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일서 6강 / 07.2.23 본문
광주 강의(2007. 2. 23)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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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요한1서 4장 10절을 했는데, 다시 읽어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사랑은 여기 있다’ 해놓고 그 사랑을 누가 독점했느냐 하면, 주님이 사랑을 독점하고 우리는 거기 근처도 안 가는 거죠. 우리는 아예 사랑을 몰랐단 말이죠. 사랑을 모르니까 사랑을 못할 수밖에 없지요. 사랑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사랑을 왜 몰랐는가를 설명해 드리면, 왜 우리는 사랑을 모르느냐 하면 여기 13절에 나오지요.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라고 되어 있지요? 왜 사람을 사랑을 모르느냐 하면, 성령 밖이기 때문에. 성령이 여기 계시다면 사람은 성령 밖에 있기 때문에 사랑을 모르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 밖에 있다는 말은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육에 속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육에 속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육에 속했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육이라고 합니다. 육은 하늘나라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영이 되어야 넣어줍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누구든지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 넣어준다는 것이 다 거짓말이죠. 천국은 그냥 활짝 열린 곳이 아니고 나름대로의 조건으로 꽉 차 있습니다. 영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넣어주지 않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 말은, 육으로 그냥 머물러 있는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더욱 더 절망적인 것은 육은 영을 쳐다보지도 않아요. 육은 육만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적인 인간이 아무리 신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다 육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조작해낸 신이지요. 절대무오, 절대자, 또는 무한, 조물주, 창조주 이것 전부다 육에서 만들어진 육의 작품들입니다. 포이에르바하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지요. “신이란 것은 인간이 조작해 낸 것이다.” 신이란 것은 자기가 미흡한 것을 뛰어넘어, 나는 미흡하지만 미흡함이 전혀 없는 지성을 가진 어떤 존재, 인격자 그것을 그들은 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신은 누구를 닮았겠습니까? 그 신을 믿는 사람을 닮았지요. 사람은 부모가 자식을 낳는데, 신에 대해서는 자식이 부모를 낳는 식이예요. 사람이 부모를 창안하는 식입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요. 세상에 어느 자식이 부모를 따로 만듭니까? 그런데 인간은 부모는 안 만들더라도 신은 곧잘 만듭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각자가 믿는 신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신이 다 달라요. 그것은 무슨 뜻이냐? 각자가 따로 자기가 신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신이 다릅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하의 이야기를 좀 더 하면,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은 지. 정. 의로 되어 있어요. 지식적으로 우열하고, 감정적으로 사랑이 넘치고, 의지적으로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이 세 가지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의 특성입니다. 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여러분들이 인간이 만든 이 신이 이런 신이라면 여러분들은 이 신을 피해가서 따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이 조건에 안 맞는 신을 여러분의 아이디어로 한 번 만들어 보세요.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그럴싸한 신을 만들어 냈더라도 이 세 가지 안에 다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주몽]에 나오는 신녀들이 신을 섬기잖아요. 그 신을 섬길 때 가만히 보세요. 이 세 가지 다지요. 미래에 대해서 미리 알고, 능력 없을 때 도와주고, 어려울 때에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그런 지성적인 존재. 이런 육적인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신 말고 다른 신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인간이 구태여 종교를 갖지 않더라도 본인 자체가 매일같이 하나의 그림자처럼 뒤돌아보면 있어요. 그러나 자기는 그것을 의식 못하지만 항상 그림자는 주인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도 항상 따라오지요. 이처럼 신의 흔적은 항상 뒤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귀신이든 영물이든 영체든 간에 있다면 하나의 정체를, 흔적이라도 내 놓아보란 말이지요. ‘내가 그 흔적 잡고 당신을 믿어줄 게’ 이런 뜻이거든요. 이것이 뭐냐 하면, 신이라 하는 것은 항상 내가 포착할 만한 그 범위 내에서 포착이 되어야 당신이 신 답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포착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냔 말입니다. 신이란 것은 인간에게 포착이 될 때만 그게 의미가 있지, 신이 있다면, 인간과의 어떤 관계가 정말 수립되어 있다면 인간에 의해서도 포착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어렵게 말해서 옛날 중세 시대 때는 이걸 가지고 존재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이라고 봤어요. 좀 설명이 필요한데 이것이 뭐냐 하면, 사람마다 키가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다 다르잖아요. 그런데 공통점이 있어요. 그 공통점이 뭐냐 하면, 누구나 신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는다는 사실. 심지어 신에 대해서 부인한다 할지라도 캐물어 보면 ‘너 어디에서 태어났는데?’ 이렇게 캐물어 보면 결국 신이라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절대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뭔가 설명되지 않는 다른, ‘천지와 자연, 코끼리를 누가 만들었어?’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각자 다르지만 그 다른 인간도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신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지요. 이것은 깡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 다음에 정의롭게 살고 예의범절을 갖추는 것, 그리고 동정할 줄 아는 것. 이런 것은 결국 인간은 각자 다르다 할지라도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말이지요. 그 뿌리에서 뭔가 분배받은 신의 흔적들이 조금씩 각자 존재에다가 약간씩 개입이 된 거죠. 그것이 많이 개입된 사람은 천사 같지요. 그것이 적게 개입된 사람은, 사람은 사람이지만 악마 같지요. 어찌했던 간에 작게 들어 있던 많이 들어 있던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거지요. 그것은 가지고 ‘영혼’이라고 합니다. 신의 성품으로써 ‘영혼’이 들어왔다는 말은, 영혼을 쉽게 이야기하면 양심이죠. 양심이라는 것이 신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은, 신이 밧줄 같으면 예를 들어서 손수건이 밧줄이라면, 밧줄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간들 만들 때 양심을 줬잖아요. 줬으면 이 인간 속에 있는 양심과 신이 주신 양심과 그것을 받은 인간의 양심 사이에 뭐가 형성되겠어요? 무슨 밧줄이 형성 되겠지요. 그러면 인간이 신을 찾는 방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다 들어 있는,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다 들어 있는 신이 주신 흔적을 사다리를 올라가듯 조금씩 밟아 올라가면 뭐가 되겠어요? 결국은 신의 경지에 언젠가는 도착 되겠지요. 이것이 하나의 아이디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결국은 좋은 나라 가고, 나쁘게 살면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더럽혔기 때문에 나중에 죽어서 나쁜 나라 가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점에 대해서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부인하지는 않는단 말이지요. 논리적으로 아니라고 거부하지는 못해요. 왜? 인간 속에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형수라도 양심적으로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통한다고 하잖아요. ‘당신 때문에 그 젊은 사람이 피해를 봤잖아. 그것 어떻게 할래?’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사회가 나를 그렇게 몰아넣었지만 어쨌든 내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한테는 미안합니다.’ 만약에 미안하다는 소리를 안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신부나 목사 혹은 중이 와서 ‘당신, 죽고 난 뒤의 세계에 대해서 모르잖아요. 만약에 당신이 염라대왕 만난다면 지금 당신은 마지막 카드도 놓치는 셈입니다. 사람은 잘못한 것이 다반사기 때문에 그것은 인정하더라도 지나간 것이니까 앞으로도 내 양심만큼은 참 고왔습니다. 그런 소리 하면 당신에게 그것이 참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당신 행동에 대해서 염라대왕 만날 때’ 그러면 그 흉악범이 뭐라고 합니까? 나는 염라대왕 안 믿는다고 현장에서 고함을 치겠지요. 왜? 자기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돌아서면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해서 기죽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심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가 안 죽어 봤잖아요. 안 죽어 봤으니까 없다고는 장담 못하잖아요. 혹시 있다면 마지막으로 내가 회개하고 반성했다는 그런 성과 하나는 건져야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에 갈 수 있겠지요? 죽어서 좋은 자리에. 그리고 사람의 자존심 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 자기 의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은 10여명 사람을 죽였지만 죽을 때는 뉘우치는 마음으로 죽었다.’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 다른 사람이 자기를 정말 나쁜 놈으로 보지는 않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보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계산이 있겠지요. 이런 것이 다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이것은 성령 바깥의 인간 육이 만든 산물입니다. 육에서 만들어낸 신의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는 신의 모습은, 결국은 신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신을 육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에서 찾아요? 영혼이 어디 안에 들어 있어요? 답변해 보세요. 육 안에 들어 있지요. 