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일서 5강 / 07.1.26 본문
광주 강의(07. 1. 26)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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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1서 4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 영이냐, 아니면 참된 영이냐? 거짓 선지자냐, 참된 선지자냐? 하는 것은, 본인이 참된 선지자라고 우기고 큰소리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육체의 그 의미, 담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참된 선지자냐 아니냐가 판명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육체가 지닌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은, 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6절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속했다’는 말을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지금 공간개념을 가지고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속했다’는 것은 우리의 우두머리가 따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 우두머리에 의해서 영향 받는 그러한 형편과 처지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봐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고 상대방을 이해할 때도 그가 개인적인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누구로부터 영향을 입고 그의 지시와 통제를 받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이분으로부터 받습니다.’ 하는 서로가 다른 공간의 속성으로 비교를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 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이 참된 영과 거짓 영을 구분하는 절대 기준이 되는가 하면, 예수님의 육체에서 비로소 참된 영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많은 거짓 영이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 종교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많은 종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많은 종교들이 무엇을, 인간들에서 무슨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 인간들의 무슨 한 풀이를 들어주기 위해서 종교들이 그렇게 융성하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볼 때, 자기 육신이 이렇게 괴롭고 고통스럽고 자기 인생을 돌아볼 때 슬프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이고 예수고 하지만 자기 몸이 아프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픈가? 남은 안 아픈데 나는 왜 건강을 잃었는가?’ 라면서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을 가난하게 산다든지 힘들게 산다든지,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다든지, 민족이 나라를 빼앗겼다든지, 직장에서 바른 소리 했는데, 강제 퇴직을 당했다든지 하는 경우를 당할 때, 사람에게는 욕망이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기존에 내가 잘나야 된다는 욕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실이 거기에 안 따라주는 것에 대해서 뭔가 추가적으로 하나님께 애타게 기대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육체의 연약함을 알면 그 때부터 안 연약한 육체, 이상하게 나쁜 짓 하면 두 번 다시 나쁜 짓 안 하는 내 몸뚱아리. 그것을 잔뜩 기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되느냐? 사람은 새로운 신선한 영, 거룩한 영, 나를 훌륭하게 만들어 낼 능력을 담뿍 안고 찾아오는 영, 대단한 위력을 가진 영, 나로 하여금 모든 괴로움과 슬픔과 눈물을 씻어줄 수 있는 그러한 고상한 영, 성품도 착해지는 그런 영, 그 영을 구하게 되고 찾게 되지요. 괴로운 나와 그리고 그것을 회복시켜 줄 영, 이것이 인간의 종교적인 본능이고 본심입니다. 순복음 같은 경우에, 순복음 교단이 커지게 된 것은 조용기 목사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몸이 그렇게 아팠는데 성령을 받고난 뒤부터는 깨끗해져서 성령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여기에서 가능성이 수입되지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절망이지요. 불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현실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가능성, 된다는 희망이 남아있는 한 사람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낼 수가 있습니다. ‘참된 영은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나온다.’는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그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잖아요. 죽었으니까 부활하고, 부활되니까 성령을 보내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구원 받을 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예수님의 아픔은 이것은 남의 아픔이기 때문에 자기 아픈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몰라요. 거기에 별 관심도 없고. 중요한 것은 내가 아프고 내가 인생이 고달프고 괴롭다는 겁니다. 자기의 욕구대로 안 되는 비참함 속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그 원인을 남들에게서 찾고자 해도 찾을 수가 없어요. 물론 사람이 양심이 있는 이상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내가 옛날에 죄가 많아서, 업보가 그래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게 여러분 맞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고생하다가 죽는 것이 우리가 죄를 지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겁니까? 그 죄라는 것이 우리가 나름대로 측정한 죄잖아요. 자기가 스스로 기준점에 되어서 ‘이것은 죄고, 이것은 의다.’라고 규정한 거잖아요. 성경에서 무슨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본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의 뜻과 관계없이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선악적인 구조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서, ‘이것은 죄고 이것은 의구나.’ 이렇게 나오는데, 그러한 판단 때문에 만약에 고난 받고 한다면 그것은 욥기와 달라요. 욥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고요. 