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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제29강 071109 / 왜십자가인가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갈라디아서

제29강 071109 / 왜십자가인가

정인순 2010. 12. 30. 23:10

갈라디아서 제29강 071109 갈라디아서정리, 왜십자가인가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7서울/서울071109a갈라디아서정리.mp3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7서울/서울071109b왜십자가인가.mp3

 

 

녹취:오용익

서울071109a갈라디아서정리

갈라디아서 제 29강

(이 근호목사, 2007년 11월 9일 a,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마지막 강의입니다. 그동안 갈라디아서 6장까지 공부했는데 다 공부하고 난 뒤에 남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나 갈라디아서 다 공부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데?”
“몰라.”
“들은 게 있을 거 아냐?”
“몰라.”
“강의 내용이 있었을 거 아니냐고?”
“몰라.”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더냐고?”
“몰라.”

이렇게 되면 갈라디아서를 새로 시작해야 되겠지요. 갈라디아서는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갈라디아라는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있는 교회, 성도지요, 교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이 복음이라는 선물을 탁, 깨 보니까 그 안에서 뭐가 톡, 튀어 나왔어요. 거기서 십자가가 톡, 튀어 나왔어요.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라는 것이 십자가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복음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지붕에는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있고 그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가 새로 생겼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뭐가 없는 사람들일까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사람은 나중에 천국에 가게 되고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나중에 지옥에 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쁜 소식, 복음을 이야기 했는데 그 안에는 십자가가 들어 있고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었습니다’입니다. 그 ‘죽었습니다’가 덮여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천국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이게 가마솥인데 이 가마솥위에 솥뚜껑이 붙어 있습니다. 솥뚜껑을 가지고 가마솥을 덮습니다. 이 솥뚜껑이 십자가라고 한다면 여기 덮여있는 사람들이 성도들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자기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뭘 덮어 쓴 사람이 성도입니다. 솥뚜껑과도 같은 십자가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런데 이 솥뚜껑 밑에 개미가 한 마리 있다고 합시다. 이 개미가 자기를 덮어씌운 솥뚜껑을 밀어 낼 수 있습니까? 못 밀어 내지요. 한번 십자가 솥뚜껑이 우리를 턱, 덮어 버리면 우리 힘으로 십자가 밖으로 나오려고 애를 써도 나올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나올 수 없습니다. 솥뚜껑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솥뚜껑아래 있는 개미는 자기 힘으로 그 솥뚜껑을 열어 제치고 그 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덮어 쓴 사람은 죽음 이후, 영원토록 십자가 안에 있어서 그 사람은 지옥은 구경 못하고 앞으로는 천국만 구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왜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갑니까? 솥뚜껑(십자가)때문에! 솥뚜껑이 날아와서 덮치니까 지옥 갈수가 없어요. 이 솥뚜껑을 가지고 두 글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은 용서 해주시는 사랑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솥뚜껑을 주셨다. 그 솥뚜껑의 이름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는 사랑이다. 그 사랑의 솥뚜껑이 우리를 덮쳐 버리면 우리는 마치 나약한 개미와 같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열어 제치고 바깥으로 도망칠 수가 없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 계속해서 용서, 용서, 용서 해주시는 사랑을 받아서 나중에 천국에 가게 된다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한테 직접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오늘로서 갈라디아서를 끝낸다고 했습니다. 1장부터 6장까지 갈라디아서 공부를 다 했는데 혹시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갈라디아서 공부를 다 해보니 어떤 내용이더냐?”
“몰라!”

이러면 안 되지요? ‘몰라’대신 ‘알아’라고 해야지요. 하늘에서 웬 솥뚜껑이 날아와서 덮었는데 그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사랑이라고요? 날마다 우리를 용서해서 마지막에 천국으로 데려가는 사랑, 그 십자가라는 사랑이 우리를 인도해서 천국으로 데려간다는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의 내용입니다.

혹 누군가 갈라디아서에 대해서 묻거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받아서 천국 간다, 이것이 그 내용이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그 이야기를 들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에 내가 그 사랑을 거부한다면 어쩔래? 나는 그 사랑 안 믿어, 나는 고집이 세서 그 사랑을 발길로 차버리겠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 사랑은 우리보다 더 세기 때문에 아무리 발길질을 해도 그 사랑이 우리를 떠날 수가 없어요. 여기까지는 잘 아시겠지요?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1-14까지 관련된 이야기인데 아주 어려운 대목입니다.

솥뚜껑 이야기 더 해봅시다. 여러분은 여기서 그냥 살아요. 공부하고 직장 다니고, 목사님은 설교하고 그냥그냥 살아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뭐가 날아왔다고 했습니까? 웬 솥뚜껑이 날아와서 덮쳤습니다. 여기 안경집이 있는데 제가 제 오른쪽에 안경집을 던졌습니다. 주인이 그 안경집을 떨어뜨리고 나니까 안경집이 떨어진 그 동네가 천국 가는 동네입니다.

제가 아까는 십자가를 이야기했는데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그냥 공부하고 밥 짓고 빨래하고 있는데 솥뚜겅이 날아왔습니다. 그럴 때 이 바깥에 있는 친구 a가 말하기를, ‘야, 너는 어떻게 천국 가는데?’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솥뚜껑 아래 있는 친구 b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한테 용서받아서 천국 간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a라는 친구가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한테 용서를 받았느냐, 그 말이야’라고 묻습니다. 그때 b라는 친구가 하는 말이 ‘몰라’라고 하면서 ‘그냥 주님께서 이렇게 나를 툭, 던졌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는데 주님의 사랑의 솥뚜껑이 와서 나를 덮쳤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a라는 사람이 ‘와, 답답해라. 내가 묻는 요지는 네가 어떻게 했는데 하나님의 솥뚜껑이 와서 너를 덮치게 되었으냐, 하는 거야. 그것을 이야기 해 달라’고 합니다. b라는 사람이 끝내 ‘몰라’라고 합니다. 툭, 던지니까 여기 있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하면,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선악과를 따먹은 그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고 부터는 항상 이유를 따지기를 좋아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장래에 이렇게 될까? 이렇게 하면 나중에 이렇게 될거야’라고 항상 이유를 따졌어요. 이것이 또르르, 굴러갑니다. 이것이 왜 굴러갈까요? 내가 굴렸으니까 굴러갔지요. 그러면 내가 왜 굴렸어요? 내 팔이 있으니까 굴렸지요. 왜 내 팔이 굴립니까? 내 머리가 팔에게 굴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왜 머리는 팔에게 그렇게 굴러가게 했습니까? 그것은 내 맘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자꾸 이유를 따지는 거예요. 그렇게 이유를 따지는데 정작 구원받는 것은 나로부터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힘들 때, 내가 왜 이렇게 힘들까, 이유를 따집니다. 원인을 찾아내어서 그 원인으로 인해서 내가 되었다는 그러한 틀, 그러한 그물구조에 우리가 갇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는 이유 없이 구원하는데, 우리가 평소에 하는 생각들은 자꾸 이유를 캐내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왜 쌍꺼풀이 없을까? 수술을 안했기 때문이구나.’ 수술을 하면 되는데 수술은 공짜로 해주지는 않습니다. ‘수술비 얼마? 50만원? 의료보험은 안 되고. 50만을 가지고 수술을 하면 나에게도 쌍꺼풀이 생긴다. 그러면 50만원을 어디서 구하지?’ 또 이유를 구해요.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50만원을 벌어야겠다. 한 달 동안 번 50만원을 가지고 병원에 가서 그 돈 가지고 쌍꺼풀 수술을 하게 되면 나에게도 쌍꺼풀이 생긴다. 옳지,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야지.’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만 컵을 깨뜨렸습니다. 주인이 ‘나가라. 너 같은 애에게는 일을 못 시키겠다’고 합니다.