육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간다? 육에서 시작해서 신을 찾고자 하는 이 모든 것이 ‘육에서 난 것은 육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이러한 신의 논리 구조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어요. 유명한 신학자나 목사들, 그 외 모든 사람, 케이블 TV켰다하면 나오는 것이 육적인 신이잖아요. 케이블 기독교방송 켰다하면 나오는 것이 육적인 신이 나온다고요. ‘하나님 계신데 당신들 한 것이 뭐가 있어? 바쳐야 복을 받지!’ 이렇게 나온다고. ‘바르게 충성해야 죽어서 좋은 데 가지.’ 이것이 전부다 어디에 호소하는 겁니까? 인간 속에 있는 인간의 양심, 영혼 여기에 호소해서 신에게 점차 점차, 악마에서 천사로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려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신학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저 높은 곳에 뭐가 있습니까? 거기에 육적으로 만든 신이 거기에 있다고 상상을 하지요. 라캉이라는 학자는 이것을 가지고 ‘실제성’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와 자기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니까 그 분열을 똑 떼서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둬서 자기가 매울 수 없는 그것을 딱 떼세 높여 놓고 ‘신이시여, 내 부족한 것을 당신이 채워주소서.’ 이것은 교회를 안 다녀도, 절이나 성당을 안 가도 일반인들의 모든 심성 자체에서 그것이 하나의 따끈따끈한 찐빵처럼 김을 내면서 올라옵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이것이 다 올라옵니다. 내일 강의할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에 보면 이것이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인간의 영혼 구조를 설명하고, 인간의 영혼 안에서 어떻게 신이 발생되는가 하는 것도 설명할 겁니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는 그 과정, 그 논리적 과정, 그 종교적 과정을 설명할 거예요. 이러한 육적인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천국에는 이런 육적인 사람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이 육적인 사람을 거부한다는 말은 모든 인간을 다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서울의 지하철이 복잡할 때 엉덩이가 아주 큰 아줌마가 지하철에 사람들이 쭉 앉아 있는데, 정원 5명이 앉는 의자에 5명이 앉아 있어요. 틈이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엉덩이가 큰 아줌마가 와서 엉덩이를 들이밀면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요. 먼저 앉아있던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지요.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야기할 때는 인간들이 안심 푹 놓고 있는 천국에다 낯선 천국을 집어넣어서 ‘저리 비켜’ 해가지고 여기에 예수님의 천국을 따로 마련한 샘이 돼버려요. 여기서 예수님은 엉덩이 큰 아줌마가 됩니다. 휙 휘저어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천국 백성이라고 우기는,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큰소리치는 바리새인들 있어요. 그 가운데서 그들을 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은 지옥에 가게 되고 천국에는 오지 못한다.’고 선언 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쭉 보면, 사람들은 ‘신이시여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면, 예수님은 단번에 쳐버려요. 천국을 어떻게 하면 가느냐가 아니라, 천국은 네가 가는 세계가 아니라 천국이 너희 속에 침투하는 그 세계가 바로 천국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천국을 간다는 인식이 있어요. 천국을 간다고 인식하는 그 천국은 가짜 천국입니다. 여러분들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죽어서는 어련히 가게 되리라.’ 라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거예요. 이것은 허구지요. 성경을 보게 되면 천국은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이 오는 겁니다. 천국이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옛날 구약 때는, 예수님 초반기에는 사람들이 ‘천국이 뭐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지나고 난 뒤에 사도행전부터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천국 이야기가 그의 안 나오고 예수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증거했어요. 천국을 증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좀 이상한 생각이 안 듭니까?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이야기하셨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천국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바울 이후의 사도들은 그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예수님을 믿으라.’ 예수님을 증거해요.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라고 증거합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설명해 볼게요. 이것이 신약 성경해석에 제일 어려운 부분입니다. 초창기의 예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믿기를 독촉 했어요. 예수님은 “천국이 왔다. 나를 믿으라.” 라고 믿기를 독촉을 했는데, 이것이 십자가 이전이라면, 십자가 이후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인간이 예수를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확인된 입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에게 어떻게 능력을 주었느냐’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초창기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믿을까’ 하는 이야기지만, 여기는 아직도 우리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편이에요. 그러나 사도 이후에는 ‘예수님 쪽에서 뭔가 행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무도 천국 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셨습니까?’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쪽으로 전개돼요.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할 때 사람들이 제일 혼선을 빚는 것은, ‘왜 산상설교에서는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내 놓아라.’ 라고 누가 누구보고 묻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내 놓으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왼 뺨을 내 놓아야 될 당사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우립니까? 우리잖아요. 그 때 예수님이 명령하실 때 우리는 명령을 들어야 될 주체로서 주님 앞에 지금 인정받고 있지요? ‘구하라, 두드려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 누구보고 한 이야기입니까? 우리 사람보고 한 것 아닙니까. 이것이 인정 되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말씀을 전혀 이해를 못하고 산상설교만 딱 듣고 하는 말이 ‘아니, 지금 예수님이 우리보고 뭘 하라고 했잖아! 그러면 해야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주님께서 하라고 했으면 해야지!’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요. 이게 바로 육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는 우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몰라요. 우리가 육이라고 해도 우리 속에 얼마나 더러운 것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명령을 하게 되고 우리가 그 명령을 받들어서 뭔가 하려고 하면 그 순간부터 뭐가 끌려나오는가 하면 우리 속에 감춰진 것들이 전부다 질질 끌려 나오는 겁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남 지적하는 것보다 더 많아요. 더러운 것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 더러워요. 이것은 명령을 통해서만 이것이 발각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번 해 보시지요.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말로만 그렇게 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번 해 보란 말이지요.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붕대 감아서 왼손 한번 감춰보세요. 붕대를 감는다고 감춰집니까? ‘누구에서 돈을 빌려줄 때는 그냥 줘버려라.’ 이게 될 일인가요? 몰라 딸이 와서 ‘아버지 돈 좀 빌려주세요.’ 하면, 아버지가 ‘가만, 산상설교에 어떻게 되어 있더라? 그저 주라고 했지.’ 딸에게는 이 말씀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원수가 와서 돈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빌려주겠어요. 어림도 없지요. 안 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뭘 느낍니까? 주의 말씀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 주의 말씀을 거역하는 더 큰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짓이지 너희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우리는 졸지에 이방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이 발각되는 순간이지요. 참새가 그냥 뜻 없이 아무렇게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육과 영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사람을 안 두려워하겠습니까? 강도나 날 죽이려하는 사람을 안 두려워하겠어요? 우리 육의 본성상 안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육인 것을 인정을 안 해요. 인정을 안 하니까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통해서 ‘너는 육이야. 네가 천국을 가? 여호와를 믿어? 신을 섬겨? 전부 다 헛짓이야.’ 그 이야기를 말씀을 통해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육은 육이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영에 속한 사람만이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그런 소리를 못해요. 지금 제가 뭘 설명하려고 하는가 하면 요한1서 4장 13절을 설명하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비로소 사랑을 알아요. 성령 밖에 나가면 육뿐이에요. 정말 여러분들이 사랑을 알았더라면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하면 육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됩니다. 육으로부터 도전을 받아야 되고, 육적인 제안에 동의하신다면 그것은 가라(엉터리)로 성령 받은 것이지 사실은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육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육적인 이야기를 했을 때 ‘저건 아니다. 저건 내 생각과 다르다. 일반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내 생각은 그게 아니야.’