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를 1장부터 5장까지 공부해 왔습니다. 성경만 있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가정 해 봅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살지 않는 어느 섬에 헬리콥터가 날아왔습니다. 그 헬기에서 성경책만 툭, 던져 놓고 갔습니다. 사람도 없는데 성경책만 떨어졌을 때에 그 성경은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닙니까?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세상은 성경말씀대로 될까요, 안될까요?
오늘 갈라디아서 6장을 할 텐데, 갈라디아서 5, 6장의 말씀이 헬기에서 펄렁 거리면서 떨어졌을 때에 그 성경말씀을 보는 사람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고 읽는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그 성경말씀대로 세상이 진행 될까요, 안될까요?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2년 뒤에 어떤 사람이 파선하고 표류해서 이 섬에 상륙하고 나서 성경책을 보게 되었어요.
그때에 그 사람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1) 나는 구원받았다. 2) 나는 구원받지 못했다. 3) 나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과 상관없다.
이중에서 어느 쪽이 정답이 되겠습니까? 초반부터 너무 어려운 문제를 냈습니까? 정답은 3번입니다. 왜 정답이 3번이 되느냐 하면 ‘나’가 들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는 정답에서 탈락되는 겁니다. 성경을 보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갈라디아서 5,6장에서 하는 이야기와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책을 집어 들면서 ‘나는 구원 받았구나’라고 생각한다면 논리에 어떤 문제점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성경책을 안 봤더라면 지옥 가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책을 안 봤다면 그가 천국에 갈까요, 지옥에 갈까요? 정답은 하나님 맘입니다. 그것을 3번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무인도에 올라와 보니 성경에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구원받았느냐, 안받았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 자기 맘대로 일을 하셨구나. 그리고 그 일을 하신 결과 중에 하나로서 내가 성경이 이 섬에 도착한 지 2년 뒤에 와서 성경을 보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도 내가 잘나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중에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렇게 해 놓고 비로소 1번,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 맞구나’라고 한다면 그것도 정답이 될수 있겠지요. 1번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3번을 거쳐서 1번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바로 1번으로 가면 3번이 무시당합니다. 방금한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5:24의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십자가가 오기 전까지는 전부 다 나 위주로, ‘신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신이시여 저를 버리지 마시고 천국에 보내 주소서. 오, 신이시여, 제가 주를 찾나이다.’ 전부 다 생각이 ‘나’ 중심으로 갑니다. ‘나’중심으로 생각 할 것 같으면 이 성경 덮어버리고 그 자리에 불교의 경전이나 알라의 경전인 코란을 갖다 놓아도 그 사람은 변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경이냐, 불경이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미리 성경책 펴기 이전부터 ‘오, 신이시여, 날 구원하시려고 성경을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이것을 보고 구원을 받겠습니다. 자, 어디 한번 읽어나 볼까나’ 이래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성경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쳐다보기도 전에 지레짐작으로, 자기 멋대로 ‘아마 성경은 날 구원하는 책일걸?’하고 각본을 짠 셈입니다.
이거 안 됩니다. 이거 뜯어 고쳐야 됩니다. 교인들도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을 설교할 때 ‘내용 뻔하지 뭐. 이런 내용으로 나올걸?’ 합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까 ‘그런 내용으로 나올걸?’하는 나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면서 치면서 그것을 깨버리는 설교를 들을 때 ‘내가 또 내 위주로 생각 했구나’ 하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내가 내 위주로 생각하는 이것이 인생의 짐이었구나’ 하는 이것이 감동으로 밀려온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약속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헬기가 여기 착륙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밑에 사람이 있다고 할때 그 사람은 시끄럽겠습니까, 안 시끄럽겠습니까? 귀를 막을 겁니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소리가 나죠. 그러면 밑에 있던 사람이 “시끄럽다!”하겠지요. 자, 그러면 여기에 사람이 없다고 칩시다. 사람이 없을 때 헬기가 착륙하면 소리가 납니까, 안 납니까? 나잖아요. 그게 정답입니다. 성경은 자기 혼자 다 “타타타타타!” 움직이는데, 여기 성경도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옆에 있다 보니까 “헬기 파일럿 아저씨, 시끄러운데 엔진 좀 꺼주시겠습니까?”라는 말을 할 수는 있어도 “당신은 내가 여기 있는데 왜 헬기의 프로펠러를 왜 돌려?”라고 항의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경대로 일하시는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화내거나 짜증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오늘 확실하게 배웁시다. 믿음이란 내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성경은 “타타타타타타!” 하고 움직인다는 겁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어떤 여자 분이 자기 딸의 몸이 아프니까 “예수님께서 어서 오셔서 제 딸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할 때에 “나는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러 왔지 개 같은 인간을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게 뭡니까? “타타타타타타!, 나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 개같은 이방민족의 소원을 들어주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일을 하러 왔다. 타타타타타!” 하니까 그 여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맞습니다. 개도 주인이 부스러기를 던져주면 ‘어마나, 부스러기다’ 하고 주워 먹을것이 아닙니까?”
“옳소이다”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맞습니다. 주님께서 ‘타타타타타!’ 하시는데 저도 거기에 끼어들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영광이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네가 이스라엘이구나. 네가 참 믿음이 크도다” 하면서 즉시로 그 딸의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마 15:21-28).
성경은 내가 있든 없든지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엔진이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돌아가고 움직이는 헬기를 보면서 ‘저렇게 움직이네’ 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거, 시끄럽다. 내가 지금 조용하고 싶은데 왜 떠들어!”라고 버티고 있으면 그 사람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자기 자신만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 5:14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온 율법을 이루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두 자로 ‘사랑’이죠. ‘온 율법을 이루는 것’은 ‘사랑’입니다. 온 율법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거죠. 그러면 온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추가적으로 할 것이 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헬기가 “타타타타!” 할 때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제가 맹렬하게 소리가 왕왕대도록 확성기를 달아 드릴까요? 제가 엔진좀 손봐 드릴까요?”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자체적으로 ‘사랑’은 핑핑,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온 율법이 이루어서 자체적으로 잘 돌아가기 때문에 누구는 빠져야 됩니까? 우리는 거기에 가담하면 안 되고 빠져 나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서 우리 몸을 거기서 빼야 됩니다. 빼버려서 사랑을 받는 입장에 서 있어야 되는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고 부탁이고 권면입니다.