자, 아르바이트 하려던 것이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50만원 벌려고 했던 것도 안 되고, 그래서 병원에도 못가고, 병원에 못가니까 쌍꺼풀 수술 못하고 그러니 아르바이트를 안 하면 안 된다. ‘주여,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는 그런 것을 묻지 않고 구원하는데 우리는 버릇 들기를 ‘반드시 이유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왔다’고 들어서 자꾸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공녀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영국의 좋은 학교에 다니던 소녀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인도에서 하던 광산업이 망해서 그 때부터 선생님에게 미움을 받아서 다락방으로 거처도 옮기고 불쌍하게 울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소공녀의 아버지 직업은 왜 꼭 광산업입니까?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소공녀는 꿋꿋하게 살아가죠.

신데렐라를 아십니까?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문제 나갑니다. 왜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을까요? 1) 신데렐라가 까불었다. 2) 신데렐라가 말을 안 들었다. 속이 타서 엄마가 죽었다. 3) 신데렐라가 밥을 잘 안 먹었다. 4) 신데렐라가 달리기를 너무 잘했기 때문이다. 몇 번입니까?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 상관없습니다.

신데렐라가 어떤 행동을 했든지 간에 아버지는 이미 죽었습니다. ‘자기 탓이 아니다’는 말, ‘내 탓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어른들은 압니다. 어른들은 평생 동안 마음고생 하는 이유가 뭐든지 자꾸 원인을 캐서 ‘내가 이렇게 못사는 것은 내 탓이다, 내 탓이다’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가 우리 교회, 성도에게 하는 이야기는 우리(성도)의 옛 버릇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갈라디아서 6:12에 있는 대로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는 대목인데 이 대목이 무지하게 어렵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신데렐라의 아버지가 죽은 것은 신데렐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 너는 여자로 태어났니? 너 나쁜 짓 했구나.”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나쁜 짓을 하면 여자로 태어나고 착한 일을 하면 남자로 태어납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뜻은 이 겁니다. “얘야, 너는 이유를 달지 마라.” 그런 식으로 창조를 했는데 바보 같은 인간들이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바보짓을 하면서 아직까지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내가 못사는 것은 교회에 헌금을 적게 해서 그렇고, 내가 못사는 것은 뒤에서 목사를 험담해서 그렇고 내가 못사는 것은 교회 봉사를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자꾸 이유를 캐냅니다. 반대로 ‘내가 이만큼 사는 것은 내가 훌륭해서 그렇고 내가 이 만큼 재산을 모은 것은 내가 성실해서 그렇고, 내가 이만큼 잘된 것은 기도를 열심히 해서 그렇다’고 자꾸 이유를 댑니다.

아무 이유 없습니다. 이것을 크게 써야 합니다. 이 안에서는 “아무 이유 없음.”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했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이유로 제시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환영한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받은 겁니다. 듬뿍 받은 겁니다. 아이스크림을 어디에 담아 줍니까? 끝이 뾰족한 콘에 아이스크림이 담기는 겁니다.

그 때 콘이 하는 말이 “네가 뭔데? 왜 내 위에 담기는데?” 그러면 아이스크림이 “네가 왜 이유를 달아? 내가 담기면 너는 그냥 담기면 그만이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로마서 9장에, 긍휼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릇은 뭐가 담기든 담긴 것을 그냥 담긴 채 있으면 그만이지 ‘주님, 왜 저를 사랑하는데요?’라고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왜 나를 축복하셨을까’라는 식으로 이유를 찾으면 안 됩니다.

“목사님, 고함지르지 마세요. 이유 안 찾습니다.”
“이유, 안 찾지요?”
“예. 이유 안 찾습니다.”

일주일 뒤에, 이유를 안 찾는 사람의 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주여, 왜 하필이면 우리 애가 교통사고를 당해야 합니까?” 대번에 또 이유를 찾습니다. 자기가 뭡니까? 콘이죠. 의존교회에서 공부할 때는 “이유 달지 마세요.” “예, 우리는 이유 안 달겠습니다. 그냥 공짜로 사랑받는 것은 옛날부터 다 아는 이야기인데 왜 자꾸 우리보고 모른다고 무시하는 겁니까?”라고 하면서 다짐까지 했건만 일상생활에서 조금만 자기 예측대로 안 되면 따지고 듭니다.

“하나님이여!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불상사를?”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따질 거야? 또 나한테 따질 거야? 지난번에 안 따지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따져.”
“주여, 저는 왜 이렇게 얼굴이 동글동글합니까?”
“따질 거야, 안 따질 거야?”

이 따지는 버릇, 아주 나쁩니다. 지금부터 왜 사람들은 그렇게 따지기를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가지고 살아가는 습관을 다 뒤집으려고 하니 이렇게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사람들이 무엇을 따먹었다고 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지? 나는 무엇을 하지? 나는 어떻게 되지?’ ‘나는 어떻게 될까’라고 왜 묻습니까? 궁금해서 묻고 싶어서 묻는 겁니다. ‘나는 앞으로 5년 되에 어디에 가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묻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것은 하나님 소관이지 자기 소관이 아닙니다. 여기 보세요. 안경을 이렇게 툭, 던졌습니다. 그러니까 안경이 하는 말이 ‘어?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런데 내가 3초 뒤에 여기 있을까? 저기 있을까?’ 주인이 또 들어서 던집니다. 안경이 또 ‘어? 내가 왜 여기 있지?’ 합니다. 주인이 “묻지 말라니까!”

