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일서 1 강 (2006, 광주) / 06.7.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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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요한 1서를 하겠습니다. 신약성경 388페이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생명이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요한 1서에 나오는 하늘에서 온 생명이 있고, 또 하나의 생명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상의 목숨, 육체에 달려 있는 목숨. 이 두 종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의 목숨은 죽음으로 끝이 나고, 하늘에서 온 생명은 영생으로 그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죽음으로 끝나는 목숨과 하늘에 속한 생명과 연결이 안 된다는 것, 연결이 안 되는 이유가 한쪽은 죽음의 요소가 있고, 다른 쪽은 죽음의 요소가 없으니까 이 목숨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연결이 되지를 않지요.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없는 자인데 불현듯 생긴 자, 대표적인 것이 이삭이지요. 이삭이 없는 자인데 약속에 의해 생겨납니다. 이삭이 없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라의 태가 죽지요. 없는데서 불현듯 생김으로 말미암아 이 주변에 있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죽음임이 들통 나 버렸습니다. 이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의 생명가지고 하늘의 생명을 따 내려 하는 것은 예수님의 표현에 의하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 따는 것이 가능합니까? 안 되잖아요. 그런데 자꾸 따려고 하는데 이런 시도를 하면 이것이 종교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예초부터 사기입니다. 근본적으로 불쑥 솟아난 이삭 같은 인물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출현하고, 그 생명으로 졸지에 주위 사람들이 ‘아, 내 목숨은 생명도 아니구나!’ 라는 것이 화들짝 와 닫는 것입니다. 그러한 계기가 일어날 때 그 사람은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다고 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했다고 할 때, ‘아, 부활되지 못하는 내 목숨을 목숨도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이런 목숨은 목숨 취급도 하지 않는구나! 나는 죽음을 품고 사는 자구나!’ 라고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없는데서 불현듯 생긴 그런 사람들을, 콩 심으면 콩 나듯이 쏙쏙 튀어나오는 생명들의 모임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성도라고 합니다. 없는데서 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직업이라든지, 월수입이라든지, 키가 몇 센티라든지, 집안이 어떤 집안인가 이런 것은 일체 영생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죽음에 같이 묻혀 가기 때문에. 88고속도로로 오다 보니까 개울에 물이 내려가는데 거기에 빨간 꽃잎도 파란 꽃잎도 그냥 제 자리에 있을 때는 각자의 색깔로 자랑스러워하지만 흙탕물이 쳐들어오니까 그 꽃은 다 꺾어져서 탁류에 휩쓸러 가듯이, 누구하나 저기서 생명이 떳다 하면 그 순간 우리는 탁류에 쓸려가듯 싹쓸이 당해야 될 그런 목숨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이 출현되었기에 우리가 쓸려 내려가는 것에 대해서 너무 안타까워하시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팔자 고치겠다고 하는데, 팔자 고쳐봐야 탁류에 다 쓸려갈 팔자 고쳐서 뭐 할 거예요. 아무 소용없지요? 12년 동안 혈류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지고 병이 나았다. 대단한 믿음이다. 라고 사람들이 좋아라고 하는데, 생각해 보세요. 12년 동안 피 흘리는 그런 병이 안 걸리면 더 좋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병에 안 결렸으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질 필요도 없단 말이지요. 지금 이 여인이 12년 동안이나 피를 흘리는 병이 난 것은,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자기의 목숨이라는 것은 뭔가 떳다 할 때는 이것은 은퇴해야 될, 사라져야 될 목숨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러한 장치를 하신 것입니다. 그 여인이 12년 동안 안 아팠으면 예수님의 옷가를 만질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옷가를 만졌단 말은 ‘나는 죽은 목숨이요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죽은 목숨이요.’라고 만지면서, 죽은 목숨을 되돌아보면서 거기에 미련과 아쉬움이 있다면 주님 옷가를 왜 만집니까?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생명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온 생명이 있고, 우리가 지고 있는 목숨 이 생명이 있는데, 저쪽 생명이 eM면 우리 생명은 포기를 해야 돼요. 우리가 가진 생명은 주님 보시기에는 생명도 아니니까 그쪽 생명이 오면 우리 생명은 밀쳐 버리는 그런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한 것이, 하늘로서 오는 생명은 어디에 생기는가? 그것은 사람 자체를 아예 없는 자에서 불현듯 생기게 만듭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사람의 목숨의 연줄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아예 이삭의 엄마는 없고, 이삭의 엄마는 하늘에 있어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그래서 이삭은 아주 희한한 사람이에요.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아주 독특한 사람인데, 이삭이 뜸으로 말미암아 이삭같이 없는데서 생기지 아니한 모든 것은 생명이 없다. 그런 것들은 다 끝난 것이다. 다 지옥가야 해. 라고 확인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삭이 오게 되니까 아브라함은 이제 이삭 득을 보게 되지요. 이삭처럼 그러한 약속을 이삭 이전에 아브라함 자신에게 계속 퍼부어 왔다는 것이 비로소 감이 오는 거예요. 아브라함한테는. ‘하나님께서 일을 계시하셨구나.’ 내가 안 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계시했는데 그것이 뭐냐, 아내가 아들 낳지 못하는 죽은 태인데 거기에서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이렇게 하나님이 일을 시작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지로 로마서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 알맹이가 중요해요. 믿음이란 것을 딱 깨보면 그 안에 알맹이가 있는데, 믿음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어느 정도로 되는 약속인가 하면, 몇 날 몇 일에 어느 다방에서 만나자, 기자 역에서 만나자 이런 약속이 아니라, 이 약속은 우리 인간세계에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것이 약속에 담겨 있어요. 태가 죽었는데 아이를 낳는다. 이것은 새로운 노선을 개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노선을 개시하신 것을 아브라함은 믿은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노선에 관여된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4장에는 은혜의 노선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4장을 잠시 봅시다. 16절을 누가 크게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이 조상이라고 나와 있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아주 독특한 거예요. 특이한 노선을 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특이한 노선을 개시하기 위해서 어떤 요건이 필요한가?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약속과 동일한 약속이 담겨 있으면 우리는 죽어가는 목숨들 가운데 불현듯 일어나는 새로운 노선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줄기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로마서 4장에 태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이것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로 봅니다. 태가 죽었는데 아이가 태어난 것을, 십자가 죽었는데 예수님이 부활한 것과 같은 동질로 봐요. 같은 약속에 의해서 이뤄진 일로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아브라함 식의 부활이 뭐냐 하면, 태가 죽은데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 그러면 지금 우리 시대에는 뭐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 죽었던 그분이 사흘 만에 살아났다 이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요한 1서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 1서 1장 1-4절에 왜 이런 내용이 나왔는가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라의 태가 죽었습니다. 죽은 자궁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라가 아이를 낳아 그 아이의 얼굴이 어떻고 코가 어떻고 하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겠지요. 뭐든지 존재하기 이전에는 그 존재를 예상할 수 없지요. 아예 없는 거잖아요. ‘묻혀 있는 것들의 작동’이란 말이 있어요. 감춰져 있는 것들의 작동. 분명히 감춰져 있는데 밑에서 뭔가 움직임이 감지되는 거예요. 그런데 감춰져 있고 묻혀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몰라요.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만 봅니다.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못 보는 것이 아니고 안 보이는 것을 못 보지요. 지금 칠판에 그림이 없잖아요. 그런데, ‘아 나는 저기 있는 그림이 안 보이네.’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림 여기 하나 걸렸거든. 그런데 왜 나는 안 보이지.’ 그러면 ‘이 사람이 돌았나?’ 하지요. 없기 때문에 안 보이잖아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예수 믿으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안 믿는 거예요. 있으면 믿지요. 없기 때문에 안 믿고, 의지하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아요. 만약 있다면 숨어 있는 것도 캐낼 거예요. 없기 때문에 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있다는 것을 문제 삼지도 않아요. 우리교회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옛날 우리 조상들은 예수 안 믿었으니까 지옥 갔습니까?”하는 상당히 상투적이면서도 사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궁금한 질문을 했어요. 과거 조선시대, 고려시대에는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지옥 갔습니까? 라는 궁금증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했어요. 지금 어떤 중이 문 앞에 와서 ‘석가모니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라고 하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싱글벙글 웃지요. ‘미쳤나?’ 하고 웃잖아요. 우리가 답답해 할 필요 없단 말이지요. 그 사람에게는 예수가 아예 없는 거예요. 있는데 ‘내가 왜 예수를 안 믿었을까?’ 이러면 좀 안타까움이 있는데, 아예 그들은 예수라는 분에 대해서 기억조차 없어요. 없는데 안 믿었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림도 없는데 ‘저 그림을 믿을 걸. 믿어야 구원 받는데.’ 해도, "없네."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말이 얼마나 대단한 것 인줄 아시겠습니까? 뭔가 윤곽이 잡히면 캐내서라도 믿고 싶은데, 이미 태가 죽었어요. 얘가 태어난다고 했으니까 어떤 생김새일지 그런 것은 몰라요. 