성령의 열매, 매우 쉽지요? 그러면 어떤 때, “타타타!”하는 헬기를 망칩니까?
1) 도끼 2) 칼 3) 수류탄 4) 기도
몇 번입니까? 이것은 정답이 많아요. 1-4번까지 전부 다 해당됩니다. 헬기가 잘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헬기가 참, 성능 좋다. 사랑이 막나오네.’ 여러분, 저는 어릴 때 봤는데 설탕을 넣고 기계를 돌리면 솜사탕이 막 나오는 것 봤습니까? 발판을 막 구르면 구름처럼 솜사탕이 올라오고 그것을 막대로 말아서 솜사탕을 완성합니다.
그처럼 주님께서 발을 구르니까 안에서 무엇이 피어오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막 피어나지요?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야, 신기하다. 저거 봐! 사랑이 막 피어나는구나’ 하면서 우리는 그 사랑을 맛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맛보기만 하면 되는 그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라고 했습니다. 왜? 모든 법은 뭐라고요? 모든 법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부지런히 움직이시면서 사랑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맛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그 맛을 보면서 “야,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감사하면 그것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쉽습니다. 정말 쉽습니다.
교도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에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었든 그것을 아예 묻지를 않겠습니다. 당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는 이유는 당신은 표류하다가 이 무인도에 도착한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자, 이제 내가 소개할 것은 헬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당신이 무슨 이유로 모레 사형선고를 받는지는 모르겠는데 죽을 때까지 제가 당신에게 이야기 할 것은 헬기입니다.”
공중에서 ‘타타타타타타!’ 하고 주님께서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온 율법으로 무엇을 만든다? ‘사랑’을 만듭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 무인도에 도착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면 당신은 성령의 열매로서 정과 욕심을 못 박은 성도입니다”라고 했을때 그 사람은 대단히 기뻐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기뻐할 겁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고, 여기 이 무인도에서 부동산 투기를 해서 50층짜리 빌딩, 100층짜리 빌딩, 땅은 한 50만평, 아파트는 100평짜리 10채를 갖고 있는 한 아저씨가 있다고 합시다.
“아저씨,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스스로 작용해서 옵니다” 할 때,
이 사람이 흘깃 보고서는,
“나, 그거 별로야. 별로 안 좋아.” “그럼 뭐가 좋습니까?”
“나는 내가 노력해서 벌어들인 이 수천억의 재산이 훨씬 더 좋다. 주님의 사랑도 고맙기는 하지만 별로 마음에 내키지가 않는다. 이 넓은 땅과 재산이 더 좋다”고 이야기 하면 그 사람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았고 성도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그것이 육체의 열매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 나라는 온 율법을 다 이루어야 갈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온 율법을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 그 온 율법을 이룬 사람이 누구지요? 타타타타타!, 헬리콥터, 예수님이 다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그냥 공짜로 누리고 받는 사람 같으면 성도지만 그렇지 않고 온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도 없고 태도가 불량스럽고, ‘그게 뭔데? 나는 내가 한 노력이 더 가상하고 중요하다’라고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온 율법에서 하나라도 어기기 때문입니다. 온 율법을 하나로 묶어 버렸습니다. ‘사랑’이라고 묶어서 우리에게 주는데, 이 사람은 자력으로 천국에 가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에 불과하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헬리콥터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알아요. ‘나는 무인도에 표류하다 온 하나의 나그네’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늘에서 온 사랑의 헬리콥터에만 기대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갈라디아서 5:24절을 설명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십자가 이야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분명히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여기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어떻게 됩니까? 죽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를 어떻게 한다고요?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요. 안경 쓴 어린이가 잠깐만 앞으로 나와 주세요. 이게 못이고 이게 망치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손 벌려.” 이쪽에 꽝! 꽝! 이쪽에 꽝! 꽝! 이쪽도 꽝! 꽝!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답니다.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의 표시가 뭐냐? 우리가 원하는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건강 주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면, 우리 전체를 다 못 박아 죽여 버리면서 “똑바로 서! 손 벌려! 똑바로 서! 손 벌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하고 죽여 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이게 참 이상해요. 우리는 이런 방법 말로 다른 방법을 원해요.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그런데 네가 좀 나쁜 짓을 했어. 네가 욕심이 좀 많은데 그거 좀 고쳐라. 이제 욕심 하는 고쳤는데 너는 세상적인 정이 많아. 정도 좀 고쳐야 되겠구나. 고쳤고, 그러면 고칠게 그거 두 개뿐이네. 됐어. 고쳤지? 깨끗하게 되었어요. 자, 고쳤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박수 한번 칩시다. 짝짝짝! 이제부터 깨끗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이 날 새 인간 만들기 위해서, 나의 약점들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뜯어 고쳐서 새 사람 되고 깨끗한 인간 되어서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 이런 사랑을 우리는 은근히 기대를 했지요. 아버지가 자식 불러 놓고,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오늘도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 놓고 잔소리를 좀 할 모양이군’ “얘야, 내가 너를 참 사랑하는데, 수학이 0점, 국어는 좀 하는가 싶었는데 국어가 10점, 과학은 15점, 다 합해서 25점밖에 안되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그러니까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을 좀 올려라.” “예, 아버지, 알겠습니다. 저의 공부 못함을 용서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K랑을 알았으니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는 은근히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이리 와. 옳지. 손을 올리고 이쪽 손도 올리고. 너는 죽어야 된단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똑바로 손을 올려라. 꽝! 꽝!” 죽여 버립니다.
그렇게 죽이고 난 뒤에 형이 왔습니다. 형은 숙학 100점, 영어 100점, 국어 100점,
“아빠 나, 무지 신난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너도 좀 이리 와볼래?” “아빠, 저는 100점 맞았어요.” “알지. 내가 너 공부 잘하는 거 알지. 여보! 못 좀 가져오세요. 아까보다 더 큰 못으로 가져오세요.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아버지, 저는 100점인데요?” “공부 잘하는 것 안다. 에라, 죽어라 이놈. 공부 잘하는 것 가지고 하늘나라 들어갈 줄 아느냐?” 그리고는 못 박아 버립니다.
