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일서 2강 / 06.9.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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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해 봅시다. 생명이 등장했다는 말은, 지금 이 세계가 죽음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간단하지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없는 세계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생명 되시는 분이 오셔야 이 세상이 죽음인 걸 알지, 생명 되시는 분이 안 오면 우리끼리 유사생명을 조작해 내게 됩니다. 그런데 생명은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구분해 보겠어요.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음’ 이것이 서로 달라요. 그리고 이것은 뭐냐 하면, ‘죽어 있는 것’과 ‘죽음’이 다릅니다. 현재 우리는 ‘죽음’ 속에 있으면서 ‘죽어 있는 것들’이 되지요. 예수님은 살아 계시면서, 예수님만이 ‘살아 계신 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구분을 하지 아니하면 -- 많은 사람들이 제게 묻기를, “목사님, 생명이 뭡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지금 살았다는 이야기에요, 죽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목사님 말씀 들으면 성도는 주님 안에서 생명을 얻어서 산 사람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맨날 죽어간다고 이야기하니까 헷갈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우리가 살아 있는 겁니까, 죽어 있는 겁니까?’ 라고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서 답변을 해 달라고 하는데, “우리가”라고 할 때 이미 이것은 우리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할 때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할 때, 예수님이 생명이고, 예수님 이외의 모든 사람, ‘우리’가 되든지 ‘너희’가 되든지 그 모두는 죽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있다는 이것을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있는데 이것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참 곤란합니다. 아무리 죽었다고 해도 꼬집으면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리 누가 ‘죽었다’고 해도, 그래도 ‘저는 살아 있습니다.’ 라고 우기기 때문에, 정작 생명 되시는 분이 왔을 때, ‘아하,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우리는 죽어 있구나.’ 라는 것을 비로소 알지요. 성경은 뭐냐? 우리가 죽어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죽어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지요. 성경은 예수님이 중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이 떴다는 말은, 이로 인하여 우리는 자동적으로 생명이 아니고 죽어있는 존재였구나.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음이 우리 속에 있고, 죽을 때가 되면 그 죽음의 세력이 우리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고, 그 중간에 -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 죽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죽음의 지배를 받아서 지금은 어린 아이지만 나중에 늙어서 죽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사이에 있기 때문에 죽음 안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죽어있다는 것을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다면, 우리가 또 오기가 있지요. ‘죽으면 죽지 뭐. 죽는 게 무서우냐?’ 이렇게 되는데, 죽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고 왜 죽어 있느냐 하면, 이게 요한일서 1장에 나옵니다. 이게 죄 때문에 죽어 있어요. 여기서 이걸 설명해 드려야하는데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고 하잖아요. 이것은 잘못된 겁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죄가 사람보고 죄를 드러내게 사용하지요. 죄는 우리보다 힘이 세고, 우리는 죄보다 힘이 약해요. 우리가 죄를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죄가 우리를 다루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가 자기 새끼들을 확산시키는 겁니다. 자기 본질을 우리 인간을 통해서 죄를 이 세상에 퍼뜨리는 그런 일을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우리보다 더 강해서 우리를 통해서 죄가 이 세상에 퍼질 때에 어떻게 퍼지는가 하면, 이게 윤리적으로 퍼집니다. 요게 어려워요. 윤리적으로 도덕적인 모습으로 죄가 퍼져요. 윤리적, 도덕적이라고 할 때 이게 두 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 죄를 아직 짓지 않았다.’ 반대말은 ‘나는 그 죄를 이미 지었다.’ 첫 번째, ‘나는 그 죄를 아직 짓지 않았다.’하는 경우나 두 번째, ‘나는 그 죄를 이미 지었다.’는 경우나 둘 다 예수님 앞에서의 죄는 아니지요. 예수님 앞에서는 뭘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무조건 죄로 인한 죽음인데, 예수님의 생명을 생각 안 하고 우리 인간들끼리 보면 둘로 나눠집니다. ‘아직 나는 그 죄를 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착하다. ‘나는 그 죄를 이미 지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구분한다는 자체가 윤리, 도덕적 지평이라는 겁니다. 지평. 건물이 있는데, 1층이 있고 그 위에 한층 더 있으면 2층이지요. 1층 102호나 103호나 104호나 공동점이 뭡니까? 모두가 1층에 속했지요. 이것을 1층 지평이라고 합니다. 이해되십니까?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같은 1층에 있으니까 같은 지평에 있는 것입니다. 철학에서 ‘지평’이라는 것은, 못 만났다 뿐이지 시간 지나면 우연히 만날 수도 있는 옆집 아저씨 이런 뜻입니다. 같은 동네에 전부터 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윤리, 도덕적 지평이라는 것은 1층에 해당되니까 결국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죽음 속에서 대화가 서로 통하고 사상이 통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뭘로 봤기 때문에 그런가 하면, 윤리, 도덕적 지평으로 - 이제 지평이란 말 이해되지요? 그런데 생명은 지평이 달라요. 지평이 다르다는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노는 동네가 다른 거예요. 요즘 부산에서 조지 래드를 강의하는데, 부산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래드라는 신학자가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은데요, 그 문제점이 뭐냐 하면, 영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1층 역사 지평으로 전환시켜버려요. 그래서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성령을 받게 되면 윤리, 도덕적 사람이 된다.’ 이렇게 주장해요. 이 사람은 뭘 영적이라고 보는가 하면, 윤리,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을 영적이라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마귀는 뭐냐? 윤리, 도덕적으로 안 살도록 요청하는 게 마귀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아마 분명히 철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윤리적, 도덕적 삶이냐? ‘나는 그 죄를 아직 짓지 않았다.’ 혹은 ‘나는 이미 그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다.’라는 이 두 가지의 서로 다툼이죠. 저는 이러한 인식 자체가 노는 동네가 다르다는 겁니다. 이것은 죄 안에서 윤리, 도덕적 기준으로 봤을 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고, 내 안에 얼마나 도덕적인 것이 남아 있으며 선한 것이 남아 있는가를 그냥 측정하고 개발하는 용도의 책일 뿐이지요. 세계적으로 유수한 신학자가 그런 소리 한다는 게, 이 신학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 신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저는 거기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 이야기하기 전에 요 대목을 다시 한 번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리니까 잘 들어보세요. 미술에 인상주의라는 것이 있어요. 인상주의가 미술 사조에서 뭘 의미하는가 하면, 진짜 밖에 있는 사물이 어떤 모양세냐? 이것이 궁금해서 밖에 있는 사물을 그대로 그리고 싶은 것이 인상주의에서 나오는데, 인상주의는 유명한 마네, 모네, 반 고호 이런 사람들인데, 이들은 화가로서 어떤 성당을 그렸어요. 그런데 아침 9시에 그린 그림과 12시의 그림과 오후 3시의 그림이 다 달라요. 똑같은 지짐에서 똑같은 건물을 그렸는데 다 달라요. 왜냐하면, 진짜 사물에는 빛이 내려와서 빛이 팍팍 튀잖아요. 아침에는 분홍색이다가 오후에는 노란색, 저녁 무렵에는 주홍색으로 바뀌잖아요. 바뀌는 그것을 그대로 그린다구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진짜 사물의 그 분홍색, 노란색, 주홍색 가운데 어느 것이 성당의 진짜 색깔인가는 모르고 자연은 그때 그때마다 다른 인상, 다른 빛의 색깔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들은 그렇게 그려요. 인상주의 이전에는 고전주의가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바로크 미술 뭐 이런 것이 있는데, 고전주의는 뭐냐 하면, 어떤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을 내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거예요. 원근법으로. 그럴 때 이것은 사람들에게 현재 실존해 있는 것은 빛이 팍팍 튀는데, 그 빛에 의해서 다 다른데도 불구하고 화가가 자기 머릿속에서 자기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그림을 그림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기를 치는가 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실제로 그런 냥 사기를 치는 거예요. 이 그림(광주 성경공부 모이는 우인숙 집사님 집 벽에 걸린 그림)이 바로 인상주의입니다. 인상주의가 빛을 그리기 때문에 사물이 뚜렷하지를 않지요. 그지요? 뭔가 흐물흐물하지요. 우리 같으면 분명하고 선명하게 그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이 뭐냐 하면, 일종의 화가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기를 치는 거예요. 자기 생각대로 구조지은 것을 그려놓고는 마치 남들에게는 실제가 그렇습니다. 라고 사기 치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지요. 그래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도대체 무엇이 실제냐? 