그냥 태가 죽은 것만 알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이삭이 태어났어요. 이렇게 태어난 이삭은 사라의 죽은 태와는 관계가 없고 하늘의 약속과 관계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의 그 정력, 사라의 태는 이삭 출생에 전혀 도움도 안 됐고 보탬도 안 되었지요. 이것을 믿습니까? 전혀 보탬도 도움도 안 됐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삭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사라의 목숨은 무가치한 것으로 차버리는 거예요. 자식이 태어나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었으니까. 이삭 쪽에서 이쪽을 차버려도 할 말이 없지요. ‘차버려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갔다 바치는 거지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내가 반발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내게는 없습니다.’하고 즐거이 기쁘게 자기 아들을 하나님의 지시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질문: 그것이 아브라함 자체적으로 생산된 믿음이 아니잖아요? 대답: 그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브라함도 모르지요. 질문: 그 믿음을 해석한다면 예수님의 믿음이라고 하면 안 됩니까? 대답: 그렇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로마서 4장에서는 이야기하지요. 뭐냐 하면, 그것을 예수님의 믿음이라 하는데, 은혜에 속했다. 은혜라는 field, 장(場), 영역에 속했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가 은혜를 주관하지 못하고 은혜가 쏘아대는 거예요. 물 폭탄처럼 하늘에서 장마 비가 쏟아지듯이 떨어지면 그 능력으로 아브라함은 이삭과 같은 노선에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것을 은혜에 속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는데, 지금 그 믿음을 해부하는 거예요. 도대체 믿음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해부해 보니까 인간의 이성과 노력과 공부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놀라운 변동이 일어났어요. 새로움이 등장한다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없는데, 짠 하고 아기 천사가 하나 태어난 것과 같은 거예요. 없는데 나는 천사1, 나는 천사2 하고 없는데서 생긴 거예요. 이처럼 생명은 그렇게 오는 거예요. 오늘 본문 1-4절이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예상치도 못했는데 우리 곁에 생명이 나타났고 우리는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믿습니다”라는 말을 이렇게 한 거예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1절) 이것을 압축하면 “믿습니다”하는 이야기예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겁니다. 하늘에 별이 떠 있는데 그 별이 갑자기 내 곁에 와서 ‘저 마구간으로 가라’고 하면 깜짝 놀랄 일이잖아요. 분명히 별은 하늘에 떠 있어야 하는데 나 가까이 오면 ‘분명히 이것은 별 아닐거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요. 없었는데 불현듯 생겨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한단 말이지요. 우리가 저이를 믿어야 해. 하고 믿었으면 이것은 신념에 해당 되는 것이지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상한 거예요. 우리가 예상한 것은 우리의 희망이고 여망이고 나의 확산(확대)이지요. 지금 요한 1서를 하면서 생명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출몰해서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 전에 이삭부터 먼저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해도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도 인정합니다. 옛날 사람이니까 죽은 것이 사실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할 줄 예상한 사람은 누가 있어요? 몇 명 되겠습니까? 한 명도 없어요. 놀랍게도.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만약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 그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자기 능력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 앞에 자기 가치가 그대로 살아 있어요.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믿음의 노선, 은혜의 노선이 아니고 행함의 노선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어서 지옥 갑니다.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다만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바로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만났던 엘리야, 모세 이런 사람들만 알지요. 그런데 제자들 중에 안 사람은 단 1명도 없어요. 따라서 어떤 사람도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고 나의 구세주라고 할 때, 4절의 그 낌새를 미리 알아 차려서 가능성 보고 믿은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은 아직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믿어지다니. 이것은 말도 안 돼. 아니 이럴 수 없어. 이것은 기적이야. 하늘의 별이 내 앞에 떨어지는 것과 동일한 거예요. 동방박사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별이 그 동네 별이 아니고 따라온 별이거든요. 자기 고향에서부터 계속 따라 오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어떤 교단의 학자들은 이 별을 UFO라고 합니다. 이것은 수직 수평 이동이 자유롭고, 이것을 타는 것은 천사인데 --- 어쩌고 저쩌고 해요. 샛별 떠는 이야기가 시편에도 나오고 베드로후서에도 나옵니다만 어쨌든 여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모습은 과거 예수님이 지상에 있을 때 제자들이 만났던 그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분이었다면 제자들이 단번에 알아봤을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못 알아 봤어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알아보지를 못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알아볼 수 있도록 창자국, 못자국의 변신도 가능하지요. 이것을 안산 강의에서 했는데, 전 목사님은 들어서 아시겠지요? 벌써 2주 지났다고 다 잊었습니까? 제가 영체, 부활체, 그리고 육신의 모습 이렇게 세 가지가 있는데, 어찌했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것 바깥에서 그냥 도전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너는 지금 새로운 노선에 가입되었음’을 통보해 주는 식으로 옵니다. 요한 1서를 다시 봅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은 죽기 전의 그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했다는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 믿는데 하등 보탬이 없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내 생명은 이제 은퇴해야 된다. 지금 내 목숨 데려가도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 믿는 자가 진짜 믿는 자라는 이야기를 제가 한 것입니다. 참 생명이 떴는데 내 구닥다리 같은 생명에 연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평생 마귀의 협박과 공갈에 시달리는 사람을 풀어 해방시키기 위해서 ---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목숨의 노예입니다. 자기 목숨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누구라도 죽인다고 하면 겁이 나서 ‘예.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남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가 나한테 무서워서 그래요. 요한 1서에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는데, 만진 바라고 했기 때문에 더 잘 믿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진짜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합니다. 라는 표현을 이렇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 1서 1장 1절부터 4절 까지는 완전히 ‘약 올리기’예요. 우리는 손으로 만졌는데 너희들은 못 믿겠나? 네가 만진 것은 예수라는 청년의 피부를 만졌지 그것이 무슨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냐? 안 믿는 사람은 이렇게 나옵니다. 네가 만진 것은 33살 먹은 보통 사람과 똑같은 몸을 만졌는데 그것 만졌다고 그것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네가 만졌다고 해서 어떻게 그런 논리가 나오는가? 안 나오지. 당연히 안 나오지요. 손으로 만졌다고 메시아입니까? 안 나오잖아요. 안 나오니까 ‘약 오르지’라는 거예요. 너는 안 나오지. 그런데 나는 나오거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믿으라’가 아니라, 네 속에 이미 있는 믿음을 끄집어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믿음이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어떤 소리를 하더라도 믿음으로 화답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건도 주께서 일으키신 줄 믿습니다. 그 말씀도 주님 주신 말씀인줄 믿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화답하라는 거예요. 그런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너는 아주 특별한 노선에 섰기 때문에, 아브라함 노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안 나와도 너에게는 나오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뭐가? 믿음에 대한 반응이. 이것을 징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징후와 반응을 제가 좀 차이를 두겠는데요, 반응이라는 것은 때리면 금방 튀어나오는 것이 반응입니다. 12시에 때려도 아프고, 새벽 1시에 때려도 아프고, 서울 가서 때려도 아프고, 대전 가서 때려도 아프고 공간 시간을 초월해서 때리면 항상 아프다는 반응이 나올 때는 반응이지요. 징후라는 것은 때려도 ‘아파볼까’ 해도 안 아프고, 다만 뭔가 내 쪽에서의 어떤 반응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그것이 징후입니다. 내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튀어나오는 반응을 징후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리수씨 에게는 미안하지만, 남자에서 여자로 변한 하리수란 사람이 있는데, 내가 장난삼아 “하리수 군” 하고 불렀는데, 하리수가 “예”하고 대답을 한단 말이지요. 자기는 의식적으로 나는 여자야, 하다가 “하리수 군”하고 부르면, 자기도 모르게 불쑥 “예”하고 대답한단 말이지요. 자, 이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지요. 저쪽에서 기대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의도한 것입니다. 내가 불러놓고 내가 반응을 얻었으니까 내가 일으킨 사건이지요. 그것이 믿음이라. 주께서 나에게 징후라는 반응을 일으킬 때 그것이 믿음의 사건입니다. 만약에 내가 의도해서 ‘내가 믿어야지’ 이렇게 하면, 그것은 나의 반응이지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니고 나의 신념, 나의 의도, 나의 계획 이런 거예요.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주 희한한 현상이 주님 주신 사건으로 말미암아, 원인 제공자가 원인의 결과를 되 가져가는 식으로, 그것을 징후라고 합니다. 그 징후가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라든지,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숨겨 주는 것 이런 것. 이렇게 할 때 다른 사람이 ‘라합아, 네게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했는가?’ “주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그것이 내가 예상한 것이 아니고 돌발적인 상태가 왔을 때 돌발적인 반응을 나타내는데 그런 식으로만 홍해를 건너게 되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천국에 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실 때는 어떻게 오느냐? 도적 같이 오세요. 도적같이 오는 것은 예비를 못 합니다. 만약에 예비한다면 그것은 자기 반응이지 징후가 아닙니다. 도적 같이 오실 때, 도적같이 납치되어서 주님과 함께 들려 올라갈 때 그것은 주께서 일으키신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신학자들이 믿음이냐, 행함이냐? 논쟁을 하는 거예요. 내가 미리 예상해서 정리한 것은 내가 만든 반응이지 믿음의 징후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생명이 출몰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생명의 징후를, 우리를 가지고 놀면서 계속 뽑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리수 군” ‘예’ 남자 맞네! 이런 식으로. 계속 우리를 하리수 군으로 삼아서 너는 믿는 자라는 그런 징후들을 뽑아내는 식으로 생명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나는 예수를 만났는데 손으로 만졌어, 눈으로 보았어. 그런데 너희들은 안 믿지? 당연하지. 주의 능력이 임해야 믿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1서에서 이렇게 시작하지만 중간 중간에 징후가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인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죽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랑. 이건 보통 사랑이 아니에요. 심판이 전혀 안 무서운 정도의 사랑입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이 전혀 안 무서울 정도가 되어야 사랑입니다. 제가 전에 서울에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 우리교회 자기 어머니가 순복음교회 전도사인데, 제책 [지옥의 하나님]을 주니까 보지를 안아요. 무슨 하나님이 천국의 하나님이지 지옥의 하나님이 다 있냐? 고 하면서 안 읽어요. 지옥의 하나님도 즐거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주의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과감한 말을 해요. ‘내가 내 형제를 위해서 지옥 가라고 하면 갈게. 내가 지옥 갈지언정 내 형제가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으면--- 그래서 요한 1서 4장 16-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고,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그리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이 세 가지를 보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이 있으면 심판 날에도 겁나지 않고, 심판 날 뿐 아니라 지금도 모든 두려움을 추방을 합니다. 어둠을 보고 나가라고 하면 안 나갑니다. 그런데 빛만 갔다 대면 어둠을 사라집니다. 우리가 왜 두려운가 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빛 스위치를 안 켜서 그래요. 사랑의 빛 스위치만 켜면 우리에게는 두렵다는 어두움도 싹 사라져 버려요. 사랑만 들어오면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져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은 것도 사랑이 넘쳤기 때문에 죽음이란 것이 자기에게는 큰 문제가 안 돼요. 이것을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생명이 생명답게 되기 위해서 우리를 가지고 논 결과예요. 생명이 우리에게 장난 짓을 하고 있어요. 생명이 우리 안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거예요. 요한 1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으로 기뻐한다는 것이 있거든요. 주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거리가 별 의미 없이, 그것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뭐가 중요해. 라고 한 3초 정도 느끼게 한단 말이지요. 이것이 징후지요. 3초 지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거리가 또 나오지요. 그런데 생명이 내게 찾아와서 장난을 치면 순간적으로 이런 것들(육신의 정욕 -- 등)이 아무것도 아니지. 이미 생명이 있는데.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의 마음입니다. 이제 요한 1서 초반부터 차례로 하겠는데, 이것 하기 전에 요한 1서에 대서 묻거든 이렇게 하세요. 생명이 출몰해서 자기 백성을 가지고 노는 책. 이것이 요한 1, 2, 3서입니다. 누구 허락도 없이?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갖고 노는데, 갖고 놀 때마다 나오는 것이 뭐냐? 사랑 나오고,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리고 심지어는 어떤 죄도 다 씻어짐이 확인되는,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5장 18절인데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놀라운 거예요. 범죄치 아니한다. 이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어떻게 믿을까요? 이렇게 물으면 바울은 ‘그런 것 염려할 필요 없다.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믿을까 라고 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된 거예요. 처음부터 믿음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정말 나에게 이런 상태가 나옵니까!’ 라고 감탄하면서 고맙다고 받아들여야 할 문제이지, ‘어떻게 내가 이렇게 합니까?’ 라고 묻는 것을 잘못 되었어요. 생명이 그렇게 하지요. 생명이 범죄치 않게 해요. 그것이 요한 1서 4장 4-5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이렇게 노선이 둘로 나눠집니다. 이것은 생명이 와서 우리에게 장난질을 쳐서 우리가 구원 받은 거예요. 생명이 와서 장난 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도요한부터 시작해서 12제자 중 한 명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세 번씩 부인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사도요한도 모르는 채 하고 도망쳤습니다. 아무도 믿은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말을 하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와가지고 ‘너는 빼도 박도 못해. 너는 완전히 나에게 장악된 자야.’ 그 징후들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 1서입니다. 제가 어렵다는 것이 뭐냐 하면, 요한 1서 1장 첫 대목이 어려운 거예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이것이 어려운 말씀인데, 왜 어려우냐 하면, ‘태초’가 뭐냐고 묻지 말란 말입니다. ‘태초’가 뭐냐고 묻게 되는 것은, 우리 목숨을 안 버리고 앞에서 쥐려고 할 때 이런 물음이 가능해요. 생명 안에서 우리 목숨을 포기하면 되는데 포기 안하고 ‘내가 태초가 무엇인지 알아서 신앙에 보탬이 되어야지’ 이런 마음으로 태초가 뭐냐고 묻게 되요.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도 나오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할 때, 우리의 관심사가 ‘태초’에 가면 안 돼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태초’에 가요. 그 이유는 모든 육체는 시간과 공간을 포기를 못해요. 우리 육신은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우리는 ‘나’라는 인간을 파악합니다.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뭔가 행동에 옮기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전부 나를 보기 위함이다.’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함이라고 했어요. 뷔페식당에 갔는데 어떤 사람은 잡채에 젓가락이 가고 어떤 사람은 탕수육에 젓가락이 간단 말이지요. 잡채와 탕수육이 같은 형제간인데 한 사람은 잡채 편에서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탕수육에서 데려감을 당하고. 그렇게 가는 거예요. 왜 잡채와 탕수육이 형제인데 A는 잡채 데려가고 B는 탕수육 데려가느냐? 잡채를 놓음으로서 내가 누군지를 아는 거예요. 잡채 좋아하는 나. 나는 탕수육 좋아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대학을 진학하는데 어떤 사람은 법대를 가고, 어떤 사람은 의대를 가요. 왜?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그래요. 어떤 사람은 부모가 법대를 가라고 하는데 기어이 안 가요. 왜냐하면 자기는 농사짓겠대요. 기어이 농사짓겠대요. 왜? 법대 가면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 그래서 어떤 사람이 행동을 할 때 그 사람의 잘 잘못이나 가치를 논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겠기 때문에 그 사람의 그 행동은 나보다 더 가치가 있다든지 없다든지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목사님들께 ‘공부하라’고 했는데, 공부하라고 해도 그것은 소용없는 말이에요. 왜?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그런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데, 공부하라는 말을 언제 좋아하는가 하면, 내 말 듣기 전에 평소에 공부하기를 좋아했는데, 제가 ‘공부하면 좋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렇지”하면서 동의하면서 나오지요. 원래는 제 말에 동의 하지 않다가 자기 본색에 맞으니까 그 때는 동의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억지로 한다고요. 그러니까 자기 본성에 안 맞는 거예요. 하지만 나도 공부 좀 했습니다. 이런 핑계대고 틈만 나면 놀면서 나중에는 바빠서 못했다고 변명하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본성 따라 가기 마련인데, 공부하는 것이 가치 있고, 공부 안 하는 것이 가치 없다고 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본성 따라 가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믿으세요.”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에 예수의 생명이 이미 들어있는 사람은 좋아하고, 생명 없는 사람은 억지로 믿으려고 하니까 가짜 교인 되는 거예요. 자기의 본색을, 자기의 징후를 그대로 드러내면 되요. ‘나 예수 믿습니다.’(목에 힘을 주면서) 하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이것은 가짜고 ‘예수 믿으라고 해서 믿으니까 얼마나 좋은지--’ 갑자기 “얼마나 좋은지”가 나오면 이것은 진짜예요. 믿으라고 해서 믿습니다. 그런데 나를 지옥 보내기만 해 봐라. 이러면 이것은 가짜예요. 그런데 누가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 안 해주나? 아, 해 주는구나. 내가 믿을게요. 라고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성경에도 이런 경우가 많잖아요. 삭게오 같은 경우. 자진해서 나오잖아요. 이것은 이미 주님과 다 내통했기 때문에, 자기 삶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같이 예수님을 봐도 별로인데, 삭게오는 예수님 보기 위해 애를 썼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다 나무위에 올라가도 소용없어요. 삭게오는 자기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낸 거예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생명의 말씀이 태초를 새롭게 규정을 이 땅에 남겼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요 태초가 없어요. 왜? 태초가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나’만 있으면 돼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장마가 왔을 때 조선일보 1면에, “강원도에 폭우가 내려 손실이 많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우간다에서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죽었습니다.” 