하나님이 맘대로 인도하는데 인도하는 대로 가자마자 항상 생각하는 것은 ‘나는 왜 여기 있지?’라고 자꾸 묻는 거예요. 그 버릇이 나쁜 버릇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그 묻는 것이 죄입니다. ‘내 친구는 50평짜리에 사는데 왜 나는 왜 20평짜리 아파트에 살까?’ 그것을 묻지 말라니까! 그것을 묻는 것이 죄입니다.

‘나는 왜 키가 작을까?’ 그냥 콘인데. 갈라디아서를 하고 로마서를 떼고 에베소서를 하고, 다음에는 에베소서를 할 것인데요,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교회를 20년 다니고, 복음을 알고 백날 공부해도 근본이 바뀌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콘에 불과하다는 것, 내가 아이스크림을 골라잡을 그런 권리가 없다는 것, 그쪽으로 인간자체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이 채우는 대로 나는 채워지고, 주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나는 가게 되고, 주님께서 그만 살아라, 하게 되면 나는 그만 산다. 왜?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나를 가지고 노니까. 그래야 선악체제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의 체제 말고 다른 체제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두 가지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이 건물 A, 이것이 건물 B입니다. 건물 A안에서는 ‘원인-결과-원인-결과-원인-결과’의 사슬로 살아갑니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다시 그 결과가 원인이 되는 식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부모를 잘 만나서 그렇다. 내가 아픈 것은 그때 차가 달려와서 나를 받아서 그렇다.’ 전부가 다 원인-결과로 이어져 있어요.

‘내가 그때 키가 작았던 것은 운동을 너무 안하고 집에만 틀어 박혀 있었기에 키가 안자라서 그랬다. 내가 운동하면 키도 자라고 뱃살도 빠진다’는 식이죠. 이 그물이 누가 쳐놓은 그물이냐 하면 악마가 쳐놓은 그물입니다. 그런데 B라는 건물은 ‘나는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여기 있지?’ 하면 여기서 사랑이 날아옵니다.

“저기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빨리 달려가거라.”
‘나는 왜 이 학교밖에 못 다니고 있지?’ “저기 또 사랑(용서)이 필요한 데가 있다. 빨리 달려가거라.”
‘나는 왜 고기 낚는 어부가 되지 않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을까.’
“저기 베드로가 까분다. 사랑은 달려가거라.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 요한은 언제까지 살겠습니까?”

“저기 또 사랑이 필요한 놈이 있다. ‘베드로야, 저 사람이 어떻게 살든지 너는 알바 아니다. 너는 사랑 때문에 원치 않는 죽음으로 달려가리라’.”
“어떻게 하면 내 아이가 공부를 잘 할 수 있습니까?”
“여기 또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 어서 달려가거라.”

여기(건물 B)서는 용서라는 그물을 자기 힘으로 뚫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 무슨 뚜껑? 용서의 솥뚜껑, 하나의 개미는 그 솥뚜껑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악마가 쳐놓은 그물이 선악과의 그물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다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그 원인이 선했으면 지금의 너는 선하고 그 원인이 악했으면 악하다고 했는데, 이런 선악의 그물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이쪽의 세계(B)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에덴에서 사람이 쫓겨난 이유가 선과악이라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생각했다는 그 자체가 그 이유이고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추방되었습니다. 추방되고 난 뒤에 계속해서 그 이유를 못 버리고 있어요. “목사님,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또 이유를 그렇게 대고 있어요. “예수를 믿으세요.” “저, 예수 믿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원인으로 해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결과를 나타내려는 것, 이런 식으로 구원이 된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 치매현상이 걸리면 그때 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인간은 이런 육적인 생각에서 탈출할수 없습니다. 만 날 이것만 생각합니다.

학생 같으면 ‘이번 달에 반에서 15등을 했다. 왜 15등을 했을까? 내가 공부를 너무 안 해서 15등을 했구나. 다음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5등을 해야지.’ 이렇게 한다고요. 그런데 똑같은 15등짜리 학생이 여기에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15등을 하게 했을까? 아, 이것을 물을 필요가 없구나.’

그러면 다음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 또 하나님이 주신 힘가지고 사는데 5등이 되었습니다. 15등 되었을때 친구들이 “야, 너 공부 열심히 해서 15등이 되었구나” 하니까, “아니야. 주님께서 15등 하게 했어.” 그 다음에 5등하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했어.” 5등을 하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했어.” 1등을 하니까 “이것은 내 힘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했어. 나에게서 원인을 찾지 마. 나는 주님께서 움직이는 것뿐이야. 여기에 던지면 여기에 던져지고 저기에 던지면 저기에 던져지는 것뿐이야.”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기서 복음을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당신같이 그렇게 하면 어느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하겠는가? 15등 하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데도 5등이 될 것 같으면 놀려고 애쓰지 꼭 5등이 되려고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15등 된 것이 아니고, 내가 게을러서, 라는 원인을 찾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원인을 안 찾으면 되는데, 원인을 찾다 보니까 또 다른 원인을 또 만들고 또 만들고 그러다 보니까 계속해서 나중에 5등 못하면 초조하고 불안해서 주님이 주신 은혜고 뭐고 다 놓치고 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를 끝내면서 과연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얼마나 이해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지금 원인 결과를 찾는 이런 틀을 벗겨버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되었단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솥뚜껑이 날아와서 구원된다고 했습니다.

그 솥뚜껑이 날아온다는 말은 솥뚜껑만 날아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 앞으로 될 일의 모든 것까지라도 그 모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못 벗어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12절에 보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니까 그 율법을 내가 원인이 되어서 그것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니까 그 율법 중에 하나가 뭡니까? 할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할례를 받게 하는 겁니다. 그 할례 받는 자가 나입니다. 내가 할례 받아서 할례 받는 내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주시는 용서가 아니라 내가 할례 받고 율법 지켰다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서 내가 구원된다는 선악적인 그물에 그대로 빠져있는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이것을 철폐하고 이것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이렇게 할례를 받는 이유가 십자가로 그냥 이유 없이 주시는 사랑이라 하면 이쪽 사람들이 자꾸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그 미워하는 것이 싫다는 거예요. 진짜 성도 같으면 ‘아하,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미워하는구나’라고 하면 될 터인데 ‘나의 어떤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미움을 받는구나. 그러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미움을 받지 않겠지’라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를 또 계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믿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할례라는 율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자,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이제 율법을 행했다. 이제 나를 안 미워할 거지?”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솥뚜껑은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은 솥뚜껑 없어요. 자기가 자기 머리에 쓸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해서 자기가 원인이 되어서 자기가 만들어 내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누가 죽었습니까? 내가 죽은 겁니까? 예수님이 죽은 겁니까? 예수님이 죽어서 십자가 아닙니까? 강의 제일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물론 나도 함께 죽지만. 예수님이 죽은 것이 십자가라는 말은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선악과 속에 있기 때문에그것은 죽은 놈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할례를 행해야지. 내가 율법을 지켜야지. 내가 뭘 행해야지’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그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아무 가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인-결과 그것을 자꾸 따지기 때문입니다.