무엇이 객관이냐? 무엇이 진짜 주관이냐? 이것을 사람들이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밖에 떠 있는 달이 진짜 있는 달이냐, 아니면 내가 달을 생각하니까 달이 있는 것이냐? 이런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주관이고 객관이고 이런 것은 다 없고,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지각이라고 합니다. 느끼는 것. 지각으로 느끼는데, 이 지각을 느낄 때 어디에서 느끼느냐 하면, 이것은 바로 나의 몸, 또 는 살점, 신체 같은 말입니다. 내 신체에서 모든 것을 지각, 느끼는 거예요. 느낄 때 무엇이 주관이고 객관인가 이전에 처음에 느꼈던 지각상태, 무엇이 나고 무엇이 상대방인가를 안 느끼고 처음으로 느꼈던 그것에서 정신과 신체는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란 책에 보면 나옵니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 있는데, 정신은 신체의 안에 있는 부분이고 신체는 정신을 바깥으로 내 품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본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어떤 사물을 볼 때, 이 촛불을 볼 때 눈으로 보잖아요. 볼 때 망막이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손과 발과 온 몸 전체가 하나의 이미지를 담아서 이 촛불을 내 망막 안에 집어넣어요. 현대 심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초가 있고 여기 사과가 있고 뭐가 있더라도 초를 생각할 때는 사과를 잊어버려요. 그것은 내가 내 안에서 편집을 합니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말이에요.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뭔가를 볼 때 자기가 욕구하는 곳에 초점을 맞추고 그 순간 다른 것은 잊어버려요. 운전할 때 집에 가스불 껐는가 그것 생각하면 운전 못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거짓말 할 때는, ‘당신이 운전을 왜 그렇게 못했습니까?’ 하면, ‘똑바로 못 봐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온 정신과 육체가 총 동원해서 다 보는 거예요. 눈으로 아무리 봐도 상대방이 안 보입니다. 왜? 집에 가스불 안 끄고 와서.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운동회에 가서 달리기하는 것을 보는데 많은 아이들이 달리지만 자기 아이 밖에 안 보여요. 그런데 운동회 주관하는 선생님의 아내는 애들이 안 보이고 그 운동회를 진행하고 있는 자기 남편만 보여요. 점심시간이 되면 애들은 자기 애를 챙기지만 자기는 남편을 챙기지요. 사람들은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머지는 다 없어지는 겁니다. 특히 연예할 때 그러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을 착시현상이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연예할 때는 안 보이던 얼굴 형태가 결혼하고 난 뒤에 이미 빼도 박도 못한 상태에서 그런 약점들이 한 두 가지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무를 수도 없고. 그래서 ‘눈이 삣지’ 라고 하는데 눈이 삔게 아니고 마음이 삔 거예요. 그래서 요즘 결혼 중매하는 회사에서는, 오후 몇 시에 만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호감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요. 가을날에 붉은 노을이 질 때 분위기가 끝내주지요. 그 때 오후 5시에 대형 유리벽이 있는 그런 까페에서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그 빛 아래서 보면 어떤 남자나 여자도 다 로멘틱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아침 6시 머리까락도 부스스하게 일어날 때 어떤 남자든 낭만하고는 관계없어요. 그렇지요? 전 목사님은 새벽 4시나 오후 4시나 마찬가지지만(하하하).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논리로 어떤 구조를 만드는 것이 전부다 사기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조직신학으로 만들 때 이 조직신학이 사기가 되는 거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거예요. ‘생명’이 있다면 느끼는 것이지 따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윤리, 도덕은 뭡니까? 이것은 따져야 된다니까. 윤리는 이것을 할까, 말까 하는데, 그런데 그 따지는 것이 아침 6시에 따지는 것과 7시에 따지는 것이 다 달라요. 아까 인상주의 이야기했지요. 자기의 느낌따라 호흡따라 필이 충만할 때 그때따라 전부다 상대방에게 따지고 싶고 나무라고 싶고 때로는 칭찬하고 싶고 이것이 다 달라요. 이게 시간마다 다르고, 본인이 기분 좋은 상태이면 어지간한 것도 넘어가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소소한 일 가지고 시비를 걸어서 싸우고 하지요. 그래놓고 내가 뭐 잘못 되었는데? 나는 윤리, 도덕대로 했다고 합니다. 윤리, 도덕은 체계를 잡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변명입니다. 김건모의 [핑계], 이것은 핑계이고 변명입니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 자기 행동의 당위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핑계 대는 것이 도덕이고 윤리란 말이지요. 자기가 만든 윤리, 도덕을 어제 만들어 놓고 오늘 취소시키네. 상대에 따라서 취소시키고 상대에 따라서 다시 회복시키고. 세 식구 사는 우리같은 가정에서 제 딸 이름이 진주인데, 진주가 약간의 불만이 뭔가 하면, 왜 아빠와 엄마와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엄마는 왜 달리 대우하는가? 밤 10시 되면 청소년은 네 방에 가서 자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나는 11시 까지 있어도 내 방으로 가라고 안 하거든요. 그러니까 달리 대우하는 것 아닙니까. 그 때 하는 말이 ‘너는 청소년이거든, 너는 딸이거든’ 이렇게 하지요. 그것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동일한 논점에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식구 같으면 동일하게. 그런데 이것이 어디에서 모순 되느냐 하면, 밥 먹고 난 후에 설거지 할 때는 지가 싹 빠진다고. 왜 빠지냐고 하면 나는 딸이거든. 하면서. 이게 윤리, 도덕적으로 자기 행동을 변명하고 핑계 대는 자기 유리한 쪽으로 전부 재해석해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런 예리한 지적을 했습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모든 것이 경제활동에서 나온다.’고. 이것이 뭐냐 하면, 나에게 돈이 된다. 유리하다. 그러면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이 윤리와 도덕이 되는 겁니다. 이번에 바다이야기와 그 일로 뇌물 받은 사람들 뉴스에 나왔지요. 그 사람들이 다 전에 뇌물 받은 사람 집어넣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자기가 막상 고위직에 있고 판사도 되고 검사도 되니까 자기가 돈 받아먹는 것은 돈 빌린 거고, 남이 돈 받아먹는 것은 뇌물이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오늘날의 윤리, 도덕이란 자기에게 경제적인 이득이 있을 때는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는 그런 윤리, 도덕이라고 유명한 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어요. 이것은 마르크스의 이야기와 비슷하지요? 밑의 하부구조는 경제고, 위의 윤리, 도덕은 상부구조다. 알티세르에 의하면 윤리, 도덕, 경제 전부다 하나의 신급이다. 교회라든지 병원이라든지 학교라든지 각 패쇠된 집단들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모든 것이 경제의 바탕위에 윤리, 도덕, 종교 이런 상부구조가 올라가 있다고 했는데, 알티세르는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전부다 따로 되어 있는데, 따로 되어 있으면서 가정, 학교, 병원 여러 가지 단체가 따로 있단 말이지요. 바둑 두는 단체, 낚시하는 단체 등이 다 있더라도 이 안에서 작용하는 것은 무엇이 작용한다? 이것 하나 하나를 신급이라고 합니다. 계급이라고 하는데, 이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 전부다 경제다. 그러니까 경제위에 뭐가 있다는 것은 이 안에다가 집어넣은 것이 되요. 그 대표적인 것이 가정 아닙니까. 두 사람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는데 아빠가 돈을 못 번다. 그러면 가정의 위기지요 뭐. 왜? 최종 신급이 뭔데? 돈 문제 아닙니까. 그러니까 돈이 넉넉할 때 이 가정의 윤리, 도덕과 돈이 위기가 왔을 때의 윤리, 도덕이 다르겠지요. 특히 경상도 남자의 경우에는, 우리교회도 그런 사람이 있고 해서 제가 한심스러운데, 남자의 허풍이지요. 그 허풍중 하나가 뭔가 하면, ‘야, 너, 나랑 결혼하면 직장 그만 둬. 내가 너 하나 못 먹여살릴까봐’ 이렇게 큰 소치 쳐놓고 나중에 보면 지는 놀고 있고 아내가 돈 벌고 있고. 이게 뭐냔 말이지요. 나는 남자로서 남자의 책무가 있다는 것이 언제적 이야기인가 하면 경제가 어느 정도 돌아갈 때 그런 허풍은 누가 못 부릴까요. 대구, 경북 지역의 정치적 정서에 대해 잘 아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하데요. 노무현 정권의 문제점이 뭐냐? 분배위주의 정책을 편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일 해놓고 제대로 못 챙겨 받은 사람이 이 노무현 정권 들어서서 없는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그런 정책을 펴는데, 분배 위주로 하니까 어느 사업가가 투자할 생각을 하겠느냐는 것이지요. 열심히 투자해도 분배란 이름으로 세금으로 해서 다 빼앗기니까, 그러니까 뭘 모르는가 하면 계속 생산이 되는 상태에서 분배가 되어야 하는데, 생산이 안 된 상태에서 있는 것 가지고 나누자. 이 소리 누가 못합니까? 아내가 집에서 놀면서 가계부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여자보다도 가계부 안 써도 좋으니까 직장 나가서 돈 좀 벌어오라고 요구하는 남자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혼자 벌어서 애들 과외비도 못하니까. 우리 지원이도 앞으로 피아노 배우려면 한달에 한 200만원 들어가요. 남 하는 것 반만 시켜도 200만원 들어가요. 두 살 된 아이한테 과외 시키는데 월 200만원 들어간다니 기가 찰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윤리, 도덕도 결국은 없고, 내 신체가 내 나름대로 살고자하는 것, 이 원리 외에 무슨 원리가 또 있느냐 말이지요. 이 세상 원리가 내 신체가 살고자하는 원리 외에. 그런데 이것이, 생명 되시는 예수님이 안 나타나면 서로서로가 여기에 대해서 동의하고, ‘그래 이것이 최종 진리다.’ 아무리 교회가 뭐고 병원이고 가도 마지막에는 돈 문제가 최고 큰 문제다. 이렇게 되는데, 생명이 와 버리면, 생명이 왔다는 말은 그동안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생명이 없다는 말은 결국 우리는 죽어 있는 것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내 몸이 스스로 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의 증거다? 죽음이 나를 지금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단 말이지요. 이것을 언제 아는가 하면 생명이 올 때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전체를 뭐라 하는가 하면 ‘죄’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죄이기 때문에 이 안에 따로 어떤 지평, 윤리 도덕적 지평을 갖지 말란 말이지요. 