 바쁘지요. 사람이 두려움이라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에 더 살고자 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데,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살고자하는 것과는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만들어지고, 그 대신 우리는 기어이 ‘내가 살아야겠다.’는 것은 포기해야 됩니다.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살고자 하는 사람한테는 결코 사랑이란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 살고자하면 두려움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웃이나 형제를 대할 때도 자기가 살고자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형제와 이웃을 이용하는 식이 되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순수한 사랑이란 것이 나올 수 없어요. 사랑이란 것은 두려움이 없어야 사랑인데, 자기가 살고자하는 이상은 반드시 두려움이 생기게 마련이에요. 사람이 살고자하면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상태에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살고자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웃과 형제를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를 않지요. 여기에서는 온전한 사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1서 뿐만 아니고 성경 전체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번에 제가 결혼식 주례를 했는데 주례 중에 분위기가 너무 숙연해서 좀 풀어줘야겠다 싶어서 한 마디 뚝 던졌습니다. “제가 지금 불가능한 이야기만 계속 늘어놓지요?” 라고. 사실 성경 말씀 전체가 성령세례 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하고 성령세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마게도냐 사람들이 환상 중에 나타나서 ‘우리에게 건너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세요.’라고 되어 있고, 또 에베소서에 보면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말씀이 있어요. 이처럼 사도바울이 가는 곳마다 성령세례 받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냥 길에서 보통 만나는 그런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쉽게 말해서 ‘새 사람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라고 하는데, 완전히 딴 사람이 되는 거예요. 왜 딴 사람이 되어야 되는가? 이것은 기본이니까 아셔야 됩니다. 현재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 천국은 이 세상과 공통점이 없습니다. 평생을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느끼고 해도 천국에 있는 것과는 전혀 달라요. 천국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맛볼 수 없는 것을 맛보는 곳이 천국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살고자 했던 모든 것은 천국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런 일들입니다.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 살다가 힘 빠지면 죽는 그런 것을 되풀이 할 뿐이지,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어떤 노력도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아야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어렵게 이야기하면, 천국에서 어떤 능력이 이 세상에 임하는 사람, 천국에서 능력의 손길이 닿은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성경 전체가 그래요. 제가 일부러 어렵게 해서가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이 세상의 어떤 재주로도 못 들어가고, 천국에서 기다란 팔이 내려와서 우리의 멱살을 탁 잡아서 끌어당겨야 비로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말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정사실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당연시 여겨야 합니다. 이 땅에 예배당을 100곳을 세워도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어쨌든 천국은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안 된다고 진작 포기를 해야 돼요. 우리는 천국을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천국에서 능력이 오니까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서민들이 운집해 있는 시장이나 백화점에서 얼마나 낯선 이야기인가.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열심히 합시다.’ 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잖아요. ‘모이기를 힘씁시다. 기도합시다. 헌금합시다. 예배드립시다.’ 이것은 굉장히 익숙하고 들으면 이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령세례 받았습니다.’ 라는 말은 무지무지 낯선 이야기란 말입니다. 이렇게 낯선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와요. 성령세례 받은 사람만 영생 얻기로 작정된 사람이에요. 작정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예 작심하고 주신 사람이에요. 