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25강
(이 근호목사, 2007년 09월 14일(a), 서울의존교회)
오늘은 갈라디아서 5:13부터 보겠습니다. 그 전에 갈 5:4을 먼저 보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율법 안에서”라는 말이 나오지요.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율법 안”이니까 이 전체가 율법이라면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율법 안”이라고 합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로다.” 여기는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그림을 그렸잖아요.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의 영역이죠. 그리스도의 영역이 따로 있고, 율법이라는 영역, 또는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역이 따로 있고 율법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이 생각은 인간들이 의논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공간을 두 개로 나눈 거예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지 않더라도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따로 만들어진 공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수긍을 좀 해 주셔야 됩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역과 율법영역이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북한에도 미국에도 그런 헌법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안 만든 것은 없다고 여기는 못된 버릇이 있는데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수용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구태여 어떤 체제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 쪽에서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체제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수용을 해 줘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보면서 제일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머리 맡 대고 연구하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사람에게 어떤 의견을 개진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따로 영역을 만들어 버렸어요.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안 만들고 내가 생각하지도 않은 영역을 내가 왜 구태여 동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황소고집과 관련되어 있지요? 사람은 내가 한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지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마다 다 자기 자존심이 있는데, “싫어요. 내가 안 만들었는데 왜 일방적으로 강요하십니까?”라고 황소고집을 부릴 수가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사도바울은, “사람에게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고 사람에게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두개의 영역을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영역을 만든 것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그냥 다가섰고 덮친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우리는 섭하지. 우리하고 의논도 하고 영역을 만들든지 해야지 일방적으로 만들어서 마구 들이대시는 그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일을 그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하시면 우리 인간으로서는 버거워서 수용하기가 참 난처합니다. 앞으로 이야기 하실 때는 사전에 우리와 의논하고 ‘너희들은 이것이 이해가 되느냐? 이해가 될것 같으면 너희들에게 안겨줄게’ 이런 쪽으로 나와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요.
제가 지금 다섯 번도 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영역과 그리스도영역은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들이닥친 영역입니다. 무조건 수용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율법 안, 그리스도 안, 이렇게 틀을 잡아 놓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율법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로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도발적으로 나와 버린 거예요. 지금 우리 사람들은 교회 나오는 목적이 뭐냐 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되라고 교회 나왔어요. 교회 나온 것이 일종의 노동이 아닙니까? 그 노동의 대가를 어느 정도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바쁜데 만사 제쳐 두고 교회에 쪼르르, 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했다, 그러면 한 주 동안은 복의 부스러기라도 뭔가 몇 조각 챙겨야 그 다음 주일날 또 보상을 얻는 재미로 다음 주일에 또 올 것이 아니냐는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전부 다 우선 나에게 이득이 되고 나 좋아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신이시여, 우리는 어떤 영역에 있습니까?” 그것이 궁금해서 교회 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떤 영역에 있든지 골치 아픈 그런 것은 관심이 없고, 교회 안 나오다가 교회 나오니까 “사업 잘되게 해주시고 애 공부 잘하고 애 아픈 몸을 건강하게 해 주시면 다음에 또 나오겠습니다”라는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교회 나오는 재미가 있을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봉사한 만큼 주머니에 두둑하게 챙겨져야 ‘아하,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 맞구나. 내가 이런 기적을 받다니, 내가 그동안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줄을 몰랐네. 이렇게 열성을 내니까 복을 주는구나. 목사님의 말이 다 맞네. 앞으로 목사라고 부르지 말고 목사님이라고 불러야지’하면서 그 다음에 또 교회 나올 이유를 찾을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일방적인 생각이고, 만약에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 같으면 교인들이 자기 이득을 위해서 교회 오는 것을 뻔히 알아요. 뻔히 알면서도 갈라디아서 펴놓고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두 가지의 영역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사전에 어떤 힌트라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역이 궁금해서 온 것이 아닌데요. 왜 목사님은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십니까? 우리가 원치 않는 이야기를 왜 하는 겁니까?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이런 이야기를 해줘야죠. 우리가 별로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왜 하십니까?”라고 나올 거예요.
그럴 때 목사님이 하시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촐랑대고 까불든지 간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기입장밖에 모릅니다. 왜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들은 토기니까. “당신 생각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 목적을 노리고 교회에 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하나님이 발걸음을 인도해서 교회에 오게 했다”는 겁니다.
벌써 여기서부터 차이가 나지요? 인간은 ‘내가 내 의지로 왔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교회로 완전히 몰아 세워버렸다. 들어가! 들어가!”하고 몰아 세웠다는 겁니다. 내가 왔으면 내 이익을 챙기는데, 오기 싫은 교회를 강제로 왔다면 그 강제성 뒤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어떤 의도, 어떤 계획으로 왔던 간에 그 계획과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뭡니까?”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비밀을 너희에게 알려줄게” “그러면 그 비밀이 뭡니까?”
“이 세상은 두 가지 영역이 있다.”
이세상은 두 가지 영역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교회에 온 노림수, 나는 이 교회에 와서 복 받아야지, 하는 그 노림수와 계획은 완전히 묵사발 되는 겁니다. 그것은 부도수표같이 소용없는 것이 찢어 버려야 됩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에게 걸려든 겁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걸려들지 아니하면 아무도 천국에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구원받기로 걸려들어야 됩니다.
걸려든 사람은 내가 걸려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왜 걸려든 사람이 걸려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모든 자기 인생을 통해서 추호도 하나님이 내 뜻을 안 이루어주는 쪽으로 계속 인도하시더라는 겁니다. ‘내 뜻을 안 이루어주는 쪽으로 인도하시더라.’ 여기에 강조점(엑센트)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 뜻을 안 이루어주는 쪽으로” 이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그 다음에 “인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동행하심이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한 것처럼. 내 뜻이 안 되는 쪽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쪽으로 인도한다면, 그것이 성도의 모습이라면, 여기서 두 가지를 알아야 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한다면 ‘내 뜻’도 알아야 되고, ‘아버지의 뜻’도 알아야 되고 둘 다를 알아야 되는 겁니다.
성도는 둘 다를 알아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이제 예수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밖에 모른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내가 미처 나도 모르는 은밀한 욕망의 뜻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엄마가 애들한테 “얘야! 너는 숙제를 잘 해서 공부를 잘 하는 어린이가 되기를 원한다.” 애가 있다가 “나도 그러기를 원해요. 엄마 뜻하고 내 뜻하고 같네요.” 이럽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엄마의 비위를 맞추면 거기서 얻어지는 보상이 크더라는 겁니다. 내가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사준다든지, 내가 가고 싶은 곳에(놀이공원 같은) 보내준다든지, 그런 것이 애 본인도 몰랐는데 나중에 보면 은밀하게 들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냥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뜻 이거 맞지?” “맞습니다.” “내가 기어이 안 되게 해줄게. 고맙지?” “별로 안 고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너의 뜻은 절대로 안 이루어지는 쪽으로 인도해줄게”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나갑니다.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우리가 내 뜻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갈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내 뜻을 꺾고 주의 뜻을 맞춘다는 이런 것은 우리가 성도가 아니라 성도 생활을 백년을 해도 우리에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예 포기하세요. 없습니다.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행복해도 괜찮아요.