공부를 잘하건 착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왜 이렇게 십자가에 우리를 죽이는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당시, 그때는 아담이 ‘나’라는 것이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마귀가 와서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는 신처럼 된다”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깨뜨릴 때부터 처음으로 아담에게서 ‘나’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내가 깼다. 내가 먹었다. ‘따먹지 말라’는 것을 내가 먹었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뜨림으로서 비로소 사람이 하나 건지는 것이 뭐냐?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여기 있다’가 등장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고분고분하게 들으면 그것은 바보고 등신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 나는 비로소 ‘나는 나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나’라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아담은 하나의 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신이냐? 선악을 아는 새로운 신이 거기에 등장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함께 되었으니 저 아담과 우리는 함께 살 수 없다”고 해서 쫒아내고 말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담이라는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이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있었기 때문에 계명을 깨뜨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맛있는 것 따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귀가 와서 “너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신처럼 되리라” 하는 순간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에 있고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 그 앞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여기 비타 500하고 저하고 같이 있는데 처음에는 선악과를 안 따먹는 조건 하에 아담은 살았습니다. 선악과를 안 따먹으면 선악과는 아담이 안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을 “따먹지 말라” 하고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어이, 너는 따로 놀아라” 하는 그 순간부터 ‘나’가 등장하면서 계명은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서 떨어질 때 처음으로 ‘나’가 생겼어요. ‘나’가 생겨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은 ‘나’의 바깥에 있는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계명은 내 안에 있을 경우에만 지킬 수 있는데 이미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어떤 율법, 어떤 계명도 내가 다가서면 도망가도 다가서면 도망갑니다.
다가서면 도망가고 다가서면 도망가고 멀어지면 다가오고 멀어지면 다가옵니다. 지키려고 가면 도망가고 지키려고 가면 도망갑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지키려고 하는 한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말씀을 못 지키게 되어 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나’라는 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깨어버린 이후에 등장한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어진 ‘나’를 가지고 성경말씀을 새삼스럽게 지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매우 어려울 줄 알았습니다. 지금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수학 100점, 영어 100점, 과학 100점, 이렇게 공부 잘하는 애를 아버지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도 왜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처음에 헬리콥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의가 어렵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헬리콥터는 사람이 있어도 시끄럽습니까, 안 시끄럽습니까? 사람이 있어도 시끄럽죠. 사람이 있어도 시끄럽죠. 그런데 사람이 있으면 뭐라고 합니까? 사람, 내가 있잖아요. 내가 여기 있는데 헬리콥터가 시끄럽게 타타타타타! 하고 있으면 뭐라고 합니까?
“아저씨, 헬리콥터좀 멈추세요!” “왜요?” “내가 시끄러워요. 시끄러워서 못살겠어요. 그러니까 그만 멈추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온 율법을 예수님이 지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 밖에 모르기에,
“이 말씀을 내가 지킬 것인데 당신이 뭔데 건방지게 당신이 지키는가? 당신이 온 율법을 왜 지키는데? 내가 지킬 건데. 내가!”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가 못 지키거든?” “내가 왜 못 지킵니까?”
“너라는 인간이 처음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그 인간이 아니고, 따먹고 난 뒤에 아담의 죄가 묻어 있는 그 인간이기 때문에 이미 너는 끝나버렸어. 이미 선악과를 우지직, 하고 부수어 버린 이상 너는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는 나쁜 신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안 되는 거야. 이미 에덴에서 쫓겨난 입장에서 지키기는 뭘 지켜. 에덴동산에 있을 때도 못 지킨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난 주제에 지키는 뭘 지켜. 못 지켜. 지킬 수가 없어”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우리는 선과악에 대해서 분별할 줄 압니다.” “그러니까 내가 에덴동산에서 쫒아 냈잖아. 그것을 왜 알려고 하지?” “이미 알게 된 것, 말씀 주시면 제가 알아서 이것이 선인지 악인지 판단해서 지키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사랑하시면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사랑하거든?” “사랑하는 것 아니까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리와! 너는 죽어야 된다.”
어디로 데려갑니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를 죽입니다.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지키냐, 못 지키냐’ 하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뭐가 문제입니까? ‘내가 지킨다’가 문제입니다. 문제점. ‘내가 지킨다.’ 이것이 잘못입니다. 이것은 범죄 한 후에 하나님보시는 그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과 맞먹으려는 인간밖에 안됩니다.
선과악을 아는 것으로서 신과 함께 놀려는 것밖에 안됩니다. 착한 사람들 더 착하게 해 주고, 공부 잘 못하는 사람들 공부 잘하게 해 주면 되지 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입니까? 그 이유는 뭐냐? 원래의 그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거든.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너를 죽이는 것.”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뭐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만 할 수 있습니다. 문제 나갑니다. 그러면 한번 죽은 나가 그것으로 죽을까요? 한번 죽인 나가 또 살아날까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 ‘나’가 없어집니까? 또 살아납니까? 또 살아나지요. 그러면 또 죽이지요. 그것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란 주님의 영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되면 날마다 튀어 나오는 ‘내가 지킨다’ 가 ‘나는 못 지킨다. 나는 죽어야 돼’ 라는 생각으로 바뀌어 지게 됩니다. 어린이 여러분, 인생 앞으로 살아가실 때 참 힘들 겁니다. 저도 이만큼 살아오면서 힘들었습니다. 애들 보고 천사라고 하는데 태어날 때 그 모습이 천사가 아니고 악을 씁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게 누구 작품이겠습니까? 엄마 아빠의 작품입니다. 자기 밖에 모릅니다. 그런 아이 구원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정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됩니다. 엄마와 아빠가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누가 합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성령을 따라서 정과 욕심의 십자가를 못 박아 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제발 좀 가만히 있어줘. 제발 가만있으라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내가, 내가’하고 자꾸 내가 등장합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왜 자꾸 내가 등장할까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과 동료처럼 되었는데 인간은 추방되었거든요.