이런 것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조선일보는 우리나라 신문이기 때문에 우간다 이야기를 1면에 낼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지요? 같은 지구상에 일어난 이야기라도 우간다 이야기는 조선일보 1면에 안 나온다고요. 예가 너무 엉뚱하지만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태초’에 관심이 없어요. 조선일보에 “태초에 생명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 안 실립니다. 왜? 조선일보는 2006년 이야기가 중요하지 ‘태초’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믿는 사람은 ‘태초’가 중요해요. 이것이 믿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희한한 사람들이라. 분명히 자기가 대한민국에 살고, 광주에 살고, 2006년을 보내고 있으면서 중요한 것은 여긴 줄 아는데, 한 2, 3초 동안은 ‘태초’가 중요해요. 갑자기 ‘태초부터 나를 알아서 주께서 오셨구나!’ 갑자기 ‘태초’가 그 사람의 시간 속에 개입하고 그 사람의 공간을 헤집고 개입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를 앞장세워 우리에게 들이닥친다는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그런 관점으로 우리 마음속에 징후를 남기면서 들이닥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자신의 목숨이란 것은 파리 목숨이며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그런 반딧불 같은 하찮은 목숨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태초부터 있던 계획이 밀려들러 왔는데 사소한 나의 프로젝트는 그 앞에서 빛을 잃어버립니다. 태초에 계신 분이 나에게 작업을 들어왔는데 내가 벌리는 작업은 그 태초의 작업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작업입니다. 동박 박사들이 무엇 때문에 멀리서 왔습니까? 그곳에서 곗돈 받으러 왔습니까? 동창회 참석을 위해 왔습니까? 태초가 밀어서 온 거예요. 태초의 생명의 말씀이 밀어서 와보니까 태초의 말씀 되시는 분과 접견이 가능했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 참 중요한 거지요. 하지만 그 아기 예수님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아낌없이 그것을 예물로 받칩니다. “오! 메시아여. 영원한 우리의 왕이시여.” 그 때 그 동방 박사와 아기 예수의 만남은 이 땅의 공간과 시간이 아니고 태초의 정지된 시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별이 함께 했던 거룩한 천국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놀라운 일들을 생명 되시는 분이 우리를 가지고 캠버스로 사용해서 이 광주 땅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합시다. 첫 번째 시간에서, 생명이 나타난 것은 우리의 요구사항이 아니고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 자기가 원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그냥 출몰하신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아무도 안 믿고 도망쳤는데, 그 생명 되시는 분이 기어이 따라와서 제자들로 하여금 ‘야, 진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이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고백하도록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든 작업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대로 작용했는데, 이것을 붙잡으려고 하면 안 돼요. 그분이 작용했기 때문에 작용하게 되면, 우리한테는 예상치도 못한 어떤 징조가,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작용해서 징조가 나오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고, 그런 징조가 없으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징조가 어떤 것이냐? 제가 첫째시간 끝에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을 우리로 하여금 잠시나마 완전히 잊어버리게 한다. 태초에 있는 생명을 우리가 눈으로 봤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기쁨이 충만케 되는데, 충만이라는 것은 어떤 상자 안에 꽉 차서 다른 게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충만이 바로 태초에 생명께서 그런 기쁨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그런 징후와 징조가 자기 백성은 가지고 그런 것이 나오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첫째시간에 한 것입니다. 이제 둘째시간에 어떤 징조가 있는가? 6-7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라고 되어 있지요. 무슨 징후냐 하면, 빛과 어둠이 구분지어지는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빛과 어둠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는 거예요. 빛은 무엇이냐 하면, 여기 1장 9-10절에 보면, 빛은 죄 용서입니다. 이게 빛이에요. 그 전에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빛과 어둠이 구분되는데, 그러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빛과 어둠을 구태여 구분 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빛이 와야 어둠이 어둠이란 것을 감 잡지, 빛이 오지도 않았는데 빛과 어둠을 구분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너는 어떻게 사노?’ ‘그냥 사는 대로 살지 뭐.’ ‘교회 왜 나왔는데?’ ‘복 받기 위해서 나온거지 뭐.’ 세상 사람들은 빛과 어둠이라는 자기를 둘러싼 어떤 외부적인 장, 영역, 외부적인 어떤 지배, 통치 그런 것 생각 안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자기 몸만 편하면 돼요. 내 몸뚱아리만 잘 되면 끝나는 거예요. 교회 문을 들어와도 축복받기 위해서, 내가 어디에 속했느냐 하는 것이 귀찮아요. 그저 내 몸만 편하면 최고예요. 교회 다녀서 복만 받으면 최고예요. 이 복이 뭐냐, 몸 건강하고, 자식 잘 되고, 내 욕망대로 만사형통하고 이거잖아요. 내 몸뚱아리 하나 잘 되면 끝나는 거예요. 이걸 지난 수요일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立春大吉(입춘대길)’ 이라고 했어요.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봄에 절에서 뭘 주는가 하면 ‘입춘대길’이라고 선 부적처럼 된 것을 가계마다 붙이라고 줘요. 봄이 되면 큰 행운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만약에 절에 안 가고 교회와도 마음속에 뭐가 있습니까? ‘입춘대길’ 내 몸뚱아리 하나 잘 되면, 교회 계속 다녀서 가계도 잘 되고, 자식 잘 되고, 내 뜻대로 잘 되고 이러면 되는 거예요. 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고, 이런 것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를 덮치고 있는 것이 흰 구름이냐, 먹구름이냐 그런 것 생각 안 한다고요. 그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내 몸뚱아리 하나 이게 가장 생생하게 느껴지고, 이것 외에는 딴 것 절대로 생각 안 하는 거예요. 이것이 무식한 절에 다니는 할머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유식하다는 대학교수라든지 사장님이라든지 의사나 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뭐냐, 자기 몸뚱아리 하나 잘 되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자기 딸 외국어고등하교 입학하는 것이 목표고, 자기 잘 되면 끝나는 거예요. 그 외에 잡다한 소리 하면 잡니다. 듣기를 싫어해요. ‘여러분의 몸이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면 자다가도 다 깨요.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생명이 오게 되면, 자기 몸뚱아리를 뭘로 보는가 하면 죄인으로 규정해요. 죄인 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내 몸뚱아리에 대한 기대를, 뭘 요구하지 않고 ‘나는 빛에 속했느냐, 어둠에 속했느냐?’ 전에는 어둠에 속했는데 지금 빛에 속했다. 이것을 생각하게 돼요. 몇 초? 3초. 나머지 수 천 초는 뭘 생각하지? 내 몸뚱아리입니다.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은, 생명이 다가와서 어떤 징후를 만들지 아니하면, 세상 사람이나 우리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빛에 속했을까, 어둠에 속했을까 평소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아무 생각 없는가? 아닙니다. 생각합니다. 뭘 생각하느냐? 내 몸 편한 것만 생각해요. 딴 거 아무것도 생각 안 해요. ‘오늘 교회 왔으니까 내 몸 편하게 해 주세요.’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절을 대체해서 제 2의 절로서 온 골목마다 절로 가득 찼습니다. 대한 예수교 합동측이라는 절, 일종의 조계종이지요. 여기 가까이 순복음도 있지만 전부다 “여러분, 복 받아서 몸 하나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 주제로 설교를 합니다. 만약 그 외에 다른 설교를 하면 그 교회 안 나오고, 교인 줄고 헌금 안 나오면 그 목사는 장로들에 의해서 쫓겨나고 길거리에 나앉아야 합니다. 오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큰 교회 안 간 것이 천만 다행이지 갔다고 하면 길에 내팽개쳐 졌겠지요. 목사가 되어서 돈까스 가계 하면 됩니까, 안 됩니까 하는데, 요한 1서에 의하면 돈까스 가계를 하는 것이 하나의 징후라면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요한 1서에서의 징후는 뭔가 하면, “나는 빛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까스 가계를 하는 것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으로서 돈까스 가계를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죄와 연관되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빛 안에서 용서 받는 대상으로서의 죄인이고, 빛은 우리에게 용서를 해 줍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장 10절에 나오지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 올 때는 화목제물로 다가왔는데, 우리가 죄 안 지었다고 하면 화목제물은 멀뚱하잖아요? ‘저, 짜장면 시키신 분?’ 이러는데 ‘우리는 초밥 시켰는데요.’ 이러면 짜장면 배달하는 사람은 멀뚱하잖아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서 무엇이 꼭 필요한가를 알아요. 그것은 화목제물의 피입니다. 피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7절에 있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줄 선물보따리를 가지고 왔는데 그게 한 글자로 뭐란 말입니까? “피”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왔다는 말은, ‘너는 너에 대해서 몰라.’ 라는 뜻이에요. ‘이근호, 너는 너에 대해서 몰라. 이근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나 예수가 더 알아.’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그냥 알아가는 거죠. 아까 했잖아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거예요. ‘나는 뭘 좋아할까? 짜장면을 좋아할까? 개고기는 싫어. 영덕 대게는 좋아.’ 뭔가 알아가면서 평생을 보내는데, 진짜 제대로 딱 꼬집어서 ‘너는 이거야. 이런 거야.’ 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쟁반에 피 들고 왔을 때, 쟁반이 아니고 십자가의 피 들고 왔을 때, ‘아, 나는 죄인이구나.’ 하고 자백하면, 그 자백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는 뭐냐? 빛의 관계 속에 놓여 있고,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그 피로 왔기 때문에, 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빛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어둠에 속했다는 것이 완전히 규정되어 버려요. 우리보다 나쁜 짓 더해서 어둠이 아니라 용서의 피가 없는 영역이, 용서의 피가 적용이 안 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어둠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의 징후로 아는 거지요. 