내 뜻대로 내 뜻을 누른다든지 그럴 자질도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고 그것이 오늘 강의의 주제가 되는 자유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으로 부터의 자유,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내가 내게 기대를 거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자유입니다. 내가 나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욕망대로 나오지만 그 기대대로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겁니다.
말을 좀 쉽게 하면 “율법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고 할 때에,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내 뜻은 율법이고 뭐고 그런데 관심 없고 교회 나와서 복 받고 돈 잘 버는 것 밖에는 없었는데, 하나님의 뜻이 임해보니까 두 가지 영역이 있더라는 겁니다. 한쪽은 율법의 영역이 있고 한쪽은 그리스도의 영역이 있는데, 율법의 영역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는 것도 주의 뜻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율법 안에 있는 내가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 말입니다. 제가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없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율법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다”는 그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율법에서 안 벗어나려고 해요. 왜?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고 우리의 뜻이니까.
거기에서 우리가 안 벗어나도 된다는 그 점이 우리로 하여금 이미 자유가 우리 속에 작동하고 있다고 봐야 됩니다. 지금 자유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에서 우리가 맥을 못 춰요. 우리가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를 줄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상 외로 자유로워요.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되어 있지요? 자유라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나에게 어떤 힘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라 하는 것은 자유의 혜택을 마음껏 입고 있는 거예요.
“술을 끊으려고 하는데 술이 안 끊어집니다. “본인이 자기 힘으로 술 안 끊어진다는 것을 아셨지요?” “예!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술이 안 끊어지는 그런 세계에서, 더 이상 내가 내 힘으로 술 끊을 필요가 없는 그런 영역에 당신이 속해 있습니다.”
두 가지 영역이니까, 우리는 이 영역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겨가려고 애를 쓰는데, 자기 힘으로 율법에서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겨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일찌감치 포기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율법의 영역에서 못 벗어날 때는 그리스도의 영역이 이쪽을 덮쳐 버리지요. 덮쳐버리면 이 그리스도의 영역을 가지고 ‘자유’라고 합니다.
‘자유’가 우리 위에 덮쳐 버립니다. 그러면 본인은 비록 율법 아래 있지만 자유의 영역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을 이기지 못하면 율법은 어떻게 되는가? 율법의 관계는 따로 처리반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됩니다. 율법이 있고 그리스도가 있다. 그것은 둘다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와 관계없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덮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전체가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될 그런 문제가 아니라서 자유로워요. 어느 정도로 자유로운가? 과분할 정도로 자유롭습니다. 주님께서 과도하게 베푸신다고 느낄 정도로 과분하게 사랑을 받아요. 그것을 사랑의 강권이라 합니다.
제가 지난 오후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아가서에 보면 너무 자기 신부에 대해서 사랑에 관해 너무 과도한 치장의 표현을 해 놓았어요. 모든 것이 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예쁘다는 거예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한 순간도 ‘주님께서 나에게 너무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너무 과분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고 느끼시거든 그 사람은 이미 어떤 것으로부터도 이미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과분한, 남아도는 사랑이 넉넉하고 남아도는 용서가 넉넉할 때는 우리가 구태여 세상일로 인해서 얽매일 필요가 없잖아요. ‘아, 나는 술을 못 끊어서 큰일이다’라는 그런 고민도 과분한 사랑으로 인하여 “누가 너 보고 술 끊으래?” 라는 식으로 다가올 때는 “주님께서 너무 과분하게 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할 때 “원래 사랑이란 과도하게 보이는 거야” 라고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한 자유를 주께서 준비하셨다. 우리가 상상하고 또 상상하고 또 상상해도 그 상상으로 다 미치지 못할 정도로 그 보다 더 큰 자유함을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신 거예요. 그걸 평소에 왜 우리가 못 느끼느냐 하면, 우리는 이 율법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맨 날, 내가 어느 정도까지 선한가, 어느 정도까지 악한가, 덜 선하고 덜 악하고, 이런 것만 신경 쓰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여름에 홑이불 덮다가 두꺼운 겨울이불 덮어 보세요. 따뜻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 솜이불 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지요. 마찬가지로 그 솜이불보다 더 두꺼운 것이 뭐냐, 자유라는 겁니다. 자유! 자유의 부르심을 받고 자유가 오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걱정했던 모든 것 이상으로 과부한 사랑과 용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또는 의도를 가지고 교회를 찾는 그런 생각보다도, 평소에 우리가 세상 살면서 내 위주로 살던 그러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늘도 복음 앞으로 몰아 넣어버렸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것은 율법을 덮어씌우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으니까. 여기 인간이 있다면 율법이라는 홑이불, 얇은 이불을 덮어씌우면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갑자기 따뜻해져요. 자유라는 이불을 덮어씌우니까 이러한 율법을 지키냐, 마냐 하는 이 소소한 모든 것이 자유 앞에 무의미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갈등, 투쟁이란 게 “거 뭐, 애썼다. 얘! 평생 말씀대로 산다고 수고는 했다마는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인데 네 자존심과 경쟁했지. 그냥 교회 가면 미안스러우니까 말씀 몇 가지 지켜본다고 애썼는데 처음부터 나는 기대를 안했다. 그것은 해도 소용없는 거야.” 해도 소용없는 짓을 우리가 계속 하고 있죠.
그런데 해도 소용없는 짓을 해도 그게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목사님,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제가 심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무 심합니다. 우리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너무 큰 은혜를 베풀어요. “목사님, 그러면 방종할 게 아닙니까?” 뭘 잊지 말라고 했습니까? 인도. 두 가지 영역가운데 하나는 무슨 영역? 율법의 영역, 율법의 영역은 우리가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냥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주신 것.
그러면 자유의 영역은 그냥 만드는 겁니까? 그냥 주시는 겁니까? 그냥 주신 것을 여러분이 믿을 것 같으면 자유의 영역을 믿어야지요. 우리가 자유를 만든 게 아니잖아요. “아, 율법대로 안 되는데 율법을 안 지켜도 구원받는 방법이 없을까?” 이렇게 까불대면서 하나님과 타협해서 “율법으로 말고 그냥 용서받는 길을 주세요”라는 식으로 의논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올 때 우리는 복 받고, 돈 더 벌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런데 난데없이 율법의 능력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덮쳐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렇게 무서운지를 몰랐어요. 성경말씀 전체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사람이 배고플 경우에는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도 족할 줄을 압니다.