원래 선악에 대해서 몰라야 될 인간이 선악에 대해서 알아 버렸습니다. 여기에서는 누구의 지배를 받느냐? 악마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인간이 선악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신처럼 행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지배를 받는 이상 항상 “너는 신처럼 굴어야 돼. 너도 자유의지가 있어. 너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어”라고 자꾸 옆에서 부추깁니다. 여기서 계속 ‘나’가 튀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를 설명하겠습니다. 빛이 우리에게 비추이면 우리는 거울이 되어서 빛이 되비쳐 나옵니다. 첫 번째 빛을 ‘원’이라 하고 두 번째 빛을 ‘투’라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비추셨을 때 거울을 튀어 나오게 되면 뭐로 나오는가? 고난과 희생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희생의 모습으로, 처참한 죽음으로 나왔다면 빛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니면 거울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밝은 빛이 왔는데 그 빛이 거울을 비추자 시커멓게 죽은 채 튀어 나왔다면 거울에 문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울에 문제가 있지요. 빛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왔는데 그 빛에 대해서 거울이 희생과 죽음과 고난으로 비추어 나온다면 거울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울에 뭐 밖에 없습니까? 이 거울에 문제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뭡니까? 선악과 따먹고 무엇처럼 되리라? 신처럼 되리라. 문제가 그것 한 가지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신이 한분이어야 합니까, 두 분이어야 합니까? 그래서 구약에서는 우상숭배를 그렇게 싫어하는 겁니다.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우상숭배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왜 신도 아닌데 신인 체 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뭡니까? 신도 아닌 것이 신 인체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 누가 신 인체 합니까? 선악과 따먹은 우리가 신 인체 행세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본래의 사람으로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짜 신을 죽여야 됩니다.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신을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십자가를 알았다’고 해놓고는 다시 신처럼 되려고 할 때 질문입니다.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죄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신처럼 되고자 하는 것은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역시 죄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누구만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만 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믿고 난 뒤에는 뭐가 없어져야 됩니다. 뭐가 없어져야 됩니까? ‘신처럼 구는 것은 잘못 되었습니다’라는 것이 나와야 됩니다. 다시 합니다. 내가 신처럼 되려고 하는 것은 죄 아닙니까, 죄입니까? 그러면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뭘 느낀다? ‘내가 신처럼 되는 것은 죄 입니다’라고 해야 되지요.
그러면 십자가를 통해서 뭐가 없어져야 됩니까? ‘내가 신처럼 되는 것은 죄야. 이것은 없어져야 돼’라는 마음이 생겨나야 되겠지요? 그렇게 생겨나야 된다면 십자가를 믿게 된 사람은 마음자세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신처럼 되고자 해야 합니까, 반대로 가야 합니까? 반대가 뭡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나와야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다! 나는 개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복음을 안다’ 하면서도 나오는 것을 보면 계속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대체 저 사람은 지금 십자가를 정말 통과했는지, 아니면 안통과 했는지? 아담이 신이 되고자 한 것은 자아성 때문에 처음으로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는 죽을 때까지 계속 튀어 나옵니다. 육이 살아 있는 한 계속 튀어 나옵니다. 그러면 튀어 나올 때 마다 뭘 느낍니까? ‘나는 이것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수다’라는 것을 절감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게 신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니까 십자가를 통과 했다고 하면서도 ‘우리 하나님처럼 됩시다’ 하는데 무슨 이런 것이 다 있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나 이제 예수 믿었다. 술 끊었다. 이제 하나님하고 맞먹자. 내가 하나님이다.’ 그런 생각 안 듭니까? 아니면 예수 믿고 난 뒤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는 생각이 들던가요. 도대체 당신이 죄라고 여겼던 기본 죄가 기껏해야 간음죄, 살인죄, 사기 친 죄, 그런 죄이지 진짜 아담처럼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죄,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진짜 죄 인줄 정말 압니까?
그 죄가 나로 하여금 선과 악을 아는 자의식, ‘나는 나다’라는 생각 때문에 말씀은 저 앞에 있고 ‘말씀은 내가 지키면 되지. 뭐, 내가! 누가 지킨다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내가 지킨다. 내가! 주여, 저 말씀은 내가 지키겠습니다’라는 자세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타타타타! 헬리콥터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그 헬리콥터 좀 멈추라’고 한다든지 ‘내가 그 소리 좀 크게 나도록 해 준다’든지 이렇게 까불대면서 거든다는 것 그것은 정말 세상이 헬리콥터 중심인지 모르고 자기중심, 자기 구원중심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궁금증이 있습니다. “목사님! 죽이려거든 몰래 연탄가스 피워서 죽이든지, 절벽에서 떨어뜨려서 죽이든지 해야 하는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로 죽이십니까?” 그 문제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제 28강
(이 근호목사, 2007년 10월 12일-b, 서울의존교회)
‘성경 말씀을 내가 지킨다’ 할 때 여기서 ‘내가’라는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지킨다’ 하는 자체가 선과 악을 아는 내가 지키기 때문에 이것은 일체 하나님께서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왔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요 14:6)
여기서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요 19:30)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선과 악의 지식을 가지고 내가 지킨다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꺾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기 때문입니다.(롬 5:14) 예수님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두 번째 아담. ‘성경을 내가 지킨다’는 것은 누구입니까? 첫 번째 아담.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꽁꽁 묶어 보면 한 사람이 됩니다. 누구입니까? 아담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흑인, 백인, 황인종, 그런 사람들을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꽁꽁 묶어 버립니다. 묶어서 달랑 들면 한 짐입니다. 무슨 짐? 아담, 한 사람입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 같은 점이 무엇입니까? 뭐든지 누가 한다? ‘내가 한다’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했다. 내가. 나를 믿으라. 예수 내가 했음을 믿으라.” “아닙니다. 내가 지키겠습니다. 저는 왜 안 됩니까?” “너는 첫 번째 아담에 속했기에 안 된다.”
소속이 첫 번째 아담 소속이기에 무슨 짓을 해도 안 됩니다.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지키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째 아담께서 첫 번째 아담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것을 못 지킨다’고 하면서 가위표로 그어버리고 그 자리에 두 번째 아담에 소속된 사람을 이 안으로 불러 들입니다. 아담에 소속된 자녀들이 많이 있더라도 전체로 묶어 버리면 하나의 아담입니다.