“사도님, 할례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왜?”
“할례를 안받으니까 다른 사람이 율법을 안지켰다고 나를 향해서 욕을 합니다.”

사도가 하는 말이,

“사람들이 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는 원래 하나님 앞에 욕을 얻어먹을 그런 죄인이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말고 그런 죄를 용서한 것이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해봐. 그게 뭐냐?”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면 되었지 왜 자꾸 할례를 행해.”
“그래도 미움 받는 것은 싫습니다.”
“그러면 미움 안 받는 수가 있어?”
“있습니다. 제가 할례를 받으면(제가 하는 일이 원인이 되어서) 미움을 안 받습니다(미움안 받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너무 안타까워하면서 바로 그것이 십자가를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겁니다. 이제 갈라디아서를 다 끝내면서 지금 우리에게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유 없이 주어졌는데 왜 자꾸 자기 속에서 구원받는 원인과 이유를 따로 챙기고 만들려고 하는가, 그 말입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콘 위에 아이스크림이 덮이면 감사하면 될 터인데 자기가 콘 주제에 자꾸 맛있는 것을 찾아서 찍어 먹겠다는 겁니다. 자기는 콘이니까 아이스크림만 듬뿍 담으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콘 위에 아이스크림이 있으면 그 콘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감사합니다. 저 같은 것에게 이렇게 큰 영광을 주시다니요.’ 이렇게 살면 되는데 자기가 자꾸 아이스크림공장을 만들어 내려 합니다.

‘이왕이면 꽃을 하나 만들어서 달까? 꽃 아이스크림.’ 이거 하나님은 안 좋아합니다. ‘이번에는 별사탕을 달아볼까? 별사탕 아이스크림.’ 이거 하나님은 안 좋아합니다. 십자가사랑은 우리가 따로 첨가물을 드릴 필요 없이 100퍼센트 그것으로 구원받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저희 집은 너무 가난합니다. 부자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너의 소관이 아니고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됩니까?’라는 것은 내가 예상하고 예측하는 겁니다. 예상하고 예측하는 것 자체가 내 위에 있는 아이스크림으로 영, 성이 안차고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아이스크림 덮어씌우면 감사하고 부자면 부자대로 아이스크림을 덮어씌우면 감사합니다.

가난해도 십자가로 구원받고 부자 되어도 십자가로 구원받으면 밑에 있는 가난이나 부함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는 겁니다. 어떤 아주머니께서 미장원에 갔는데 머리가 잘 못나왔습니다. 자기는 어느 탤런트를 생각해서 했는데 이상하게 머리모양이 빠졌어요. 그럴 때 짜증을 냅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내가 미장원에 다녀오는 길인데 머리가 이 모양 되어서 머리 때문에 속상합니다.”

머리모양 안 나와도 솥뚜껑이고 잘 나와도 솥뚜껑인데 머리모양 안 나왔다고 지옥가고 머리모양에 의해서 구원이 철수됩니까? 그런 발상은 내 위에 있는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내가 영, 감사치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기를 ‘오늘 머리모양이 잘 안 나와서 속상하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머리카락, 그 아주머니 것이 아닙니다. 주님 것입니다. “그래도 천사님, 미장원 바꾸면 머리모양 잘 나옵니다.” 미장원 바꾸어서 모양 잘 나왔다고 해도 그것이 본인 것 아닙니다.

‘내 것 아니어도 좋으니까 이왕이면 예뻤으면 좋겠다.’ 그 예쁜 자아는 허구입니다. ‘나’라는 자체가 허구입니다. 이게 이해가 잘 안될 겁니다. 얼마 전에 제 친지 한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백 살 까지 사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장담할 수 없고 그렇게 장담하면 안 되지요.

‘주여, 오늘밤에라도 낙원에 보내 주신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라고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백 살 까지 살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나 말고 다른 나를 생각했습니다. 백 살 까지 사는 내 모습을 따로 내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콘인데 가짜 콘을 따로 자기가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콘이 있는데 가짜 콘이 생겨났으니까 이것을 점선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나’라는 인간이란 하나님이 던져준 나, 인데 던져준 나에 대해서 영 불만입니다. 그래서 상상하는 나를 가정했는데 요 나가 신데렐라입니다. 백 살 까지 살고 집이 열두 채 있고, 땅은 12만평쯤 되고 친구들은 3600여명쯤 되는 이런 것.

목사 같으면 교인들은 한 7000명 되고 외제차 타고 다니고 사택은 한 150평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 이것은 현재의 나가 여기 있는데 다른 나를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허구적인 나가 나타나서 진짜 나를 핍박합니다. ‘에라 인간아 나가 죽어라.’ 그런데 핍박당하는 인간이 나가 아니라 현재의 나를 만드신 예수님, 실컷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예수님이 나한테 욕을 얻어먹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멱살을 쥐고 ‘내 인생을 물어내라’고 흔들어 대는 겁니다. 흔들어 대는 그것이 바로 ‘나는 할례를 행해야 되겠다. 왜? 남들이 욕을 하니까.’ 예수님은 “너는 할례 안 해도 돼”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할례를 안 하니까 미움을 받습니다. 나는 미움 안 받는 나를 따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할례를 행했습니다”라는 것이 바로 12절입니다.

자꾸 원인과 결과를 따로 내 쪽에서 만들지 마세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주신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백날 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리 십자가, 십자가 백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엉터리 가짜 내가 진짜 주님이 던져주신 진짜 나를 이렇게 핍박하고 못살게 굴고 매일같이 자기를 때리면서 ‘나가 죽어라 이놈아, 남들은 이렇게 하는데 너는 왜 이것밖에 못하냐’라고 핍박하니까 날 위해서 죽으신 분이 나 때문에 또 죽게 생겼어요.