요게 어려운데, 숨겨져 있는 것이 작동한다고 말했지요. 현재 우리 속에 주님이 계시는데, 우리가 24시간 정신 차리고 아는 게 아니에요. 다만 우리는 본성상 내 몸뚱아리만 알아요. 우리 안에 아무리 예수님이 계시고 생명이 있더라도 우리는 내 몸뚱아리만 생각해요. 권사님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내 몸이 최고라. 우간다에 비가오고, 우간다고 나이지리아고 내게는 소용없어요. 내 동생이 있는 지역에 장마가 왔다고 하면 관심을 갖지요. 그런데 내 동생이 아니고 옆집 동생 이야기하면 신경 안 쓰요. 옆집 동생을 내가 왜 신경 써. 내 몸뚱아리와 관련된 것만 신경 쓰요. 이게 우리 본성이에요. 그런 우리가 정신 차린다고 해서 빛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징후가 아니에요. 그런데 뭔가 내 예상한 일이 요상하게 꼬이면서 예상치도 않는 일이 벌어지고 사건이 일어날 때, 갑자기 내 몸뚱아리 생각한 것에 대해서 화가 치밀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신경 썼다는 자체가 손해 본 것 같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미 빛에 속한 사람입니다. 생명이 가만 두지 않는 사람, 빛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피가 생각나면서 그 순간만큼은 기쁨이 충만하지요. ‘아, 나는 살았지. 나는 죽을 놈이 아니고 살 사람이지. 나에게 생명이 있지. 내 이 목숨 말고 다른 생명이 또 있지.’ 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왔다 가신 것입니다. 왔다 갔다니까 말이 좀 이상한데, 주님께서 “하리수 군” 하면서 한번 건드려 본 거예요. 장난을 쳐 본 거예요. 사실 장난이란 것이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신 것이지만, 제가 말을 쉽게 하기 위해서 그냥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그 어려운 요한 1서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지요? 조사하면 다 나와요. 슬슬 풀리기 시작하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생명을 가지고 생명 없는 우리를 대상으로 노크를 하고 두드리면서 장난치고 합니다. 그 대목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데,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문 열고 들어오시지 왜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치냔 말이지요. 제자들 모여 있을 때에는 잘도 들어오셨는데. 제자들에게 ‘잘 계십니까?’ 노크하고 들어왔어요? 그냥 들어오셨어요. 문이 닫혔는데도 그냥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고 하셨지요. 그런데 계시록 3장에는 노크를 하는데 왜 이렇게 하느냐? 이미 성도한테는 ‘내가 너와 지금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주님한테 있어요. 지금 네가 혼자 몸이 아니고 내가 너를 지금 사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계속 신호를 보내고 싶은 모습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요한 1서 1장 3절에 보면,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사도들과 사귀는 거지요.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 다음 7절에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 아빠, 아들, 딸 4명이 함께 있는 것처럼, 사도와 우리, 예수님과 하나님 전부 부둥켜안고 우리는 한 식구라고 확인시키기 위해서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노크도 하고 장난도 치고, 깜짝 놀라게 만들고 그러면서 결론적으로는 그리스도 피로 말미암아 기쁨이 충만케 하고. “우리가 남이가” 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지역감정에 호소해서 표 찍어달라는 소리인데, 예수님이 “우리가 남이가” 하는 식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요한 1서 이제 대략 아시겠지요? ‘아, 장난치시는 구나.’ 그렇게 아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장난치시는데, 그렇게 장난치셔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해서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진리란 것은 ‘확증되었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목회를 하면서 제일 괴로울 때가 언제냐 하면 확증 된 것이 손에 안 잡힐 때 제일 괴로워요. 힘들어요. 교인들이 애먹이고, 누가 말썽 일으키고, 교회서 나가라, 저는 벌써 네 번 쫓겨났나 모르겠습니다만. 여하간 여러 가지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 그 가운데서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확증된 것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제일 힘듭니다. 설교 전에, 뭘 전해야 되는데 확증된 것이 없을 때, 제일 설교하기 곤란한 거죠. 확증된 것이 없을 때 설교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신학 강의가 돼 버려요. 목사님들 설교 들으면서 신학 강의식으로 들리면 ‘아, 확증된 것이 없어서 시간 때우는 식으로 하고 있구나.’ 이분이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면 곤란한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확증된 것이 있으면 설교가 되는 정도가 아니고 목사가 설교하면서 모든 시름과 걱정이 없어져요. 교인이 3명이 오던 1명이 오던 상관없이 증거할 수 있습니다. 확증되었다는 그 자체에 기쁨이 충만해서 그것이 설교로 그대로 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이 설교 듣고 누가 나에게 욕을 하겠는가, 그런 것 따진다는 말은 아직도 확증된 것이, 자기 몸뚱아리만 확증되었지 아직 진리는 확증 안 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걱정이 되는 거예요. 너무나 확증되었으면 내 몸뚱아리가 여기 있는지 저기 있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방송에서 한 이야기인데, 연극하는 사람인데, 연극 초반에 하도 어려워서 열심히 했는데 손님들이 잘 안 오는 거예요. 그래도 열심히 준비를 했기에 연극 공연을 하는데, 상영 시간이 10시여서 상영을 했는데, 손님이 1명 왔어요. 연극하는 사람은 15명이라. 회의를 해서 상영 하느냐, 마느냐를 의논해서 하기로 결정했어요. 나이 40 중반쯤 된 관객 1명이 앉아 있는데, 15명의 사람이 열심을 다해 했답니다. 10분쯤 지났는데, 그 관객이 화를 내면서 “내 하나보고 연극하고 있는데 내가 민방해서 더 못 보겠다.”고 해서 연극 하는 사람 15명 다 불어서 막걸리 싸 줬답니다. 수고 했다고. 입장료보다 더 많이 들었지요. 혼자밖에 없는데 뭣 하러 공연하느냔 말이지요. 내가 민망해서 못 보겠단 말이지요. 식사를 해도 같이 해야 맛이 있고, 공연을 봐도 여럿이 같이 봐야 재미가 있지 혼자 무슨 재미로 봅니까. 15명이 웃어가면서, 울기도 하고 하는데 혼자 앉아서 얼마니 찜맛이 없겠어요. 그런데 설교자는 사람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생명에 붙잡혀서 하기 때문에 관객 1명 두고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저는 1명 두고도 설교 했어요. 제 아내 말고. 아내 같으면 둘이 의논해서 오늘 하지말자고 했을 것인데, 아내 말고 진짜 1명 왔는데도 했어요. 기쁨이 충만해서. 왜냐하면, 설교 몇 명 가지고 안 한다는 것이 확증되었기 때문에. 교인 몇 명 왔느냐? 교회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 이런 것 가지고 안 따지기로 확증을 했기 때문에, 확증되었으므로 오는 안도감 때문에 마음껏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끝나고 난 뒤에는 저 나름대로 바쁘지요. 왜 안 오셨습니까? 혼자 했습니다. 하고 짜증내는 척 하면서 전화도 하지만, 설교할 때는 다 잊어버리지요. 어떤 교회는 1명오니까 찜맛 없어서, 연극에서처럼, 오늘은 하지 말고 수요일은 폐지합시다. 그렇게 해서 안 모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진리가 확증되었으면 죄는 뭐냐? 중요합니다. 죄는 확증되지 않는 것에 마음 빼앗기는 것이 죕니다. 이것이 요한 1서의 죄예요. 확증된 적도 없고 그냥 앞으로 잘 할게. 이런 것에 대해서 기대는 것. 앞으로 잘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기대를 걸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죄입니다.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이미 확증되었잖아요. 결장 나버린 거예요. 생명은. 지금 생명 얻으면 다 얻은 거잖아요. 그러면 생명이 나타났으면 다 나타난 거예요. 더 없는 거예요. 없는데, ‘내가 교인 좀 더 모아야 하는데, 지금보다 설교를 좀 더 잘해야 되는데’ 뭔가 계속해서 미흡함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면서 그걸 채우려고 애쓸 때, 그것이 바로 죄라고 하는 겁니다. 진리에 확증된 것에 모자라는, 미 확증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쓴다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죄는 평생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미흡함을 느끼니까 마귀가 슬슬 장난을 치지요. ‘봐라, 지난번에 벌 받은 것은 네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 진리에 합당해야 된다는데 진리에 미흡하니까 죄를 느끼는 거예요. 죄를 느끼니까 여기서 마귀가 덤벼들고, 심판이 찾아오고, 벌 받을까 싶어서 두려움이 찾아오고 그렇게 되니까 기쁨의 충만은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기뻐하지 않아요. 죄 안 짓기 위해서 정신 바짝 차리는 거예요.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은 있지만 안도감이 없어요. ‘야,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 몰라? 이런 사태가 일어나면 큰일인데, 안 돼, 안 돼. 하나님이여 제발 그런 사태만은 일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은 아예 두려움을 호출하는 거예요. 두려움을 다 끌어 모으는 겁니다. 이 집 팔려고 내 놓았습니까? 이 집을 내 놓았으면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빨리 팔려야 할 텐데. 팔리더라도 제값 받고 팔아야 할 텐데. 세금 너무 많이 나오면 안 될 텐데’ 등등 여러 가지 미흡한 요소들을 막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는 이상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예상 못할 일, 갑자기 집 걱정이 있는데 얘기 스키 타다가 넘어졌다고 하면, 그 순간만큼은 얘 걱정에 솔리면서 집 생각은 안 했는데,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와서 원하는 만큼 돈 줄 테니 집 팔라고 연락이 왔다면 기쁩니까, 안 기쁩니까? 안 기쁜 거예요. ‘마음대로 하세요.’ 전에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해 놓고는 지금은 퉁명스럽게 ‘알아서 하세요. 지금 신경 쓸 일이 많으니까 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하나님께서 일을 처리하면서도 내가 예상한 기쁨은 안 주고 정신을 딴 데 돌릴 틈새에 그만 예상치도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에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장난을 치시는구나, 왜 얘가 평소에 건강할 때 그 건강한 것 때문에 주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고, 건강한 것을 당연히 여기고--- 얘들 키워보면 알지만, 공부 못한다고 그렇게 닦달하지 마세요. 얘가 아프면 공부 못해도 좋으니 제발 건강하라고 빕니다. 그렇게 되면 얘가 시건방져서, 아이스크림 사 와라, 핸드폰 사 달라 뭐 온갖 요구를 다 하지요. ‘그래, 해 줄게’ 하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김정일 약속하고 똑 같아요. 다 취소되는 것이고. 어쨌든 우리가 평소에 작은 것에 감사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뭔가 일을 하나 터뜨리게 해서 새삼스럽게 우리가 생명의 혜택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이것이 바로 확증된 진리와 사귀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와 사귀는 분이 장난치기를 좋아해서 맨날 확증된 것을,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우리가 괴로워 할 때마다 확증된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쁨을 재생시키고 활성화 시키는 일을 계속 하십니다. 