인간의 힘으로는 영생을 받을 수 없고,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은 다 믿더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렇게 사도행전에 나온 것을 보니까 결국 사도행전의 하나님 이야기는 뭐냐 하면, 콩나물시루가 있다면 주인 아줌마가 오늘 반찬을 콩나물 무침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루에서 자기가 원하는 콩나물을 뽑아서 그릇에 담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들 바빠요. 왜 바쁩니까? 살고자 하기 때문에 바빠요. 세상이 무지하게 분주합니다. 오늘 강의도 바빠서 참석 못하신 분이 있고, 다들 바쁜데, 뽑고 솎아서 그들에게만 속삭이는 거예요 ‘너희들은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야. 너희들은 성령세례 받았어.’ 라고. 그 때 그 사람은 뭘 느끼느냐 하면, 영생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는데 내가 평소에 살고자 했던 모든 노력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보탬도 안 된다는 것을 그 때 처음 느끼지요. 신앙이 생길 때 첫 번째 현상이 뭐냐 하면, 내가 부지런히 노력한 그 모든 것이 아무 보탬도 안 되고 효과도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내가 구원 받는데 내 쪽에서 하는 어떠한 노력도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끼는 겁니다. 이것을 두 글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1서 4장하기 전에 사랑이 나왔으니까 사랑이 뭔가에 대해서, 세상적인 사랑 말고 성경적인 사랑이 뭔가를 제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사랑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짝을 이뤄 오게 되어 있는데, 미움과 짝을 이루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뭔가는 잘 몰라도 미움이 뭔지는 잘 알겠지요. 미움의 대상이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 쉬울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 뭐냐 하면, 믿지 않은 대상. 안 미울 때 사랑이에요. 요한1서 4장 20절 다시 봅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랑은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미움과 같이 나타나요. 미움의 대상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미워하십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그것은 사랑 받은 거예요.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본격적으로 성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고 이야기하죠. 언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성령세례 받을 때. 성령을 세례로 받은 분이 예수님인데, 성령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뭐는 아니란 말이지요? 미움의 대상은 아니고 사랑의 대상이 되지요. 그런데 말로만 사랑한다고 했나요? 아니지요. 뭐가 왔습니까? 성령이 오셨지요. 자, 그렇다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뭘 느낀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지요. ‘목사님, 제가 성령세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할 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는 ‘받았다’고 하면 소유로 생각하잖아요. 선물을 받았다. 은사를 받았다. 할 때 다들 소유로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세례 받은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했다는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끌려 다닌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푹 빠진다고 할까요, 아버지의 사랑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배우가 무대에서 연극할 때 보면 배우가 이동할 때 조명이 따라가잖아요. 그런데 관객들이 보면 이 배우는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조명아래 항상 갇혀 있지요. 관객들이 보면 우리는 다 어둠에 갇혀 있고 배우만 빛에 갇혀 있지요. 이것이 바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가는 곳에 아버지가 함께 있어요.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말은 아버지의 사랑이 함께 있어요. 예수님이 고생 안 했습니까? 고생 많이 했지요. 40일 동안 굶기도 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뺨도 맞고 했는데 그 때도 아버지의 사랑의 조명이 예수님을 비추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뺨 맞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있을 때도 그 전체가 어디 안에 있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조명 안에 여전히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에는 아무도 못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너무도 특이해서 우리가 상상도 못할 나라예요. 천국은 철저히 가리워진 나라고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나라예요. 너무 흠도 띠고 없고 거룩하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행함으로, 성경 율법을 지켜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가는 방법은 성령세례 밖에 없다는 겁니다. 