라고 뭔가 경계를 느끼신다면 그 사람은 이미 육에서 벗어나서 영 안에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을 육 되게 까발리는(폭로하는) 작업을 하실 때, 그 작업이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육의 육 됨의 마지막이 어디까지 뻗치느냐 하면 악마에게 자기 목숨을 바치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가서 육의 육 됨을 들통 냅니다. 갈 때까지 가는 거지요. 그들의 육의 본 모습을 다 드러낼 때까지 갑니다. 결국 예수님이 노리는 것은 ‘육은 영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영적인 분을 죽임으로 육은 자기 정체를 다 폭로하는 이 방식을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증명하러 오셨습니다. 육은 그냥 ‘예수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이 정도가 아니라, 육은 결국 영(예수님)을 살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을 봅시다. 23절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지하철에서 엉덩이 큰 아줌마 생각하면 됩니다. 비집고 들어온 거예요. 오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위에 계신 영적인 분이 육의 세상에 비집고 들어와서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24절에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야 비로소 육, 죄는 죄대로 드러난단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 하실 일이 뭡니까? 자기 신체를 이용해서 철저하게 왜 이들은(예수님 빼고 나머지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들통 내는 그러한 말씀과 그러한 행동과 그러한 기적들을 계속 일으키시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공생애 전체를 통해서 인간을 계속 쑤시고 쑤시고 또 쑤셔서 우리도 미처 모르는 우리의 죄를 다 까발리는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시고 그런 쪽으로 자꾸 기적을 일으켜요. 한 예를 들면,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기 전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좋은 사이였습니다. ‘경치 좋다. 바다가 참 잔잔하네. 주님은 기분이 좋아서 주무시는구나.’ 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자 제자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것이 우리 생명에 무슨 보탬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 보탬도 되지 않아요.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주느냐 하는 점입니다. 지금 교회 온 사람들 다 그런 생각 안 합니까? 교회 다녀도 소용없어. 기도해도 소용없어. 안 다녀도 좋은데 가고 다 하더란 말이지요. 도대체 내가 예수 믿는 것으로 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뭐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풍랑이 일지 아니하면 인간은 자기 속에 그런 마음이 들어있는 줄을 미처 모를게 아니냔 말이지요.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주님은 천국의 만드신 분입니다.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면서, 그 믿음이 옳은 믿음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인생의 풍랑을 일으키니까 도대체 예수 믿고 난 뒤에 계산해 보니 이익 본 게 하나도 없단 말이지요. 당신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냔 말이지요. 예수 당신은 나에게 왜 왔느냐는 것이지요. 이것은 육의 육 됨을 철저하게 폭로하기 위해서 일을 벌이시는 거예요. 늘푸른교회 이성희 집사님이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해서 홈페이지에 병상일기를 썼어요. 제가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아픈 사람이 그냥 있지 무슨 오기로 일기를 다 쓰냐고. 일기를 꼼꼼하게 썼는데, 그 고통을 언어가 허락하는 한 최고조로 표현을 했어요. 보셨습니까? 얼마나 아팠겠느냔 말이지요. 뭐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고 이런 투를 달아야 마땅한데, 저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약을 올렸어요. 자아라는 것이 원래 내가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아는 없느냐? 있어요. 있는데 누가 만든 자아냐 하면 주님이 만들어야 될 자아를 가지고 우리는 내가 육으로써 내 자아를 딱 만들어 놓고 주님과의 대결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주여, 내 인생, 내 육체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네 손톱하나 발톱하나 네 것이라고 상표 붙여놓은 것 있냐?’ 자아라는 게 없는데 없는 것을 인간들이 상상해서 만들어 놓았어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주님이 주신 몸 가지고 기껏 육적인 인간들이 한다는 것이 자아 만들기 입니다. 주님이 주신 것은 주님이 주인이고 주님이 조정하고 주께서 다룰 권리가 있는데, 기껏 그것으로 따로 자아 만들어 놓고 자아가 원하는 대로 이 몸은 움직이고 굴러가야 되고 내가 원하는 식으로 건강 유지되어야 하고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우기는 거예요. 원래 주인이 누군데요? 주님이 주인인데 손님이 주인행세를 해서 주인이 멀쑥한 거예요. ‘책상은 왜 이 모양이고, 걸상은 왜 안 닦았어? 똑바로 하란 말이야!’ 이게 어디서 굴러온 뼈다귀가 주인 노릇을 하고 -- 따지고 보면 자아라는 것이 우리가 구상한 겁니다. 그러니 만날 바뀌지요. 자아가. 좋을 때 자아와 나쁠 때 자아가 만날 바뀐다고요. 이렇게 바뀌는 것을 보면서 본인이 알아채야 되는데 그걸 모르면서 ‘왜 내 몸을 하나님 당신이 뭔데 함부로 손 대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그 자아를 부수고 주님이 만드신 자아가 있어요. 주님이 만드신 자아가 따로 있어요. 주님이 만드신 그 자아는 예수님이 크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아가 새로 생겨요. 이게 오늘 강의의 어려운 부분인데, 우리가 만든 자아 따로 있고, 자아가 없을 수는 없어요. 있어요. 있는데 육으로 만들어낸 자아가 따로 있고 성령 안에서 주신 자아가 따로 있어요. 성령 안에서의 자아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주님과 교재하지요. 교재하면서 ‘주님의 것입니다. 주께서 쓰십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피조물로서의 자아, 새로운 피조물의 자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육으로 만든 자아가 따로 있단 말입니다. 이것은 만날 불충분한 거예요. 만족함이 없고, 제가 아까 양심에서 만든 신이 있다고 했지요. 이 결핍을 채우는 신이라야 하나님답다는 것입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이 호들갑을 떨 때 예수님은 풍랑부터 잠잠케 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마음부터 잠잠케 합니다. “너희들이 믿음이 있느냐?” 우리 같으면 ‘주님을 믿습니다.’ 할 텐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거죠.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믿음이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은, 너희 위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그 생각을 왜 포기하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자꾸 예수 믿는다고 우기지만,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믿고 삽니다. 이게 육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들러리예요. 나를 뒷받침하고 잘 되게 해 주는 시종, 혹은 머슴 정도 밖에 취급 안 합니다. 항상 우선은 나예요. 이걸 내일 강의에서 심도 있게 따질 텐데, 인간의 사유와 존재가 자아의식으로 돌아오는데, 결국 궁극적으로 자아의식으로 도로 돌아옵니다. 모든 것은 자기로부터 전개되면서 결국 자기한테로 돌아오는 것이 인간의 모든 사유, 생각입니다. 이것을 피히테는 ‘인간이 절대 신이다.’고 했어요.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높은 신은 없어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나보다 낮아요. 나에게 봉사해야 될 하급 신들입니다. 원래 주인인 예수님이 찾아왔는데 주인도 아닌 것이 주인행세하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고 우기니까 여기에서부터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의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풍랑을 일으켜서 제자들의 본색, 믿음 없음을 폭로시키는데 풍랑을 이용합니다. ‘너 자신을 위한 것은 예초부터 허구였다.’ 나를 위한 나는 없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위주가 되면 죽을 때 자기 실체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자기가 죽을 때 자기가 없어져버리면 처음부터 자기란 것이 허구에 불과한 것이 그 마지막 순간이 온통 만인이 보는데서 들통 날 것이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했어요. 예수님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으로 오셔서 지하철을 타고 ‘여기는 내 자리’라고 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 오셔서 점잔은 신사 양반을 더러운 육적인 인간으로 돌변시키고 마는 겁니다. ‘너도 육이고 저 사람도 육이고 어느 인간도 영적인 인간은 하나도 없다.’ 다 똑같이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식으로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다. 이 기간이 뭐냐? 예수님 십자가 지기 전에 계속 말씀하신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 이후에는 십자가 이전에 제자들에게만 했던 그 이야기를 온 인류에 다 퍼트리는 거예요. 범위를 넓혀서, 12제자와 몇몇 무리들에게만 하던 그 이야기를 온 세계에 다 퍼트리면서 동네방네 다 쑤시고 다니는 거예요. 탄자니아, 도미니카 공화국, 필리핀, 러시아 할 것 없이, 어느 민족 어느 족속 할 것 없이 다 쑤시는 거예요. 주의 말씀을 가지고. 다 육이라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영적인 인간이 없다는 거예요. 다 자기가 만든 자아에 도취되어 착각 속에 살다가 주께서 회수해 가면 하나의 연기처럼, 마술 할 때 쿵 하고 사라지는 연기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는, 자아가 어디 있어요. 하나의 연긴데. 불교에서도 말하지 않습니까. 자아가 없이 하나의 집합, 기 덩어리라고. 뻥 하고 터지고 난 뒤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은 직업이 의사냐 판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런 것 들춰내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너는 육이란 말이지요. 여기에서 복이 뭐냐 할 때, 자기가 육인 것을 알 때 그 때 유일한 복은 육에서 성령 안에서 영적 사람이 되는 것. 이 축복 외에 다른 복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어떤 사업을 하던 육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고 영이 되고 난 뒤에 어떤 일을 하던 그것은 육이 아니고 영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지난 시간에 영역 개념으로 말씀을 드렸지요. 어떤 공간에 갇히는 이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주일 예배 때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육이기 때문에. 우리를 육이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오해하기를 그것을 지켜야 하는 줄로 오해하는 겁니다. 이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너는 육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서 말씀 주시고 기적 주신 겁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계에 주께서 보여주신 기적은 뭡니까? 