그 다음 2장 봅시다. 너무 쉽지요. 요한 1서 말씀이 어려운데 너무 쉬우니까 이상하다.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자, 보세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마귀에게 놀림감 될 수밖에 없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때문에 매일 거기에 파묻혀 삽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죄 짓지 말라고 하시면 될 텐데,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짓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우리를 어디로 보내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중간에 대언자, 중보자지요. 중보자에게 관심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는 내 몽뚱아리만 생각하지 주님의 몸에서 피가 나오는지 땀이 나오는지 그것은 생각 안 해요. 내 몸만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내 몸만 생각하는 인간을 주님 몸만 생각하는 인간이 되도록 생명께서 우리에게 자꾸 사건과 일들을 일으킵니다. ‘네가 죄 짓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너의 죄를 대신해서 용서해 달라고 하는 대언자가 있으니 곧 그리스도다.’ 그분이 누구라고요? 우리 곁에 오신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요’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절에 “우리 죄를 위한”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지요.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온 세상은 1장 3절이나 7절에 보면 사도와 사귀는 사람만을 말합니다. 그냥 온 세상이 아니고 사도의 이 말을 듣고 사도와 가까이 하는 그 사람에게만 주님께서 화목 제물로 오셨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확증된 것을 가지고 요한 1서에서는 “온전함”이라고 합니다. 늘 온전함이 미흡한 우리 속에 삽입되어 있는 식으로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2장 6절에서는 “거한다”고 했습니다. ‘사귄다, 거한다’ 이 말은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이 있기 때문에 너도 예상 못한 예수님 생각을 하지, 만약 네가 네 힘대로 예수 믿으면 바쁘면 예수님 생각 안 할 것이 분명하잖아요. 우리는 바빠서 예수님 생각 못하는 것이 아니고, 바쁘든 안 바쁘든 우리는 내 몸을 생각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건드리기 때문에 건드릴 때마다, ‘아하 예수님이 대언자로 계시지,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지.’ 라는 생각이 순간순간 떠오르고 기쁨이 충만하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주님 주신 기쁨이 있는가를 측정하는 방법은, 지금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일 계획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금 교통사고로 죽는다고 할 때, 그게 만약 아깝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몸뚱아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죽어도 좋다고 할 때는, 자기 몸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몸을, 피를 생각할 때는 그 순간만큼은 지금 죽는 것이 별로 무섭지 않아요. 여한이 없지요. 그러나 이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오셔서 계속해서 그러한 현상을, 징후를 우리에게 드러내고 하시는 겁니다. 2장 10절에 보면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여기 형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치가 우선되기 때문에 경쟁이란 것이 생겨요. 경쟁이 성립되려면 각 개인마다 자기 몫의 가치가 따로따로 구분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가치, 네 가치 따로 구분되어 있어야 서로 경쟁이 되지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공동의 가치입니다. 주님 한 분이 흘리신 그 피를 공동이 자기 것도 아닌데, 주님의 것인데 공동이 누리는 그런 식의 가치지요. 이 자치는 주님의 의인데, 우리가 반듯하게 살고 착하게 살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공동의 가치, 주님께서 공동용으로, 공동의 가치 속에 공동이 누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의로 우리가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에 성화가 개입되어버리면 성화론은 개별자의 가치로 전환되고 말아요. ‘너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하냐? ‘성화 되려고.’ ‘그러면 너는 열심히 기도해라. 나는 놀게. 그런데 네가 기도해서 얻은 거룩한 것을 내게도 좀 다오.’ ‘안 돼. 이것은 내가 노동했기 때문에 나만 누릴 수 있어.’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원칙이지요. 주님은 공동의 가치예요.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서 개인 가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로 해서 공짜로 누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제대로 된 형제라는 개념이 생깁니다. 요한 1서 3장 16절에 보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아니하면 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위해서 목숨 안 받칩니다. 턱도 없는 소리예요.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능력이 있는데, 어떤 능력이냐 하면 개별적인 가치를 무산시키고 그 경계선을 넘어서 공동적인 가치로 자기 사랑을 내 놓게 하는 능력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 사랑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가지고 놀기 때문에, 마음껏 나를 다루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이 퍼지도록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징후가 되겠지요. 생명이 있다는 징후가 됩니다. 너와 나의 경계선이 성립되면 안 돼요. 형제만 있으면 돼요. 형제들이 있으면 안 되고, 그냥 형제예요. 오 목사님과 합해서 형제들이 아니고 그냥 형제예요. 그러나 보통 집안 식구들은 형제들이 몇 명입니까? 3명입니다. 이렇게 되지요. 이것은 형제들이 되지요. 그러나 우리는 형제밖에 없어요. 하나의 형제밖에 없어요.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다 하나의 징후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을 지키라고 하면 지킬 사람 아무도 없어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도와줬는가? 누가복음에는 이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자비’라고 했지요. 자비심으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형제가 되겠어요? 자비라는 그러한 연대로 묶여진 사람은 이웃이 되니, 이웃이 생겼다는 그 자체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도 함께 자동적으로 성취가 되고 마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율법사가 주님께 뭘 물었습니까? 율법사는 따로 떼서 물었지요. ‘십계명의 온 말씀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것이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자기가 행동의 주체가 되어서 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내 밖에 있는 이웃은 이웃이 아니에요. 내가 그 사람과 이미 하나 된 상태가 아니면 이웃이란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웃은 자비가 우선될 때 이웃은 뒤따라 자동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자비,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 따라 올 때, 사랑은 대상을 향하여 겨냥하게 되어 있는데, 사랑이 꽂이는, 사랑이 쏘는 그 화살일 때 그것이 이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오, 이웃. 사랑합니다.’ 이런 것은 성립이 안 돼요. 사랑하니까 이웃이 되는 거예요. 이미 사랑이 있으니까, 그 안을 들여다보니까 이웃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리니까 새삼스럽게 이웃을 사랑하지 마세요. 그냥 사랑만 하면 이웃은 저절로 그 사람이 바로 이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원하든 원치 안든 형제고 이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오해하는 것은, 김 집사님 우 집사님 다 이웃인데, 김 집사님이 돈이 털어져서 ‘우 집사님, 100만원 빌려주세요.’ ‘미쳤나. 돈 빌려주게.’ ‘형제라면서’ 돈 ---- 형제가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형제가 아니고, 주님이 주신 형제인데, 내가 일부러 김 집사와 형제하려고 돈 빌려줄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돈 안 빌려줘서 삐쳐서 ‘그럼 형제 안 한다.’ 그러면 처음부터 형제가 아니었지요. 그것은 다른 관계 때문에 맺어진 것이지 주의 사랑 관계는 아닙니다. 그래서 보증서지 마세요. 삐쳐서 나가거든 처음부터 형제 아닌 줄 알고, 그저 당신 만난 것이 주님의 사랑 때문에, 사랑 안에서 교재하기 위해서 만나지, 주님이 만들어준 형제지 우리가 돈 문제 때문에 만난 형제는 아니다. 이럴 때만 진정한 형제입니다. 믿습니까? 교회에서 형제라고 하면서 돈 거래, 보증서는 문제 때문에 시험 들고 할 필요 없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 졌네. 다시 이야기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형제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정해놓은 것입니다. 형제가 정해졌다는 말은 이미 사랑이,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이 내 속에 들어와 있어서 그래서 작동을 개시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몇 개지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하나지요. 하나가 둘이 될 수 없고, 셋이 될 수 없어요. 둘, 셋을 노린다면 이것은 형제의 몸을 깨는 거예요. ‘우리는 한 성령을 같이 마셨다’고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우리는 아무리 헤어져도 하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가도, 10이 되더라도 다 하나다. 전부다 하나라는 것이고, 이것이 태초의 생명 되시는 분이 그렇게 하셔서 그렇습니다. 2장 14절을 봅시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형제이기 때문에 아이들아, 어른들아 나이별로 다 해요.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거한다고요? 우리 속에 거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2장 7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새 계명이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빛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확증된 어떤 권력 속에 우리가 이미 사로잡혀 있다 이 말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그러니까 여기 1장 1절에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반진 바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람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건질 때 낚시 대로 건지는 것이 아니고 진짜 형제의 모습으로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와서 사랑을 증거 하듯이, 이 사도들이 너희보기에는 초래해 보이지만 예수님도 사도 못지않게 초라했다. 그런데 초라한 분이 우리 사도들을 이렇게 사랑했듯이, 이 초라한 사도를 너희 형제들아 좀 영접해 주고 같이 사귀자. 이 말입니다. 