여기에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 c라는 사람이 성도라면 불러들입니다. “a! 들어와. b! 너도 들어와. c! 너도 들어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두 번째 아담은 이것을 지켰지요. 지켰는데 무엇으로 지켰습니까? “내가 지켰다”고 하면서 돌아다녔습니까? “나는 지켰다. 나는 지켰다”고 하면서 동네방네 방송했습니까?
어디서 지켰습니까? 십자가에서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계신 곳,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너는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이 예수님 계신 곳으로 들어오려면 십자가를 통과해서 들어와야 되겠지요.
갈라디아서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법”이 나옵니다. 두 번째 아담에 소속된 사람은 ‘내가 지킨다’에서 ‘예수님이 지켰다’로 넘어 오면서 예수님이 지킨 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왜 우리는 못 지키는가?’ 왜 우리는 못 지킵니까? 그것은 우리가 첫 번째 아담에 속해서 내 중심, ‘선도 내가 알고 악도 내가 알고 내가 지킬 수 있다’ 하는 그것이 뭐가 됩니까? 그것이 바로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뭘까요? 첫 번째는 내가 지키겠다는 것이 첫 번째 죄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다 이루었는데 그것을 안 믿는 것, 내가 천국 가는 것은 누구 때문이다? 예수님공로, 예수님덕분이라는 것을 안 믿는 것, 죄인이 의인 되는 것은 누구 덕분이다? 예수님공로 때문이라는 것을 안 믿는 것, 이것이 죄가 됩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두 번째 죄를 알려면 무엇을 통과해야 할까요?
1) 문 2) 엘리베이터 3) 에스컬레이터 4) 십자가
몇 번입니까? 여러분이 엘리베이터를 통과하면서 ‘맞아, 내가 지킨다는 그것이 죄야. 그리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안 믿는 것이 죄야.’ 이렇게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모르잖아요. ‘야, 엘리베이터 잘 간다.’ 이것만 알잖아요. 그런데 무엇을 통과할 때? 예수님께서 여기 의자에 앉아 계시는데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지나가는데 그 의자에 턱 걸려서 넘어 졌는데 보니까 거기 누가 피 흘리고 있습니다. “아저씨, 왜 피를 흘리죠?” “너의 죄 때문이다.” “제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나는 선과 악을 알고 내가 지켜보겠다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사람인데 제가 무슨 죄를?” “네가 지키겠다는 그것이 죄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모르니까 죄다.” “맞아, 십자가를 보니 비로소 내가 지키겠다는 것도 죄고 예수님이 다 지켰다는 것을 안믿는 그것이 죄입니다.”
이것을 십자가를 통과할 때만 아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어디에 못 박습니까? 벽에? 에어컨에? 시계에? 천정에? 오직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왜 우리를,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지 그 이유를 알겠지요? 무엇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인 됨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아직도 문제가 또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했는데 십자가는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사건입니까? 2000년 전의 사건입니다. 이미 지나간 사건입니다. 새삼스럽게 어떻게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까? 십자가 만들어 놓고 “전국에 있는 성도 여러분, 여기 십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씩 줄서서 오시기 바랍니다. 순번 대기표를 뽑아서 순서대로 오세요”라고 지정된 장소에 가서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까?
얼마 전에 내시경으로 위 검사를 했습니다. 강제로 입을 벌려 놓고는 “이제 들어갑니다” 하는데 머리 부분에서 반짝 거리는 빛이 달린 긴 줄을 목을 통해서 몸 안으로 계속 집어넣는 겁니다. 그렇게 집어넣고는 들여다보면서 “이상 없네요. 약간의 역류현상이 있고, 스트레스성 현상들이 있기는 한데 별 이상 없습니다. 약 지어드릴게요. 자 이제 다시 나옵니다.”
그것이 2분 내지 3분인데 얼마나 아픈지. 왜 아플까요? 육체가 있기에 아픕니다. 왜 그 의사가 내 육체를 아프게 했습니까? 아프게 하지 않으면 내 속의 무엇이 고장이 났는지를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까? 그리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육체 자체가 어떤 육체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에 속한 육체, 아담에 속한 욕심, 아담에 속한 정 자체가 무엇을 발생 시킵니까? 죄를 발생시킵니다. 어떤 죄입니까? 첫 번째는 ‘말씀을 내가 지킨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홀로 다 지킨 것을 내가 못 믿겠다. 내가 할 몫이 남아 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아는 더러운 사고방식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육체 자체가 더럽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 육체 자체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기적 몇 가지 베풀고 잔소리 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물이 포도주 된다고 해서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육체 자체가 아예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해보겠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잘못된 겁니다.
노인 분들 병원에 입원해 계신 분들 많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노인 분들이 고집 세고 철이 없고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안합니다. “할아버지. 이것 빼면 안 됩니다. 이것 빼면 피 나옵니다.” “싫다. 칼 가져와라. 잘라 버린다.” “할아버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것이 있어야 삽니다.” “필요 없다. 칼 가져와라. 잘라버리자.”
뭐가 있기에 그럽니까? 육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목사, 장로, 집사라도 나이 들고 몸이 불편하면 만사가 귀찮아서 전부 다 자기 위주, ‘나’ 위주로 주먹을 휘두릅니다. “내가 아픈데 그 애 왔어?” “서울에 있는데요.” “서울에 있어도 와야지.” “지금 바쁘답니다.” “바쁘면 다야? 아버지가 지금 아픈데.” “한 참 바쁜 중인데 어떻게 합니까?” “에이, 후레자식! 내가 이렇게 아픈데.” 자기밖에 모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나이 들어서 자기 몸이 아파서 그런 겁니다. 여러분도 몸이 피곤하면 어떻게 됩니까? 잠이 오지요. 몸이 불편하면 모든 것이 짜증스럽지요. 저 어린애도 지금 짜증이 났는데 나이 들어서 90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육체가 있는 한 사랑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은 나오지가 않습니다.