요나의 기적뿐이었잖아요.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행하니까 그것이 우리가 육임을 깨우치기 위한 것 인줄도 모르고 먹고 배부른 기적인줄 알고 착각해서 계속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보면서,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은 육의 양식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내가 주고자 하는 것은 육의 양식이 아니고 영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이 뭡니까?’라고 물으니까 ‘내 살과 내 피, 즉 내 죽음이다.’ 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어렵도다’ 이해가 안 된다고 했어요. 왜? 육이기 때문에. 그래서 평소에 예수님은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 바보 같은 인간들이 이해된다고 신학도 만들고 하면서 자기는 이해된다고 우기는 거예요. 예를 들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을 끓여서 그 죽 먹고 죽어라고 주면서 ‘죽 맛이 어떠니?’ 하고 물으니까 ‘아 죽 맛있네요.’ 이런 이상한 놈이 다 있어. 그 죽은 먹고 죽으라고 준 죽인데,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죽어라고, 너는 육이니까 죽어도 마땅하다고 준 거예요.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씀을 줬는데, ‘주의 말씀대로 살았더니 복을 받아 얼마나 사업이 잘 되는지’ 이런 엉뚱한 소리 하고 있단 말이지요. 왜 엉뚱한 소리 할까요? 이것은 바로 육이 만들어낸 예수, 육이 만들어낸 삼위일체. 이것을 그냥 그대로 쥐고 있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으니까 자기 속에 천사의 품성이 전보다 더 많아졌다고 여기고 그 많아진 양만큼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여기지요. 그것이 바로 육에서 육으로 나온 신이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육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영이 오셨다니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율법을 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심 이예요.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룬 분 아닙니까. 그러니 얼마나 율법 덩어리겠습니까. 그 율법 덩어리가 오셨으니까 우리는 그 율법 앞에 더욱 더 할 말을 잃지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강도에게 ‘네가 오늘 밤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전혀 자기 공로를 내세울 수 없어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죄인 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냥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잘난 사람 가는 게 아니고 잘났다는 사람도 죄인 되게 만들어서 천국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린 양’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돌아온 탕자’, 이것을 바울 식으로 하면 ‘죄인 중의 괴수’. 이 복음 가지고 지금 할 일 많습니다. 육을 육 되게 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이 해야 될, 영적인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영적인 사람들도 육을 육 되게 하는 식으로 살도록 조치하십니다. 그것은 처소 개념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아주 어려워요. 제가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삶]이란 글을 올렸지요. 읽어보셨습니까? [병상 일기] 바로 밑에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삶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처소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다음에 하도록 하고. 하여튼 십자가 이전에는 그렇거든요. 그러면 십자가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십자가 이전에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앞의 제자들은 육으로 드러났지요? 예수님은 유일한 영이시고 제자들은 육인 것이 드러났지요. 이 육적인 인간에게 요한1서 4장 10-14절 말씀처럼 사랑을 해주니까 제자들이 영적인 사람이 되지요? 제자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의 영이 오니까 그렇게 되지요. 지난 시간에 화목제물이 어떤 것이라고 했습니까? 마무리 제물이라고 했지요. 더 이상 우리가 추가해서 어떤 행동을 안 해도 이미 구원 받았다는 것이 화목제물 아닙니까. 예수님이 바로 화목제물로 오셨단 말입니다. 이것을 성령을 가지고 그대로 이방인들에게, 이방인은 개 같은 인간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는 개는 아닌데 조금 부족하다고 여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도 개 같은 죄인 되어버렸지요. 천국 밖에서 노는 육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육인 이방인들도 육이지요. 예수님이 유대인들 용서하는 그 원리를 가지고 그대로 이방인에게 주어버리면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담이 허물어지고 예수 십자가 안에서 한 형제가 되겠지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안에서. 형제 되었다는 말은 그동안 이방인과 유대인을 나눴던 그 기준이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이지요. 십계명이고 십일조고 안식일 지키고 하는 모든 계명들이죠. 이 계명들은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것이 십자가 안에서는 더 이상 의미 없이 되지요. 왜? 이 사람도 십자가로 구원 받고, 저 사람도 십자가로 구원 받으면 율법이란 것이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깁스는 뼈가 고정될 때까지만 필요하지 뼈가 단단히 되었는데 깁스를 왜 하고 있습니까. 폼 잡을 일 있습니까? 가렵기만 하지. 깨서 떼버려야지요. 여기서 깨져 나가는 것이 뭐라고요? 그것이 율법입니다. 율법 깨지면 남은 것이 뭡니까? 사람만 남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모든 명령과 권면은 깨진 율법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까, 사랑에 근거해서 해석해야 됩니까? 당연히 사랑으로 해석해야지요. ‘이러니까 사랑이지!’ 라는 식으로 해석해야지요. ‘이것 안 지키면 지옥 간다.’ 이건 사랑 식이 아니고 율법 식이예요. ‘이러니까 네게 지옥 간다.’는 것은 율법 식이고, 사랑 식은 ‘이러니까 네가 육이고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한다.’는 것 아닙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지요. 이것이 구약입니까, 신약입니까? 신약에 나오지요.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이것을 율법 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돼요? 아무리 예수 믿어도 돈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심판받던지 도중에 탈락하던지 그렇게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육적인 목사들이 육적인 교인들에게 돈 더 거둬내기 위한 하나의 사기 술법 아닙니까. 여기에 대해서 육적인 인간들은 사랑보다도 오히려 그런 목사들을 더 반겨요. 왜? 육이기 때문에. ‘내가 저 목사 시키는 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품성이 짐승 쪽이 아니고 천사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천사 품성(신의 품성)이 증가하게 되면 그만큼 보너스가 온다.’ 여러분이 옛날에 다 이렇게 안 살았습니까? 10분간 쉽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광주 강의(07. 2. 23) 23-2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십자가 이후에 주님께서는 뭘 하나 만들었어요. 이것은 십자가 이전까지는 인간의 육을 드러내는 식으로 그들을 공박하지요. 그 공박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야 될 그 피에 대해서, 로마서에 가면 이 피가 흘러야 화목제물이 되거든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만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피를 좋아합니다. 그 피 안에는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 피만 받습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피와 다른 피를 구별하기 위해서 레위기가 있습니다. 레위기는 피 뿌림이 어떻게 거룩으로 이어지느냐 하는 것을 증명하는 책입니다. 출애굽기도 마찬가지고. 피를 뿌렸더니만 더러운 인간이 남긴 지문조차도, 다른 것은 안 돼요. 물로 씻어도 안 되고, 제단에서 죽은 제물의 피만 뿌리면(물리적으로 깨끗지 않다 하더라도) 거룩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상주할 수 있어요. 임재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면 하나님이 임재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안 계시는 다른 나라를 충분하게 이기지요. 이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다른 나라를 끌고와서 바위돌 같은 이스라엘에 부딪혀서 제풀에 넘어지게 하지요. 이것을 붙여주는 전쟁. 획 달려와서 제풀에 깨어지게 되어 있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거대한 두꺼운 유리창이 있는데 유리창 안에는 이스라엘이 있고 밖에는 적들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이스라엘 속에서 보이지 않게 동행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전 속력으로 이스라엘을 쳐들어오게 합니다. 그러면 누가 놀라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놀래겠지요?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 하나님이고 뭐고 다 끝났다.’ 그런데 오자마자 그들은 어디에 부딪쳐요? 투명한 유리벽에 부닥쳐서 스스로 몰살하지요. 때로는 해충, 때로는 유황불, 어떤 때는 서로 서로 죽이는 방법. 어쨌든 제풀에 넘어지게 해서 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리 힘으로 이겼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지요. 누가 이겼습니까? 이스라엘은 벌벌 떨고 있었고, 실제로는 누가 이겼어요? 누가 용사입니까? 이스라엘이 용사가 아니고 그들과 함께 있는 ‘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 용사가 되셔서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대군을 무찔렀구나.’ 라고 깨닫게 하는 겁니다. 저의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삶]이라는 글에 보면 나와 있어요. 광야에 들어서자 비로소 안식의 의미가 다가와요. 광야에 안 들어서면 안식이 뭔지 몰라요. 광야에 들어서야 안식의 의미가 비로소 나타납니다. 몸이 아파 수술을 해 봐야 평소에 못 느꼈던 건강의 의미가 다가오지요. 건강, 아름다운 목소리. ‘아, 이렇게 내 음성이 꾀꼬리 같은 소리였구나.’ 하는 것을 알지요. 광야에 들어서게 하셔서 안식에 의미가 다가오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이 방법을 지금 그대로 쓰시는데 우리로 하여금 온갖 무서운 말씀으로 집중 공격해서 우리가 육일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고, 육인 우리를 위하여 주께서 피를 주셔서, 피와 육이 결합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 되게 하는, 더러운 인간에게 피 뿌리면 제물 되잖아요. 