사귀는데 그 사귈 때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사랑이 있는 사람만 사도의 가치를 알아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새 가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도 가치 있고, 부동산도 가치 있고 다 가치가 있는데, 사도가 전하는 생명의 복음을 가치 있게 보는 사람은 그의 없잖아요. 그의 없는데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생명이 그 사람 속에 있으니까 결국 서로는 미워하지 않고 말씀 가운데 서로 사귈 수 있는 그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사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사랑이 있으면, 이제 그 사랑으로 다 설명을 하는데, 15절을 봅시다. 이런 사랑이 있으면 어둠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아요. 왜 어두움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을 설명 해 드리겠습니다. 어두움 쪽에 속한 사람이 뭘 말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올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와서 우리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냐 이 말입니다. 흔히 ‘교회 갑시다.’ 라고 하면 ‘나도 왕년에 교회 다녀 봤는데, 교회 다녀도 내게 돌아오는 게 없더라.’ 이 말입니다. 결국 이 말은 교회에서 뭔가 들 줬다는 말이 아니고, 관심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없다는 징후가 되는 겁니다. 아까 징후는 영생이 있는 생명의 징후이지만, 또 징후가 뭐냐 하면,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고발해 내는 그런 징후가 있는 거예요. 그런 것이 이 세상에 분명히 있어서, 어둠에 반응하는 사람은 어둠 쪽으로 가고, 빛에 반응하는 사람은 빛 쪽으로 오고, 한 쪽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있고 한 쪽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있고 분명히 둘로 구분될 필요가 있습니다. 구분될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 그것을 한데 모으는 것은 뭐냐? 그것은 바로 이유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이것이니라. 하는 뜻이에요. 피곤하시니까 한 5분만 쉬고 마지막 시간 합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서 제가 이야기한 것은, 예수님께서 피를 가지고 나오고, ‘피 안에서 우리가 사귀자’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죄 씻어주는 사랑으로만 너에게 접근했고,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형제라고 결정해서 그 형제를 사랑하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주님께서 자기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지요. 자, 2장 2절에 보면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세 번째 시간 정신 좀 차려주시기 바랍니다. 좀 복잡하니까.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분명히 이 세상에는 사도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택한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 C라는 사람 있단 말이지요. 여기서 동일하게 사도뿐만 아니고 피로서, 피의 사랑이 다가갔다면 이 피를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사랑으로 전부다 A, B, C 다 사랑으로 주셨잖아요. 따라서 각 사람들이 A라는 사람이 개별적인 자기의 주도권을 쥘 수 없는 이유가, 내가 받은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하게 형제에게도 주어졌다고 하면 이 피로 인하여 우리는 한 형제가 되고, 그리고 사도에게 주신 그 사랑이 나에게도 임하듯이 동일하게 다른 형제에게도 임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귄다’고 할 때, 제가 아까 이상한 예를 들었습니다. ‘보증서지 마라, 돈 빌려주지 마라’라고 했는데, 형제에게서 뭘 찾느냐 하면 주님의 피와 주님의 사랑만 발휘하면 형제가 되고 서로 한 형제로서 이미 확증되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돈 빌려줄까, 뭘 해 줄까’해서 형제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형제를 사랑하려고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미 형제 안에서 주의 사랑이 발견되거든 형제가 만든 사랑이 아니고 주님 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마땅히 같은 사랑을 가지고 당연히 사귈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그렇데 되면 이것은 바로 빛에 거하는 족속이 되고, 그 외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어둠에 속한다는 것을 구분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피 흘린 것이 뽄떼가(모양이) 나고 가치가 드러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교인이나 성도라고 할 때는 그 사람을 무시할 수 없지요. 다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피를 모를 때는 마음껏 무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원히 멸망 받을 것은 아니고 혹시 예수의 사랑을 믿으면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겠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사람에 대해 무서워한다든지 두려워한다든지 겁을 집어먹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주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형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 사랑이 어떤 징후를 드러내는가? 그 징후 중 하나가 2장 15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야! 이것 순복음 교회 가서 설교하면 기절할 겁니다. 이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순복음 교회가 세워진 이유, 순복음 아니라 다른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교회 가는 이유가 뭐냐? 내 몸뚱아리 하나 잘 되기 위해서, 어디에서? 이 땅에서 비까번쩍 빛나기 위해서. 주의 빛이 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빛나기 위해서 이 세상 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하는데, 만약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이렇게 나오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랑이란 것이 이미 확증적이고 결정적이라면, 사랑으로 충분하다면 다른 것을 사랑할 틈이 없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고 하면, 주님이 주신 피의 사랑은 추가 용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추가적으로 딴 것을 더 보태서 더 크게 할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그 정도로 완결된 사랑이란 말이지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다 끌어 모아도 주님의 사랑과는 족히 비교가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사람을 사랑하지 말란 말입니까?” 이 완전한 사랑이 있기에 이 사랑이 흘러넘쳐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요. 그렇게 사랑해야지 ‘내가 저 여자를 사랑하려고 하오니 주여 사랑을 주옵소서’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신부감을 생각하면서 키는 몇 센티고, 대학은 어느 정도 나와야 되고, 가정은 기독교 가정이어야 하고, 시집와서 부모한테 효도 잘 해야 되고, 뭐뭐 해야 되고 이렇게 조건을 달아요. 남자들이 조건을 다는데 몇 가지 안 달아요. 예쁘고, 건강하고, 착실하고, 남편 말 잘 듣고,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보테면 돈 벌어오고 이렇게 다섯 가지만 되면, 더 큰 욕심 없이 간단하게 다섯 가지만 되면 --- 그런데 사랑이 포함되면, 사랑이 예쁨을 능가해서 사랑스럽게 되고, 건강을 능가해서 몸이 좀 안 좋아도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게을러서 아침 10시에 일어나도 사랑이 되고, 남편한테 바가지 긁어도 그것이 귀엽고 이렇게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예쁘고,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이런 것을 추가적으로 더 보텔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따로 떼어서 사랑하지 말라고요. 주님 사랑하면 자연적으로 이런 것들도 다 사랑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다 사랑하게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예쁘고, 건강하고, 착실하고 이런 것을 원했던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서 사랑했던 그 사랑이 동일하게 우리에게 쳐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에 못났고, 게으르고 하다면 주님이 ‘못났고 게으른 것을 보니까 너를 사랑 못해.’ 이렇게 하신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영원한 사랑을 얻겠습니까? 어디서 사랑을 맛보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받았잖아요. 피로써 모든 조건에 관계없이 용서 받고, 사랑을 받은 자라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어떤 조건 따져서 사랑할 필요 없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랑을 아는 형제를 찾아 나서면 이런 조건을 초월하고 능가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게 형제간의 사랑이에요.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서 혼자 머리 깎고 중 되어서 기도하란 말이 아니고, 세상에 나갔을 때에 이 넘치는 사랑으로 들어가면 구태여 세상에서 새삼스럽게 세상적인 사랑을 따로 구할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저는 TV드라마를 그의 안 봐요. [주몽]인지 주먹인지 그의 잘 안 보는데,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뭐 그런 것도 있는데, 그 모든 드라마가 뭐냐 하면, 자기가 이미 설정해 놓은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써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라고 합니다. 집착은 남을 나의 종으로 만들어요.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줍니다. 그냥 있어라. 내가 사랑할게. 내 앞에서 변신 안 해도 주께서 만들어주신 그대로 흘러가라. 어디를 가더라도 내가 끝까지 따라가서 사랑해 줄게. 어디를 어떻게 가더라도 끝까지 따라가서 기어이 사랑해 줄게. 그냥 그대로 사랑해 줄게. 왜 그런 사랑이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 우리를, 인간 같지도 않은 우리를 끝까지 따라와서 사랑하고, 지금도 장난치듯이 그렇게 사랑을 주시니까 그 받은 사랑을 그대로 내놓게 되면 상대방도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 두려움 없이, 심판 날을 걱정 안 해도 되고, 그냥 속에 있는 것을 쏟아내는 거예요. 너나 나도 똑같은 꼬라지(꼴)인데 주님 사랑 받았구나. 하고 형제로서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랑할 것이 없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16절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런 것들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 뒤에 나오는 적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너무나도 육신적이라는 겁니다. 육신적으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 육신적으로 확증된 것을 얻고자 하는 것, 자기 정욕이지요. 자, 여기서 하나님하고 하나님 맞은 편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정욕이 있지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런 정욕이 있지요. 