은행에 가보면 여직원들이 어떻게 합니까?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그런데 그 사람들이 평소에 집에서도 그렇게 합니까? 집에서는 안 그럽니다. 집에서는 그렇게 상냥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착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싶어도 육체가 힘들면 만사가 귀찮아요. 사람은 자기 육체를 못 이깁니다. 아무리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이 육체를 못 이깁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육체가 힘들면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12살 연상의 검사가 12살 연하의 검사와 사랑하는 드라마가 나옵니다. 드라마 보면서 “저거 저 뚱뚱한 게 왜 나오지? 저건 내 타입 아닌데.” 괜히 심술을 냅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5:19,20에 해당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당 짓는 것, 뚱뚱한 것과 홀쭉한 것을 편 가르는 것) 분리함과 ….” 여기에 다 해당됩니다.
그게 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이 육체가 있는 한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여, 제가 이런 짓을 했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지키겠다. 내가 뭔가 이루겠다.’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그러면 죄가 아닌 게 뭘까요?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진짜로 제가 죄인 맞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80, 90이 되어도 희망 없습니다. 내 힘으로 선을 행한다는 그것이 저에게 아예 없습니다. 저는 육체가 있는 한 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구원되는 것은 누구 덕분이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덕분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아담을 통과해서 두 번째 아담의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 특징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정리하면 첫 번째, ‘나’라는 자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선악과를 따먹은 첫 번째 아담의 속성이고 이미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 예수 안에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겁니다.
이제 세 번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어떻게 못 박습니까? 어떻게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을 살펴야 합니다.
창세기 3:22,2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선악을 아는 것이 왜 쫒겨나야 할 문제일까요? 선악을 안다는 것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인데 왜 그것이 하나님 곁에 있지 못할 이유가 되었습니까?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되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기분 나빠서 추방시켜야 될 이유가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선악을 아는 것에 대해서 사람이 처음부터 알게 되어 있습니까,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까?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선악을 아는 것은 영적, 신적인, 하나님 같은 분들에게만 선악은 알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인 주제에 그만 하나님같이 되었으므로 추방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장본인, 인간의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그때부터 인간은 누구의 후손? 뱀의 후손이 되지요. 뱀의 후손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악마인데, 인간은 그 영적인 존재로부터 못 벗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방식이 뭐냐,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한 사람씩 불러다가 못 박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식으로 못 박는 것입니까?”에 대한 답을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뱀의 후손이 되었기 때문에 신적인,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물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 방식도 영적인 방식으로 못을 박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린이가 한 번 더 나와서 수고해 주세요. 자, 이 어린이가 인간이고 제가 마귀입니다. 마귀는 이렇게 이 애(인간)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얘가(인간) 십자가로 간다면 나도(마귀) 같이 따라가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세상 신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인간의 육체를 못 박아 봤자 마귀가 못에 박힙니까, 안 박힙니까? 사람은 그림자입니다. 사람이 가는 곳에 말씀이 있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사람이 가는 곳에 마귀가 따라옵니다. 사람은 이미 영물의 지배, 세상신의 지배를 받는 영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는 곳에 마귀가 따라 오니까 “이게 십자가다. 자 이제 너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하고 백날 해 봐야 마귀는 영물이기에 신체가 없고 그 신체 없는 마귀까지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미 마귀와 합작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단지 신체를 못 박는 방식으로는 안 되고 마귀와 떨어지게 하는 방식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 와야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마귀를 쫒아 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28,29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 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에 의해서 일을 하게 되면 인간들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는 악령이, “귀신아, 나가라” 하면 나가 버립니다. 귀신이 떠나게 되면 사람이 남지요. 사람만 남는데 사람은 이미 영적인 존재가 되었기에 귀신이 떨어져 나오면 그 다음에 누구에게 속합니까? 성령에 속하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 말은 ‘성령께서 네 배후의 것을 떼어내는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네가 성령을 믿는다고 아무리 해도 성령에 의해서 무엇이 떨어져 나갔는지를 믿지 않으면 너는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해 봅시다.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내 뒤에서 마귀가 그동안 나를 지배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2:1-4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2:1-4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좆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보세요. 사람들이 혼자 있습니까? 배후에 뭐가 따라 붙습니까?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 악마가 사람들마다 배후에 다 따라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사람이 백사람이면 마귀도 백 명입니까?”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사람이 백 명이라도 그것을 하나로 묶어 버리면 뭐가 됩니까?” “한 아담이 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마귀가 지배합니다. 마귀가 지배하면 아담이 아무리 새끼를 쳐도 그것은 누구의 지배아래 있습니까? 마귀의 지배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백 명이든 천명이든 마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가 전 인간을 다 지배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그 해답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첫 번째, 성령이 와야 마귀가 떨어진다. 두 번째로 마귀는 어떤 식으로 붙어 있는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어떤 식으로 붙어 있습니까? 에베소서 2:1,2에 보면 ‘전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이제는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렸다’고 되어 있죠.
우리교회 어느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제가 답변하기를 ‘죽음이 무엇이냐’, 그것에 답하려면 그냥은 못하고 ‘생명이 무엇이냐’, 그것과 짝을 이루어서 설명해야 되는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와 싸워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아버지가 화가 너무 나서 “내 호적에서 네 이름을 파낸다. 너는 이제부터 내 아들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은 남이 되었습니다. 남이 되었는데 이민 가고서 아버지가 보고 싶어 전화를 합니다. “아버지세요?” “아버지다. 너는 누구냐?” “저, 이민 간 아들입니다.” “전화는 왜 했느냐?”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미국에 와보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아버지 저를 받아 주실거죠?” 이럴 때 아버지가 “너같은 자식 둔적 없다” 하겠습니까? 아니면 “아이고, 내 자식아. 네가 돌아왔구나” 하겠습니까? 두 번째 이겠지요. “그래, 네가 이렇게 회개 했구나. 다시 내 아들로 삼아 줄게.”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도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끊어지면 죽음이고 관계가 이어지면 생명이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2:1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무엇이 따라 다닙니까? 마귀가 따라 다니는데 마귀는 영물이기에 우리 힘으로 떼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냅니다. 문제 나갑니다. 다음중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 일까요?