일단 배부르고 나면 다른 것을 찾기 마련입니다. 어느 인간이 디모데전서 6장을 지킵니까?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어느 인간이 이것을 24시간 매일 같이 지킵니까? 못 지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것을 누가 지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이것을 누가 지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화를 버럭 내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지키지도 못하는 것을 숙제로 내서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최선을 다 해 보기는 하겠습니다만 24시간 돈을 사랑하지 않는 그것은 정말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너는 어찌 영역이 율법영역만 있는 줄로 알고 그렇게 화를 내느냐? 다른 영역이 있는 것을 한번 봐라. 뭐가 보이느냐?” “자유 영역이 있네요.” “그것은 누가 만들었는데?” “주님이 만들었네요!” “왜 만들었을까?” “우리에게 덮치려고 만들었습니다.” “그럼, 덮쳤음을 네가 믿나?” “믿습니다.” “그러면 너는 자유자다.”
왜 처음부터 자유를 주지 않느냐 하면, 율법에 매이지 아니하면 자유가 의미가 없어요. 율법을 주지 아니하면 자기가 자기의로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양 착각을 해요. “역시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더니 그만한 보상을 해 주시는구먼. 그렇지 하나님께서 자기형상대로 만든 인간을 버릴 리가 있겠어? (이렇게 까불어 대면서) 거기다가 나는 십자가까지 믿어주니까 얼마나 대견스러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죠.
율법으로 짓이겨 놔야, “나는 내 힘으로는 못 벗어날 정도로 ‘나는 죄인중의 괴수 맞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세상에 그것마저 구원으로 쳐주는 과도한 구원의 영역을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서 우리에게 줬습니다. 두 가지 영역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율법영역, 또 하는 무슨 영역? 자유의 영역. 이상하게 사람들은 율법영역 가지고 시비를 많이 걸어요.
최근에 나온 책, 「성도의 삶에 대한 질문과 답변 」(이근호저, 대장간, 2007. 8)을 보고 어떤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아직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질문은 한국교회에서 계속 되풀이해서 나올 겁니다.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그 책의 질문을 보니까 답변을 어떻게 할지 가슴이 조마조마 하다”는 겁니다.
왜 질문에 대해서 가슴이 조마조마 하는가 하면, 그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들이 평소에 내가 묻고 싶은 것들만 골라서 질문해 주니까, ‘십자가도 맞고 이 말도 맞고 둘 다 맞잖아’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마조마 한 거예요.
사람들은 율법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영역에 내가 속하면, 전에는 없었지만 이제는 마치 율법의 영역에 내가 없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잘 들어 보세요.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은 율법의 영역에 있었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율법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이제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 들어 있으니까 율법의 영역에는 더 이상 내가 없다는 거예요. 율법의 영역안에 내가 없다고 해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짓을 하느냐 하면, “주여,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들을 제가 지키겠나이다”라고 또 법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 버릇이 그대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영역을 몰라서 그래요. 자유 안에서는 지키는 것이 없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나,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자나 둘 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입니다(갈 2:17, 5:4).
둘 다 자유라는 솜이불을 덮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율법 안’이라는 홑이불을 덮습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만 자유를 위해서 부르심을 입은 솜이불이 덮씌워집니다. 성도에게만. 성도가 아닌 사람은 홑이불(율법)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도 아닌 교회의 특징은 뭐냐? 법을 줍니다. 법을 줘서 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법을 안 지키면 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들 전체가 하나의 법이 됩니다. 법으로 지키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유대인들이 했던 그 행위의 되풀이입니다. 지금 아직까지 자유의 영역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강조하는 것이 뭐냐, 내 힘으로 내가 법 지키고자 하는 그 버릇이 평생토록 우리에게서 지워진다, 안 지워진다?
평생토록 법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절대 안 떨어져 나갑니다. ‘전에는 세달 만에 한번 교회를 나갔는데 이제는 두 달 만에 나가니까 나도 참 신앙성숙 많이 되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뭔가를 지키겠다는 속성을 우리는 떼쳐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그 버릇을 떼쳐버리지 않아도 구원이 되는 그 상태를 자유라고 합니다.
“내가 법에서 벗어나야지”라는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영역(공간)이 들이 닥쳐서 그 자체로서 이미 구원된 상태, 그것이 자유의 상태입니다. 내가 더 이상 나에게 손질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제 남은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자유라는 그런 대단한, 과도하고 과분한, 분에 넘치는 혜택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습니까?”라는 그 질문만 남아 있지요. 자신이 스스로 이제는 법에서 벗어났다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80이든, 90이든 인간은 자기 의를 포기를 안 합니다.
인간은 자기 의를 만들어 낼 것이고 만들어 낸 자기 의는 누적이 될 것이고, 그 누적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복을 따내려는 심보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절대로 없어지지 않아요. 따라서 “옛날에는 교회 와서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 줄을 알았는데 의존교회 오니까 헌금 안해도 복 받는 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헌금 안해야지”라고 한다면 그 헌금 안해야지, 그것이 뭐가 됩니까? 새로운 법을 만들었지요?
그것처럼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어떤 법을 지켜내서 그 지켜낸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인정받고 싶은 그 심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원되었다는 그 상태가 구원의 상태이니까 그 상태를 여러분은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참새가 창공을 날 때 참새가 하늘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진 그 하늘을 그냥 맘껏 날아다닙니다. 날아다니면서 ‘내가 날개 짓을 너무 하면 하늘이 좀 좁아질 것인데…’라고 걱정을 하면 그 참새는 못된 참새지요. 어느 정도로 하늘이 넓으냐 하면, 참새가 똥을 싸도 그것을 다 수용할 정도로 하늘은 넓습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까불면서 “나는 두 개 지켰다, 세 개 지켰다”고 까불어도 그것마저 과분한 사랑으로 하늘같은 넓은 사랑으로 그런 되도 않는 똥마저 다 치워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것이 하늘같이 넓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자유이고 그 자유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겁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하나님을 부르려고 했는데 막상 교회 와서 보니까 하나님이 날 처음부터 불러냈어요.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모든 것은 율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유의 영역에서 다 행사를 하는 겁니다. 세상에 어느 신랑신부가 결혼식 할 때 자기가 부케 만들고 그럽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신부입장 할 때 자기가 피아노앞에 앉아서 반주도 하고 그 다음에 입장도 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미 다 마련된 곳에 신랑 신부로 입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너무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과분하니까요. 자꾸 예수님 하시는 것을 뭔가 흉내 낸다고 생각하니까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네’라고 이따위 생각을 하는 거예요. 테레사 수녀처럼. 평생토록 구제해도 주님의 사랑 근처도 안 갔어요. 그것은 하나의 새똥 같은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구제 안해도 구원받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 영역이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갈라디아서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여기 보면 할례를 행하세요, 라고 율법을 증거 했더라면 내가 전한 십자가도 여러분에게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뜻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게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인지를 여러분이 좀 알아야 됩니다. 율법, 할례, 안식일 같은 것을 다 지키자고 설교하고 가르쳤다면, 십자가를 믿으라는 것이 그렇게 거부반응이 안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무엇과는 어울리지 않고 섞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법을 지키세요”라는 동네는 “십자가를 믿으세요”라는 동네와 절대 함께 섞일 성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증거 하려면 반드시 “여러분이 법 지켜서는 소용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날 때부터 나이 90이 넘도록 까지 법을 지키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끝까지 우리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소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껄끄러운 소식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만약에 “법을 지키세요”라는 투로 “십자가를 믿으세요!”라고 한다면 그들은 쉽게 거부반응 없이 십자가를 믿었을 겁니다. 왜? 십자가를 믿는 것도 뭐가 되기에? 법을 지키는 그런 버릇 중에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까짓 거 다른 것도 지키는데 십자가는 못 믿을까?” 이렇게 믿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고 십자가가 아니고 가짜라는 말입니다. 진짜 십자가라면 인간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법 지키고 싶어서 환장해요. 심지어 도둑놈도 강도도 자기가 의리 있다고 여기는 의리 지킨 법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한 인간들에게 “그것이 소용없습니다” 하고 나서는 그것이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모든 인류에게 거치는 것, 거북스러운 것, 듣기 싫은 소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를 믿었습니까?” 여러분들이 믿은 것이 여러분들이 재주껏 믿은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자유의 영역에서 능력이 흘러 나와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럼 목사님, 자유의 영역에서 왜 능력이 흘러나오는데요?” 그것은 자유의 영역을 만들 때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자기 숙제, 자기 과제가 있어요.