갖지 말아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래, 맞습니다. 나는 돈 없이 못살고, 돈이 전부인줄 아는 죄입니다.’ 이러면 될 텐데,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것을 정당화해서 그 다음에 윤리, 도덕으로 나오니까, 아까 윤리, 도덕은 뭐라고 했습니까? 경제적인 뒷받침을 변명하는 식으로 나오니까 이것은 죄를 고백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죄를 점점 더 죄 아닌 것으로 위장하게 되니까 결국 이 죄가 누구를 공격합니까? 생명을 공격해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일서의 죄라는 개념이 그렇다 이 말입니다. 제가 이번에 [예수 사회] 발간하는데 원고를 4개나 보냈습니다. 분명히 많은 사람이 안 내지 싶어서, 우선 1호를 내야, 전도지 발간을 위해 회비 작정한 분들이 여러분 돼요. 그런데 지금 책자도 안 나오고 돈 받는다는 것이 뭣하니까 1호를 내는 것이 중요해요. 1호를 발행해 놓고, 이런 내용의 이런 모양새로 전도지가 발행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후원하실 의사가 없습니까? 이렇게 뭔가 손에 쥐고 해야 되는데, 옛날에 했던 것은 벌써 너무 오래 전 일이잖아요. 그래서 [예수 사회]를 새로 발간하는데, 이렇게 이런 식으로 이런 방향으로 냅니다. 이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면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거든요. 첫 회가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 모인 분들에게 제가 숙제를 드릴게요. 전부 A4 용지 1매 혹은 2매. 우리 이재은씨도 예외가 아닙니다. 얘 키우면서 바쁘고 글 쓸 시간 없다고 핑계 댈 수 있는데, 우리가 보통 일상에서 느끼는 것을 쓰면 되는데, 적어 놓으세요. 아예 안 쓰려고 안 적으시는데, 적어 놓으세요. samp12@hanmail.net 글을 써서 그냥 이 주소로 그대로 보내면 되요. 쉬워요. 종이 프린트 할 필요도 없고. 박기삼씨하고 제가 의논한 것이 목사들의 글 말고 집사님들 평소에 썼던 것, 그리고 사모님 평소에 쓴 것 있잖아요. 그런 것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가 잘 나왔을 때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데, 인터넷 시대에서 인쇄물이 중요하거든요. 제게 여기 실은 원고 중에 뭘 썼는가 하면, 목사님들이 목회하면서 복음을 외치다가 흔들립니다. 이 흔들리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애썼으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도록 해 줄 때, 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확인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복음을 외쳤는데 돈으로 안 돌아오더란 말이지요. ‘돈으로 안 돌아오는 복음적 목회’ 그러니까 돈으로 안 돌아왔다는 말은, 내가 지금 복음적 목회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야, 그게 아니야. 진짜 복음적 목회 같으면 돈으로 돌아와야 돼. 그래서 너의 생계도 책임지고 너의 교회도 운영 되는거야!’ 라고 꾸짖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한다고 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적 목회’라고 했던 것을 포기하고, 돈으로 돌아오는 목회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쪽 방향으로 가라고 수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본인이 느끼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외치라고 해서 외쳤는데 경제적 어려움을 주시니까, 이것은 하나의 채찍인데 ‘네가 복음을 제대로 안 전해서 어려움이 생겼으니 이제부터는 돈으로 돌아오는 목회를 해 봐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참된 목회다.’ 라는 식으로 한번 바꿔볼까? 자꾸 이런 마음이 든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 전에 복음적 목회에서 돈이 안 돌아온 것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뭐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 복음도 전하고, 십자가 복음만이 전부가 아니고 뭔가 하나 추가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십자가 복음으로는 구원 받고, 그리고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헌금을 듬뿍 하는 이런 행위를 평소에 강조를 안 했고 그동안은 십자가만 주의 일이고 다른 것은 주의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나중에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다 보니까 주의 일을 너무 좁은 시각으로 보았다. 십자가만 주의 일이 아니고 더 넓게 봐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넓게 본 게 뭐냐, 평소에 놓친 것. 전도하기, 기도하기, 헌금하기, 서로 돌아보기 이런 것을 그동안 복음 전하기 바쁘다보니 다 빠뜨렸으니까 이것을 추가적으로 집어넣으면 비로소 온전한 이것도 하고 저것도 되는 온전한 비책이 없을까? 그러면 이걸 뭘로 하는가? 이것을 행함으로 하고, 십자가 복음은 믿음으로 구원 받자. 믿음으로 구원 받고, 거룩한 행함을 추가해서 균형 잡힌 신자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참된 목회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자꾸 옳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십자가 복음을 버리는 것은 아니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그 동안의 문제는 헌금 강요를 안 했다는 겁니다. 제가 원고를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렇다면 그럴 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겠는가? 그 목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란 말이죠. “너의 평소의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의 근거가 무엇이었나?” 방금 제가 말했던 것처럼, 십자가 복음과 함께 헌금을 강요해야 하고, 경제적으로 잘 안 돌아가는 것을 보니까 내 목회가 잘 못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짜증’이거든요. 짜증은 뭐가 아니다? 기쁨도 아니고 감사도 아니지요. 화딱질 난다는 말 아닙니까. 평소에 목사기 때문에 화를 낼 수 없고, 늘 웃으면서 지내지만 속은 죽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아까 정신과 육체가 내부적으로는 정신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육체라는 것은 내부적인 정신으로 밖으로 나온 것이 육체라고 했습니다. 본다는 것은 뭘로 본다고 했습니까? 본다는 것은 속에서 편집을 하는 거예요. 편집하는 것은 정신적인 작용이 보는 거예요. 눈으로 보는 것은 밖에 뚫린 구멍이고, 진짜 보는 것은 -- 예를 들어 도둑이 침입했다. 그러면 내가 이 집에서 뭘 훔쳐갈까? 생각합니다. 벽에 걸린 그림이 아름다워도 그림 안 봅니다. 돈 될만한 것 TV를 훔칠까 생각하면 딴 게 안 보이고, 옆에 몽둥이 있는 것도 안 보이고, 주인이 안 자고 있는 것도 모르고 TV에만 정신 팔게 되어 있단 말이지요. 본다는 것은 내 정신이 보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의 육체적 행동이라는 것은 속의 정신이 지배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헌금을 강요해야겠다는 말은, 이것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지요. 조직신학적이지요. 그런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은 반드시 죽음의 세계에서는 뭐가 된다? 윤리와 도덕 시스템이 되지요. 어떤 느낌이 아니잖아요. 필링이 아니에요. 지금 주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서 온 몸으로 실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책보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거예요. 어떻게 목회를 하면 떠났던 돈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가? 결국 주님께서는 그 목사를 이렇게 보는 거예요. 너의 평소에 기쁨의 근거가 무엇이었나? 놀라운 환희의 근거가 무엇이었나? “저는 복음이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강단에서도 복음만 나와요. 그런데 평소에 그 사람이 돈에 궁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강단에 서서 앞에서 십자가 복음을 백날 핑계대도 그것은 논리적 이성이고, 진짜 온 몸으로 느끼는 것은 “돈 좀 내 놓으세요. 교인 여러분! 이 도둑놈들아 이 목사 죽겠다. 돈 좀 도. 교회 안 돌아간다. 돈 좀 내 놓아라. 돈 안 내는 인간은 십자가 모르는 인간이야. 돈 좀 내 놔.” 이것을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면서 안 들키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감사와 기쁨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 피로 인하여 저는 이제 죽어도 그만입니다. 이렇게 훨훨 독수리처럼 날아서 천당 갈 준비를 하는 그러한 덜렁댐, 좋은 의미에서의 덜렁댐. 복음을 안 그 기쁨. 내 죄가 용서받은 그 환희. 그 감격을 주체할 수 없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사랑의 마음이 없어요. 팔 걷어붙이는 마음이에요. ‘너희들 돈 내 놓을래, 안 내 놓을래. 양심이 있지, 그렇게 복음 듣고도 입 다물고 있어? 정말 너희들 인간 말종이네. 성질 같아서는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목사라서 참는다.’ 이 소리는 돈 내 놓으라는 소리보다 더 무섭네요. 주께서는 중심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속을 아십니다. 사람이 자기 죄 용서 받은 것을 알면, 그것도 자기 노력으로가 아니라 예수님 피로 구원 받은 것을 안다면 자기가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도 기억 안 나요. 내가 지금 백수냐, 노가다를 하느냐 그런 것에도 신경 쓸 수 없어요. 너무 좋아서. 그게 몇 초라고 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루에 2초인데, 어떤 사람은 두 달에 2초라. 모든 것이 다 달아나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죽고 싶지 뭐. 당장 죽고 싶고, 생계 걱정할 시간도 나에게는 안 줬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천당 데려가서 몇 년 더 살아서 생계 때문에 걱정하는 그런 것이 아예 없었으면 좋겠어요. 주님 만나고 싶고. 그럴 때 그 목사는 빛이 튕기지요. 생명이 그 사람 육체에 튕겨요. 그런데 목사에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 순간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도 복음의 생명이 교회마다 튀게 한단 말이지요. 그 교회 집회는 오직 사랑밖에 없어요. 짜증이나 원망이 전혀 없고 사랑밖에 없어요. 제가 우리교회에서 많이 느끼지만 우리교회 예배 시작하잖아요. 처음에 묵도, 사도신경하고, 그 다음 교독문하고 그 다음 앉아서 찬송 부르고, 그 다음 광고하고 찬송하고 설교에 들어가는데, 광고시간에 장로님 광고 하지요. ‘이번 달 헌금 마이너스 140만원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김을수 집사님도 여기 계시지만 교인들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지만 장로님은 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지요. 