이래놓고 무슨 성도고 무슨 교인이며 무슨 집사 장로 목사입니까? 3500명 안된다고 따지는 목사, 재벌 안 되고 사업이 크게 안 된다고 따지는 장로, 이게 무슨 장로입니까? 자기가 따로 상상하는 나를 만들어 놓고. 성경말씀을 시시하게 보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속사정을 완전히 꽤 뚫어 봅니다.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따로 나를 만 날 상상한다는 것, 그것 없어져야 합니다. 그것 죽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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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071109b왜십자가인가

갈라디아서 제 30강 종강

(이 근호목사, 2007년 11월 9일 b, 서울의존교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솥뚜껑이 우리에게 덮쳤습니다. 덮치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꼼짝 못하고 십자가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우리 위에 덮쳐진 그 십자가가 뭐냐,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가 우리위에 덮쳤는가? 만약에 진짜 솥뚜껑이라면 그 밑에 있는 느낌은 무겁다, 단단하다, 숨이 막힌다는 식으로 나올 텐데 십자가가 덮치면 ‘왜 그 분께서 죽었을까’ 하고 나와야 합니다.

‘왜 주의 죽으심이 우리를 지배해서 우리가 천국 가는 겁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직장에서 일하면서, 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그런데 주님은 왜 죽은거지?’ 제가 열심히 강의하고 있으면서도 ‘그런데 주님은 왜 죽었는데요?’ 택시운전기사가 열심히 운전하면서 ‘손님 하나 더 태워야지’ 하면서도 ‘그런데 주님은 나같이 이렇게 성실하게 손님 태우고 택시기사 하는 나를 위해서 왜 죽으셨는데요? 택시 운전하는 그것이 무엇이 나쁘길래 죽으셨는데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진짜 십자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냥 모자 하나 쓴 것처럼 ‘이 신기한 모자를 쓰면 천국 가는 모자입니다. 이 모자는 절대로 벗어내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이 모자가 그냥 모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피를 흘리면서 덮어씌우니까 우리는 그 피가 자꾸 묻어가면서 ‘그런데 왜 자꾸 피를 흘리시는데요?’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피가 없으면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죄가 용서가 안 됩니다. 한 어린이가 나와 보세요. 자 여기 이 애가 냄새가 많이 납니다. 목욕을 잘 안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냄새가 나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모기약을 가지고 계속 뿌리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택시 운전 합니다. 택시 기사는 택시운전하고 설거지 하는 사람은 그냥 설거지 합니다. 15등하는 학생은 5등하겠다면서 공부합니다.

그러고 있는데 자꾸 뭐가 모기약이 뿌려지는 겁니다.

"왜 자꾸 뿌리는데요?”
“냄새나잖아.”
“무슨 냄새요?”
“죄 지었잖아.”
“설교하고 강의하는 이것이 왜 죄인데요? 맛있는 주스 마시는 이것이 왜 죄인데요?”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전체입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마음에 양심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이 양심과 법이 있는 이유가 지금 우리 맘속에 선과 악이 서로 대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과 악을 안다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나는 운전을 잘하니까 나는 착하다 그리고 운전을 안 하고 게으름을 부리면 나는 나쁘다 착한 사람 되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나쁜짓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점점 착해지기에 죽어서 좋은데 가고 살아서도 더 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쁜 짓을 하면 ‘나는 이런 것이 나쁜 것이라고 여기기에 나는 죄인이다’라고 단정하는 거예요. 제가 의존교회에서 많은 강의를 했습니다만 지금 제일 어렵고도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쁜 짓을 해서 이게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나는 벌을 받는다’는 이것이 바로 나쁜 짓이 되는 거예요. ‘내가 나쁜 짓을 했기에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되었다’는 그 생각이 원래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던져준 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래 의도한 사람이 아니고 아주 엉뚱한 사람입니다.

진짜 원래 의도한 사람은 갈라디아서 6:15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안 것이 죄가 되기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추방되었습니다. 그 자식들이 새끼 치는 식으로 낳고 또 낳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좋은 일 했으니까 벌 내리지 마세요. 내가 나쁜 일을 했으니까 착한 일로 메우겠습니다. 착한 일을 두 배로 했으니까 복을 많이 주셔서 다른 사람 다 망할지라도 나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자꾸만 엮습니다. ‘오늘 성경공부 참석했으니 이번 한주는 복에 복을 많이 더해 주세요.’ 이것은 옛 사람입니다. 옛날의 그 망해야 될 사람입니다. 지옥가야 될 사람입니다. 새로 지은 사람은 그런 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착한 짓이야. 이것은 나쁜 짓이야.’ 그것은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 양심의 소리가 문제가 됩니다. ‘양심대로 살면 나는 복 받아서 오래 살고 양심에 어긋나게 되면 나는 망해서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 내가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 이런 것은 하나님의 생각에 애초부터 없었던 마귀가 지어낸 엉뚱한 생각입니다.

“목사님!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으나 그 말대로 한다면 사람들을 다 게으름뱅이 만들 겁니다.” 이렇게 나오는 분들이 있는데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머리카락도 세시고 발걸음도 세시는 것을 아십니까? 방금 제가 몇 걸음 걸었습니까? 모르지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제 머리카락 몇 개입니까? 모르지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만든 새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상관없이 새 사람의 원리대로, 새사람의 원칙대로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 사람을 위해서 피 흘리신 예수님이 책임지고 구원하는 새로운 원리에 속한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예수 믿을 때 예수 믿는 일이 착한 일이 되어서 그 착한 일의 보상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그리 되면 성령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육체의 일이고 도덕, 양심상의 일입니다. 그 착한 일 중의 하나로서 ‘예수 믿기’ 라는 착한 일을 해서 그 착한일의 보상으로 천당 간다는 것은 옛사람의, 죄악 된 인간들이 했던 그 행세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매일 같이 없애버리면 남는 것이 있습니다. 없애버리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요? 그러면 그것은 구원 못 받은 사람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 합니다. 이제부터 예수 안 믿기로 해 보세요. “목사님, 이제부터 예수 안 믿습니다. 절대로 예수 생각 안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뭐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나를 주께서 십자가로 구원했다’는 이것이 남아 있어야 그게 새사람입니다. 내가 예수 안 믿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여러분을 덮어씌운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축축한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난 예수 안 믿기로 했는데 이건 뭐야? 어? 내가 예수 믿기로 했든 안 믿기로 했든 관계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내가 구원된다’는 그것이 바로 내가 원인이 되지 않고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구원해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누구를 증거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성령이 임해서 구원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이 갑자기 성령세례를 받고 나니까 그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다른 사람이 와서 “야, 너 왜 갑자기 예수를 믿는데? 너는 어떤 착한 일을 했기에 구원을 받는데?” “아니야, 아니야. 내가 착한 일 한 것 없어.”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 쪽에서는 사람이 뭘 해야 그가 한 그것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가 전에 유치원선생님을 했는데 그때 했던 동화와 동요가 몇 개 생각납니다.