성령세례가 뭔지 나중에 보니까 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라면 늘 불안합니다. 두려움이 생겨요. 왜냐하면, 내가 받은 사랑을 내가 흘려버린다든지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10년간 사랑받고 11년째 죽어서 지옥 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이라는 것은 소유가 아니고 무대 위에서 비취는 조명과 같은 것이라고 했지요. 배우가 비틀거리면서 넘어진다고 해서 조명 빛이 사라집니까? 이처럼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장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사랑의 조명을 비춰줘서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도 성령세례 받았다는 이 사실을 드러내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사랑이 인도합니다. 이러한 사랑 안에서는 두려움이 없지요. 두려움이 왜 생긴다고 했습니까? 자기 스스로 자신을 살리려는 것 때문에 생깁니다.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에 생겨요. 그냥 내 곁에 어떤 빛이 왔는가 이것만 생각하면 두려움이 없는데, 내가 빛을 만들고 사랑 만들고 내가 억지로 믿음을 만들려고 하니까 되지도 않고 두려움이 찾아와요. 성경공부도 그렇고 예배 참석도 그런데, 보통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다가 이제는 많이 알았다는 거예요. 알만큼 알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참석하지 않지요. 이것은 뭐냐? 소유로 생각한 거예요. 독자적인 소유로 생각한 겁니다. 서울에 이미아 성도님이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좋을 글을 올려서 제가 그 글에 대해 찬동하면서 리플을 달았어요. 오늘 낮에 대구 중구청에 컴퓨터가 있어서 들어가서 리플을 달았는데, 하나님은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서 대신 죽었는데, 주님께서 대신 죽었다는 말은 주님의 천국은 대신 죽으신 그분의 천국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날 위해 죽었다고 하니까, 내 세계가 커지고 내가 독자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멋진 세계를 내 소유로, 내 것이라고 내 명함을 붙이고, 자기 영역, 자기 세계를 예수님 도움 받아서 확장시키려 하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나온 오해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가 돈을 적게 벌었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면 뭐하나? 내 몸이 아픈데. 예수님의 대신 죽음이 무슨 소용 있느냐? 내가 가난한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대신 죽었다’는 말은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그 어떤 것도 하늘나라에는 못 들어온다는 이야기예요. 예를 들면, TV가 고장 나서 서비스센터에 가서 TV 좀 고쳐달라고 하니까 점원이 하는 말이, “우리 집 TV 대신 드릴게요.” 왜요? “이것은 고쳐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말은, ‘당신의 생명으로 살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 소용없습니다. 안 됩니다. 내(예수) 생명으로 대체될 때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하는 뜻으로 대신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인생과 생명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당신의 공로나 업적 이런 것에 미련두지 마세요. 그런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천국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내가 준 생명 가지고 대신 죽었던 그 생명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 것은 안 됩니다. 교체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대신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교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내가 못하는 것을 대신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내가 원하는 것은 마음껏, 내 능력이 확장되고 다 할 수 있다고 오해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예수님이 날 사랑하고 대신 죽었다고 해 놓고 왜 내 하는 일이 자꾸 꼬이고 안 되는가?’ 이렇게 따집니다.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하는 말씀이 ‘지금 그렇게 따진다는 자체가 두려움이다.’ 사람이 언제 두려움이 생기느냐 하면, 내 것이 있을 때는 반드시 두려움이 생깁니다. 내 것이 있더라도 괜찮아요. 이 안경 제 것입니다. 있더라도 그냥 ‘내가 끼는구나.’ 이러면 괜찮은데, ‘이것은 내 것이야. 내 것이야.’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것 간수한다고 고민도 하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어딜 가도 ‘안경 어디 있지?’ 하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고. 그냥 인생 살면 되는데 ‘이것은 내 인생이야. 내 인생이야!’ 하면, 혹시 내 인생을 누가 짓밟고, 내 인생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내 소유를 빼앗아 갈까봐 계속 두려움이 생깁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어떻게 한다? 내어 쫓는다고 할 때에, 그것은 주님의 사랑은 내 것을 쫓아요. 주님의 사랑은 내 것을 없애버리고 현재 가지고 있는 나의 모든 것을 사랑 덩어리로 보는 거예요. 