좋은 일만 알리고 그러면 안 되니까. 숙연해지지요. 분위기가. 심각하지요. 전부 다 그 순간에 약 2초 동안 자기반성에 들어가는데, 자기반성이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변명과 핑계로 나타나요. 왜? 이 지평은 무슨 지평이냐 하면 1층 지평이니까. 이런 상태에서 제가 본문 읽고 설교를 하려고하니까 얼마나 설교가 어렵겠어요? 왜냐? 한 마디 할 때마다 돈 내라는 소리와 결부될까 싶어서, 결부되기를 지금 교인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 대부분 이렇습니다. 목사님, 마이너스 140만원인데 오늘 설교 좀 잘 하셔서 저는 못 내더라도(이것이 변명이거든요) 다른 사람 은혜 받아서 헌금 좀 해서 다음 주에는 마이너스가 좀 줄게 해 달라. 주여, 제발 목사님 설교 좀 잘 하게 해 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듣게 되니, 이것이 몇 층 지평입니까? 이건 1층 아닙니까. 그런 걱정조차도 1층 지평입니다. 그런데 생명이 나타나게 되면 목사는 여러분들이 지금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는지는 그것은 문제 삼을 것도 안 됩니다. 문제 거리도 안 될 정도로 예수님 복음은 이미 그런 것을 냄새나는 발로 쓱 밀쳐도 상관없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살았습니다. 이렇게 설교하다 보면 돈 한 뿐도 내지 마세요. 마이너스 300이든 500이든 갈 때까지 한 번 가 봅시다. 집달리(집행관)가 와서 딱치를 붙여서 우리는 교회당 나가면서 웃으면서 나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쫓겨 나와서 골목에 모여서 오늘 계시록 말씀 어떤 말씀일까? 궁금해 하는 그것이 교회예요. 왜? 집달리고 뭐가 와도 생명이 튀잖아요. 이 안에 생명이 들어왔으니까 생명이 영으로 왔으면 영적인 사람은 이것이 논리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온 몸으로, 온 정신으로 생명과 교류가 되면 여기서 불꽃이 튑니다. 불꽃이 튀면 그 순간 돈 문제 이런 것은 발에 떼만도 못한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되요. 우리 시험 삼아 마이너스 5,000까지 한 번 내려가 볼까? 그것도 참 재미있겠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배당 치워버리고 우리 집에서 모이지 뭐. 그것도 재미있겠네. 할 정도의 자유로움. 이것이 생명이 주는 자유로움입니다. 왜? 우리는 500만원 플러스가 되도 그것은 1층 지평이기 때문에. 애들 노는 소꿉놀이기 때문에. 그런데 목사에게 생명이 와서 빛이 팍팍 튀게 되면, 이 환희를 그대로 말씀을 통해 교인들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는 목사가, 평소에 ‘나는 돈 있어야 내심 기뻐하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품고 강단에 섰다면 이것 자체가 사기가 아니고 뭡니까? 완전 사기지요. 지금 요한일서를 쓴 사도요한이 돈을 밝히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왜 돈을 밝힙니까?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라는 것을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해 보겠다고 신경 쓴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의 기쁨의 이유가 복음에서는 멀어졌고, 내가 원하는 교회 하나 소유해서 내가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겠다는 그런 장사꾼, 종교 사업가 본색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되어 있지, 돈 많은 교회 되어서 기뻐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은 근본적으로 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그 생명이 직접 우리 정신 속으로, 우리 영과 만남으로서 직접 생명을 주는데, 인간들은 교회라는 가게 세워서 사람들이 오면 엉덩이에 주사 놓는 식으로 목사가 설교해서 생명이 들어가는 줄 알고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인도하니까 발걸음 세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마태복음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조차도, 네가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성경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5장 봅시다. 6장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참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여기 지금 영적 세계 말고요 이 밑의 1층 세계, 이것을 무슨 세계라고 했습니까? 죽음의 세계. 죽음의 세계는 뭘 만든다? 윤리와 도덕을 만들지요. 이것을 만들 때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원인과 결과를 끄집어내서 만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 27절을 보면 원인이 이 땅에 없어요. 키가 한 자나 더했는데 그 원인이 없습니다. 참새가 공중을 나는 것이 이 땅에 원인이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자꾸 윤리, 도덕적으로 생각해서 이런 짓을 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다. 자꾸만 원인과 결과를 연결 시키려하는데 이것이 억지입니다. 부산에서 강의할 때 했는데, 어떤 사람이 A지점에 있어요. 여기 나무가 한 그루 있고, 갈림길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와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 B지점에 왔습니까?’ 할 때, 답변이 ‘우리 엄마가 가라고 하더라.’ 두 번째, ‘걸어서 왔다.’ 세 번째, ‘산책 하려고’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B라는 지점에 왔다는 결과를 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네 번째, ‘A라는 지점을 통과해서 왔다.’ 가게에 손님이 왔는데, 종업원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물으니까, 손님 답변이 ‘버스타고 왔는데요.’ 무슨 이런 허무 개그(우스갯소리)가 있냔 말이지요. 그보다 더 심한 허무 개그가 ‘우리 엄마가 가라고 해서 왔는데요.’ 그보다 더 심한 개그가 ‘저 곧 갈 거거든요.’ 사람은 원인, 결과를 자기 원하는 대로 뽑아서 어떻게든 원인, 결과를 만들어버려요. 그런데 마태복음 6장 27절은 뭡니까? 원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원인 없이 지금 이 키가 된 거예요. 키 작은 사람한테는 미안합니다만. 원인 없이 이 키가 된 거예요. 발걸음을 세시거든요. 발걸음 세기 위해 발 씻었습니까? 안 씻어도 발걸음 세십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원인을 제발 너의 육체에서, 죽음의 세계에서 원인 찾지 말란 말입니다. 죽음의 세계에서 원인을 찾겠다는 것은 원인 찾아서 생명의 세계로 한 번 들어가 보려는 쓸데없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건져 주기는 이쪽에서 건졌는데 왜 원인을 ‘내가 이렇게 행동을 하니까 벌 받았어. 내가 이렇게 행동하니까 칭찬 받았어.’ 왜 자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느냔 말이지요. 그게 바로 ‘죄’란 말입니다. 원인을 내게서 찾는 이것을 가지고 죄라는 것입니다. 죄. 의는 무엇입니까? 반대로. 의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의’입니다. 그것은 관계성 ‘칭의’라고 합니다. 주와의 관계 때문에 의롭게 된 거예요. 이렇게 볼 때, 요한일서의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겠지요? 너무 겁나서 공부 안 하려고 할지 모르겠는데, 보세요. 제가 설명하기 전에는 그냥 ‘죄’ 그냥 ‘생명’이었잖아요. 이것이 우리 논리가 아니고, 팍팍 튕기는 하나의 빛처럼 비추는, 빛으로 튕기는, 주께서 진짜 살아가 부활하셔서 계신단 말이지요. 앉은뱅이가 나은 것처럼. 실제로 살아 계신 주님이 끊임없이 팍팍 튕기면서 찾아오면, 주님께서 생명으로 찾아 올 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너는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니까 새삼스럽게 네가 죄 된 원인을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담 때문에 이미 죄인 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내가 죄인 아닌 이유를 찾을 필요 없고, 더 죄인 되기 위한 이유를 새삼스럽게 시도할 필요도 없고, 나를 건져주신 생명이 작용하는 그대로 생명과 부딪치고 불꽃 튀는 삶을 살면 그것이 바로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오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그냥 잡수시면서 편하게 합시다. 요한일서 2장 5-6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서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한일서 1장 지난번에 한 것처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죄 없다 한다면. 1장 9절에 나오지요? “만일 너희가 죄 없다하면” 생명이 나타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이 떴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원인이 우리한테는 없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아,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내 안에서 원인을 찾을 필요 없구나.’라고. ‘내가 나쁜 짓해서 벌 받았구나.’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내가 착한 일 했더니만 예수 믿게 되었구나.’ 그런 생각도 하지 말란 말이지요. 공중에 나는 새가 위로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올 때도 있잖아요. 어떤 경우에도 참새 자기가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움직여서 참새가 공중으로 날아다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좀 떴다 싶으면 자신이 잘나서 그렇고, 떨어졌다 하면 하나님이 벌 줘서 그런 것이고. 전부 다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자기가 임의로 자기변명과 합리화를 위해서 임의적으로 골라서 뽑는 거예요. 뽑아서 자기를 꾸미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까 고전주의처럼 실제의 빛은 그렇지 않은데 내가 보는 그림을 실제라고 해놓고 보는 사람들에게 속이려는, 이것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거지요. 자신이 죄 없다고 하면 자기가 남들에게 속이는 그리고 하나님을 속이는 제 2의 자기를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죄 없거든’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죄가 있기 때문에 생명이 왔는데 생명으로 오신 분 앞에서 ‘주여, 저는 죄 없거든요.’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진짜 자아가 아닌 가짜 자아를 스스로 꾸며서 대외용으로 홍보용으로 남을 속이기 위해 그 짓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생명 안에서 살 수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것은 네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2장 8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새로운 계명으로 왔다.’ 