그 과제중의 하나가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저는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개입. 안산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어떤 곳을 보든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개입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즉 “주여, 우리에게 뭘 또 퍼부으려고 하십니까”라는 쪽으로 보게 되면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아하, 이런 은혜를 퍼부으려고 하는구나”라고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자기 개입으로 보면서 “주여, 오늘 어느 말씀을 어떻게 지킬까요?”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개입을 느끼지 못한 채 엉터리 해석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자기한테 부담이 되는거죠. 시편도 그렇고 성경 어떤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지켜서 우리에게 공짜로 준다. 자, 오늘도 어떤 말씀이 공짜의 은혜를 주실까’ 이런 마음으로 보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여, 내가 이것을 또 꼭 지켜야 됩니까? 열심히 지키겠습니다”라는 쪽으로 보게 되면, 볼 때 마다 본인도 압니다. 온전치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그래서 두 번 다시 성경이 꼴도 보기 싫게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다니엘서에 나오는 벨사살왕이 있습니다. 그가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승전의 전리품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것들로 건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통도 없는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지금 검은 천을 이렇게 뒤집어쓰고 이렇게 손만 등장하면 이것은 귀신이 나타난 거죠.
그 손가락이 벽에다 글씨를 씁니다. “벨사살 왕, 너는 끝났다. 망했다”고 썼을 때, 만약에 벨사살이 성도라고 했다면 ‘아, 내가 망하는 것도 주의 뜻이 맞구나’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벽에 쓴 것은 무슨 말씀? 성경말씀! 그 성경말씀대로 나에게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이면 내 쪽에서 할 것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맘이 편하잖아요.
기분 좋지 않습니까? ‘아, 앞으로 나에게 저런 일이 들이 닥치겠구나. 주여, 나는 토기이니까 토기장이 맘대로 하옵소서.’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과제가 아니고 자기 과제로서 다가오니까 여기서 난리가 났어요. “못 지킵니다. 우리보고 어떻게 지키라고요. 너무 심합니다. 좀 약한 것을 주세요. 너무 셉니다.” 호들갑을 떨어요.
호들갑을 떤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말이 아니고 ‘약한 것을 주면 우리도 지킬 수가 있는데 라는…’ 율법의 영역에서 나오는 버릇입니다. 아주 더러운 버릇이 속에 있다가 갑자기 말씀이 들이 닥치니까 발동을 하면서 난리가 났어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헌금을 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라.”
그러면 헌금을 할 때 기쁜 마음, 자발적으로 하라는 그것이 누구의 과제입니까? 주님의 과제지요? 그러면 언젠가는 그런 기쁜 마음을 주시고 자발적인 마음을 주시겠지요? 왜? 주님은 자기 말씀을 실패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의 개입 아닙니까? ‘아, 이 말씀을 앞장세워서 하나님께서 개입하는구나. 나중에 언젠가 자발적으로 할 때는 주님이 하셨다고 그렇게 증거 해야지.’
이렇게 마음가짐을 가지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을 가지고, “기분이 더러운데 어떻게 기쁜 마음이 됩니까? 돈이 아까운데 무슨 수로 헌금을 해요. 자발적으로 하라는데 자발적으로 하라는 말 듣기도 싫어요. 아예 퍼센트로 수입의 얼마라고 딱 정해주세요. 자발적으로 하라고 하면 우리가 부담됩니다.” 누가 뭐랬어요? 왜 난리입니까?
자기들끼리 오해를 해가지고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고 자기의 능력을 집어넣어서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드니까 “너무 심합니다. 너무 과중한 율법을 주셨군요. 좀 더 믿음이 좋아지면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할게요. 지금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너무 탓하지 마세요.” 이래놓고는 삐져서 교회도 안 나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는 장면인데요. 거기에 롯의 가정이 나옵니다. 롯의 가족이 네 식구입니다. 롯이 있고, 롯의 처가 있고, 두 딸이 있습니다. 사위들은 천사의 말을 안 따르겠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네 명은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천사의 말을 듣고 네 명이 탈출 할 때에는 뭐가 필요 없느냐 하면 구태여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추가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 성을 떠나라고 했고, 그 말씀대로 그 성을 떠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뒤돌아보지 말라는 그 말씀을 왜 집어넣었을까요? 나중에 보니까 네 명이 분명히 구원될 줄 알았는데, 그 넷 중에서 롯의 처가 뒤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되지 못할 자가 구원되는 식으로 절대로 섞이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갈고리 가지고 찍어 내는 것처럼 확 잡아 당겨내면서 “너는 아니고!” 하니까, 결국 네 명중에서 결국 세 명이 되잖아요. 75퍼센트!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선별작업입니다. 이 선별작업에 하나님의 추호의 실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교회 개척할 때 50명이 되었는데 일 년이 지나고 나니까 20명이 되었다고 할 때, 박수쳐야 됩니다.
“와, 나는 교회 오면 다 성도인줄 알았는데, 제가 깜빡 속을 뻔 했습니다. 하나님은 참 빈틈이 없네요.” 하나님은 식약청 직원같이 도사입니다. 중국산인지 한국산인지 대번에 알아 냅니다. 이 고사리가 중국산인지 국내산인지 다 압니다. 우리는 몰랐는데 하나님은 다 알아요. 지금 그런 선별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분노하지 마세요. 특히 목회자가 분노하지 마세요.