1) 나 구원받았다. 2) 나 새사람 되었다. 3) 나 예수 믿었다. 4) 나에게서 마귀가 떨어졌다.
정답) 이것은 다 정답이 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순서상 무엇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까? 성경대로라면 ‘나, 평소에 나를 따라 다니던 마귀가 떨어졌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성령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구원받으려고 덤빕니다. ‘예수 믿었다. 구원받았다. 이제 천당 가게 되었다. 교회 안 나가도 된다. 교회는 나중에 죽을 때 쯤 되어서 다시 나오겠습니다’ 하면서 도망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면 무엇부터 떨어져 나가야 됩니까? 그 동안 나를 지배했던 세상 마귀가 떨어져 나가야 됩니다. 마귀 떨어져 나가는 것 봤습니까? 봤다고 하면 수상하죠. 왜냐하면 영물은 눈에 안보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떨어져 나간 것을 어떻게 알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입니다’ 하는 사람치고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습니다’ 하는 것을 믿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전에는 그 소리를 못했습니까? 누가 있기 때문에?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오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옵니다. “너는 네 힘으로 말씀을 지킬 수 있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네가 착한 일을 해야 구원받는다.”
이것을 마귀가 자꾸만 이야기 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해라. 네가 말씀대로 한다면 뛰어 내려라. 그리하면 천사가 받아 줄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네 앞에 있으니 내게 절하라.’(눅 4:1-13) 이 모든 것이 다 마귀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파우스트라는 책을 아십니까? 괴테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독일의 전설을 각색해서 파우스트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에서 중요한 대목은 파우스트 박사가 마귀와 흥정하는 장면입니다. ‘나의 한계가 무엇인가?’ 갈 때 까지 다 가보자는 겁니다. 그 때 마귀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마. 그러나 네 영혼은 내가 가져간다.”
여러분과 여러분에게 붙어 있는 마귀와 흥정이 될까요, 안될까요? 여러분의 오른손과 왼손과 흥정이 될까요, 안될까요? 여러분의 그림자와 여러분과 흥정이 될까요, 안될까요? “그림자야, 한 30분만 떨어져 주겠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림자는 언제나 내가 가는 곳에 반드시 따라 붙습니다.
그처럼 마귀는 내가 가는 곳에 따라 붙어서 “말씀은 자기 자신이 지켜야 한다. 예수의 공로가 아니라 너도 뭔가 한몫 단단히 해야 구원 된다”는 식으로 나를 괴롭혀 왔습니다. “그거 봐라. 죄졌다. 너는 이제 죽었다. 꼴좋다. 너는 이제 지옥 간다. 이런 죄를 지었기에 너는 지옥 갈 거야.” 자꾸 그런 생각을 우리에게 일으킵니다.
성경 보다가 바빠서 성경 못 보면 어떻게 됩니까? “너는 이번 주에 벌 받는다. 성경을 못읽었잖아.” 여러분이 가끔씩은 교회를 못나옵니다. 나오려고 하는 데 그만 갑자기 차가 펑크 나기도 합니다. 친구가 불러내기도 합니다. 교회를 못 나갔을 때 ‘이번 주간은 저주의 주간이다. 교회를 못나갔으니 하나님께서 벌을 내릴 것이다.’
이것은 누구의 시험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시험이기도 하고 여러분 속의 누구의 시험입니까? 마귀가 그렇게 시험합니다. 떨어져 나가도 계속 달라붙어서 시험하는 겁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 그게 나의 죄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내 죄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귀를 계속 이용 합니다.
마귀를 이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죄인가를 계속 일깨우기 위해서 마귀를 가끔 붙여서 시험 들게 하는 여러 가지 일을 우리에게 만들어 냅니다. 그럴 경우라도 이미 성도이기 때문에 주님이 역사하기 때문에 그런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어쨌든 마귀가 여러분을 붙들고 있었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마귀가 여러분을 떠납니다.
“전에는 우리가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엡 2:3)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체가 원하는 것을 우리는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없다? 쫓아 낼 수 없는 겁니다. ‘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은’ 추가적으로 뭐가 왔습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오지요.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입니다. 어느 정도 큰 사랑입니까? 마귀를 떼어 내는 큰 사랑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말라고 할 수 있는 넉넉한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2:4-7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이 큰 사랑으로 인하여, 그 엄청난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다? ‘전에는 우리의 육체가 원하는 바를 계속 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십자가에 우리를 어떻게 죽이는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답변은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대목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마귀가 떠나갑니다.
마귀가 떠나가게 되면 이것을 느낍니다.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죄와 허물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바를 했습니다. 그랬는데 지금은 어디에 앉아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있고, 또 어떤 사랑? 큰 사랑으로 이미 우리가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긍휼과 큰 사랑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세상 신이 붙잡고 있었잖아요. 결국 이래나 저러나 우리는 누군가에게 붙잡힐 수 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전에는 마귀에게 지금은 긍휼과 큰 사랑으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보따리를 풀어 보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9,10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든다는 것, ‘만든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라’고 할 때 그것은 누구보고 한 이야기입니까? 빛 보고 이야기 한 겁니까? 빛은 ‘빛이 있으라’고 해서 생긴 것이 빛입니다. 빛도 없는데 ‘빛이 있으라’고 하니까 빛이 생긴 겁니다. 그게 바로 ‘만드신 바’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겁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 약속에 들어가면 ‘없는데서 있게’ 합니다. 그러면 만드실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하여 새로 만들어졌지요.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 그러면 지금 누가 만들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고 있지요.
어떻게? ‘전에는 이러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은혜와 사랑이 넘친다’라는 사람으로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습니까, 안 만들고 있습니까?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니까 ‘전에는’이라는 것을 잊어야 됩니까, 안 잊어야 됩니까?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잊을 수가 없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전에는, 전에는, 전에는’ 우리 같으면 “이제 ‘전에는’ 은 그만 해라. 지금도 ‘전에는’ 을 따지는가? 지나갔으면 그만이지”라고 할 텐데 주님께서는 우리 구원이 문제가 아니고 ‘전에는 네가 이러한 사람이었는데’라는 그것이 우리를 만드는데 재료로써 포함이 됩니다.