여기에서 새로운 계명이란 말은, 기존의 계명은 오히려 죽음을 죽음으로 확인케 하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효력이 없고 새로운 계명이 왔는데 이 새 계명의 특징이 뭐냐? 2장 6절에 보면,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계시는 분이 움직여서 우리가 움직이는 그러한 법칙. 그게 새 계명인데 그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의 특징은, 내가 사랑하자 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느끼면 ‘너는 이미 죄를 용서 받았어.’ 하고 환희와 기쁨이 오면 그 다음부터 그 사랑에 감격하여 뭔가 움직이는데, 오줌을 누든지 밥을 먹든지 움직이는데 그 자체가 전부 하나의 사랑 덩어리로 움직이는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다 이 말입니다.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가 사랑을 알았으면 너무 좋아서 가만히 있지를 못해서 뭔가 들썩들썩 한다 이 말입니다. 사랑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요한일서에서 미움도 이야기하지요. 미움도 사람이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숨기지를 못한다는 뜻입니다. 보통 추석 때가 되면 가정마다 위기가 옵니다. 평소에 감정이 있던 것이 표출되는데, 보통 집에 올 때 정종 한 병 사들고 화투도 챙겨서 옵니다. 와서 처음에는 부엌에 가서 ‘형수님 수고하십니다. 형님 고생 많지요. 조카 입학했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 하면서 겉치레 인사부터 좀 하고, 그러다가 저녁에 술 한 잔 들어가면, 술을 처먹는다고 해야지요. 술 처먹고 하는 말이, ‘여기 형님도 계시지만 형수님, 어머니께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오면 형도 ‘동생,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야, 이 새끼야. 네 형수가 어쨌는데? 제수씨가 네 형수만큼 하나?’ 이런 소리 듣고 있다가 엄마가 한 소리 하지요. ‘야들아, 와 이러노. 싸우려고 모였나? 1년에 한 두 번 만나서 어미 앞에서 이렇게 형제간에 욕하고 싸우려고 왔나?’ 하고 고함을 치지요. 동생이 ‘어머니는 좀 참으세요. 내가 형수한테 할 소리는 좀 해야겠습니다. 말 들으니 형수가 어머니께 그렇게 학대를 한다는데--’ 이 때 형이 냄새나는 말도 동생을 차면서 ‘야 이 새끼야, 너는 어머니 한번 모셔봤어?’ 제사 지내고 난 뒤에 이런 다툼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형수님, 어제 밤에는 제가 좀 과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식으로 또 겉치레를 합니다. 형도 ‘어머님 계신데 서로 좀 참자. 자주 놀러 오너라.’ 이것이 하나의 순서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미움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가 돈 이야기 한다는 말은 참다 참다 튀어나온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랑이 작동하는 사람이 아니고 목사 자신은 복음을 전했다는 자기 정당성, 목회의 윤리와 도덕으로 교인들에게 말씀 증거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 착하잖아. 그동안 월급 안 줘도 참았잖아. 이런 자기 윤리, 도덕. 성경하고 전혀 상관없는 하나의 교회 장사꾼이지요. 영혼 장사꾼이지요. 제가 이런 소리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웃던데 여기는 안 웃네! 느낀바가 있는 모양이지. 특히 어머니가 나물 무치다가 ‘너희들이 싸우려고 왔나?’ 이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술 취하면 개가 됩니다. 그러고는 화해한다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14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다음에 뭡니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이게 인력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1층에서 안 돼요. 인간들의 지평에서는 이것이 성사가 안 됩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말씀을 배울 때는 자기가 판단력을 동원하기 때문에 자기가 평소에 해 왔던 윤리, 도덕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보기 때문에 이것은 그 뒤의 구절이 해당이 안 됩니다. 그 뒤의 구절을 봅시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너희 가운데 움직인다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일하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말릴 수가 없어요. 이게 요한일서에 보면 ‘말씀’ 자리에 ‘사랑’을 집어넣어버려요. 십자가 사랑이 나를 탄복케 하고 환희에 잠기게 하고 기뻐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 목사한테 바늘로 꼭 치르면 ‘십자가 지신 주님 은혜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 이야기가 줄줄 나오지, ‘돈 안 내놓나?’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오느냔 말입니다. 정신을 어디다 쏟느냐는 말입니다. 제가 이런 소리하면 ‘다 안다’고 합니다. 나도 그렇게 전했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2장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돈 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자기가 망했다고 생각해도 그게 아직 망한 게 아니에요. 진짜 망하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누가 돈 안 주나? 이럴 겨를이 없어요. 진짜 망한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빛난 영광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아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새삼스럽게 자기 것 안 챙겨요. 하나님 만나는 순간 뭐가 깨지느냐? 바로 윤리와 도덕이 깨집니다. 이것 꼭 적어놓으세요. 생명을 만나는 순간 윤리와 도덕이 깨져버립니다. 윤리, 도덕은 한 트럭 가져와도 소용없습니다. 천당 가는데 아무 소용없어요. 윤리, 도덕에서 벗어납니다. 왜? 죄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윤리, 도덕 깨지고 뭐가 등장합니까? 사랑으로 역사하는 사랑이 남아요.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는 행위가 나오지요. 노상방뇨를 해도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사랑으로 나온다니까. 이로서 사랑이 우리 죄 속에 침투하죠. 묵시가 역사를 침투하지요. 2층 사랑의 나라가 생명이란 이름으로 1층 나라 윤리와 도덕으로,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 자기 보람으로 사는 세계. 결국 그것이 뭐냐, 이런 힘으로 내가 살고자 하는 세계, 사실 죽어있으면서도 살고자 하는 세계. 여러분, 살아있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것은 저주예요. 참 고통스럽습니다. 살아있는 것을 은혜로, 사랑이 주신 은혜로 순간순간 감사하면 되지 내일 일까지 미리 당겨서 살고자 하는 것은 그 현재를 지옥으로 만드는 거예요. 현재 나를 갑자기 지옥의 구렁텅이로 만드는 것이 내 속에 있는 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죽은 인간은 죽는 날만 기다리면 돼요. 왜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는 날만 기다리면 되지 죽는 인간이 살고자 하는 것은 자기 본질과 어긋나기 때문에 굉장히 어색합니다. 어색하고 억지가 많아요. 목사가 되었으면 ‘저 죄인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죽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 된다니깐. ‘저 목사거든요. 저 살아야겠는데요.’ 이런 소리, 이런 티를 내면 안 돼요. 목사들이 아무리 감춰도 교인들이 그것을 대번 압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압니다. 교회 헌금이 한 5,000만원 남아돌아서 처치를 못할 때, 그 때는 ‘여러분, 제대로 헌금합시다.’ 그 때는 괜찮아요. 하지만 돈이 궁할 때는 그런 것이 티를 낼 수 있다고요. 헌금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헌금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가 나와야 합니다. 왜? 돈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돈은 생명이 아니고 십자가가 생명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헌금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과부의 두 렙돈. 과부는 자기가 생명 얻었다는, 사랑 받았다는 것을 동전으로 냈어요. 이걸 동전으로 냈던 뭘로 내던 주께서는 아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주께서 아십니다. 나다나엘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기도해도 주께서 무화과나무에서 기도하는 것을 알고 계세요. 하늘나라의 특징은 몰래카메라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좌에 눈이 많다고 해요. 천사들은 눈이 많아서 걸어 다니는 몰래카메라에요. 조사하면 다 나와요. 윤리, 도덕이 아니라 사랑으로 뭘 해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오기를 지금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추상이 아니고 구체적인데 그 구체적인 것이 뭐냐? 사랑으로 기뻐하는 것이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외에는 다른 구체는 없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주제입니다. 아직 요한일서를 다 안 했지만 주제가 뭐냐? 생명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데 나오는 증거는 뭐냐? 사랑으로만 나온다. 끝. 다른 계명은 필요 없다. 8절을 다시 봅시다.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빛과 어두움을 구분합니다.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렇게 해서 아예 빛이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뭘 우리로 배격하게 하는가 하면, 우리가 따로 챙겨놓는 윤리, 도덕 이것을 완전히 제쳐버립니다. 발로 빌어버리지요. 너에게서 나오는 것, 네가 제공하는 것, 그것은 주께서 아예 받지를 않습니다. 빛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이거거든요. 제가 책을 한 권 가져왔는데요, [미학 오디세이]라는 책인데, 그림이 하나 있는데,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야경’이라는 그림인데, 이 그림을 보면 특징이 빛이 딱 세 사람에게만 있지요. 그런데 여기 작은 소녀는 빛을 한꺼번에 받습니다. 이것은 화가가 이것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영적인 존재를 암시할 때는 이렇게 빛을 한껏 비춥니다. 이게 진짜 실제 같으면 빛이 모두에게 다 와야 되는데, 딱 중요한 핵심부분만 빛이 한꺼번에 옵니다. 