주께서 선별작업을 해 놓았는데, 목사가 옆에서 “주님, 저 사람은 끼워 넣읍시다”라고 간섭하지 마세요. 괜히 끼어들다가 “네가 한번 당해 볼래?”소리 듣습니다. 주님 하시는 일에는 하자가 없어요. 실수도 없고. “너, 왜 똑바로 안 해. 내가 시킨 것은 이것인데 왜 이것을 똑바로 못해” 하고 우리 보고 당부하고, “똑바로 해야 되는데 네가 이따위로 해서 나도 못하겠다”고 책망하면 그렇게 하겠는데,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자유의 영역에서 실시해야 될 그 업적들이기 때문에 주의 일에 오류나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선별작업, 가라지는 가라지, 알곡은 알곡으로 구분하는데 귀재이고 도사입니다. 그 과분한 사랑을 오로지 자기의 친 백성에게만 주기를 원하지, 진노의 자녀에게는 한 방울도 하나님의 자비가 섞이는 것을 애초부터 허용한다든지 용서하는 적이 없습니다.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했으면 이제는 그 코스대로 밀어부치는데 그 모든 과업의 완성자는 우리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이 우리 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자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자유의 영역에서 어떻게 선별작업을 해 내는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녹취: 오용익
갈라디아서 제 26강
(이 근호목사, 2007년 09월 14일-b, 서울의존교회)
'케제만’이라는 신학자는 「예수는 자유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예수님이 행적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이것이 법이다’ 하는 것을 다 거부해요. 사람들이 ‘이것이 법이다’ 하는 것에 섞이는 법이 없이 아주 돌발적으로 행동을 해버립니다. 의도적으로 그 ‘법이다’ 하는 것과 ‘나는 무관하다. 상관없다’는 식으로 모든 행동을 해버립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지요. 자유의 영역은 이 밑의 율법의 영역과 연결점이 없어요. 두 어린이가 노래를 하는데 한사람은 형이고 한사람은 동생이고 형제 둘이 나와서 노래를 합니다.
“자, 둘이 제창을 합니다. ‘나비야, 나비야’를 둘이 같이 부릅니다” 하고 노래를 하는데 세상에, 갑자기 형이 손으로 동생의 입을 틀어막았어요. 그렇게 틀어막아 놓고서는 혼자서 큰 소리로 불러 버렸습니다. 동생의 그 입을 막는 손이 율법입니다. 다른 손 가지고 크게 부른 것은 예수님의 자유의 선포입니다.
‘눈먼 자는 눈을 뜨고 세리와 창기는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갑니까? 주님이 “내 맘 대로다. 왜?” 예수님은 자유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를 구원 안 시켜 주는 법이 없어요. 주님이 원하는 자를 마지막 때에 영광스럽게 부활 안 시켜주는 주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기 솜씨를 과시하는 겁니다. 한쪽 손으로는 뭘 막고?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입이 틀어 막히니까 자기 딴에는 그 방해를 떨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마구 인상을 써가면서 노래를 부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보통 자유라고 할 때 “나는 자유하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나 입던 도포나 개량한복 입고 다니고, 이 외수 같은 사람들도 있고, 록 가수나 영화배우 같은 연예인들도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맘대로 살면서 자유라고 해도 뭐가 없습니까? 남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없습니다. 석가모니, 공자 이런 사람들 다 자유로운 사람들 아닙니까?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잘난 체를 다 하는데 그렇더라도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 그런 무모한 짓은 안하거든요.
예수님의 자유는 “자유다!” 그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 버립니다. “나는 입을 열 자격도 없어. 너는 심판받아야 돼”라고 틀어막고 자유를 외쳤습니다. 왜 틀어막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홀로 이루어서 혼자 다 이루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영역에는 무엇을 배제하느냐? 인간을 배제합니다. 인간의 이름을 배제하는데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그냥 인간을 배제한다고 합시다.
처음부터 인간을 배제하고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분을 향하여 그분의 능력으로만 모든 만물이 회복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틀어막을 자격이 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으니라.”(롬 8:29,30)
이 모든 것이 지금 뭘 틀어막았습니까? 법을 지켜서 하겠다는 것을 틀어막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여기에 보탬이 됩니까, 안됩니까? 보탬이 안 됩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내가 성경말씀 열심히 지키는 것이 내가 의롭게 되는 일에 보탬이 됩니까, 안 됩니까?
보탬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의인이 맞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유를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유인 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손이 입을 막거든요. 하는 말이 “너는 네 힘으로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너의 힘으로는 의롭게 안 돼?” “주님이 날 틀어막았거든요.” 주님이 날 틀어막았다는 고백은 성령을 안 받으면 못하는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매일 같이 나를 틀어막더라”는 그 기쁨의 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절대로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시는 그 행복감. “주여, 오늘 아침에도 기도 열 개나 했는데 오늘도 그 열 개 다 펑크 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 살아 계시는 군요.” 우리가 언제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아느냐 하면, 내 뜻대로 하나도 안될 때 비로소 빼꼼히 주님의 얼굴이 보여요.
“주님은 참 빈틈이 없으시군. 내 욕망을 틀어막는데 하여간에 귀신이다. 어디로 도망쳐도 다 잡아내는 구나.” 내 뜻대로 안되게 하시는 은혜, 그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이 안 나올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내뜻대로 되어 버리면 주님만이 할수 있는 자유영역에 내가 침범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으니라” 여기에 뭐가 섞이느냐 하면, 내 행위가 섞이게 되고 그것은 내가 법을 지킨 것이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사람입니다. 법에 속한 사람은 어디에서 끊어졌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입니다. 바로 이 자유를 엿보려고 온 사람들이 있어요.
갈라디아서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 입에서 너무 심한 욕설이 나왔어요. “하나님의 자비를 훼손하는 자는 스스로 자멸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저주 받아서 아예 폭삭 망해 버려라, 이놈들아!” 그런 욕설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13절입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우리가 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자유라는 말은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법이 아니면서도 법 지키는 사람의 입을 틀어막아 버립니다. 인간의 행위를 틀어막습니다. “내가 길이다”는 것은 “는 길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진리다”라는 것은 “너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생명이다”라는 뜻은 “너는 생명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입을 틀어막아요.
틀어막아버리고 홀로 그 일을 다 이루실 때 그것을 바로 자유라고 합니다. 인간의 힘이 거기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받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매일 “내가 무엇을 행했다”는 그것을 작살내고 매일 부정하게 만드는 그런 작업을 동반해서 “주님만이 하셨다”는 것이 나오게 합니다. 그러면 이 자유는 누구 겁니까? 이 자유는 누구만 이루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겁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이 말씀은 “네가 용쓰고 애 안 써도 돼”라는 그런 행복감으로 다가와야 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라는 이 말씀을 해석하려면 “스스로 자신을 살리려고 애쓰고 용쓰지 않아도 그런 것과 상관없이 구원이 된 신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길을 가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은 “너는 이미 구원받았어. 너는 이미 하나님이 아신 자야, 아신 자이기에 그 마지막도 영광스럽게 보장된 거야. 너는 가만히 있어도 돼. 내가 다 할거니까.” 그래서 입을 틀어막는 거예요. 입을 틀어막고 “원치 않는 길로 데려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너는 네 것이 아니고 이 예수 내 것이다”라는 겁니다.