세상으로부터 오는 정욕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공동점이 뭐냐 하면 끝없이 나온다는 거예요. 둘 다. 우리가 말릴 수가 없습니다. 계속 쏟아 나와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 육신의 정욕은 항상 내 몸뚱아리로 돌아와요. 이런 말이 있어요. “그리운 사람은 시간이 가도 늙지 않는다.” 사진에 있는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리 봐도 늙지 않아요. 늙지 않는 그 사람을 늘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이 상당히 좋은 말이지만, 그게 결국 뭐냐 하면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 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당사자가 와도 싫어요. 그 사진에 있는 사람 내 놓으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같이 늙어 가는데. 그래서 옛날 애인 만나면 참 곤란해요. 왜? 너무나 실망스러워. 청소년 때 만났던 사람은 내 앞에서 짜장면도 먹기를 거부했어요. 짜장면 먹으면 얼마나 호들갑스럽습니까? 그것이 부끄러워서. 그의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만나면 짜장면 곱빼기 시켜 먹을 겁니다. 얼굴에 짜장 다 묻히고. 내가 되고 싶은 나. 사람들이 나를 보거든요. 내가 원했던 나를 타인에서 찾습니다. 찾는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는 겁니다. 사랑이라는 건사한 말을 붙여요. 사실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너를 대체해서 내가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그런 위치에 없으면 그 타인을 죽이려고 하지요. 나의 이상, 꿈을 빼앗아갔으니까. 이렇게 되면 사랑이 돌변해서 증오로 바뀝니다. 이게 성경에도 나오지요. 이복동생 사랑해서 취한 후에 버린 다윗의 아들 암논. 사랑한다는 것은 증오와 함께 있어요. 사랑하는데, 내 뜻대로 안 되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는 증오가 뒤에 숨어 있어요. 그런 무서운 증오가 뒤에 깔려서 안 보이고 앞의 사랑만 보이면서 접근해 갑니다.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가 못하는 것을 뭔가 대체해 주기 위해서 상대방을 원했던 거예요. 특히 아버지를 좋아하는 딸이라든지 엄마를 좋아하는 아들 같은 경우에는 결혼할 때 엄마 같은 여자를 찾아서 미흡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사랑의 대상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 됩니다. 이런 현상이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중요한 것은 진짜 주님의 사랑이 오면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 이 모든 것을 능가한다니까요. 사마리아 사람이 미쳤다고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줍니까? 자기는 강도도 아닌데. 자기가 왜 책임져야 됩니까? 왜 아까운 돈을 냅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을 예로 든 거예요. 예수님께서. 있을 수 없는 일을 예로 든 것은, 지금 있을 수 없는 짓을 예수님이 너에게 해 준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예상치도 못한. 아마 강도만난 사람이 미안해서 못살 거예요. 수해를 만나 집이 떠내려갔어요. 정부에서 집만 다시 지어주면 고맙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건축설계사와 목수 등이 와서 대궐 같은 집을 지워 준다면 미안해서 그 집에 못 삽니다. 지금 그런 식이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그런 식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안 해주고 비딱하게 우리가 원치 않는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 그 사랑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위대한 사랑으로 변한 거예요. 그것이 우리 속에 이미 숨어있어서 그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세상을 좋아하지 않는 그런 것. 3초 정도 밖에 안 가지만. 조금만 더 하고 강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아까워 죽겠다.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네. 18절에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제가 집착과 사랑의 차이를 이야기했습니다. 집착이라는 것은, 집착에서 나오는 사랑은 내가 설정해 놓은 조건, 그 조건에 부합될 때만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증오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 인간은 나를 알기 위해서 행동하니까, 내가 이상적인 내가 되고 싶어서 그 사람을 이용한 것 밖에 안 되니까. 그리스도의 사랑과 피 그런 것 관계없이 내가 좋아하니까 무조건 너는 내꺼야 하는 식으로 가는 것은 뒤에는 무서운 증오가 깔려 있어서 보복이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좋았던 남편도 술 먹도 들어오면 개 패듯이 패잖아요. ‘이게 반찬이가’ 하면서 밥상을 차고 난리를 치다가 아침이 되면 ‘모르겠다. 나는 하나도 기억 안 난다.’ 이러고. 아내는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데 ‘너 왜 그러니?’ 이런 식으로. 제가 이런 소리 하면 ‘그런 남편과도 같이 살아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데, 본인이 자기 미흡함을 메꾸기 위해서 그런 남편을 만나놓고, 그런 남편과 누가 강제로 결혼하라고 했습니까? 본인이 좋아서 결혼해 놓고 이제 와서 사네 못사네 하고 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프라이펜은 왜 샀는데요? 그럴 때는 프라에펜으로 대가리를 때리라니까. 그게 사랑이라. 네가 증오하면 나도 증오로 나온다 이 말이지요. 18절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가 뭐냐? 적그리스도지 적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반대하는 거예요. 마귀는 하나님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귀가 항상 막는 것은 복음, 복음에 대해서 반대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를 지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마귀로 하여금 지옥 가는 근거를 마련해 줘요. ‘마귀 너는 지옥가도 싼 존재야.’ 이 증거는 십자가 복음뿐이지 딴 것에서는 안 나와요. 그러니까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은 십자가 복음이지, 나쁜 짓하고 이런 것으로는 마귀의 정체를 못 드러냅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문제지 적하나님, 즉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다 있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라는 작자는 하여튼 메시아는 아니야. 네가 아무리 설득해서 예수 믿도록 해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심껏 사는 놈인데 나사렛 예수라는 그 청년을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실 그 사람은 아니야. 라고 반대하지요. 그러면 성도는 뭡니까? 누가 뭐래도 예수님 그분이 바로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신 구세주야. 나사렛 예수 그 청년이 바로 나의 구세주야. 이것이 바로 형제입니다. 그분의 피 때문에 살지 뭐 내가 잘해서 사나? 이것이 확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를 어떻게 발각하느냐 하면 복음만 전하면, 예수 그리스도 일변도로 나가면 적그리스도가 군데군데서 막 튀어나와요. 개혁주의라는 이름의 적그리스도, 이런 것이 막 튀어나와요.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 목회자가 이단으로 자기 정체를 숨기지 않고 다 드러내요. 삼위일체를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백날 믿어봐라. 이단이 이단 안 되는 줄 아냐?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끼고 있네. 예수님이 우리를 만든 거예요. 예수님 영광 돌리라고 만든 거예요. 예수님만 증거하라고 만든 거예요. 이삭처럼 없는데서 약속으로 생기게 하셔서, 약속은 예수님이고, 이삭이 없는데서 생긴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 증거하라고 준 거예요. 하나님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 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기 피를 증거하라고 우리를 세워준 거예요. 그것이 사랑이라고. 다른 사랑은 없어요. 이처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마지막이 되는데,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가 누구냐,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22, 23절) 야,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아들을 낳으신 게 압니다. 이것은 이단들이 하는 소리고,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얼굴을 드러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 안에 계세요. 예수님과 하나님이 더불어 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하나님 알아서 예수님 아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면 그 하나님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마귀들이 만든 가짜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을 통해서 아들 예수를 알면 이 하나님은 전부 가짜였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예수를 죽인 자들이 소위 하나님 아는 자들이잖아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다 예수님을 모르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생명과 성령의 법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죽은 것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고, 그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진짜 하나님이란 것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 알게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중심이지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믿으세요가 아니라 예수님 믿으세요.’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는 석가모니하고 같은 레벨인데 나는 예수 안 믿고 석가모니 믿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당신에게 하나님 믿으라고 하면 믿었을 텐데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상처받고 안 나오잖아. 여러분, 복음을 확실하게 해야 가짜가 스며들지를 않습니다. 우리 오 목사님이 그걸 참 잘해요. 복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가짜가 못 스며들고 교회 부흥이 안 되잖아요. 화평교회가. 가짜가 겁이 나서 듣고 다 가버려요. 어차피 천국 같이 갈 것도 아닌데 괜히 짐만 무겁고 기름값만 더 들고, 차가 가는데 방향이 틀린 사람 타면 중간에 내려줘야 하는데, 미리 내리게 해서 걸어가도록 해야지 뭣 때문에 같이 데리고 가겠습니까? 갈 사람만 가야지. 24, 25절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너희 속에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징후를, 사랑이란 징후, 그것을 믿게 된 징후 이런 징후가 있으면 이미 너희 속에 거대한 사랑이 들어갔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안 든,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직접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마지막 때를 장식하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가 세상 일이 바쁘다 보니까 내 위주로 살아갔는데, 이제부터는 예수님 생각해서 기쁨이 충만한 그런 안도감을 얻을 수 있는 행복한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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