이것은 ‘빛과 야경’이에요. 빛과 어둠의 세계를 구분하는 거예요. 실제로 보면 똑같이 빛이 와도 빛에 속한 사람 따로 있고, 어둠에 속한 사람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둠에 속했던 빛에 속했던 공동점이 뭐냐 하면, 자기가 어둠을 만들지도 않고 빛을 만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빛은 외부에서 비춰서 ‘너는 내 나라에 속한 인물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빛을 집중적으로 비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빛은 그 사람이 어디를 가도 따라옵니다. 그러면 이 빛에 속한 사람은 어딜 가도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되어 있지 따로 자기의 독자적인 윤리, 도덕 체계를 내지 않게 되어 있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이 책(미학 오디세이)을 보여드리는 것은 요한일서의 빛과 어둠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너희가 빛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빛을 만들어내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너는, 심지어 지옥에 가더라도 빛이 너를 환하게 빛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꼭 거지 나사로 같아요. 남들 보기에는 거지인데 천사들이 받들어 모시고 가잖아요. 빛의 사람으로 찍은 거예요. 빛이 있고 우리가 있지, 우리가 빛을 만들어내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빛을 받고 누리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빛의 사람이 있다는 말은 자동적으로 그 외에는 전부다 어디에 속했다? 어둠에 속했지요. 어둠에 속한 특징이 뭐냐? 사랑을 모른다는 거예요. 사랑을 모르니까 윤리, 도덕을 내세울 수밖에 없지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윤리, 도덕은 어떻게 만들어진다고 했지요? 원인과 결과를 자기가 임의로 뽑아낸다고 했습니다. ‘당신 약국에 어떻게 왔습니까?’ ‘버스타고 왔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어떻게 왔습니까?’ ‘엄마가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게 평소에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평소에 사람들은 어쨌든 간에 원인을 자기 입맛에 골라서 같은 사항도 계속 뽑아냈습니다. ‘포도를 왜 먹습니까?’ ‘포도가 먹음직스러워서 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포도를 주시니까 먹지요.’ 이렇게 뽑는다고요. 그렇게 뽑는 이유가 ‘내가 이 포도 먹어봤는데 맛 별로다.’ 이런 뜻도 갖고 있고요. '나는 포도가 그리운데 잘 됐습니다.' 이런 뜻도 갖고 있고요, 내가 갖고 있는 내 신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급조해서 그때마다 자꾸 원인, 결과를 매치를 시키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 말이지요. 사람은 그렇게 돼요. 그런데 이 포도를 빛 가운데서 생명의 사랑을 알고 먹는다면 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주께서 주셔서 먹게 했습니다.’ 라는 그런 이야기. 이거 성경에 나오지요? 고넬료와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보자기에 있는 것을 왜 먹었느냐? 주께서 먹으라고 하니까 먹었습니다. 저는 그것 먹기 싫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원인을 네 속에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성경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께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살게 하실 거예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기 속에 뭐가 역사한다고 했습니까? 말씀이 역사하기 때문에 요한일서에 있는 말씀들, 빛이라든가 사랑, 생명 이것이 여러분 속에 여러분 허락도 안 받고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빼도 박도 못한 신세로서 빛 된 생활 하고, 어쩔 수 없이 천국으로 끌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저 예수 믿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뭐 해야 됩니까?’ 이런 질문 많이 하지요? 이 말은, 예수 믿고 난 뒤에 이제는 교회 발을 끊겠습니다. 라는 소리와 똑같은 소리거든요.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챙길 것 챙겼으니까 더 이상은 안 다니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지요.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제가 뭘 해야 합니까?’라는 말이 성립이 안 돼요. 주께서 당신의 쓴 잔을 먹게 하지요. 마시게 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소유가, 소유권이 이전되어서 내가 아니고 주님 소유기 때문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케 하시지요. 십자가의 길로 가게하고, 좁은 길로 가게 하십니다. ‘내가 뭘 할까?’ 하는 것은 어둠에 속한 나의 옛날 버릇이지요. 습관이지요. 옛날에 한 얘기를 다시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한 말인가? ‘먹는다, 입는다, 마신다, 길은 간다.’고 할 때는 동사가 우선이고, 그런데 꼭 앞에 뭘 붙이는가 하면, ‘나’를 붙이지요. 이것은 없어야 돼요. ‘나’라는 것은 언제 등장하는가 하면 내가 아닌 자가 불쑥 나타났을 때 나를 느낍니다. 열심히 혼자서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보입니다. 그런데 누가 오면 ‘내 밥’ 이렇게 된다고. ‘나’가 등장할 때는 자기 존재를 분명히 밝혀야 될 입장에 있을 때 ‘나’가 생각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영어 문법에서는 반드시 습관적으로 ‘나’를 써요. ‘내가 간다.’가 아니라 그냥 길을 가지요. 길을 가는데, 그냥 ‘길을 간다.’고 하면 되는데, 꼭 앞에 ‘내가 간다. 그가 간다. 그녀가 간다.’ 꼭 앞에 이런 것을 붙여요. 붙일 필요 없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배가 고파서 밥을 먹잖아요.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밥을 먹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배고픔이 나로 하여금 밥 먹게 했지요. 이것이 문법적 버릇 때문에 마치 내가 밥을 먹기로 작정한 것처럼 생각해요. 나는 이제부터 1주일 동안 오줌 안 눈다. 누가 했나? 내가 했다. 이것은 쓸데없는 짓이에요. 나오게 되어 있다고요. 그때는 ‘오줌 누가 눴지? 내가 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나는 다시는 나쁜 짓은 안 한다.’ 이게 말이 안 되는 소리란 말이지요. 오줌을 내 마음대로 못하듯이 나쁜 짓도 다가오면 하게 되어 있고, ‘누가 했지? 내가 했네.’ ‘나는 뒤에 같다 붙는 거예요. 나중에 같다 붙는 거예요. 그런데 습관적으로 자꾸 ’나‘가 앞에 붙어요.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이런 습관이 통하지 않고, ‘그래. 그 변명 다 아는데, 어쨌든 생명이 네 속에 역사하면 그것이 바로 생명이고 빛의 생활이다. 그게 사랑이다.’ 성경이 이런 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완전히 못 본 척 그냥 지나가고 밀어붙입니다. 생명이 너에게 와서 네가 생명의 사람이 되었다. 끝. 이제부터 생명이 네 속에서 너를 이런 쪼로 다뤄 나간다. 그게 뭐냐? 형제를 사랑이 되게 한다. 원인은 찾지 마라. 예초부터 너한테 원인은 없었다. 형제를 사랑하거든 주의 말씀이, 사랑이란 계명이 스스로 네 속에 작용해서 하나의 앵글이 되어 움직여서 그래서 바깥에 사랑이 나온 줄로 알아라.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뭐냐?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죄 짓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거예요. 5장 18절을 봅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키죠. 이걸 지켰다고 하면 원인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또 바보같이 나에게서 찾는 거예요. 사람들이 바보처럼 잘못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지킵니까?’ 왜 원인을 당신한테 두느냔 말이지요. 원인은 주님께 있는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기를 공격하니까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느냐, 사람으로부터 왔느냐?’ 사람들이 인정해서 세례 요한이냐, 정말 너희들 보기에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한 세례 요한이냐? 그것을 묻는 거예요. 물어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면 ‘나도 그렇고, 예수 믿게 된 너희들도 그런 류의 사람이다.’는 것이지요. 원인을 땅에서는 찾지 못하고 하늘에 원인이 있는 아주 특수한 사람입니다. 그걸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4절 4-5절 봅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이제 이유를 알겠습니까? 내게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의 원인을 나와 결부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나와 결부시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윤리와 도덕이 되 버려요. 윤리, 도덕은 뭐냐? 반드시 나오는 게 ‘내가 지켜야지. 다시는 이런 짓 안 해야지’ 이거예요. 세상에 속한 사람은 이런 이야기 해야지요. 그러나 하늘에 속한 사람은 원인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이런 소리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지켜야지, 내가 그것을 안 해야지. 내가 반드시 그것을 해야지.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지. 예배시간이 11신데 10시 50분까지는 반드시 가야지.’ 이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기차가 연착하는데 어쩔 거예요. 이게 마음대로 됩니까, 안 되지. 제가 이런 소리 하니까, ‘그러니까 목사님, 교회가 방종하고 교육이 안 되잖아요.’ 교회 교육을 누가 시키시는데요? 왜 원인을 목사한테 찾습니까? 원인은 주께 있는데. 저는 방종하는 사람을 기독교 신자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 안에 박혀있는 사람은 방종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자기가 방종하고 싶어서 방종하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은 세상을 이긴 분이 아니고 세상을 한 번도 못이긴 본인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을 이긴 분이 우리 속에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 말씀이 뭐라고요? 오직 사랑. 사랑인데 이 사랑은 내가 지키는 사랑입니까, 못 지키는 사랑입니까? 못 지키는 사랑이지요. ‘내가’를 붙입시다. 내가 못 지키는 사랑. 