“ 것이기 때문에 너는 네 마음대로 못하고 내 맘대로 할 거야”라는 뜻입니다. 이게 얼마나 부담이 없습니까? 기분 좋지요.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것은 “이미 자유의 영역에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제 걱정할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 육체의 기회를 삼는 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육체로 했다는 것이 어디에서 어느 경우에 발각되는가? 율법이 가까이 갈 때 육체의 일이 드러납니다. 법이 오게 되면 갑자기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면서 마음이 심난해 집니다. ‘지켰다. 혹은 못 지켰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아주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쉽게 말해서 욕심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죄를 낳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분해해 봐야 됩니다. 욕심을 분해해 보면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선과 악을 나눕니다. 자기는 무조건 선한 쪽에 속하고 자기 타입이 아닌 것은 무조건 악한 쪽에 속하죠. 예를 들면 자기는 화상을 입지 않았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이 화상을 입은 것을 보면서 측은해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고소해 합니다. ‘나는 화상을 안 입었는데 너는 어깨에 화상을 입었군. 참 안되었다.’
그 다음에 자기는 빨간 옷을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은 검은 옷을 좋아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빨간 옷은 자기가 좋아하니까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됩니다. 다음의 예는 자기는 개고기를 안 먹어요. ‘어떻게 애완용으로 기르는 개고기를 식용으로 먹을 수가 있어?’ 그러면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나는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사람으로도 안 본다’는 이 말은 ‘나는 개고기를 안 먹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쌍커플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쌍커플이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쌍커플이 없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겠지요. 만일 자기가 경상도 사람이라면 경상도는 좋은 편이고 전라도는 나쁜 편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기의, 자기의 의로움을 위해서는 무엇이 악하냐 하는 것을 세밀하게 쪼개고 쪼갭니다. 또 쪼개서, 쪼개면 쪼갤수록 자기는 선하고, 선하고, 선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확인받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여자 다 괜찮은데 똑똑한 여자는 용서가 안 된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똑똑한 여자는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 말이죠. 그래서 ‘똑똑한 여자를 아침부터 만나면 이유 없이 기분 나쁘더라.’ 이유 없이 기분 나쁘다는 말은 아예 차에 치어 죽든지 망해버리라는 말입니다. 똑똑한 여자가 망하고 저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똑똑하지 않은 나는 자동적으로 신의 츅복을 받는 자아인 것을 확인할 수 있겠지요.
이것은 아담으로부터 타고나는 겁니다. 이 작업을 하루에 얼마나 할까요? 적게 잡아서 24시간 합니다. 아침에 눈뜨면 시작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집 같은 경우는 설거지를 한 가족과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가족으로 나뉩니다. 제가 설교 중에 예화를 드는데 제 아내가 부탁해서 제가 음식쓰레기를 버린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난 뒤에 어떤 집사님이 약간의 화가 난 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내 남편에게 남 보기에 부끄럽게 음식 쓰레기를 버리도록 하는 일이 없다. 아무리 뭐 해도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쓰레기를 버립니다”고 말입니다. 그게 뭡니까?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신(?) 목사님이 반바지를 입고 음식쓰레기를 버린다? 그분 보기에 이것은 도대체 앞뒤가 안 맞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바로 육체의 소욕입니다. 육체의 소욕이란 타고난 성깔 그대로 발휘하는 것이 육체의 소욕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깔, 나는 무조건 선해야 되고 나의 타입이 아닌 것은 무조건 악하고 망해야 된다고 여기는 그 성깔이 육체의 소욕입니다. 그것은 처음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을 그때부터 나온 겁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인간이 있다, 없다?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내 타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생전 만나본 적도 없고 관계도 없는 탤런트 얼굴이 나오니까 보기 싫다고 채널을 돌려 버립니다. “아니, 저거 또 나왔네. 내가 텔레비를 안보면 안 봤지 네 얼굴은 안본다” 하면서 텔레비전을 꺼버립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한 이야기중의 한 대목입니다.
사람이 제일 난처한 것이 뭐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대상한테서 도움을 받을 때 참 난처합니다. 그럴 때는 표정관리가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다른 분의 이야기인데, 강의는 2층에서 하고 3층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살고 있었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이라고 고함까지 지르면서 강의를 했는데 돌아오려고 보니까 타이어가 펑크가 났더랍니다. 자기교회 교인들은 아무도 안도와 주는데 그 여호와의 증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돕더라는 것입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주의 은총이라 해야 할지….
옛날 봉화에 살 때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수도까지 끊겼는데, 뒷집에 사는 안식교인이 자기 집에서 호스 연결해서 물 대준 일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이단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내 타입 아니라고 갖다 버린 그들마저 주님께서 건사하시고 마리 아셨다는 입장에서 부르시고 구원할 때, 자동적으로 나는 주님의 자유의 훼방꾼이 됩니다.
내가 꼴 보기 싫은 것을 주께서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했다는 겁니까? 성령을 따라서 행한 것이 아니고, 자유를 따라서 행한 것이 아니고 내 육체의 소욕이 작동하는 대로 했더니만 주님의 숙제를 내가 방해한 방해꾼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 일이 비일 비재합니다. 매일 같이 그런 일이 생겨나고 쉴 새 없이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벗어납니까?” 이것은 하나의 공식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혹은 아니다’의 표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일의 끝이 ‘감사 합니다’로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짜증납니다’로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소매치기를 했는데 순경한테 걸렸다. 짜증난다.’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소매치기 하다가 걸리고 나서 ‘주여, 감사합니다. 저보고 인간되라고 이렇게 경찰 손에 잡히게 하셨군요’라고 감사하게 되면 소매치기 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일이 뭐냐? “범사에” 그 다음에 뭐죠?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그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나 오늘도 소매치기 안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칼빈은 이런 것을 잘 몰랐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명령들을 가지고 뭐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성경대로 하시면 그것이 착한 일이 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하지 말아야 되는 나쁜 일도 많이 있지만, 나쁜 일도 아니고 착한 일도 아닌 중간 것도 많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어디로 피신하느냐 하면 나쁜 일도 아니고 좋은 일도 아닌 중간으로 다 피신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을 살아보세요.
전에는 착한 일이라고 우겼던 그것이 인생을 더 살고 보니 세상에, 그것이 내 타입으로 움직였던, 내 타입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비를 베풀어 놓고는 마치 사랑을 베푼 것 인양 호도했던 철없던 지난 세월이 후회스럽지요. 내 육체의 소욕대로 해놓고는 마치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은 것 인양 그렇게 과시했던 그 기억들. 그래서 결론은? 우리가 살아갈 때 살아 있는 동안은 하루라도 한시라도 내 육체의 소욕 아닌 것이 한순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있는 대로 ‘육체의 소욕대로 살지 말고 성령을 좆아 행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라고 나올 텐데, 성령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고 주님과 상대합니다. 여기 떡이 하나 있는데 제가 성령입니다. 말로 하면 어려우니까 쉽게 하기 위해서 연극으로 해야 됩니다.
어린이 한분이 여기 있고 저는 성령인데 성령님은 이 애 하고 상대하지 않고 누구와 상대한다? 예수님과 상대하죠. 예수님이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을 좆아 행하라”고 했지요, 이것이 말씀(떡)입니다. 성령이 이렇게 그냥 집어서 어린이에게 먹여 버립니다.(성령의 대역인 목사님이 말씀으로 놓여져 있는 떡을 집어서 어린이의 입속에 그냥 집어넣어 버린다) 내 말을 지켜줘 그게 아니라 성령은 누구를 바라본다고요?