더러운 우리 육이 하나님의 제물 되는 이 방식, 이 유리관 안쪽을 가지고 요한복음에서는 ‘처소’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37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베드로가 목숨까지 담보로 내놓고 주님과 합세하려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것이 가당치도 않다고 본 겁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내 놓는 그 목숨은 영입니까, 육입니까? 육이지요. 베드로가 순교해봐야 그것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천국을 만들어도 예수님이 만들고, 처소를 만들어도 예수님이 만들고, 천국의 있을 자리를 만드는 것도 예수님 혼자 만들지 제자들의 협조를 받아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드실 때 누구 협조 받아서 합니까? 일체 협조를 안 받지요? 다만 자기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육 되게 하셔서, 만약 어떤 사람이 설교를 듣고 구원 받았다면 목사가 설교를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누구의 덕이다? 유리관 안의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사용해서 그 사람들을 구원하신 거죠. 그래서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항상 주의 일을 하는 동안에 자기가 육임을 더욱더 알고 깨어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주의 일을 하게 되지요. ‘내가 못났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나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구나.’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방식으로 계속 그 사람을 가지고 일 하시는 겁니다. ‘나는 못났지만 이 못난 나도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이런 사람과는 같이 일 안해요. 못났으니까 못났다고 가치 있다는 이런 논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냥 주께서 일방적으로 일 하실 뿐이죠. 나는 저 사람 구원 받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만약에 어떤 성도가 비율이 아주 센 경찰대학 혹은 서울 법대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쿠 장하다. 훌륭하다.’고 하는데, 성도는 ‘나는 서울 법대생이 되어 내 죄가 얼마나 많은가 드러내시겠구나.’ 이렇게 마음 준비 하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60억이 생겼다고 하면, 60억 없을 때보다 ‘60억 가지고 내 죄가 얼마나 악질적인지 알아가 봐’ 그런 마음으로 가지고 가시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때요? 60억 가지고 그런 일 한 번 해봐도 괜찮겠지요?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돈밖에 모르는 인간인가를 60억을 가지고 아는 겁니다. 주의 일이라는 것은 항상 이렇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이 적들을 계속 공격하는 것은 여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력으로 그들을 대처하려는 그 자체가 같이 계신 주님을 모독하는 육적인 본성을 적을 통해서 노출하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광야 길을 가면서 여러 가지, 힘도 없고 병력도 없고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광야에서 적들을 만나 전쟁을 벌이시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천국이라는 것은 나로 하여금 더욱더 육 됨을 드러내고 주님의 영광만 드러내는 그 세계가 바로 주께서 원래 진작부터 생각했던 천국이고 그 외 다른 것은 천국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이후에는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로 얻었던 이 화목제물 이것을 처소로 만들어요. 이것은 베드로가 목숨 바쳐도 들어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겠습니다. 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 같이 읽어보세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네게로 영접하여” 그렇지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거예요. 이것은 처소로 만드는 것도 주님이 일방적으로 만들고, 그 처소 안에 넣어주는 것도 인간이 안달이 나서 손들도 데모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다시 오지 아니하면 그 천국 구경도 못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첫째시간에 했는데, 인간이 만든 신 개념에는 이런 것이 없지요. 인간의 신 개념은 ‘자기의 착한 부분이 많으면 점점 천국에 가깝고 악한 부분이 많으면 지옥에 가깝다.’ 그 뿐이지요. 그러니 어찌하든 마일리지를 쌓아야지요. 선행의 마일리지. 착함의 마일리지. 그래야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죽어서 천당 가고. ‘부모한테 효도하면 죽어서 좋은데 간다.’ 이거 불교 아닙니까? 이건 불교예요. 지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 했는데, 제 아내 친구 이야긴데요, 듣고 제가 깜짝 놀랐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황금돼지의 해에 닭띠와 소띠, 뱀띠 이 세 띠는 3재가 겹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절에서는 이렇게 한답니다. 절에서 얼마나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잘 다루는가 한 번 보세요. 나쁘다는 액운을 주고, 그것을 절에다 시주하고 기도하고 하면 3재가 해소가 된다는 거지요. 사람의 심리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도 나쁜 것이 있다 하고 그것을 속 시원하게 해결하면 뭔가 펑 뚫린 것처럼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따져보니 우리 집안 진주하고 나하고 셋이 다 3재 하나씩 골라잡았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세 개를 다 모아서 마징가 제트처럼 모아서 변신 ---. 이게 무슨 심리냐 하면 나를 때려달라는 겁니다. 못된 나를 때려주면 내가 시원하겠다는 거예요. 얻어맞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거죠. 목사가 “여러분, 복음은 자유롭습니다. 뭘 해도 구원 받습니다.” 이것보다도 그냥 회초리로 때려주면 그 때리는 그 맛에 교회 다닙니다. 이것만 알면 목회 성공합니다. 때려주는 쾌감을 제공하는 목사. “그렇게 하면 벌 받습니다. 헌금하시면 그 벌이 복으로 됩니다.” 그럴 때 뭔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처럼 교인들은 느낍니다. 기독교 케이블 TV 켜보세요. 모두 그런 식입니다. 화(禍)주고 거기다가 해결책 제시하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오고 싶어도 못 오고, 가만히 있어도 못 오고, 이래도 못 오고, 저래도 못 오는 나라가 천국.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가는가? 예수님이 다시 와서 그들을 데려가야 비로소 가는 나라, 그것이 천국입니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과 자존심을 얼마나 모독하는 것이겠습니까? ‘나도 착할 수 있는데. 나도 주의 말씀 지킬 수 있는데.’라고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철야기도 해도 안 되고, 집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안 되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끝.’ 이게 얼마나 인간을 낙담케 하겠습니까? 이런 교회 절대로 돈 안 냅니다. 그러니 돈도 안 나오고, 사람도 안 모이고. 결국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고 ‘어렵도다.’ 하고 떠나지요. 주님께서는 그걸 원합니다. 제발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말고 다 떠나라. 떠나고 난 뒤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만 내가 기어이 찾아가는데, 어느 정도로 찾아가는가 하면 구약의 아가서를 보면 됩니다. 아가서에 보면 어떻게 찾아가지요? 세상에는 이렇게 지독한 사랑은 없습니다. 여자가 도망가고 남자는 따라가고, 문 안 열어주겠다고 우기는 걸 기어이 문 열게 해서 선물 주고. 아가서의 내용이 뭡니까? 여자는 멍청한데 남자는 그 멍청한 여자, 새까만 여자를 보고 싶고, 잊을 수 없어서 잠을 못잘 정도에요.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승철이 부른 노래있지요? 김범수가 부른 노래입니까? 아가서의 주제가 뭐냐? “보고 싶다”입니다. 만나기 전에 집에 앉아 있으면서도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일을 못해요. 너무 보고 싶어서. 남의 여자보고 ‘내 누이’라 하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결정해 놓았어요. 아가서 끝에 봐도 여자가 동의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찾아가서 ‘너는 내 여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오죽했으면 ‘병이 났다’고 하지요. 이것을 무슨 병이라고 합니까? 상사병. 보고 싶어 병이 날정도, 이것이 아가서입니다. 요즘 여자들은 그런 남자가 나타나기를 원하지요. 그런 사람 기다리다가 나이 30을 훌쩍 넘기고. 30이 넘어가면 이제 자가가 보고 싶은 남자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40을 훨쩍 넘기지요. 자기가 보고 싶어 환장해서,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남자. 이것을 아가서에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특징은 한편이 일방적이라는 사실. 양쪽이 교류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한쪽 사랑만 있어도 넉넉하고 충분하다는 겁니다. 둘 다 미쳐서 사랑하면 이것은 문제가 일어나요. 집안 난리 납니다. 한쪽만 사랑해도 그 사랑에 모자람이 없는, 한쪽은 그냥 사랑 받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1서 4장은 뭐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했지요. 요한복음 14장 3절에 보면, “내가 다시 와서” 그 오신 게 뭐냐? 성령 안에서 오시거든요. 성령 안에서 와서 처소를 만들고, 성령이 오게 되고, 그 다음 요한1서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나니” 그러면 그 사랑과 성령이 만나면 성령 안에 사랑만 가득하기 때문에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는 두려움이 없고, 심판이 있지 않지요.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심판할 분이 아니고 미치도록 사랑해 주실 분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다시는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나니”(요5:24) 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 분명히 이런 말씀이 있는데 왜 교회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안 합니까? 왜 안 하는가 하면 교인이 육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 말고 ‘바쳐야 복을 받는다.’ 이런 대목만 골라서 이야기하고 돈만 챙기면 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영적인 성도들은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올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육적인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그 반응이 아주 미미해요. 굉장히 좋은데 억지로 억눌러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알았던 것이 다 사기였던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천국은, 처소는 우리가 목숨 바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 내 놓는다고 해서 그것 안 받습니다.