이것이 마지막에 늘상 나옵니다. ‘내가 못 지키는 사랑’ ‘내가 못 지키는 사랑이’ 요한일서 2장 1-2절에 보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가 우리 죄를 위해서” 뭐가 되었으니? “화목제물이 되었으니” 그것이 나중에 새로운 계명이 되어서 사랑으로 왔단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 속에 주님의 화목제물이 용광로처럼 펄펄 타고 있으니까 그 사랑으로 인도함을 받으면 반드시 이런 사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못 지키는 사랑. 대중가요 가사에 이런 것이 있어요. ‘화장을 고치며’라는 노래가 있는데, 아십니까? 그 노래 재현씨 아십니까? 그 가사에 보면 ‘아무것도 난 해준 게 없이 받기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 있지요. 2절은 묻지 마세요. 2절은 잘 모르니까. “받기만 했을 뿐--” 노래 어떻게 되더라? ‘왁스’가 부른 노래인데, 그 가사를 보고 제가 큰 은혜를 받았어요. ‘아무것도 해준 것은 없는데 받기만 했을 뿐’ 주여, 월급 한 푼 안 나오는 교회 오게 한 것도 이것이 사랑인줄 믿습니다. 왜? 이것도 주께서 주신 ‘받기만 했을 뿐’에 해당되는 사랑임을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왔으니까 돈 내라’ 이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준 이것이 큰 사랑입니다. 노래가 생각 안 나네. 미치겠다 이거. ‘받기만 했을 뿐 -- 그래서 미안 해.’ 맞지요? ‘나 같은 여자를 왜 그리 사랑했는지 --’ 이러다가 다 나오겠다. 마지막 가사가 ‘우린 다시 사랑해야 해’ 이렇게 끝나지요. 잘 모르는 척 하면서 다 했다. 제가 그 노래에서 너무 은혜 받아서 박사교회 있을 때 그 노래 가사를 설교시간에 인용한 기억이 나요. 왜 우리가 평소에 자꾸 불평하는가?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랑이 내가 타협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이것 해 줄 테니 사랑 달라는 것이 아니라 허락도 안 받고 그냥 들어옵니다. 빛이 와서 빛이 튀듯이 생명이 우리한테 튀다보니까 내 논리를 뛰어넘는 내 감성과 영이, 호흡이 거기에 반응을 해서, 내 영 속에 주의 사랑이 들어와서 주께서 그 사랑을, 사랑의 냄새가 풍기는 향기로 가득 차게 만들었습니다. ‘받기만 했을 뿐, 해 준 게 없는데’ 이런 식으로. 그 사랑이 왔을 때 요한일서 3장 16절이 성립이 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가 이것을 지키겠다고 나오면 그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시더라도, 형제가 죽을 자리에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합니까? 왁스의 ‘화장을 고치며’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내가 형제를 위해 죽는 자리에 있더라도, 이것은 나의 선행도 아니고 나의 윤리, 도덕도 아니고, 이런 일까지 시키는 것도 주의 사랑의 연장선입니다. ‘받기만 했을 뿐 해준 게 없어 그래서 미안 해’ 진작 죽어야 했는데 이제 죽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생명의 티’입니다. 생명이 팍팍 튀는 것입니다. 이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자, 2장 11절 봅시다. 미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한다.’ 어두움이란 것이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두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요? 어두움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빛도 역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빛이 우리를 지배하지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고 할 때, 이것은 우리가 실천할 항목이 아니고 주께서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빛 되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14절) 이 대목은 설교시간에 잘 때 잠 깨우는데 필요한 구절인데. 이 대목 한 번 찾아봅시다.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이제 빛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빛. 원인이 나한테 없는 것.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어디서 일어나라고 했습니까?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미 너희들은 죽은 놈이란 말이지요. 죽은 놈인데 빛이 오게 되면 ‘좀 더 잘래요.’ 이게 안 된다는 거예요. 빛이 오면 눈이 부셔서 더 이상 잘 수가 없어요. 깨어서 일어나보니까 이미 자기는 빛의 자녀라. 어둠에 속한 것은 옛날 일이고 지금은 빛의 자녀라. 그렇다면 이 빛이 우리 속에 역사하지요. 뭘로? 주님의 사랑의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역사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생명의 활동하심’입니다. 우리의 활동이 아니고 생명의 활동. 그 활동하심에 우리는 거기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된 겁니다. 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 밑줄 쫙 긋고 별표를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절대로 원인을 자기 행동을 가지고 자기의 현재 있는 것과 원인과 결과를 역지 마세요. 그렇게 역어버리면 그게 하나의 윤리, 도덕이 되면서 여러분들은 엉터리 같은 죄관이 막 나옵니다.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제가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내가 나 된 것은 원인이 나한테는 없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어머니 이름이 뭐지요? 마리아. 그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참 훌륭한 여인입니다. 꼭 우집사님 같아.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냥 저, 예의상 맨트라는 것 아시죠? 이 집에 왔기 때문에. 하하하하 -- 또 다른 집에 가면 달리 해야지요. 2장 14절 끝부분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렇게 나옵니다. ‘사랑’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결국 사랑으로 뭐든지 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것을 하겠다, 저것을 하겠다. 논리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느낌대로 사랑으로 일하는데 그 대상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세상이냐 반드시 그 둘 중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상에 대해서는 미워하게 되어 있고, 세상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같은 인간을 놓고 악마와 하나님과 서로 다투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 하나 놓고 둘이 다투는 거예요. 악마는 코끼리 다루고 하나님이 사람 다루고 이것이 아니고, 같은 사람을 놓고 하나님과 마귀가 서로 자기 지배 하에 두려고 다투는 입장인데, 처음에는 누가 이겼습니까? 마귀가 이겼지요. 아담 이후에. 그런데 지금은 누가 이겼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겼다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한 것은 아니고 택한 백성에게 해서 이겼단 말이지요. 이겼기 때문에, 그 이긴 특징이 뭐냐?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16절부터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것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육신의 정욕을 가지고 먹고 싶은 것, 잠자고 싶은 것 등 신체적인 욕구를 육신의 정욕이라고 간주했고, 안목의 정욕은 기본적인 생존 외에 명품을 갖고 싶다든지 고급 아파트를 갖고 싶다든지 눈에 보이는 탐욕으로 봤고, 이생의 자랑은 자기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 그리니까 남은 다쳐도 나는 다치면 안 되고, 남은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되고 철저히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것으로 이 세 가지를 구분했는데, 저는 여기에 대해 동의 못합니다. 일리는 가요. 그러나 동의는 못합니다. 저는 그렇게 세 가지로 구분될 게 아니고, 같은 말을 세 가지 면에서 했다고 봅니다. 똑같은 경우를 이렇게 저렇게, 예를 들어, 사과가 있다면 같은 사과인데 첫 번째 크다, 맛있겠다, 비사겠다. 똑같은 사과를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요. 이처럼 똑같은 것을 세 측면으로 본단 말이지요. 인간은 전부가 육신의 정욕에서 허덕이고 있고, 전부다 안목에 정욕에서 허덕이고 있고, 이생의 자랑거리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전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거스틴과 저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개인한테 이런 유혹이 오는 것이 아니고 세상 자체가 이런 것을 생산해 내는 사회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어거스틴의 경우에는 이것을 끊어야 되지만 나의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거기서 나올 필요가 없어요. 예수 믿는다고 머리 깎고 산으로 갈 필요 없다니까요. 다만 그 정체를 알고 사랑 안 하면 되잖아요. 어거스틴 같으면 명품을 갖지 말라고 하잖아요. 저는 그것이 아니라고 봐요. 명품이 있고, 고급 아파트가 있더라도 그걸 사랑 안 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 이 말은 예의상 맨트가 아닙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소리 하거든요. 부자가 천국 가기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 라는 말을 듣고, 그러면 사람들은 이 세상 논리에 의하면, 이 세상 자체에서 선인과 악인이 있다고 보잖아요. 그러니까 부자가 천당 못 간다면 그러면 가난하면 되겠네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 따로 구획 짓는 논리입니다. 저는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부자가 되든 가난한 자가 되든 사랑 안 하면 된다고 봐요. 그런데 부자가 집이 몇 채 이상 되어야 부자입니까? 스위스는 국민소득이 6만불입니다. 룩셈부르크는 4만 5천불입니다. 미국도 그쯤 됩니다. 우리나라는 1만불 좀 넘어요. 나이지리아나 토고에 가면 국민소득이 100불 혹은 200불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츄리닝만 입고 다녀도 아프리카에 가면 중산층이라고 합니다. 이소룡이 입는 노란 줄 쳐진 옷 알지요? 그것만 입고 다녀도 아프리카에 가면 테러 당할 수가 있어요. 부자라고 옷 빼앗길 수 있단 말입니다. 옛날 예수님 당시에는 옷 자체가 갚진 재산이 되어서 옷을 뺏어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겉옷을 얻고자 하는 자는 속옷까지 주어라’는 말씀이 있어요. 그것이 하나의 재산이 되니까. 핸드백 빼앗거든 시계도 풀어주라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으란 말이 아니고, 세상에서 우리가 못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아프리카 가면 부자 아닙니까? 미국가면 가난뱅이 되는데. 이 돈 가지고. 아까 오다보니까 감자탕 앞집에서 공무원들 파업하고 있어요.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 장사 안 되서 욕합니다. 