자식도 사랑 덩어리, 아내도 사랑 덩어리.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 덩어리. 전부 다 사랑의 덩어리로 보는 겁니다. 사랑은 조건보고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조건이란 말은 또 두려움을 낳습니다. 왜? 조건은 내 조건을 또 따져야 하니까. 사랑이 덮치게 되면 내 것이라는 인식 자체가 밀려버리고 그것이 전부 다 하나님의 것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안경이 있는데,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차이점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이 안경인데, 만날 안경 더럽게 한다고 잔소리를 들어요. 안경 좀 깨끗하게 하라고. 그러니까 신경 쓰이는 거예요. 안경 깨끗이 하기 위해서. 이럴 경우에는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어, 안경이 없었는데 여기 있네.’ 없다고 생각하고 안경을 보니까 안경 있다는 것이 굉장히 고맙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랑이 오게 되면 현재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아예 없는 경우로 몰아가요. 내가 없는 경우, 내 아내가 없는 경우, 자식이 없는 경우, 내 집이 없는 경우. 뭐든지 없는 경우로 몰아가서 없어도 괜찮은데, ‘어 있네!’ 라고 하는 그 환희, 행복감 그 때 두려움이 없어지지요. 지금 여기 딸기가 있는데 딸기를 치우겠습니다. 그러면 원래 딸기를 준비한 사람한테는 ‘어, 딸기 어디 갔지?’ 하고 걱정이 돼서 성경공부가 머리에 안 들어온단 말입니다. ‘딸기가 없잖아.’ 그런데 다른 분들은, 딸기는 원래 없는 것인데 갑자기 나타나니까 딸기 있음에서 오는 기쁨이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항상 어떻게 하느냐, 우리로 하여금 무(無)의 상태로 자꾸 몰아가요. 모든 것이 없었을 때를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이지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오,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네.’ 할 때 오는 그 기쁨은,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두려움을 다 쫓아 버립니다. ‘이것은 내 자리, 이것은 내 재산, 내 것이야’ 라고 하면서 자꾸 쥐게 되면, 그것을 방어한다고 급급해서 스스로 불행을, 걱정 근심을 자초하게 됩니다. 요즘 제 딸도 그런데, 나는 귀찮아 죽겠어요. 봄 되니까 이 옷, 저 옷 입어보고 아침에 나갈 때마다 묻습니다. “오늘 차림 어때?” 라고. “그냥 대충 입고 가라. 네가 지금 할 일이 피아노 치는 일이지 패션 쇼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해도 자꾸 꾸미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꾸며봐야 불행만 자초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더 옷을 잘 입은 친구를 만나면 하루 종일 얼마나 신경 쓰이겠습니까? 뿔따구 나잖아요. 화가 난다고. 그러나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현재 내가 ‘이런 옷이 없어야 되는데 있다니’ 하면서 고마워하게 되면, 옷을 1,000벌 갖다 줘도 얻을 수 없는 행복입니다. 내가 없다는 순간에만 오는 행복이기 때문에 앙드레 김이 옷을 1,000벌 갖다 줘도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 1,000벌을 가지면 2,000벌을 더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무(없음)로 돌립니다. 어떻게? ‘현재 네가 갖고 있는 것으로는 천국에 못 간다. 가져봐야 짐만 되고 소용없다. 그런데 현제 네가 있는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사랑 덩어리다.’ 여기에서 사랑을 느끼게 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 세례 받은, 정말 천국 가는 사람이 된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 4장에 ‘형제 사랑’에 대해 나와 있는데, 지난 대전 수련회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원수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설명 드리면 이 대목이 풀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고 하니까 또 이야기해 드릴게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까요? 첫 번째, 원수 사랑 아닌 것. 원수를 만약에 사랑하게 되면 이 말 자체가 모순되는 것이, 사랑의 대상이 되면 원수는 없어져 버려요. 그렇잖아요. 원수가 원수로 남아있으려면 안 사랑해야 원수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사랑하라.’ 이런 말이 아니거든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거든요. 예수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 갚은 것은 내게 맡겨라.”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원수를 사랑해야 되고, 원수 갚는 것을 주님께 맡기려면 분명히 원수가 있어야 돼요. 원수도 없다면 이 말이 성립이 안 되지요. 다시 말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원수가 있어야 돼요. 그런데 원수는 어떻게 생겼느냐? 미워할 때 원수입니다. 사람이 미울 때 원수지 고울 때 무슨 원수가 됩니까? ‘이 원수야!’ 라는 것은 그만큼 밉다는 것 아닙니까? 미우니까 원수지요. 그런데 미워해야 될 대상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잘못 된 방법 중 하나가 뭐냐 하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다가 기도 중단하는 거예요. 이것은 소극적 방법이지요. “주여, 제가 원수 갚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세요.” 