동화책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애가 하는 말이 “기린 아저씨, 기린아저씨. 나무에 올라가면 안돼요.” 기린이 담장위로 목이 쑥 올라와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 애 생각에는 담장 위로 목이 쑥 솟아오를만큼 키가 되려면 뭔가를 밟고 올라설 때만 그만한 키가 유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린아저씨가 “나? 나무에 올라간 것 아닌데”라고 합니다.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왜 그리 키가 큽니까? 원래 큽니다. 기린은 원래 목이 길어요. 우리가 예수님의 새사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에 새사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린 아저씨가 나무에 올라가서 키가 커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원래부터 새사람 된것을 어쩌란 말입니까? 자꾸 원인을 따져서 ‘어떻게 해서, 뭘 믿어서 구원되었습니까? 어떤 착한 일을 해서 구원되었습니까?’라고 만 날 따지는 겁니다.

이게 환장할 일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백날 연구하고 가르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을 모르는데. 제가 아직까지 피 흘리는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새사람이라는 것은 우리 쪽에 원인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왜 하필 피냐, 그 이야기는 아직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양심이라든지 혹은 법을 지키는 이유는, 법 지키고 양심 지키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보상으로 천국에 넣어줄 줄 알고 법을 지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새사람 된 사람은 없습니다. 왜 사람이 행함으로, 율법 지켜서 구원 안 되는 이유는, 뭘 지킨다는 그 자체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그 인간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생긴 버릇입니다. ‘이것이 선일까, 악일까? 내가 이런 일을 하면 선한사람 되고 저런 짓을 하면 나쁜 사람 되겠지’라고 생각해서 이왕 선한 일 하는 것, ‘예수 믿기’라는 착한 일을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새사람하고는 관계없이 우리가 그냥 지어내 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나중에 나이 많이 들어서 치매 걸려서 예수 안 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까?

그러면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는 지옥 가는 겁니까? 갈라디아서 마지막 대목에 와서 왜 이것을 강조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어떤 구절을 공부하든지 ‘내가 저것 알아서 구원받아야지’라는 생각은 갈라디아서 자체가 거부합니다. 사도바울이 거부하고 주님이 거부합니다. 기린아저씨가 이미 큰데 뭐하려고 또 발을 딛고 올라섭니까?

기린아저씨가 발뒤꿈치 들었습니까? 그냥 가만 서 있었습니다. 새사람은 그냥 그대로 사는 거예요. 운전을 하든 운전을 안 하고 놀든 그냥 있는 거예요. 그냥 있어도 새사람 맞습니다. 주님의 피 뒤집어쓰고 그냥 있어도 이미 새사람입니다. 죽으면 천당 갑니다. 거지 나사로는 개가 와서 무시하고 핥았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기죽었습니까?

가난하든, 개가 핥든지 그것하고 새사람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천사가 와서 큰 사람 대우해서 천당에 데려갔습니다. 아브라함도 거기 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천국 간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거지여서 천국 데려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새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택함 받으면 그냥 천국 가는 겁니다.

이미 새사람의 영역에 속한 사람은 이것이 믿어집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기린입니다. 기린 되려고 목 빼지 마세요. 수술하지 마세요.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대머리만 구원한다고 하니까 멀쩡한 머리를 쥐어뜯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행함 아닙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여기 대머리 있습니다’하고 손들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새 사람 됩니다.’ 맞죠. 그냥 맞다고 믿어지는 겁니다. 내 피가 아니고 예수님 피입니다. 그냥 믿어지는 거예요. 믿었다는 내 행위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6:14을 봅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새 사람 안 된 사람은 이 뜻이 뭔지 모릅니다. 14절에 있는 ‘나’라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각자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각자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인 이상은 이 본문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이 안경집이 ‘내가 주인이다’라고 하면 주제파악을 못하는 겁니다. 안경집의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제가 이 안경집의 주인입니다. 내가 던지면 던지는 대로 이 안경집은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어디에 던졌습니까? 십자가 안으로 던졌습니다. 십자가안은 예수님의 죽음 안입니다.

지금부터 왜 피인가? 왜 예수님이 피를 흘려야 되는가?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우물을 그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멀쩡한 사울을 이 우물 속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우물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먼저 죽였던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서 생긴 우물이 바로 이 우물입니다.

이 이물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밀어서 예수님이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떠밀어서 우물 속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왜 죽였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선과 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가지고 있어서 ‘착하든지 악하든지 다 내가 하기 나름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 11:25,26)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쪽 사람들은 ‘내가 착하면 영생 얻고 내가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가, 내가’라는 그런 것은 다 생각하지 말고 ‘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고 나를 믿지 않는자는 저주를 받는다’라고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내 생각하다가 남 생각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잘났어. 나는 훌륭해.’ 그럼 저 사람은? ‘몰라 그것은 관심 없어. 나는 씩씩해. 나는 달리기도 잘해. 잠도 잘자. 축구도 잘해.’ 24시간동안 남 생각한적 있습니까? ‘나는 000을 찍어야지’라는 것은 000을 생각하는 겁니까? 자기 생각하는 겁니까?

앞에 ‘나’가 붙어 있지요. ‘오늘 저녁은 치킨을 먹을까, 피자를 먹을까?’ 누구 생각합니까? ‘나’지요. 24시간 자기에게서 떨어져 본적 있습니까? 그것은 정신병 환자 같으면 몰라도 어떤 인간도 ‘나’로부터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나’만 믿는다는 뜻입니다. 나의 결정, 나의 행동만 믿습니다.

나 안 믿고 다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떠밀어서 우물 속에 빠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너를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할수 없는 불가능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나를 믿으라.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라고 백날 이야기를 해봐야 우리는 ‘나’에서 못 벗어납니다. 곧 죽어도 나와 함께 더불어 죽고 싶습니다.

내가 제일 소중하고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이 날 데려가면 몰라도 내가 날 포기하고 믿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님 계신 곳에 자진해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보시기에 저쪽은 이미 죽은 자요, 우리 보기에 예수님은 이미 우리 손에 죽은 자가 됩니다. 예수님 보기에 예수님 우물밖에 있는 자는 죽은 자요, 이쪽에서 보기에 예수님은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울이라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야 된다고 했던 그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와서 사도바울을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자기가 핍박했던 예수님 우물에 풍덩 하고 빠졌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은 내게 대해서 죽은 자고 세상 사람들은 나를 예수와 똑같이 죽은 자로 본다는 겁니다.