그러면 이렇게 먹게 된 영광은 성령영광이 아니고 누구 영광? “주님의 십자가의 영광으로 내가 떡을 먹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은 주님을 증거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시기를 “내 뒤에 보혜사가 오는데 그 보혜사는 다른 것은 못하고 예수님께서 행한 것만 그대로 죄인들에게 적용시키는 쪽으로 일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6:13-15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예수님 행한 것, ‘예수님 수고하셨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그것을 그대로 미리 아신 자를 위하여 성령께서 예수님의 보혜사 역할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에 의해서 떡을 먹고 나면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주여 왠 떡입니까? 나는 내 타입이면 무조건 좋아하고 내 타입이 아니면 무조건 다 싫어하는 육체의 소욕체의 소욕대로 살았는데 이것이 웬 떡입니까?” 하면서 “이것이 전부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할 때, 그 순간을 찰칵 하고 사진 찍으면 8장의 사진이 그대로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 할 법이 없느니라.”
이것은 누구 힘으로 끊을 수 없습니까? 내 힘으로도 안 끊어집니다. 다른 사람도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것을 끊을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집어 넣어버렸습니다. 누가 말립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에 나에게 이런 혜택이 오다니!’ 하고 있는 그 모습이 온유이고, 형제우애고, 양선이고, 그게 참음이고, 자비이고, 충성이고, 절제지요.
이것을 한꺼번에 다 끌어 모으면 “범사에 감사하라”입니다. 애가 아프더라도, 집에 불이 나더라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집이 내 집도 아니고 그 애도 내 애도 아니고. 이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더 돕기 위해서 안산강의 중에 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자유의 영역은 산정상입니다. 아주 높은 산,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 높은 산입니다. 이 자유의 영역은 미래의 영역입니다. 미래에 이렇게 될 겁니다. 현재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과거, 다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의 영역에 속한 자는 “미리 아신 자”에 속했기 때문에 무엇까지 보장을 받는가? 영화롭게 되는 것까지 보장 받습니다.
미리 이 자리에 서서 소급해서 현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새삼스럽게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로서 육체의 소욕이 있더라도 그 육체의 소욕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 아닌 것은 무엇인가? 현재 여기, 산 아래 있는 나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겁니다. 자꾸 열심히 자기 자신을 밀어 올리는 겁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보통생활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19세기의 시를 암송했는데,
「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너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오늘은 항상 우울하지만 마음은 항상 미래에 있는 것 지금의 모든 날은 다 사라져 버리지만 그 때가 되면 사라진 그 날이 그리워지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은 미래에 있는 것.” 이 시의 문제점은 계속해서 10년 전에 한 그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되지 못하고 ‘구원될 걸, 아마도?’ 하는 식으로 계속 시간을 뒤로 미루는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나중이 되면 뭔가 해결될 것처럼. 어린이가 어른이 되면 착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영악스러운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인간성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어른이 되면 그 인간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는 죄 아니라고 여긴 것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 이것까지 나쁜 짓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열심히 일해서 얻은 대가는 건전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안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구나. 얼마나 건전하게 돈을 벌었는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돈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그 것 자체가 이미 주의 말씀에 위배되는 육체의 소욕이구’라는 것을 우리가 안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 때 그 아는 그것을 찰칵, 사진을 찍으면 그것이 뭡니까? 그것이 양선이요, 온유요, 형제우애요, 절제요, 오래 참음 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알면 성령의 열매가 아닌 것이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의 인줄 알면서 그 모든 것이 육체의 일이 됩니다. 이제는 자기의 라고 주장하는 육체의 열매에 어떤 것이 있는가를 봅시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유업이란 상속이라는 말입니다. ‘하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내가 행해서 얻는 나라가 아니고 아무것도 안했는데 상속되어서 받을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받아서 들어가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살만한 사람이 되려면 뭘 알아야 됩니까? ‘나는 이러 이러한 인간이었음’을 자인해야 됩니다.
사람이 죄 인줄을 모르면 자기 정당화를 하게 되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강도짓을 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 내 주특기인 것을,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서 죽으신 것을 보고 그게 내 죄인 줄을 알 때, 그것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고 바로 그것이 하늘나라 상속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살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늘나라 들어갈 사람답게 살아야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 들어갈 사람답게 사는 것이 뭐냐? 내가 내 힘으로는 죄밖에 짓지 못한다는 것을 알 때 그때 십자가가 드러나고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씀을 뺐다고 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런 성령의 열매와 육체의 열매를 빼버리면 우리는 뭐합니까? ‘나 구원받았다. 끝! 나는 이제 내 맘대로 산다.’ 이렇게 됩니다.
이게 바로 13절에 있는 대로 ‘자유를 줬는데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뭘 알라고요? 우리가 이렇게 살던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 말씀대로 밝힐 때 구원받은 내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신 십자가를 자랑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어디에 못 박았습니까? 이거 중요합니다. 어디에 못 박았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우리의 형틀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원래 누가 죽는 형틀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시는 형틀이 십자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하여 그냥 공동묘지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불신자가 다 같이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의 육체가 죽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공동묘지가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양쪽 다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냥 보기에는 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 같아도 한쪽은 그냥 자연스럽게 죽고 한쪽은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간주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누가 접선합니까? 이미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가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다리고 있다가 십자가 자기 죽음까지 인도합니다. 인도하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되면 우리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공로 덕분에 우리가 주님의 이루신 자유의 영역(롬 8:29,30)이 몽땅 우리의 상속으로 되는 겁니다.
안산에서 식사를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불교의 자기부인과 기독교의 자기부인이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불교에서도 자기를 부인하라는 소리를 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죄인이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에서 나와서 무로 간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과 다르잖아요. ‘이것이 오렌지인데 이 안에 아무것도 없어’ 와 ‘이게 오렌지네’ 하고 다르잖아요. ‘우리 안에 죄가 가득하다’는 것 하고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미련두지 마라.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여, 죄인입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과 분명히 다르지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증거 하려면 우리가 죄인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하늘나라는 아들의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스러운 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겁니다. 토기장이가 우리를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은혜의 그릇으로 만든 겁니다(롬 9:21). 지옥 가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십자가 안 믿는 꼴좋다!’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지옥에 가야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불신자들이 들으면 사람의 존엄성과 인격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돌멩이가 날아옵니다. 그래서 돌멩이에 맞아 죽은 분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사람을 모독해도 당신같이 그렇게 완전히 짓밟는 사람은 첨 봤다”고 나옵니다. 잘 못 들어서 그렇지요. 첨 봤다는 그 말은 그동안 이야기를 해도 듣기 싫다고 듣지 않다가 그때서야 들은 거지요.
여러분도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기분 나쁘십니까? 제가 여러분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이야기는 없다고 봅니다. 왜? 내가 나를 부담지우는 것에서 자유로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인간되고자 하는 그 부담에서 자유로워졌잖아요. 주님한테 고맙다고 해야 됩니다.