해놓고, “나는 도저히 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마음은 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첫 번째는 기도를 잠시 중단하는 거예요. 원수를 복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찾아가서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 아니라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다가 기도를 중지하는 이 방법. 두 번째는 원수를 사랑해서 복수하는 방법이 있어요. 원수를 사랑해봐야 원수가 안 돌아올 것이 뻔 하잖아요. 하지만 원수를 사랑했다는 자기 의로움은 남잖아요. 그러니까 원수에게 당했다는 이 괘씸한 마음과 분노를 그런 원수까지 사랑한다는 나의 의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자체적으로 보상을 받는 거예요. 원수가 나를 미워할 때, 내가 복수해야 되는데 그 원수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업적이 남지요. 원수가 발생되므로 말미암아 나는 손해를 입었지만, 그 원수마저 사랑했다는 자기 의로움으로 보상받아서 상쇄가 되는 겁니다. 더 쉽게 이야기합시다. 자매가 있는데 동생이 언니한테 엄청나게 대들어요. 그런데 엄마는 ‘동생이 대든다고 때리지 마라.’ 고 해요. 동생을 때리고 싶은데 엄마의 말 때문에 참으면서 하는 말이, “엄마, 나 동생 사랑했다.” 하고 자랑함으로 말미암아 엄마로부터 용돈을 더 타내는 보상을 받는 것. 그러면 동생이 대들 때마다, 나는 무엇을 얻을 기회를 얻는가 하면, 착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을 기회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되지요. 두 번째 이 방법도 원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두 방법 외에 달리 원수 사랑하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면 인간은 “원수를 사랑하라.” 또는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이 말씀 자체가 우리한테는 큰 짐이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얼마나 큰 짐인지 한번 보세요. 4장 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을 안 들었으면 모르지만 일단 이 말씀을 본 이상은 누가 나를 미워할 경우에, 또는 아주 독하게 미운 형제가 있을 때에 이 말씀을 듣고 기억하는 이상은 이것이 우리에게 큰 짐이 되는 겁니다. 특히 5장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거든요. 그러면 지키는 방법이 뭐라고요? ‘하나님만 사랑하실 수 있지 나는 사랑 못합니다.’ 라면서 하나님께 맡긴다든지, 밉지만 보상을 바라면서 참고 사랑한다든지 이 두 가지 방법 외에는 없잖아요. 첫 번째, 두 번째 하지만 사실은 이것도 안 됩니다. 대번 뺨을 치고, 형제고 뭐고 성질나는데 못 참겠다고 하면서 화를 내지요. 이 말씀을 누가 지킵니까? 성령님이 지킵니다. 이 말씀을 성령님이 지켜요. 누구를 붙들고 지키지요? 누구를 사용해서 지킵니까? 성령세례 받은 우리를 가지고 이 말씀을 지키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내가 1번, 2번처럼 지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잘못된 겁니다. 어떻게 지키느냐? 나는 성질을 내고 원수하고 말도 안 하고 기도도 끊어버리고 했는데, 어느 날 원수가 찾아와서 “형제님, 날 이렇게 사랑해 주니 고맙습니다.” 라고 했을 때, 우리는 멀쑥하잖아요. ‘웬 엉뚱한 소리!’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A: 아니, 나는 집사님에 대해 안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십니까? B: 전에 제가 집사님께 화를 내며 욕을 했는데, 집사님은 그 때 화도 안 내고 꾹 참는 것 보니까, 저는 그것을 보고 ‘야, 저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구!’ 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집사님이 그렇게 은혜롭고 훌륭한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처럼, 내가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상관없이 받는 쪽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될 때 이것이 ‘원수 사랑’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저쪽에서 사랑 받았데요. 우끼는 이야기죠. 심지어는 이런 것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김 집사님이 “우 집사님!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하고 막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성질을 부렸어요. 그러면 우 집사님이 김 집사님을 향해 또 얼굴 붉히고 화를 냈어요. 그런데 돌아서서 둘 다 사랑받았데요. 우 집사님은 “나는 김 집사님한테 사랑 받았다.”고 하고, 김 집사님은 “나는 우 집사님한테 사랑 받았다.”고 하고. 제 3자가 보면 우끼는 이야긴데, 둘 다 서로 사랑 받았데요. 두 사람이 서로 성질내고 있었는데, 뒤돌아 생각해 보니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느끼게 하신 것이 누굽니까? 이것은 김 집사님도 아니고 우 집사님도 아니고 누가 했습니까? 성령께서 그렇게 깨닫게 하신 겁니다. 코미디에 보면 그런 것이 나와요. 얘가 잘못된 길로 가니까 아버지가 “회초리 가져와. 너를 잘 못 교육시켰기 때문에 내가 맞아야 해. 네가 나를 때려라.” 고 할 때, 옛날 시나리오 같으면 아들이 무릎 꿇고 “아버지, 제가 잘 못했어요.” 이렇게 되겠지만, 요즘은 “아버지 한 번 맞아 볼랍니까?”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옛날 시나리오 식으로 보게 되면, 그런 경우를 하나님께서 허다하게 지금도 계속 유발시킵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상대방이 사랑을 느낍니다. 그것도 주님의 사랑을. 이것이 바로 원수 사랑이에요. 지키기 무지하게 쉽지요. ‘아니, 목사님 결론이 뭡니까?’ 성깔대로 살란 말이지요. 뭐. 