왜냐하면, 욥 같은 경우에는 친구들보다 더 착한데 문제는 친구들이 욥보다 더 고통을 안당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친구들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고, 욥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정말 욥이 죄 값으로 힘든 고난을 받는다면 욥보다 덜 착한 친구들은 욥보다 더 심한 벌을 받아야 합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사도요한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육체 그것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왜 하나님께서 나의 이 육체 중심으로 출발하지 않고 예수님 십자가 지신 그 육체 중심으로 모든 일을 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모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곧 성령께서 임해야 된다는 것도 모르게 되지요. 우리 허약한 육체와 그것을 능히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고상한 영이 임해서 영과 육이 결합될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거짓 영들이 주장하는 주장이라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오셨는가 하면, 우리의 육체는 죄가 나오기 때문에, 죄인은 성령이 임할 수 있는 그 대상이 못됩니다. 죄인에게 성령이 온다면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이 아니고 그냥 더러운 것도 봐주는 영이 돼 버려요. 그것은 엉터리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영이 아니고 그냥 성령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그런 귀찮은 일 할 필요 없습니다. ‘너, 너, 너 구원 받아!’ 이러면 되는 거예요. ‘아이쿠, 내가 보니까 너 고생 많은데 불쌍히 여겨줄게 구원 받아!’ 이러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해서 구원 받을 영이 나온다면, 이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의 괴로움, 병듦, 허약한 육체 가지고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라는 소리를 못하도록 완전히 입을 막아버리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구원 받는데 꽉 막혀 있어요. 베드로는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내 놓고 주님 따르려는 이런 다짐을 했는데 주님께서 그것을 거절하잖아요. ‘안 된다. 너는 목숨 받쳐도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꽉 막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막혀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전도해서 구원 받을까요?’ 라는 것도 죄고, ‘찬양해서 구원 받을까요?’ 라는 것도 죄고,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을까요?’ 라고 나오는 것도 죄예요. 왜냐하면 구원 받을 자격이 안 되는데 구원 받으려고 하는 그 의욕과 시도 그 전부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타고난, 자기가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자기 전체가 죄인인 것을 인정 못하겠다는 데서 나오는 오기 또는 고집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에 비위를 맞추면서, ‘당신의 구원 욕구와 회복 욕구를 성령이 오게 되면 달성할 수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들이 바로 적그리스도고 거짓 영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육체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꽉 막혀있다고 하면 두 영토가 완전히 구분되게 되겠지요. 하나는 예수님이 계신 영토. 거기는 성령이 충만합니다. 여기는 주님의 거룩한 육체가 있으니까. 이것 말고 꽉 막혀있는, 서로 내통할 수 없는 두 영역이 서로 통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바깥에 있는 영이 있죠. 이것은 바로 꽉 막혀 있는 영역인데, 주님의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효과를 가지고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인간에게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그 효력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예수님 자기 영역으로 빼 옵니다. 자기 영역서 합류시키지요. 그렇게 되면 원래 있었던 동네 사정도 알고, 새로 자기가 소속된 동네도 아는데,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요. ‘나는 전적으로 구원될 자격도 없는 인간인데 예수님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기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그는 무엇만을 증거하는가 하면 ‘나는 이런 일을 해서 구원 받았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나는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이다.’ 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인간이다. 이것을 요한1서 4장 4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6절에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뜯지 아니하나니” 왜? 꽉 막혀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우리도 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아주 우습게 여겼지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새로운 영역에 오다 보니까 저쪽 사정 이쪽 사정을 다 아니까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그 영역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깊이 알지요.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람에게 다가갈 때는 요령을, 어떤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성령이 임해야 구원 받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순복음 같은 경우에는 인간의 가능성을 계속 제시합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하니까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소리 듣고 병들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가능성 있는 기적을, 희망을 안고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의 말을 듣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입하는가 하면, 먼저 성령 받은 사람들의 경우를 전부 다 모아서 그들은 어떤 식으로 거듭나게 되었는가 그 방법론을 다 배웁니다. 물론 그 전체가 불가능성이 아니고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배울 욕구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아예 되지도 않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배우겠습니까? 하면 되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 방법론을 몰라서 못했을 뿐이지 그 방법을 알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하면 할 수 있다.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이 희망으로 모이는 겁니다. 모여서 자기가 존경했던 사람과 같이 방언이 터지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소망하는 바를 다 얻었다고 여기고 안심을 하게 되지요. ‘야, 나도 성령 받은 사람의 부류에 속했구나.’ 그러면 자기가 못했는데 자기가 이렇게 되니까 이것을 자랑삼아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는 거예요. ‘당신도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된다니까.’ 