왜? 나라는 세금이 있는 이상은 월급 안 주는 경우가 전쟁 경우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장사는요 반짝 장사가 되었다 할지라도 건너편에 새롭게 인테리어 한 집이 생기면 완전히 말아먹기 일보 직전이에요. 아슬아슬하다고. 그런데 그 사람들 파업한다고. 파업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치권을 달라고 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사치가 넘쳤구나.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그러나 그들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돈 문제가 아니고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돈 있고 인권 있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설움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돈 없어보세요. 사람이 괴물 되기 일 아닙니다. 한강에 나타난 괴물(영화: 괴물)만 괴물인줄 압니까? 지금도 한강에 자살하려고 괴물들이 쭉 서 있다니까요. 아까 말했지요? 사람이 술만 처먹으면 괴물 된다고. 술만 처먹으면 사람이 괴물 돼요. 사람이 술 먹는 이유가 뭔데요? 사는 게 힘들어서 먹잖아요. 좋아서 먹는 경우는 별로 안 돼요. 대부분 힘들어서 먹어요. 스트레스 안 풀면 내일 일어나지 못해서 풀고 갈려고 해요. 그래서 술집 이름이 뭐냐? ‘속에 천불’이에요. 술도 오래 살라고 이름이 ‘백세주’ 세상을 사랑 안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랑이 밀려오면 세상 사랑할 겨를이 없어요. 세상 좋아할 마음이 안 생겨요. 왜? 시시해서. 이것은 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되지만 실제로 미국 가서 중산층 되는 사람보고 인터넷하면서 ‘당신 행복하십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미국의 시민권 따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시민권 따고 난 뒤에 한 몇 개월 지내보니까 그것도 별로 행복 안 해요. 남자들 다 아시지요? 여자들 제일 싫어하는 군대 이야기. 군에서 고생하는 졸병 시절에는, 제대하고 나가서 세상에서 머슴살이를 해도 좋으니까 제대만 하면 좋겠다. 했지만 제대하고 나면 머슴살이 못합니다. 제대하고 나면 그 겸손한 마음 싹 없어지고, 직장이 힘드니 어쩌니, 보너스가 적니 어떠니 하면서 사는 거예요. 군인들 훈련 끝나고 이등병 달고 난 뒤에 하는 말이 있습니다. ‘치마 둘렀으면 다 미인이다.’ 이게 이등병 때 말이지 제대하고 나면 --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할 만해서 사랑한 게 아니고 달리 사랑할 게 없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겁니다. 명품을 사랑하고 골프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것보다 좋은 게 없어서 그래요. 도박에 빠진 사람들, 도박보다 더 큰 쾌감 있으면 도박하러 안 갑니다. 도박보다 더 짜릿한 게 없기 때문에 도박으로 가는 겁니다. 술 먹는 사람도 그렇고, 담배 피우는 사람도 그렇고 다 그래요. 남자들은 도박에 빠지지요. 여자들은 자식 사랑. 이것도 도박 못지않습니다. 사람이 얘기를 낳고 난 뒤에 세상이 바뀝니다. 안산에서 그런 강의 했는데, 애 낳기 전에는 주님 말씀이 어떻고 하지요. 애 낳고 보세요. 주의 말씀은 안 나옵니다. 그러면 아기는 어디에 속합니까? 세상에 속하지요. 아기보다 더 큰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아기를 최종 사랑으로 보는 겁니다. 이 사랑을 인력으로 못 끊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랑이 오게 되면 내가 사랑했던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사랑했던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옵니다. 그러면 아기를 하수가에 버릴까요? 어거스틴 같으면 그래요 돼요. 저는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아기면 아기를 키우고, 예수 믿고 난 뒤에 그러면 고스톱 치지 말까요? 10원씩 걸고 하면 괜찮아요. 100원 넘어가면 큰 문제가 되는데. 그걸 하더라도 사랑 안 하면 된단 말이지요. 저는 취미로 컴퓨터 바둑을 하는데, 바둑 제 이름이 뭐냐 하면, ‘1초 바둑’이에요. 상대가 20분 생각하고 둬도 나는 1초 만에 놓습니다. 요즘은 시간을 좀 당겨서 0.5초 만에 놓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딴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예수 사회] 원고를 생각하든지 이런 것을 할 수 있다고요. 딴 것을 하는 가운데 이쪽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딴 것을 하면서 이쪽을 집중 더 할 수 있어요. 남자들이 담배를 못 끊는 이유가 담배가 좋아서가 아니라 담배를 피우면서 딴 것에 몰두 할 수 있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거예요. 담배를 피우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끄집어낸다 이 말입니다. 가수들이 마약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말은, 세상은 그냥 가만 두시고 그 안에 그냥 사세요. 하나님께서 무슨 사태를 일으키실지 모릅니다. 사시되 그것이 나의 생명은 아닌 거예요. 그것이 나를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 안에서 죽어가고 있어요. 회사에서 일하는데 회사는 나에게 더 나은 실적을 요구하지요. 만약 자동차를 판매하는데 지난 달에 5대를 팔았다. 그러면 이 사람은 졸지에 ‘너의 능력은 5대야.’ 이것이 확증되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6대 팔아야 돼요. 회사가 다 그래요. 자꾸 실적이 올라가야 돼요. 그래서 사람이 죽을 지경이라. 그래서 여기에 매여 살면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살려고 한다는 것이 결국은 저주라고 했지요. 그러면 살아있다는 것이 뭡니까? 이것이 축복이지요. 그러면 5대 팔았으면 주의 은혜인줄 알고, 그 다음에 또 팔았으면 주의 은혜인줄 알고, 그냥 내가 현제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은혜지요. 저주가 아니에요. 세상은 저주가 아닙니다. 그냥 은혜로 있는 것이지만 생명은 아니지요. 생명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는 여기에 있지요. 사회라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그쪽에서 요구를 하게 됩니다. 심지어 원치 않는 쌍꺼풀 수술도 해야 되고, 원하지 않는 술판에도 가야 되고, 원하지 않는 노래방에도 가야 되고 하는데,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아침에 눈 뜨면 환상을 꿈꾸고 있어요. 만약 의사이면, 내가 오늘 출근하면 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환상을 가지고 가는데, 막상 가보면 아무도 없고, 그럴 때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말이 있어요. 환상이 한 사람만 가지면 환상인데, 여러 사람이 같이 꾸면 그것이 현실로 변하는 거예요. 세상은 이게 환상인데 이것을 뭘로 보느냐 하면 여러 사람이 다 꿈을 꾸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로 현실이 되 버립니다. 이 현실은 무슨 현실이냐? 너와 나의 환상을 정치적인 타협과 양보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내 욕구대로 한다면 만약에 기차를 탔는데 어떤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 나 같으면 기차를 세우고 싶어요. 그리고 그 사람을 창 밖으로 내 던지고 싶은데, 이것은 내 욕구지요. 그래서 타협하지요. ‘담배 끄겠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요. 이것이 바로 너와 나 사이의 양보와 타협입니다. 이것은 부부 사이에도 양보와 타협을 매일같이 합니다. 오늘 일찍 들어오소. 일찍 못 오는데. 몇 시까지? 10시에 올게. 9시까지 오소. 알았다. 이것이 타협이거든요. 그러니까 뭐든지 곧이곧대로 한다는 것은 비사회적입니다. 곧이곧대로 한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자기 의로움, 자기 정당함을 유지하는 거예요. 그런 것은 남의 환상을 방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곧이곧대로 안 됩니다. 타협이에요. 타협하다보니까 어떤 때는 돈을 안 밝히고 싶은데 밝혀야 되고 하는 거예요. 이런 사회 속에 우리가 사니까 우리의 윤리, 도덕이란 것은 그냥 핑계에 지나지 않지 어떻게 그것이 의로움이 되겠습니까? 사회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회에 적응할 수밖에 없고, 하지만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그 사회를 주님처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주님께 용서 받은 것을 네가 부인해서는 안 된다. 저는 이 책을 보고 많은 책들을 나름대로 봤습니다만 항상 뭐가 없느냐 하면, 영적인 사랑이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마지막 결론이 뭐냐? 타협입니다. 세상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까 적당히 양보하며 살아라. 그게 최선이다. 맞아요. 최선 맞습니다. 최선인데, 문제는 최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문제예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 어쩔래. 하나님이 나를 지옥 보내면 섭섭하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니까. 최선을 사랑하니까 문제예요. 최선을 사랑하면 안 돼요. 최선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냥.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최선을 하면서 삽니다. 그냥 사시되 그것을 최선대로 사는 것을 마치 어떤 훈장처럼 여기고 사랑하지 마세요. 주님의 화목제물만 사랑해야지 최선을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겁니다. 마지막으로 2장 17절 봅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지나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나가는 것. ‘있다. 어, 어디 갔지? 오, 또 있네. 어디 갔지?’ 자꾸 뭔가 나는 가만히 있는데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는 이것이 지나가는 거예요. 영화가 개봉되면 꼭 보고 싶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보고 싶지 않아요. 왜? 지나가버리니까. 또 새로운 영화가 개봉되니까. 또 과대 선전을 하지요. 보고 싶지요. 안 봐도 괜찮아요. 지나가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계속 지나가는 거예요. 그림으로 그리면, 나는 가만히 서 있는데, 옆에 화려한 세상이 지나갑니다. 이것만 보지 마시고, 그렇다고 이것을 피하지도 마시고, 볼 건 보되 사랑의 대상은 지나가는 것이 대상이 아니라 영원히 거하는 주님의 사랑의 나라, 생명의 불꽃, 빛의 나라 그것을 여러분들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성경을 보는 것은 우리가 맨날 꿈만 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꿈을 지워주시고, 이 성경 말씀이 유일한 현실인 것을 우리가 믿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벌써 10시다. 뭐 질문 있습니까? 없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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