세상은 자기 양심을 자랑하고 자기가 법을 지켰음을 자랑하지만 사도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자랑할것이 없으니’라고 합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입니다. “목사님, 내가 갈라디아서에서 뭘 배우면 됩니까?” “그 ‘나’라는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누가 뭘 배우고 말고가 아니라 크레인처럼(이런 놀이기구도 있지요? 500원 동전 넣고 인형도 꺼내기 하는 놀이기구) 나를 집어서 우물 속에 집어넣는데 이 우물의 흔적이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내 머리 위에 솥뚜껑에 십자가 피 묻은 것은 ‘이미 너는 예수와 더불어 생명 안에 있느니라’는 증거로서 예수의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나는 십자가와 함께 죽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에 그것이 영광이고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자기가 살았던 세상을 보니까, 저 인간들은 아직도 자기양심과 자기율법을 자랑하는, 선악과만 생각하고 원인과 결과만 생각하는 하나님께 저주받을 인간이고 사도바울 본인은 죽었던 나를 주님께서 살린 것을 알아서 ‘내가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이고 피입니다. 십자가란 ‘내가 옛날에는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이렇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인하여 피 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남들 보기에 죽었다는 그 장소가 유일하게 영생이 있는 곳, 영생의 샘물이 있는 곳입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 때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연극처럼 그것을 제가 약간 각색해서 연출해 보겠습니다.

“여인아! 물 좀 도.”
“당신은 경상도 사람인데 왜 서울사람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나한테 물을 주면 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지 롱.”

이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그 우물은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
두 번째, 내가 어떤 방법으로 물을 퍼 올립니까?

이 두 가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여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내게 물을 주면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지 롱” 하니까 “그래요? 어디쯤에 그 우물이 있으며 어떻게 길어 올릴 수 있느냐”고 물은 겁니다.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영생, 천국이라도 내가 뭔가 행함으로 따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고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천국이니, 하나님이니 뭣이든 내 양심껏 하면 그 천국이 내 것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이야기를 다 하고난 그 여자가 “난 예수님을 만났다!” 하고 소리치면서 물 길러 올 때 가지고 온 물동이를 다 버려뒀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아줌마, 아까 목마르지 않는 샘물에 대해서 주고받던데 그 샘물이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퍼 올리는지 그 방법을 알아냈습니까? 못 알아냈습니까?” 그러면 그 여인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그거요. 몰라도 됩니다.”
“왜요?”
“이미 마셨으니까.”
“아니, 그 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은 몰라요.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이 지리적 공간적인 세계 말고 다른 세계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도 내가 알 필요 없습니다. 그때는 내가 철딱서니 없어서 ‘어떻게 하면 퍼 올릴까’라고 했지만 이것은 내가 퍼낸다든지 내가 어떻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나를 가지고 영생하는 물속에 놓으니까 내가 가는 그곳에서 퐁퐁 물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곳에 생명의 물을 먹게 되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가지고 노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그곳이 바로 생명의 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메시야를 봤다’고 하는 것은 ‘이미 나는 생명수를 봤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그것을 퍼 담지 않아도 되고 내가 그 기적을 안 가져도 되고 예수님자체가 계속해서 내 속에서 생명의 물이 터져 나오도록 조치를 한 겁니다.

그것을 좀 엽기적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아줌마가 있습니다. 그 아줌마가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그 물을 길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그 아줌마에게 내시경 검사할 때 쓰는것 같은 호스를 집어넣습니다. 그 호스로 물을 막 집어넣으니까 아줌마 눈에서 물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예수님께서 내안에 있으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이 막 나오는 거예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자랑할 것은 뭐밖에 없다?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생명밖에 없다고 막 나오는 겁니다. 물을 퍼 담고 어디 가서 물을 긷고 그런 것이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날 가지면 되는 겁니다.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이름이 나사로입니다. 나사로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나사로가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와라.” 그러니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나사로는 죽었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 때 네 명이 올라갔습니다. 올라가 보니까 거기에 엘리야도 있고 모세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초청했습니까? 이미 예수님 계신 곳에 엘리야도 있고 모세도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이미 낙원에 있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자에게는 이미 죽어도 산 것이고 살아도 살았습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입니다. 따로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든 운전을 하든 그게 주님 안에서 살고 영생하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6:15입니다. 행하기는 뭘 행합니까?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나 버렸는데 행하기는 뭘 행하고 율법을 지키기를 뭘 지킨다는 말입니까?

어제 일본팀하고 야구경기 한 것 어떻게 되었습니까? 6:3인가로 한국 팀이 이겼는데 진 일본팀이 씩씩거리면서 “한 번 더 붙자. 한 번 더 붙자. 계속 12회 13회 더 하자” 하면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야구는 9회까지 해서 승부가 갈리면 그것을 끝나는 겁니다. 무승부 아닙니다. 끝났습니다.

지금 율법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았고 솥뚜껑이 날라 왔으면 그것으로 끝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새삼스럽게 십일조해라, 안식일 지켜라, 율법을 들이댈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아셔야 갈라디아서를 아는 겁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사전에 자신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던져준 대로 가보니까 거기 십자가 있고 그게 우물속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 있는 사람의 특징이 ‘나는 자랑할 것이 하나 밖에 없는데 나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1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갈라디아서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서 2:17,1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뭘 헐었습니까? 양심이고 법이고 그것을 다 헐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지요? 예수님이 죄 많은 분 같으면 부활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렸다는 그 말은 다른 길로서는 영생 얻을 길이 없고, 예수님 십자가 아니고서는 어떤 인간도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를 부활을 통해서 보여 줬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 왜 죽었습니까?”
“너의 죄 때문에 죽었잖아.”
“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네가 만 날 율법, 내가 어떻게 하면 착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벌받게 된다. 나는 나쁜 짓해서 벌 받았고 착한 일 해서 복받고, 만 날 생각하는 것이 선악, 선악, 선악만(에덴에서 쫒겨난 습성) 생각하잖아.”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십자가로 모든 것을 끝내버렸습니다. 골로새서 2:15에 있습니다.

골로새서 2:14,15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승리하신 겁니다. 모든 저주는 그분이 대신 다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올 저주가 없습니다. 무슨 짓을 해도 저주를 못 받습니다. 왜? 저주를 가져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저녁때 음식쓰레기를 비롯해서 모든 쓰레기를 집안에 다 널부러져 있는데 아침에 보니 깨끗합니다. 누가 문 열고 들어와서 쓰레기를 다 가져갔습니다.

구경할 쓰레기가 없습니다. 다 가져가서.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그분께서 사랑의 그물로 계속해서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다 가져가 버렸습니다. 안산에서 강의한 부분 잠간 다시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19입니다.