이렇게 자꾸 희망을 주니까 그 사람도 또 제 2의, 제 3의 자기처럼 또 그렇게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그렇게 해서 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해서 순복음 교회가 커진 것은 뭐냐 하면, 불가능성이 아니라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성령을 달라고 하면 주어진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가지고 그렇게 설명을 해요. 사도행전에 성령 받은 사람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순복음 교회는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은 어디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고 천사였나?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들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라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처럼 우리도 성령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방언이 터지고 병을 고치고 서로 자기 재산을 나눠주고 이상적인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희망 자체가 사람에게 희망을 주지요. 사람이 희망을 달성했는가가 아니라 계속적인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살맛을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하나가 성취되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데, 그 다음 목표도 달성할 수 있다고 계속 새로운 희망을 제시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순복음 편을 들어주지를 않지요. 그것은 이단이니까. 요한복음 16장 끝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여기에서 ‘내 안에’라는 말이 나오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에서 세상을 이겼다는 것은 누가 이겼다는 것입니까? 지금 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아까 한 이야기를 연결시키면 이렇습니다. 환란을 당할 때 이것은 성령이 안 와서 환란 당한다. 성령만 오면 환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서 영을 찾게 되면 순복음적인 영밖에 찾을 수가 없어요. 물론 거짓 영들이지요. 그런데 성령 받아도 환란 당할 때 그 의미를 이렇게 봐요. 환란에서 벗어나서 승리가 아니라 환란 속에서도 승리가 되어야 그게 참된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환란은 환란대로 있고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승리감을 마음껏 누리는 것,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환란의 대처 방법을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또 내가 너무 어렵다. 힘들다. 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내가 힘들든 힘들지 않든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승리가 나아게 임하니 그 승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비록 환란 중에 있더라도 그 환란을 구태여 피해 갈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 안에서 이미 승리를 만끽하게 만드는 그런 성령이란 말이지요. 주님이 승리했기에 내가 구태여 승리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요한1서 다시 보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은 이미 승리 안에 속한 거지요. 그리고 그 승리하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아니고.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육체만 고집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왜 우리 육체부터 시작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지요. 예수님을 우리 소속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예수님 소속으로 만들어서 예수님이 이긴 그 이기심이 우리의 이김이 되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공간 개념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신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 다음 요한1서 4장에 보면 사랑에 대해서 나오는데,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랑을 설명하면서 구태여 사도요한이 이 말씀을 삽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넣지 않고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시고 화목제물 되었다.” 라고 이렇게 썼을 때,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는 것을 삽입하는 것과 이것을 빼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차이점이 나올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는 것이 없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은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사랑을 고대했다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했다든지 돈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어 미치고 죽겠다든지 그런 정성어린 열성과 성의를 아주 귀하게 보셔서,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사랑 여기 있다.’ 라고 사랑을 주는 냥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필요 없어. 나는 천당 가지도 않을 거야.’ 라고 했는데 주님께서 찾아왔을 때, 그래서 구원 받았을 때, 어떤 사람이 묻기를 ‘당신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한다면, 그 사람이 반드시 무슨 말을 집어넣겠습니까? ‘글쎄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니까.’ 라는 말을 반드시 집어넣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교회에서 인간의 가능성 가지고 목회한다면, 희망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키우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신자를 제일 싫어하겠지요. 왜? 아무것도 안 해도, 오히려 하나님을 미워했는데 사랑받았다. 이렇게 되니까 그것을 본봐서 ‘에이, 나도 기도 안 한다. 전도 안 한다. 헌금 안 한다.’ 이렇게 나오니까 교회 꼴이 될 리가 있습니까? 교회가 부흥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신자를 제일 싫어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뭐라고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 속한 교회가 아니고 세상에 속한 교회가 그렇다 이 말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희망을 계속 부여함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결합이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 독생자를 보내심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는데 그냥 하나님이 예수님과 의논해서 알아서 일방적으로 요구하지도 않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내신 겁니다. 10절에 그것이 나오잖아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이것이 사랑이란 말이지요. 