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해요. 우리 주위를 동그랗게 파서 삽으로 떠버리면 흙과 더불어 그 안에 우리가 담겨 오겠지요. 우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를 흙은 떠서 처소를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 안에서 주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물론 그런 행위 자체가 사랑의 능력으로 오지만. 누가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 지워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는데,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지워지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고, 제가 아는 주님은 생명책에 있는 이름도 자기 마음대로 지울 수 있는 분입니다. 그걸 믿는 자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 설명을 그렇게 복잡하게 했는가 하면, 사람들은 육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야기하면 그것을 주님께서 행하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자칭 구원 받았고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가차 없이 지워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주님은 천국으로 천국을 부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라는 것도 같은 말이에요. ‘천국을 부순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니잖아요?’ 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제 답변은 ‘천국을 부술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을 못 믿잖아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천국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어야지요. 천국을 믿기 때문에 ‘천국 가기 위해서 뭘 이용할까’ 하다가 ‘예수 믿어야지.’ 이런 사람은 천국 못 갑니다. 그런데 천국은 예초에 포기해버리고 ‘천국 갈 사람이 아니구나.’ 여겼는데 예수의 능력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사람은 천국 갑니다. 똑같은 이야기지요. 아까 생명책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내 중심은 포기하세요. ‘나’가 자아아닙니까? 자아는 틀림없이 일방적으로 내가 내 자아를 만들었어요. 그래놓고 나를 구원해 달라고 우겨대니 이게 주님 보시기에는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죠. ‘네가 뭔데 엉터리 같은 자아를 가지고 그 자아 살려내라고, 영혼불멸 상태로 만들어 달라는 소리를 해. 원래부터 너는 너의 것이 아니고 나(주님)의 것인데. 구원해도 내가 구원하고, 지옥 보내도 내가 지옥 보내는데 네가 뭔데 날 구원해 달라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어디 그런 소리를 해.’ 그런 것도 주님께 맡기란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처소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을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성령 세례가 어떤 것인지 요한복음 14장을 통해 살펴봅시다. 여러분이 조금 피곤한 눈치를 보이시는데, 저도 눈치 빠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는 백발백중이죠.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이 진리의 영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철저하게 세상에 속한 사람과 주님께 속한 사람을 구분하는데 귀재예요. 누가? 성령께서. 성령은 지옥 갈 사람들에게 절대로 오지를 않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사람 파악하는 데는 귀신입니다. 창세전부터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선택한 자만 골라서 차질 없이 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창세전에 선택되었기 때문에 구원 받았지 내가 구원 받으려고 애써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상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들이 세례요한의 세례를 알고 있어도 성령세례는 모르고 있더라.’ 라고 되어 있고, ‘사도 바울이 안수를 하니까 성령세례 받더라.’ 그 대목이 나오지요. 여러분, 성령 받은 상태에서 예수 믿는 것과 성령 안 받고 예수 믿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게 오늘 문제예요. 이건 첫 번째 강의 들은 사람은 압니다. 그런데 문제 내놓고 2초도 안 돼서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지요. 처음 공생애 때 예수님은 뭘 인정했다고 했습니까?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지요. 한시적으로 인정해서 명령을 하지요. 그 때는 아직 십자가 지기 전이라서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성령세례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으면 성령세례는 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는 ‘다 이루었다’고 할 때만 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럴 때는 예수 믿는 것이 누구의 의지로 된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처럼 여기지요. 그걸 보여주는 때에요. 왜냐? 예수님이 “나를 믿으라.”고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믿겠나이다.’ 내가 믿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다는 이런 공식이 아직도 유지되는 곳이에요. 성령이 개입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 계시고, 내가 믿고 그것만 있으면 돼요. ‘이것으로 처소든 천국이든 성사된다.’ 라고 착각했던 그런 시절입니다. 성령 없을 때는 ‘내가 예수 믿으서’ 이것이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내가 어떻게 했더니만 예수 믿게 되었어. 내가 기도했더니만 믿음이 왔어. 내가 간절히 천국을 사모했더니만 꿈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서 믿게 되었어.’ 믿음의 주체가 ‘나’임을 포기 못하는 거죠. 그리고 성령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음의 주체가 만약 내가 아니라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구원 받는다면 내가 얼마나 속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기에, 내가 믿었다는 공로로 내가 구원 받는 것이 당연하지, 믿기는 내가 믿었는데 믿지도 않은 다른 놈이 나대신 천당 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겠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만 천국 데려가야 하나님답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뭔가 한 게 있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입니다. 아무 한 것도 없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믿는다는 고백을 누가 했어요? 내가 했지요. ‘내가 했기에 그걸 근거로 해서 그 공로로, 그 덕분에 다른 사람이 아니고 고백을 한 내가 구원 받게 된다.’ 이것이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의 논리지요. 내가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그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었고, 육에서 나오는, 나를 천국에 집어넣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믿습니다.’가 아니고 ‘믿을 테니까 천국 넣어주세요.’라고 자기의 미래 희망사항을 표출한 것에 불과하단 말이지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니까 ‘주여, 나는 개뿔도 구원 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 중의 괴수였군요. 그런데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내가 구원 받고자 하는 열망과 상관없이 이미 창세전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공로에 의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오니까 그 덕분으로 제가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면류관도 주님이 써셔야 합당합니다.’ 하고 내놓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게 되면, ‘내가 믿습니다.’가 깨져요. 그러니 손무성 목사의 질문이 잘못된 거죠. “목사님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죠.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정답이죠.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주체가 되는 것을 인정 못하지요. 왜냐? 성령이 주체가 되면 나는 성령 앞에서 죽어야 되니까. ‘나’라는 것을 따로 정립하지 않으면,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지 아니하면 달리 믿을 길이 없는 거예요. 예수 믿는 나를 안 믿고서는 내가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자의식으로 뭐든지 전개해도 모든 행동은 다시 나에게로 귀속되고 나에게로 되돌아온다는 피히테의 자의식입니다. 이게 내일 강의에 나옵니다. 무슨 짓을 해도 내가 한 짓이기 때문에 결국 그 보답은 나에게로 쏟아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자, 이런 사람의 두려움이 뭘까요? 10년 동안 예수 잘 믿다가 11년째 믿음이 없다고 여길 때, 그 사람은 두렵겠습니까, 안 두렵겠습니까? 13년째 잘 믿어도 소용없어요. 왜? 12년째 겨울에 예수님 재림하면 끝나잖아요. 지금 한창 믿음이 떨어질 때 예수님 재림하시면 나는 구원 못 받잖아요? 그러니까 항상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한1서에 보니까 ‘사랑(성령) 안에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아가서에 보세요. 나는 멀뚱하게 있는데 저쪽에서 열을 내며 사랑한다고 고함을 치고 찾아오신 분이 계세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이 있기 때문에 내가 행동을 주의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일부러 착한 일을 만들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착한 일을 만들지 않더라도 주님은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내가 그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만 알면 그만이지, 내 쪽에서 착한 행동해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따로 내가 주님 사랑하는 처소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존심 챙기겠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이야기합니다. “헌금하기 싫거든 하지마라. 단지 얻어맞거든 헌금해라.” 주님이 하신 일은 늘 우리를 깨지게 합니다. ‘내가 생색내는구나. 이것 없어도 사랑인데, 왜 나는 이걸 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에 어느 정도 보답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망상. 또 나의 자의식에 가치를 두는 시도. 