성질대로 살면 주께서 말씀대로 지켜서 그것을 누구 몫으로 돌린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우리 몫으로 돌릴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가요.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저 혼자 신기한 것 같은데 --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아까 한 사랑의 원리를 다시 적용시켜 봅시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면 우리는 유에서 무가 되 버려요. 딸기로 다시 설명할까요. 성령께서는 있는 딸기 없애고 없는 딸기 나타나게 하고. 그렇게 해서 현재 ‘나는 원수를 사랑해야 돼. 주님을 사랑해야 돼.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말씀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이 모든 것이 어디에 해당됩니까? 무에 해당됩니까, 유에 해당됩니까? 유에 해당되지요. ‘어떻게 하면 성경 말씀 지키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사랑할까?’ 이 모든 것이 유에 해당되는데, ‘내가 말씀 지켜서 의를 삼고, 원수를 사랑해서 신앙인답고’ 이런 ‘나’에 대해 집착할수록 두려움이 생기지요. ‘이 말씀 못 지키면 어쩌지? 못 지키면 지옥 갈 거야!’ 이런 두려움이 생기지요. 이렇게 초조,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성령이 찾아오면 염려와 불안 이런 것은 아예 없었던 것으로 해 주세요. 마치 배우가 무대에서 어떤 몸짓을 하든, 어느 위치에 있든 조명이 비치는 공간 안에 있는 것처럼, 성도는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우울증, 조울증이 있어요. 좋을 때는 잠도 안자고 일하다가 갑자기 맥 빠지면 울다가 자살까지 하고 이런 심리적인 상태가 현대인들에게 굉장히 많아요. 이것을 고쳐보겠다고 약도 먹고 하는데, 정신 분열증은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이 과다하게 나오면 정신병에 걸려요. 도파민이 왜 생기느냐? 그것은 몰라요. 이 모든 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정신 분열증이 있든 뭐든 그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무로 돌려버려요. 없는데 나라는 인간이 손에 잡히더란 말이지요. 이게 전부 하나님의 사랑 덩어리고 천국에서 내려온 빛 덩어리예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성령세례 받게 되면, 모든 내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다 없어지고 현재 내 있음 자체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있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느끼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우리와 동시에 저쪽도 사랑해주면 둘 다 형제사이가 되고 서로 사랑으로 만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요한1서 4장 19, 20, 21절, 5장 1, 2절 계속 가는 겁니다. 양쪽 다 사랑가운데서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그러면 우리 성도는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포도나무, 아버지는 농부라면 그러면 우리는 뭐예요? 5절에 보면, 우리는 가지지요. 붙어 있잖아요. 한 덩어리죠. 예수님과 우리가 한 덩어리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장사할 때나 직장에 가서는 이것을 완전히 잊어버리지요. 왜 잊을까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니’ 이 경우에 우리 것은 없지요. 우리는 포도나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직장생활 할 때나 세무서에서 세금 낼 때는 이런 것을 다 잊어버리지요. 그러면 독자적이 돼요. 독자적이란 말은 내 것이 생겨버려요.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절에 포도나무와 가지에서 우리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는 붙어있는 입장이지 내 것이 없잖아요. 내 것이 없는데 동사무소 가면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주민등록증 보여주시지요.” 이렇게 내 것을 묻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내 것을 물으니까, 내 것은 누가 지켜야 됩니까? 내가 지켜야 되는 거예요. ‘당신의 비밀번호, 당신의 주민등록번호’ 만날 묻는 거예요. ‘당신 것이 무어냐?’고 묻는 겁니다. 물으니까 이 세상에서는 ‘이것이 내 것입니다.’ 해야 되니까 할 수 없이 내 것은 내가 지켜야 되고, 그러다 보니까 두려움이 생기잖아요. 못 지키면 남들이 놀리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요한복음 15장에는 반대로 되어 있어요. 누구든지 내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잘린 사람입니다. 어디서에부터? 포도나무에서. 세상에서는 내 것을 내 놓으라고 하고, 주님 앞에서 내 것을 주장하면 포도나무에서 잘린 사람이고. 그래서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고의 딜레마가 뭐냐 하면, 세상이 요구하는 것과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이 달라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혼란이 와요. 달라도 조금 다르면 성경 볼 때는 이렇게 하고 세상에서는 저렇게 하면 되는데, 정 반대로 다르니까 결국은 성경을 덮어버려요. 성경은 ‘안 본 것으로,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세요.’ 그렇게 하니까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내 것이 남지요. 내 것이 남는데 이 내 것 가지고 교회에 가지요. 교회 가서도 내 것이 있으니까 거기에서 ‘내 기도’가 나오고, ‘내 헌금’이 나오고, ‘내 봉사’가 나오고, ‘내 충성’이 나오지요. 