왜 사랑할 수 없습니까?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우리 죄를 위하여 화물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화목제물이란 것은 모든 제사를 마감하는 마감재 역할을 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제사는 ‘모든 제사는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더 이상 추가될 제사도 없고 더 이상 추가될 제물도 필요치 않습니다. 화목제물 받았거든 하나님의 완결된 사랑을 다 받았다고 여기시면 합당합니다.’ 라는 뜻에서 화목제물을 사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화목제물 받고난 뒤에 또 구원 받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자기 행동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면서 추가적으로 어떤 다른 돈이나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해 줄 테니까 추가적으로 이런 일 저런 일 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이것은 조건부 사랑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나는 그런 것 못하겠습니다.’ 하면서 그 사랑을 거부할 것 아닙니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랑은 주지 마세요. 흔히 말해서 ‘당첨되었습니다.’ 해 놓고 ‘세금은 내셔야 합니다.’ 하면서 세금이 상품 값보다 더 많은 것. 이런 사기를 치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사기 치는 분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화목제물이란 것은, 쉽게 설명하면 비디오나 영화 볼 때, ‘감사합니다.’ 하고 자막이 올라오는 거예요. 이 자막이 올라왔다는 것은 영화 끝났다는 말입니다. 더 진행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사랑으로 사랑한다.’ 어떤 사랑입니까? 화목제물 같은 사랑으로 사랑한다. 라는 말은 더 이상, 그 화목제물 받고 또 다시 우리가 추가적으로 더 보테야 구원 받는 일은 일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요구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약 요구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죠. 요한1서 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했습니다. 우리 피가 아니잖아요. 우리 외부에 계시는 예수님의 피를 보고 우리의 죄를 용서한 거예요. 하나님이. 내 정성도 아니고 내가 하는 사랑도 아니고 예수님의 흘린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추가적으로 더 할게 없다 이 말입니다. 그 피가 있는, 그 사랑이 있는 공간에 우리가 놓여 있으니까 우리가 매일같이 거기서부터 뭘 부여받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4장 18절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두려운 경우가 언제입니까? 지금 이만큼 확보해도 또 다음에 뭔가 하지 않으면 이미 확보한 것도 보장 못한다. 할 때 자연적으로 두려움이 생기겠지요. 그러니까 온전한 사랑. 다른 말로 ‘피’, ‘화목제물’ 감사합니다. 하고 얻은 그 사랑만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이미 우리는 구원 받은 자이기 때문에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하는 그러한 안절부절과 공포감과 두려움과 그런데서 오히려 온전한 사랑이 내어 쫓아 버리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이 될 때는 ‘주여, 이 말씀 안 지켰는데 벌 내리실거죠?’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십자가와 예수님의 피를 생각해 보면, 화목제물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을 다 이룬 그 사랑을 생각해 보면 ‘내가 부질없는 두려움 속에 사로잡혔구나.’ 하고 깨닫게 되지요.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은 어디에 속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육체에서 나오는 성령 안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18절에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는 말에서, 두려움을 내 쫓는다는 말은 악마의 협박과 공갈도 내어 쫓는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오면 다 쫓겨 가게 마련이죠. 17절에 보면,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여러분,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진단 말은, 심판 날이 언제인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심판 날이 아닌 지금도 담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주님의 온전한 화목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화목제물은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지 우리의 피를 짜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는가 하면, 그 피의 사랑이 일방적으로 퍼부어지는 그런 공간, 그런 영역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묻지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하면, ‘피로 구원 받았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어요. 이때 예수님의 영역에 같이 속하지 않은 사람은 ‘당신 그렇게 믿으면 이단이지. 그러다가 나중에 나쁜 짓 하면 지옥 가려고?’ 하고 본인이 두려워하는 두려움을 우리한테 적용시키려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이렇게 두려운데 당신은 뭘 믿고 안 두려워하느냐?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 보니까 이단 아닌가?’ 오히려 우리보고 이단이레요. 자기들처럼 안 두려워한다고. 우리는 예수 피만 믿는다고 이단이라는 겁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저들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 기준이 뭐라고요? 하나님께 속했다는 우리가 기준이 됩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의 육체, 십자가 사건, 십자가 피 이것이 기준이 되어서 한쪽은 심판 날에 지옥 가는 그 두려움 속에 빠져서 결국은 그 두려움을 안고 지옥 가서도 두려워하는 그 인간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역시 두렵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 이루었음을, 우리가 사랑 받아서 구원 받지 내가 주님 사랑해서 구원 받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위력이 지금 안전하게 돌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피와 주님의 화목제물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마귀에게 속아 살아왔는지 알게 됩니다. 내가 자질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영역이 하나님의 거룩한 피의 영역이고 오직 사랑만 주어지는 그래서 내 죄가 다 씻어지는 영역에 속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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