‘전에는 그랬었는데’도 재료고, ‘지금은 이렇다’는 것도 우리를 만드는 재료입니다. 둘 다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라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오늘 강의의 제일 중요한 마지막 부분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시 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습니다. 빛에게 부탁 했습니까? “빛아, 제발 좀 있어 다오”라고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는데 ‘빛이 있으라’는 그것이 뭡니까?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십자가에서 뭘 만드는가? 새로운 피조물이 만들어 집니다. 전에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듯이 이제는 십자가에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으매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와 큰 긍휼을 입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을 십자가를 가지고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사람은 모든 공로를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돌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이런 사람 같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백 명이라도 그들은 전부 다 한 명입니다. 왜 그 안에 뭐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십자가가 살아 있기 때문에 두 몸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몸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지체’라고 합니다. 두 몸이 아니고 한 몸에 붙어 있는 두 지체라고 합니다. 또는 한 몸에 붙어 있는 세 지체입니다.
세 지체 빼버리면 전부 다 뭡니까? 너나 나나 다 한 몸입니다. 십자가로부터 있는 한 몸입니다. 저는 그것을 낙지와 같다고 보는데 낙지의 다리가 몇 개 입니까? 8개입니다. 낙지의 8개의 다리가 한 몸이죠.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전체를 너 나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한 몸아, 한 몸아’ 라고 부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됩니까? ‘한 몸아, 한 몸아’ 라고 불러야 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서로 합력하고 서로 교통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서로 내어 놓았다’(행 4:32)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몸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부 다 십자가 때문에 한 몸 된 겁니다.(고전 10:16,17)
비록 여러분은 서울에 있고 나는 대구에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한 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 6:2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무엇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성취한다는 것은 구현한다,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큰 사랑’이고 ‘큰 긍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키면 안 됩니다. 왜? 우리가 지키면 뭐가 됩니까? ‘나’가 살아 있잖아요. ‘나’가 살아 있으면 ‘나’와 ‘너’가 두 몸이 됩니다. 왜 교회에서 ‘나’가 살아 있으면 안 됩니까? 내가 살아 있는 순간부터는 그 몸과 내 몸이 다른 몸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나’가 있으면 안 됩니다.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 한 낙지에 붙어 있는 다리에 불과합니다. 다리에 불과하기에 이것을 따로 내 몸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각자 한 몸인데 여기서 십자가를 통과해서 상대방에게 다가가야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 사랑을 드러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사랑을 드러낼 때는 ‘내가 했다’든지 ‘내가 지킨다’든지 ‘내 공로로 너를 사랑한다’든지 이러면 안 됩니다.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이 모든 것을, ‘나’라는 육체가 이미 죽은 몸이기에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해야 되겠지요.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기 보세요. 그냥 육체가 아니고 누구 육체? ‘자기’죠. 그냥 육체가 아니고 ‘자기 육체’입니다. 왜 또 ‘자기’가 나오냐, 이말 입니다. ‘자기’가 나오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나오면 한 몸이 안돼요. 자기 빼놓고 저쪽은 또 다른 몸이 되어 버립니다. ‘같은 몸 되기 싫어서 자꾸 다른 몸 되기 위해서 내 몸을 주장하느냐’는 겁니다.
‘내가 지킨다’든지 ‘내 힘으로 구원 받는다.’ 이게 죄라니까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가 날마다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전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십자가의 긍휼과 사랑 안에서 자기를 죽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죽어 버리면 거기서 성령의 열매가 드러나죠.
갈라디아서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찌니라.”
“… 착한 일을 하되 더욱 …” 누구에게 하라? “ …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찌니라.” 왜냐하면 다른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오른 손에 손톱깎이를 들고 왼손에 있는 손톱을 깎아 줄때 여러분이 자신의 공로를 내세웁니까? 손톱깎이로 발톱을 깎아 줄때 ‘봐라 내가 안도와주면 누가 너를 돕겠나’라고 자기 위세를 합니까?
발톱이 길면 누가 다칩니까? 내가 아프잖아요. 아픈 내가 발톱을 깎아 주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 나올 때 한 몸된 누가 가슴 아파 하면 누가 아파요? 내가 아파요. 이게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형제가 울때 같이 울어주고 형제가 웃을 때 같이 좋아해라.’ 왜 한 몸이니까, 한 육체이기에, 새로운 아담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2:20-27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려면 뭐가 없어져야 됩니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나’가 없어져야 됩니다. ‘내가 지킨다. 내가 행한다. 내가 성경대로 행한다. 내가 사랑한다.’ 이 내가 있으면 안돼요. ‘나’라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옛날 아담이 한 짓입니다. “목사님, 흥분할 것이 아니라 그러면 성경대로 누가 한다고 했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옵니다.
‘봉사할 때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의’ 누가 한다? ‘그리스도가 한다’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당신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게 행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4:9-11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박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한테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로 인하여 헌금하게 하십니다. 어떤 분과 헌금문제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는데 집사님 하는 말이,“우리 교인들은 헌금을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라고 했는데, 지금 기존 교회들은 헌금을 강요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문제고 우리 교인들은 억지로 안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참 명언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기존 교인들은 강요로 인해서 억지로 십일조 하고 헌금을 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우리 교회 교인들은 억지로 안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억지로 안합니다. 왜? 하게 되면 자기 공로가 된다는 겁니다. 자원해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도 ‘아니야, 이것은 마귀의 생각이야’ 하고 억지로 안하는 겁니다. 그 돈 모아서 자기 애 피아노 가르칩니다.
괜찮습니다. 피아노 레슨 열심히 하게 해서 교회 반주도 하고, 예쁜 옷 입고 연주회도 하고 그래도 보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왜 그리스도가 하라고 하는 것을 왜 안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하라고 했는데, ‘주여, 제가 이러면 안 됩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해야 되기 때문에 하면 안 됩니다’ 하면서 아예 안 해 버립니다. 자기가 그리스도를 가르치려 듭니다. 여러분, 주께서 하라고 하는 것을 그냥 하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게 되었고 마귀가 떠났기에 우리가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은 긍휼과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값없는 큰 사랑을 받았사오니 이제는 내 위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의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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