꼬깃꼬깃 내가 나를 안 놓치고 엄마가 자식을 키우듯이 합니다. 아가씨가 시집가기 전에는 성가대 하고 교사하고 이런 저런 봉사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지만 시집가고 나서는 자기애 밖에 몰라요. 모든 관심사가 내 새끼 밖에 몰라요. 예수고 뭐고 없고 자기 새끼 밖에 몰라요. 지독한 자기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 때 과도하게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푼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과도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평소에 내가 나만 챙기기 때문에 ‘주님은 너무 심하게 용서 하십니다’라는 의아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보고 그냥 좋아라고 주신 사랑이 아니고 ‘더 이상 네 생각 안 해도 된다’고 우리가 우리 생각하는 부담에서 떨쳐버리기 위해서 그런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거예요. 애가 “엄마, 배고파. 맛있는 자장면 … ” 이러고 있는데 엄마가 전화를 걸어서,
“거기 중국집이죠? 팔보채, 난자완스, 탕수육, 쟁반짜장 … 얼른 갖다 주세요.” “엄마, 난 그냥 자장면이나 먹으면 되는데 …” “가만있어. 이것 다 먹어라.” “엄마, 이거 너무 과도해.” “네가 과도하다고 여긴 것은 너 배고픈 것만 생각했지 너를 사랑하는 엄마 입장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너한테는 과도하게만 보이는 거야.”
앞으로 입만 떼기만 해봐라.
“엄마, 용돈!” 은행에서 26억 가져와 버립니다. 우리는 평소 습관이 우리 자신만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하심을 너무나 과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날 위해서 내가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마땅히 줄 수 있는 사랑을 마땅히 공급받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고린도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는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뒤에 붙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들으면서 궁금해 할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는데 문제는 진짜 입니까? 혹시 그냥 위로삼아서 해주는 조작된 이야기 아닙니까?”
갈라디아서 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나옵니다. 우리 같으면 ‘나 구원받았다’고 촐랑대면서 자랑할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 구원 받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십자가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분명히 2000년 전에 터졌지요?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다 그대로 진실합니다.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해석할 때 절대로 십자가쪽으로만 해석해해야 됩니다. 십자가만 자랑해야 되는데 거기에 다른 것이 곁들여지면 성경해석이 전부다 조작된 것이고 엉터리 해석입니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식으로 사도바울이 성경을 썼기 때문에 이 성경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만 풀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같은 성령 받은 사람끼리 의사소통이 되려면 사도바울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경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앞에 다른 이야기를 잔뜩 해 놓고도 그것이 어디로 통한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맞잖아!’라는 쪽으로 나왔다면 우리도 동일한 성경을 보면서 ‘그러니까 십자가 맞잖아’라는 쪽으로 해석이 되어야 사도바울과 같이 한통속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가 사도바울과 같이 되면 우리한테는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마귀가 하는 말이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누가요? 마귀가! 어떤 목사는 사도바울을 모독하는데 마귀보다 더 못합니다. 마귀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아요. 그 말은 사도바울 같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마귀가 볼 때에 우리를 성도로 안 본다는 뜻입니다.
요즘 뉴스에 신정아 사건이 떠들썩하게 나오면서 그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해도, 저는 세상을 볼 때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예수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일대학을 나왔든 그렇지 않든 간에 안에 예수가 없는 것은 사람도 아니라는 겁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개고기를 먹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소욕이죠. 그런데 갈라디아서 6:14에 의하면 성령에 의해서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성경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육체의 소욕을 위해서 성경해석을 한 거예요.
‘자, 한 십억을 가져야 산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방법이 뭐가 있습니까? 기도하는 방법이 있지요. ‘주여, 10억을 주옵소서.’ 그런데 앞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한 20만원만 주옵소서. 20만원 없으면 나는 죽어버린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건 내 타입이 아니야.’ 20만원 위해서 기도하고 20만원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내 타입이 아니고 적어도 10억이 있어야 내 타입이 되는 거예요.
이게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기도를 해 온 거예요. 그런데 고맙게도 주께서 그 기도를 전혀 안 들어주는 것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 목사님,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맘대로 기도하세요. 왜? 육체의 소욕이니까.
기도할 때 솔직한 게 제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솔직한 것을 수정해 봐야 그것도 솔직한 거니까. 솔직한 것을 수정해 봐야 주께서 속아 넘어가실 리가 없으니까. 솔직하다는 말처럼 솔직하지 않은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솔직해도 껍데기처럼 벗겨보면 덜 솔직한 것이 또 남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라고 말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않은 말 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솔직하지 않은 층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솔직하게 한다고 하지 말고 ‘지금 내 성질대로 한다’고 하면 맞습니다. 흔히 되도 않는 말중에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 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취중객소리’만 있습니다. 본인도 진담인지 뭔지도 몰라요. 내일 되면 또 다릅니다. 매일 같이 가짜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종잡을 수 없어요.
다만 아는 것은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도 상관없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 다른 불신자들은 공동묘지에서 죽고 화장터에서 죽지만 우리는 죽는 장소가 어디? 십자가입니다. 어떤 분은 국립묘지에 묻혔다고 자랑스러워하는데, 어디에 묻히든 예수 없는 것은 인간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있어야 마지막 때 무덤에서 나올 때 부활할 때 영광스러운 부활로 나오는 겁니다(요 5:28,29).
영광스러운 부활은 누가 이룬 겁니까? 그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주님의 아이디어입니다. 주님의 숙제고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바쁜 일상을 사는 가운데 비가 내리는 이 금요일 밤에 주께서 몰아넣어서 모인 것은 쓸데없는 것 때문에 우리의 청춘과 세월을 다 지새우고 있다는 것을, 우리 육체의 소욕 때문에, 내 좋아하는 타입을 얻고자 평생을 허비하고 낭비해 왔다는 것을 다시 알아서 앞으로는 살면서 낭비하면서도 낭비인줄로 아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되면 내일 또 낭비할 것인데 제발 내일 부터는 ‘낭비구나. 헛된 수고를 하는구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을 아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90이 되었다 해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주름진 껍데기밖에 남지 않아요. 아무 쓸모도 없어요. 20대의 그 물기가 90이 되어 다 빠지면 쭈글쭈글 합니다. 아무리 미인 소리 들어도 80이 넘은 미인은 못 봤어요. 진솔한 내 모습은 흉측한 모습으로 이 세상 은퇴를 합니다. 이미 그것은 예상된 겁니다. 정과 욕심은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80이 되든, 90이 되든 십자가외에는 자랑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쁘다 보니까 십자가 잊어버렸습니다. 바쁘다 보니까 사소한 일인지 아닌지 분간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바쁘다고 성경 안보다 보니 작은 일에 목숨 걸었습니다. 내 육체의 소욕에 우리의 운명을 거기에 걸었고 그것이 성공인지 알았습니다. 이런 촐랑거림과 부질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자유가 덮치니 그 모든 것이 용납이 되고 미리 아신자가 영화롭게 되는 것까지 우리가 알았사오니 이제는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