만약 이것이 버릇이 되면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와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이 자꾸 찾아와요. ‘이 꼴이 내가 신앙생활 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겨우 몇 명 모이는 이것도 교회인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내가 찾아갈게”라는 말도 안 들리고, 아가서에 “주님이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도 안 들리고, “너희들이 날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는 그 소리도 안 들리고, 그저 불안하고 초조해서 벌벌 떨면서 ‘내가 어떤 조치를 하면 옛날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하면서 자기 챙기는 일에 급급한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육적 흔적으로 남아 있지요. 이런 육적인 흔적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 처소 안에서 계속 그리스도의 피만이 화목제물인 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그 방법 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불안케 하는 그 적들이 유리창 밖에서 막 달려듭니다. 우리는 겁나서 눈을 감고 “엄마야!” 하고 있는데, 보니까 적들이 유리창 밖에서 쓰러져 있어요. 주께서 적들을 다 처치했어요. 이것도 모르고 우리는 적들을 보고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아이쿠 죽었구나.’ 했었는데, 주께서 막아주셨어요.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이 말을 왜 하십니까? 지금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이 ‘내 갈 길 간다.’고 하시니까 졸지에 그들은 아비 없는 고아가 돼버려요. 왜냐하면, 3년 동안 그들이 원해서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12제자 뽑을 때 주님이 뽑으셨어요. 주님 따르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12명을 따로 뽑았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고 할 때, 그들은 생각하기를 ‘주님이 다시 온다.’ 자, 여러분들이 장차 올 십자가를 모른다고 치고, 제자들의 입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주께서 다시 오신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시나리오를 짤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잠시 은퇴했다가 옛날 주님 방식 그대로 샌들신고 --’ 이렇게 생각할 것이 뻔하지요. 이게 바로 착각입니다. 여러분은 생각하기를 ‘예수님 제자들은 좋겠다.’ 왜? 예수님을 직접 봤으니까. 몸으로 만졌으니까.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거기에 봤던 주님은 전에 있던 방식대로 같이 동거하는 방식대로 시간이 지나니까 허용이 안 됐어요. 부활하신 주님이 늘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본인이 원할 때 불쑥 나타났다가 붙잡아도 바람같이 떠나버려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애간장이 다 타게 만들어요. 옛날처럼 같이 보면서 지내면 좋겠는데, 예수님은 한 번 하신 방식대로 다시 하시지 않거든요. ‘새로운 보혜사 보내 줄게.’ 그것이 뭐냐? 성령이 온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미치고 환장합니다. 옛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누가 뭐라 해도 “봐라, 예수님 옆에 있잖아!” 라고 이야기하면서 우줄 댈 수 있는데,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봐라, 성령님이 함께 있잖아!”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나 제자들은 이상스럽게 옛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확실하게 의심이 없는, 확신 중에서 죽기까지 복종할 정도로, 진짜 주님이 딱 붙어 있어서 늘 상 같이 있다는, 이제 완성된 상태에서 함께 있다는 것을 더 즐겁게, ‘내가 주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왕좌왕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함께하실 때 그 흔적이 뭐냐? 반드시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루었다는 그런 방식으로 오시는 것.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항상 성령이 나타날 때는 뭘 느끼게 한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그 피의 사랑을 더욱 더 알게 하는 거죠. “너희가 날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증거가 뭐냐? 피다. ‘내가 피 흘려 죽었잖아. 이 보다 더 큰 사랑 있으면 내 놔봐? 없잖아.’ 이런 피의 사랑으로 다가올 때,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고아 같이 버려두지 않고 떠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예수님과 같이 잠을 자도 잠시 화장실에 가시면 제자들 곁에 없는 게 돼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미 벌어진 십자가 사건, 그 십자가 사건 하나만 있어도 그 십자가 사건을 항상 일깨워주시는 분이 바로 지금 함께 하신단 말이지요. 이것을 십자가 사건이라고 했지만, 요한 1서에서는 이것을 ‘화목제물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한1서 1장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빛 가운데 행한 증거가 뭐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이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의심되지 아니하고 이것이 인정되고, 동의 되면서 ‘아하, 내가 잘나서 구원된 것이 아니고 내 못난 것 뻔히 아시고 피 뿌림으로 이미 영생을 얻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이고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모이는 것은 돈에 의해 모이는 것이 아니고 피 묻은 사람끼리 모이는 겁니다. 그 피가 있는 사람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처소가 되지요. 자, 그러면 요한복음을 다시 봅시다. 아까 정 목사님과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가슴이 아팠어요. 우리교회 오랜만에 오셨는데, 우리교회가 정이 메말라서 세상교회처럼 잘 안 받들어서, 냉담해서 다시 오기 싫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설교나 복음에서 피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국 발견하는 게 뭐냐? 교회라는 보험회사 하나 발견하는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어느 교회에 가든 피 없는 교회는 절이나 마찬가지지요. 집사는 보살이 되고, 목사는 주지스님이 되는 겁니다. ‘할렐루야!’ 라는 것이 뭡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똑같은 거예요. 피 없어도 정이 많다. 그러면 갓바위가 되는 겁니다. 왜 피냐? 육은 일체 못 들어오도록. 만약 육이 영속에 들어와 버리면 무엇이 모독 받는가 하면, 예수님과 하나님만 알던 그 리스트, 명단 책이 모독 받지요.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이 만든 처소는 예수님이 일부러 먼저 방문해서 불러줘야 갈 수 있는데, 끄집어낼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만, 생명 책 명단 보고 끄집어낸다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명단에 포함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방문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육에서 영으로 와버리면 명단에 없는 사람이 천국에 포함 되잖아요. 그러면 뭐가 모독됩니까? 예수님과 하나님이 의논한 것이 완전히 모독 받지요. ‘아, 우리가 괜찮은 인간 있는데 몰라보고 이름을 뺏네.’ 하나님이 치매 현상이 있습니까? 생명 책 명단에 없는 인간이 천국에 끼어드는 그런 경우가 있겠어요? 없잖아요. 명단대로 하려면 철저하게 예수님이 찾아가지 않고서는 절대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예수님 하는 것이, 육을 육 되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너는 백날 기도해도 육이다.’ 라는 소리를 해야 그 가운데 진짜 성도는 ‘맞습니다. 맞고요. 진짜 나는 예수님 피 때문에 구원 받았지 제 힘으로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가끔 한 톨, 두 톨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밀어붙이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너는 육이다 오지마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광주 강의(07. 2. 23) 23-3 셋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과 아버지 안에 있는 상태, 이것은 인간이 도저히 가입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인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어떤 식으로 들어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방식 그대로 그걸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평소에 어릴 때부터 계속 살아 올 때 그 안에 누가 계셨습니까? 아버지의 영이 계신 것처럼, 마찬가지로 성도에게도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는 방식으로 그렇게 합류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이죠. 영혼불멸 사상에서 나온 욕망에 불과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천국은 전혀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 방식 외의 다른 천국은 상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요한1서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봅시다.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 말은, ‘하나님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어디 하나님이 있다고 하느냐?’ 이런 주장들이 많이 있잖아요. “본 사람이 없으되” 일부러 안 보여줘요. 보여주면 그것은 육이 되니까. 육적인 하나님이 되니까 그것은 안 되고.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보세요. 이것이 평소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서 사랑으로 살았던 그 사랑을 우리에게 그대로 그 상황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봤으면 좋겠다.’ 이런 방식은 육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가짜 신이지 진짜 신은 아니란 말이지요. 진짜 하나님의 방식은 ‘십자가 피’, 다른 말로 하면 ‘사랑’ 이것으로 충분하고 넉넉해요. 그 사랑을 우리가 일부러 상기하려고 애쓰는 사랑은 가짜고, 성령께서 그 사랑을 회상케 하시는 그 놀라운 능력 안에 있거든 이미 천국 안에 있다고 믿으시면 됩니다.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결과적으로 안다는 거지요. 14-16절에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란 말이지요. 예수님이 하신 일은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요한복음 전체 다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다시 오면” 그것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잖아요.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하신 일 모두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정점이고, ‘베드로야, 네가 목숨 바쳐도 못 온다.’ 이것도 예수님이 하신 일이에요. 방금 우리가 요한복음 봤지요. ‘내가 보혜사를 보내니까 그 보혜사가 오게 되면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 이것도 예수님이 하신 일. 그 모든 것이 다 인정되고 믿어지는 겁니다. 누가 올 때?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17절에 “이로서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심판이라는 것은 통과해야 담대해 져요. 