그러면 목사는 거기에 대해서 칭찬해 주고 다른 사람들도 칭찬해 주니까, 이런 교회는 결국 성경과는 상관없는 세상에 있는 지옥을 그대로 옮긴 (가짜)교회지요. 옛날에는 교회 안 다녀서 지옥 간 사람들이 이제는 (가짜)교회 다녀서 지옥 가는 겁니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 내 것을 포기해야 되는가 하는 시점이 없어져 버렸어요. 교회는 내 것을 버리라고 이야기하는데 교회 가도 내 것이 있어야 사람 대우를 받으니까 도대체 어디 가서 내 것을 포기해야 될지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내 것이 없는데 세상에서는 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 십일조 얼마 냈어요?’ 내 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내 행함으로 구원 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내 행위로 구원 못 받는 정도가 아니라 내 것은 아예 인정을 안 해요. 내 것은 인정 안 하고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대신 죽었기에 구원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한 자로 하면 ‘피’잖아요.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고, 성경에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을 보면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대신 죽으심이 우리를 점령해야 됩니다. 그러면 내 것은 파도에 밀려 버리지요. 대신 죽으심은 파도고 그 파도(대신 죽으심의 피)가 확 덮쳐버리면 나는 내 것을 쥘 수 없고 그 파도에 함몰될 때 덮쳐온 것은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가 되면서 우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피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님과 함께 붙어있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내 것을 용납하지 않고 내 것을 인정하지 않는 형태로 우리에게 덮쳐옵니다. 시편 50편에 보면 나오지요. 유대인들이 수소, 소염소를 제물을 바치니까 하나님이 “취치 아니하리니”라고 합니다. 왜? 산에 있는 짐승이 모두 누구의 것입니까? 다 하나님 것이잖아요.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전부 다 주님의 사랑 덩어리라는 것에 눈을 좀 뜨라는 것입니다. 현재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 덩어리고 은혜 덩어리란 것을 눈을 떠야 알지 눈이 감겨버리면 남과 비교를 한다니까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 이것은 손대지 마. 이렇게 되면 요한1서처럼 사랑의 관계가 아니고 경쟁관계가 되고 비교하게 됩니다. 비교하고 경쟁이 되니까 여기서 미움이 생깁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사랑은커녕 ‘왜 하나님은 내가 없는 것을 저 인간에게 주셨습니까?’ 이것을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영화에 보면, 모차르트가 너무 천재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왜 나에게 없는 것을 저 인간에게 다 주고 나에게는 이것밖에 주지 않았습니까? 왜 나에게는 천재적인 재능을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신이시여!’ 하고 [모차르트] 영화에 보면 그 사람이 모차르트를 죽이게 되어 있지요. 미움 때문에. 실제는 안 그런데. 제게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두뇌를 쪼개서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다운 받아서 자기한테 그대로 옮기고 싶다.’고. 이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포도나무 왼쪽 가지가 오른쪽 가지를 보고 탐을 내는 것과 똑같아요. 포도나무를 보고 감사해야 되는데, 다 같이 한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다른 가지가 탐이 난다면 그것은 독자적인(포도나무와 떨어진) 상태에서는 가능한 논리지만, 지금 자신이 붙어있는 데가 어딥니까? 포도나무 아닙니까. 그러면 제(이근호 목사)가 붙어있는 것이 어디에요? 포도나무예요. 그러면 어디서 만납니까? 포도나무에서 만나잖아요. 그렇다면 이 가지 저 가지 양쪽 다 대신 죽으심으로 천국 가잖아요. 이렇게 주고받는 것이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계명은 하나밖에 없어요. ‘서로 사랑하라.’ 그 이유는 뭐냐? 너희들이 미워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12제자를 본드로 붙인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싫어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하는 너희들을 대단히 미워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이미 미움 받았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되면 사랑 받게 된 사람을 더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콩쥐, 팥쥐가 그런 것 아닙니까. 요즘 MBC 드라마에 나오는 [문희]. 안 봅니까? 안 보면 그만이고. 무지하게 미워하는 거예요. 데려온 자식이라고. 계명이라는 것은 본드예요. 접착제라니까. 당신하고 나하고 이야기할 때 네 것, 내 것 가지고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누구 때문에 살았다.’ 하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형제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역할 때문에 서로 대화가 될 때 그게 교회고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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