고린도후서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으니라.”

여기 보면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 다음 5:21입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 누가 합니까? 우리 양심껏 법을 지켜서 하는 겁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는 그 우물 속으로 풍덩 하고 놓아주니까 거기에 디뎌 보니까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묻어있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염색합니다. 빨간 물감에 우리를 풍덩 집어넣어서 “아이고, 이놈 빨갛게 잘 되었다”고 하시고 파란 물감에 집어넣어서 “아이고, 이놈 파랗게 물 잘 들었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가지고 노십니다.

이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옛날의 선악적 그물이 아니라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는 무조건적인 그 용서가 염색이 되어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를 다시 끄집어냈습니다.

갈라디아서 6:15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여기 보면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법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지켰다고 하면서 ‘축복 달라’고 자꾸 이야기하고 그것 못 지켰다고 ‘저주 받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분에 의해서 이미 저주는 없고 있는 것은 오직 계속 용서하시고 천국 가는 길 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게 솥뚜껑입니다. 개미가 솥뚜껑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여러분에게 덮씌워진 사랑이 여러분이 평생 동안 일구어 낸 여러분의 수고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이 생산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습니다. 한나가 기도해서 애기를 낳았습니다. 그 애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한나가 사무엘을 바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얻어낸 내 새끼다. 이것은 내가 공부해서 얻어낸 5등이다. 내가 애쓰고 수고하고 운동해서 나는 이만큼 건강하다.'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100평짜리 집에서 살고 싶습니까? 살아보면 얼마 못가서 별로 안 좋습니다. 100평짜리에 사나 30평짜리에 사나 다 헛되고 헛되니 인생이 헛됩니다. 애기 낳은 뒤에 예쁘니까 또 하나 낳고 싶어서 또 하나 낳아 보면 그 기쁨이 몇 년 안갑니다. 금방 또 낳고 싶어지는데 살림살이가 안 되니 낳지를 못합니다.

사람의 만족은 끝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결핍과 허무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콘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콘이고 그 위에 예수님의 아이스크림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옛날 습관, 내 노동에 의해서 결과를 얻어 낸다는 그 습관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상의 아이스크림, 이렇게 점선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이런 것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없는데 나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되었다 치면 여기 뭔가 또 있어요. 또 상상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이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국민소득이 1000불만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000불이 되니까 또 허무하거든요. ‘하나님, 5000불이 되게 하옵소서’ 합니다. 그게 되니까 ‘2만불’, 그게 되니까 지금은 ‘동해 바다에 석유가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석유 나오면 그게 천국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하심이 영 맘에 차지 않고 감사하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감사할 맘은 없고 석유 나오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나의 기도덕분에 대한민국에 석유 나온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자기중심, 내 중심,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절대신, 내가 신이다, 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이런 생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어떤 법을 지키면 됩니까? 양심껏 살면 축복해 줍니까?’라는 소리가 자꾸 나오는 겁니다.

할머니들이 새벽기도 하면서 무슨 기도합니까? ‘하나님, 저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새벽기도 하는 노인들 저는 못 봤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새벽기도 3초, 5초만에 끝납니다. 그렇게 안하고 뭐합니까? ‘손자가 영국에 유학 갔는데 안 아프게 공부 잘하게 해주시고, 어디를 가든지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어 놀게 해주시고, 이번에 아들이 부장으로 승진했고 이제는 다음에 전무인데 속히 전무되게 해주시고 우리 교회 교인 200명인데 내년에는 300명 되게 해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하는 사람이 일용할 양식이 감사하겠습니까? 주기도문에 있는 대로 기도도 할수 없습니다. ‘주여 내 죄를 사해 주시고.’ 죄지은 것이 없는데, 옛날에 다 용서받았는데 그런 기도 왜 합니까? 예수님의 거저주시는 용서에 감사하지 못하고, 이런 콘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사도바울처럼 ‘나는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이런 사람 못되고, 자꾸만 나는 위대한 사람, 진급하고 승진하고 부자 되고 재벌 되는 ‘나’가 되기를 간곡히 기도하는 이런 죄, 이 결핍성, 이 불만족, 여러분은 이 죄 다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한다’(롬 8:26)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빌 바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 콘이 눈에 들어오도록, 떠오르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밝히 보여줘서 ‘공상(궁상)떨지 말고 너 같은 죄인도 이렇게 용서받은 것을 감사해서 사도바울처럼 나는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그런 고백이 내가 고백해야 할 유일한 고백이다’라고 깨닫게 합니다.

자꾸 가짜 ‘나’를 만드시면 안 됩니다. 가짜 나를 만들면 허무를 느끼고 허무를 느끼면 우울증 걸립니다. 우울증 책 읽어 봤습니다. 그 증세가 첫째 잠이 안온다. 둘째 체중이 빠진다. 우울증이 왜 오는 겁니까? 프로이트에 의하면 ‘남에 대한 분노를 자기에게 퍼붓기 때문에 우울증이 온다’고 했습니다.

‘왜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석유가 나오는데 왜 우리나라에는 석유가 나오지 않는가? 사우디를 폭파해서 우리 것으로 만들까? 저 못난 인간이 나보다 먼저 승진했는데 저걸 죽여? 공부도 못하는 게 선생님한테 사랑을 받는데 저걸 내가 혼내줄까?’ 나의 미흡한 것에 대한 분노를 남에게 퍼부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 대신 나한테 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때리는 겁니다. ‘이렇게 나를 때려도 하나님이 기도를 안 들어 줍니까?’ 교회 다니면서 우울증 걸리니 꼴이 참 좋습니다. 무슨 그런 것이 다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주께서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가난해도 허무하고 부자 되어도 허무합니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어릴 때는 한창이지만 나이 들어 90될 때가 있습니다.

노인이 되면 다 흙이 되어 산산이 부서집니다. 부서질 인간 처 발라봐야 별 의미 없습니다. 별 의미 없습니다. 바른다고 허무한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쉽지만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갈라디아서 6:16-18입니다.

갈라디아서 6:16-18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아멘.”

기쁨으로, 정말 고마워서 ‘나같은 인간을 구원해주시니 정말 아멘, 아멘입니다’하고 진짜 하나님의 은혜에 아멘, 하시는 새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정말 오해했습니다. 십자가로 새사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영 성에 안차고 만족치 못해서 남들 가진 욕망을 따라 잡는다고 헛되고 헛된 세월 다 보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죄 많은 인간입니다. 이 죄 위에 주의 피를 얹으사, 그 피로 다 씻어주심을, 씻을수 없는 죄가 없음을 또다시 감격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피의 능력을, 용서를 찬양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