지난 설 전날(토요일) 음식 준비하기 위해서 장을 보고, 설날(일요일) 아침 일찍 어머니께 세배 드리러 갔다가 세배하고 예배드리고 음식 먹고 오는 도중에 차 안에서 아내가 이런 말을 해요. “그렇게 토요일에는 스트레스를 받더니만 이제 속이 시원하다.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그래서 제가 얘기 했어요.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기분 같지?” 운전면허 시험 칠 때는 ‘혹시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서 내리지요. 그런데 막상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속이 시원하지요. 이처럼 ‘담대함’이라는 것은 언제 느끼는가 하면 심판이 지나가야 비로소 ‘나, 심판에서 벗어났구나. 만세!’ 하고 담대함을 가지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담대함을 심판 후가 아니라 심판 전부터 담대함을 가진다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뭘 보고? 십자가 사건 보고. 화목제물 보고. 피 보고. ‘야, 저토록 날 사랑했구나!’ 그 사랑이 있으면 그렇게 담대한 거예요. 연예시절 남자가 ‘입술을 다오. 몸을 다오.’ 하지만, 여자는 언제 주느냐 하면 담대함이 있을 때 줘요. 정말 저 남자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질 때는 아낌없이 바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실수한 경우가 한 둘이 아니지요. 남자가 날 버림받은 여자로 취급 안 할 때, 그 때는 요청 안 해도 아낌없이 다 줍니다. 마치 번지점퍼 하듯이 날아서 남자에게 가지요. 그러면 남자가 부담을 느끼면서 ‘왜 이래, 왜 이래? 우리 속도 너무 빠르다.’ 이렇게 되거든요. 처음에는 남자가 여자한테 ‘입술을 다오. 내 못 믿나? 믿으라.’고 하거든요. 그러다가 여자가 ‘예라 모르겠다. 가져가라.’ 이렇게 나오면, 남자가 ‘안 된다. 왜 이러는데?’ 하고 부담을 느껴요. 지금 성경은 육적으로 계산을 튕겨서 믿을 만 해서 믿는 것은 천국에 못 갑니다. 내가 예상치도 못했는데 그냥 십자가 피로써 다 이루었다는 외침 소리 듣고 그 외침 소리가 낭낭하게 귓가에 들려오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심판에 이러지 아니하나니’라는 요한복음 5장 말씀이 이젠 믿어지는 거예요. ‘그 피와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는 말이 받아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내 놓을게 뭡니까? 자기 자랑, 학력, 재산 이것이 아니고 뭡니까? ‘내가 인간답게 사는 것은 오직 주께서 심판에서 면제하신 그 화목제물, 사랑 그 덕분에 산다.’ 이런 고백이 저절로 막 나오잖아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서로 사랑한다.’고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사랑을 끄집어내면 안 됩니다. 항상 사랑은 내 사랑,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깨고, 그것을 밟고 나오는 사랑입니다. 주의 일은 그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를 밟고 튀어나온단 말이지요. 내가 주님 사랑하고 내가 형제 사랑하는 것을 밟고 주님 사랑만 튀어나올 때 그 사랑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내가 너 사랑했다. 내가 너에게 돈 빌려줬다. 내가 너한테 잘 해 줬다.’ 이런 것이 안 튀어 나오지요.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봐 줬는데’ 그런 소리 안 나오지요. ‘성경 말씀대로 이웃 사랑하라고 해서 내가 얼마나 너의 뒤를 봐 줬노? 그런데 지금 네가 이렇게 나오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이건 노림수지요. 진짜 사랑은 뭔가 나의 노림수 사랑이 깨어지는 그 순간 나오는 사랑입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내가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추상적으로 내가 지어낸 이것이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박살나고 뭉개지면서 튀어나올 때 나오는 그 에너지 그것이 사랑입니다.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이 말이 육적으로 보면 굉장히 어려워요. 형벌 받고 싶은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성경은 말합니다. 형벌을 누가 주는 게 아니고 스스로 형벌을 만들어요. 물론 나중에 심판이 있지요. 있는데 심판하기 이전부터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살다가 지옥 가지.’ 하는 초조와 불안. 초조와 불안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은 이미 지옥 갈 사람입니다. 왜냐? 처소 안에는 사랑뿐인데, 처소 밖에 있으니까 자꾸 자기에게 형벌을 가하는 겁니다. 그러면 좀 더 완벽해 질까 싶어서. 자동차 안에서 창문을 보면 차 안과 밖이 구분됩니다. 밖에서 자동차를 보면 자동차가 자그만 해요. 아무리 큰 차를 타고 있어도 밖에서 보면 작아요. 그런데 막상 차 안에 들어가면 왠지 차 안이 넓어져요. 그래서 안에 있는 넓이만큼 바깥 넓이도 그만큼만 넓어요. 이것은 인간의 심리가 그런데, 이것은 내가 있는 곳을 위주로 항상 크게 보는 성향이 있어요. 남이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것이 더 아파요. 어떤 여자가 TV에 나왔다면, 내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겁니다. 옆에서 ‘아니다’고 하면 내가 못 참아요. 왜? 내가 본 것이 맞고, 상대가 본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있는 세계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창문 밖에 있는 실제 세계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랑이란 것을 하게 되면, 남이 주는 사랑은 사랑 같지도 않아요. 남이 주는 사랑은 장난이고 내가 주는 사랑은 정말 진실한 사랑이에요. 그래서 이 사랑 안 받아주면 용서가 안 돼요. 남이 주는 사랑은 심심풀이 장난으로 보고, 내가 제공하는 사랑은 정말 중요한 사랑이라서, 남이 주는 은혜는 잊어버리고 내가 주는 사랑만 꼬깃꼬깃 기억해 놓았다가 그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응답 못하면 상대방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그런 본성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있으니까 이런 사랑에 의해서 형벌을 가중하는 거예요. ‘이것들이 내 사랑을 몰라줘? 내가 누군지 알아? 골목대장 마빡이야! 이 마빡이를 몰라보고.’ 이렇게 자꾸 자기 형벌을 가중하는 겁니다. 그런데 심판이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듬어준다는 뜻입니다. ‘저는 심판 안 받지요?’ 이러면 또 불안해져요. ‘저, 심판에서 면제 되었지요? 아 신난다!’ 이런 사람은 수상해요. 아주 수상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랑 안 받으면 형벌 받을까 걱정하는 사람이에요. 출애굽 할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잖아요. 피를 발랐으면 주님의 약속을 믿고 느긋하게 있으면 될 텐데, 문설주에 피를 발라놓고 둘이 싸우면서 ‘누가 더 사랑 받는가 시합해 보자.’는 것은, 지금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도 안 하고 피를 보고 넘어갔는데 그 사람은 자기 보고 넘어갔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만 상대합니다. 그리고 심판이 면제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고 피보고 그냥 넘어가신 거예요. 그 예수님의 피의 사랑이 우리에게 모든 형벌(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하는 것)을 추방시켜 버립니다. 이런 것들을 논의할 가치조차 없음을, 추방시켜 버리고 잠시나마 그 빈 자리에 주님의 사랑이 자리 잡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말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내 중심주의를 쫓아버리는 것. ‘나는 잘 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라는 것조차도 ‘비켜, 그런 것은 묻지도 않았어.’ 하고, 내가 잘했나, 못했나를 따지는 순간부터 두려움이 오기 때문에 아예 그것을 추방해 버리고,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비켜가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한 마디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가 우리를 사랑한 것은 우리가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이것은 아니지요. 순서가 바뀐 건 아니란 말이지요. 그가 먼저 사랑했기에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내가 있잖아요. 내가 남잖아요. 이렇게 되면 두려움이 찾아오고 형벌이 오지요. 두려움에 대한 대가가 찾아오겠지요. ‘내가 잘했으면 벌 안 받을 건데 못해서 벌을 받았어.’ 이것이 ‘나’라는 가상 주체가 있기 때문에 자꾸 형벌과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이 오게 되면, 아가서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죽도록 사랑하시는 분이 날 찾아왔기 때문에, 얼마나 사랑했으면 내 앞에서 죽었을까요. 그 피를 흘린 사랑이 있기에 더 이상 내가 나를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 때문에, ‘나’가 없는 상태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이제 요한1서가. 서서히 풀리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예수 믿었으면 사랑이 생겼을 텐데 그 사랑 끄집어내 보세요.’ 이렇게 되면, 사랑을 많이 끄집어 낼 때가 있고 적게 끄집어 낼 때가 있고, 사랑 끄집어내면서 사실은 비수의 칼을 은밀히 숨기고 사랑한다면서 찌를 수가 있잖아요. 이것을 상대방은 몰라도 본인은 아니까 본인이 사랑 못했다고 오는 형벌을 스스로 자기가 발생시키겠지요. ‘사랑하라’는 말씀을 율법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요한1서에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 미치겠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 재림하시면 안 되는데. 주님, 재림 한 주간만 미뤄주세요.’ 이런 식으로. 또 예를 들면 딸이 결혼식을 하는데 이 목사님 설교에 의하면 결혼식 때에 주님 재림하신다고 하는데 지금 내 정신은 재림에 있지 않고 아이 결혼식에 있는데, 혼수를 3,000만원 해 달라고 하는데 2,000만원 밖에 못했는데 애가 시집가서 구박받지는 않을까?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주님만 사랑해야 되는데 돈을 사랑하고 --- 주님이 ‘누가 뭐랬어? 누가 2,000만원 하라고 했나? 3,000만원 하라고 했나?’ 괜히 자기가 자아의식이 강하다보니 스스로 형벌을, 두려움을 자초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결론적으로. 성경 해석을 십자가 사랑에서 해석하면 십자가 사랑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율법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결국 누구한테 돌아옵니까? 내가 못하면 내 육에 의해서 내가 지옥갈 수 있다는 두려움만 찾아옵니다. 그래서 루터가 그런 이야기했고, 저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모든 성경 말씀은 피가 묻혀 있다.” 모든 성경 말씀에 보면 피가 흥건히 고여 뚝뚝 떨어집니다. 이게 뭐냐? 사랑은 모든 율법을 완성했다는 그 시대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가 우리 코앞에 보이고 눈앞에 보이는데, 우리가 우리 육에 현혹되어서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행동했고 자신을 철저하게 해서 주께 복을 따내려는 음흉한 심보도 있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찾아오시면 우리 안에 우리의 허락 없이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제 푸근하게 여기고 주님께서 지독히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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